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위병 1호 (2) >
[염화의 지팡이의 입찰가가 6,900코인으로 올랐습니다.]
“으! 대체 누구냐?”
경매의 방에서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한 인물.
“어떤 놈이 감히 내 지팡이를 노리는 것인가?”
그는 다름 아닌 흑마법사 크라겔이다. 저주받은 숲에서 전혀 예측도 못한 방법으로 지팡이를 빼앗긴 그는 그것을 이곳 경매장에서 발견했다.
‘그 가증스러운 놈이 내 지팡이를 훔쳐가 경매장에 올리다니.’
그는 로안만 떠올리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놈을 손보는 거는 나중 일이고 일단은 지팡이를 찾는 게 시급했다.
문제는 누군가 그 지팡이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는 그의 약을 바싹 올리며 천천히 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쉽게 포기할 것 같지가 않군.’
그는 인내심이나 오기라면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 또한 만만치 않아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느껴졌다.
‘틀림없어. 돈 많은 귀족 놈들 중 누군가 유희를 즐기고 있는 거다.’
크라겔에게는 필사적으로 이 지팡이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지만, 상대에게는 그저 놀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존재할 가치도 없는 것들 같으니!’
그가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존재가 바로 귀족이다. 물론 그 귀족에는 왕족이나 황족도 포함된다.
거기에 더해 모든 부유한 자들도 마찬가지.
‘큭! 탐욕스러운 돼지들! 하지만 곧 새로운 세상이 온다. 머지않아 너희들은 내 발 아래 때만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망이 번쩍였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그 정체불명의 상대와 놀아줘야 할 상황이다.
무려 3일 동안 말이다.
‘하필 지금 남은 자금이 딱 2만 코인뿐인데.’
그는 지금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끌어 모은 거의 모든 코인을 들여 한 가지 물건을 구매했기 때문이다.
* 위장의 팔찌
-등급 : 전설
-설명 : 공개 창의 정보를 완벽히 위장할 수 있으며 외모의 존재감을 대폭 낮춘다.
-장착 제한 : 각성자
-주의 사항 : 통안(通眼)의 능력을 가진 일부 존재에게는 간파될 수 있음.
바로 이것이다.
무려 50만 코인이나 되는 전설 등급 팔찌.
오직 비밀 경매장에서만 파는 것으로 이것을 장착하는 순간 그는 완전 다른 인물처럼 외부에 보인다.
덕분에 그는 지금 왕궁의 조사단의 추적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는 지금 흑사문을 멸망시킨 배후로 지목되어 수배된 상태였다.
신성력을 가진 왕궁의 사제들과 상급 기사들이 지금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뒤쫓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내가 지금 배부른 돼지 놈들과 장난을 벌이고 있을 때가 아니지.’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염화의 지팡이를 즉시 구매가에 입찰한다!”
[염화의 지팡이가 당신에게 낙찰되었습니다.]
[20,000코인이 지불되었습니다.]
그렇게 크라겔은 자신의 지팡이를 되찾았다. 그는 지팡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이걸 찾았구나.’
지팡이가 돌아오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내가 내 지팡이를 내 돈 주고 사다니!’
무엇보다 로안이 이제 낙찰가에서 수수료를 제외한 19,000코인을 손에 쥘 것이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로안! 네놈은 절대 용서 못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로안이 어느 도시의 경매장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곳 도시 헤르바에만 경매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
레온 왕국에만 해도 수십 개가 넘는 도시가 있고 그 각각에 다 비밀 경매장이 위치해 있다.
하물며 대륙 전체로 따지면 수를 셀 수도 없다.
‘그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모르겠군.’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어디에 있든 기다려라! 반드시 찾아내 죽인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물론 염화의 지팡이는 아공간에 보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스스.
경매장 주변의 짙은 안개 지대를 빠져나왔을 때의 그는 10대 후반의 평범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웨이브 진 밤색 머리카락 아래 순박할 정도로 커다란 두 눈을 가진 소년.
【이름】 랄프
【레벨】 0
【종족】 인간
【신분】 방랑자
【소속】 없음
그의 실제 레벨은 31.
그러나 정보 창에는 0으로 나와 있다.
외모도 완전히 달라져 아주 평범한 비각성자 소년처럼 보인다.
‘이러면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지?’
상공에 생겨난 시커먼 구멍과 곳곳에서 날뛰는 거대 벌레들. 모두 경매장에 가기 전에는 없던 것들이다.
‘저 구멍에서 나오는 기운은 나에겐 낯설지 않은 기운인데?’
다름아닌 마기(魔氣).
그가 가진 흑마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흥미롭군.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곧 그 때가 온다는 징조일까?’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날은 곧 온다.’
세상이 뒤집힐 그날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흑마법의 힘을 준 한 절대적 존재의 약속이니까.
그 생각을 하며 잠시 걷는데 누군가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와아! 또 10레벨 승급석이라니! 축하한다, 하일. 이건 네 거다.”
“오오! 이거 꿈 아니지?”
“맙소사! 축하해, 하일! 정말 잘됐어!”
“축하합니다, 하일 형.”
“모두 고맙다. 로안, 네 말대로 오늘 드롭률 죽이는구나. 잠깐 사이에 승급석이 두 개나 나오다니 말이야.”
“어서 승급해, 하일. 이제 함께 레벨 올려야지.”
“그래. 알았다.”
누군가 베르미스들을 해치우고 운 좋게 10레벨 승급석을 얻은 모양이다.
피식.
크라겔의 입가에 조소가 피어났다.
‘10레벨? 딱 죽기 좋은 레벨이지.’
오래도록 소심했던 이들이 직업이 생겼다며 갑자기 대담해지는 레벨.
