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민국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치는 열성 팬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상당히 놀란 얼굴로 막무가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비제이를 관둬야 할 정도로 뭐 문제라도 있어?”
“다른 문제라기 보단 그냥….”
“설마 목이 그렇게 안 좋은 거야?”
열성 팬은 진심으로 걱정되는 눈빛을 지었다. 민국은 그 눈빛에 내심 마음이 약해졌다.
사실상 파뿌리 TV의 현대왕은 상당히 싹수가 노란 언행을 맘껏 진행해온 비제이였다. 그러나 그 비제이 일을 하는 그의 실제 모습은 한없이 선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래서인지 민국은 열성 팬의 걱정스런 눈빛을 마주하게 되자 안타까운 감정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피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목보단….”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머리에 강한 고통이 나타나자 민국은 휘청거리다 못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열성 팬이 신발을 벗고 쓰러져 있는 민국에게로 다가와 부축했다.
“아!”
그러다가 민국의 신체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잠시 탄성을 짓다가 곧 진지해진 얼굴로 민국을 바라보았다.
“너 몸에 심하게 문제 있지? 그래서 비제이를 관두려고 하는 거구나?”
“…….”
살결만 접촉해도 그의 상태에 대해선 곧잘 알 수 있다는 말투였다. 이윽고 열성 팬은 민국을 부축하여 침대 쪽으로 데려가 눕혔다. 민국은 열이 펄펄 끓는 모습으로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열성 팬은 힘들어하는 민국의 모습을 보면서 굳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괜찮아. 내가 다 해결해줄게.”
민국이 기절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건 모두 다 현대왕을 위한 일이야.’
기절한 상태로 민국이 꿈속에서 듣게 된 소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민국은 그때만 해도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몸속에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어온 것은 자명하였으며, 그것이 민국을 그동안 아프게 했던 희귀병 편도선염을 깔끔히 치료해주고 있음을 확신했다. 이상한 느낌에 잠시 후 민국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복부에 닿아있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손바닥을 보게 되었다.
그 손바닥의 주인은 다름 아닌….
‘열성 팬…?’
민국의 눈이 커지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이게 무슨….”
“가만히 있어봐.”
진지한 소녀의 음성에 민국은 상체를 뒤척이려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윽고 눈을 감은 채 손바닥에서 뿜어지는 이상한 기운을 민국의 복부에 주입하고 있던 소녀가 일을 마쳤는지 눈을 뜨면서 말했다.
“이제 됐어.”
“이게 무슨… 어?”
말을 중얼거리던 민국은 순간 의아함을 느끼고 침묵했다. 민국은 분명히 아파야 할 목이 아프지 않자 의아해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런 민국을 쳐다보다가 아프지 않지? 하고 질문했고 민국은 놀란 얼굴로 그 소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민국이 질문했다.
그러자 소녀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마법이야.”
“…….”
“비록 흑 마법이지만.”
민국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녀가 담았던 단어를 똑같이 입에 담아보았다.
“흑 마법?”
“그래. 너무 늦게 소개하는 감이 있지만 사실 난 흑 마법사야. 네 몸은 내가 힐링으로 치료해준 거라 보면 돼. 다만 백 마법사 같이 조건 없는 힐링은 불가능해서 여러모로 안 좋은 점이 있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네가 죽을 것 같이 아파하는데 망설이고 뭐고 할 데가 아니었지.”
민국은 이 어린 소녀가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갔다. 하지만 방금 전 희미한 의식 속에서 빛이 나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던 소녀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자, 민국은 농담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니….”
“이 세계의 인간들은 마법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한다고도 하던데. 역시 사실인가 보네. 난 다른 세계에서 온 흑 마법사야. 이계에서 흑 마법으로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켜서 이곳으로 쫓겨났지. 지금은 지구에서 살고 있다고 보면 돼.”
“…….”
