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워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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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자는 감히 앞은 보지 못하고 바닥만을 보며 발발 떨었다. 당장에라도 맥켄지가 불같이 화를 내 자신의 나머지 다리를 부러뜨릴 것 같았다. 맥켄지가 알아 버렸다. 자신이 도망간 것도 알았고 자신이 워린과 부정한 짓을 한 것도 알게 되었다.
캔디스와 사흘간 잤다는 것을 알아 버린 맥켄지는 제 오른쪽 발목을 아예 망가뜨렸다. 그런데 또 몸을 함부로 굴려 버렸고 제 품에서 말라 죽으라고 한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 버린 노예를 그가 용서할 리 없었다.
하지만 워린과 주먹다짐을 했던 맥켄지는 늙고 귀해 보이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들은 후로는 아예 자신에게서 관심을 꺼 버렸다. 그는 그렇게 싫어하던 캔디스와 함께 퍽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너자는 자신을 아예 없는 취급을 하는 맥켄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맥켄지에게 버림받지 않으려 도망갔다. 그에게서 충동적으로 도망쳤지만, 저를 진창으로 처박은 워린에 의해 붙잡혔고 강간당했다.
다시는 제 손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 했다. 자살하고 싶어질 만큼 괴롭혀 준다고 했다. 그는 밤새도록 자신을 강간하며 손찌검을 했고 물어뜯었다.
유일하게 저를 돌봐주고 애정을 주었던 맥켄지가 더러운 제 꼴을 보고 드디어 질려 버린 게 분명했다. 짐승에게 맬 법한 목줄을 목에 차고 짐승처럼 끌려오는 자신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감히 제 소유의 노예가 방탕하게 몸을 내준 것이 혐오스러웠을 것이다. 그래, 추잡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제 눈앞에서 말라 죽으라고 강요했던 맥켄지는 더 이상 자신을 보지 않았다.
끝났다. 모든 게 끝났다. 가만히라도 있으면 그가 적선하듯 내리는 관심과 애정에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것마저 끝났다. 제 손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진창을 구르고 있던 자신을 구해 주었던 맥켄지를, 이제 겨우 말을 튼 그레머와 샬로메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
천치처럼 눈을 껌뻑이던 너자의 목이 거칠게 당겨졌다. 너자는 순간 조여지는 숨통에 그 와중에 목이 졸리기 싫어 빨간 개 목줄의 틈 사이로 양 손가락을 넣어 당겼다. 조금은 트이는 숨통에 헥헥거리고 있을 때 그의 목줄이 더욱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제야 너자의 정신이 돌아왔다. 검은색의 망토를 두른 전사들이 저와 워린의 양옆에 일렬로 마치 호위하듯 서 있었다. 언제 옆으로 몰려든 거지?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워린이 다른 말 없이 너자의 목줄을 잡은 손에 힘을 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몹시 빠르고 보폭이 넓은 그의 걸음걸이가 너자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하지만 아까처럼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고 싶지 않았다. 마치 짐승처럼 목덜미가 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것도 싫었다. 너자는 와중에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질러대는 제 발목을 애써 무시하고 워린을 따라갔다.
길고도 긴 본관 예배당을 빠져나와 검은색 마차가 서 있는 곳까지 따라왔다. 마차가 종착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바짝 벼려진 너자의 신경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래서 마차까지 몇 걸음 남기지 못한 너자가 결국 크게 넘어졌다.
보는 사람이 아플 정도로 크게 구른 너자였지만, 워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너자가 넘어진 것에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병신, 이제 걷지도 못하는구나?”
“…….”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야? 말대꾸하는 거? 아니면 구멍에 자지 끼우는 거? 정액 싸는 거?”
질 낮은 시정잡배가 할 법한 말이 워린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술술 나왔다. 너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어서 일어나라는 듯 제 목줄을 잡아당긴 워린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워린은 자신을 원망하듯 바라보는 야만인에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맥켄지가 엄청나게 화났나 봐.”
“…….”
“아예 너를 보고 있지도 않잖아. 완전히 버림받았네. 하긴 어떤 주인이 몸을 걸레처럼 굴리고 다니는 노예를 끼고 있겠어.”
“…….”
“축하해. 네 뜻대로 완전히 맥켄지에게서 도망쳤네.”
너무도 아픈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너자는 몹시 즐겁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워린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했다. 하얗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맥켄지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닮은 얼굴로 자신에게 그에게서 벗어난 것을 축하한다며 말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슬펐다.
워린이 그 와중에 자신을 바라보며 맥켄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야만인의 뺨을 치려고 할 때였다.
“워린.”
황제와 먼저 자리를 뜬 러트가 워린의 마차 앞에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과 함께 서 있었다. 워린은 열등감에 일그러진 얼굴을 재빨리 펴 ‘유순’한 ‘전쟁 영웅’의 낯을 만들었다. 워린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예비 가주님.”
한껏 치켜세운 워린의 말에 러트가 잔뜩 거들먹거리며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에게 호통을 쳤다. 제 친동생에게는 이러지도 못하는 러트였지만, 워린은 제게 아쉬운 게 많은 놈이었고 자신과의 거래에서 을인 입장이었다. 강약약강의 화신 러트가 워린에게 호통을 쳤다.
“왜 이렇게 늦나!”
“죄송합니다. 야만인이 잘 걷지를 못하여.”
워린의 공손한 말에 러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과 눈이 마주칠세라 들었던 고개를 밑으로 숙이는 야만인을 흥미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덩치는 산만 한 게 마치 천적을 마주친 토끼 같은 행동이었다.
몹시 유해한 눈으로 야만인을 바라보고 있는 러트에 워린이 웃는 낯을 더욱 진하게 하고 죄송하다며 너자의 앞에 섰다. 꽤 장신의 워린이 너자의 앞을 막아선 터라 러트의 시야에 야만인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러트가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편인 러트는 야만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러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에게 말했다.
“어서 마차로 들어가지.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네, 예비 가주님.”
먼저 검은색 마차에 올라탄 러트를 워린이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다 공 벌레처럼 바닥을 웅크리고 있는 야만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싫어! 내려 줘!”
워린은 감히 버릇없이 제게 반말을 찍찍하는 야만인을 밀가루 포대를 짊어지듯 어깨에 메고 가만히 있으라며 야만인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너자는 처음 맞아보는 엉덩이에 경기를 일으키며 워린의 어깨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지만, 워린은 거슬린다며 너자의 엉덩이를 한 번 더 강하게 때렸다. 그리고 넌지시 말했다.
“한 번만 더 지랄하면 이따 맥켄지 앞에서 네 똥구멍에 주먹을 처넣어 버릴 거야.”
“……!”
너자는 무시무시한 말을 해대는 워린에 버둥거리던 몸뚱이를 멈췄다. 그러다 무언가 맞지 않는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워린에게 물었다.
“왜? 맥켄지가… 이제 맥켄지 못 보는데? 맥켄지에게 보내 줄 거야?”
문맥을 파괴하며 물어보는 너자에 워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맥켄지랑 형제야. 형제 알지?”
“…뭐?”
워린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활짝 열린 마차에 너자를 짐짝처럼 집어 던지며 말했다.
“형제니 당연히 같은 집에서 살지. 아, 또 먼저 들어간 새끼 있지? 그놈의 이름은 러트고 우리 형제야.”
청천벽력 같은 워린의 말에 너자가 그게 정말이냐며 반문할 새도 없이 넓은 마차의 바닥에 형편없이 굴렀다. 그리고 강하게 박은 제 얼굴을 들어 올리는데, 마차의 의자에 앉은 고수머리 색의 남성이 하의와 속옷을 모두 벗어 제 물건을 덜렁이며 자신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워린 또한 제 하체를 휑하니 내린 채 바닥을 구르고 있는 야만인을 응시하는 러트의 기가 막힌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너자는 이 땅에 끌려와서 온갖 고생을 했고 별의별 꼴을 다 당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추잡한 꼴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너무 당황스러우면 말도 안 나온다고 하던데 너자가 딱 그 상황이었다.
마차의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얼굴만 든 너자는 맥켄지의 형제라고 불린 고수머리의 장성한 남성을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남자가 눈가에 내려온 금발의 고수머리가 거슬린다는 듯 오른손을 들어 제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남자의 엄지손가락이 반 토막 나 있었다.
너자는 전사도 아닌 것 같은 남자의 손가락이 없는 것이 의아해 무례하게 러트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러트는 그런 눈길 또한 익숙했다. 그는 되레 야만인 노예에게 제 오른손을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너자는 제 앞에 들이대진 러트의 오른손을 바라보다가 저를 끈질기게 바라보는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맥켄지와 닮은 부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얼굴도 아닌 남자의 얼굴에 딱 하나 비슷한 것이 있었다. 맥켄지보다는 못하지만 남자의 눈은 하늘처럼 새파랬다. 청명한 하늘의 색을 빼닮은 파란색의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맥켄지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짓궂은 표정을 지은 러트가 눈을 반짝이며 개처럼 엎드려 자신을 멍청하니 바라보는 너자를 보고 제 하반신에 눈짓했다.
