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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으로 독존한다-163화 (163/240)

< 최강 드래곤의 마지막 만찬 (1) >

레이는 자신을 포위한 흑색 복면인들을 보면서도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번쩍!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그녀를 향해 접근하려던 암습자들의 시야에 갑자기 빛의 폭탄이 터지는 듯 엄청난 광채가 발산되었다.

‘으윽!’

‘큭!’

눈을 감아도 파고드는 가공스러운 빛의 폭풍!

그것은 예측하지 못한 기습이었다.

암살자들은 일시적으로 시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시각을 회복했을 땐 레이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도주했습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적의 시력을 제압하면 즉각 반격을 하는 게 정상이다.

마법사라면 당연히 그런 충동을 이기기 어렵다.

일시적으로 무력한 상대들을 향해 강력한 마법을 쏘아내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테니까.

물론 암살자들을 상대로 그런짓을 벌이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동귀어진의 수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목표 대상을 척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도망가버리면 그런 여지조차 사라진다.

“어디로 갔는지 종적조차 묘연하군.”

“아마도 디온 성으로 갔을 것입니다. 마쿠스 공작이 오기 전에 서두르면 척살 가능합니다.”

“실패는 곧 죽음이다. 전원 몰살을 각오하고서라도 임무를 완수한다.”

“예!”

그런데 그 순간 들려오는 창노한 음성.

“갈 것 없다. 너희들은 이미 실패했으니까.”

짙푸른 검신의 대검을 손에 쥔 노인.

마쿠스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백색 로브의 레이가 오연히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암살자들이 놀랐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그러자 마쿠스 공작이 차갑게 웃었다.

“어리석은 놈들이군. 너희들은 내가 이곳에 왜 와있다 생각하느냐?”

“그럼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 예측을 하고 있었던······.”

암살자 두목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번쩍이는 검광과 함께 마쿠스 공작의 대검이 그의 허리를 갈라버렸으니까.

“간악한 사르곤 제국 놈들! 조만간 레온 왕국의 군대가 너희들을 짓밟을 날이 올 것이다.”

마쿠스 공작은 단 한 명의 암살자도 남기지 않고 도륙했다.

그 모습을 레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담담히 지켜봤다.

마쿠스 공작은 그런 손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할애비가 손을 놓고 있었는데도 네가 혼자서 잘 성장하다니 장하구나.”

“스스로 성장하도록 일부러 방치하신 것 알고 있어요.”

“기특하게도 나의 뜻을 알았느냐? 남의 도움으로 쉽게 성장한 이들은 나중에 혼자서 커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앞으로는 파티 사냥을 통해 협력하는 법도 배우도록 해라.”

“네, 할아버지.”

마쿠스 공작은 잠시 망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로안과 자주 파티를 하도록 하여라.”

“그는 매우 바빠서 제가 공연히 민폐를 끼칠까 두려워요.”

“민폐라 해도 좀 붙어다니거라. 앞으로 세상은 그 녀석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녀석이 옆나라 공주와도 제법 친해보이던데 정말 두 눈 뜨고 빼앗길 셈이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쯧, 답답하구나. 할애비가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다니 말이야.”

순간 레이가 민망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저는 솔직히 자신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으냐?”

“그 반대겠죠. 그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 같아요.”

“시도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겠다는 거냐?”

“시도도 포기도 안 해요. 그냥 전 저의 길을 갈 거예요. 그래서 저의 능력으로 가치를 증명할 생각이예요.”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거지?”

“최고의 마법사가 될 거예요.”

“그럼 그 녀석이 널 선택할 거라고 보느냐?”

“모르죠. 그러나 꼭 그에게 선택받으려고 마법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순수하게 마법사가 좋아서다.

그 능력을 통해 악마들을 처치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협조할 것이다.

현재 그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런 손녀의 마음을 읽은 마쿠스 공작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원 녀석이 사제도 아니고. 무슨 욕심이 그리 없느냐? 아무튼 걱정말고 이 할애비에게 맡겨라.”

마쿠스 공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잊었느냐? 너는 로안에게 그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선물을 했다.”

“제가 언제요?”

“토실이.”

“아.”

“네가 아니었다면 그 녀석이 토실이를 얻기란 불가능했지.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도록 해라.”

“근데 전 토실이가 행복해하는 것으로 충분해요.”

“으이그! 내가 정말 네 녀석 때문에 못 살겠구나.”

마쿠스 공작은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쳤다.

* * *

“실패했습니다.”

“무엇이!”

