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간다, 토실아! (3)
토실이의 표정을 보며 로안은 가방 속에 뭔가 대단한 것이 들어있음을 직감했다.
대체 어떻게 이 와중에?
정말 기막혔지만 지금은 그런 내색을 할 때가 아니었다.
로안은 〈청금석 왕뱀(Lv54)〉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토실이를 쳐다본 건 잠깐이었을 뿐 이내 기죽은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겁 먹을 것 없다, 청금석 왕뱀아. 어디 갈데도 없는 것 같은데 나와 함께 있지 않겠느냐? 내 등 위엔 너와 비슷한 녀석들이 많이 있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로안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저놈의 등에 올라가 토실이를 구할 수 있게 됐으니까.
“감사합니다. 흑암의 케르베로스님.”
그러나 상황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뱀을 무척 아끼는 것으로 알려졌던 케르베로스가 뜻밖에도 아주 색다른 제의를 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네가 레벨이 가장 낮아 막내가 될 것 같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결투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결투라고?
이건 로안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원래 있던 설정인가, 아니면 새로 생겨난 설정인가?
그건 알 수 없었다.
로안이 아무리 고인물이라고 해도 괴물의 개별적 취미 생활까지 세세하게 다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놈의 펫이 되어봤어야 알 수 있는 일이지.’
그러고 보니 토실이가 그냥 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 같아도 서열 즉, 전투력이 낮은 녀석들은 저 뒤로 밀려나 있었다.
다시 말해 토실이 가까이 접근하려면 뱀들 중 탑 10 정도는 되어야 한다.
거기에 터치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가까워지려면 탑 5에는 들어야 할 듯했다.
‘내가 정말 별짓을 다하는구나.’
하지만 로안은 탑 5가 아니라 탑 1이 될 자신도 있었다.
비록 거력붕멸도법은 쓰지 못하지만 스탯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저 뱀들의 레벨이 아무리 높아도 환생사의 사기적 스탯빨을 당해내기란 불가능한 일.
「자, 그럼 젤 막내부터 시작하자.」
케르베로스의 지시에 〈꽃무늬 맹독뱀(Lv58)〉이 험악한 눈빛을 하며 로안의 앞에 내려왔다.
‘저 녀석이 막내인가?’
하긴 로안 말고는 50레벨 대 뱀은 저놈뿐이었다.
“흥! 덤벼라, 요 귀엽게 생긴 녀석아! 선공은 양보하마.”
꽃무늬 맹독뱀은 로안의 레벨이 4단계나 낮자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양보해준다니 고맙지.”
로안은 그대로 달려가 놈의 목을 휘감았다.
우득.
“꾸아악!”
꽃무늬 맹독뱀이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트렐 24코인을 얻었습니다.]
‘아, 이런!’
로안은 살살 겁만 주려고 했는데 그만 힘조절을 하지 못해 녀석의 목을 부러뜨려버리고 말았다.
‘내가 뱀 상태로 언제 싸워봤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단번에 즉사할 줄이야.
‘되게 약한 녀석이었군.’
로안은 힐끔 케르베로스를 올려다봤다. 혹시라도 놈이 이로 인해 분노하면 골치아파질 텐데.
「저런, 애석하지만 정당한 결투로 인한 결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의외로 케르베로스는 쿨했다.
「하지만 다음엔 좀 사정을 두도록 해라. 꼭 죽이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면 말이야.」
“예, 노력해볼게요.”
로안은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다음은 누가 저 녀석과 싸워볼 테냐?」
그런데 뱀들이 로안의 시선을 피했다.
방금 전 꽃무늬 맹독뱀이 죽는 걸 보자 딱 감이 왔는지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설마 모두 기권이냐? 기권하면 저 녀석보다 아랫서열이 될 것이다.」
그러자 토실이와 가까운데 위치하고 있던 뱀들 중 하나가 우렁찬 포효와 함께 날아내렸다.
〈쌍뿔 맹독뱀(Lv65)〉
드디어 탑 10중 한놈이 나선 것이다.