너자가 러트의 눈짓에 저도 모르게 그의 은밀한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너자는 질색을 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저를 무시하는 노예에게 무자비한 체벌을 가했겠지만 러트는 오히려 질색하며 싫어하는 야만인 노예의 모습에 더욱 즐거워했다.
러트는 천성이 진중하지 못하고 타고난 머리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손이 귀한 가문에서 정말 힘들게 태어난 자식인지라 도노반 후작 부부 내외는 하나뿐인 귀한 자식인 러트를 오냐오냐 양육했다. 러트 또한 경쟁할 형제가 없으니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고 한량처럼 사교계에 나가 탱자 탱자 놀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정말 우연히 차남 맥켄지가 태어났다.
차남은 장남보다 진중했고 타고난 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후작 부인인 페리는 정말 어렵게 얻은 제 아이들이 권력 때문에 피의 숙청만은 하지 않기를 원했고, 그것은 다비드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후작 부부는 차남이 받고 있던 고급 교육을 황급히 끊어 버렸다. 그들은 그저 차남이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처럼 되기를 원했다. 차남에게 예쁜 것, 좋은 것, 사랑스러운 것만 안겨 주었고 차남이 잘못하는 것도 무조건 감싸 주며 키웠다. 러트는 제 동생이 인형처럼 예쁘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인 상태라 너무 행복했다.
하지만 러트의 꽃길 같은 미래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러트가 15살이 된 해의 일이었다.
아주 사소한 실수였다. 가문의 행사 중 제일 규모가 큰 사냥 대회가 열렸다. 러트는 지금껏 가문의 영지에 풀어 놓은 작은 동물들만 사냥해 봤지 영지의 외곽에 있는 깊은 산에서 커다란 산짐승을 잡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인형같이 예쁜 제 동생의 앞에서 있는 폼 없는 폼을 잡아 대며 늑대를 잡아보겠다고 설쳐댔다. 하지만 막상 늑대를 마주치니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머스킷을 장전하다 부주의로 제 엄지를 날려 먹었다. 총기를 제작하고 판매하는 가문의 후계의 머저리 같은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다. 러트는 그 일 이후로 총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대표가 될 제 아들이 총을 쥐지도 못하고 설계도조차 그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다비드는 제 아들이 백치가 되었다며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지금껏 가주로 키우던 장남을 버릴 수 없어 나머지 기능에는 하자가 없으니 도노반 리피팅 암즈를 굴릴 후계로 인형처럼 키우던 맥켄지를 갈아댔다. 지금껏 방치하며 예뻐하기만 하던 동생은 타고난 머리가 좋았고 독하기 짝이 없어 범인이라면 견디지 못할 교육을 견뎌냈다. 그리고 러트는 그런 동생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러트는 제 동생이 증오스러웠다. 동생만 아니었으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점점 입지가 견고해지고 훌륭한 남성이 되어 가는 동생은 자신보다 아름다웠으며 재능 또한 출중했다. 보통의 가문이었다면 쓸모없는 자신은 금방 목이 따였을 것이다.
의외로 자기객관화가 잘 되어 있는 러트는 가업이 잘 굴러가도록 저 대신 온갖 고생과 귀찮은 일을 잔뜩 하는 동생을 가여워했다. 저렇게 개고생을 해 봤자 맥켄지는 차남이었다. 또 혼자서 어찌나 고고한 척을 해대는지 치정 사건에 연루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한번은 맥켄지가 섹스를 하는 게 너무 보고 싶어 동생의 앞에서 라이브 섹스 쇼를 펼쳤지만 맥켄지는 더럽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책상에서 장부를 정리했다. 자신이 저 얼굴이었다면 온갖 여자를 후리고 다녔을 것이다.
러트는 제 동생이 사랑스럽기도 했고 자기보다 훌륭한 머리와 재능을 갖고 있는 게 재수 없고 짜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제 동생이 자신을 제치고 가주가 될 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끊임없이 후려친 결과 제 동생은 감히 자신에게 불손한 생각을 품지도 못했다. 러트가 맥켄지에게 가지고 있는 애증은 복잡미묘했다.
그런데 그 재수 없는 동생이 꽤 싸고도는 야만인 노예였다. 고 깜찍한 게 노예가 자신에게 빠져 버릴까 무서워 노예를 록시에 데려왔음에도 데려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워린과 맥켄지가 야만인 노예를 두고 소유권을 다투는 것이 분명했다.
러트는 질색하며 자신을 외면하는 야만인 노예의 까만 머리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덩치는 곰만 한 게 행동은 꼭 초식동물 같았다. 포식자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여 바들바들 떠는 작은 토끼. 거기에 검은 토끼의 몸은 성애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워린이 만들었을까? 아니면… 맥켄지? 그 맥켄지가 저리 만들었나? 그 목석같고 재수 없는 맥켄지를 어떻게 꼬여냈을까? 밤 기술이 무척 훌륭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저것들이 검은 토끼를 두고 싸우는 것일 테다.
러트도 그런 검은 토끼에게 봉사를 받아 보고 싶었다. 도노반 후작 영지로 돌아가는 길, 지루한 시간을 아찔하게 보낼 수 있게 주저함 없이 바지와 속옷을 깐 것이었다.
워린은 그런 러트에게 어떻게 해야 저 머저리가 기분이 상하지 않고 순순히 바지를 올릴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단장님, 우리 기사단 전속 사제 치드가 아까 낙마를 했다고 합니다.”
“뭐?”
치드 사제는 전쟁 내내 말을 타고 다닌 이로 어지간한 기사보다 기마술이 뛰어났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되물으려고 할 때 레너드가 워린이 보일 정도로만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레너드의 신호에 워린이 곧 입을 다물었다. 레너드는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우리 귀한 치드 사제가 엉덩이가 깨져서 마차를 타야 할 듯싶습니다!”
레너드의 외침에 한구석에 있던 치드가 재빠르게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 구르는 척을 했고, 9대대 대원 둘이 치드 사제를 부축해 마차 앞에 데리고 왔다. 마치 짜 맞춘 듯 행동하는 대원들에 워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워린은 직접 엉덩이가 터진 척을 하고 있는 치드 사제를 부축해 러트의 앞에 세웠다. 너자만을 지그시 바라보는 러트에게 잘 들리도록 치드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고오… 제가… 제가 드뷔시 님께 가나 봅니다… 엉덩이가아…!”
치드는 러트가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곡소리를 냈다. 그에 짓궂게 웃고 있던 러트의 표정이 서서히 암전되었다. 러트의 파란색 눈이 드디어 치드에게 향했다.
“…….”
그래, 숫총각 앞에서 보일 짓은 아니지. 자신의 섹스 쇼를 보고 그 귀한 사제가 성애에 눈을 떠 파면을 당하면 노한 드뷔시 신께서 자신에게 벼락을 내리칠 것이었다. 또 러트는 사제가 가여웠다. 평생 고추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늙어 죽는다니….
러트는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치드 사제를 보다 한숨을 쉬며 제 속옷과 바지를 올렸다.
록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도노반 후작 성에 세 대의 마차가 도착했다. 전서구를 띄워 후작 성에 미리 보낸 덕에 지금까지의 사건을 인지한 후작 성의 안주인인 페리 후작 부인이 미리 나와 마차들을 맞이했다.
페리의 눈가는 너무 울어 새빨갛게 부었지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은 능수능란했다. 그녀는 슬퍼할 새가 없었다. 다비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가주의 일을 하지 못하니 자동으로 도노반 후작 성의 실질적인 주인은 페리였다. 만약 다비드가 죽으면 자동으로 가문의 승계는 장남 러트가 할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가문의 주인은 어떤 일에도 의연해야 했다.
페리는 죽어 가는 다비드와 황제가 직접 명령해 보내 준 세 명의 고위 사제를 부부 침실로 올려보냈다. 그리고 황제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라며 깊이 고개 숙였다. 되돌아가려는 사격기사단의 단장에게 되돌아갈 때 배를 곯지 말라고 주전부리를 바리바리 싸 주었다.
또 맥켄지를 직접 데려다준 캔디스에게 사업 파트너인 페리 후작 부인이 아니라 맥켄지의 부모 페리로서 감사를 전했다. 사회성이 부족해 친구라고는 없는 맥켄지에게 캔디스라는 친구가 있어 페리는 행복했다. 페리는 자신에게 살갑게 인사하는 캔디스에게 자고 가라고 했지만 질색하는 맥켄지와 할 일이 많다는 캔디스의 말에 마찬가지로 주전부리를 한 상자 싸 주었다.
마지막으로 페리는 이제 세 번째 아들이 된 워린에게 위엄 있게 악수를 청했다. 비록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가문의 명예를 하늘 끝까지 올려 준 금덩이 같은 사업 파트너였다. 또 주제를 아는 아이니 감히 제 아들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워린은 당당하게 내밀어진 얇고 가는 손가락을 응시하다 빙긋 웃으며 페리의 손을 맞잡았다. 페리가 말했다.
“환영한다.”
“이렇게 환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자네는 내 세 번째 아들이 되어 나의 아들들을 잘 보필해야 할 것이야.”
