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한 시간 동안 가슴을 만져야 하루 동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병이라는데, 만일 만지지 않으면 호흡곤란은 물론이며 정신착란도 고사하고 어느 순간 심장마비까지 와서 죽는 병이래. 의사에게 제대로 진찰 받아서 확인한 거야. 농담이 아니고.”
애초에 그런 병은 실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겪었던 경험은 확실하니 민국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자 은별은 픽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정말이라니까.”
“차라리 아까 전처럼 여자가 고파서 가슴 만져보고 싶다고 말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겠다!”
끼이익. 은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옷자락을 붙잡은 다음에 ‘정말이라니까!’라고 다시 한 번 외쳤다. 하지만 은별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식당에서 나가려고 하였다. 근데 그 순간이었다.
‘컥!’
갑작스런 통증에 민국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쿠당탕! 소란스러운 소음과 함께 쓰러진 민국을 향해 식당 내부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으로 민국을 쳐다보았다.
은별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민국을 쳐다보았는데,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은별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으으….”
아무래도 슬슬 통증 증세가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가슴을 잡고 심하게 통증을 앓다가 천천히 한 손을 뻗으면서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응? 하고 그녀가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애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가슴….”
“…….”
“슴…가….”
“…….”
“가스음!”
‘이게, 마지막까지 장난을 쳐?’
민국이 아픈 척 연기를 하면서까지 가슴을 만지려고 한다고 착각한 은별은 다시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매정하게 뒤로 돌아서버렸다. 민국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뒷모습의 은별을 주시하면서 절규하듯 소리쳤다.
“가스으으으으으음!”
* *
민국은 꿈을 꿨다. 가슴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으로 보게 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한 감정을 느끼면서 민국은 꿈에 감정이입했다.
‘가스으으으음!’
민국은 처절했다. 꿈속의 그는 빨주노초파남보의 색깔로 어우러진 하늘을 날아다니며, 뻗으면 곧장이라도 닿을 듯한 여자의 두 가슴을 만지려고 했다.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성욕을 톡톡히 샘솟게 하는 큼지막한 가슴!
‘신화(神話)를 창조(創造)하고 전설(傳說)에 도달(到達)하리.’
오로지 그 마음가짐으로 민국은 일생 최대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민국은 꿈을 이루었다. 두 손바닥으로 있는 힘껏 여자의 큼지막한 가슴을 만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선지 민국은 그토록 바랐던 편안한 안식을 느낄 수가 없었다. 민국은 손을 대고 있던 가슴을 꼼지락 만져보았다.
‘없어. 없다고.’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민국은 생각이 아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의사 선생… 이게 대체 무슨 소리요….”
“…….”
“절벽이라니… 절벽이라니이이!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이오!”
퍽!
“자꾸 장난치면 진짜 죽게 내버려둔다?”
“…그래.”
꿈에서 깨어난 민국은 은별의 가슴에 대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을 샅샅이 훑어보는데, 현재 이곳은 은별이 사는 저택의 근처에 있는 모텔. 차마 쓰러져 있는 그를 집까지 데려갈 수가 없었던 은별은 모텔 주인의 부끄러운 시선을 꾹 참고 모텔 방안으로 민국을 데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점차 죽어가는 민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짝을 내준 것이다.
‘하지만 절벽이라니.’
의식을 차렸을 때 민국이 떠올린 감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민국은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운 채로, 유유히 시선을 옮겨 벽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민국이 고개를 돌려 은별의 얼굴을 보았다.
“부모님에게 한 시간 안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어?”
“아, 몰라. 너 때문에 완전 망했어. 지금 엄마한테 연락오고 난리야.”
보아 하니 민국의 머리맡 쪽에 있는 그녀의 휴대폰이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민국은 그것을 뒤로한 채 은별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 동안 이러고 있었던 건가?”
“…어.”
