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를 기회로 (1) >
붉은 달이 두 번 뜬 후 10일이 지난 밤. 로안의 예상대로 흑사문에는 대재앙이 엄습했다.
늦은 오후부터 시작된 좀비들의 공격은 점점 더 강력해졌고, 급기야 한밤중에는 수천 마리가 넘는 좀비들이 흑사문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
“좀비들을 막아라!”
“물러서지 마라! 모조리 죽여라!”
“크아아악!”
“으아악!”
문주 추마광의 지휘 아래 흑사문의 무사들은 좀비들과 치열하게 싸웠지만 밤이 깊어갈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크윽! 문주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맞습니다. 오늘 크라겔 놈이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습니다. 일단 피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에 추마광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하들이 하나둘 좀비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빌어먹을! 그때 그 꼬마 놈을 어떻게든 없애버렸어야 했다.”
추마광 또한 지금의 재앙이 무엇 때문에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천재 흑마법사라 불리는 크라겔!
그놈이 지금 누나의 원수를 갚겠다고 벌이는 일이니까.
‘그놈이 어디있는지만 알아도 없애버릴 텐데, 제기랄!’
흑마법사 크라겔은 어둠 어딘가에 숨어서 좀비들을 지휘하고 있을 뿐 추마광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아까 좀비들이 습격할 당시부터 추마광은 계속 크라겔을 찾았지만 놈은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일단은 피하고 보자.’
부하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추마광은 이미 도주를 결심하고 있었다.
전세가 기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흑사문이 괴멸 직전의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피해라! 후일을 기약한다!”
추마광이 크게 외치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생존한 무사들이 앞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퇴각하라!”
“모두 피해라!”
사방에서 좀비들이 몰려드는 터라 어디로 도주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모두들 기를 쓰고 흑사문을 벗어나려 애썼다.
“퇴각이라? 훗, 헛꿈을 꾸는군. 흑사문에 속한 것들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한다.”
흑색 후드를 눌러쓴 채 어둠 속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청년.
그의 두 홍채가 핏빛으로 섬뜩하게 빛났다.
* * *
한편 장삼이 나간 후에도 로안은 쉽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곳 세계에서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아무리 무덤덤하게 넘기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하필이면 그 장면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말았으니까.
‘나는 혹시 환생이 아니라 사실은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닐까?’
밖에서 지금도 사람들이 절규하며 죽어가는 소리가 끝없이 들려온다.
“으아악! 크아아악!”
“흐흑! 사, 살려···끄아악!”
로안의 신체는 블러디 좀비가 되며 각종 감각이 강화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시각 뿐 아니라 청각도 훨씬 밝아졌다.
끄드득! 크직! 우적우적!
좀비들의 입에서 사람들의 머리가 터지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
내장을 촵촵 씹어 먹는 소리.
살을 콱콱 찢어 먹고 피를 추릅추릅 마시는 소리까지 너무 선명하게 들려왔다.
‘젠장!’
이런 상황에서도 아직까지 정신 줄이 유지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여긴 지옥이다.
틀림없다.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지옥!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차라리 일찌감치 죽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안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지옥이라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폐암 말기로 병원에 누워 있을 때 건강한 육체만 가진다면 세상에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비록 지옥과 같은 세상으로의 환생이지만 말이다.
‘지금만 잘 넘기면 나는 살 수 있다.’
그냥 사는 정도가 아니라 이곳 세계에서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강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아니, 그냥 강자도 아닌 최강의 존재! 말 그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이대로 포기하긴 너무 억울해.’
설령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새로운 삶을 포기하기란 억울한 일이다.
하물며 참고 견디면 이곳 세계의 지존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엔 변수가 많으니 게임의 플레이처럼 모두 이루어진단 보장은 없지만.
‘아무리 낮게 잡아도 이곳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다.’
전생으로 따지면 최하 강남에 빌딩을 가진 건물주 정도는 될 수 있는 것이다.
흙수저가 아닌 금수저로서의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살아야 한다.
반드시.
억울해서도 못 죽는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방금 장삼은 그대로 나갔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흑사문의 무사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데릭과 같은 크라겔의 직속 권속들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는 건 더 위험하다.
