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기묘한 힘 (3)
천검 강무진의 갑작스러운 등장!
성벽 위에 오연히 군마를 타고 있는 그를 발견한 순간 로안은 놀랐다.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경악한 이는 엘레토르였다.
카오니아 대륙에서 그녀가 가장 마주치기 꺼려지는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필 저 자가?’
그러다 보니 강무진을 발견한 순간 즉각 도주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다크 문이 뜬 이상 강무진이라고 해도 나를 어쩔 수 없어.’
강무진은 암부의 특급 척살 명단 첫 번째에 올라있는 인물.
사르곤 제국과 전쟁 중인 한 제국 최강의 무사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역시 아이린처럼 용사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아직 강무진은 용사로 각성하지 못했어. 어쩌면 오늘이 바로 놈을 죽일 절호의 기회일 지도 몰라.’
엘레토르는 다크 문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로안은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관심은 강무진을 향해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강무진 공작님. 설마 이런 데서 공작님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강무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본래라면 그를 보자마자 도주해야 할 엘레토르가 간덩이가 붓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히 서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기운이 그녀로부터 느껴져서다.
“그러고 보니 저 달을 믿고 있는 것이로군. 네가 바로 악마로 예정된 존재였더냐, 엘레토르?”
“훗, 글쎄요. 보기에 따라 악마일 수도 있고 천사일 수도 있겠죠. 흠, 그러고 보니 천사가 아니라 용사라고 해야할까요?”
악마의 입장에서는 용사야 말로 악마이니까.
그것이 엘레토르의 소신이었다.
강무진이 큭 웃었다.
“날 보고도 거기 서 있는 걸 보니 싸워이길 자신이 있나보군. 어디 한 번 잔재주를 피워보아라.”
“후훗!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당신이 대륙 제일 검사라지만 타쿨룬님의 위대한 힘 앞에선 한낱 미물에 불과할 뿐이죠.”
짙은 어둠이 회오리치는 순간 그녀는 마치 시커먼 괴수처럼 변했다.
두 눈만 섬뜩한 백색으로 번쩍일 뿐 전신이 암흑으로 이루어진 괴수!
그로부터 피어나는 기세는 가히 숨막힐 듯 가공스러웠다.
그걸 본 강무진의 안색이 굳었다.
‘저건 심상치 않군.’
군마가 연기로 변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환영처럼 엘레토르 앞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그의 손에 쥔 푸른빛이 전방을 갈랐다.
번쩍!
순간 어둠이 두 쪽으로 쪼개졌다.
엘레토르가 있던 공간 자체가 비스듬하게 분리되어버린 것이다.
‘역시 대단하네.’
로안은 강무진이 펼친 검법을 알아봤다.
신화 등급 검법인 환마천검식!
본래의 엘레토르라면 절대 무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엘레토르의 몸은 갈라진 공간과 함께 분리되었다가 이내 붙어버렸고 마치 늑대가 달려들 듯 강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쿠카아아아아!”
악마가 울부짖는 듯한 괴성과 함께 그녀가 휘두르는 두 자루의 단검!
그것은 거대 괴수의 발톱처럼 섬뜩하게 전방의 공간을 갈랐다.
캉! 카캉!
강무진은 차분히 막아냈다.
그러나 일순간 그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엘레토르가 허깨비처럼 다가와 그의 몸을 통과해버렸기 때문이다.
촥! 촤아악!
거기서 다가 아니다.
엘레토르가 그의 몸을 통과한 순간 어둠의 기운이 수십 개의 끈처럼 화해 강무진의 몸속에 박혀 있었다.
“끄윽!”
강무진의 부릅 뜬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가 처음 당해보는 괴상한 수법.
어둠의 기운이 그의 심장을 휘감아 끌어당기고 있었다.
물론 그가 버티고 있으니 심장이 뜯겨나갈 리는 없지만, 대륙 제일의 검사인 그를 이토록 당혹스럽게 하다니 놀라웠다.
‘이게 어둠의 힘인가?’
강무진의 검이 그의 손을 빠져나가 마치 살아있는 새처럼 공중을 누비며 어둠의 끈들을 잘라냈다.
그러나 그렇게 잘려나간 어둠의 끈들이 또 다시 길게 늘어나 강무진의 몸을 휘감았다.
공간을 누비던 검도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어둠의 끈에 묶여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쿠쿠쿳! 강무진도 별 게 아니었구나.”
엘레토르는 오연히 웃었다.
어둠의 힘 앞에 강무진이 꼼짝을 하지 못했다.
그녀로서도 놀라웠다.
다크 문의 힘이 이토록 강력할 줄은 몰랐으니까.
