7화
민국이 맘에 든 장모님은 손뼉까지 치며 조아라 했다. 장인어른 역시 ‘흠흠’하면서 헛기침을 하더니 민국의 멋진 대사에 조금 감명 받은 모습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은별 역시 민국의 그런 대사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흠흠… 그, 그럼… 우리 은별이랑 어디까지 갔나?”
“…아빠!”
은별은 부끄러움에 소리쳤으나 이를 민국이 제지했다. 민국은 씩 웃으면서 장인장모가 보는 앞에서 은별이의 볼을 꼬집었다. 그리고는 눈웃음 짓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빠만 믿어. 우리 꼬맹이.”
‘마요네즈랑 치즈랑 합성한 새끼….’
닭살 돋는 멘트로 은별을 달랜 민국은 고개를 돌려 대담한 얼굴로 장인장모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실은.”
“…….”
‘임신 4개월입니다.’라는 멘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으나, 민국은 그런 개드립을 쳤다간 장인장모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 생각을 달리했다.
“아직 뽀뽀도 못해봤습니다.”
“그래, 그렇군.”
장인어른은 한숨을 쉬면서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엽신 힘을 내서 키운 아이라고, 딸이 다른 남자와 입맞춤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장인어른의 속내를 완전히 꿰뚫은 민국은 짐짓 눈웃음 지으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걱정 마세요 장인어른. 저는 은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은별이가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입니다.”
“…그래야지.”
장인어른은 그제야 민국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 역시 민국의 마성에 빠지고만 것이었다. 허나 은별은 이런 예기치 못한 전개에 마냥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가 배웅해주도록 하지.”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장인어른은 그런 그를 철문까지 배웅해주었다. 민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장인어른에게 곱게 예절을 표했고, 마당에 장모님과 함께 서 있던 은별을 보면서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은별아,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
“…….”
은별은 그런 민국에게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빨리 꺼지라는 표시였다.) 어찌 됐든 혼은 나지 않고 끝이 났지만, 민국이 돌아가는 즉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어 은별은 두려웠다.
“은별이가 내 여자 친구라니!”
다시금 현재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민국은 킥킥 웃었다. 은별이의 부모님을 속였다는 사실이 심히 죄송스러웠지만, 만일 은별이가 도중에 그 계획을 제지했었더라면 민국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은별이의 부모님에게 그런 대접을 받게 된 이상 앞으로 민국이 은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민국은 그럴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침대에서 곧장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학교 가야지.”
민국은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는 간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나왔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자취방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민국아.”
“…예나?”
현관을 두드리는 형체가 보였다. 긴 머리에 하얀 피부의 그녀는 예나가 분명했다.
민국은 천천히 현관문으로 다가가 잠겨 있는 현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암울한 표정으로 문을 두드리던 예나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윽고 민국의 훤칠하게 서 있는 모습을 두 눈에 담게 된 예나가 크게 눈을 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민국은 놀란 표정의 예나를 향해 미안함이 담긴 쓴 미소를 지었다. 예나가 놀란 표정으로 질문했다.
“안 아파…? 안 누워 있어도 돼…?”
“그래.”
“하지만… 어젠 그렇게 아팠잖아….”
예나는 그동안 민국을 혼자서 돌보면서 온갖 심적 고생을 다 했었다. 민국 역시 자신이 아플 때 옆에 있어주었던 건 예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
“…….”
잠시 글썽한 눈동자로 민국을 바라보던 예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어떻게 나은 거야…? 분명히 큰 병이었는데….”
“음, 신의 가호로? 하나님이 갑자기 나 같은 녀석이 죽으려고 하니깐 ‘이건 지구 사상 최악의 위기다!’ 라고 생각하고 살려줬나 봐.”
“치… 거짓말은….”
그리고 예나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훔쳤다.
“다행이다….”
“…….”
“정말 다행이야….”
어떻게 그 병이 나았는지는 굳이 묻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민국이 고통 때문에 괴로워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는지 예나는 계속해서 조금씩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표정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곧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었다.
일주일 만에 수업을 받으러 대학교에 온 민국은, 학과 학생들의 얼떨떨한 표정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분명히 큰 병에 걸려 끙끙 앓던 민국이었건만, 한 주 사이에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으니 그들 딴에선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야… 너 몸 괜찮냐? 전에 그렇게 아파하더만.”
“이제 괜찮아.”
“걱정되어서 오늘 집에 찾아가보려고 했는데, 나아서 다행이네.”
“고마워.”
민국은 자신이 낫자마자 은근슬쩍 다가와서 친한 척 구는 녀석들을 향해 눈웃음 짓고 대해주었다. 거짓말 치지 말라며, 걱정조차 안 한 주제에 라고 따져봤자 민국에겐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결코 좋을 게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대학 생활 때 한 번보고 말 학생들이었기 때문에, 민국은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간만에 보람찬 학교생활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민국이었다.
“후우.”
일주일 결석한 것은 교수님에게 문의해봤지만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국 이제부터 결석하지 않고 부단하게 공부해서 높은 학점을 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할 일이 있지.”
공부 이전에 할 일이 있었다. 이젠 반 직업이나 마찬가지인 그 일을 민국은 간만에 할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머리에 해드셋을 착용하고, 정면에 기다란 마이크를 세워둔 채 책상 위의 본체 전원을 클릭했다.
