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빈유(貧乳) 왕의 표본>
민국은 급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다시 몇 번 신호음이 울린 끝에 비제이 남고딩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신경질이 났는지 받자마자 호통을 쳤다.
“아 왜!”
“가슴 한 시간만 만지게 해달라고!”
“나 지금 방송 중이라고 했지? 지금 네 목소리 다 들리고 있거든?”
“아 정말? …여러분 안녕하세요. 비제이 현대왕입니다.”
목소리를 깔고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는 비제이 서민국이었다. 방송할 때 컨셉이 있는 만큼 그 컨셉대로 꾸준히 시청자들에게 어필해야 했다. 비록 현실과는 다른 성격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너 보고 변태냐고 시청자들이 욕하잖아. 쓸데없는 장난 그만하고 꺼져.”
“장난 아니라니까.”
뚝, 하고 다시 전화가 끊겼다. 민국은 방송을 하고 있으니까 방해하기는 뭐하니 휴대폰으로 메시지만 전송했다.
‘자세한 일은 이따 방송 끝나고 얘기하자.’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니 남고딩이 괴팍한 성깔답게 한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
‘즐.'
“이놈의 여편네가.”
비제이 할 때 성깔이 나오는 민국이었다. 하여튼 민국은 휴대폰을 다시 책상에 놓고 침대에 앉게 되었다. 그러고는 근처의 거울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마법이고 뭐고 죽을 것 같이 아프던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다니! 가슴을 한 시간 동안 만져야 이 몸뚱이가 유지된다는 사실 하나를 제외하면 정말이지 복 받은 거라 할 수 있었다.
“…….”
하여튼 좋은 일임은 분명했음에 민국은 침대에 잠시 몸을 눕히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죽을 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도 잠시, 다시 살 수 있게 되자 접어두었던 계획들을 고스란히 꺼내놓게 되었다.
‘일단 일주일 동안 학교 결석한 건 어떻게 하지? 그동안 교수님이 낸 과제도 있을 텐데. 수업 진도도 다시 따라가야 하고.’
그러고 보니 예나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대뜸 흑 마법사가 찾아와 자신을 치료해줬다고 하면 그녀가 믿어줄까? 애초에 그 사실을 흑 마법사의 허락 없이 발설해도 아무 손해가 없는 걸까?“으음, 모르겠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평온해진 몸으로 침대에서 뒤척이며 민국은 이게 바로 행복이란 거구나 실감했다.
어느 틈엔가 두 시간이 흘렀다. 몇 차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민국은 눈을 뜨고 현재 시각을 확인한 뒤 투덜거렸다.
“남고딩 애는 언제 연락하는 거야.”
아무리 대꾸할 때는 튕겨대고 까칠한 남고딩이라도, 요구를 하면 줄기차게 들어주고 거절을 곧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인터넷 방송의 남고딩 팬들은 그런 그녀를 보고 츤고딩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남고딩은 비제이 현대왕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목소리와 애드립만으로 승부하는 비제이였는데, 드립이 찰진 편이라서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되겠네.”
결국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로 향하는 서민국이었다. 그는 컴퓨터 전원을 키고 곧장 파뿌리 TV 사이트에 접속하여 남고딩이 방송하는 방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다.'
워낙 팬층이 두꺼운 남고딩이기에 그녀의 방은 이미 생방송 순위권 5위에 들어 있었다. 서민국은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을 한 뒤 곧장 남고딩의 방에 접속했다.
그가 들어가자 채팅창에 그의 닉네임이 뜨면서 현대왕이 방에 입장했다는 문장이 등장했다. 그러자 오로지 남고딩의 방송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팬들이 ‘어! 현대왕이다!’하면서 폭풍처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딩님! 현대왕님 들어왔어요!]
[현대왕이다 현대왕!]
[현~대왕!]
시청자들의 관심을 쿨하게 무시해주고 현대왕은 방송 중인 남고딩을 향해 채팅창에 글을 끄적였다.
[야. 너 내가 연락하라고 한 게 언젠데 지금까지 연락을 안 해?]
현대왕이 작성한 글은 시청자들이 써재끼는 글 때문에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지만, 그의 글이니 만큼 모두들 스크롤을 위로 올려서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고딩님! 현대왕님이에요!’하면서 현대왕의 존재감을 알렸고, 한창 시청자들에게 인터넷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남고딩이 마이크로 한 마디 했다.
“내가 언제 연락한다고나 했어?”
‘이것 봐라?’
현대왕은 그 도발적인 대사에 이렇게 한 마디 했다.
[팅기냐? 내 열 두 번째 아내 주제에.]
“…븅신.”
현대왕의 말에 몇몇 시청자들이 [ㅋㅋㅋㅋㅋㅋㅋ]를 남발했으나 남고딩은 굴하지 않고 욕설로 답해주었다. 현대왕은 진지함을 담아 다시 남고딩을 설득했다.
[하여튼 잠시 얘기 좀 나눠 보자고.]
“뭔데 여기서 말해.”
스피커를 타고 남고딩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여기서 할 말 아냐.]
“아 싫어 나 지금 방송 중이잖아. 정 그러면 방송 끝나고 대화해.”
[너 게임 폐인인 거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언제 끝날 거 알고 기다리냐 이 폐인 년아.]
“시끄러워 오덕 같은 놈아. 자꾸 그러면 추방 시킬 테니까 알아서 해.”
[나 진짜 중요한 일이라니까? 알았다. 그럼 긴 얘기 안 할 테니까 듣고 바로 승낙만 해줘라.]