한 시간 동안 대고 있었다면 하루 동안은 살 수 있는 시간이 연장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민국은 생명의 은인인 은별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재 장소 상 야릇한 느낌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현재 민국은 은별과 모텔 방에서 단둘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침대에 앉아있는 은별의 허벅지에 민국이 누운 채로. 그동안 서로 티격태격 다퉈왔던 두 사람은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인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후 투덜대듯이 은별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뭐 그딴 병이 다 있대? 한 시간 동안 가슴을 만져야 삶이 연장되는 병이라니.”
“이게 바로 초특급 희귀병이라는 거지. 나니까 이런 병에 걸리는 거랄까.”
“하이고, 인기남이셨어요? ……인기남 다 죽게 생겼네.”
“어쨌든 간에 너 때문에 살았으니까, 그건 고마워해야겠지.”
민국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얘기했다. 민국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은별은 ‘뭐, 뭐야?’하면서 말을 더듬더니 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은별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그나저나 일단 이 상황부터 어떻게 해보아야 할 듯싶었다.
민국은 슬쩍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놓았다. 은별이 ‘읏’하고 민국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제 됐어.”
“…….”
민국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정말이지 아까 전 아팠던 게 꿈이라는 듯이 민국의 현재 몸은 가벼웠다.
“어쩌다 그런 병에 걸린 건데.”
“내가 너무 잘나다 보니.”
“…아 또 네가 인기 있어서 걸린 거라고요?”
민국은 답하지 않았고 잠시 자신의 가뿐해진 몸을 훑어보다가 은별에게 말했다.
“아무튼 오늘 고마웠고, 내일도 좀 부탁한다.”
“…지금 나보고 또 그 짓을 하라고? 너 상식적으로 여자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자에게 계속 가슴을 내줄 것 같아?”
“헐!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음?”
“…병신!”
“아 그냥 앞으로 몇 주 동안 밥 사줄 테니까 좀 해줘라.”
“진심으로 미치셨어요? 오늘 하루면 됐지 뭐 내일까지 바라는 거야?”
“야 그럼 넌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냥 보기만 할 거냐? 너 그렇게 매정한 여자였어? 우와… 난 널 그렇게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날 향한 너의 사랑이 정말 변하기라도 한 거니? 사랑은 돌아오는 거라고 네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어?”
“…지랄 삼단차기 하시네요. 안 되는 건 안 돼.”
“왜?”
“내 집안 사정 알 거 아니야. 만날 밤에 나갔다간 엄마한테 죽는다고.”
“그럼 그거 내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내일도 좀 해줘. 해줄 거지?”
“뭐 어떻게 할 건데?”
“됐고. 해결하면 해줄 거지? 너도 더 이상 어머니 눈치 받으면서 밖에 나갈 필요도 없어지고 좋은 거잖아? 그거 해결해줄 테니까 내일도 좀 해줘라.”
“…….”
“어?”
“해결하는 거 보고.”
“그래. 오빠만 믿어봐라.”
민국은 완전히 해결해주겠다고 은별에게 고하고 있었고 은별은 뭔가 수상쩍은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닌 가 눈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우뚱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모텔에서 나와 길을 거닐 때였다.
“그나저나 근처 놀이터로 가서 가슴 대주면 되지 왜 하필 모텔에 갔어? 그리고 너 돈 없는 거 아니었나?”
“말이 그렇지 아예 안 가져 올 것 같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건데. 그리고 모텔이야 당연히 근처에 놀이터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얼마나 무거운데 내가 거기까지 어떻게 가.”
“에헤이, 내가 보기엔 다른 구석이 있던 것 같은데. 너 설마… 흠… 아니지.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
“미친. 디파일러가 프로브 컨슘하는 소리 하네요.”
그렇게 두 사람은 은별의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때 마침 은별의 저택 앞에는 은별의 어머니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은별이 창백해진 안색으로 민국의 뒤에 숨으면서 소리쳤다.
“저 봐! 역시 단단히 화났잖아!”
“어허, 됐고. 오빠 한 번 믿어보라니까.”