혹시 몰라 철창문은 열어놨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안에 있는 게 안전할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죽은 척 위장하자.’
요동치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자 잊고 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지금 비록 3일 뿐이지만 블러디 좀비로 변한 덕분에 어둠의 마력을 약간 보유하고 있다.
‘잘하면 죽음 위장술을 펼칠 수 있을 거야.’
죽음 위장술!
어둠의 마력이 미량만 있으면 펼칠 수 있는 언데드 마스터의 비밀 주문 중 하나다.
[어둠의 기운이 소모되었습니다.]
[어둠의 기운 잔여 시간은 59시간 28분입니다.]
어둠의 마력을 정말 미량만 사용한다고 했는데, 주문 자체가 상위의 것이다 보니 무려 12시간이 넘게 줄어들고 말았다.
그래도 덕분에 죽음 위장술 발동에는 성공했다.
[언데드 마스터의 죽음 위장술이 발동되었습니다.]
[지속 시간 : 8시간]
툭! 푹! 푸확!
순간 로안의 몸이 피투성이로 변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난 것도 모자라 머리가 반쯤 터져나가고, 심장 부위도 깊게 파여 나갔다.
누가 봐도 처참하게 죽은 좀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지만, 로안은 물론 죽지 않았다.
‘으윽! 좀비 상태로 상위 언데드의 주문을 사용했더니 고통이 장난이 아니네.’
본래라면 죽음 위장술을 펼쳐도 고통 따위는 느끼진 않지만, 지금 그는 전신이 터진 끔직한 고통에 미쳐죽을 지경이었다.
‘이 저주는 점점 심해질 텐데.’
그러나 그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주문이 발동된 순간 앞으로 8시간 동안은 그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8시간 정도면 모든 게 끝이 나 있겠지.’
언데드 마스터가 최악의 상황에 봉착했을 때 완벽한 죽음으로 위장해 생존을 도모하는 비법.
적어도 레벨 100 이상의 상위 레벨이 아니면 간파가 불가능하다.
‘흑사문주 추마광이 아니라 크라겔이 나타나도 지금의 내가 살아있는 건 눈치 채지 못한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지금쯤 흑사문주나 크라겔 모두 레벨이 30이다. 레벨 0으로 시작하는 플레이어에 비하면 너무 불공평한 시작이지만, 애초부터 설정이 그러니 어쩌겠나.
‘이제 또 다른 기억들도 최대한 떠올려보자.’
여전히 밖에는 아비규환 속 끔찍한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지만,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생각뿐.
‘게임의 지식들을 까먹기 전에 계속 상기해놔야 해.’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는 것들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모두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터라 혹시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끝장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감옥 안으로 누군가 황급히 들어왔다.
‘누구지?’
지금 상황에서 로안은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시각은 차단되어 있다.
‘또 장삼인가?’
그런데 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다.
“포위망이 너무 두터워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문주님.”
“빌어먹을! 나도 크라겔 놈이 이렇게 철저히 준비해 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감옥으로 오신 겁니까?”
“내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부문주.”
굵직한 남자의 음성. 그는 다름 아닌 흑사문주 추마광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와 말하는 이는 부문주 이도굉.
‘저놈들이 여기에 무슨 일이지?’
로안은 순간 긴장했다.
죽음 위장술이 절대 발각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흑사문주가 나타난 상황이다 보니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 흑사문 서열 1위와 2위가 감옥에 들어온 건 아주 이상한 일.
‘미리 죽음 위장술을 펼쳐둔 게 신의 한 수였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추마광이 만약 블러디 좀비 상태의 로안을 봤다면 그 즉시 머리를 박살내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오오! 혹시 이곳에 비밀 통로라도 만들어 두신 것입니까?”
그때 이도굉이 기대감이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궁금한가, 부문주?”
“그렇습니다. 문주님께서 대체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신지 소인은 궁금해 죽겠습니다.”
“부문주! 아니, 이도굉.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넌 길거리 양아치 놈들 밑에서 앵벌이를 하고 있었다.”
“하하, 어찌 그때 얘기를······.”