“들어보고.”
[가슴 만지게 해줘. 한 시간만.]
“꺼지라고 변태 새꺄!”
결국 추방당한 서민국이었다. 민국은 ‘아놔….’하면서 인상을 찡그렸고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했다. 일단 휴대폰으로 남고딩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남고딩은 받지 않았고 민국은 폭풍 문자를 써재끼기 시작했다.
[가슴 만지게 해줘. 한 시간만.]
[가슴 좀 만지게 해줘. 한 시간만.]
[가슴이 만지고 싶다. 한 시간만.]
[가슴 만지게 해주라. 한 시간만.]
[가슴이 필요한 시간이다. 한 시간만.]
[가슴을 만져야 살 수 있다. 한 시간만]
[가슴이 필요해! 필요하다고! 한 시간만!]
[슴가가 필요하다고! 슴가!]
[슴가!]
[슴가!]
[슴가!]
[슴가!]
[슴가!]
이때 서민국이 남고딩에게 보낸 메시지는 약 300통이 넘었다.
[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
“알았어! 그만해!”
결국 포기하고 남고딩이 먼저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근성의 힘으로 승낙을 받게 되자 민국은 쾌재를 일으켰다.
“가슴 만지게 해줄 거지?”
“너 미쳤어? 아오! 알았어, 일단 들어보자고. 만나서 들어보고 결정해줄 테니까 방송 끝낼 때까지 닥치고 있어!”
“오케이 누나!”
완전한 승낙은 아니었지만 일단 남고딩과 만날 것을 약속 받게 된 현대왕은 ‘역시 누나밖에 없어 ㅎㅎ.’라면서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그런 현대왕을 향해 남고딩은 ‘씹새끼….’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통화를 끊었다.
* *
남고딩의 방송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거의 깊은 저녁때였지만 민국은 굴하지 않고 남고딩과 만나기를 청했다.
남고딩은 민국과 통화 중에 ‘이 변태 새끼가 진짜 가슴에 환장했나…’하고 중얼거렸으나 그건 민국의 진짜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대사였다. 민국 딴에선 정말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
‘설마 오늘 안으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민국은 택시를 타고 남고딩이 사는 집 근처로 향하고 있었다. 남고딩은 민국과 마찬가지로 대학생이었지만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었기에 밤늦게 혼자서 나가는 것은 가급적 금지하고 있었다. 민국은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는 차창을 응시하면서 두 손을 꼭 쥐고 속으로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오오, 하나님이여! 부디 내게 힘을!’
참고로 민국은 나자신교였다.(나자신교 : 나 자신만 믿는 교)
“형씨, 도착했수.”
“아, 예…. 고맙습니다.”
민국은 두 손으로 깍듯이 택시 아저씨에게 돈을 건넨 다음 밖으로 내렸다. 남고딩이 살고 있는 집은 강남이었는데, 그렇다고 부잣집 딸인 것은 아니었다. 민국은 남고딩의 집 근처까지 당도하고 나서 곧장 휴대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했다. 몇 번 신호음이 오가고 남고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빨리 나와. 앞이야.”
“잠깐. 진짜로 가슴 만지려고 온 거야?”
민국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미친 놈.”
뚝하고 전화가 끊겼고 민국은 설마 여기까지 오라고 해놓고 안 나오는 건 아닌 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비제이 계에서 츤고딩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그녀였다. 입에선 별의별 욕설이 난무한다고 해도, 행동은 그와는 정반대로 상냥한 것이다.
민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이윽고 끼이익 하고 츤고딩이 살고 있는 집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로 추측되는 키 160cm 정도의 여자가 귀여운 샌들을 신고 마당 쪽을 걸어왔다.
마당의 철창 문 쪽에 서 있던 민국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녀를 불렀다.
“야 츤고딩.”
“…죽을래? 츤고딩이라고 부르지 마. 여기선 강은별이야.”
강은별. 파뿌리 TV 비제이 계에서 애드립의 황제 중 한 명에 통하는 남고딩의 실명은 그러했다. 민국은 뒷머리를 잠시 긁적거리다가 철문밖의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아무튼 밖으로 나와 봐. 대화 좀 하자.”
“뭔 대화? 진짜 가슴 만지려고? 너 미친 거 아니야?”
“내가 가슴을 만져야 하는 것엔 슬픈 전설이 있어.”
“지랄하네.”
“…….”
이윽고 강은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찡그린 인상으로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민국은 철문 너머에선 어두워서 잘 안 보였는데, 강은별이 반팔 셔츠를 입고 있음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입고도 안 춥냐? 이 쌀쌀한 날씨에 그러고 밖을 나오다니, 과연 츤고딩이다.”
“됐고! 대체 뭐야? 가슴 만지려고 하는 이유가 뭔데?”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해야 하나? 그냥 만지게 해주면 안 돼?”
은별은 민국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한층 인상을 구기면서 대꾸했다.
“너 내가 쉬워 보여? 내가 츤츤 거리면서 줄 거 다 주니까 가슴까지 쉽게 내줄 것 같아?”
“츤데레인 거 지도 인정하네.”
“…칫.”
고개를 돌리면서 혀를 차는 강은별을 향해 민국은 중얼거렸다.
“아무튼 빨리 옷이나 더 껴입고 와. 얘기가 길어질 테니까.”
“아씨 엄마한테 잠깐 바람만 세고 오겠다고 했는데… 기다려봐.”
그리고 강은별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민국은 집 문을 닫고 들어간 강은별의 자취를 뒤로한 채 과연 츤데레가 확실하구나 감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