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고한 빛이 깃든 당근 (2) >
톡!
토끼가 다시 앞발로 로안을 쳤다.
거만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눈빛은 맑았다.
게다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녀석의 눈만 보면 마치 ‘당근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놈이 설마 아공간에 있는 당근 냄새를 맡은 건가?’
그럴 리 없다.
아공간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라 공기를 통해 냄새를 맡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까 아이템을 쥘 때 당근 냄새가 손에 밴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 당근은 전용 아이템이라 토실이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건데?’
아이템 설명에 토실이 전용 아이템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다른 토끼의 경우에는 그 당근이 음식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앞의 토끼가 토실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이놈이 진짜 토실이면 아공간에 있는 물건이라도 본능적으로 감지할 거야.’
달리 전설 등급 펫이 아니다.
놈에게는 오감을 초월한 특별한 감각이 있으니까.
‘맞다면 이런 대박이 없는데.’
로또에 당첨된 것과 같은 행운.
전설 등급 펫이 저절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카오니아에서 펫은 주인에게 종속된다. 무조건 주인의 말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이 기본 시스템.
그러나 당연히 예외도 있다.
토실이와 같은 전설 등급 펫은 주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이 아니라 친구나 동료로 생각하는 녀석이지.’
즉, 말만 펫이지 사실 독립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충성심이라는 것도 형식적인 것일 뿐, 내키지 않으면 언제든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요약하자면 더러워서 안 키운다는 말이 나올 만큼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승급을 해주면 웬만해서는 떠나지 않지.’
인간이 비각성자에서 각성자가 되듯, 혹은 레벨 9에서 레벨 10이 되듯, 펫도 각성이나 승급을 하기 때문이다.
‘이 녀석의 크기를 보니 각성은 했지만 그 이후 승급은 못한 상태야.’
게임에서 토실이를 펫으로 들여 본 적 있어 안다.
승급을 하면 토실이의 크기가 좀 더 커지는데, 그래봤자 어른 손바닥보다 약간 더 커질 뿐이다.
지금은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
‘숭고한 빛이 깃든 당근을 주면 이놈을 길들일 수야 있겠지만.’
로안은 섣불리 당근을 꺼내지 않았다. 멀리서 자신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미 토실이의 주인이 있었나?’
【이름】 레이
【레벨】 26
【신분】 카젤 자작의 딸
【직업】 마법사
【소속】 레온 왕국 카젤 가문
카젤 자작가의 영애인가?
고고하면서도 도도한 분위기의 소녀로 상당한 미모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근데 뭐지? 없던 설정같은데?’
카젤 자작에게 저런 눈부신 외모의 딸이 존재한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게임에서 카젤 자작에게는 아들만 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정이 바뀐 건가?’
카오니아 세계의 후반 흐름이야 랜덤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전반의 흐름은 역사책을 외우듯 빠삭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 세계는 게임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제법 있다.
미소녀 레이와 토실이도 뜬금없고, 심지어 숭고한 빛이 깃든 당근이 드롭 된 장소도 게임과는 상당 부분 다르니까.
‘이것 말고 바뀐 것들이 얼마나 될까?’
큰 흐름은 바뀌지 않았을 거라 믿고 있지만, 생각해보니 그조차도 장담할 수는 없는 일.
뭐든 섣불리 속단하지 말고 상황에 맞춰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레이는 몹시 기분이 불쾌했다. 그녀의 펫 토실이가 갑자기 웬 소년의 앞으로 가서 먹이를 달라고 애교를 떨고 있을 줄이야.
【이름】 로안
【레벨】 9
【신분】 방랑자
【소속】 없음
이름은 로안.
레벨 10도 안 되는 저렙.
먼저 정보창을 살펴 본 그녀는 담담히 물었다.
“저 로안이라는 녀석은 뭐지?”
“놈은 용병들의 짐꾼입니다, 레이 아가씨.”
그녀의 뒤에서 주눅 든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던 브라드가 대답했다.
“레벨이 9인데 짐꾼이라고?”