“별 게 아닌 건 너다, 엘레토르!”
그때 로안의 대도가 어둠을 갈랐다.
서걱!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기습.
“끄윽······.”
엘레토르의 허리가 위 아래로 분리되었다.
“아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졌다.
순간 그녀의 손과 연결되어 있던 어둠의 끈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비로소 자유를 얻은 강무진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로안을 바라봤다.
“방금 전처럼 엘레토르가 허깨비가 되어 돌진하면 그땐 막거나 공격하지 말고 피하십시오.”
“피해야 한다 했나?”
“예. 인간의 능력이 아닌 악마의 힘이니 정면으로 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용사 각성자라면 모를까 말이죠.”
로안은 일부러 용사 각성자라는 말을 했다.
강무진이 이 기회를 통해 각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솔직히 용사 각성만 하면 강무진이 방금 전처럼 엘레토르의 뻔한 수법에 당하는 황당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흥! 닥쳐! 죽여버리겠다, 애송이 놈!”
그때 다시 머리와 몸이 합체된 엘레토르가 로안을 죽일 듯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조금 전 그녀는 강무진의 방심을 틈 탄 필살기를 성공시켰다.
천검 강무진을 죽일 수 있는, 그야말로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그것을 로안이 방해한 것이다.
그녀로서는 로안이 철천지 원수가 따로 없었다.
‘저놈부터 죽여버리겠다.’
검은 기운이 로안을 향해 폭풍처럼 몰려왔다.
빤히 보고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
검은 기운은 로안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리고 방금 전 강무진이 당했던 것처럼 시커먼 줄들이 로안의 몸을 휘감았다.
“끝이다, 애송이 놈!”
콰지직! 팍팍팍팍!
잠시의 틈도 주지않겠다는 듯 엘레토르는 어둠의 줄들을 움직여 로안의 몸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대도가 번쩍 날아들었다.
촤악!
“아아악!”
엘레토르의 가슴에서 검은 연기가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네, 네놈이 어떻게······.”
그녀는 앞에 멀쩡히 서 있는 로안을 노려보다 허물어졌다.
방금 전 그녀가 죽인 건 로안의 분신이었다.
로안은 씩 웃으며 강무진을 쳐다봤다.
“보셨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군.”
강무진이 탄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실 그에게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하려 한다면 엘레토르가 아무리 빨리 돌진해 와도 피할 수 있으니까.
“대체 경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건가, 로안 남작?”
“꿈으로 얻은 계시입니다.”
“경 또한 몽환의 현자였던가?”
로안은 그냥 둘러댔는데 강무진은 놀랍다는 듯 말했다.
한 제국의 현자들 중에 꿈을 통해 뭔가를 계시받는 몽환의 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안은 끄덕였다.
“대충 비슷하지만 저는 현자라고까지 할 건 아닙니다.”
“현자가 따로 있겠나? 경과 같은 존재가 바로 현자인 것이지. 어찌됐든 나는 또 경의 덕을 봤군.”
그 말을 하며 강무진은 돌연 신형을 이동시켰다.
대략 30미터나 떨어진 성벽의 으슥한 곳에서 그의 검이 공간을 휘젓자 엘레토르의 몸이 십자형으로 잘려나갔다.
“아아아악!”
그 사이 몸을 복원해 공격해오려는 것을 강무진이 앞서 공격해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한 번 요령을 터득한 강무진은 엘레토르가 뭔가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어둠 속에서 엘레토르가 모습을 드러내면 그녀의 몸을 갈라버렸으니까.
“큭! 어디 계속 부활해봐라. 백 번이건 천 번이건 죽여주마!”
계속 도주하지 않고 살아나는 엘레토르도 집요했지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죽이는 강무진이야말로 더욱 집요했다.
보통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분노하면 그는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엘레토르는 세상에서 가장 성질 더러운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것에 대한 응징을 받는 중이었다.
“대학살의 전장에서 경의 도움을 받은 보답으로 이 녀석을 죽여주려 했다. 어차피 나의 적이기도 하니 보답이라 할 것도 없지만 말이야. 한데 오히려 내가 또 경의 도움을 받고 말았군.”
그는 엘레토르를 죽이는 것과는 별개로 로안과 대화를 나누었다.
“난 빚지고 산 적이 없다. 그런데 경에게는 벌써 두 번이나 빚을 졌지. 그것도 한 번은 생명의 빚을.”
그는 방금 전 자신이 극히 위험한 순간에 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로안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둠의 끈에 묶인 상태에서 어떤 꼴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군끼리 돕고 사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공작님께서도 제가 위험에 처하게 되면 당연히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아군이라는 말에 강무진이 씩 웃었다. 그는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다.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주저말고 얘기하라.”