순간 추마광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잘 들어라, 이도굉. 길거리에서 빌어먹던 놈을 흑사문의 부문주로 만들어 떵떵 거리게 해주었으니 이제 그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무, 물론이옵니다. 소인 문주님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이옵니다.”
이도굉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외치자 추마광은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네가 불구덩이에 뛰어들 때가 왔다. 오늘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무엇이든 말씀만 하소서.”
한편 로안은 긴장한 상태로 추마광과 이도굉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속으로 궁금하긴 했다.
‘그러고 보니 추마광 저놈은 오늘 여기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는 지는 게임에서도 알지 못했다.
자세한 과정은 나오지 않고 탈출했다고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하면 오늘 그 비밀을 알 게 될 것 같았다.
‘여기에 비밀 통로라도 숨겨져 있는 건가?’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측 밖이었다.
갑자기 추마광이 손을 뻗어 이도굉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놀란 이도굉이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추마광의 손을 치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끄으윽!”
애초부터 이도굉의 무공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추마광은 아무나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무공이 낮지만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이도굉을 부문주로 앉혀 놓았기 때문이다.
“끄으윽! 왜, 왜 저를······.”
이도굉은 목이 졸린 상태로 간신히 물었다. 추마광이 대답했다.
“미안하다, 이도굉. 하지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끄으윽!”
이도굉은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록 불구덩이라도 가겠다고 말했지만 죽을 생각까지는 없던 터라 그의 눈빛에는 억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끅!”
그러다 이내 그는 축 늘어졌다. 여전히 부릅떠진 두 눈에는 한이 가득 맺혀 있었다.
“크큭! 크라겔 놈을 완전히 속이려면 이 방법뿐이다.”
추마광은 의미모를 소리를 지껄이더니 곧바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츠으으읏!
순간 그의 두 눈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나와 그와 이도굉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연기가 사라진 후 죽은 이도굉의 얼굴은 추마광과 동일하게 변해 있었다.
얼굴뿐 아니라 체격도 마찬가지였다.
추마광은 자신과 동일하게 변한 이도굉의 몸에 자신의 옷을 입혔다. 모든 소지품을 빼지 않은 건 물론이고 심지어 흑사문주의 권능을 의미하는 흑사패도(黑蛇覇刀)마저 이도굉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놈을 완벽하게 속이려면 단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니 추마광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가라, 이도굉! 아니, 지금은 추마광이겠지. 가서 내 대신 다시 죽어라.”
놀랍게도 죽은 시체 상태인 이도굉은 흑사패도를 손에 쥔 채 씩씩하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도굉의 머리 위에 빛나는 정보창에 있는 이름 또한 추마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름】 추마광
【레벨】 30
【신분】 흑사문 문주
‘흐흐, 이도굉이 내 대신 잠시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럼 크라겔 놈도 내가 죽은 줄 알겠지.’
이른바 금선탈각의 계책!
추마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동시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두고 보자, 크라겔! 오늘일의 백배 천배로 네놈에게 갚아줄 것이다.’
추마광은 크라겔에게 복수를 다짐하고는 감옥의 방들을 둘러봤다.
‘저쪽이 좋겠군.’
웬 좀비의 사체가 하나 널브러져 있는 방.
거기라면 그가 은신해 있기 딱 좋은 장소였다.
‘크라겔 그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고 해도 귀식대법을 펼치면 날 발견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해 추마광은 귀식대법을 펼치기로 했다.
이걸 펼치는 순간 일정 시간 동안 호흡은 물론 체온이나 맥박까지 멈춰 시체처럼 변해버린다.
단점이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완전 무력화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
‘하지만 내가 여기 있는 걸 누구도 알지 못할 텐데 무슨 걱정인가?’
때마침 그의 은신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줄 은폐물이 하나 존재했다.
그는 가볍게 지둔술을 펼쳐 죽은 좀비의 사체 밑으로 파고들었다.
곧바로 땅을 판 흔적을 지운 후 그곳에서 귀식대법을 펼쳤다.
‘이제 하루만 있다 깨어나면 크라겔 놈의 추적을 완전히 피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는 누군가 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 못했다.
< 위기를 기회로 (1) > 끝
ⓒ 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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