몸체의 길이는 5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머리에 창처럼 날카로운 뿔이 두 개 박혀 있었다.
“청금석 왕뱀 놈! 네가 감히 우리 막내를 죽였겠다?”
놈은 꽃무늬 맹독뱀과 친한 사이였는지 로안을 향해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닥치고 어서 덤비기나 해.”
로안은 느긋하게 놈을 도발했다.
그러자 놈이 바람처럼 접근했다.
동시에 뾰족한 두 개의 뿔이 로안의 몸을 꿰뚫을 듯 날아왔다.
그러나 로안은 가볍게 피한 후 놈의 목을 휘감았다.
꽈아악!
“꾸아아! 하, 항복! 항복! 져, 졌다고. 그만해······.”
거친 기세와는 다르게 목을 한 번 조이니 금방 항복했다.
목뼈가 부러질까봐 겁난 모양이었다.
‘이쯤 했으면 덤비는 녀석이 없겠지.’
어쨌든 살다살다 뱀 서열 쟁탈전에서 싸워볼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다.
게임에서도 안해본 일이라 뭔가 산뜻한 기분도 들었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기권이냐? 그럼 청금석 왕뱀이 서열 1위로 올라가도 불만이 없다는 거겠지?」
그러자 탑 5로 보이는 다섯 마리의 뱀들이 심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케르베로스가 돌연 뭔가를 공중에 띄웠다.
「모처럼의 결투인데 이렇게 끝나면 너무 싱겁지 않으냐? 그래서 최종 승자에게는 이걸 포상으로 주려고 한다.」
웬 거무튀튀한 빛깔의 책자였다.
‘비급?’
친절하게도 케르베로스는 관련 정보도 띄워주었다.
[권성 아르만의 기공법 - 기초편]
-분류 : 비급
-등급 : 전설
-설명 : 고대의 전설적인 권사(拳士)인 권성(拳聖) 아르만의 기공술 기초편(1성, 2성, 3성)이 적혀 있다. 레벨, 스탯, 직업, 종족 제한없이 누구나 수련이 가능하다.
-1성 : 방어력 +50[트렐 100코인]
-2성 : 방어력 +50[트렐 200코인]
-3성 : 방어력 +50[트렐 400코인]
‘저건? 맙소사!’
로안은 깜짝 놀랐다.
3성까지 성취시 방어력을 도합 150이나 올려주는 전설 등급 비급!
비록 기초편이라 3성까지밖에 못익히지만, 직업의 제한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후반에 가면 용사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고렙들은 다 익히는 이른바 국민 비급이다.
‘그리고 저걸 익혀야 숙련편과 완성편을 익힐 수 있지.’
숙련편은 전설, 완성편은 신화 등급.
세트로 모두 얻어봐서 잘 안다.
그야말로 막강한 방어력을 얻을 수 있지만, 숙련편부터는 권사 계열 직업을 가진 이들만 수련이 가능했다.
‘물론 권성의 룬 같은 걸 얻을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카오니아 세계에 존재하는 아이템들 중 극히 얻기 어려운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룬’이다.
이 룬은 아주 특별한 효력을 지닌 것들이 많은데 권성의 룬이 대표적이었다.
‘그걸 등록하면 권사가 아니어도 권사 계열 비급을 익힐 수 있거든.’
마찬가지로 ‘검성의 룬’이나 ‘마도사의 룬’ 혹은 ‘궁성의 룬’ 같은 것들도 존재한다.
더구나 이 룬들을 얻게 되면 각각의 룬과 관계된 고대 비급들의 유적도 추적이 가능해진다.
그런만큼 모두 신화 등급 아이템들.
케르베로스와 같은 사기급 전투력을 지닌 월드 보스를 해치웠을 때, 그것도 아주 운이 좋아야 나오는 아이템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저 케르베로스 놈을 처치하고 권성의 룬을 먹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지금은 꿈도 꾸기 어렵다.
월드 보스를 잡는 건 게임에서나 가능했던 일.
