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코볼트 (2)
가렉은 기분이 이상했다.
인간 소년이 내민 왼손의 끝.
거기엔 하나의 얼굴이 생겨나 있었다.
시커먼 형체이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가렉 자신의 얼굴이었다.
인간 소년의 손 끝에 자신의 머리가 만들어져 있다니!
저게 대체 뭘까?
무시하고 싶었지만 계속 눈이 갔다.
왜 이런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뭐냐, 인간 놈아?”
본래라면 무시하고 대뜸 공격을 했겠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 따위 것으로 날 겁줄 수 있다 생각하느냐?”
그러자 로안이 차갑게 대꾸했다.
“모두 잘 들어라. 특히 오크들! 내가 이 칼로 이 부분을 자르면 너희 두목 가렉의 목도 동시에 잘려나간다.”
순간 가렉을 비롯한 오크들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오크들에게 붙잡힐 위기에 처한 코볼트들조차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가렉이 이를 갈며 외쳤다.
“인간 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는구나.”
“저 인간 놈이 미친게 분명합니다, 가렉 님.”
순간 로안이 왼손 끝에 있는 검은 형체의 목에 마룡도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살짝 힘을 줬다.
촥!
그러자 가렉의 목 일부가 실제로 베여지며 피가 울컥 새나왔다.
“크어어어!”
가렉은 기겁했다.
그는 잽싸게 두 손으로 목을 지혈했다.
곧바로 충혈된 두 눈으로 로안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공포심이 가득했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오크들도 마찬가지.
또한 코볼트들도 얼어붙은 표정으로 로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악마를 보는 듯한 눈빛들.
‘하여간 달리 악마의 능력이 아니라니까.’
괴물들에게까지 악마 취급을 당할 정도라니.
하지만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이런 종류의 능력을 가진 적이 있다면, 절대 그 적과 마주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
로안은 방금 전 권능을 1 소모해 가렉에게 악마 크루스의 인(印)을 새겼다.
놈은 보스 급도 아닌데다 로안보다 레벨도 낮아 악마의 인을 새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크으으! 뭐,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을 공격······끄억!”
그때 가렉이 부하들을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 했지만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서걱!
로안의 마룡도가 손 끝에 생성시킨 가렉의 목을 잘라버렸으니까.
추아악!
순간 로안과 20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던 가렉의 몸에 경련이 일었다. 그의 몸체에서 머리가 분리되더니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머리가 사라진 가렉의 몸체는 몸부림을 치다가 맥없이 널브러졌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아프릴 283 코인을 얻었습니다.]
소정의 경험치와 코인을 남긴 채 가렉이 죽었다.
“봤냐? 너희들도 마찬가지다.”
로안은 오크들 중 두 번째로 강해 보이는 녀석을 향해 다시 악마의 인을 새겼다.
[대상에게 악마 크루스의 인을 새겼습니다.]
[권능이 1 소모되었습니다.]
[권능 8/10]
“크으······!”
레벨 29의 전사인 드칵은 갑자기 몰아치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러다 로안의 손 끝에 자신의 얼굴이 생겨난 걸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크윽! 그런다고 내가 빌 것 같냐, 인간 놈! 어서 날 죽여라!”
그러나 놈은 용맹의 오크답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하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내가 죽는 순간 모두 한번에 저놈을 공격해라.”
그리고는 목이 잘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도끼를 번쩍 쳐들고 달려왔다.
이게 바로 오크들의 무서운 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격하는 투혼을 가지고 있으니까.
서걱!
그래서 놈들과 싸울 때는 반드시 기세부터 꺾어야 한다.
투혼 따위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려줘야 한다.
“크으으아악!”
로안은 마치 보란 듯 최대한 천천히 드칵의 목을 잘랐다.
드칵이 처절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쓰러지자 오크들의 표정에 비로소 공포심에 어렸다.
투혼이 꺾인 것이다.
곧바로 로안이 돌진하며 근처로 다가온 오크들을 향해 마룡도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스스.
때맞춰 분신도 소환했다.
거기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제논과 몰캉이도 공격에 가담했다.
좀비 본체로 현신한 제논이 갑자기 거대화 된 상태로 움직이며 오크들을 처죽이기 시작했다.
퍽! 퍼억!
분명 좀비 마법사인데 싸우는 건 좀비 광전사가 따로 없었다.
그건 제논이 일시지간 광전사로 변신하는 스킬을 펼쳤기 때문이리라.
‘알아서 잘 싸우겠지.’
제논이 크라겔인 걸 알고 있는 한 녀석에게 일일이 어떻게 싸우라고 지시할 필요가 없다.
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효율적으로 전투를 벌일 테니 말이다.
촤악! 콰드득!
몰캉이 또한 괴력을 발휘했다.
오크들보다 레벨은 낮지만 몰캉이 전투력이 압도적이었다.
하긴 녀석은 그냥 펫도 아니고 영웅 펫이다.