가늘지만 힘이 있는 언사였다. 워린은 페리의 명령에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제 상관의 행동에 그의 뒤에서 대열을 갖춰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을 입은 9대대의 기사들도 페리에게 경의를 표했다.
페리는 깍듯이 허리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는 워린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말했다.
“우리 도노반 가문을 수호해 주길.”
“네.”
그런 어미의 모습에 러트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해한 게 바로 눈앞에 있는 그놈인데 그리 마음에 들어 하시면 어찌하십니까. 질투 나게.
러트가 픽 웃으며 워린을 안아 주는 페리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는 곧 목숨을 잃을 것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은 평생 도노반 후작 성의 개발실에 갇혀 썩어 갈 것이었다. 희극이 따로 없는 꼴이었다.
페리는 제 아들들과 새롭게 입적한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다며 격려했고 만찬을 준비해 놨다며 얼른 씻고 다이닝룸으로 오라 명했다. 그녀의 말에 한창 배를 곯은 젊은 장정들이 환호했다.
맥켄지는 환호를 하든 말든 러트의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너자를 데려가기 위해 마차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저를 부르는 페리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페리를 바라볼 때는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페리는 제 말에 유순히 답하는 맥켄지에게 말했다.
“맥켄지, 러트. 잠시 이야기 좀 나누자꾸나. 경들은 어서 후작 성으로 들어가 짐을 풀고 씻고 다이닝룸으로 오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샬로메와 티모시가 9대대를 기사 숙소로 데려가고, 워린의 처소는 집사가 안내해 줄 걸세.”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기사들이 움직였다. 맥켄지의 눈에 마차 쪽으로 향하는 워린의 기사가 보였다. 그 기사는 마차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자루를 꺼내 와 어깨에 짊어졌다. 커다란 자루는 노예의 키와 비슷했다.
맥켄지는 그런 기사의 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맥켄지의 꽉 쥔 손바닥에는 붉은 손톱 자국이 새겨졌다.
너자는 커다란 자루에 담겨 짐짝처럼 옮겨졌다. 너자는 정신을 잃었다. 워린이 내리기 전 가만히 있으라며 가지고 있던 목면 손수건에 약품을 적셔 너자의 코와 입을 막아 기절시켰기 때문이었다. 레너드는 묵직한 야만인의 무게에, 앞서 걷는 워린의 취향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사는 페리가 명령했던 방 앞으로 향했다. 그곳은 러트와 맥켄지의 방이 있는 4층이었다. 그는 4층의 맨 끝방에서 발걸음을 멈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레너드는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방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토록 화려한 방은 처음 보았다. 역시 이베아 제국의 실세 도노반 후작 가다웠다. 모든 가구에 금박이 붙어 있었고 장인이 만든 게 분명한 가구들과 방의 벽지도 단색 종이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모두 자수가 들어간 특수한 천이었다.
노집사 엘런은 촌놈처럼 우와거리며 방을 구경하는 레너드를 응시하다 아무런 감흥 없이 방을 바라보는 워린에게 공손히 말했다.
“시종은 따로 데리고 있으십니까?”
“아니.”
워린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노집사는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준비해 드릴까요?”
“필요 없어.”
“불편하시지 않을까요?”
조심히 되묻는 집사에게 워린이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그에 집사는 다시금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언제든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라고 말한 뒤 방을 나섰다.
레너드는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제 어깨에 짊어진 야만인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감히 내 걸 던져?”
워린의 서슬 퍼런 말에 레너드는 잽싸게 야만인을 다시 짊어져 이제는 워린의 것이 된 엄청난 사이즈의 침대에 공손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머쓱한 듯 괜히 야만인이 담긴 자루를 잘 펴다가 야만인이 숨이 막힐 거라면서 부산을 떨고 자루의 입구를 막아 놓은 끈을 재빨리 풀며 말했다.
“그런데 단장, 집사에게 너무 싹수없게 대하는 거 아닙니까?”
“곧 뒈질 놈한테 뭐하러 예의를 차려.”
성가시다는 듯 말하는 워린에 그도 그렇다며 레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너드는 끈을 바닥에 던지며 머리 위까지 올려져 있던 자루의 천을 밑으로 내려 자루에 담겨 있는 야만인을 꺼냈다. 야만인은 여전히 잠에 들어 있었다.
레너드가 야만인을 보며 말했다.
“대장, 제발 일이 끝날 때까지 맥켄지 그 새끼를 자극하지 마세요.”
“…….”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일이 틀어질까 무섭….”
조곤조곤 타이르는 레너드의 말을 무시한 워린이 그의 옆으로 성큼 걸어와 새근새근 잠든 야만인의 뺨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 새끼가 먼저 날 자극하잖아.”
“그런다고 그렇게 행동하시면 어떡해요. 그나마 맥켄지 그 새끼가 바로 대장의 얼굴을 갈겨서 다행이었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을 대동해서 난리를 부렸으면 어찌할 뻔했습니까.”
“…….”
“정말 일이 모두 어그러질 뻔했습니다. 다비드에게 살을 못 날릴 뻔했다구요!”
레너드의 잔소리에 워린이 귀찮다는 듯 팔꿈치를 휘두르며 말했다.
“내가 언제 임무 실패하는 거 봤나?”
“…아니요.”
“결과가 중요한 거야, 결과가. 그리고 만약 다비드를 그때 공격하지 못했어도 러트가 알아서 기회를 만들어 줬을 거다. 뭐, 그랬으면 더 좋았을 뻔했네. 러트가 제 아비를 죽였다고 뒤집어씌우면 더 편했을 텐데.”
“하지만 그러기엔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러트 저 새끼도 언제까지 써먹을지도 모르구요. 분명히 뒤통수를 칠 놈입니다.”
“그 새끼 눈 봐 봐. 그럴 놈이야. 지금도 우리 뒤통수를 치고 싶어서 근질거릴걸. 하지만 제 실력으로는 제 동생을 찍어누르지 못하니 섣부르게 행동하지 못할 거야. 그동안 최대한 빨아먹고 죽….”
-똑똑.
워린과 레너드의 입이 곧바로 닫혔다. 그리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워린은 허리춤에 넣어 놓은 리볼버에 손을 대었고 레너드는 허리춤에 찬 장검에 손을 대 발도 자세를 취했다.
“단장님, 저 해립니다.”
빼꼼히 내밀어진 앳된 얼굴에 워린과 레너드가 한숨을 내쉬며 경계를 풀었다. 레너드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페리 후작 부인이 기사단 예산에 대해 말해 줄 게 있다고 단장님을 찾으십니다.”
해리의 말에 레너드가 반색하며 해리에게 뛰어갔다. 정말이냐? 정산 얘기를 먼저 꺼냈대? 워린은 동태 눈깔 같던 레너드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는 것에 집에 돈도 많은 새끼가 왜 그렇게 돈을 밝히느냐며 타박했다. 레너드는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워린에게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장부 담당 말고 저를 데려가시죠.”
“장부 담당을 데려가야지 왜 너를 데려가.”
“제 월급이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영광적인 자리에 빠질 수 없지요.”
“안 돼. 너 지금 눈깔 돌아갔어. 페리가 널 보면 악귀에 들렸다면서 퇴마해야 한다고 할걸. 야, 너는 야만인 옆에 있어. 샬로메 그 새끼가 쳐들어오면 해리가 그 새끼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워린과 레너드의 투닥거림이 길어졌다. 그때 뒤돌아 누워 있던 너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검은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듯 몹시 떨렸다. 그러다 다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에 재빠르게 눈을 감았다.
가슴팍에 고이 올려진 너자의 양손에 땀이 뱄다.
너자는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너자가 겪고 아는 것이라고는 맥켄지에게서 도망쳤지만 별안간 튀어나온 워린에 의해 잡혀 어딘가로 끌려갔고 그곳에 맥켄지가 찾아왔었다는 것이다. 다음 날 자신은 목에 개 목줄이 채워진 채 예배실이라는 곳에 끌려갔고 거기에서 워린과 색만 다를 뿐이지 똑같은 옷을 입은 맥켄지가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워린과 말싸움 후 워린을 들이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켄지와 똑같은 옷을 입은 늙은 남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주변은 혼비백산했으며 그곳에서 모두 퇴장되었다. 그리고 워린과 고수머리의 변태가 형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맥켄지와 똑같은 색의 옷은 입은 늙은 남자가 피를 토하게 된 이유가 워린이 저지른 짓 때문이라고 했다. 맥켄지와 고수머리는 묘하게 늙은 남자를 닮았으며 고수머리가 분명 늙은 남자에게 ‘아버지’라고 했었다. 그런데 워린도 그들과 형제라면… 워린에게도 늙은 남자는 ‘아버지’인데? 그리고 아까 레너드라 불린 잿빛 머리의 기사가 러트가 제 아비를 죽였다고 뒤집어씌운다고 했었다. 너자는 화이트들의 말을 완벽히 알아듣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방금 제가 들은 것은 이해했다.
워린이 고수머리에게 러트라고 했었다. 그럼 워린은 제 아버지와 제 형제를 죽일 생각이란 말인가?
