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로운장이다 (1)
“당황하지 말고 쥐를 죽여라!”
“식량 창고를 보호해라!”
드라우트 성은 완전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자그만 쥐.
그 한 마리는 병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만 그 쥐가 수백, 수천, 수만이 넘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디서 몰려왔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쥐들이 성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파직! 파지지직!
레이가 마법을 펼쳐 쥐들을 한번에 수십 마리씩 죽이고 있었지만 역부족.
그런데 그때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던 쥐들이 일순간 한곳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르르르! 우르르르르!
시커먼 쥐들이 뭔가에 홀린 듯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 선두에는 하얀 토끼가 한 마리 날고 있었다.
물론 토실이였다.
로안이 긴급히 토실이를 투입해 쥐들을 홀리게 한 후 성밖으로, 기왕이면 오크들의 진영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저 쥐들이 이쪽으로 오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오크 지휘관 케락이 놀라 물었다.
“크익! 이상하게도 쥐들에게 더 이상 주술이 먹히지 않습니다요.”
“빌어먹을! 주술도 믿을 게 못되는군.”
“케케! 그래도 성안의 식량은 동났을 겁니다요.”
주술사 토첼이 키득거렸다.
백부장 하나가 긴급히 물었다.
“그런데 저 몰려오는 쥐들을 어찌할까요?”
그러자 케락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뭘 묻느냐? 인간 놈들은 우리에게 쥐를 보내면 곤란해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우리에겐 저것들이 맛좋은 별미라 할 수 있지. 모조리 잡아먹어라.”
그러자 오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시커멓게 몰려오는 쥐떼를 향해 달려갔다.
우적우적! 찌익! 짭짭짭!
그렇게 쥐들이 오크들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드라우트 성의 망루에서 로안은 못마땅한 듯 쳐다봤다.
“괜히 저 녀석들에게 방향을 돌린 건가?”
생각해보니 저놈들에게 쥐는 식량이었다. 오히려 좋은 일을 해준 것이다.
“후! 그래도 덕분에 한숨 덜었어. 정말 고마워, 로안.”
“토실이 덕분이죠. 녀석이 아니었다면 저도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당근을 사줘야할 이유가 또 늘었네.”
레이는 신이 나 있었다.
아마도 토실이에게 마구 퍼주고 싶은데 그 명분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 식량은 어떻게 됐나요?”
“큰일이야. 대부분의 식량을 쥐들이 먹어치워버렸어.”
레이의 얼굴이 다시 수심으로 가득 찼다.
저 아래서 스카드 남작이 머리를 쥐어 뜯으며 괴로워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또 식량이 부족해지다니!”
그래도 아껴 먹으면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이 불과 하루 분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다시 또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고 말 것이다.
“결국 오크 놈들의 작전은 성공했군요.”
“그래서 말인데······.”
레이가 로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로안, 네가 그 고블린을 설득해서 나와도 거래를 할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고블린 머천트 타이나에게 식량을 구매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때 막 올라와 대책을 논하려던 스카드 남작이 반색했다.
“오! 레이의 말이 맞다. 로안, 네가 고블린 상단과 친해졌으니 나 또한 정식으로 부탁하지. 적당히 중간에서 수수료로 이득을 취해도 좋으니 식량만 많이 구해줄 수 있겠나?”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로안으로서는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중간에서 적당히 수수료를 먹으라고 스카드 남작이 대놓고 말까지 한 이상 말이다.
곧바로 로안은 타이나가 있는 푸니카 상단의 막사로 갔다.
“어서 와, 로안. 성에 떨어진 식량을 구하러 온 것 같은데?”
“맞아. 잘 알고 있네?”
“머천트에게 그 정도야 기본이지.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말해봐.”
“판매금액의 10퍼센트를 수수료로 선지급해줄 테니 나를 이 성의 책임자와 만나 거래할 수 있도록 해줘.”
10퍼센트라.
“그럴 필요없이 나와 거래를 하면 되잖아.”
로안이 식량을 구매한 후 거기다 적당한 이윤을 붙여서 스카드 남작에게 팔면 된다.
아마도 흥정 스킬을 동원하면 못해도 20퍼센트 이상은 먹을 것이다.
아니, 그 이상도 가능하다.
로안이 얼마에 팔든 스카드 남작 입장에서는 살 수밖에 없으니까.
즉, 이 상황에서는 중간에서 로안만 폭리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타이나는 10퍼센트를 수수료를 떼어주는 대신 자신이 직접 스카드 남작과 거래를 하려는 것이다.
“대신 너의 직업에 맞는 50레벨 승급 아이템을 구해다 줄게.”
50레벨 승급 아이템?
구하려면 매우 귀찮은데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15퍼센트 정도면 생각해보지.”
“거기서 추가로 흥정 능력을 쓰지 않는다면.”