“그건 그렇고 한 번 일어나서 몸 좀 제대로 움직여봐. 부족한 점 있으면 보완해주게.”
생각에 잠겨 있던 민국은 소녀의 말에 차츰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여보았다. 어째선지 방금 전만 해도 아프던 몸이 너무도 활발하고 개운하여 가볍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국은 못 믿겠단 얼굴로 대꾸했다.
“잘 움직여요. …그리고 개운해요.”
“그치? 다행이네. 그게 바로 흑 마법을 사용해서 몸을 치유시킨 거야. 앞으로 한동안은 아프지 않을 거야.”
실감나지 않는다는 듯 몸을 움직여보던 민국의 귓가에 그녀의 대사가 들어왔고, 민국은 그녀가 입에 담았던 ‘한동안’이란 단어에 신경이 거슬렸다.
“한동안이요?”
“맞아. 네가 그 몸을 유지하려면 이제부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거든.”
“…….”
민국은 침묵하며 상념에 잠겼다. 그는 많이는 아니었지만 한 때 학창시절 때 친구들의 권유로 판타지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흑 마법사란 자고로 한 가지의 조건을 걸고 마법을 사용하는 존재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민국은 자신의 몸이 이렇게 아프지 않게 유지되려면 한 가지 조건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것이고 그건 필시 인간의 목숨이라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인간의 목숨이라든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창백해진 안색의 민국을 보고 흑 마법사는 한숨을 쉬었다.
“예전만 해도 사람 목숨이니 뭐니 그런 조건을 달면서 악독한 짓을 했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회개한 상태이고 더 이상 목숨을 갖고 논하는 짓은 하지 않아. 만일 이 지구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지켜보고 있는 이계의 마법사들이 이번엔 정말로 날 죽이려 들 걸?”
“…….”
“네가 그 몸을 계속 유지하려면 필요한 것은 딱 하나야.”
민국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머지않아 흑 마법사 소녀가 입에 담을 그 대가라는 것이 무엇일지 귀를 기울였다. 민국의 집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시간을 끌던 흑 마법사 소녀가 다음 단어를 발음했다.
“슴가.”
“…슴가?”
“그래. 가슴이지.”
소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여자의 가슴.”
“…….”
도무지 그것이 어떻게 대가가 될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던 민국은 질문했다.
“여자의 가슴이랑 제 몸이 치유되는 거랑 뭐가 관련인데요?”
“거참.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비제이 할 때는 온갖 잘난 척을 다 하더니 실제로 만나니까 너무 다르잖아?”
“…….”
“네가 그 몸을 유지하려면 여자의 가슴을 만져야 한다고. 요컨대 하루를 살아가려면 못해도 한 시간 이상 가슴을 만져야해.”
민국이 찬찬히 눈을 크게 뜨면서 반문했다.
“예?”
“그렇다고 가슴을 애무한다던지 그러라는 건 아니야. 그냥 한 손으로 꼬옥 포개고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러고 한 시간 동안만 있으면 하루를 그 몸으로 살 수 있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지.”
민국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루를 살기 위해선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 시간 동안 여자의 가슴을 만져야 한다. 만지작만지작 거릴 필요도 없고, 한 시간만 가슴에 손을 대고 있으면 하루를 살 수 있는 에너지가 보충되는 것이다.
“다섯 시간 동안 가슴을 만질 시 5일 동안 그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가 주어진다는 뜻이야.”
“…….”
“여자 친구만 있으면 해결될 일이잖아. 안 그래?”
“저 모태 솔로인데요.”
“비제이 쪽 일하면서 아는 여자 애들 많잖아? 한 번 부탁해봐, 비제이 남고딩이라든지.”
“미쳤습니까? 그 괴팍한 성격한테 부탁을 하라고요?”
“이제 좀 현대왕 답네.”
“…….”
