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죽이기 (1)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어둠을 뚫고 누군가 로안의 앞에 나타났다.
[곧 사방이 지금과 같은 암흑으로 뒤덮일 것이다. 그때에 암흑을 밝혀줄 빛과 같은 존재들이 나타날 것이니······]
그 존재는 의미모를 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음성은 마치 우주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신의 음성처럼 웅장했다.
[사십 구 개의 암흑이 세상을 뒤덮을 것이나 일곱 개의 빛이 그 암흑과 대항해 싸울 것이라.]
[예기치 못한 특별한 힘이 작용해 예정된 암흑의 일부가 소멸되었으나 그로써 다른 암흑들이 더욱 짙어졌도다.]
[아직 빛들의 힘이 미약한데 그 빛 중 하나를 소멸시키려 짙은 어둠이 다가왔으니, 만일 그대가 그 빛을 지켜준다면 큰 보상이 있으리라······!]
그 말을 끝으로 정체불명의 음성은 사라졌다.
그리고.
“으음?”
로안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꿈이었다.
하도 긴장을 했는지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긴 당연히 꿈이겠지.’
여기는 드라우트 성 내부의 한 숙소다.
화려한 장식이 갖춰진 넓은 방.
이 성에서 몇 개 안 되는 최고급 숙소로 상급 귀족들이 방문했을 때나 내주는 곳이라 했다.
그런데 크라드 남작이 평민인 로안에게 이 숙소를 내준 것은 그가 코볼트들이 훔쳐간 식량을 되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공적이었으니까.
식량이 고갈되어 여차하면 드라우트 성을 버리고 퇴각했어야 할 최악의 상황에서 로안으로 인해 한 달치 식량이 확보된 것이다.
곧바로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을 달랠 수 있었고 그로써 사기도 회복됐다.
로안이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메인 퀘스트가 뜨다니 뜻밖이네.’
로안은 방금 전 꾸었던 꿈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건 아무리 봐도 단순한 꿈이 아니다.
고인물의 입장에서 볼 때는 더더욱.
‘틀림없어. 본래와 다르게 변형됐지만 분명 메인 퀘스트가 시작된 거야.’
사십 구개의 암흑과 일곱 개의 빛이 서로 싸운다?
그건 우스울 정도로 쉬운 비유다.
49명의 악마와 7명의 용사가 전쟁을 벌이는 걸 의미할 테니까.
‘내 생각이 맞다면 곧 메인 퀘스트가 뜬다.’
로안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렸다.
이 메인 퀘스트는 카오니아 게임의 전반에 반드시 나타나는 중요한 사건의 흐름이다.
오직 선택된 존재에게만 주어지는 유일 퀘스트.
당연히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바로 그 선택된 존재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를 제외한 나머진 사실 NPC라 할 수 있으니까.
악마건 용사건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모두 NPC나 마찬가지다.
게임의 유일한 플레이어.
그가 카오니아 세계의 진정한 주인공인 것이다.
따라서 메인 퀘스트가 뜬다는 것.
이는 곧 이 현실로 나타난 카오니아의 세계에서 로안이 진정한 플레이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로안이 이 세계의 주인공임을 확증한다 할 수 있었다.
‘왜 안 뜨지?’
밖은 아직 어두운 밤이다.
새벽이 오려면 한참이 남았다.
멀리 어디선가 괴물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가 잡아먹히는 소리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살육의 음향.
공포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하다.
그러나 로안은 이제 그런 음향들에 익숙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연히 식사를 하고 잠을 자기도 한다.
어느덧 이 괴상한 이세계에 적응을 한 것이다.
‘어째서 안 뜨는 거지?’
이 순간 로안의 관심사는 오직 메인 퀘스트다.
방금과 같은 꿈은 그냥 우연히 온 것이 아니다.
분명 메인 퀘스트를 암시하는 것인데, 만약 끝까지 안 뜬다면?
‘그건 내가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다시 말해 로안은 수많은 NPC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플레이어가 바로 주인공이고, 로안은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어차피 고인물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곳 세계에서 잘먹고 잘 살수 있는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악마들이 용사들을 다 잡아죽이고, 어둠이 세상을 장악한다고 해도, 그럭저럭 한 몸 건사해서 살아날 방법조차 다 알고 있으니까.
‘물론 악마들이 세상을 순순히 지배하게 놔둘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로안은 이미 악마가 될 종자 셋을 보내버렸으니까.
크라겔과 마쿠스 공작, 오크 지휘관 우르스.
거기다 악마의 힘중 하나를 얻기도 했다.
그것도 고렙이 된 것도 아닌 저렙 상태에서 말이다.