…맥켄지는? 맥켄지는 그 계획에 포함되었을까? 분명 아까의 대면을 보건대 맥켄지와 워린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런 맥켄지를 워린이 가만히 둘까?
당장에라도 맥켄지에게 가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맥켄지가 노예 따위의 이야기를 믿어 줄까? 감히 제 형제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한다며 더 혐오하지 않을까?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어 버린 너자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레너드와의 대화를 한참 전에 끝내고 침대맡에 앉아 이 야만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던 워린이 허리를 숙여 너자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 속삭였다.
“너 안 자고 있는 거 다 보여.”
“…….”
“그거 알아? 사람은 잘 때… 너처럼 눈꺼풀 안에 있는 눈알이 사방팔방 움직이지 않아, 병신아.”
워린의 속살거림에 너자의 목에 살이 오소소 돋아났지만 모르는 척 몸을 뒤척이려 할 때, 워린이 팔뚝으로 너자의 가슴팍을 강하게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 들었지?”
“…….”
“다 들었잖아.”
너자의 눈꺼풀이 기어이 파르르 떨렸다. 워린은 그런 너자의 어수룩한 모습에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맹해 빠진 놈 때문에 일 년 동안 그 개고생을 했다. 워린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자는 척을 하는 너자를 넌지시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레너드와 해리에게 말했다.
“레너드, 당장 가서 맥켄….”
텁.
너자의 눈이 번뜩 떠지며 워린의 왼팔을 한 손에 잡았다. 워린은 제 손목을 잡아챈, 뼈가 불거진 커다란 손바닥을 나른한 눈으로 응시했다. 제 손목에 느껴지는 손바닥이 꽤 뜨거웠다. 그래, 야만인의 구멍도 이렇게 뜨거웠지. 너자를 응시하는 워린의 눈이 점점 정욕으로 물들어 갔다.
하지만 너자는 그런 워린의 표정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자는 그저 맥켄지가 걱정됐다. 그 천사같이 작고 여린 애가 죽을지도 모른다. 너자가 워린을 보며 절박하게 말했다.
“안 돼. 그러면 안 돼.”
“…….”
“형제끼리 싸우면 안 돼!”
불과 어제였다. 문 한 짝을 두고 맥켄지 앞에서 저 야만인을 찍어 눌러 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맥켄지는 머저리 러트와 함께 오늘 있을 승전미사 준비를 했고 자신에게 범해지는 야만인은 제 손목을 물어뜯으며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았었다. 지금의 표정이 마치 그때를 떠오르게 해 워린의 하체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열이 받았다. 맥켄지 그 빌어먹을 새끼가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워린은 맥켄지와 관련된 것이라면 절박해지는 너자의 행동이 꼴사나웠다. 너자의 맹목적인 맥켄지에 대한 애정이 워린의 열등감을 더욱 자극했다.
“맥켄지를 건들지 마.”
워린은 자신을 바라보며 헛소리를 찍찍해 대는 너자의 절박한 표정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었다. 워린의 손끝이 자신의 손목을 잡은 너자의 손목 안쪽을 야릇하게 긁었다.
“……!”
어찌나 세게 긁었는지 너자의 하얀 손목에 붉은색으로 선이 죽 그어졌다. 그 선은 어제 온종일 묶여 있느라 보랏빛으로 물든 손목과 잘 어우러졌다. 워린의 눈빛이 야릇하게 변질되어 있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너자의 생명력 넘치던 표정이 점점 암울하게 침전되어갔다. 그리고 우울하게 변해 가는 너자의 얼굴을 보는 워린의 속도 뒤집히기 시작했다.
너를 데리고 온 건 난데? 그 새끼보다 내가 너와 먼저 알았잖아. 우리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붙어먹었잖아. 내가 너와의 싸움에서 이겼잖아. 그럼 너는 나만을 바라봐야지. 그놈이 너를 나에게서 훔쳐 간 거였어. 그놈만 아니었으면 지금 너의 순정은 나를 향했을까?
감히 전리품 나부랭이가 제 속을 이렇게 긁어놓는다. 이 새끼를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이 풀릴까? 섹스하는 것을 무서워하니 하루 온종일, 후장이 정액에 터질 만큼 범해 줘야 고분고분해지려나? 저 작은 입에서 정액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없을 만큼 잔뜩 정액을 먹여 줘야 정신을 차릴까?
저 맹랑하게 떠진 까만색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퐁퐁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눈물 콧물을 쏙 빼 버리고 싶었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잘못했다고 말이 나올 만큼…….
“그만둬.”
“…….”
“그러면 안 돼. 싸우는 건 나빠. 형제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워린은 정말이지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서 페리에게 가 봐야 했다. 아직 이 집안을 완전히 집어삼키기에는 힘이 부족했고 밑 작업을 깔아 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현재 이 집안의 관리자인 페리의 눈 밖에 나면 일이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페리는 유순해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꽤 독했다. 맥켄지의 독함은 다비드보다 페리를 닮…….
“…단장?”
레너드는 죽여 버릴 듯 응시하던 워린의 표정이 점점 야릇해지는 것에 저도 모르게 워린을 불렀다. 레너드는 저 표정을 알았다. 저 표정은 워린이 사고를 치기 전 짓는 표정이었다.
“나 꽤 재밌는 게 떠올랐어.”
“…단장… 제발요.”
우리… 아까도 말했잖아요. 그 일을 치르기 전까지는 쥐죽은 듯 있자구요… 이 새대가리야…….
레너드의 입속에서 워린을 향한 욕 한 바가지가 넘칠 듯 응어리져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페리의 정산 이야기에 악령이 들린 것처럼 탐욕에 흠뻑 젖어 반짝거렸던 레너드의 눈이 다시금 동태 눈깔처럼 흐리멍덩해졌다. 레너드는 자신의 미래가 보였다.
“맥켄지도 아마 좋아하지 않을까?”
“…신이시여.”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싸 놓은 워린의 똥을 이를 꽉 깨물고 치우는 자신의 모습이.
워린이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손목에 힘을 줘 비틀었다. 그의 손목 스냅에 너자의 손목이 풀렸다. 워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허공에 떠 있는 너자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부여잡았다. 얼마나 세게 휘어잡았는지 너자의 손끝이 하얗게 변하며 덜덜 떨렸다.
너자는 워린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낑낑거렸지만 아직까지 약에 취해 있는 몸이라 그의 손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다. 워린은 자신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짜내는 너자를 너무도 쉽게 들어 올렸다. 그가 너자보다 훨씬 작고 야리야리했는데 말이다.
워린은 너자의 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침실 옆에 딸려 있는 욕실로 질질 끌고 갔다. 레너드는 눈치껏 뛰어가 워린보다 한발 빠르게 욕실의 문 앞에 도착해 워린이 진입하기 쉽도록 문을 활짝 열었다.
페리가 신경을 쓴 게 맞는지 욕실은 침실과 같이 몹시 휘황찬란했으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욕조에는 뜨거운 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 페리가 시종들에게 지시해 미리 뜨거운 물을 담아 놓은 것일 테다.
워린은 쩔뚝이다 못해 결국 넘어진 너자를 개처럼 끌고 와 뜨거운 욕조에 처박았다.
첨벙! 너자의 커다란 몸이 억지로 던져진 탓에 물보라가 일었다. 튀긴 물에 워린의 옷이 젖었지만, 그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마치 더러운 빨래를 빨듯 너자를 씻기기 시작했다. 너자의 머리채를 위로 들었다 처박았다 반복했다. 그에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인 너자는 마치 물고문을 당하듯 몹시 괴로워하며 욕조를 빠져나가려 애썼으나, 그럴 때마다 워린은 너자의 뺨을 쳐대며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너자는 전날 해리에게 박박 씻겨진 덕에 별다른 구정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워린은 일부러 더욱 심하게 너자를 씻겼다. 워린의 물고문을 오도카니 보던 레너드가 주저하며 말했다.
“단장, 페리 부인에게….”
“레너드.”
“넵.”
서슬이 퍼런 워린의 목소리에 레너드가 잽싸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 수년간 워린을 모셨던 레너드의 감이 야만인은 좆 됐다고 말하고 있었다. 레너드는 괜히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빠릿빠릿하게 행동했다.
“지시하십시오.”
“콜록… 웩… 콜… 악!”
“발정제를 가져와.”
레너드는 순간 제가 들은 게 맞나 싶었지만, 역시 제가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마치 야만인을 발라먹을 듯 쳐다보는 제 상관의 모습에 레너드가 해리를 불렀다. 해리 역시 심상치 않은 단장의 분위기에 잽싸게 튀어나와 그들의 앞에 섰다. 그런 해리에게 레너드가 말했다.
“발정제를 구해 와.”
“…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 오겠습니다! 해리 또한 자신이 들은 게 맞나 순간 멈칫했지만, 레너드가 헛말을 지껄일 리가 없었다. 해리는 레너드의 명령에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아마… 누구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해리가 워린의 침실을 박차고 달려갔다. 그런 해리의 빠릿빠릿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권력의 참맛에 레너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짜릿한 일이었다.
