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물이 왕이 되면 벌어지는 일 (2) >
성녀(聖女).
각 여신마다 오직 한명만 존재하는 신전의 최상위 존재.
베일에 쌓여있으며 평생 신전에 소속된 성지(聖地)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전해진다.
성녀 아르시안도 그중 하나.
심지어 아프릴리스 신전의 사제들조차 그녀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고 했다.
성녀 아르시안이 머무는 성지에는 사제들도 절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성녀 아르시안이 성지 밖으로 나와 여신 아프릴리스의 뜻을 전했다.
새로운 국왕의 지명!
극히 이례적인 일로 레온 왕국의 모든 대신들과 귀족들, 평민들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은 잔뜩 들떠 있었다.
신의 특별한 가호와 은총을 받은 새로운 국왕 로안의 등장!
바로 그를 통해 레온 왕국이 전에 없던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리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 * *
디온 성 로안의 집무실.
다른 모든 대신들은 밖에서 대기하고 로안과 성녀 아르시안은 독대 중이었다.
카오니아 세계관에서 성녀는 권력은 없지만 그 지위는 국왕과 거의 동격으로 인정해준다.
그런만큼 로안과 성녀의 대화에 마쿠스 공작이나 베안트 공작 같은 대신들조차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국왕과 성녀의 대화는 곧 국왕과 신의 대화일 수도 있는 터라 더더욱 접근이 불허했다.
“후! 그리 된 것이었군요.”
로안은 성녀 아르시안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들었다.
그녀가 매우 조곤조곤하면서도 상냥하게 모든 정황을 설명해주었으니까.
카라스 왕가의 패망과 더불어 나타난 숨겨진 재앙인 파멸마 조니스까지.
그리고 여신 아프릴리스가 새로운 국왕으로 로안을 지명한 것도.
“아프릴리스 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여야죠.”
로안이 흔쾌히 끄덕이자 아르시안이 그럴줄 알았다는 듯 밝게 미소지었다.
“아프릴리스 님의 말씀대로군요. 대군 전하께서는 별 고민없이 국왕의 보위에 오르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별 고민없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고인물인 로안은 일국의 국왕 정도야 수도 없이 많이 해봤으니까.
제국의 황제는 물론이고 통일 대륙의 황제를 한 것이 몇 번인가?
그래서인지 느닷없이 주어진 국왕의 보위이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로안은 다른 사람들은 감히 상상조차 못한 특별한 비밀도 하나 알고 있다.
‘성녀들은 여신들의 화신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즉, 이 앞의 성녀 아르시안이 아프릴리스의 화신, 다른 말로 아바타 혹은 분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적어도 카오니아 세계관 속의 성녀는 그렇다.
그래서 성녀들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
여신들이 대부분 화신으로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니까.
간혹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건 해당 여신과의 호감도 즉, 친밀도가 거의 극에 달했을 때다.
그때 여신들이 간혹 성녀로 나타나 많은 도움을 베풀어 준다.
버프를 준다거나 새로운 능력을 주기도 하고, 동료가 되어 함께 파티 사냥을 할 때도 있다.
심지어 이벤트도 발생한다.
그건 여신들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평화를 사랑하는 여신들이 성녀로 나타날 땐 풍요와 관련된 이벤트가 발생하고, 전투를 좋아하는 여신들이 성녀로 나타나면 전투 관련 이벤트가 생겨나는 식이다.
‘그런데 나와 아프릴리스의 친밀도가 그렇게 높아졌나?’
당연히 아니다.
얼마전 초대형 균열의 핵을 날림으로 인해 밑바닥까지 추락했다가 간신히 미움받지 않을 정도로만 회복한 상태로 알고 있다.
‘친밀도 때문이 아니라면.’
해당 여신이 모종의 목적을 가진 경우라고 봐야 한다.
‘이때는 모르는 척해야 해.’
정체를 숨기고 있는 성녀가 곧 여신의 화신임을 알고 내색을 하면 절대 좋은 꼴을 못본다.
게임에서 그러다 해당 여신의 미움을 사서 피곤해진 적도 있으니까.
