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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5화 (5/369)

5화

“…….”

강은별. 그러니까 비제이 남고딩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치게 된 것은 불과 5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때 한창 애드립으로 방송하는 태반의 비제이들이 합동 방송을 기본으로 해왔었는데, 그것을 목도하고 민국도 역시 합동 방송을 해야겠단 생각이 든 것이었다. 다만 비제이 현대왕은 무조건 비제이 한 명을 골라 같이 하자고 부탁하기도 뭐해서, 싹수없는 현대왕의 컨셉을 이용해 이유 불문으로 남고딩의 방송에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보다 못한 남고딩이 현대왕의 시비에 맞대응을 하였고, 자연스레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으르렁거리게 되었다. 이내 마주하게 되면 바로 치고 박고 싸우게 된 두 사람은 ‘부부 싸움 잦은 비제이 커플’ 컨셉을 시청자들에게 심어주게 되었다.

두 사람의 팬들은 만날 때마다 싸우는 두 비제이의 모습이 보기 즐거워 두 사람의 합동 방송을 몇 번이고 강하게 요구했고, 그러다 보니 비제이 현대왕과 비제이 남고딩은 몇 차례 합동 방송을 하면서 진심으로 친해지게 되었다.

요컨대 싸우다 보니 정이 들어, 함께 방송하는 상대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어느 틈엔가 서로 간에 약속을 하고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이라 보면 되었다. 물론 처음에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현대왕과 남고딩은 서로를 믿지 못했다.

‘네가 그 현대왕?’

‘네가 그 츤고딩?’

‘…츤고딩이라고 부르지 마!’

두 사람은 실제로도 티격태격하면서 싸우는 친구가 되었고, 방송계에서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되고 말았다. 민국은 집으로 들어가 지금쯤 부모님과 옥신각신하고 있을 강은별을 떠올리면서 생각했다.

‘저렇게 예쁘장한 미모의 애가 그 남고딩이라니. 여전히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그건 사돈 남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 생기고, 매사에 사람들을 잘 대해 친절한 이미지를 심고 있는 그런 민국을 보고 어느 누가 비제이 현대왕이라 생각하겠는가? 실제로 똘망똘망한 눈에 예쁘장한 미모의 강은별과 마찬가지로 별 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잡념에 잠겨 있을 때 이윽고 강은별이 현관문을 열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까 전과는 다르게 두꺼운 잠바를 입고 마당을 거닐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고 있자니 가분수가 걸어오는 것 같아 민국은 저도 모르게 비웃을 뻔했다.

“너 방금 비웃으려고 했지?”

“…아닌데?”

“하여튼 빨리 가자. 어디로 갈 건데 그래?”

“일단 천장이 있고….”

“변태 새끼. 네가 아주 작정을 했구나? 아무리 방송에서 온갖 변태 짓을 다 해도 컨셉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건 진….”

“무슨 소리야? 너야 말로 왜 이상한 상상을 하고 그래? 난 식당 말한 건데.”

“…뭐?”

“식당. 식당에 천장 없냐?”

“…….”

너무 앞서 생각한 강은별이었다. 이윽고 강은별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홱 시선을 피하면서 삐죽 내민 입술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어디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자고. 이유를 들어보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 그래. 돈은 가져왔지?”

“아니? 내가 왜 가져와? 나 지금 빈손인데?”

“하? 야, 빨리 가서 돈 가져와.”

“내가 왜? 아쉬운 건 너지, 내가 아니잖아? 더치페이 개소리 즐.”

“…이 여편네가.”

확실히 은별의 말대로, 그녀는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아쉬울 뿐만 아니라 목숨 또한 달아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민국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가자.’하고 앞장서서 거닐기 시작했다. 은별은 민국의 긴 보폭을 따라잡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옆을 따라갔다.

* *

야심찬 밤에 민국이 그녀를 데리고 향한 식당은 김밥 천국이었다.

“야심한 밤에 여자 데리고 가는 식당이 고작 김밥 천국? 진짜 센스 없네. 이러니까 여태까지 만년솔로를 하고 있지.”

“여자? 여자는 어디 똥구멍에 먹어버렸더냐? 그리고 난 사귈 수 있는데 고유 철학의 이유로 솔로를 유지하는 거야.”

“지랄하네! 네 그 철학이 뭔데?”

