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빛을 형성한다 (3)
로안은 디우스를 노려봤다.
한 가지 크게 놀란 점은 놈의 배후에 있는 악마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악마들과 분리된 상태인가?’
이는 악마들이 이전과 달리 악마 각성자들의 뒤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
직접 카오니아 대륙에 개입하고 있으니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계를 펼치고 있군.’
디우스의 손에서 번쩍이고 있는 신비한 구슬 하나.
‘회생의 보옥?’
신화 등급 아이템이다.
이와 비슷한 등급의 보옥 아이템으로 아이템의 레벨 제한을 없애주는 〈성광의 보옥〉이라는 것이 있다.
로안이 이미 두 번이나 얻어서 요긴하게 사용했던 아이템이다.
디우스가 들고 있는 〈회생의 보옥〉은 특별한 결계를 펼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회생 지점을 따로 지정해두고 결계를 펼치면 결계 안에서는 죽어도 회생 지점에서 부활하게 된다.’
이 결계는 구슬을 사용하면 즉각 펼쳐지는 식이라 특별한 시간이 소모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서 여분의 생명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템.
사르곤 제국의 황제답게 디우스는 그러한 특별한 아이템을 가지고 로안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각종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네.’
신화 등급 방어구에 장신구들까지.
심지어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까지 신화등급 방어구에 해당했다.
로안의 앞에 나타나기까지 디우스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로안은 그런 막강한 장비빨의 디우스를 보면서도 담담했다.
또한 디우스가 회생의 보옥으로 결계를 펼친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저지를 하지 않았다.
“나와 거래를 하자고 했나?”
“네 말대로다, 로안. 나는 너와 거래를 하기 원한다.”
회생의 결계가 완벽하게 펼쳐진 상황이라 디우스의 표정은 매우 느긋했다.
“어떤 거래인지 말해봐.”
그러자 디우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전에 생사결계를 펼치는 것을 허락해주겠나?”
생사결계(生死結界)는 서로의 합의하에 펼치는 결계다.
이 결계는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다.
설명대로라면 신이나 악마라고 해도 침입할 수 없는 절대 결계다.
생사 결계 생성에 합의한 이들 모두가 동의하면 다시 결계를 풀 수 있지만, 동의하지 않을 경우 최후의 생존자 한 명이 남아야만 결계가
풀리는 식이다.
이 또한 관련 아이템이 있어야 생성할 수 있는데 디우스가 그것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별 괴상한 잡템들이 더럽게 많군.’
로안은 실소를 흘렸다.
사실 그는 생사결계와 흡사한 귀령결계를 별다른 아이템 없이도 펼칠 수 있다.
또한 귀령체 상태에서는 생사결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빠져나오는 게 가능하다.
귀력을 가진 로안에게 결계의 제약같은 건 통하지 않으니까.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서 굳이 생사결계를 펼칠 이유가 있나?”
“물론이다. 오직 생사결계 안에서만 철저한 비밀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비밀 거래?”
“신들이나 악마들도 생사결계 안은 엿볼 수 없지. 솔직히 말해 그들을 믿을 수 없지 않으냐? 너 또한 대부분의 여신들에게 버림받은
신세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 무슨 거래일지 흥미롭군. 그런데 생사결계를 펼치고 나면 둘 중 하나가 죽거나 혹은 둘이 동의해야 해제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다. 어디까지나 거래를 위한 것이니 거래를 마치면 바로 해제할 생각이다.”
로안이 그때 결계 해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생사의 결투가 불가피하다.
그 경우 디우스는 죽음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미 이런 때를 대비해 회생의 결계를 펼쳐두었다.
즉, 최악의 상황에 로안이 그를 죽여도 살아날 구멍은 만들어놓았다는 뜻.
그야말로 주도면밀한 준비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 능구렁이랄까?
로안은 픽 웃으며 끄덕였다.
“좋아. 생사결계 생성에 동의하겠다.”
“잘 생각했다. 역시 말이 통하는군.”
디우스가 입가에 짙은 미소가 다시 피어났다.
[디우스가 생사결계 생성을 요청합니다.]
[수락하겠습니까?]
곧바로 이어지는 알림.
로안은 선뜻 끄덕였다.
“예.”
[생사결계가 생성되었습니다.]
[결계 인원 2/2]
곧바로 주변의 정경이 바뀌었다.
로안은 텅 비어 있는 무(無)의 공간과 같은 곳에 디우스와 대치한 채로 서 있었다.
“이제 어떤 거래인지 말해봐라, 디우스.”
그러자 디우스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없느냐, 로안?”
“손을 잡자고?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우리가 손을 잡아 여신이나 악마들을 카오니아 대륙에서 몰아내자는 뜻이다. 그 후에 카오니아 대륙은 너와 내가 절반씩
나눠서 통치하는 게 어떻겠느냐?”
로안은 순간 황당했다.