워린이 잔뜩 물을 먹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야만인을 물속에서 드디어 끌어 올렸다. 야만인은 허우적거리며 물속에서 나왔고, 욕조의 끝부분에 상체를 걸쳐 밭은 숨을 내쉬었다. 워린은 그런 야만인의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야만인의 짧은 머리카락은 자신이 쥐어 잡은 탓에 뒤로 넘겨져 있었는데, 그에 야만인의 하얗고 곧은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해 보였다. 남자다운 눈썹 뼈와 높은 코가 시원스레 뻗어 있었지만, 창백한 하얀 피부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침을 질질 흘리는 붉은 입술이 야릇했다.
잘그락, 야만인이 휘청거리느라 목에 걸린 쇠 목줄이 소리를 냈다. 워린의 시선이 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검은색의 헐렁한 옷이 물에 젖어 야만인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톡 튀어나온 가슴 중간에 봉긋 솟은 젖꼭지의 모양에 워린의 입술이 바싹 말라 갔다.
아, 제기랄. 아깝네. 페리만 아니었으면 자신이 먼저 한 발 뺐을 텐데.
워린이 반대쪽 팔로 쇠사슬을 잡고 완전히 야만인을 욕조에서 끌어냈다. 너자는 강하게 졸리는 목에 컥컥거리며 욕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워린은 그런 너자의 모습을 보며 레너드에게 말했다.
“나는 페리에게 다녀오겠다.”
“네.”
“너는 이 새끼에게 해리가 가져온 발정제를 먹여서,”
“네.”
“만찬에 데려와.”
“…네.”
워린이 홍안이 불길에 휩싸인 듯 강렬하게 타올랐다.
“어디, 한번 이 새끼들이 어떻게 하나 보자고.”
저 상태의 워린을 자극하여 좋을 건 없었다. 씻기는 건 워린이 했으니 자신은 이제 푹 젖은 야만인을 닦아 멀끔한 옷을 입히고 해리가 구해 온 발정제를 먹이면 되었다. 레너드는 유순하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들어 워린이 한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욕실 한편에 있는 수건을 들고 바닥에 널브러진 야만인의 팔을 함부로 잡았다.
“…….”
의외로 손목이 얇네. 너자의 손목을 쥔 레너드가 무심코 생각하며 초록색 눈을 도륵 굴려 하얗게 드러난 너자의 손목서부터 팔꿈치까지를 훑었다. 한 손에 잡힌 손목은 뼈밖에 없었지만 위로 쭉 뻗은 팔꿈치까지는 세로로 근육이 죽 갈라져 있어 탄탄해 보였다. 야만인은 발목도 얇았는데 손목도 얇았다. 또 손바닥에 잡힌 야만인의 손목 감촉은 차고 돌같이 단단했지만 매끄러웠다.
사내놈이 이런 피부를 가질 수가 있나? 가까이서 본 야만인의 피부는 요철 하나 없이 매끈하며 하얬고 물에 젖은 탓에 반짝이며 빛나는 듯했다.
레너드가 멍하니 수건을 든 채로 너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워린이 물에 젖은 제복의 케이프를 벗으며 말했다.
“왜 너도 따먹어 보고 싶냐? 먹어 봐. 맛있어.”
“…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뭐 부족하다고 사내새끼를 따먹습니까. 거기다 남창보다 허벌창인 놈 아닙니까? 병에 걸릴 것 같아서 싫어요. 레너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레너드에 워린이 픽 하고 웃고 욕실 벽면에 붙어 있는 거울에 손짓하며 말했다.
“네 면상을 한번 볼래?”
제 상관의 말에 레너드가 고분고분히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
“눈에서 정액 나오겠어.”
천박하기 그지없는 워린의 말에 레너드가 아니라며, 더워서 그런 거라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얼른 표정을 갈무리한 뒤 손에 들린 수건으로 아직도 기침하며 물을 뱉어내는 너자를 마구잡이로 닦았다. 짐승을 닦여도 이보다는 부드럽게 닦을 것 같은 레너드의 손길에 워린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잠깐 멈춰 봐.”
제 상관의 말에 레너드가 물에 푹 전 수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제 손에 들린 야만인도 바닥에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그건 들고 있으라는 명령에 양손으로 유순히 야만인을 제대로 잡았다. 그때였다.
“…거 사람이 있는데….”
결국 레너드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와 버렸다. 워린이 레너드의 코앞에서 너자의 코를 쥐어 잡고 입을 맞췄다. 너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워린의 입술을 피하려 했지만, 자신을 뒤에서 꽉 부여잡고 있는 레너드의 강한 힘과 제 코를 쥐어 잡아 얼굴을 돌리지 못하게 한 워린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뭍에 끌어 올려진 물고기처럼 퍼덕이는 것밖에 없었다.
“헉… 흐… 헉….”
거기에 숨이 막혀 입으로밖에 숨을 쉴 수가 없었는데, 그 입 또한 워린이 혀를 넣고 깨물어대는 통에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숨이 막혀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입맞춤당하며 워린이 자비를 베풀듯 내쉬어 주는 숨과 잠깐 입이 떨어질 때 간헐적으로 내쉬는 숨으로 연명했다.
쫍, 쪼옥… 쪽….
안 그래도 울리는 욕실의 구조 덕에 둘의 입맞춤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고 질척이는 것 같았다. 워린은 너자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며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너자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
너자가 질색을 하며 눈을 꽉 감았다. 닳고 닳은 놈이 이 정도 터치는 별것도 아닐 텐데 더럽게 튕겼다. 하지만 그 싫어하는 모습이 워린의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리 범해도 범해지지 않는 고고한 늑대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고한 늑대도 이제 게게 풀려 뒷구멍을 쑤셔 달라고 애원하며 싸게 굴 터였다. 그 모습에 맥켄지는 야만인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아끼는 색노일지라도 뒷구멍에서 장액을 질질 흘리며 천박하게 바닥을 기는 모습에 기겁할 게 분명했다.
머저리 러트의 말로는 제 동생의 앞에서 록시 내 제일의 창녀들과 섹스를 하며 같이 즐길 것을 종용해도 놈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책상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놈이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부정한 것, 정숙하지 못한 것, 더러운 것에 치를 떨었다. 놈은 사교계 어둠의 난교파티에 수없이 초대되었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고, 귀족 영식이라면 한 번쯤은 일으키는 성추문 또한 일으키지 않았다.
재수 없는 새끼. 어렸을 때부터 마나님들의 종마 노릇을 해 온 워린과 확연히 다른 행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워린의 열등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워린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 저열한 감정이 기꺼웠다. 그래, 그런 놈이니 분명 천박하게 발정하는 성노에게 혐오를 느끼고 아예 버려 버리겠지. 야만인에게 침을 뱉을까? 아니면 주인의 명예에 먹칠했다고 채찍질을 할까? 아니면 암캐보다 못한 놈이라며 수캐와 흘레붙게 명령을 할까? 또 야만인이 저와 레너드가 한 말을 모조리 불더라도 짐승이 하는 말이라며 흘려들을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무척 재밌을 것이고 야만인의 정신은 갈가리 찢길 것이다. 그러면, 맹목적일 만큼 맥켄지만 바라보는 야만인의 마음은 불에 타 버려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
워린은 마지막으로 너자의 입술을 이로 세게 깨물었다. 아! 너자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워린의 입속에 비릿한 쇠 맛이 퍼졌다. 워린이 레너드에게 말했다.
“내가 말한 것, 잊지 않았겠지?”
“네.”
“그럼 다이닝룸에서 보지.”
그 말을 끝으로 워린은 너자의 입술을 강하게 빨았다.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일어나 욕실을 나갔다. 레너드는 워린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자신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야만인의 하얀 뒷목을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당당하게 있던 야만인은 워린이 나가자 몸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아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발정제를 구하러 나갔다 온 해리가 욕실에 들어왔다.
“부단장님! 구해 왔….”
당당하게 들어온 해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입술이 잔뜩 뜯겨 벌벌 떨고 있는 야만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레너드는 해리의 눈이 야만인을 끈적하게 훑는 것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눈깔 조심해라.”
“앗….”
워린은 제 것에 대한 집착이 심한 편이었다. 레너드야 몇 년을 함께 구르며 생활한 부하이며 유난히 충성심이 깊고 감히 제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 워린은 레너드의 행동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대원들은 아니었다.
무려 일 년 육 개월이었다. 단장이 이 야만인을 손에 넣으려고 개고생을 한 게. 그런데 감히 자신의 것을 저런 불손한 눈으로 보는 대원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레너드는 해리가 꽤 마음에 들었기에 해리가 불명예 퇴직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레너드는 대강 물기를 닦은 야만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려 달라며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야만인을 무시하고 욕실을 나와 워린의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워린의 침대는 무척 폭신하고 부드러워 내팽개쳐진 너자의 몸은 다치지 않았으나 별안간 자신의 옷을 벗겨내는 레너드의 거친 손길에 손을 휘둘러 뿌리쳤다. 마치 겁탈을 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너자에게 레너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옷 갈아입어야 할 거 아니야.”
“…….”
“네 더러운 몸뚱이에 발정 안 해. 더러운 남창 새끼야.”
