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물이 왕이 되면 벌어지는 일 (5) >
붉은 사막.
작렬하는 열기로 인해 생명체가 살기 힘들다는 죽음의 땅.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사막 외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 홀연히 나타났다.
스스스.
말끔하게 빗은 붉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
목에는 붉은 리본.
백색의 셔츠에 붉은 색의 정장.
“크.”
남자는 사막의 열기 따위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자조어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돌연 그의 앞 어딘가를 두드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투명한 벽이라도 존재하는 건지 쾅쾅 소리가 났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자가 큭 웃으며 다시 그곳을 쳤다.
“거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다네. 그만 나오는 게 어떤가?”
그러자 남자의 앞쪽에 흑색의 문 하나가 생겨나더니 그것이 이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동시에 그 안에서 나온 한 명의 청년.
말끔한 인상을 가진 귀공자의 외모.
그러나 두 눈에서 섬뜩한 흉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기막히군! 대체 여길 어떻게 찾은 거냐?”
귀공자가 물었다.
그러자 붉은 정장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건 몰라도 숨어있는 뭔가를 찾는 데는 나를 능가할 존재는 없다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혼자서 날 찾아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적룡 카루이스!”
그렇다.
붉은 정장의 남자는 로안의 서브 메이드 중 하나인 적룡 카루이스다.
그가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은 남자 메이드가 입는 서번트복.
그것을 입어도 메이드복으로서의 전투 증가 효과는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다.
천만다행한 일.
그렇지 않았다면 카루이스는 여성으로 변했어야 했을 것이다.
남성으로 여성 메이드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그짓만은 못한다. 풍룡 그놈은 미친놈이라서 가능하지만.’
풍룡 엘카리나.
그는 남성의 몸으로 여성 메이드복을 입는 만행을 서슴치 않고 있다.
심지어 이때가 기회라며 서큐버스 팬티를 뒤집어 쓰기도 하는 등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지경.
‘그놈 옆에 있으면 나도 같은 취급을 당하고 말 거야.’
본래 누구든 조니스를 찾으면 즉각 연락을 취해야 하지만 카루이스는 혼자서 한 번 붙어볼 작정이었다.
‘꼴은 우습지만 이 서번트복을 입고 있으니 전투력이 증가했다는 말이야.’
레벨 98의 월드 보스인 파멸마 조니스!
사실 그가 혼자서 덤비는 건 당연히 무모한 일이다.
그래도 그는 서번트복의 전투력 증가 효과를 믿고 일단 선빵을 날리고 봤다.
‘겁화의 브레스! 소멸의 폭!’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그가 날릴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시작부터 펼쳤다.
화아아아아아아!
굳이 본신으로 변하지 않아도 입바람만 불면 본신과 동일한 화염 브레스가 쏟아져 나간다.
그래서 더욱 불의의 기습이 가능하다.
적룡은 다른 이름으로 화룡(火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만큼 입에서 내뿜는 브레스의 파괴력으로 따지면 빙룡, 풍룡, 흑룡 중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다.
즉, 선빵을 성공만 시키면 아무리 파멸마 조니스라도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감히 혼자서 파멸마를 상대하겠다는 배짱을 부린 것은 바로 그때문.
그러나 파멸마 조니스는 이미 그러한 카루이스의 기습적인 일격을 훤히 눈치채고 있었다.
파스스스.
겁화의 브레스에 녹아 사라진 건 조니스의 환영일 뿐.
그는 멀쩡한 상태로 카루이스의 뒤쪽으로 이동한 후 손을 뻗었다.
검붉은 빛이 파동처럼 뻗어나가는 순간 카루이스의 몸에 거미줄같은 균열이 일더니 그 사이로 피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곧바로 거대한 적룡의 본신으로 변신해 순식간에 상처를 치료한 카루이스는 다시금 브레스를 날리며 조니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조니스는 그의 앞에 검붉은 차원벽을 생성시켜 그것을 튕겨버렸다.
“큭! 어리석은 놈! 이제야 알겠느냐? 넷이서 덤벼도 시원찮을 판에 혼자서 내 앞에 나타난 건 죽음을 자초한 것임을.”
그가 차원벽을 낫의 형태로 변환시켜 던지자 전방의 공간이 그대로 뒤틀렸다.
파괴력이 너무 강해 공간의 균형이 일시적으로 붕괴된 것이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카루이스의 거대한 몸체에 엄습했다.
“커어어어억!”
붉은 드래곤의 목이 절반 정도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곧바로 붉은 구름이 뭉클 그곳에 모여들며 사라진 몸체가 다시 나타났지만 카루이스는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 몸체를 비틀거렸다.
“제기랄! 어쩔 수 없는 건가?”