“운이 엄청나게 좋은 녀석이죠. 오늘 각성석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짐꾼이 아니라 정식 파티원이 되었을 겁니다.”
“그래?”
레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에게 있어 누가 각성석 하나 얻었다는 얘기는 별다른 관심거리도 되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수상한 녀석이야. 저 녀석은 물론이고 그 동료들의 옷과 짐을 다시 수색해봐.”
“예, 레이 아가씨.”
방금 전 수색을 끝낸 자들이다.
그런데 또 하라니!
이유불문 하라면 해야 한다.
토를 다는 순간 페덴의 검이 브라드의 신체 부위 중 한 곳을 또 잘라버릴 것이다.
브라드는 즉각 달려가 외쳤다.
“너희들! 배낭 안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바닥에 쏟아라. 주머니에 있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너희는 죽는다.”
브라드의 서슬 퍼런 기세에 닐스 등은 어쩔 수 없이 배낭의 짐들을 바닥에 쏟았다.
뭐라고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지금 던전 입구의 분위기는 무슨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한편 토실이는 로안이 뭔가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짓자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사라졌다.
‘나중에 찾아오겠다는 뜻인데? 역시 영리한 녀석이네.’
놀랍게도 녀석은 로안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로안을 곤란하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승급 아이템인 숭고한 빛이 깃든 당근을 원하겠지만.
‘잘됐어. 내가 어디에 있든 녀석은 조만간 찾아올 거야.’
레이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겠지만 토실이의 진정한 주인 아니 친구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남의 펫을 뺏는 건 도의가 아니다만.’
그러나 어차피 토실이는 남의 펫이 아니다.
녀석은 누구에게 종속되는 존재도 아니고, 지금은 그냥 그런척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 사이 레이의 관심은 다시 토실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토실이가 그녀의 어깨 위에서 아주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쯧,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토실이의 실체를 로안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얼굴은 귀엽지만 속은 능구렁이.
충성도는 그저 속임수일 뿐.
레이는 그녀가 토실이의 당근 셔틀에 불과하단 걸 꿈에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로안 등의 짐 수색이 모두 끝났다. 뭐라도 털어보려고 기를 썼지만 다들 평범한 아이템들 뿐.
특히 로안의 경우 아공간에 모든 아이템을 넣어둔 터라 허름한 옷가지 외에는 그 흔한 무기조차 없었다.
그가 무기로 쓰던 고블린의 녹슨 칼은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부서져버렸으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요, 레이 아가씨.”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보내주도록 해.”
레이는 토실이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웬일인지 그녀가 쓰다듬어도 가만있었기 때문이다.
“당근 줄까? 자, 먹어.”
[토실이가 당근을 좋아합니다.]
[충성도가 1 올랐습니다.]
그러나 토실이는 슬쩍 시선을 돌려 멀리 사라지는 로안의 뒷모습을 아쉬운 듯 쳐다봤다.
그런 줄도 모르고 레이는 토실이를 쓰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 * *
고블린 던전에서 나와 도보로 반나절 정도 이동한 곳에 위치한 도시 헤르바.
이곳은 레온 왕국 중부의 소도시 로 비록 카젤 자작령 내에 위치하고 있지만 관할은 다르다.
국왕이 파견한 총독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으니까.
그런 만큼 여기는 카젤 자작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여긴 안심해도 된다. 우리 아지트거든.”
헤르바 변두리에 위치한 허름한 건물의 지하.
여기가 바로 블랙호크 용병단의 아지트였다.
나중에는 대륙을 진동시키는 거대 용병단이 되지만 지금은 이들 3명이 다인 것이다.
“일단 이걸 받으세요.”
이제 동료들에게 아이템을 분배할 시간.
그래서 10레벨 승급석을 닐스에게 건넸다. 그러나 닐스는 손을 흔들며 사양했다.
“아니야. 로안 네가 먼저다. 우리가 비록 함께 족장을 잡긴 했지만 로안 네가 아니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어.”
“닐스의 말이 맞아, 로안. 너부터 승급하고 그 다음에 우리도 챙겨줘.”
