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빛을 형성한다 (2)
황제의 침소에 숨겨진 밀실.
그곳에 숨겨둔 비밀의 존재.
그것은 바로 대악마 켈베더가 그토록 찾으라 명령하던 여신 트렐라였다.
‘정말로 운이 좋았지.’
디우스가 트렐라를 발견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그가 전용으로 사용하던 대전장의 히든 게이트.
측근은 물론이고 황후를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오직 그만의 히든 게이트였다.
그 근처 숲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 살펴보니 지금 보는 트렐라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지고하면서도 강력한 분위기.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기운.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여성이 여신 트렐라라는 것을 말이야.’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그러한 확신이 들었다.
그로인해 처음엔 두려움에 떨었지만 점차 그러한 두려움은 희열로 바뀌었다.
트렐라가 전신이 거의 석화된 상태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즉각 대악마 켈베더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디우스는 이곳 밀실에 은밀히 트렐라를 감춰놓은 것이다.
혹시 몰라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트렐라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봉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신에게 이런 봉인은 통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힘을 거의 잃은 상태이니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했다.
‘어차피 트렐라를 켈베더에게 넘겨봤자 나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
그렇다고 트렐라를 이대로 이곳에 방치한다면?
만에 하나 트렐라가 힘을 일부라도 회복해 봉인을 풀기라도 하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놈과 거래를 하는 거지.’
디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놈은 절대 나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그놈은 다름아닌 로안이다.
로안이 여신 트렐라와 매우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이미 대악마 켈베더로부터 숱하게 들은 내용이다.
‘그놈에게 트렐라를 넘겨주는 대신 나는 여섯 개의 조각을 얻는다.’
디우스가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심연의 신비 조각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 그 힘을 얻으면 카오니아 대륙은 물론 이면 세계들도 지배할 수 있다······.〉
일곱 개의 조각을 합치면 태초의 힘을 형성해 대단한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카오니아 대륙은 물론 이면 세계들도 지배할 수 있는 힘! 그게 뭔지 모르지만 어쩌면 신이나 악마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일 수도
있다.’
디우스의 입가에 다시 득의만만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데 그때.
“디우스! 이런 곳에 밀실을 만들어두었느냐?”
갑자기 등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음성에 디우스는 경악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음성.
“케, 켈베더 님! 이곳을 어떻게······.”
등 뒤에 나타난 존재는 대악마 켈베더였다.
차갑다 못해 섬뜩하기 이를데 없는 악마의 눈빛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디우스! 네놈은 항상 내게 뭔가 숨기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네놈을 늘 주시하고 있었지. 역시나 이런 곳에서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었구나.”
소름끼치는 분노가 담긴 눈빛과 달리 켈베더의 음성은 매우 담담했다.
그러나 그러한 담담한 음성이 디우스를 더욱 두렵게 했다.
‘자칫하면 죽는다!’
디우스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러지며 외쳤다.
“존귀하신 마계의 신이시자 미천한 이 종의 주인이시여! 부디 오해하지 마시옵소서!”
“오해라 했느냐?”
“물론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여신 트렐라를 발견하여 주인께 바치려고 했사옵니다. 그저 호기심이 동하여 살펴보려 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사옵니다.”
쿵쿵쿵.
디우스는 바닥에 머리를 세차게 찍으며 외쳤다.
그러자 켈베더가 큭 하고 웃더니 한심하다는 듯 디우스를 노려봤다.
“네놈은 지금 저게 여신 트렐라로 보이느냐?”
그말에 디우스는 깜짝 놀라 켈베더를 쳐다봤다.
“하면 아니옵니까?”
순간 켈베더가 손을 슥 휘저었다.
파스스스.
여신상이 연기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보았느냐? 저건 그저 허상이었을 뿐이다.”
“허상이 아니라 분명 실체였사옵니다.”
“실체 같지만 허상이다. 트렐라가 너같은 녀석들을 속이기 위해 저런 허상을 만들어둔 것이다.”
“그럴수가!”
“진짜 트렐라였다면 네놈은 접근하는 순간 이미 죽었다.”
“하오나 트렐라는 이미 신의 힘을 잃어서 어지간한 인간 각성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다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사자가 아무리 힘을 잃는다한들 한낱 쥐새끼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다. 트렐라가 비록 힘을 잃었다 하나 너희들은 그녀
앞에서 그저 꿈틀거리는 벌레에 불과할 뿐이다.”
디우스가 몸을 움찔했다.
“그리하면 애초부터 저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임무가 아니옵니까?”
“물론이다. 그렇지만 트렐라가 너희 미물들을 손보는 순간 발휘하는 신력을 통해 나는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저런 허상 중에 하나는
실체일 테니까.”