‘모르지. 아주 나중에 용사들을 모두 데려와서 함께 공략해보면 가능할지도.’
모두의 레벨이 최소 100 아니, 110 정도는 되어야 안정적일 것이다.
솔플로는 130이 되어야 하니까.
「이 보물을 주는 데도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냐? 겁쟁이 놈들이로군.」
케르베로스 놈은 비급을 공중에서 흔들어대며 뱀들을 도발했다.
그러고 보면 아주 고약한 취향이다.
하긴 달리 대전장의 월드 보스일까?
‘변덕이 엄청난 놈이야. 토실이가 너무 귀엽다보니 지금은 살려두고 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몰라.’
그래서 최대한 빨리 토실이를 데리고 여길 떠야 한다.
‘저 비급도 챙길 수 있으면 좋고.’
권성 아르만의 기공법 기초편.
나중에는 고렙들의 국민 비급이 된다 쳐도 지금은 로안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비급이다.
「흐음, 결투는 종료됐다. 앞으로 너희들 중 서열 1위는 청금석 왕뱀이다. 그리고 이 비급은······.」
로안은 혹시 자신에게 주지 않을까 싶어 눈을 반짝였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나 케르베로스는 그것을 토실이 쪽으로 이동시켰다.
「결투로 쟁취한 게 아니니 이 포상은 토실이에게 주도록 하겠다. 다들 불만 있느냐?」
아니 뜬금없이 왜 토실이에게?
케르베로스의 포상 기준이 뭔가 이상했다.
‘토실이에게 주면 나야 좋지만.’
아무래도 케르베로스 놈이 토실이의 귀여움에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귀여운 게 뭔지는 아는 놈이군.’
덕분에 전설 비급 하나 득템!
로안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어 잠시 고개를 바닥에 숙였다가 펴야 했다.
쏘옥.
그때 토실이는 얼싸좋다며 비급을 받아 노란색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케르베로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바라봤다.
사실 어차피 뱀들중 누가 승리하든 비급을 줄 생각은 없었다.
토실이에게 줬지만 조만간 다시 회수할 것이다.
토실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한 번 줘봤을 뿐이다.
「청금석 왕뱀은 이제 내 등위로 올라오도록 해라.」
“예, 케르베로스 님.”
로안이 올라가자 다른 뱀들이 알아서 자리를 비껴줬다.
“와아! 잘 오셨어요, 청금석 왕뱀님.”
“레벨이 낮은데 어떻게 그리 강해요?”
“껍질이 너무 예뻐요, 청금석 왕뱀님!”
게다가 녀석들은 아부성이 가득한 말을 해댔다.
로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은채 토실이 근처로 이동했다.
토실이가 눈을 반짝이며 로안을 쳐다봤다.
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자, 토실아.’
[최상급 축복의 성수가 아공간에서 출고되었습니다.]
로안은 즉각 아공간에서 축복의 성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를 토실이에게 들이밀었다.
부비.
토실이가 즉각 머리를 비볐다.
순간.
[전설 펫 토실이가 아공간 휴식처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토실이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자 뱀들은 깜짝 놀랐다.
뱀들만이 아니었다.
케르베로스는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즉각 로안을 붙잡으려 했다.
순간 축복의 성수가 담긴 병을 물고 있는 로안의 입이 슬쩍 달싹였다.
“토실이는 내가 데려간다. 나중에 보자 이 똥개 놈아!”
그말을 끝으로 로안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크으으으! 가, 감히!」
케르베로스의 거대한 몸체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군. 청금색 왕뱀이 바로 그 인간 놈이었다.’
비로소 놈은 자신이 인간 로안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토실이의 원래 주인 말이다.
「이 교활한 인간 놈!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리고 내 토실이를 감히!」
커우으! 커우우우!
커우우우우우우!
분노한 케르베로스의 포효와 함께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폭주로 길길이 날뛰며 질러대는 케르베로스의 포효 소리가 광대한 대전장 저편으로 끝없이 울려퍼졌다.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간 놈! 넌 반드시 내게 죽는다······!」
놈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사방을 수색했지만 로안의 종적도 찾을 수 없었다.