Lv95 월드 보스와 Lv98 월드 보스의 격차.
그것은 단순히 서번트복 하나 입어 늘어난 전투력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사실 아주 당연한 상식이지만 일단 뭐든 저지르고 보는 적룡 답게 그것을 몸소 체험해본 것이다.
당연히 상대 자체가 안 됐다.
이대로 몇 방 더 공격을 당하면 그는 파란만장한 용생의 종지부를 찍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는 로안의 서브 메이드가 되며 생겨난 능력 하나를 재빨리 펼쳐냈다.
[로안의 서브 메이드 카루이스가 동료 메이드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위급한 상황을 당했을 때 다른 메이드들에게 구조 요청을 하면 그들 모두의 앞에 즉각 게이트가 열린다.
이건 본래 드래곤들간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때 좌표를 알려주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는 비할 수 없이 신속하면서도 강력하다.
번쩍!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구조 요청을 보내자마자 멋들어진 흑발에 온통 흑색 일색의 메이드복을 입은 여성이 환영처럼 그 자리에 나타났다.
하얀 얼굴과 목, 일부 노출된 가슴과 팔을 제외하면 머리부터 치마까지가 완전히 검은 색.
그 아래 늘씬한 허벅지와 다리가 다시 백색으로 이어지다 맨 아래 흑색의 하이 힐이 자리잡고 있다.
흑룡 베라.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메이드복을 외형템으로 뒤집어쓴 채 나타난 것이다.
“파멸마 조니스! 명색이 월드 보스란 놈이 이런 곳에 웅크리고 있었던 거냐?”
순간 조니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외부적으로는 풍룡이 4대룡 중 가장 강하다고 하지만, 막상 싸워보면 단일 대상으로는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드래곤이 바로 흑룡 베라다.
요염해보이는 외모로 겉을 포장하고 있을 뿐.
“귀찮게 됐군. 하지만 너희 둘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 생각하느냐?”
순간 베라가 작고 가녀린 손을 들어 입을 막더니 우아하게 웃었다.
“푸웃! 설마 그럴 리가 있겠니? 나는 승산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단다.”
“뭐냐? 그 어색하게 우아한 자세는? 제발 아그너스 흉내내지 마라. 설마 베라 너마저 정신 줄이 나간 거냐?”
그 사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루이스가 못봐주겠다는 듯 인상을 썼다.
“나도 좀 편하게 살고 싶거든. 어때? 이러면 로안이 나를 진짜 메이드처럼 봐줄까? 솔직히 외모로는 내가 아그너스보다야 낫잖아.”
베라가 허리를 비틀며 요염하게 웃었다.
“크아악! 너까지 대체 왜 그래? 제발 본래 너의 모습으로 돌아와라.”
카루이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베라가 킥 웃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혹시 질투하는 거니? 귀엽다, 너!”
“우라질! 귀여워?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정말 나와 싸우자는 거냐, 흑룡?”
“흥! 감히 도전인가? 나 흑룡 베라는 지금껏 내게 도전해오는 녀석을 살려둔 적이 없다만.”
“크큭!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승부를 내겠다면 덤벼라.”
그러자 조니스가 울화가 치민 듯 양손에 차원력의 무기를 생성시켰다.
“크크큭! 드래곤들 중에 정신 줄이 제대로 박힌 것들이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만 감히 나 파멸마 조니스를 앞에 두고 농담을 주고 받다니! 그렇게 죽고들 싶으면 완전히 끝장을 내주마.”
바로 그때 조니스의 좌측에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뭘 그리 흥분하고 있는 건가? 전투 중에 흥분하는 건 패배의 지름길이라네.”
“네, 네놈은!”
머리에 서큐버스의 팬티를 뒤집어쓴 남자.
팬티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래가 가관이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조화된 전형적인 메이드복.
리본과 앞치마, 거기에 짧은 치마를 입은 채 짐짓 요염한 포즈를 취하며 실실거리고 있다.
색깔이 다른 찢어진 스타킹에 하이 힐까지······.
“크윽! 이 변태같은 놈!”
파멸마 조니스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인상을 확 구겼다.
그뿐 아니라 베라와 카루이스는 자괴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 정말 창피해 죽겠어.”
“내 말이 바로 그거다. 오죽하면 저놈을 부르기 싫어서 나 혼자 덤볐겠냐고.”
그들은 최대한 풍룡 엘카리나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채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엘카리나는 그들의 그런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짙은 미소를 피워냈다.
“다들 왜 그런 표정들인가? 너희들 표정만 보면 내가 꼭 변태인 것처럼 보인단 말이야.”
“그럼 네놈이 변태가 아니고 뭐냐?”