‘만약 내가 엑스트라이자 NPC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 정도면 사실상 주연급 못지 않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다.
고인물이 왜 무서운지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면 어딘가 진짜 플레이어 혹은 주인공이 있다는 얘긴데?’
로안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그가 만약 카오니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존재라면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임에서는 리스타트라도 할 수 있지, 현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니까.
‘나만 해도 리스타트를 수백 번이 뭐야? 몇 번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주인공이건 아니건 솔직히 상관없다.
이 게임의 유일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해도.
어차피 이미 플레이어만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그 따위 것이 무슨 의미일까?
다만 아쉬운 건 퀘스트 보상이다.
어떤 식으로 메인 퀘트스가 변형되든 그 보상은 꽤 쏠쏠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안 뜨는군.’
그 사이 새벽이 밝아오고 있는 데도 임무가 생성되지 않았다.
퀘스트 창을 아무리 살펴봐도 메인 퀘스의 ‘메’자도 보이지 않는다.
‘하긴 그냥 별 꿈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
굳이 그걸 메인 퀘스트에 연관짓고 그것이 안 뜬다고 스스로를 엑스트라라며 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으니까.
* * *
“로안 님! 아침 가져왔습니다.”
아침 햇살이 창문에 비칠 무렵.
방문을 열고 푸른 수염 코볼트 오롬이 안에 들어왔다.
오롬은 빵과 치즈를 비롯한 간단한 음식이 놓은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래. 고맙다. 거기 놓고 가.”
“예, 로안 님.
오롬은 매우 공손하게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녀석을 비롯한 코볼트들은 드라우트 성에 끼친 피해를 배상하는 차원에서 일꾼으로 봉사 중이었다.
“옛다! 당근이다! 너희들도 아침 먹어야지.”
아공간에서 당근을 꺼내 토실이에게 건네자 녀석은 또 그것을 입으로 조각내 몰캉이와 제논에게 하나씩 건넸다.
녀석들이 식탁 위에 앉아 아침 먹을 준비를 했다.
기특하게도 로안이 먼저 먹어야 먹겠다는 듯 각각의 조각을 손에 쥐고 로안을 쳐다봤다.
우린 주인 먼저 먹으면 먹겠다!
딱 이런 눈빛이다.
심지어 제논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당근 조각을 손에 쥐고만 있었다.
아마도 몰캉이가 눈치를 줘서이리라.
제논에게 그런 충성심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이러고 함께 식탁에 앉아있으니 이 녀석들이 꼭 가족같네.’
여러모로 펫들이 있다는 게 정말 좋다.
외롭지 않고 녀석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 진다.
슥.
로안은 빵을 뜯어 입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밥 먹자.”
냠냠.
사각! 사각―!
밥은 아니고 빵이지만 전생의 습관 때문인지 지금도 밥이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모두 전생의 추억이다.
물론 쌀로 밥을 짓고 김치나 된장찌개를 반찬으로 먹는 것이 여기서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한 제국에 가면 가능해. 거긴 전생의 한국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곳 세계에 존재하는 국가 중에 한(韓) 제국이라는 곳이 있다.
대한민국할 때의 그 한(韓)이 맞다.
카오니아의 게임 개발자가 한국인이다 보니 설정상 집어넣은 것이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되어있고, 먹는 것도 비슷해. 외모도 딱 한국인처럼 생겼지.’
하지만 딱 그것 뿐이다.
실제 한국의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국가이니까.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지 거기 가면 전생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겠구나.’
제국이라 불릴 만큼 강대국이며, 특히 천검 강무진이라 불리는 사기급 절대강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무진도 용사로 예정된 운명을 타고 났는데.’
7명의 용사 중에 가장 강한 인물.
처음부터 강한 만큼 용사가 되어서도 가장 강하다.
하지만 워낙 자신감에 넘쳐 혼자서 독주하다가 악마들에게 다굴당해 죽는 경우도 있다.
랜덤으로 흐르는 게임의 후반에서 강무진이 그런 식으로 죽는 경우를 로안은 숱하게 봤으니까.
‘여기서는 그럼 안 돼. 무조건 말려야 한다.’
강무진은 다소 독선이 넘치는 것 빼고는 나무랄 데가 없는 존재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매우 훌륭하며, 매우 정의롭다.
그렇다고 헤로스처럼 호구짓을 하지도 않는다.
‘언젠가 만나게 되겠지.’
어차피 악마들과 싸우다보면 용사들과는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다.
헤로스 백작과 만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메인 퀘스트는 결국 안 나온다 이건가?’
한밤중에 깨서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 기다리는 데도 아직 안 뜨는 걸 보면 결국 안 뜰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상관은 없다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좀 아쉽다.