‘날 국왕으로 지명했다면 그냥 사제들에게 계시를 내려도 될 것을 굳이 성녀 상태로 나타난 이유가 뭘까?’
그때 아르시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군 전하께 한 가지 특별한 요청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입니다. 어떤 요청인지 모르지만 부담갖지 말고 말씀해 보십시오.”
로안은 긴장했다.
드디어 본론인가 보다.
성녀 아니, 아프릴리스가 화신 상태로 나타난 이유.
그것이 바로 이 요청에서 드러날 것이다.
‘토실이를 성펫으로 달라고 하진 않을 텐데.’
지난 번에 아프릴리스가 직접 계시 알림을 통해 알려줬다.
토실이를 성펫으로 빼앗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의 맹약을 깨고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릴리스 님께서는 대군 전하께서 다스릴 새로운 레온 왕국에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고 싶어하시죠. 그러기 위해서 제가 부득불 칩거를 깨고 성지를 나선 상황이에요.”
“저로서는 든든한 일입니다, 아르시안 님.”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만 왕궁에 제가 머물 수 있는 곳을 내주셨으면 해요. 제가 왕궁에 머물게 되면 레온 왕국 영토에 풍요의 축복이 임하게 되어 산물이 풍부해지게 될 것입니다.”
풍요의 축복!
이건 거의 대박급 축복이다.
왕국의 영지들 중 랜덤으로 발생하는 이벤트로, 최소 하나 이상의 영지, 운이 좋으면 왕국 전체 영토에 풍작이 발생하기도 한다.
강과 호수는 물론이고 영해에 해당하는 바다에서 어획량이 증가하고, 산에서는 약초나 과실이 풍부해지며 숨겨져 있던 진귀한 광산도 드러난다.
심지어 출산율도 증가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가축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여신과의 친밀도가 극에 달해야 해주는 건데.
아무튼 로안은 반색했다.
“그럼 신전을 세워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오. 신전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그냥 작은 집 한 채만 내주시고 대신 그곳을 성지로 지정해 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왕궁에 있는 별궁과 같은 곳을 하나 내주면 될 것이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내줘야 한다.
여신 아프릴리스가 내리는 풍요의 축복은 받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아르시안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능하다면 매일 자주 성지에 토실이와 몰캉이를 들여보내 주세요.”
“제가 왕궁에 있을 때는 가능하지만 출정 중일 때가 많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왕궁에 계실 때만이라도 부탁드려요.”
“그런데 왜 그 녀석들이 필요한지 여쭤도 될까요?”
“아프릴리스 님의 뜻이에요. 성지에 머물다 가면 그 아이들 뿐 아니라 전하께도 아주 좋은 일이 생기죠.”
“좋은 일이요?”
“그곳에 있는 시간 만큼 적지않은 경험치를 얻게 되거든요. 그만큼 펫들이 강해지게 되며 동시에 전하께도 상당히 큰 경험치가 쌓이게 됩니다.”
“펫들이 성지에 있기만 해도 저의 경험치가 오른다고요?”
“네. 바로 그거예요. 물론 전하께서 레온 왕국에 머물러 계실 때에 한합니다. 대전장에 가 계시거나 다른 왕국에 있을 땐 효과가 미치지 않아요.”
요즘들어 펫들의 레벨 올리기가 쉽지 않은데 아프릴리스가 알아서 높여준다는 얘기다.
거기에 겸사겸사 로안도 경험치가 오르게 되고.
하지만 그 효과를 얻으려면 대전장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얘기인데.
“기왕이면 제논과 귀마도 좀 부탁하겠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성향이 좀 다른 펫들이지만 전하의 펫이라면 모두 성지로 들어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많은 이들이 전하의 백성이 되고자 모여들게 되고 레온 왕국은 카오니아 대륙에서 가장 안전하고 부강한 나라가 될 거예요.”
“그리 된다면 모두 아프릴리스 님 덕분일 것입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접대 멘트였지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르시안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피어난다.
그러던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실은 아프릴리스 님이야말로 다른 어떤 여신들보다 백성들이 가장 편안한 삶을 누리길 원하는 분인데, 백성들은 그 사실을 잘 몰라준답니다. 모두 아이템과 레벨에 급급해 과격하고 지극히 파괴적인 성향을 가진 여신만을 추앙하고 있죠. 아프릴리스 님께선 그것을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고 계신답니다.”