그리고 민국이 대뜸 은별의 손을 잡았다. 은별은 갑작스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민국을 올려다보는데, 민국이 한층 점잖아진 얼굴로 저벅저벅 은별과 함께 은별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은별이 어머니는 막 근처로 다가오는 은별을 발견하고 두 눈에 잔뜩 노기를 띠었다. 이윽고 은별 어머니의 눈이 그녀의 옆에 있는 민국에게로 향했다.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쪽은 누구시죠?”
은별은 어쩔 줄 몰라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천하의 은별조차 아연실색할 정도로 은별의 어머니는 장난 아니게 무서웠다.
만일 그녀의 어머니가 파뿌리 TV에서 은별이 비제이 노릇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즉에라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쓸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보수적인 어머니였다.
이윽고 은별이 옆에 있는 민국을 노심초사한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민국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모님.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은별이 남자친구입니다.”
은별은 이 새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문했다.
* *
“이 캐새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침 일찍부터 울려온 휴대폰을 받았을 때 민국은 귀청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는 아침부터 욕 한 바가지를 날려대는 이 여편네가 대체 누구일까 잠시간 추측했다. 이런 샤우팅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 우리 은별이 아냐?”
“지랄하지 마! 내가 너 때문에 어제 엄마에게 무슨 소리 들었는줄 알아!”
“왜? 나 덕분에 이제 밤늦게까지 외출해도 상관없잖아? 혹시… 오빠의 힘에 감명 받아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연락한 거니? 하하, 괜찮단다.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는 너의 일탈 같은 마음, 나는 다 이해해.”
“미친! 엄마가 너 사위로 삼겠다고 했어!”
“하하, 역시 장모님도 사위를 잘 알아보시네.”
“거지새끼!”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자 뚝하고 통화를 끊어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흐아암’하고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제 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밤늦게 은별을 데리고 그녀의 어머니를 뵙게 된 민국은, 대뜸 자신을 은별의 남자친구라 소개해 그녀의 어머니를 당황시켰다. 심지어 장모님이라고 호칭까지 하였으니, 은별 어머님은 난데없이 자신이 할머니가 된 듯한 신선한 느낌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은별 어머니, 아니 장모님은 처음엔 심하게 혼란스러워하며 민국을 경계했다.
그러나 민국의 겉모습이 어떻던가. 그는 대학교에서 모르는 여학생들이 없을 정도로 똑 부러졌으며 잘 생기고 키 큰 남자에 속했다.
별의별 개+색+애드립으로 인기를 모으는 비제이란 단점(?)하나만 제외한다면, 민국은 여자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한 스팩이었던 것이다. 은별의 어머니는 그런 민국의 모습에 서서히 호감을 갖게 되었고, 은별에게 내려던 화도 자연스레 식히게 되었다.
이윽고 장모님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간 민국은 장인어른에게도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은별의 아버지는 초면인 남자가 대뜸 자신을 장인어른이라 호명하자 매우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곧 그가 은별의 남자친구라는 소식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의자에 앉아 장인장모와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되었고, 내내 옆에 있던 은별은 카오스 상태에 들어서 석상이 되어버렸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은별이가 이런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니.”
“저야말로 장모님이 이토록 남들과 다른 고사한 품격을 가지고 있단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어머, 무슨 그런 소리를.”
나이가 많든 적든 잘 생긴 남자 앞에선 뻑이 가는 게 여자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많든 적든 예쁜 여자 앞에선 뻑이 가는 게 남자였다. 그 법칙에 의거하여 장모님은 어느 틈엔가 활짝 미소를 펼치고 민국을 반겼다. 허나 옆에 있던 장인어른은 장모님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민국에게 질문했다.
“자네, 우리 은별이 어디가 좋아서 사귀는 건가?”
“은별이는 마음이 착하고 여린 여자입니다. 외모 또한 예쁘지요. 하지만 제가 진정으로 은별이를 좋아하는 것은, 이 여자가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머, 멋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