“알면 너도 나한테 반해서 눈을 못 뜨게 걸?”

“그러니까 뭔데.”

“난 스물다섯 살에 부자가 돼서 빌게이츠랑 손잡고 짝짝쿵 거리다가 어느 슴가한 서양 여자 만나서 사귀고 결혼할 거다. 이게 바로 내 고유 철학이지.”

“지랄…. 전혀 설득력 없는 조리퐁 같은 철학이시네요. 그거 아시나? 조리퐁은 겉은 그럴 듯 해도 속은 비어 있는 거?”

“너 그거 조리퐁 비하 발언인 거 아냐. 조리퐁 회사에 연락하면 조리퐁 명예훼손으로 인권단체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걸.”

“모르는데? 이 여자 가슴만 아는 조리퐁아. 넌 백퍼 빌게이츠 만나기는커녕 서양 여자도 못 사겨!”

“레알? 내기할까?”

“해보던지. 네가 서양 여자에 로망 품을 시간에 난 이미 부자 남자 낚아채서 잘 먹고 잘 살 거다? 진짜 양심 걸고.”

“너 같은 빨래판을 어느 부자가 좋다고 낚아채겠냐.”

“어이없네! 너 지금 빨래판이라고 했지? 아직 네가 네 처지를 제대로 이해 못한 모양인데 나 빈정 상하면 그 빨래판조차 못 만질 수 있어. 알아?”

“…쩝.”

졸지에 은별에게 약점을 잡힌 민국이었다. 비록 은별은 민국이 무슨 연유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민국의 행동을 볼 때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음은 분명했다.

아무튼 은별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민국을 따라 김밥 천국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의자에 앉은 은별이 맞은편의 민국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이유를 설명해봐.”

“잠깐, 일단 밥 좀 시키고. 뭐 먹을래.”

“몇 개 시켜도 되는데?”

“한 개만 시켜. 여자가 뭐 그렇게 많이 먹으려고 하냐. 그러다가 살찌고 돼지 되는 거야.”

“남 걱정은 잘도 하시네요! 좋으시겠어요?”

은별이 고른 음식은 떡볶이였다. 민국은 밥을 먹지 못해서 음식 두 개를 주문하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은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딴죽 걸었다.

“넌 왜 음식 두 개 시켜?”

“배가 고프니까.”

“난 왜 배고픈데 하나만 먹으래? 사람 차별하는 거야 지금?”

“당연한 거 아니냐. 우리나라는 남아선호사상의 나라야. 남자는 음식을 두 개 먹을 때 여자는 한 개를 먹어야하지.”

“지랄한다… 이유가 뭔데?”

“남자는 힘을 쓰지. 여자는 힘쓰는 일은 안하잖아? 그런 이유에서다.”

“어이구, 여자가 힘쓰는 일은 안 해요? 아기 돌보고 장보고 집안일 하는 게 누구인데 힘쓰는 일을 안 해요?”

“남자는 밤일에도 힘을 쓰잖아.”

“…븅신!”

은별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리 일갈하고는 수저통에서 젓가락과 수저를 꺼내 민국의 자리에 놓았다. 역시 말하는 꼬락서니는 싹수가 없었으나 행동은 굉장히 다른 그녀였다.

민국은 ‘고맙다’고 얘기했고 은별은 다시 작은 목소리로 ‘븅신….’이라면서 투덜댔다. 이윽고 민국이 시킨 떡볶이와 돈가스, 김치찌개가 등장했다.

이 중에 돈가스와 김치찌개는 민국이 먹으려고 시킨 것이었는데 도무지 조합 자체가 제3자가 볼 때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민국은 굴하지 않는다는 듯 김치찌개를 자신의 앞에 놓고 돈가스를 중간에 두었다.

“이거 먹어라.”

“말 안 해도 먹을 거야.”

말하기 무섭게 은별은 떡볶이를 자신의 앞에 두고 중앙에 있는 돈가스 하나를 젓가락으로 짚어서 냠하고 입에 물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귀여운 동작에 피식 하고 웃었다가 천천히 김치찌개를 떠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식사하던 은별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정말 무슨 일인데.”

“조용히 하고 식사부터 해. 남자가 밥 먹는데 말하는 거 아니다.”

“…아주 지랄 나셨어요.”