15퍼센트로 확정한 후 로안이 흥정스킬을 발동하면 강제 조정해줘야 한다.
타이나도 여우였다.
로안은 끄덕였다.
“좋아.”
사실 이건 로안도 바라던 바다.
그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깐다고 해도 스카드 남작에게 식량을 아주 비싸게 파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같이 이 성을 지키며 고생하는 입장에서 말이다.
따라서 그런 건 로안이 아닌 전문 상인이 나서는 게 모양이 좋다.
15퍼센트 수수료만 해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로안이 직접 파는 것보다 더 많이 남을 가능성이 높다.
타이나는 푸니카 상단의 부단주인 만큼 상당한 거래 스킬을 발휘할 테니 말이다.
‘뭐든 중간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게 최고지.’
로안은 숙소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나는 승급이나 하고 있자.’
곧바로 그는 아공간에서 중급 마도비경을 꺼냈다.
[당신의 경험치가 승급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급 마도비경을 읽으면 40레벨로 승급할 수 있습니다.]
[중급 마도비경을 학습하시겠습니까?]
“예.”
로안은 즉각 수락했다.
[중급 마도비경의 학습을 시작합니다.]
[학습 종료까지 1시간]
[40레벨 중급 마도객이 될 수 있는 고대의 지식을 터득 중입니다.]
.
.
.
[중급 마도비경의 학습이 끝났습니다.]
[당신은 마도객에 대한 고대의 심오한 지식을 터득했습니다.]
[승급에 성공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은 40레벨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마법 저항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근력과 지력 스탯이 각각 1 증가합니다.]
[마도객 전용 능력 〈불의 칼〉이 Lv4가 되었습니다]
[불의 칼의 공격력과 이동거리가 대폭 증가합니다.]
[마도객 전용 능력 〈오러 생성〉이 Lv3이 되었습니다.]
[도(刀)에 오러를 생성할 때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대폭 감소합니다.]
[마도객 전용 능력 〈분신〉 이 Lv2가 되었습니다.]
[분신의 지속 시간이 늘어납니다.]
[생성된 분신은 당신이 보유한 스탯의 85%만큼의 스탯을 가집니다.]
[마도객 전용 능력 〈분신 블링크〉를 배웠습니다.]
[〈분신 블링크〉를 통해 본신과 분신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고유능력 〈냄새동화〉가 Lv5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지정하는 대상에게 일정시간 지속되는 냄새동화의 버프를 걸어줄 수 있습니다.]
[고유능력 〈흥정〉이 Lv5가 되었습니다.]
[흥정 가능한 영역이 늘어납니다.]
1시간의 중급 마도비경 학습이 끝나자마자 승급!
드디어 40레벨이 되었다.
정신없이 울리는 알림들을 보며 로안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분신 블링크를 배웠네.’
분신을 보낸 후 그 분신과 본신의 위치 교환!
이건 기습 공격은 물론이고, 회피에도 매우 유용하다.
‘공격하고 빠질 때도 최고지.’
물론 분신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진 거리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이 거리도 늘어난다.
그런데 그때.
[푸니카 상단에서 당신에게 거래 수수료로 아프릴 30,000코인을 보냈습니다.]
갑자기 웬 돈 아니, 코인인가?
로안은 순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타이나와 스카드 남작이 식량 거래 협상을 마친 모양이다.
즉각 수수료가 들어온 걸 보니 말이다.
‘생각보다 꽤 짭짤하네.’
15퍼센트인데 3만코인이니, 타이나가 무려 20만 코인이나 식량을 팔아먹었다는 얘기다.
로안은 앉아서 3만 코인을 번 것이다.
‘이건 여유 코인이니 던전 투자에 쓰는 게 좋겠다.’
이거면 고대의 유적 평원 던전 30좌를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거력붕멸도법의 단계를 올려볼까?’
-5성 : 6,400코인 [Lv40]
-6성 : 12,800코인 [Lv45]
40렙에 5성, 45렙에 6성을 익힐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곧바로 알림이 떴다.
[거력붕멸도법을 5성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흥정에 의해 비용이 6,080코인으로 감소합니다.]
[6,080코인을 소모해 도법의 경지를 높이겠습니까?]
【코인 잔액】
-아프릴 30,000
-트렐 31,482
‘오! 이제 이것도 흥정이 되네.’
감소폭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본래 안 되던 영역에도 흥정이 된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예, 높이겠습니다.”
[트렐 6,080 코인이 지불되었습니다.]
【코인 잔액】
-아프릴 30,000
-트렐 25,402
트렐 코인이 자동 지불됐지만 어차피 지금은 모든 코인 가치가 동일하니 상관없다.
앞으로 코인들의 가치가 달라지는 순간부터는 어떤 코인으로 지불할지 물어볼 것이다.
‘그래도 트렐 코인으로 다 환전해두는 게 좋겠지.’