메인 퀘스트 보상 아이템에 비견될 만한 건 따로 얻기가 매우 힘드니까.
‘그보다 꿈의 내용대로라면 누군가 위험에 처한 것 같은데?’
보통 꿈을 꾸면 시간이 갈수록 그 기억이 흐려지는데, 밤에 꾼 꿈은 여전히 선명했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한 말의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이 날 정도다.
〈아직 빛들의 힘이 미약한데 그 빛 중 하나를 소멸시키려 짙은 어둠이 다가왔으니······〉
이게 마지막 말의 내용 중 일부다.
빛 중 하나를 소멸시키려 짙은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
이건 악마들이 용사로 예정된 자를 죽이려 한다는 뜻.
‘일곱 명의 용사 예정자 중 누군가 위험에 처해있는 게 분명해.’
이른바 용사 죽이기.
초반에 가끔 등장하는 이벤트다.
악마들이 용사로 예정된 존재를 실제로 죽이는 경우도 있고, 혹은 성장을 방해해서 강해지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로안이 여기서 노후를 편하게 즐기고 싶다면 절대 막아야 할 이벤트다.
‘대체 누군지 알아야 가서 도와라도 주지.’
그래서 로안은 답답했다.
퀘스트가 안 뜨니 누군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헤로스 백작에게나 가볼까?’
로안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까이에 있는 용사 예정자를 살피는 것 뿐.
그런데 밖으로 나가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성의 중앙 망루 위에서 스카드 남작이 마법사 플로리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 중이었고, 성벽의 경계도 삼엄해졌다.
“오! 로안이구나. 잘 잤냐?”
“예. 형은 잘 잤어요?”
“물론이지. 네 덕분에 배 두드리고 아주 잘 잤다.”
마침 닐스가 앞에 나타났다.
그는 성벽의 경계 근무를 위해 가는 중이었고, 밤새 근무를 선 하일과 데라는 취침 중이라 했다.
“그보다 지금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잘은 모르겠는데 헤로스 백작님이 보이지 않나 봐.”
이게 무슨 말인가?
로안은 깜짝 놀랐다.
어제 저녁까지 멀쩡했던 헤로스 백작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이상한데?’
그럼 악마들이 죽이려는 용사가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때 망루 위에 있던 플로리가 훌쩍 로안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로안! 일어났구나.”
플로리와 도미닉은 어젯밤에는 보지 못했다. 그들은 기력이 소진되어 잠들어 있었으니까.
“예, 플로리 님. 그보다 헤로스 백작님이 사라지셨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플로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구나. 네 말대로 백작님이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야.”
“언제부터요?”
“그것도 모르겠어. 밤중에 사라지신 건지, 아니면 아침에 산책을 나가신 건지.”
산책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헤로스 백작이 바보도 아니고 오크들이 우글거리는데 단신으로 성밖에 산책을 나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산책을 했다면 병사들 중 누군가는 그것을 봐야 정상이다.
하지만 아무도 헤로스 백작이 방밖으로 나오는 걸 보지 못했다 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더욱 이상한 건 도미닉 사제님도 보이지 않아.”
상급 사제 도미닉까지!
이건 뭔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간밤에 꾼 꿈도 그렇고.’
로안은 곧바로 말했다.
“일단 헤로스 백작님의 처소에 가봐야겠습니다. 뭔가 단서가 있을 지도 몰라요.”
“이미 살펴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 그래도 로안 너라면 혹시 찾아낼지 모르니까 다시 가보자.”
로안에게 아주 특별한 예지 능력이 있다는 걸 플로리는 이미 지난 번 스켈레톤 로드와의 전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잠시 후 헤로스 백작의 처소.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상할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그러나 플로리의 말대로 아무 단서도 없었다.
탁!
그때 토실이가 바닥의 한 곳을 뒷발로 찼다.
“왜 그래 토실아? 거기 뭐가 있어?”
“그럴 리가. 거긴 그냥 바닥일 뿐이야.”
상급 마법사인 플로리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수상한 흔적을 샅샅이 살펴봤다.
토실이가 바닥을 치고 있는 곳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수상한 흔적이 없었다.
탁탁!
그런데도 토실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그곳을 계속 찼다.
로안의 눈이 빛났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토실이가 공연히 저럴 리가 없다.
로안은 즉시 토실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앉아서 아래를 세심히 살피는 순간.
번쩍!
바닥에서 돌연 환한 광채가 쏟아져나왔다.
동시에 들리는 알림.
[메인 임무 〈빛을 보호하라〉가 생성되었습니다.]
[임무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이 웅장한 알림을 듣고 로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설마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드디어 떴다.
메인 퀘스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