과격하고 지극히 파괴적인 성향을 가진 여신의 대명사는 바로 트렐라일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로안도 아프릴리스보다는 트렐라를 추종하는 편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계획을 품고 있다.
앞에 있는 아프릴리스의 화신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앞에서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아프릴리스의 마음을 상하게 할만큼 고지식하지는 않다.
‘역시 그거였군.’
그리고 로안은 비로소 아프릴리스의 뜻이 뭔지 짐작했다.
느닷없이 주어진 여신의 호의 뒤에 숨어 있는 목적!
그것은 바로 트렐라 견제다.
요즘들어 각성자들이 둘 이상만 모여도 다들 대전장, 대전장 하고 있다.
코인도 다들 트렐 코인에만 집착하고 있고.
반면에 아프릴 코인의 가치는 갈수록 추락 중이다.
사람들이 트렐 코인을 찾을수록 자연스레 그들의 마음엔 여신 트렐라를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반면에 아프릴 코인을 하찮게 생각하면 할수록 여신 아프릴리스에 대한 흠모는 그들의 마음 속에서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이번 기회에 나를 통해 레온 왕국을 태평성국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대전장보다는 레온 왕국을 더 많이 찾게 만들고 자연스레 아프릴 코인의 가치도 높이겠다는 뜻이야.’
척하면 착이라고 로안은 아르시안과의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아프릴리스의 이 숨은 속뜻을 짐작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고인물이지.
달리 고인물이 아닌 거다.
그리고 고인물은 당연히 이런 걸 오히려 기회로 삼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아무리 레온 왕국의 인기도가 높아져도 대전장을 능가하지는 못해.’
그래도 그간 바닥에 추락해 있던 아프릴 코인의 가치가 다시 오르기 시작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슬슬 신계의 경쟁도 본격화되는 건가?’
여신들간의 보이지 않는 인기도 경쟁!
다른 여신들이 별짓을 다해봤자 결국 트렐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여신들을 무시하거나 홀대했다간 아주 피곤한 일이 벌어진다.
‘여신이 성녀가 되어 찾아오는 기회는 절대 흔치 않아. 지금 아프릴리스의 마음을 최대한 얻어놔야 한다.’
곧바로 로안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아르시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타깝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저는 평화를 사랑하는 아프릴리스 님에 대해서 항상 존경하고 마음 속으로 깊이 흠모하고 있죠. 토실이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때때로 사료까지 챙겨주시는 자상함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리 생각해요?”
“물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프릴리스 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할 수 있을까 고민도 해봤지만 하찮은 인간인 저로서는 고귀하신 여신께 저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이군요. 대군 전하께서 그리 깊이 아프릴리스 님을 흠모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입니다. 저의 마음엔 항상 아프릴리스 님에 대한 깊은 흠모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프릴리스 님께서 그것을 모르고 계실 뿐이죠.”
순간 아르시안이 감동했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사실 겉만 아르시안일 뿐 실제는 여신 아프릴리스다.
여신을 감동시키면 당연히 좋은 일이 발생한다.
“로안 루페스 대군 전하!”
아르시안이 손으로 눈물을 닦더니 로안을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네, 아르시안 님.”
“아프릴리스 님을 향한 당신의 그 마음 부디 변치 말아주세요.”
“네, 물론입니다.”
그러자 아르시안이 일어나 로안을 향해 다가오더니 머리에 손을 얹었다.
신성한 위엄이 느껴져 로안은 항거할 수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자 신비한 빛과 함께 알림이 들렸다.
[여신 아프릴리스가 축복을 내립니다.]
[당신에게 군주의 매력이 생성되었습니다.]
[군주의 매력]
-분류 : 능력
-등급 : 신화
-설명 : 여신 아프릴리스가 내린 특별한 축복으로 이 축복을 받은 자는 군주로서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백성들의 민심 및 각종 인재들의 충성심을 얻기 수월해진다.
-조건 : 군주의 신분 획득 시 자동 발동. 레벨이 높을수록 매력도 높아진다.