데라와 하일도 닐스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로안은 미소 지었다.
“저는 이미 하나 있어요. 그러니까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하나가 또 있다고?”
“미리 준비해뒀죠.”
순간 로안의 손에서 또 하나의 10레벨 승급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네.”
“맙소사! 어디서 얻은 거냐?”
“미리 구해뒀어요.”
닐스 등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로안은 닐스의 손에 승급석 하나를 쥐어줬다.
“이제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그래. 고맙다.”
닐스는 그제야 승급석을 받았다.
“그럼 데라 네가 먼저 해라.”
그는 그것을 데라에게 내밀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하일도 마찬가지.
“닐스 너부터 해!”
“우리야 어차피 차례가 돌아올 테니 급할 것 없다.”
결국 닐스가 먼저 하기로 결정했다.
“좋아! 그럼 내가 먼저 한다.”
닐스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10레벨 승급석을 입안에 넣었다.
화아아악―
순간 눈부신 빛이 일어나 그의 몸을 휘감았다.
[당신은 10레벨 승급에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10레벨!
닐스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기다리던 것은 바로 직업.
[10레벨이 되면 직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선택 가능한 직업입니다.]
[1. 전사(일반) 100%]
[2. 권사(일반) 100%]
[3. 창투사(희귀) 50%]
[4. 마창사(영웅) 1%]
[5. 랜덤 ??]
뒤의 확률은 성공 확률이다.
선택한 직업 획득에 성공하면 무사히 승급하지만, 획득 실패할 경우 다시 레벨 9로 하락한다.
10레벨 승급석이 아주 많다면 모를까, 가능하면 100% 확률에 가까운 직업을 선택하는 게 유리하다.
‘50% 확률.’
닐스는 고심했다.
그동안 그는 주로 창을 무기로 사용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창투사 아니면 마창사가 되었으면 싶다.
기왕이면 마창사가 좋겠지만 확률이 너무 극악하니 문제.
따라서 창투사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실패하면 9레벨로 하락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시 승급석을 얻으려 큰 고생을 할지라도 적성에 맞지 않은 전사나 권사 쪽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3번. 창투사로 선택하겠습니다.’
그는 결연한 눈빛을 지으며 속으로 엄숙히 외쳤다.
‘제발! 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순간 다시 광풍과 같은 빛이 몰아쳤다.
[직업 획득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은 창투사가 되었습니다.]
“오오!”
간절한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
정말로 바라던 창투사가 된 것이다.
50% 확률이었지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하하하! 성공이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데라와 하일도 환호했다.
“축하해!”
“희귀 직업 창투사가 되다니! 정말 축하한다, 닐스.”
로안도 축하해주었다.
“축하해요, 닐스 형.”
“모두 고마워. 앞으로 너희들의 레벨 업은 내가 책임진다.”
닐스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로안은 기다렸다는 듯 아공간에서 거무튀튀한 날의 창 한 자루를 꺼내 닐스에게 건넸다.
“받아요, 형.”
“오! 이건?”
영웅 등급의 무기인 고블린 족장의 창이다.
창투사가 된 그에게 이 무기가 있으면 말 그대로 호랑이에게 날개가 생기는 격이다.
“정말 이거 내가 가져도 되냐?”
“물론이죠.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요.”
“그래. 고맙다.”
닐스는 사양하지 않았다.
레벨 15제한이라 당장은 쓸 수 없으니 아지트 창고에 잘 보관해둬야겠지만 말이다.
그는 어서 레벨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보다 이제 로안 너도 승급해야지?”
“지금 해야죠.”
로안은 끄덕이고는 10레벨 승급석을 입안에 넣었다.
순간 눈부신 빛의 폭풍이 몰아쳤다.
[당신은 10레벨 승급에 성공했습니다.]
드디어 Lv10.
이제 직업 선택의 시간이 왔다.
그런데.
톡.
그때 뭔가가 로안의 볼을 살짝 쳤다.
< 숭고한 빛이 깃든 당근 (2) > 끝
ⓒ 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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