레벨 13이면 20레벨 대 오크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펫들이 점점 전투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동안에는 보조적인 도움만 주던 녀석들이 직접적으로 전투에 가담해 적을 쓸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뭔가 감개무량했다.
더욱 놀라운 건 토실이다.
어떻게 홀렸는지 사방으로 도주하던 오크들이 다시 녀석을 따라 로안이 있는 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크으! 내가 왜 다시 이쪽으로?”
“우라질! 저 토끼 놈 때문이야!”
오크들은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홀렸는지도 알지 못했다. 죽도록 뛰다보니 토실이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오오! 잘했다, 토실아!”
앞으로 몹몰이는 녀석에게 맡겨도 되리라.
덕분에 로안은 오크를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몰살시킬 수 있었다.
오크들의 사체는 몰캉이가 먹어치웠고, 모든 드롭템들은 로안의 아공간으로 말끔히 들어왔다.
[토실이의 능력이 상승했습니다.]
[몰캉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몰캉이의 레벨이 16이 되었습니다.]
[제논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제논의 레벨이 9가 되었습니다.]
로안의 레벨은 그대로지만 펫들의 레벨이 올랐다.
[영웅 펫 제논이 10레벨이 되는데 충분한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500코인을 소모해 승급하겠습니까?]
“예.”
드디어 제논도 10레벨 승급!
방금 전 오크들을 해치우고 얻은 코인이 있어 승급 비용은 충분했다.
[제논이 10레벨이 되었습니다.]
[제논의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순간 본신 상태의 제논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나는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캬캬캬캬―!”
그런데 그의 음성은 좀비 특유의 괴성으로만 흘러나왔다.
‘기다려라! 나 크라겔이 머지않아 세상을 뒤집어 엎으리라!’
“크캬캬캬―!”
그러자 몰캉이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시끄럽다는 듯 꼬리로 제논을 쳤다.
철썩!
“크억!”
하늘을 보며 앙천광소하던 제논은 꼴사납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에 제논이 욱하며 몰캉이를 노려봤지만, 몰캉이의 두 눈에서 하얀 안광이 번뜩이자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크윽! 이런 치욕이!’
아직 전투력에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애벌레 녀석에게 눌려 살아야 할지.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제논을 향해 토실이가 다가왔다.
토실이가 눈을 반짝이는 순간 제논은 작고 귀여운 2등신 좀비 펫으로 변했다.
부비.
토실이는 그런 제논을 얼굴로 비벼댔다.
그 사이 작게 변한 몰캉이가 훌쩍 날아와 토실이에게 몸을 비볐다.
부비.
그러자 토실이가 이번에는 몰캉이를 안고 비벼댔다.
“재밌게들 놀고 있군.”
자그만 녀석들이 서로 비벼대고 있으니 귀여워 미칠 지경이다.
물론 제논은 멍한 표정으로 비빔을 당하고만 있지만 말이다.
“저어······.”
그때 코볼트들이 로안을 향해 다가왔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들의 대표는 푸른 수염 코볼트 오롬이었다.
그는 자신의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한손으로 어루만지며 로안의 눈치를 봤다.
“혹시 드라우트 성에서 나오셨습니까요?”
“거기서 나온 건 아니지만 거기로 가는 길이었다.”
로안의 대답에 오롬은 화들짝 놀라며 넙죽 엎드렸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로안 님. 저희들은 오크들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드라우트 성의 식량 창고를 털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즉시 본래 장소로 돌려놓겠습니다.”
오롬 뿐 아니라 다른 코볼트들도 로안 앞에 넙죽 엎드렸다.
로안은 끄덕였다.
식량을 훔친 코볼트들의 행동이 괘씸하긴 했지만 놈들의 사정을 들어보니 한편으로 딱하긴 했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지.’
잘하면 아주 훌륭한 일꾼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보통은 이런 경우 코볼트들이 은혜를 갚으려고 하니까.
“좋아! 모두 돌려준다면 용서해준다.”
“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안 님.”
로안이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롬을 비롯한 코볼트들이 감동을 받은 듯 눈시울을 적셨다.
“하지만 이대로 함께 움직였다간 자칫 적으로 오인해 공격을 받게 될 거야. 일단 오롬 너만 나를 따라와라.”
“예, 로안 님.”
오롬은 넙죽 허리를 숙여 대답한 후 로안을 따라왔다.
* * *
한편 드라우트 성의 광장에는 헤로스 백작과 스카드 남작, 그리고 레이를 비롯한 각성자들이 모여 있었다.
헤로스의 앞에는 각종 식량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뭐야? 고작 이게 다 인가?”
“예. 모두의 비상 식량을 털었지만 생각보다 많지가 않습니다.”
넓은 아공간을 가진 헤로스와 달리 이곳에 모인 각성자들에는 아공간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었다.
금수저인 레이와 기사 페덴을 비롯한 소수를 제외하면 다들 배낭에 약간의 비상 식량을 챙겨왔을 뿐이다.