그러자 컴퓨터가 작동하면서 머지않아 바탕화면이 등장했고 민국은 홈페이지를 켜 간만에 파뿌리 TV 사이트에 접속하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의 현대왕 클럽에 들어가 보았는데, 클럽 게시판에 왜 요즘 방송을 안 하냐는 문의가 잦게 작성돼 있었다. 현대왕은 그 문의가 무려 50페이지 이상을 채운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가 곧 미소 지으면서 클럽 상단의 방송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방송을 하기 위해 갖갖이 준비를 다 갖춘 다음에, 생방송을 대비하여 오프닝 음악을 틀었다. 현대왕이 항상 방송을 할 때마다 오프닝으로 틀어 보이는 음악은 슈퍼키드의 어쩌라고 라는 노래였다.
“어쩌라고 씨발 좆도~ 어쩌라고 씨발 좆도~.”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대며 잠시 준비 시간을 갖던 민국은 마침내 10분이 경과하고 사람들이 금세 자신의 방에 가득차자 노래를 끄면서 진행을 준비했다.
흠흠 하고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던 현대왕은 마이크를 대고 ‘아아’ 가볍게 소리 내 보았다. 그리고 방송을 듣는 시청자들에게 무사히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점검을 마치고 이렇게 첫 인사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비제이 현대왕입니다.”
* *
“아, 일주일 동안 못 본 사이에 다들 많이 늙으신 것 같습니다. 응? 제 목소리는 많이 젊어 진 것 같다고요? 당연하지요. 저는 여러분들의 신선한 정기를 빨아먹고 사니까요.”
방송에 틀어진 발라드 노래 속에서 현대왕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간만에 현대왕의 방송을 보게 된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지금까지 왜 방송을 하지 않았느냐며 그를 핀잔하고 있었다. 현대왕은 어깨를 으쓱하고 그에 대해 답변했다.
“실은 제가 몸이 좀 많이 아팠습니다. 이게 나이를 먹다 보니까 뼈도 시리고 추위도 많이 타게 되더군요. 그래서 어떤 귀여운 여자애한테 일주일간 병 간호 받으면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레 나아지더군요. 역시 인간의 치유력이란… 훗.”
[무슨 여자애?]
[츤고딩님인가? 아니면 강강님?]
[혹시 애플파이님 아냐?]
현대왕의 답변에 방송을 보고 있는 많은 시청자들이 벌써부터 온갖 추측을 해대기 시작했다. 현대왕은 그 추측이 단단히 틀렸음을 알리고자 말을 이었다.
“일단 츤고딩은 제가 아프다고 연락했으면 츤츤대면서도 와서 간호해줬을 겁니다. 하지만 걔는 아니에요. 걔한텐 제가 아팠던 거 어제 말했거든요. 그리고 강강님은 저랑 별로 치하지 않습니다. 아실 분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간호해줬으면 전 병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어색해서 죽었을 거예요. 애플파이…는 님들 뒤질래요? 어따 대고 그 녀석을 감히 입에 올립니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엔돌핀이 솟구쳐서 경기가 날 지경이군요.”
[ㅋㅋㅋㅋㅋ.]
“자, 오랜만에 방송을 하는 만큼… 어, 처음엔 뭐부터 하더라? 아, 고민 상담. 그치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겠는데, 저는 방송할 때마다 고민 쪽지를 보내주신 분들의 고민을 한 개씩 상담해주곤 합니다. 오늘은 뭐시냐… 그러니까 일주일 만에 보게 된 고민 쪽지군요. 이 고민 작성하신 시청자 분이 지금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읊어드리겠습니다.
”
현대왕은 곧장 자신의 프로필 아래에 있는 쪽지함을 클릭했다. 그러자 일주일 동안 전송받은 수북한 쪽지들이 육안에 드리웠다. 현대왕은 맨 뒤페이지를 클릭해서 첫 번째 쪽지를 열어 보았다. 그리고는 과장스럽게 헛기침을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고민 쪽지의 내용을 얘기했다.
“안녕하세요, 현대왕님. 저는 이제 막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남학생입니다. ……올~ 초글링이시군요.”
초글링 : 초등학생과 스타크래프트 유닛인 저글링의 합성어다.
“저에겐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아이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음… 있었습니다라, 과거사군요? 하지만 그 아이는 저를 바라보지 않았고 저는 벌써 그 아이를 3년째 좋아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현대왕이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시여? 이거 왜 이렇게 말이 왔다갔다해? 있었습니다 라고 과거를 얘기하듯 하더니 갑자기 좋아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면 지금도 좋아한다는 거잖아? 역시 초딩이라서 언어력이 후달리는 건가… 아, 시청 중이신 초딩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초딩 비하 발언은 절대 아닙니다. …그나저나 3년이라. 꼬꼬마 순정파군요.”
현대왕은 쪽지의 내용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언제부터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냐면, 예전에 그 아이가 학교에서 놀림 받는 불쌍한 장애인을 도와주는 것을 보고서입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애와 친해지고 싶어서 어떻게든 대시를 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근처 친구에게 제 심정을 알리고 도와달라 부탁했습니다.
그 친구 녀석은 절 힘내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친구 녀석과 단 둘이 노래방에 갔을 때입니다. 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 호기심 삼아 저는 녀석의 지갑을 뒤져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그 녀석의 지갑에 제가 좋아하는 아이의 사진이 있던 것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그 지갑을 보여주면서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줄기차게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녀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든 진실을 털어놓더군요. 실은 그 녀석이 2년 전부터 제가 좋아하던 아이와 사귀고 있던 것입니다!”
[킁킁. 무슨 냄새 나지 않아?]
[자작나무 타는 냄새인 듯.]
[]속에 담긴 말은 채팅방 시청자들의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