“마쿠스 공작이 도시 헤르바에 오자마자 즉각 다시 라고스 영지로 복귀했습니다. 암살조들의 연락이 끊긴 것을 보니 지금쯤 모두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흑색 복면인의 보고에 멜더 후작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토록 자신있다고 말하더니 꼴이 좋군. 사르곤 제국의 힘이 고작 이 정도뿐인 건가?”

“이번 일은 할 말이 없습니다만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습니다. 예정대로 그들을 역모죄로 몰아붙이십시오. 거기에 추가로 사르곤 제국 황제 폐하를 능멸했다는 죄도 추가하시고요.”

그러자 멜더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하긴 그래야 제국에서 개입할 명분이 생기겠군. 하나 이 일은 신속함이 생명인데 현재 이곳에 있는 제국군은 고작 수십 명. 그 정도로 마쿠스 공작과 베안트 공작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해.”

“곧 적어도 3만 이상의 병력이 도달할 것입니다.”

“지금 3만이라 했나?”

멜더 후작이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흑색 복면인이 끄덕였다.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목표를 제거할 때까지 무제한 투입이 제국의 방침이니까요.”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군대를 이동시킨다는 건가?”

수만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을 공간이동 마법진으로 이동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심지어 최근에는 소규모 공간이동조차 도처에서 발생하는 차원의 균열로 인해 원할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즉, 3만이 넘는 대규모 병력이라면 육로나 수로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 많은 병력이 사르곤 제국에서 육로로 이동해 오려면 몇 개월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지 않나?”

“3일도 되지 않는 단기 경로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가만! 설마 그럼 대전장의 게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흑색 복면인이 끄덕였다.

“그것도 라고스 영지 남부 미티안 영지에 있습니다.”

“미티안 영지라면 알레노그 자작의 영지인데 그곳에 대전장 게이트가 생겨났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네만.”

알레노그 자작은 멜더 후작이 뒤를 봐주는 인물이다.

“예. 아직 알레노그 자작은 파악하지 못했더군요. 쉽게 접근하기 힘든 험지라서 말입니다.”

“험지라? 그럼 제국군도 이동이 어렵지 않겠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오히려 북부 라고스 영지로 향하는 곳은 숲으로 이어져 있어 이동이 수월한 편이죠.”

“오오! 그럴수가!”

멜더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차피 제국군의 목적은 라고스 영지를 쓸어버리는 것이니 잘 된 것이군.”

“로안이라는 놈이 아무리 대단한 균열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의 영지를 상대로 균열을 날리지는 못하겠지요.”

흑색 복면인의 두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

“모든 일보다 라고스 영지를 쓸어버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로안이라는 놈만 사라지면 베안트 공작이나 마쿠스 공작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마쿠스 공작은 왕국 제일의 검사라 불리는 자야. 만만하게 봐서는 안 돼.”

“어차피 한 배를 탈 운명입니다.”

“마쿠스 공작이 배신이라도 한다는 건가?”

“자세한 건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이건 일급 기밀 사항이니 멜더 후작님만 알고 계시고, 왕궁에 가셔서 제가 알려드린 대로 중립을 취하고 있는 귀족들을 포섭해 명분을 만드는데 치중하십시오.”

“알았네. 그건 염려말게.”

곧바로 멜더 후작은 왕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누나 즉, 현 레온 왕국 왕비 안나의 알현을 청했다.

“멜더 후작이 왕비마마를 뵈옵니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한 것인가, 멜더 후작.”

“긴히 아뢰올 말이 있사오니 주위를 좀 물러주시옵소서.”

그러자 안나는 시녀와 시종들을 물러가게 했다.

“되었느냐? 이제 말해보아라.”

“누님, 이제 때가 왔습니다.”

멜더 후작이 눈을 반짝였다.

“때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곧 사르곤 제국의 수만 군사가 와서 라고스 영지를 쓸어버릴 것입니다.”

멜더 후작은 아까 들은 얘기를 왕비 안나에게 해주었다.

안나는 경악했다.

“그런 일이! 그게 가능한 것이냐?”

“흐흐, 그렇습니다. 로안뿐 아니라 눈엣가시같은 베안트 공작과 마쿠스 공작도 모두 정리가 될 것이옵니다.”

안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말을 듣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것 같구나.”

“이제 누님만 결단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안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알고 있다. 내가 구해오라는 약은 어찌 되었느냐?”

“여기 있사옵니다.”

멜더 후작은 작은 약봉지 하나를 왕비 안나에게 건넸다.

여성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나 남성에게는 심장에 치명적인 무리를 주는 약.

