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파괴력 최강의 도법이다 (2)
신장은 10미터 정도.
엄청 거대해서 그렇지 인간 여성의 형체였다.
다만 전신이 눈과 입을 빼고는 눈처럼 하얀 색을 띠고 있었다.
두 눈은 푸른 색의 화염이 불타오르는 듯했고, 입술은 피를 칠해 놓은 것처럼 붉었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섬뜩한 형상.
게다가 저 거대한 여성의 머리 위에는 수많은 인간의 뼈들로 만들어진 왕관이 놓여 있었다.
‘악마 바실리오!’
로안은 단번에 저 거대 여성의 정체를 알아봤다.
물론 본신이 아니다.
그저 환영일 뿐이다.
진짜 악마 바실리오라면 저보다 수십 배는 더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로안은 담담한 눈빛으로 앞을 노려봤다.
“뭐냐, 넌?”
그러자 바실리오가 입을 열었다.
“몇 번의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다니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임무에 실패했으니 그에 대한 징벌을 각오하고 있겠지?”
임무 실패에 대한 징벌?
그런 것도 있었나?
당연히 없었다.
이건 그저 바실리오가 억지를 부리는 것일 뿐.
그냥 헛소리라 생각하면 된다.
“귀찮게 하는군. 별볼일 없는 환영 따위로 겁주지 말고 당장 꺼져라.”
그러자 레이와 플로리 등이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로안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들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거대한 악마를 보며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사제 도미닉은 인상을 찌푸린 채 차가운 눈빛으로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공포심을 이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안이 악마를 향해 오히려 도발을 하고 있으니 기겁한 것이다.
“로안! 흥분하면 안 돼.”
“하하, 저건 단순한 환영이니 겁먹지 말아요.”
“환영이라고?”
“예, 겁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니 무시하면 됩니다.”
그러나 레이 등은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환영이라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형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큭! 완전히 겁을 상실한 녀석이로구나.”
바실리오의 두 눈에 더욱 강렬한 분기가 피어났다.
“그렇다면 보여주지. 이제부터 네가 얼마나 무모한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푸르게 이글거리는 두 눈에서는 금세라도 뜨거운 화염이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저주받은 악마여!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당장 꺼지지 못하느냐?”
이번에는 로안이 아니다.
도미닉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자 바실리오의 시선이 도미닉을 향해 홱 돌아갔다.
“멍청한 사제 놈이 그 질긴 목숨을 용케 부지했구나. 무능한 여신 아프릴리스를 섬기지 말고 차라리 날 섬기는 게 어때?”
“닥쳐라! 감히 아프릴리스 님을 모독하다니!”
“너에게나 신일 뿐, 그 따위 허접한 여신 따위를 내가 두려워할 것 같은가?”
“으하하하! 가소롭구나. 바실리오! 넌 그분 앞에 서면 벌레의 똥만도 못한 존재일 뿐이다.”
평소답지 않게 도미닉의 입에서 거친 말이 쏟아져나왔다.
그러자 바실리오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벌레의 똥만도 못하다?
별로 대단한 욕은 아니다.
그보다 수만 배는 더 심한 욕설이 난무하는 곳이 마계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하찮은 욕일망정 감히 그녀의 면전에서 하는 이는 없었다.
있다면 미쳤거나 죽고 싶어 환장한 녀석일 것이다.
그런데 저놈은 대놓고 벌레의 똥만도 못하다 말했다.
역시나 그녀가 매우 증오하는 여신 아프릴리스의 사제답다.
그 여신의 그 사제일 테니.
“하찮은 미물 따위가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아프릴리스가 여기서 널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느냐?”
순간 바실리오의 뒤로 그녀와 동일한 모습의 수많은 분신들이 나타났다.
스스스. 스스스스―
전방에도 후방에도 심지어 공중에도, 끔찍하게도 바닥에도 바실리오가 피처럼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
그것을 본 레이, 플로리, 닐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로안이 다급히 외쳤다.
“신경쓰지 말고 차라리 눈을 감아요. 저건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는 환영일 뿐입니다.”
그러나 로안의 말은 그들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공포심이 그들을 옭아매었기 때문이다.
“아프릴리스 님의 성광 앞에 사악한 어둠은 사라질 지어다!”
그때 도미닉이 양손을 위로 올리며 크게 외쳤다.
번쩍!
순간 찬란한 광채가 일어나 태양처럼 사방을 비췄다.
그것이 끝이었다.