켈베더는 권속들을 미끼로 트렐라의 위치를 알아내 직접 처리하겠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디우스는 자신이 얼마나 망상에 차 있었는지를 깨닫고는 몸을 떨었다.
“요, 용서하옵소서, 이 미천한 종의 주인이시여!”
“큭! 용서라!”
켈베더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리 허상을 숨기고 있었다 해도 네놈이 나를 속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 아니옵니다. 저는 당신께 바치려고······크아아아아악!”
디우스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그의 몸에 무수한 기포가 생겨나더니 전신이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악! 제, 제발 용서를······!”
디우스가 처절히 울부짖으며 자비를 구했지만 켈베더는 그의 몸이 녹아서 한줌 액체가 될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스스스.
그런데 그렇게 액체가 되었던 디우스의 몸이 잠시 후 멀쩡한 상태로 다시 복원되었다.
그와 동시에 켈베더의 손에서 피어난 푸른색의 불꽃이 디우스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르르! 활활활! 화르르르르!
“쿠아아아아악!”
화염은 강렬했지만 특이하게도 디우스의 전신을 한번에 태우지 않았다.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태워 재로 만들며 서서히 상부로 올라오는 식이었다.
“크아아아악! 제, 제발! 이제 그만! 차라리 죽여······.”
“디우스! 네놈은 감히 나를 속이려는 가증한 마음을 품었다. 하찮은 권속 따위가 그러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죽어마땅한 일. 살고 싶다면
네놈의 마음 구석에 숨겨진 모든 걸 다 토해놓아야 할 것이다.”
켈베더는 디우스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인간 중 어디에도 디우스만큼 쓸만한 권속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놈의 마음 한 구석은 나에게도 숨겨져 있지. 오늘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그로인해 켈베더의 고문은 계속되었다.
디우스는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크흐흑! 지, 진심이옵니다. 더 이상 당신께 숨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제발 이 종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주인이시여!”
켈베더는 조소를 흘렸다.
“너의 분수를 잊지마라!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나의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후로 또 한 번 나를 속이려 한다면 그때는 네놈을 하급
마물로 만들어 영원히 마계의 바닥을 기어다니게 만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
그 후에도 디우스는 한참 동안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비로소 켈베더가 사라진 걸 알아채고는 괴성 비슷한 신음을 토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크으윽! 크아아아아······! ”
그는 살기 위해서 그동안 켈베더에게 숨겼던 것들을 모조리 실토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한 가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심연의 신비 조각과 관계된 비밀이었다.
‘으득! 악마 놈! 날 이꼴로 만들다니 절대 용서 못해.’
전신이 만신창이 상태였지만 디우스의 두 눈은 광기 가득 번뜩였다.
* * *
한편 로안은 아스피스 성을 뒤졌지만 그곳에서 트렐라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아쉽게도 여기에는 없네.’
그렇다면 이제 패리드 호수의 결계 밖으로 나가서 트렐라가 숨어 있을 법한 장소를 찾아봐야 한다.
‘어디부터 가봐야 하나?’
왠지 느낌 상 대전장은 아니다.
대전장 안에 있을 거라면 아스피스 성에 있었을 테니까.
‘라고스 영지!’
거기부터 가볼까?
로안은 즉시 귀령체로 변신해 레온 제국 북부에 있는 라고스 영지로 이동했다.
스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디온 성의 광장.
‘후! 여전히 모두 석화된 상태군.’
지난 번에 살펴봤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광장에는 없는 것 같고 저택 안을 살펴볼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당신의 펫 요후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요후의 환상을 보겠습니까?]
‘환상이라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갑자기 이런 알림이 뜬 적 있다.
아스피스 성에서 부하들과 함께 암흑의 오크 성을 공략하기 직전.
느닷없이 펫 요후가 환상을 보여줬으니까.
부하 메르벨을 비롯한 소중한 존재들이 죽는 장면이었다.
위기를 감지한 로안은 부하들을 철수시키고 혼자서 암흑의 오크 성을 쓸어버렸다.
‘설마 이번에도 뭔가 있나?’
요후는 지금 아공간 휴식처에 있다.
패리드 호수 외부에 있는 상태라 혹시 몰라 펫들을 소환하지 않고 있는데.
놀랍게도 비소환 상태에서도 요후가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좋아! 보여봐라.’
[요후의 환상입니다.]
곧바로 펼쳐진 환상.
놀랍게도 로안이 지금 가려는 성주의 저택 거실에 트렐라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그녀의 화신 트리아나의 모습이다.
‘오! 설마 그곳에 트렐라가 있는 건가?’
환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트렐라를 향해 다가가는 로안 자신의 모습. 또한 그 뒤에는 베로니카의 화신 베니도 보였다.