그러다 보니 분수도 모르고 강한 괴물들에게 덤볐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곧 죽을 놈들이 꽤나 좋아하는군.’
크라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가려했다.
‘가만?’
그러던 그가 돌연 멈춰 섰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로안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무심코 넘겼지만.
크라겔의 두 눈이 번뜩였다.
‘틀림없어. 분명 로안이라고 했다.’
물론 로안은 무척 흔한 이름이다.
어느 마을에 가든 로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은 한둘 있으니까.
심지어 고양이나 개에게 로안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놈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왠지 목소리도 귀에 익은 듯했다.
‘일단 확인해보는 게 좋겠지.’
곧바로 움직이려던 그는 갑자기 한쪽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자는?’
마치 환상처럼 그의 시야에 나타난 한 60대 남자.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다. 드러난 팔뚝은 노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근육질.
그런 그가 대검을 한손으로 쥔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 기세에 숨이 막힐 정도다.
【이름】 마쿠스
【레벨】 79
【직업】 암흑마검사
【신분】 공작 / 가주
【소속】 클라우 검가
‘마쿠스 공작!’
크라겔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레온 왕국 최강이자 대륙을 통 털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가(劍家)인 클라우 가문.
그곳의 주인이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설마 저 자까지 왕궁의 조사단에 파견 된 건가?’
소문으로 듣기에 마쿠스 공작은 흑마법사라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죽인다고 했는데.
‘빌어먹을! 여기까지가 내 운명의 끝인가?’
아무리 흑사문의 멸망에 흑마법이 관여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해도 왕국 최강의 검사가 직접 왕림할 줄이야.
저벅. 저벅.
마쿠스 후작이 두 눈에 섬뜩한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오고 있다.
‘역시 나를 죽이러 온 게 분명하다.’
크라겔은 맥이 빠졌다.
어지간해야 도망을 치든, 아니면 반격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마쿠스 후작이라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그리 놀라느냐, 아이야.”
그런데 마쿠스가 우뚝 멈춰서더니 크라겔을 쳐다봤다.
“내가 그리 무서운 게냐?”
“아, 아닙니다.”
“이름이 랄프로구나.”
“예.”
크라겔은 비로소 자신이 완벽하게 위장된 사실임을 인지하고는 속으로 안도했다.
‘큭! 통안의 능력이 아니고는 내가 누군지 알아낼 수 없다는 걸 깜빡했군.’
제 아무리 왕국 최강의 검사라 해도 위장의 팔찌로 감춰진 정체까지 꿰뚫어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십년감수할 상황.
“지금 이곳은 꽤 험악하니 내가 왔던 저 길로 가거라. 그럼 안전할 것이다.”
마쿠스는 대검의 끝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그의 뒤에 있던 모든 벌레 괴물들이 산산이 부서진 채 흩어지고 있었다.
‘정말 전율스러운 실력이군.’
그가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근처의 괴물들이 다 죽은 것이다.
“예.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마쿠스가 가리킨 방향은 방금 전 크라겔이 가보려던 방향과 정 반대다.
‘어쩔 수 없지.’
그의 판단은 빨랐다.
로안이고 뭐고 일단 살고난 이후에 생각할 일이니까.
그는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마쿠스 공작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마쿠스가 힐끔 다시 한 번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녀석이군.’
그는 랄프에게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뭐가 이상한지 알 수 없던 것이다.
그렇다고 녀석을 붙잡고 물어볼 상황도 아니다.
그에게는 지금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까.
“하하하! 난 이제 전사다!”
“축하해요, 하일 형.”
“호호, 그래. 무난하게 잘 선택했어.”
승급석으로 10레벨이 되고 직업도 얻었다며 좋아하는 소리들.
마쿠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크라겔은 거리가 멀어서 보지 못했지만 마쿠스에게는 손바닥을 보듯 가까운 거리다.
‘흠.’
다른 녀석들은 별 볼일 없지만 한 소년이 특이했다.
‘마도객이라? 게다가 마룡의 무기까지? 꽤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그 사이 다시 괴물들과 전투가 벌어졌다. 마쿠스는 로안이 싸우는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그러던 그의 안색이 굳었다.
‘아니, 저 토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상 위에 새처럼 떠 있는 하얀 털의 토끼!
‘저 녀석이 왜 저 로안이라는 놈에게 가 있는 건가?’
혹시 다른 토끼인가 싶어서 다시 쳐다봤지만 틀림없었다.
그가 난이도 높은 던전에서 최종 보스를 처치한 후 운 좋게 얻은 보물 중의 하나.
그는 그것을 외손녀인 레이에게 아낌없이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한편 그때 어둠을 뚫고 걸어오는 한 소녀. 그녀는 뭔가 심통이 났는지 투덜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아끼지 말고 즉시구매할 걸 그랬나 봐요.”
그녀의 뒤를 기사 페덴이 호위하며 걸어왔다.
“하지만 2만 코인이면 너무 큰돈입니다, 레이 아가씨.”
소녀는 다름 아닌 레이.
방금 전 염화의 지팡이의 입찰에 실패해 힘없이 경매장을 빠져나온 상태다.
“그건 그렇죠? 1만 코인 정도였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너무 상심 마십시오, 아가씨. 제가 어떻게든 토실이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던 페덴은 돌연 전방을 보며 흠칫 놀랐다.
누군가 서 있었는데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헉! 저 분은?’
정보 창을 통해 그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는 너무 놀라 숨조차 쉬지 못했다.
레이 또한 긴장한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마침 오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널 찾았다, 레이.”
우람한 덩치의 노검사를 본 레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외할아버지?”
< 호위병 1호 (2) > 끝
ⓒ 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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