디우스가 이런 엉뚱한 제의를 해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보다 카오니아 대륙에서 신이나 악마들을 몰아낸다?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물론이다. 로안 네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디우스의 눈빛이 불타듯 이글거렸다.
“솔직히 요즘 신이나 악마들이 인간 세계에 너무 과도한 간섭을 하고 있지 않으냐? 그들은 각각 신계나 마계로 돌아가고 카오니아
대륙에서는 이전처럼 신앙이나 숭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것에는 나 또한 동의하지만 우리가 신이나 악마들을 몰아내는 건 허무맹랑한 얘기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네가 도와주면 가능하다.”
“내가 어떻게 도우라는 거지?”
순간 디우스가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심연의 신비 조각. 그걸 내게 맡겨라.”
“역시 너 또한 언령을 풀었나보군.”
그렇지 않아도 로안은 디우스가 갑자기 나타나 거래를 제의해올 때 혹시 심연의 신비 조각 때문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놈이 이런 무리수를 둬가며 자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으니까.
“큭! 물론이다. 그 따위 언령 쯤은 내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
디우스는 순순히 시인했다.
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그렇다면 여섯 개를 확보한 나에게 네가 가진 마지막 하나를 건네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건 왠지 내가 너무 손해보는 것 같잖아.”
“물론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주마.”
“보상이라고?”
“물론이다. 네가 만일 그 조각들을 나에게 양보하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악마들 및 악마 각성자들의 정보를 너에게 말해주겠다. 또한
황궁 비고를 털어서 너의 직업에 맞는 최상급 신화 등급 아이템은 물론이고 각종 비급들도 모두 지원해주마. 그뿐이 아니다. 네게 이 초월 등급 아이템도 주도록 하지.”
디우스는 〈고대 신의 지혜가 깃든 수정구(초월)〉를 로안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저건?’
로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것도 사기템 중 하나인데?’
각종 봉인된 아이템의 정보를 손쉽게 알 수 있다.
온갖 비밀 던전 같은 것도 저 수정구가 있으면 무척이나 수월하게 깰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디우스가 심연의 신비 조각에 대한 비밀을 알아낸 건 저것의 도움도 있겠군.’
물론 수정구가 언령을 푸는 직접적인 단서는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반 등급에 불과한 심연의 신비 조각이 사실은 엄청난 아이템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려줄 수 있다.
“어떠냐? 이것 외에 코인이나 각종 재물들도 네가 원하는 만큼 주도록 하지. 원한다면 황궁비고에 있는 모든 걸 털어가도 좋다.”
디우스의 말에 로안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줘도 다시 빼앗아갈 자신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디우스가 제시한 조건은 이 상황에 별 의미없는 것들이다.
태초의 빛 신검 제네시스를 손에 쥐면 사실상 카오니아 대륙의 모든 걸 얻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고작 그런 걸로 내가 조각들을 줄 것 같은가? 나를 너무 순진하게 보고 있군, 디우스.”
그러자 디우스가 로안을 노려봤다.
“황궁비고의 보물을 모두 주겠다는 데도 만족을 못하겠다는 건가?”
“물론이야.”
“큭! 과욕을 부리는군. 추가로 원하는 뭐냐?”
“없다.”
“없다?”
“애초부터 너와 뭔가 거래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뭔가 대단한 조건을 걸지 않나 기대했는데 역시나군.”
순간 디우스의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크큭! 결국 나와 싸워서 빼앗겠다는 것이로군.”
“잘 알고 있구나.”
로안의 왼손에서 칠색의 광채가 피어났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는 지켄의 불멸도가 꿈틀거렸다.
그와 함께 피어나는 가공스러운 기세 앞에 디우스는 흠칫 놀랐다.
로안이 차갑게 웃었다.
“마침 이곳은 생사결계가 펼쳐져 있으니 싸우기 아주 좋은 장소야. 하지만 네가 조각을 내놓는다면 특별히 죽이지 않고 살려줄 수도 있다.”
“닥쳐라! 내가 그리 쉽게 당할 거라 보느냐?”
생사결계뿐 아니라 회생의 결계도 펼쳐놓은 터라 디우스는 느긋한 표정이었다.
“크큭! 나 또한 네놈과 순순히 거래를 할 수 있으리라 보지 않았다만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디우스의 몸 주변을 칠색의 광채들이 위성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각각의 광채들이 점차 커지더니 상공으로 날아오르며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으로 변했다.
‘저건?’
칠룡소환! 천지종말!
로안의 두 눈이 커졌다.
레벨 90 대마도사 이상만 터득이 가능한 신화 등급 마법서에 수록된 궁극마법이다.
그 위력은 천룡도법이나 무극비급 못지 않은 수준.
특히 하루에 한 번만 시전이 가능한 천지종말(天地終末)!
이건 일곱 드래곤이 동시에 전력을 다해 브레스를 내뿜는 것으로 대재앙급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광대한 영역에 포진해 있는 다수의 적을 한 번에 쓸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한 명의 강적을 향해서도 매우 위력적이다.