레너드의 폭언에 너자는 풀이 죽었지만 정말로 싫어하는 레너드의 표정에 한편으로 안심되었다. 아까 워린에 의해 물고문을 당해 정신이 없을 때 자신을 보던 레너드의 표정을 알지 못하는 너자였다.
그런 너자에게 레너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도노반 가문의 시종들이 워린을 위해 준비한 옷장을 벌컥 열었다. 옷장 안에는 이베아 내의 온갖 고급 패션 상표의 옷가지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제일 무난한 품이 넓은 검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와 속옷을 꺼내 들어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너자에게 던졌다.
너자는 눈치껏 자신의 앞에 던져진 옷가지를 보며 제가 입고 있는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사실 너자도 잔뜩 물을 먹어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옷가지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몹시 건조한 두 명에 너자는 안심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있는 힘껏 표정 관리를 하는 해리에게 레너드가 손을 내밀었다. 레너드의 손짓에 해리가 품 안에 넣어 놨던 손가락만 한 크기의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해리에게 발정제를 건네받은 레너드가 물었다.
“이건 어느 새끼 주머니에서 나온 거냐?”
얼마나 좆질에 자신이 없으면 이딴 약물을 써. 레너드가 비웃듯 말하자 해리가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그게….”
“?”
“말 발정제입니다.”
해리의 말에 레너드가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짐승 발정제야?”
레너드의 물음에 해리가 말했다.
“네. 아무리 물어봐도 발정제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없더군요. 그러던 중에… 도노반 후작 가 마구간을 지나가다가 혹시 몰라 가서 뒤지니 나왔습니다. 보통 말들은 교배를 할 때 발정제를 쓰거든요.”
“그걸 누가 몰라? 이걸….”
사람한테 써도 되느냐가 문제잖아.
고급 교육 받은 귀족가의 자제 레너드가 기가 막혀 제 손에 들린 짐승 발정제를 보고 있자 해리가 쭈뼛대며 말했다.
“하지만 발정제가 없습니다. 분명 단장이 발정제를 먹여서 저놈을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
“발정제를 안 먹이고 데리고 가면….”
분명 단장이 괴롭힐 거예요. 온갖 트집을 잡아서 사람 피를 말리겠죠! 해리의 외침에 레너드가 눈을 꽉 감았다. 집요하고 치졸한 놈이니 분명 그럴 것이었다. 레너드는 워린에게 들들 볶일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다 소스라치게 질색을 하며 손안의 짐승 발정제를 꽉 쥐었다. 그리고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너자에게 다가갔다.
너자는 자신의 옆에 엉덩이를 걸터앉아 자신에게 무언가를 내민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
레너드는 이 순간 자신을 순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너자의 까만 눈망울 때문에 묘한 죄책감에 빠질 뻔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야만인보다 자신의 정신과 목숨이 더욱 귀했다. 레너드가 발정제의 뚜껑을 따며 말했다.
“마셔.”
“그게… 뭔데?”
하지만 너자는 레너드의 바람대로 납죽 받아먹지 않았다. 코끝에 맡아지는 시큼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몹시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몸을 뒤로 빼며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너자에 레너드가 해리에게 눈짓을 했다. 두 명의 은밀한 모의에 너자가 침대에서 벗어나 도망가려고 하려는 순간이었다.
“싫어!”
너자의 앞으로 순식간에 달려온 해리가 너자의 양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침대에 눕혀 억눌렀다. 이틀간 제대로 먹은 게 없는 데다 물고문 후유증으로 너자는 건장한 젊은이인 해리의 행동을 막지 못해 쉽사리 제압되었다. 너자는 이리도 힘이 없는 제 몸이 기가 막혔다. 세 번의 총상으로 너자의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해리가 너자를 침대에 억눌러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억압하고 있자 레너드가 너자의 코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너자는 입을 벌리지 않을 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숨을 쉴 수가 없어 결국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살기 위해 벌어진 너자의 동굴 같은 입안에 레너드가 짐승 발정제를 쏟아부었다. 너자는 입안에 억지로 들어오는 액체를 뱉어내려 얼굴을 돌리려 했으나 이제는 입까지 틀어막는 레너드의 냉정한 손짓에 결국 시큼 달달한 그것을 모조리 삼켜 버리고 말았다.
레너드는 야만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코와 입을 억누르고 있던 손바닥을 떼어내었다.
안타깝게도 너자는 ‘발정제’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다. 너자는 공기와 함께 급하게 액체를 삼킨 탓에 물고문을 당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해댔다. 너자에게 짐승 발정제를 먹인 레너드와 해리만 표정이 심각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격렬하게 기침을 하느라 얼굴만 조금 발개졌을 뿐 야만인은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기침을 끝낸 너자는 오도카니 서서 자신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두 명의 전사들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대체 뭘 먹였길래 저런 표정으로 보기만 하는 거지?
“나… 뭐 먹은 거야?”
너자의 물음에 레너드가 한참 후에 말했다.
“너 괜찮냐?”
레너드의 질문에 너자가 상황도 잊고 눈을 감고 한참을 가만히 있어 보았다. 입에 시큼 달콤한 맛이 잔향처럼 남아 있는 것 외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숨도 잘 쉬어졌고 어디 아픈 곳도 없었다. 오른 발목은 아직도 욱신거렸지만 이것은 그 액체를 마시기 전부터 그랬다. 너자가 슬며시 눈을 뜨며 말했다.
“응. 괜찮아.”
그의 말에 레너드가 해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너 제대로 가져온 거 맞아?”
“당연합니다! 제국 기사단에서도 저 새끼가 먹은 발정제랑 똑같은 걸 쓰고 있습니다.”
레너드가 이것은 짐승의 것을 인간이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 야만인의 독소 해독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가 분석을 하고 있을 때 해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저 발정제 원래는 물에 희석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희석한 걸 먹이면 바로 반응이 와서 발정이 나는데….”
해리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레너드는 그런 해리를 보고 자신의 턱을 만지며 멍청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는 야만인을 보며 생각했다. 물에 희석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독하다는 건데 야만인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했다. 결론은….
“좆 됐다.”
“…….”
레너드는 길길이 날뛰며 왜 이런 것 하나 제대로 처리를 하지 못하느냐고 개지랄을 떨며 자신을 들들 볶아댈 워린을 상상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레너드가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무심코 생각했다.
…신음 흘려 달라고 하면… 야만인이 해 줄까?
“제기랄….”
“…죄송합니다.”
해리가 몹시 면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레너드는 그런 해리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옷 갈아입을 필요 없지?”
“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다이닝룸으로 가자.”
레너드의 말에 해리가 유순히 고개를 숙이며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야만인의 쇠 목줄을 잡아당겼다. 여전히 거친 해리의 손에 너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워린에게, 레너드에게 끌려다니느라 막 쓴 너자의 오른쪽 발목이 불에 타는 것같이 욱신거렸다.
너자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명이 삼켜졌다. 미치도록 아팠지만 너자는 그것을 티를 내지 않았다. 해리와 레너드가 보기에 너자는 걸음걸이만 불편해 보일 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들은 안 그래도 너자의 창백한 얼굴이 허옇게 질려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레너드와 해리는 앞으로의 할 일을 조곤조곤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는 개처럼 끌려가기 싫어 너자는 비명을 지르는 발목을 무시한 채로 그들을 따라갔다.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따라가던 너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해리가 남의 집의 다섯 배보다 큰 다이닝룸의 고풍스러운 문짝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다이닝룸의 문에 양옆에 서 있던 시녀들이 레너드와 해리에게 깊게 허리를 숙인 채 문을 열었다.
“이야… 역시….”
“조용.”
“죄송합니다.”
레너드의 주의에 해리가 괜히 너자의 개 목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너자는 순간적으로 조이는 목에 기침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이닝룸의 문이 완전히 열렸다.
다이닝룸은 제국 중앙 교회의 예배당만큼이나 크고 넓었으며 고풍스러웠다. 다이닝룸의 정 가운데에는 열 명이 둘러앉아 먹어도 족히 남을 앤티크의 넓은 마호가니 테이블이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기다란 테이블이 줄지어 있었다. 오른편에는 승전미사에 참가했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1대대가 앉아 있었고 왼편에는 9대대 기사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1대대의 기사들이 레너드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굴러들어 온 돌에 대한 견제였다.
“…….”
레너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수십 개의 눈에, 이곳에 있지 않아야 할 1대대가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당황해했다. 그때 1대대의 기사들이 동시에 일어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도 뒤를 돌아 허리를 숙였다. 레너드의 뛰어난 눈치가 빛을 발한 것이었다. 레너드는 시선 끝에 걸리는 붉은 드레스 자락에 외쳤다.
“도노반 후작 성의 주인 페리 도노반 후작 부인을 뵙니다.”
페리는 자신에게 깍듯하게 묵례를 하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되었다.”
그녀의 말에 그곳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다. 페리는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뒤에 서 있는 제 아들들에게 들어가자고 말을 하려는 순간, 눈에 걸리는 무언가에 눈썹을 까닥이며 말했다.
“저건… 뭐지?”
그녀의 말에 뒤에 조신하게 서 있던 러트가 답했다.
“가문의 노예입니다.”
“우리 가문의?”