흑 마법사 소녀는 겉으로 보기엔 열다섯 살로 추정됐지만, 말하는 투나 등에 지고 있는 분위기로 봐선 꽤나 나이를 먹었음 직한 어른으로 느껴졌다. 때문에 민국은 이제 와서 말을 놓을 필요도 못 느끼게 되었고, 다만 머릿속에 담고 있는 한 가지 질문을 입에 올려놓게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를 도와주시는 거죠?”
“처음 인사할 때 말했잖아.”
소녀는 비릿하게 웃었다.
“네 팬이라서 그런다고.”
“…….”
“내가 요즘 이 지구에서 빠져 나가려고 기를 쓰고 연구 중이거든. 하지만 나라고 무조건 연구 삼매경에만 있을 수 있겠어? 가끔씩 재미가 필요할 때가 있지. 그럴 때 네 방송을 자주 보곤 해. 텔레비전에서 하는 예능 프로그램처럼 깍듯이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이 막장으로 행동하는 너의 모습에 나는 곧잘 웃곤 하거든.”
팔짱을 끼고 소녀는 말을 이어갔다.
“다만 좀 놀란 건 있었어. 그렇게 파뿌리 TV에서 막장 방송을 하던 녀석이 실제로 보면 뚜렷한 이목구비에 잘 생기고 키도 클 줄이야.”
“…….”
“아무튼 몸도 나았겠다, 이제부턴 방송도 계속해서 쭉 하도록 해. 적어도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진 열심히 해야지.”
“한 시간 동안 가슴을 만져야 하루를 살 수 있는 몸이 되었는데 방송할 마음이 들겠어요…?”
“안 하면 너에게 걸려 있는 마법을 해제할 지도 모르는데?”
“…….”
소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나쁜 제안도 아니잖아. 나 덕분에 너는 다시 살게 되었고, 나는 너 덕분에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
그러고는 싱긋 웃으면서 소녀가 주머니 속을 뒤져 종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이거.”
“그건 뭔가요?”
“싸인.”
“…….”
“집까지 찾아와줬는데 싸인은 해줘야지.”
열성 팬의 요구였다. 민국이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었는데(비록 가슴을 만져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대가가 따르지만) 고맙게 싸인을 해줘야 하는 게 비제이의 태도였다.
“…하여튼 고맙습니다.”
“응. 여기 전화번호 적어놓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앞으로 내가 지구에 남아있는 동안엔 좀 친하게 지내자.”
“…….”
민국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흑 마법사 소녀는 다시 피식하고 비릿하게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현관으로 향하여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를 뒤늦게 배웅하려던 민국은, 활짝 문을 열자 아무도 없는 바깥을 보고는 침묵했다.
‘이럴 수가.’
민국은 믿지 못하고 비틀비틀 거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다시 현기증이 인다거나 아픈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지 않은 것이었다.
‘흑 마법사라고?’
어린 소녀로 추정되는 여자가 흑 마법사라 자칭하고는 흑 마법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으나 하루에 한 시간 가량 가슴을 만져야만 살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내게 되자 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책상에 놓여 있는 휴대폰을 들어 다짜고짜 전화 목록 부를 뒤져보더니 남고딩이라고 적혀 있는 번호를 통화 버튼 눌렀다. 귀에 대고 있자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하고 수신음이 울렸다.
잠시간 받기를 기다리고 있자 이내 남고딩이란 닉네임의 여자애가 운을 띄우며 받았다.
“무슨 일이야?”
“뭐 하나만 부탁하자.”
“뭔데? 빨리 말해. 나 지금 방송 중이란 말이야.”
남고딩이란 닉네임을 사용하는 비제이는 실제로 성별이 여자였다. 다만 무슨 연유에선지 남고딩이란 독특한 닉네임을 사용하였고, 그녀는 민국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방송계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민국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제이 현대왕답게 돌직구로 요구했다.
“가슴 한 시간만 만지게 해줘.”
“…꺼져 변태 새끼야.”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