* * *
‘······여기는?’
마치 사막처럼 황량한 공간.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딘가 했지만 로안은 이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케르베로스로부터 토실이를 구하고 무사히 탈출하겠다는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긴 아마 고대의 유적 평원 대전장의 어딘가일 것이다.
‘어딘지는 모르겠군.’
대전장의 일부 지형은 수시로 변하기도 하니 고인물로서도 처음 보는 지형이 많다.
다만 간혹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곳들이 있는데, 그런 곳에 유적이 존재하면 아주 훌륭한 고정 사냥터가 된다.
거길 점령하거나 통제하려고 각성자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일은 앞으로 흔하게 벌어질 것이다.
‘영지나 국가 단위로도 전쟁이 확장될 거고.’
하지만 그럴수록 이익을 보는 이는 따로 있다.
이 광대한 던전의 수입이 늘어나게 되면 던전의 배당금이 대폭 증가하고, 던전 좌의 가격도 급등하게 될 테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도시 헤르바 앞에 있는 게이트 같은 건 별로 좋지 않아.’
게이트 앞에 떡 하니 월드 보스가 버티고 있으니 앞으로 누가 거길 들어가려 하겠는가.
그렇다고 월드 보스를 쫓아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어쨌든 그거야 또 다른 게이트가 발견되면 해결될 일.
로안은 토실이를 무사히 구해내서 기뻤다.
‘토실아~!’
[당신은 현재 흑암의 케르베로스가 내린 저주에 걸린 상태입니다.]
[아공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펫을 소환할 수 없습니다.]
‘이런!’
토실이를 구해주며 녀석이 걸렸던 저주가 그대로 로안에게 옮겨졌다.
어쩐지 로안이 부르지 않아도 튀어나와야 할 토실이가 조용하다 했더니.
‘이럴 줄 알고 미리 성수를 입에 물고 있었지.’
그런데 여전히 로안은 청금석 왕뱀 상태다.
아직 변신이 풀리려면 11시간이 넘게 남은 상황.
‘뱀의 몸으로 성수의 병마개를 여는 건 쉽지 않네.’
꼬리를 이용해 병을 고정시키고 입으로 물어 조금씩 돌려여는 수밖에 없었다.
‘열었다!
벌컥!
[최상급 축복의 성수를 마십니다.]
순간 환한 빛이 일어나 로안의 몸을 휘감았다.
동시에 시커먼 연기같은 것이 몸에서 밀려나와 흩어졌다.
[흑암의 케르베로스가 내린 모든 저주가 해제되었습니다.]
폴리모프는 저주로 당한 게 아닌 터라 성수를 마셨다고 변신이 해제되지는 않았다.
[아공간 사용이 가능합니다.]
[펫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로안이 부르지 않았지만 토실이 등이 아공간 휴식처에서 튀어나왔다.
부비부비. 몰캉말캉.
녀석들은 로안의 몸에 비벼댔다.
왕뱀 상태가 아니었다면 안고 손으로 마구 쓰다듬어줬겠지만 지금은 함께 머리를 비벼대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 토실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부드럽고 따스한 토실이의 털과 체온이 느껴지자 로안은 비로소 녀석을 구한 것이 실감났다.
그 사이 제논은 귀마를 타고 허공에 오연히 떠있었다. 밝아진 표정을 보니 녀석 역시 토실이가 무사히 나온 것을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비벼대던 토실이는 깜빡 했다는 듯 폴짝 바닥에 내려서더니 옆으로 비끌어맨 노란색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권의 책과 신비한 칠색빛을 발산하는 돌.
내가 챙겨왔다, 주인!
토실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것들을 로안에게 건넸다.
[〈권성 아르만의 기공법 - 기초편〉(전설)을 얻었습니다.]
이건 이미 로안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토실이 덕분에 전설 비급 하나를 챙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비급은 옆의 보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성의 룬(신화)을 얻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대박 아이템 하나가 로안의 손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