그러고 은별이 다시 떡볶이에 집중하는 찰나였다. 떡볶이의 양념이 은별의 입술 아래에 묻었고 민국은 그것을 보다가 놓치지 않고 한 마디 했다.

“이거 이거… 대체 왜 이래? 요즘 여자들은 이런 게 문제야.”

“…뭔데 또 지랄이세요?”

“여자들은 남자랑 있으면 꼭 입술에 양념 묻히고 모른 척하잖아? 뭐 닦아주기라도 바라는 건가?”

“풋.”

진심으로 비웃는 강은별이었다.

“네가 무슨 시크릿가든의 현빈이라도 되는 줄 아니? 현빈보다 못 난 게.”

“됐고.”

민국이 드르륵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턱을 손으로 부드럽게 잡더니 치켜 올린 뒤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은별은 전혀 예상도 못한 민국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고는 경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자연스레 입술을 뽀뽀하는 형태로 바꾸고 눈을 감게 되었는데….

“옛다.”

“…….”

“이게 바로 휴지 키스다.”

“웁웁!”

“맛이 어때?”

민국이 내민 것은 입술이 아니라 휴지였다. 나머지 손으로 휴지를 들더니 그것을 그녀의 입술에 마구마구 문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짜 뽀뽀라도 할 줄 알았던 은별은 까칠한 감촉에 신음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가 팍 물러나고는 소리쳤다.

“이씨! 오랑우탄 같은 게!”

“뭐 닦아줘도 난리래. 아니면 진짜 키스라도 해주길 바랐냐?”

“미친 놈. 이빨 까는 소리나 만날 해대고, 그러니까 네가 만년 솔로인 거야.”

“말했잖아. 스물다섯 살 되면 서양 여자 사귈 거라고.”

“드래곤볼 일곱 개 모으면 가능할 소원을 자신 있게 말하시네요, 그놈의 자신감도 참.”

은별은 입술에 묻은 양념이 민국이 준 휴지로도 닦이지 않자 옷소매로 닦아버렸다. 그녀는 아쉬움에 조금 화가 나 있었는데, 이내 아쉬워하는 자신을 보고 다른 의미로 화가 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일의 원인인 민국은 태연하게 식사 중이었다. 결국 은별도 다시 식사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어쨌든 간에 장난 그만치고 뭔 일인지나 빨리 말해. 나 엄마한테 한 시간만 나갔다 온다고 허락받은 거란 말이야.”

“아, 그래? 그럼 빨리 말해야겠네.”

민국은 김치찌개를 떠먹던 수저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은별을 바라보았다. 은별은 아직도 입술에 남아 있는 찝찝한 양념의 흔적에 옷소매로 입술을 박박 닦고는 그를 쳐다보았다.

‘일을 어떻게 말해야 하나.’

민국은 잠시 고심했다. 아무래도 은별은 이유를 듣지 않는 이상 절대로 가슴을 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여자로서 당연한 상식이었다. 허나 민국은 자신이 겪었던 사실에 대해서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일반 마법사도 아니고 온갖 자잘한 범죄를 저질러 인간 세계로 떨어진 흑 마법사라지 않나. 아무리 지금은 다른 세계 마법사들의 시선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못한다 해도 언제 흑심을 품고 행동할지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치료해주다 못해 열성 팬이라는 부분은 무척이나 고마웠으나 직업에 대한 인식이란 게 있는 만큼 민국은 결단코 흑 마법사 소녀의 심리에 거슬리는 짓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만지는 건 역시 안 되겠지?”

“확 나가버린다?”

“…사실 내가 평생을 모태솔로로 살아왔잖아. 근데 그러다 보니 점점 성욕도 쌓이고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들기 시작하는 거야. 원래 이 나이 때면 한창 여자에 대해서 알고 싶은 그런 게 있잖아. 그래서 한 번 가슴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야 어디 가, 뻥이야 뻥.”

여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가슴 좀 만져보고 싶다고 얘기하면 당연지사 어느 여자든 기가 막혀 자리에서 일어날 게 자명했다. 민국은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난 은별을 타일러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후우 하고 깊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얘기했다.

“알았어, 그럼 진짜 이유를 설명해줄게.”

“이번에도 거짓말이면 확 미들킥 날려버릴 테니까 가드나 준비해.”

“그러니까, 나 병에 걸렸어.”

의외의 발언이었는지 은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병이라고?”

“어. 가슴 만지지 않으면 죽는 병이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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