[당신의 몸에 거력붕멸도법이 체화됩니다.]
[수련에 집중할수록 체화 속도는 빨라집니다.]
[성취도 5성 체화 진행 중 1%]
.
.
.
[성취도 5성 체화 진행 중 32%]
흑사광살도법과 달리 거력붕멸도법의 5성 성취 수련은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고 있었다.
체화 중에 다른 활동을 해도 무방하지만 그 경우 시간이 길어진다.
따라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방해받지 않는 개인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수련에 집중해야 빠르게 성취도를 올릴 수 있다.
따라서 로안은 푸른 수염 코볼트 시종 오롬에게 수련중이니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고 말을 해두었다.
‘확실히 영웅 도법이라 오래걸리는군.’
대략 2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30%대라니.
그것도 방안에서 수련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최소 4시간은 더 수련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강해지는데 이 정도 시간은 거저먹기지.’
도법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크게 지루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 * *
한편 로안이 방안에서 40레벨 승급을 마치고 이어서 도법 수련을 하고 있는 사이, 고블린 타이나는 드라우트 성의 성주인 스카드 남작과의 거래 협상을 마쳤다.
6개월치 군량을 20만 코인에 제공하기로 말이다.
그리고 협상을 마치고 대략 2시간이 지나자 1차로 드라우트 성의 병사들이 10일 동안 버틸 수 있는 군량이 도착했다.
“오오! 어떻게 이리 빠른 시간에!”
창고에 불과 하루 정도의 식량밖에 남아있지 않아 노심초사하고 있던 스카드 남작은 깜짝 놀랐다.
타이나가 미소 지었다.
“이 정도야 우리 푸니카 상단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 약속된 나머지 군량은 내일까지 모두 납품할 것이다.”
“고맙다, 고블린. 군량 대금은 카젤 가문에서 내일 납품이 완료되는 즉시 지불될 것이니 염려마라.”
이 군량은 스카드 남작 개인의 코인이 아닌 카젤 가문의 이름으로 거래를 한 것이었다.
드라우트 성의 성주인 만큼 스카드 남작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었다.
가주인 카젤 자작의 딸인 레이에게도 그같은 권한이 있는 터라 거래는 수월했다.
물론 가격이 상당히 비쌌다.
평시에 사는 것에 비해 두 배가 훨씬 넘는 값이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팔아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형님께 한 소리 듣겠지만 어쩔 수 없지. 드라우트 성을 지키려면 이 방법 뿐이야.’
스카드 남작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식량 문제가 해결되자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 * *
한편 드라우트 성에 대량의 식량이 들어왔다는 사실은 붉은 오크 지휘부에 즉각 보고 되었다.
“무엇이? 지금 그놈들이 식량을 확보했다고 했느냐?”
“예, 케락 님.”
주술사 토첼은 짐승을 부리는 데 능숙하다.
따라서 그는 날짐승들을 동원해 수시로 성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하필이면 고블린 상단이 드라우트 성에 들어와 있습니다요.”
그러자 케락은 기가 막혔다.
“그 깐깐한 고블린 상단 놈들이 거기에 있다고? 설마 그것도 그 로운장이라는 놈의 짓이냐?”
“놈의 숙소 근처에 고블린 상단 막사가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요.”
순간 백부장 오크들의 표정이 침중하게 변혔다.
“이대로라면 성을 점령할 방법이 없습니다, 케락 님.”
“족장 님께 원군을 요청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케락이 인상을 구겼다.
“멍청한 놈들! 원군이라고? 고작 저 자그만 성 하나도 점령하지 못하고 원군을 요청한다면 족장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겠느냐?”
그 순간 서늘한 음성이 막사 안에 울려퍼졌다.
“아주 한심하게 보시겠지. 이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이에 케락이 움찔 놀랐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전신을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거대 오크 전사 하나가 막사 입구에 우뚝 서 있었다.
‘크헉! 저분은?’
케락은 벌떡 일어났다.
“천부장 케락, 제3군단장 탈룬 님을 뵙습니다!”
군단장 탈룬.
붉은 오크 족 3대 군단장 중 하나다.
족장을 제외하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서열이다.
그래서인지 탈룬이 쏘아보는 순간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다.
“군단장 탈룬 님을 뵈옵니다!”
막사에 있던 모든 오크 지휘관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어째서 두칵이 안 보이는 거냐?”
탈룬은 인사 따위는 무시한 채 물었다.
맹장 두칵은 탈룬의 제자다.
“저, 전사했습니다.”
그러자 탈룬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안타깝게도 두칵은 결투 중 전사했습니다.”
“저 조그만 성에 두칵을 상대할 만한 놈이 있었더냐?”
“로운장이라는 놈입니다.”
“로운장?”
탈룬의 뾰족한 두 눈에서 화염과 같은 안광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