성스러운 광채의 폭풍 앞에 악마 바실리오의 환영들은 그대로 녹아 사라졌다.
반쯤 녹아있는 바실리오의 환영 하나만 남아 도미닉을 노려봤다.
“제법이로군.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어차피 너희들은 여기서 모두 죽게 되어 있다.”
“닥치고 그만 사라지라!”
도미닉의 손에서 다시 성광이 번쩍였다.
“크으윽! 짜증나는 사제 놈 같으니! 어디 두고 보자.”
순식간에 녹아버린 바실리오의 분통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내 그 소리조차 소멸되어버렸다.
‘역시 상급 사제군.’
본래 시련의 던전에 악마 바실리오의 환영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돌발 이벤트에 로안도 낭패를 당할 뻔했다.
그에게는 별것 아니었지만 레이와 플로리 등이 공포심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다행히 도미닉의 손에서 피어난 성광은 바실리오의 환영들뿐 아니라 레이 등의 공포심도 소멸시켰다.
“아, 살았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네.”
“으! 이제 좀 다리가 움직여집니다.”
모두들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로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도미닉 사제를 죽이라는 임무를 줬던 거군.’
악마에게 있어서 가장 거슬리는 존재가 바로 사제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도미닉 사제의 활약은 이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앞에 독 안개가 펼쳐져 있군요. 모두 내 주위로 모여주시지요.”
본래 미노타우루스의 제단 관문을 지나면 광활하게 펼쳐진 독 안개 지대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중 독 안개가 거의 없는 비밀 통로가 존재하는데, 미로처럼 되어 있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다행히 로안은 그 길을 모두 외우고 있어 일행을 그곳으로 이끌려 했다.
그러나 도미닉을 주위로 펼쳐진 반경 3미터 크기의 보호막 내부로는 독 안개가 침투하지 못했다.
따라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시간이 많이 절약되겠군.’
로안은 쾌재를 불렀다.
“이대로 전진하겠습니다. 절대 도미닉 사제님의 보호막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로안은 일행을 이끌고 그대로 직진했다.
“곧 주변으로 독 괴물들이 몰려올 겁니다. 자폭 공격을 하는 놈들이니 보호막이 손상되지 않도록 플로리 님과 레이 님이 원거리 공격으로 미리 처치해주세요.”
“알았어, 로안.”
“좋아! 맡겨줘.”
독 괴물들은 거대한 뱀, 개구리, 두꺼비, 지네 등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다.
굉장히 빠르게 접근해 와서 자폭을 하는데 그 폭발력은 웬만한 보호막을 날려버릴 정도다.
다만 놈들의 방어력은 매우 약해서 30레벨 중급 마법사인 레이가 공격해도 한 방이면 부서졌다.
덕분에 레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던전에 와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드디어 조금이나마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팍! 파앙! 퍼퍽! 퍼엉!
레이와 플로리는 대미지는 약하지만 시전 시간이 빠른 마법을 연사해 주변으로 몰려드는 독 괴물들을 계속 파괴했다.
보호막이 펼쳐져 있지만 안에서 밖으로 마법을 펼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파티원 닐스의 레벨이 26이 되었습니다.]
[파티원 닐스의 레벨이 27이 되었습니다.]
[파티원 레이의 레벨이 31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레벨이 낮은 닐스는 버스 팟 덕을 톡톡히 보는 중이었다.
어느새 닐스는 2단계, 레이가 1단계 레벨이 상승했다.
그러나 닐스는 꿔다놓은 보리자루마냥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레벨이 오르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 혼자서만 파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한 건 당연한 일.
“닐스 형, 저 좀 도와줄 수 있나요?”
그런데 때마침 로안이 닐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 뭐든 말해라.”
닐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다는 게 이런 것일까?
저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는 정말로 별거 아닌 임무라고 해도 파티에 기여를 하고 싶었다.
“걷다 보면 바닥을 뚫고 솟아오르는 괴물이 보일 겁니다. 그놈들의 뿔이 마치 새싹처럼 생겨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어요.”
“그 새싹들을 없애란 말이냐?”
“그대로 두면 폭발해서 보호막에 손상을 줄 수 있어요. 마법이 잘 안 먹히는 놈들이라 창과 같은 무기로 직접 없애야 합니다.”
“알았다. 내게 맡겨라.”
닐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닥을 살폈다.
잠시가 지나자 로안이 말한대로 바닥을 뚫고 은밀히 올라오는 괴상한 새싹 비슷한 게 하나 보였다.
‘저거군.’