조니스는 가장 먼저 풍룡 엘카리나부터 처치하겠다는 듯 그를 향해 그 사이 생성한 차원력의 낫 2개를 동시에 날렸다.
콰가가가강! 콰가아아아앙!
공간이 뭉개지고 있다.
아까 카루이스가 당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
이는 그만큼 조니스가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카리나는 멀쩡했다.
그의 몸에서 피어난 핑크빛 배리어가 조니스의 공격을 받아낸 것이다.
그 모습에 조니스뿐 아니라 베라와 카루이스도 깜짝 놀랐다.
그들이 알던 엘카리나가 아니었으니까.
“후후후, 이제야 알겠는가? 고정관념을 깨트리면 신세계가 열린다.”
“신세계라고?”
“다시 말하지만 나는 변태가 아니야. 그저 실험정신이 좀 강한 것 뿐이지.”
순간 베라가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 쳤다.
“그 실험의 재료나 도구라는 게 어째서 항상 여성형 마족의 팬티나 가슴가리개냐고, 이 변태 녀석아!”
“그게 그리 중요한가?”
“그럼 뭐가 중요하다는 거지?”
“보다시피 서큐버스의 팬티와 메이드복, 그리고 찢어진 스타킹이 세트처럼 상승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이는 아주 새로운 발견이지.”
엘카리나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히든 세트!
카오니아 세계의 숨겨진 비밀 조합!
서큐버스의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표준형 메이드복에 찢어진 스타킹을 장착한 순간 강력한 방어력의 세트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조니스의 공격을 막아낼 만큼.
“그간 방어력하면 항상 빙룡 아그너스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풍룡 엘카리나가 방어력의 대명사로 불릴 것이다. 인간 각성자들은 나같은 존재를 탱커라고 하지. 이제 내가 탱커가 될 테니 너희 둘은 딜러가 되어 조니스를 공격해라.”
풍룡 엘카리나는 핑크빛 배리어를 앞세운 채 조니스를 향해 돌진했다.
이에 격분한 조니스가 다시 차원력의 무기를 날렸지만 엘카리나의 핑크빛 배리어를 뚫지 못했다.
물론 무기가 격돌할 때마다 엘카리나가 뒤로 쭉 밀려나긴 했지만 그는 무적의 방패를 앞세운 방패 용사처럼 다시 돌진해왔다.
“크으윽! 네놈의 그 배리어의 색깔부터 마음에 안 든다!”
“이게 바로 어그로라는 것이지. 어그로를 끄는 건 탱커에게는 필수적인 능력이다.”
“무슨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엘카리나를 둘러싼 핑크빛이 특히 거슬린 조니스는 배리어를 깨뜨리기 위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다 보니 풍룡 엘카리나도 배리어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베라와 카루이스를 노려봤다.
“뭣들 하는 거냐?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인가?”
그러자 베라와 카루이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니스의 배후를 공격했다.
엘카리나의 말대로 어그로가 그에게 집중되어 있다보니 베라와 카루이스는 오직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베라는 흑색의 마검(魔劍)을 꺼내 쥔채 무시무시한 검격을 날려보냈고, 카루이스는 겁화의 브레스를 다시 뿜어댔다.
그러자 조니스는 결국 풍룡을 공격하는 걸 포기하고 포위망을 벗어났다.
“아직 내 힘이 모두 회복되지 않아 오늘은 이만 간다만. 두고보자, 정신 줄 나간 드래곤 놈들! 조만간 모조리 죽여주마!”
“도망칠 수 있다 보는가?”
세 드래곤은 즉각 조니스를 추격했다.
“믿을 수 없군.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힘이 저 정도라니!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아그너스는 왜 안 오는 거냐?”
“그러게. 아그너스만 있다면 저놈이 쉽게 빠져나가기 힘들었을 텐데.”
[로안의 서브 메이드 베라가 메이드 아그너스에게 참전을 요청합니다.]
이 또한 메이드가 되며 생겨난 능력.
이번에는 베라가 아그너스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바로 그 순간 레온 제국의 황궁.
해먹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로안의 옆에서 아그너스는 조용히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서있는 그녀의 앞에 홀연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 부른 이유가 뭐야?”
다름아닌 네르나스다.
패리드 호수에서 휴가 중이던 그녀에게 갑자기 아그너스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중요한 일이야.”
아그너스가 부채를 쥔채 네르나스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뭐지?”
“내가 돌아올 때까지 주인님 옆에서 이 부채를 부쳐줬으면 해서.”
“미쳤구나. 내가 그딴 짓을 할 것 같아? 로안이 명령을 내린다면 죽지 못해 하기야 하겠지만.”
그러자 아그너스가 탄식했다.
“언니도 주인님의 메이드잖아. 이런 일은 자발적으로 좀 해 봐.”