“그럼 부탁은 아니고 계시로 얻은 지식 하나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보라.”
“악마 각성자는 용사가 아니면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보여지는 악마의 힘은 빙산의 일각일 뿐 용사로서 레벨을 빨리 올려두지 않으면 나중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결국은 나보고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뜻이로군.”
“예.”
“그건 고민해보겠다.”
강무진은 빈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실제로 고민해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부터 이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일이 비교적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메인 임무가 아직 뜨지 않는 걸 보면 여전히 뭔가 난관이 존재하는 모양이네.’
급할 건 없다.
어차피 강무진은 항상 그렇지만 가장 마지막에 용사가 된다.
심지어 똥고집을 부리다 용사가 되기 전 악마에게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골치 아파지는데.’
물론 6명의 용사로도 악마를 상대하는 건 문제가 없다.
로안이 충분히 강하면 해결되는 일.
심지어 용사들이 다 죽고 로안 혼자서 악마들을 상대해 쓸어버린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한 명의 용사라도 죽는 건 고인물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라 보통은 게임을 종료한 후 리스타트 즉,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곤 했다.
‘현실에서 리스타트라는 건 없으니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야지.’
다행히 왠지 감이 좋았다.
지금보니 강무진이 그리 꽉 막힌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아아악!”
그 사이에도 강무진의 학살은 계속되고 있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마치 이곳이 학살자의 탑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도주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는군.’
엘레토르가 살아나는 곳, 이른바 부활 지점에는 강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그곳을 안다기 보다 그만큼 그의 움직임이 빠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
그는 오늘 정말 작정하고 엘레토르를 죽일 생각인 듯했다.
이대로 다크 문이 사라지면 엘레토르는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 좋겠지만 타쿨룬이 그렇게 놔둘 리가 없지.’
로안도 다 해본 일이다.
게임에서 별 짓을 다해봤지만 다크 문이 떴을 땐 악마 각성자를 죽일 수 없다.
“이런! 사라졌군.”
역시나 잠시 후 엘레토르가 홀연히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뭔가가 그녀를 소환하기라도 한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무진이 허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또 놓치고 만 것인가?”
“다크 문 때문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하늘에 떠 있던 다크 문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강무진이 눈을 빛냈다.
“분명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엘레토르는 내가 반드시 죽일 것이니 경은 안심해도 된다.”
강무진은 세상 끝까지라도 엘레토르를 추격해 해치우겠다는 듯 그 즉시 군마를 소환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성질도 급하지.’
그래도 강무진은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악마의 힘 앞에서는 본인이 무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쨌든 엘레토르에 대해서는 당분간 신경 쓸 일이 없겠군.’
강무진이 작정하고 추격하고 있는 걸 알게된 이상 섣불리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할 테니까.
‘이제 다른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하게 될 테니 그에 대비하자.’
다크 문이 오늘 처음으로 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는 말이 있듯, 앞으로 다크 문은 꽤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다시 꾸준히 레벨을 올리며 강해지는 것만이 답이었다.
* * *
다크 문이 사라지고 엘레토르는 쫓기듯 사라졌지만 디온 성은 전투의 여파가 남았다.
망루가 무너지는 등 일대 난리가 벌어진 터라 기사들 뿐 아니라 병사들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레이 또한 로브와 지팡이를 갖추고 전투 태세로 기사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잠들었다가 밖에 소란이 있자 즉각 나온 모양이었다.
“닐스, 이제 전투는 끝났으니 최소 경비조만 남기고 모두 쉬도록 해.”
“예, 로드. 다친 데는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니 염려 마.”
신령한 빛의 조각 덕분에 등의 상처는 감쪽같이 회복된 상태였다.
마룡경갑이 조금 망가지긴 했지만, 날이 밝으면 푸니카 상단의 고블린들이 올 테니 그들에게 수리를 맡기면 될 것이다.
“레이 님도 어서 들어가 쉬세요.”
“네, 영주님도요.”
로안도 쉴 생각이었다. 그의 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니까.
“몰캉아! 제논! 너희들도 고생많았어.”
그는 펫들을 잠시 격려해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피로가 모두 풀렸다.
‘그나저나 토실이 녀석은 잘 수련 중인지 모르겠군.’
고대 운석의 기묘한 힘을 터득 중이라 했는데 과연 어떤 능력을 배워 나올지 기대가 되었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치고 개운한 몸으로 침실로 들어와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시 잠이 들었을까?
뭔가 보드라운 것이 턱을 간질였다.
신선하고 향긋한 풀냄새 비슷한 것도 났다.
‘으음?’
눈을 떠보니 토실이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