따라서 헤로스와 스카드 남작, 그리고 레이가 내놓은 식량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것만으로는 병사들의 한끼도 보탤 수 없는 양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아무래도 도시 헤르바에 다시 지원 요청을 해야할 것 같아요. 제가 각성자들 일부와 함께 다녀오겠어요.”
레이의 말에 스카드 남작이 반색했다.
“정말 그래 주겠느냐, 레이?”
“지금은 그 외에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그러나 잠을 자지 않고 무리해서 움직인다 해도 최소 왕복 3일은 걸리는 무리한 여정이었다.
과연 그때까지 병사들이 버텨줄지 걱정인 것이다.
“병사들이 굶주림에 지쳐 계속 쓰러지고 있습니다!”
“병사 두 명이 성을 빠져나가다가 붙잡혔습니다. 일단 감옥에 가둬두고 추후에 징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배고파 죽겠다며 난동을 부리던 병사 세 명을 수감시켰습니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들이 계속 다급한 보고를 해왔다.
스카드 남작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헤로스 백작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마지막 식량을 배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님.”
“이번 한 번 주면 얼마나 남나?”
“거의 바닥입니다. 한 끼도 주기 힘들 듯합니다.”
“정말 암담하군.”
그런데 그때였다.
“어? 저기 봐. 로안 아니야?”
“어디? 베르미스를 타고오는 걸 보니 맞네. 진짜 로안이야!”
“우와아! 저 벌레 녀석 그 사이 많이 컸는데?”
서쪽 성벽의 닐스와 데라, 하일.
그들이 때마침 그곳으로 순환 배치되어 근무 중이었다.
‘로안이라고?’
헤로스 백작이 훌쩍 뛰어 성벽 위로 올라섰다.
서쪽 멀리 로안이 커다란 벌레를 타고 빠른 속도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건 로안의 등 뒤에 웬 대머리 괴물 한 녀석이 타고 있었다.
딱 봐도 코볼트였다.
‘엉뚱한 녀석이군.’
대체 왜 코볼트를 태우고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로안! 어서와라.”
“닐스 형! 하일 형! 데라 누나! 다들 별일 없었죠?”
“별일이 없긴. 아주 많아.”
“난 배고파 죽겠다. 혹시 남는 거뜨 열매라도 하나 있냐?”
“하하, 식량 문제라면 걱정 말아요. 곧 실컷 먹게 해줄게요.”
로안은 성벽 위에 있는 닐스 등과 반갑게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헤로스 백작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저 지금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그래, 로안! 잘 왔다. 그런데 식량은 무슨 말이지?”
“지금 성에 식량이 텅 비어있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이제 식량 걱정 안해도 됩니다.”
그러자 헤로스 백작이 무슨 소리냔 듯 눈을 크게 떴다.
로안은 미소 지었다.
“자세한 건 성에 들어가 얘기하겠습니다.”
그러자 헤로스 백작이 그 즉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열어라.”
“예.”
병사들이 성문을 열자 로안이 몰캉이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왔다.
스스스.
레벨 16이 되자 몰캉이는 좀 더 커진 상태다.
제법 위풍 당당하다.
사람들도 몰캉이를 보며 감탄했다.
“와! 저 벌레 펫 정말 멋지게 생겼는데?”
“딱 봐도 보통 펫이 아니잖아. 영웅 펫이 분명해.”
그래. 이게 바로 영웅 펫의 포스지.
로안은 왠지 뿌듯했다.
‘이제 좀 제법 폼이 나네.’
제발 날지만 마라, 몰캉아!
그런데 몰캉이가 훌쩍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둥둥 뜬 채로 이동했다.
“오오! 난다! 날아!”
“우와아! 하늘도 나는 펫인가 봐!”
사람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로안은 불안했다.
“무리하지 말고 다시 내려가자.”
그러나 이미 늦었다.
허공을 유영하듯 우아하게 날던 몰캉이가 돌연 바닥에 곤두박질 처박힌 것이다.
‘으! 그럼 그렇지.’
녀석도 무안한지 자그만 크기로 변해 로안의 어깨로 올라가버렸다.
“로안!”
그때 헤로스 백작이 다가오며 물었다.
“방금 전 그게 무슨 소리냐?”
“사라진 식량을 되찾아왔습니다.”
“그건 코볼트들이 훔쳐갔는데 무슨 수로 되찾는다는 거지? 가만! 그럼 혹시 네 뒤에 있는 녀석이?”
“예. 그 녀석들의 우두머리죠.”
순간 로안의 뒤에서 기죽은 표정으로 눈치를 보던 코볼트 오롬이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로안 님의 말씀대로 훔쳐간 식량을 모두 돌려주기 위해 왔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성의 광장 바닥 한곳이 들썩였다.
그러더니 그곳에서 대머리에 푸른 수염을 가진 코볼트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