“네. 워린 경이 대륙 토벌 때 가져온 야만인 전리품입니다. 제가 저번에 서면으로 올린 맥의 휘핑보이 기억나십니까?”
러트의 말에 페리가 잠시 생각을 하다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 네가 구해 줬다던.”
“네. 제가 ‘직접 워린에게 부탁’해서 맥에게 붙여 준 그 휘핑보이요. 우리 맥이 제국 아카데미에 별 볼 일 없는 휘핑보이를 구해서 가면 가문의 불명예니까요.”
제 동생의 휘핑보이를 구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던 러트였고, 너자를 워린의 성에서 가져온 것은 맥켄지였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하는 러트였다. 그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이는 맥켄지뿐이었지만 맥켄지는 다이닝룸의 문짝에 바짝 붙어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만을 응시하는 너자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들들의 기행을 알지 못하는 페리가 워린에게 말했다.
“경의 호의에 내 둘째 아들이 아카데미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았군.”
동업자인 러트가 입을 털어댄 탓에 워린은 페리의 말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직은 러트의 장단에 맞춰 줄 수밖에 없는 워린이었다.
페리는 만족스러운 워린의 답에 작게 미소를 짓다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발발 떨고 있는, 목줄을 한 야만인 노예를 훑어보며 노예를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는 제 막내아들에게 말했다.
“맥, 저거 식사 자리에 가지고 갈 거니?”
마치 기르는 개를 데리고 갈 거냐는 듯한 말투였다. 보통의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노예가 감히 본성 다이닝룸에 알짱거린다며 채찍질을 하고 멍석에 말았겠지만, 그녀에게는 제 사랑스러운 막내아들 맥이 관심 있어 하는 노예라는 게 중요했다. 그녀에게는 제 막내아들이 아직도 작은 꼬마로 보였고 제 꼬마 아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모두 손에 쥐여 주고 싶어 했다.
그녀의 말에 맥켄지가 너자에게 시선을 거두고 제 어미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어머니.”
페리가 마호가니 테이블의 상석에 먼저 착석했다. 그 후 러트가 페리의 왼편에, 맥켄지가 페리의 오른편에 앉았다. 워린은 예의 있게 그들의 맞은편에 서 있다가 그들이 모두 자리에 착석한 뒤에야 러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너자는 페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본래라면 노예 따위는 본성의 식구들이 앉아 식사하는 테이블에 앉을 수 없었으나 처음 보는 야만인 노예의 모습에, 모든 것에 무감각한 제 막내아들이 꽤 아끼는 듯한 모습에 흥미가 생긴 페리였다. 페리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힌 까만색의 우울해 보이는 미남자를 응시했다.
본성의 식구들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시녀와 시종들이 양질의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시녀들은 우선 페리가 앉은 마호가니 테이블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가져다 날랐고, 그 후로 기사들의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9대대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마지막 음식이 놓였다. 페리는 너자를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무척 슬픈 날이면서 무척 즐거운 날이다. 내 남편은 사경을 헤매고 있지만 우리 도노반 후작 가문에 ‘전쟁 영웅’ 워린 도노반과 그 기사단이 입적했지. 워린 도노반과 그 기사단은 사리사욕을 채우지 말고 우리 도노반 후작 가문, 아니 도노반 공작 가문을 위해 일하라. 그리고 내 남편이 사경을 헤매게 된 이유를 본가의 아들들이며 도노반 리피팅 암즈 기사단의 대표인 러트 도노반과 차석 대표 맥켄지 도노반을 도와 알아내도록 하라.”
네! 페리의 위엄 있는 말에 다이닝룸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굵직하게 외쳤다. 그런 기사단의 외침에 페리가 제 남편을 대신해 제 손에 들린 와인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도노반은.”
그녀의 물음에 너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몫의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도노반 가문의 가훈이 쩌렁쩌렁하게 다이닝룸을 울렸다. 그에 페리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제 손에 들린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페리의 와인잔이 모두 비워진 후에야 나머지 사람들이 제 몫의 와인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페리는 모든 이들이 와인을 들이킨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마음껏 즐기길.”
배고픈 기사들의 배를 채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이닝룸의 옆에 딸려 있는 주방은 흡사 전쟁터와 같았고 쉴 새 없이 만들어내는 음식을 가져가 빈 곳에 채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이닝룸 한구석에서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전용 악단이 끊임없이 곡을 연주했다.
본가의 주인들이 다이닝룸에 있는 터라 기사들은 난잡스럽게 떠들지는 못했지만, 꽤 활기가 있게 웃고 떠들며 만찬을 즐겼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마호가니 테이블은 그 분위기와 정반대였다. 정신없이 먹고 있는 기사들과 달리 페리와 러트, 맥켄지와 워린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잘게 잘린 고기를 몇 개 집어 먹거나 싱그러운 샐러드를 조금씩 먹을 뿐이었다. 또 너자는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맥켄지의 어머니, 페리의 시선이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맥켄지의 존재가 너무도 컸다. 제가 너무 괴로워서 그랬어요, 제가 너무 아파서, 당신한테 버려지는 걸 생각하니까 너무 무섭고 아파서 그랬어요. 당장에라도 맥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또 워린을 조심하라고, 저놈이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고 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맥켄지는 자신에게 정이란 정이 모두 떨어진 듯했다.
그렇겠지. 이미 한 번 캔디스에게 더럽혀진 몸이었는데 이제는 제 형제에게 다리를 벌렸다. 아마 저를 찢어발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런 맥켄지가… 자신의 말을 믿어 줄까? 감히 제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다며 더욱 역겨워하지 않을까? 너자의 얼굴이 음울하게 침전되어 갔다.
삭막한 적막을 깨고 페리가 접시에 있는 스테이크를 작게 썰며 말했다.
“저 노예는 맥의 휘핑보이라고 하지 않았나?”
페리의 말에 러트가 답했다.
“그렇지요.”
“그런데 왜 아까 워린 경의 부하가 노예의 목줄을 잡고 있던 거지?”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러트는 답을 하지 못했다. 러트 자체도 너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게 오늘 승전미사 때 처음이었으니까. 남은 것은 맥켄지와 워린이었다.
워린은 아까 러트와 말을 맞추느라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해 버린 터라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괜히 거사를 치르기 전 페리의 앞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며 맥켄지를 공격하면 페리의 눈 밖에 날 여지가 있었다. 워린이 눈알을 또륵 굴리고 맥켄지를 응시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게 아까 제 엄마한테 노예를 갖게 해 달라고 떼를…….
그때였다. 맥켄지가 제 앞에 놓인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찌르며 말했다.
“이틀 전 록시에서 노예를 잃어버렸는데….”
“…….”
“워린 경이 찾아 줬습니다.”
맥켄지의 말에 페리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워린 경은 계속해서 우리 집안에 도움이 되는군! 그녀의 말에 워린이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뭐지? 무슨 속셈이지? 워린은 맥켄지가 어떻게 나올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제 어미에게 울며불며 저 노예를 갖게 해 달라고 개지랄을 떨 줄 알았는데?
그런 워린의 모습에 맥켄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맙네.”
맥켄지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에게 다시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워린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
워린의 뒤에 있던 레너드가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맥켄지가 예배당에서처럼 제 상관에게 주먹을 날릴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맥켄지의 뒤에 있던 샬로메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는 맥켄지가 워린에게 다시금 주먹질을 날리기를 원했다.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 주인이 피하겠는가! 제 주인의 것을 가져가 돌려주지 않는 것은 저 육시럴 놈이었다. 샬로메는 혹시라도 레너드가 감히 제 주인을 제지할까 싶어 언제든 놈에게 득달같이 달려들 준비를 하며 격발 자세를 취했다.
거기에 여기는 홈그라운드였다. 중앙 제국교회에서는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베타미 황제가 승전미사의 계획과 진행을 무려 도노반 후작 가문에 맡겼다. 그 영광스럽고도, 망하면 가문의 망신이 될 일을 우리 막내 도련님 맥켄지가 모두 추진시켰다. 멍청하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러트가 아닌 제국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병행하며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실질적인 총 책임을 지고 있는 맥켄지 도노반이 모두 책임졌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이니 제 주인이 성질을 무척 죽였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총기 사업으로 탄생하였고 그것으로 가문의 돈을 불려 나갔으며 그것으로 대륙에서 도노반 후작 가문의 명성을 널리 알렸다. 모든 왕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총기류는 모두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술을 베낀 아류작이었다.
맥켄지 도노반은 가문의 차남이며 가주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다비드 도노반은 가문의 심장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총괄을 맥켄지에게 넘겼고, 지금 시판되고 개발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는 맥켄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설계 또한 맥켄지가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맥켄지는 모든 욕망을 거세당했다. 하지만 러트의 실수로 겨우 손에 쥔 교육의 기회를, 욕망의 기회를 그가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건 모두 했고 독하기 그지없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해냈다. 그런 그를 누가 말리랴?
샬로메는 레너드가 감히 반격을 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합법적으로 저 모가지가 빳빳한 재수 없는 새끼의 멱을 따 버릴 수 있으니까! 페리를 제외한 마호가니에 앉은 이들의 몸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잠시.”