환상 속의 로안은 트렐라를 본 순간 헤트시아가 준 능력을 통해 시간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트렐라를 안고 패리드 호수로 귀환했다.
그러나 곧바로 품에 안겨 있던 트렐라의 모습이 연기로 변해 흩어져버렸다.
‘뭐지? 저건?’
로안은 깜짝 놀랐다.
방금 전 보였던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긴 뭐하러 왔을까?”
그때 뒤에 들려오는 음성.
고개를 돌려보니 백색빛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팔짱을 낀 채 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신 베로니카의 화신 베니.
“말해봐. 패리드 호수에 영원히 처박혀 있을 것처럼 말해놓고 갑자기 이곳으로 온 이유가 뭔지?”
그녀는 약이 바싹 오른 표정이었다.
로안은 실소를 흘렸다.
역시나 예상대로 패리드 호수 밖으로 나오자 베니가 순식간에 따라붙은 것이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얘기해야 할 이유가 있나?”
로안은 어차피 베니가 말로는 협박을 해도 그 이상은 어쩌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룰을 깨뜨리는 순간 그녀는 영향력 포인트 전쟁에서 트렐라에게 패배하게 되니까.
“감히!”
로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베니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로안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디온 성 영주의 저택으로 향했다.
‘요후의 환상 대로라면 저 저택 안에 트렐라가 있다.’
그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며 로안은 순식간에 저택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현관을 열고 거실에 들어가는 순간.
‘······!’
놀랍게도 정말 있었다.
남빛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내려뜨린 신비의 미소녀.
신의 숲에서 로안이 조우했던 트리아나의 모습 그대로다.
로안이 들어가자 특유의 몽환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트렐라가 분명해.’
그렇다면 망설일 때가 아니다.
베니가 손을 쓰기 전에 시간을 정지시킨 후 트렐라와 함께 패리드 호수로 귀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안은 요후의 환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요후의 환상이 알려주는 경고 때문이다.
‘역시나 허상일까?’
눈으로 볼때는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흥! 여기에도 허상을 심어놨구나.”
그때 베니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소파에 앉아있던 트리아나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흩어져버렸다.
“아!”
로안이 탄식하며 침음을 흘리자 베니가 조소를 흘렸다.
“뭘 그리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거지? 설마 진짜 트렐라가 이곳에 있을 거라 생각했니?”
“허상이었던 건가?”
“후후, 네게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 진짜 트렐라였다면 아주 절망스러운 광경이 펼쳐졌을 걸.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트렐라가 영원히
봉인되는 장면을 봐야 했을 테니까.”
절망스러울 것까지야.
트렐라가 봉인되면 다시 깨우면 되는 일.
여신들의 향연을 열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꽤나 피곤한 일이야.’
트렐라가 봉인된 이후에는 더더욱 스탯을 올리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아무튼 다행이야.’
요후의 환상이 아니었다면 헤트시아가 준 시간 정지 능력을 허무하게 소모할 뻔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신기한 능력이군.’
요후는 어떻게 미래의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전설 펫이라지만 정말 놀라운 일.
이후에도 요후의 환상은 계속 나타났다.
로안이 카오니아 대륙 곳곳을 뒤지며 트리아나의 허상을 마주칠 때마다 그것이 실체가 아닌 허상임을 미리 환상을 통해 알려준 것이다.
저주의 숲, 드라우트 성, 신의 숲, 도시 헤르바, 아르곤 왕국 등등.
‘후! 모두 허상뿐이야. 분명 어딘가 실체가 있을 텐데.’
허상이 있다는 건 실체가 있다는 뜻.
트렐라는 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지속적으로 찾고 있지만 도무지 막막할 뿐이다.
그래도 로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트렐라를 찾았다.
그것은 매우 지루한 과정이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던 베니의 모습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그래봤자 어디선가 계속 날 감시하고 있겠지.’
로안은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혹시라도 진짜 트렐라를 발견하게 된다면 베니가 손쓰기 전에 그녀를 패리드 호수로 옮겨야 하니까.
그러던 중.
로안은 전혀 뜻밖의 존재와 마주쳤다.
황금빛 왕관을 쓰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중년 사내.
다름아닌 사르곤 제국의 황제 디우스다.
“디우스! 그렇지 않아도 널 찾고 있었는데 제발로 날 찾아왔구나.”
로안이 싸늘한 냉기를 풍기며 말하자 디우스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멈춰라! 내가 만일 너와 싸우려했다면 이런 식으로 너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목적이라도 있다는 건가?”
“물론이다. 나와 거래를 하지 않겠느냐?”
“거래?”
“그래. 이 거래는 네게도 내게도 절대 손해보는 일이 아니지.”
디우스의 입가에는 의미 심장한 미소가 피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