“크하하하하! 로안! 네놈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것을 받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디우스의 웃음과 외침은 허공에서 들렸다.
그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포악하게 생긴 일곱 마리의 드래곤들이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콰르르르! 콰콰쾅!
촤아아아―!
번쩍! 화르르르!
곧바로 생사결계 내부가 일곱 마리 드래곤이 내뿜는 브레스에 의해 말 그대로 지옥과 같은 광경으로 변했다.
‘대단하군.’
저게 천지종말이다.
게임에서는 많이 봤지만 현실에서는 처음이다.
그야말로 장관이 따로 없다만.
‘천룡신! 무극벽!’
[천룡신을 펼쳤습니다.]
[당신의 총스탯이 일시적으로 240% 증가합니다.]
[무극의 기운으로 벽을 생성합니다.]
무극도법의 강력한 무적기인 무극벽(無極壁).
증가한 총스탯의 힘으로 절대방어벽이라 할 수 있는 무극벽이 생겨났다.
로안의 주위를 무극의 기운이 보호하는 것으로 그가 움직이지 않는 한 이 보호벽은 깨지지 않는다.
콰쾅! 콰콰아앙!
화르르! 화르르르르!
천지종말의 대재앙은 한동안 계속 되었지만 로안은 무극벽 안에서 느긋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소환된 드래곤들의 뒤에 숨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디우스는 경악했다.
‘어찌 저럴 수가!’
이는 그가 처음으로 펼쳐보는 궁극기였다.
비장의 한 수!
정말 강적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숨겨둔 그의 최후 필살기다.
그런데 그걸 느긋하게 받아내는 녀석이 있다니.
신이나 악마라면 이해가 가지만 인간이 말이다.
‘저놈이야말로 정말 미친 괴물이로군!’
천지종말의 시전 시간은 30초.
그 시간이 지나자 결계 안은 언제 난리가 났냐는 듯 말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곧바로 무극벽을 해제하고 디우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 로안의 도가 디우스의 머리를 겨눴다.
“고작 이걸로 나에게 승부를 건 것이냐, 디우스?”
“크큭! 왜 신들이 너를 버렸는지 알 것도 같구나. 너같은 놈을 내버려두면 그들의 자리도 위태해지기 때문이야.”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조각이나 내놔. 마지막 기회다.”
디우스를 이대로 죽이면 그의 아공간에 있는 물건이 랜덤하게 드롭된다.
물론 대부분 일반 등급이지만.
혹시라도 심연의 신비 조각이 드롭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는 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일반템은 거의 100% 드롭된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가능하면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조각을 얻으려 했지만.
디우스는 가소롭다는 듯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짐은 대사르곤 제국의 황제이니라. 그 따위 협박에 짐이 굴할 것 같으냐?”
“뭐야? 갑자기 황제 말투로 변하니 어색하잖아. 그냥 하던 대로 말하는 게 어때?”
“닥치거라, 무엄한 놈 같으니! 오늘은 짐이 밀렸다만 조만간 네놈이야말로 그 조각들을 모두 짐에게 가져다 바치게 될 것이다.”
디우스는 항복할 기세가 아니었다.
회생의 결계 때문일 것이다.
로안은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원하는대로 해주마.”
신령한 빛의 성배가 번쩍이는 순간 디우스의 머리가 퍽 하고 터져나갔다.
[결계 인원 1/2]
[생사결계의 해제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생사결계가 해제됩니다.]
디우스가 죽자 생사결계가 자동해제됐다.
물론 디우스는 죽은 것이 아니다.
회생의 결계 덕분에 그가 지정해둔 포인트에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한 번 승리한 대상에게는 어디서든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로안에게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고인물.
‘귀령이동!’
로안이 나타난 장소는 디우스의 비밀 아지트이자 침소이기도 했다.
대악마 켈베더에게 들키긴 했지만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비밀 장소.
“어, 어떻게 네놈이 이곳에!”
디우스는 기절초풍한 표정으로 로안을 쳐다봤다.
로안은 싸늘히 웃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심연의 신비 조각을 내놔라. 아니면 넌 죽는다.”
그러나 디우스는 이내 인상을 굳히더니 오히려 비웃듯 말했다.
“큭! 죽여라. 그것은 짐의 아공간에서 영원히 잠자게 될 터. 네놈은 결단코 그것을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다.”
디우스는 이미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죽으면 죽을지언정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자신이 얻지 못할 물건이니 로안도 얻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
‘하여간 마지막까지.’
로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죽인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이미 심상치 않은 존재들이 접근해오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황제답게 당당한 모습은 보기 좋구나.’
“잘가라, 디우스.”
퍼어억!
성배가 번쩍이는 순간 디우스의 머리가 박살났다
역시나 일반 잡템들만 수두룩하게 드롭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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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의 신비 조각]
다행히 간절히 찾던 아이템도 그것들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