곧바로 그는 창을 휘둘러 그것을 잘라버렸다.
파스스!
순간 그것은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잘했어요, 형. 계속 그렇게 하면 돼요.”
“흐흐, 맡겨줘라.”
근거리 딜러가 한 명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로안이 직접 해도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기왕 닐스를 키워주려고 데려왔으니 그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파티원 로안의 레벨이 36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로안의 레벨이 올랐다.
그러다 멀리 독 안개 속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을 보며 레이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롭 아이템은 포기해야 되는 걸까, 로안?”
“헤로스 백작님을 구하는 게 우선이니 어쩔 수 없어요. 아주 비싸 보이는 아이템이 아니면 그냥 넘어갑니다.”
독 안개 속으로 들어가 아이템을 줍는 건 죽으려고 작정한 짓이다.
물론 도미닉 사제와 함께 이동하면 보호막이 독 안개를 밀어내 루팅을 할 수 있겠지만, 일일이 그러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혹시라도 그러다 그 사이 헤로스 백작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따라서 로안은 각성석이나 승급 아이템류의 비싼 드롭템이 반짝이고 있을 때만 줍게 했다.
‘그나저나 토실이가 꽤 힘들었나 보네.’
토실이와 몰캉이, 제논은 여전히 펫 전용 아공간에서 휴식 중이었다.
아까 거력붕멸도경을 얻게 해준 행운에 상당한 힘을 쓴 게 분명했다.
“잠깐 모두들 멈춰보세요.”
그 후로 잠시 더 이동했을 무렵.
플로리가 돌연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죠, 플로리 님?”
레이가 물었다.
“이걸 보는게 이해가 빠를 거예요.”
플로리가 지팡이의 뾰족한 끝을 바닥에 대고 마법진 하나를 그렸다.
쓱쓱 쓱쓱!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려진 자그만 마법진.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지름 30센티 정도되는 구형의 결계가 그 위로 생겨냈다.
그리고 그 결계 안에는 붉은 후드를 눌러쓴 정체불명의 인간들이 보였다.
【이름】 ???
【레벨】 ???
【직업】 ???
이런 류의 존재들은 하나다.
암살자들.
“아직 먼 거리지만 전방 뿐 아니라 좌우에서도 접근 중이에요.”
마법진 위에 새로운 결계들이 계속 생겨났다 사라졌다.
각각의 결계에는 적게는 두 명, 많게는 대여섯 명의 암살자들이 보였다.
“숫자가 꽤 많아요. 다 합치면 최소 30명이 넘어요.”
플로리는 자폭 괴물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근처에 한번씩 광역 탐지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곳을 향해 은밀히 접근하는 암살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도미닉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 안개 속을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면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군요.”
플로리가 끄덕였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고레벨 암살자들이라면 미노타우루스와 같은 괴물들과는 차원부터 다르다.
무엇보다 마법사인 그녀가 가장 싸우기 꺼려하는 직업이 바로 암살자들이다.
그들은 괴물들과의 전투보다는 사람들과의 전투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에 있어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전문가들!
바람처럼 접근해서 칼로 찔러대면 마법사로서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어떻게 하지, 로안?”
곧바로 그녀는 로안을 쳐다봤다.
그녀만이 아니라 레이와 도미닉, 닐스도 모두 로안을 쳐다봤다.
로안이 이중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새 모두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로안의 대처에 의지하고 있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로안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잠시만요. 주변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눈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여기엔 독 안개가 약한 지역이 곳곳에 존재하지. 일단 그쪽으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마침 잘됐군. 저곳이 적당하겠어.’
그런데 그때 토실이가 아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왔구나, 토실아! 잘 쉬었니?”
로안이 반색하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토실이는 로안의 볼에 머리를 한 번 비볐다.
그러더니 이내 코를 킁킁거렸다.
[전설 펫 토실이가 뭔가를 감지했습니다.]
로안의 눈이 커졌다.
역시 전설 펫 답다.
나오자마자 어새신들의 존재를 감지한 모양이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토실이가 훌쩍 보호막 밖으로 벗어나 한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은 조금 전 로안이 봐둔 지점이 아닌 다른 장소다.
다행히 거기에도 유독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였다.
‘저기도 독 안개가 옅은 곳이지만.’
가까운 곳에도 있는데 왜 더 먼 곳을 선택했을까?
그냥 심심해서?
그럴 리가 없다.
토실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이동하기로 했다.
“일단 저기 큰 바위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로안은 독 안개 사이로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