“그것을 입안에 삼켜두시면 3일 동안 누님의 침에 그 약기운이 녹아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3일 안에 국왕과 입맞춤을 한번이라도 하게 되면 국왕은 근일내에 아주 자연스럽게 심장마비로 붕어하게 된다.

“약효는 틀림이 없겠지?”

“사르곤 제국의 암부에서 극비리에 제조한 것입니다. 효과는 확실하다 하였습니다.”

“수고했다. 훗, 하긴 이제 허울 뿐인 왕을 갈아치울 때도 됐지.”

“왕세자 조니스 전하라면 아주 훌륭한 국왕이 되실 것입니다.”

“물론이다.”

“두 공작이 사라지면 공작의 자리는 저에게 주시는 것 잊지 마십시오, 누님.”

“염려마라. 그 두 놈의 영지 또한 몰수해 네게 넘겨주마.”

“흐흐, 저는 누님만 믿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라.”

“예, 마마.”

그렇게 멜더 후작이 물러가자 왕비 안나는 즉각 약봉지 안의 약을 입안에 넣고 삼켰다.

‘이 일은 굳이 지체할 이유가 없지.’

그녀는 곧바로 국왕 카라스 2세를 찾아갔다.

“왕비마마 드시옵니다, 폐하.”

“들라해라.”

카라스 2세는 왕비 안나가 들어오자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와 상의할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소.”

“말씀하소서, 폐하. 신첩은 경청하겠나이다.”

“짐이 심히 고민해보았는데 그 로안이라는 녀석을 굳이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고 차라리 끌어안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말이오.”

“끌어안는다니 그게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비트리와 그 녀석을 맺어줄까 하오.”

순간 안나의 두 눈이 커졌다.

현재 카라스 2세와 그녀의 사이에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왕세자 조니스와 공주 비트리.

“로안을 부마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그로 하여금 마쿠스 공작과 베안트 공작을 견제하게 하는 것이오. 어떻소? 짐의 생각이?”

안나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정말로 카라스 2세의 뜻대로 된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놈은 너무 위험해.’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상책이 존재한다.

그런 속내와 달리 안나는 활짝 웃었다.

“아주 묘책인 듯합니다. 신첩은 폐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역시 왕비시오. 짐의 뜻을 바로 알아주다니 말이오.”

그는 안나가 사랑스러운지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안나는 자연스레 그의 품에 안기며 입맞춤을 했다.

행복해하는 표정과 달리 그녀는 속으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안 됐지만 당신의 시대는 갔어.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야. 나의 아들 조니스에 의해서.’

* * *

패리드 호수의 백사장.

조촐하게 시작했던 강무진과 로안의 삼겹살 소주 파티는 네르나스를 비롯한 월드 보스들의 합류로 제법 흥겨워진 상태였다.

“다들 한 잔씩 받아라.”

“예, 네르나스 님!”

“헤헷! 존경하는 네르나스 님께 술을 받다니 정말 영광이옵니다.”

케르베로스와 바르투스는 네르나스에게 정말 깍듯했다.

‘위계 질서는 확실하군.’

그보다 로안은 슬슬 고기만 먹으니 물렸다.

‘요건 상추에 싸먹어야 제맛인데 말이야.’

다행히 쌈장은 있었다.

강무진이 아공간에 챙겨왔으니까.

즉, 모두들 삼겹살이 익으면 쌈장에만 찍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아쿠아에게 구해보라고 할까?’

그때 로안은 토실이가 회복의 풀밭을 펼쳐놓고 놀고 있는 장면을 발견하고는 미소 지었다.

“토실아~! 이리 와봐.”

그러자 토실이가 폴짝 뛰어 왔다. 그 뒤로 몰캉이도 따라왔다.

“저기 풀들 좀 종류별로 씻어와라. 고기 싸먹으려고 하거든.”

회복의 풀밭의 풀들은 모두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향긋하기도 해서 쌈으로 먹기에 제격이다.

끄덕.

토실이는 알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풀밭에 가서 먹기좋은 풀을 뜯었다.

그리고 몰캉이와 함께 호숫가에 서서 그것들을 한장 한장 정성껏 씻기 시작했다.

토실이는 앞발로 한장씩 든 채 물에 좌우로 흔들고, 몰캉이는 입으로 한 장씩 물어 열심히 흔들어댔다.

로안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뭐 저렇게 귀여운 녀석들이 있을까?

주인 먹으라고 쌈 채소를 뜯어 씻고 있는 펫들이라니.

“어휴! 펫들이 주인 잘못만나 고생하는구나. 악덕 주인이 따로 없네.”