“그놈의 주인님 소리 좀 그만 하지 못하겠니? 무엇보다 난 지금 휴가 중이야. 또 다시 이런 쓸데없는 일로 날 부르면 용서하지 않겠다.”
네르나스가 엄하게 경고하고 돌아서는 찰나 뭔가 물컹한 것들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것이 촉수 슬라임인 걸 알아본 네르나스는 흠칫했다.
“너! 너! 또 무슨 짓이야?”
아그너스가 싸늘히 웃었다.
“흥! 말로 하면 듣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그녀가 생성한 끈적끈적한 슬라임이 여러 가닥의 촉수로 나뉘어 네르나스의 몸을 휘감아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으! 이 끈적끈적한 감촉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 너! 정말 후환이 두렵지 않니?”
“후환? 언니 말대로 난 오늘만 사는 드래곤이야. 오늘은 주인님께서도 주무시고 계시니 아주 끝까지 가보는 게 어때?”
아그너스가 광기어린 눈빛을 번쩍이는 순간 촉수 슬라임들이 네르나스의 메이드복을 마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네르나스가 기겁하며 외쳤다.
“자, 잠깐!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할게. 할 테니까 제발 이것들 좀 없애줘.”
그말이 끝나는 순간 촉수 슬라임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그너스가 빙긋 웃으며 부채를 건냈다.
“그러게 진작 말을 잘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러자 네르나스가 부채를 받아들고 치욕어린 표정을 지었다.
“닥치지 못해?”
“훗, 그럼 주인님 부채 시중 잘 부탁해.”
“언제까지 이짓을 하라는 거야?”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언니에게 맡기고 가지만 그 일은 나의 기쁨이거든.”
그 말과 함께 아그너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네르나스는 넋빠진 표정으로 로안을 향해 부채를 흔들기 시작했다.
살살.
살랑이는 바람에 기분이 좋은 듯 로안은 편히 잠들어 있다.
그러다 일순 로안이 눈을 떴다.
“아니,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네르나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보다시피 너의 잠자리 부채 시중 들고 있잖아.”
“휴가 중인데 자발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고. 아그너스가 시켰나보군요. 찢겨진 옷을 보니 촉수 슬라임으로 협박을 받은 것 같고.”
말끔한 걸로 갈아입을 수 있었으면서도 그꼴로 있는 건 다분히 자신이 고생 중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동생에게 학대받고 있는 불쌍한 언니 컨셉.
“잘 아는구나. 내 신세가 그렇지 뭐.”
“그럼 하던거 계속 해요. 난 더 잘 테니까.”
로안은 눈을 감았다.
이미 잠은 완전히 깨어 있지만 네르나스를 이런 식으로 부려먹는 재미가 쏠쏠해 그대로 누워 있는 중이다.
‘부채질은 네르나스가 훨씬 잘하네.’
성의없이 흔들고 있는데도 아그너스가 할 때보다 오히려 더 편안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기 싫어해서 그렇지 일단 하면 무조건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는 존재.
그녀가 달리 최강의 드래곤이 아닌 것이다.
마인드만 아그너스화되면 최고겠지만 그걸 기대하긴 무리다.
‘그보다 드래곤들이 파멸마 조니스와 한 판 붙은 것 같은데 결과가 궁금하군.’
이변이 없는 한 네 드래곤이 합세하면 파멸마 조니스에게 최소한 지지는 않는다.
스으으으!
그때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
눈을 떠보니 달이 흑색으로 변하고 주위에 하얀 테두리가 둘러져 있다.
‘다크 문.’
악마 각성자들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달이다.
다크 문이 떠 있는 동안 그들은 죽지 않으니까.
게다가 엄청나게 강해진다.
따라서 다크 문이 뜨면 놈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공격해온다.
‘놈들의 제거 1순위는 나겠지.’
대전장에 있던 놈들도 저 어둠의 다크 문을 타고 순식간에 이동해올 것이다.
본래라면 가장 긴장했어야 할 순간이지만 로안은 담담했다.
굳이 드래곤 메이드들을 불러 호위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
환생사 전용 능력.
악마 모드.
그 역시 지금은 악마니까.
스스.
다크 문이 주는 어둠의 마력이 로안의 몸을 향해서도 폭발적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츠츠츠츠!
로안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휘도는가 싶더니 그의 어깨에 커다란 흑색의 날개가 생겨났다.
그뿐이 아니다.
[다크 문의 마력에 의해 당신의 메이드 네르나스가 다크 메이드로 전환됩니다.]
다른 드래곤 메이드들과 달리 로안과 레벨이 일체화되어 있는 최상급 메이드 네르나스.
뜻밖에도 그녀 또한 어둠의 마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