패시브 스킬이다.
‘오!’
이게 있으면 왕으로서의 통치가 더욱 편해질 것이다.
“저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을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충분히 자격이 있답니다. 이제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나가시어 국왕의 보위에 오르시겠다는 전하의 뜻을 밝혀주세요.”
“예. 물론입니다.”
곧바로 성녀 아르시안과 함께 집무실을 나가는 로안은 왠지 뿌듯한 마음에 가슴이 벅찼다.
‘이제 내가 현실에서 왕이 되는구나.’
뭐 패리드 호수의 주인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왕은 결코 허접한 존재가 아니다.
특히나 고인물이 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에게 알게 해줘야 하겠지.
“오오! 대군 전하가 나오십니다!”
그때까지 밖에서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대신들의 눈이 빛났다.
“대군 전하!”
“속히 뜻을 밝혀주시옵소서!”
로안은 끄덕였다.
“그대들의 뜻을 받아들이겠다. 단, 조건이 있다. 이것을 그대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보위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마쿠스 공작과 베안트 공작을 비롯한 모든 대신들이 극도로 긴장했다.
“경청하겠사옵니다, 전하.”
“전하의 어떤 뜻이든 신들은 반드시 따를 것이옵니다!”
그러자 로안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위에 오르는 순간 레온 왕국은 더 이상 왕국이 아니다.”
“하오시면?”
“난 왕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황제가 될 것이다.”
“저, 전하!”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은 로안이 설마 이같은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사르곤 제국이나 한 제국이 처음부터 제국이었던 것은 아니지. 나는 레온 제국을 그 두 제국을 능가하는 최강의 국가로 만들 생각이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순간 마쿠스 공작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전하! 아니, 폐하! 신은 무조건 폐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그는 평생을 약소국의 무장으로 주변 강대국과 두 제국들의 눈치를 보며 지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평생의 숙원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그는 레온 왕국이 제국이 될 것이라고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왕국이지만 제국도 함부로 못하는 강대국이 되길 바랐을 뿐이다.
“소신도 로안 폐하의 뜻에 무조건 따르겠사옵니다!”
그때 씩씩하게 외치는 청년.
다름아닌 용사 헤로스 백작이었다.
그 또한 레온 왕국이 강대국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으니까.
그러나 베안트 공작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제국이 되면 국가의 위상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그리 못하는 이유가 있다.
제국으로 선포하는 순간 인접국에서 곱지 않게 바라볼 뿐 아니라 사르곤 제국은 물론 한 제국에서도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지금과는 비할 수 없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오게 될 것이다.
심지어 군사적 도발도 말이다.
전대 국왕 카라스 2세의 무능함으로 인해 레온 왕국의 국력은 그리 높지 않다.
이 상태로 제국이 된다면 국가적 고립을 초래해 더욱 국력이 쇠퇴할 우려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온 왕국이 제국이 되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 없는 망상인 것이다.
그들은 성녀 아르시안이 로안을 말려주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르시안은 그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로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건 바로 무언의 긍정.
그녀 또한 로안의 뜻과 함께 한다는 얘기다.
바로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무심코 하늘을 쳐다본 베안트 공작은 경악했다.
‘저, 저것은 설마?’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존재들.
갑자기 어두워진 건 그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서다.
“드, 드래곤이!”
“하늘에 드래곤입니다!”
그 사이 다른 사람들도 하늘을 쳐다보고 대경실색했다.
신비한 은빛의 드래곤을 필두로 핏빛의 섬뜩한 비늘을 가진 드래곤, 가히 무저갱과 같은 암흑의 기운으로 뭉쳐있는 흑색의 드래곤, 마지막으로 거대한 구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그 중심에 오연히 떠있는 폭풍의 드래곤.
전설이 말하는 빙룡, 적룡, 흑룡, 풍룡이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진짜 경악할만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은빛의 드래곤이 아래로 급강하하며 점차 작아지더니 신비로운 은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으로 변했다.
우아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메이드복을 입은 채로 그녀는 로안의 앞에 내려서더니 그대로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메이드 아그너스가 주인님을 뵈어요.”
그말과 함께 그녀는 로안의 손등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