네르나스의 말이었다.

하여간 예쁘게 봐줄 수가 없다.

꼭 분위기를 망치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드래곤이니까.

“쌈 생각이 없으신가 보군요.”

“아니, 먹어야지. 쌈 채소에 삼겹살을 싸먹는 게 얼마나 맛있는데.”

“어차피 먹을 거면서 나만 나쁜 놈 만들면 좋습니까? 그리고 전 악덕 주인 아닙니다.”

그 사이 토실이와 몰캉이가 깨끗하게 씻은 쌈 채소 한아름을 가지고 왔다.

“수고했어. 자! 요건 머메이드들이 만든 맛있는 영양 사료다. 맛있게 먹어라.”

로안은 최근에 머메이드들에게 구입한 사료 한 봉지를 뜯어 토실이에게 건넸다.

그러자 녀석은 그걸 들고 회복의 풀밭으로 가서 몰캉이, 제논 등과 함께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

그 사이 로안 등도 쌈을 싸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호! 역시 삼겹살은 쌈에 먹어야 제맛이지.”

“정말 맛있습니다, 네르나스 님. 흐흐.”

네르나스는 물론이고 강무진과 케르베로스, 바르투스도 신선한 쌈 채소의 등장에 반색했다.

“어? 소주가 떨어졌네?”

네르나스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강무진이 씩 웃으며 아공간에서 소주 5병을 꺼넸다.

“염려마십시오. 소주는 충분히 있습니다.”

“오오!”

모두의 표정이 환해졌다.

로안은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 날 새겠네. 난 그만 일어나자.’

그는 이제 적당히 마시고 먹은 터라 슬슬 나가볼 생각이었다.

월드 보스 술고래들과 끝판까지 가려면 몇날 며칠이 지나도 부족할 테니까.

그런데 네르나스가 힐끗 로안을 노려봤다.

“어이! 치사하게 먼저 일어나기야?”

“하하! 실컷 드십시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는 많을 텐데요.”

그러자 네르나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에게는 그렇겠지.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게 마지막 술자리가 될 수도 있다고.”

로안은 순간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침울해진 네르나스의 말투.

뭔가 초연한 듯하면서도 모든 걸 체념하는 듯한 표정까지.

“설마 그 누군가가 네르나스 님입니까?”

그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네르나스를 쳐다봤다.

네르나스가 큭 웃었다.

“술맛 떨어지게 왜들 그래? 그냥 모른 척해. 어차피 나야 트렐라 님께 벌받는 건 이력이 났으니까.”

후! 역시나 예상대로다.

하긴 트렐라가 아무리 쿨한 여신이라고 해도 자신을 사칭한 네르나스를 그냥 둘리 없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겠지만.’

본래라면 통쾌하고 고소해야 정상인데 왠지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뭔지.

“그럼 혹시 이 술자리가 끝나는 즉시 혼나기로 한 겁니까?”

“맞아. 딱 이 술자리까지만 봐주신다고 하셨어. 내 용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실컷 먹으라고 하시네.”

네르나스는 마치 남 일 말하듯 빙긋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녀가 아무리 천하의 파멸의 용이자 대전장 최강의 월드 보스라 해도 여신의 징벌 앞에는 겁을 먹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여간.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했어요?”

“몰라.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날 너무 열받게 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트렐라 님을 사칭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죠.”

“아무튼 부탁이니 좀 더 앉아있어. 술자리의 조건이 로안 네가 앉아있는 순간까지라고.”

“뭐 그런 억지가?”

“억지가 아니라 사실이야. 그러니까 우리 하루 정도만 더 이러고 있자. 대신 내가 좋은 정보 하나 알려줄게.”

“무슨 정보요?”

그러자 네르나스가 잔에 있던 소주를 입에 머금더니 허공으로 내뿜었다.

무슨 짓일까 싶었지만 곧바로 로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결계?’

주향이 물씬 풍기는 신비한 결계가 허공에 생겨나 있었다.

마치 거대한 3차원 화면을 연상케했는데, 언뜻 봐도 수만은 되어보이는 사르곤 제국의 병사들이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보다시피 사르곤 제국 녀석들이지.”

“그렇군요. 지형을 보니 대전장 같은데?”

“맞아. 사르곤 제국에서 저기 있는 게이트를 향해 이동 중이지. 저 속도대로라면 앞으로 하루 정도면 도착하게 될 거야.”

그말과 함께 네르나스는 그들의 목적지 게이트의 바깥이 어디쯤인지 지도를 통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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