하지만 맥켄지의 행동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그가 한 행동은 워린의 얼굴에 주먹을 갈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앞에 있는 샐러드 접시를 집는 것이었다.
꽃사슴같이 기다란 팔과 상체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워린의 바로 앞에 있는 콥샐러드가 담긴 접시에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을 뻗었다. 워린과 그의 거리는 대각선으로 꽤 멀었고, 워린의 옆에는 너자가 앉아 있었다. 맥켄지가 상체를 앞으로 숙여 콥샐러드 접시를 집느라 앞으로 숙어진 얼굴에 필연적으로 너자의 얼굴이 스쳤다. 너자는 코에 맡아지는 맥켄지 특유의 냄새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자의 얼굴에 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의 냄새를 스쳐 맡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변태 같은 모습을 맥켄지가 싫어할까 봐 너자는 고개를 수그려 자신의 허벅지에 양손을 가져다 대었다.
맥켄지는 그런 너자의 모습을 곁눈질로도 보지 않았다. 그의 섬섬옥수 같은 손이 커다란 샐러드 접시를 제 쪽으로 우아하게 가져다 옮겼다. 탁, 하고 접시가 내려지는 소리에 스테이크를 먹고 있던 페리가 말했다.
“시녀에게 말하지 그랬니.”
“빨리 먹고 싶었기에.”
그들의 평화로운 대화에 맥켄지와 페리를 제외한 모든 마호가니에 있던 이들의 긴장이 탁 풀렸다. 맥켄지는 저를 바라보는 페리에게 미소를 지은 후 콥샐러드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고급 접시 위에는 귀한 과일과 채소들이 잘게 잘려 대각선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포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워린경에게….”
“…….”
그의 포크가 검은색의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블루베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항상 도움을 받는군요.”
“…도움이라니요.”
딱딱하게 굳은 워린의 말에 맥켄지가 나른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블루베리를 찍은 포크를 제 입에 가져다 대었다. 맥켄지가 찍은 블루베리는 알이 무척 실했고, 거의 검은색에 가깝게 익어 있었다. 맥켄지의 붉고 아름다운 입술이 열리며 검은색의 블루베리가 동굴과 같은 검은색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맥켄지는 입안에 터지는 과육을 음미하며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너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작고 까만 정수리에 있는 가마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맥켄지의 입술이 씩 올라가며 다시 시선을 돌려 워린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른히 말했다.
“록시에서 노예를 잃어버려 무척 당황스러웠기에,”
“…….”
“답지 않게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당황스러우니 머리가 안 돌아가더이다.”
제 아들의 말에 페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맥,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저도 그런 경험이 처음이었으니까요.”
페리가 반쯤 먹은 스테이크를 물렸다. 그녀의 뒤에 있던 시녀가 주방에 신호를 했고 페리가 즐겨 먹는 디저트가 나왔다. 페리는 제 앞에 내밀어진 달콤한 에끌레어를 손으로 집어 들며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
“전쟁 영웅 워린이 퍼레이드를 돈다고 하니 록시에 있는 모든 이들이 홍수같이 쏟아지더군요.”
“장관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금방 찾을 것 같았거든요.”
맥켄지가 포크를 집어 다시금 블루베리를 콱 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 없더군요. 꼭 노예가 숨어 버린 것처럼.”
그의 말에 너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런 너자의 모습에 맥켄지가 입에 검은색으로 잘 익은 블루베리를 넣으며 말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죠.”
“…….”
“사람은 많은데 승전미사는 해야 하고, 노예는 보이지 않고.”
“애가 닳았겠구나.”
너는 옛날부터 남에게 부탁하지 못했지. 페리의 말에 맥켄지가 나른히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블루베리를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워린 경이 내 노예를 찾아왔지요.”
“…….”
맥켄지는 자신을 응시하는 워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른히 말했다.
“다시 한번 고맙네.”
맥켄지의 말에 페리가 한 입 남은 에끌레어를 입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경의 도움으로 내 아들이 아끼던 노예를 찾았군. 맥의 어미로서 다시 감사를 표하네.”
“…별말씀을요.”
페리의 감사에 워린이 마지못해 답했다. 러트의 개소리만 아니었으면… 워린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교통정리가 맥켄지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 버렸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었고 러트는 머저리지만 이곳은 도노반 후작 가문이었다. 미처 매수하지 못한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이 반절이었다. 또 머저리 러트는 아직 완전히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워린이 맥켄지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 개새끼,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워린의 손가락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페리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움직임에 만찬을 들고 있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페리는 그런 기사들의 행동이 익숙했다. 그녀는 제 아들들에게 말했다.
“마저 먹으렴. 나는 다비드에게 가 보아야겠다.”
살펴 가십시오, 어머니. 러트가 대표로 인사했다. 페리가 알겠다는 듯 손을 들고 제 시녀와 호위기사를 대동하며 다이닝룸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다이닝룸의 문을 양쪽에 서 있는 시녀들이 닫았다. 탁, 하고 완전히 문이 닫히자 그제야 적막했던 다이닝룸이 왁자지껄해졌다. 기사들은 부어라 마셔라 했고, 시녀와 시종들은 마찬가지로 음식을 퍼다 날랐다.
다만 마호가니 테이블에 있는 이들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더욱 팽팽해졌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식을 썰고 먹었다. 그때 러트가 비어 있는 페리의 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접시만 바라보고 있는 너자에게 얼굴에 팔을 괴며 말했다.
“왜 너는 먹지를 않아?”
“…네?”
갑작스러운 러트의 말에 너자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턱 끝에 닿는 뜨거운 손가락에 헉하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다. 러트가 제 턱을 손가락으로 올려 지탱하였기 때문이었다.
러트가 토끼같이 놀라는 너자를 보며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입에 맞지 않아? 자리가 불편하니?”
“아… 아니요.”
너자의 입이 본능적으로 화이트들의 존댓말을 내뱉었다. 살살 꼬셔대는 러트의 플러팅은 캔디스의 플러팅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너자는 자신의 턱 끝을 슬슬 만지는 러트에 몸을 빼려 했지만, 다시금 그의 손가락이 제 턱을 부여잡기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러트는 검은 토끼 같은 야만인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입안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몹시 당황해하는 너자의 턱 끝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자리가 불편하면 따로 자리를 빼 주랴?”
“…아… 아니.”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맛있는 것을….”
러트가 몸을 일으켜 너자에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맥켄지의 하얀 손이 러트의 손으로 뻗어졌다. 러트는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맥켄지의 손에 수치도 모르고 팔을 뒤로 뺐다.
“…!”
“잠시.”
맥켄지의 하얀 손이 러트와 너자의 중간에 있던 검은색의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화이트소스에 곁들어진 대구 요리였다. 맥켄지는 자신을 노한 눈으로 바라보는 러트에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다른 곳에 있네요.”
“…그렇긴 하구나.”
제 동생의 식성을 아는 러트가 화를 내려다 말고 멍청하니 답했다. 제 동생은 고기류를 싫어하고 샐러드와 생선류를 즐겨 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평소의 러트였다면 천재성이 남다르고 아름다운 동생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음침하게 그를 깎아내리는 뒷공작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맥켄지를 비호하던 아비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가진 재산과 권력을 티가 나지 않게 야금야금 빨아들인 뒤 어머니를 영지의 제일 깊은 곳에 있는 별장에 처박을 생각이었다. 동생을 비호하는 두 호랑이를 꺾어 놓으면 제 동생이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제 동생을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개발실에 처박아 놓고 동생이 늙어 죽을 때까지 빨아먹을 셈이었다. 그는 더는 제 동생이 두렵지 않았다.
러트는 감히 저를 놀라게 한 동생에게 따끔하게 말을 할 셈이었다.
“아까 어머니에게 불려가기 전 이번 주 분량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장부를 보았는데,”
“그게 여기에서 왜….”
“계속돼서 반복되는 명세가 있더군요.”
“…….”
대구살을 잘게 자르며 맥켄지가 나른하게 말했다.
“명세의 이름도 이상하고, 그것의 시세도 지금 시세와 확연히 다르더군요. 또 기사단과 기술팀의 영수증 명세도 이상하고, 그리고 회삿돈으로 창녀를 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창기 업체 이름을 그대로 장부에 쓰시다니요.”
“…….”
“…제가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
“조작하고 싶으면 반복되는 명세를 쓰지 마시라고. 너무 티가 난다고.”
“…….”
“시세 조작도 적당히 하셔야지요. 아무리 아버지가 장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여도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80금이면 되는 것을 180금으로 부풀리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장부, 제국 국세청으로 넘어가면 처분받는 것은 형님이십니다.”
맥켄지의 평화로운 목소리에 러트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 내가 왜? 장부의 총 책임자는 너잖아!”
맥켄지가 아예 조져 놓은 대구살을 바라보다 그 접시를 러트에게 밀며 말했다.
“형님, 지금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대표는 형님이십니다. 또… 곧 이 가문의 가주가 되는 것은 형님이지 않으십니까?”
“…!”
“저는 고작 차석 대표에, 후작 가문의 차남에 불과한걸요. 이베아 제국법에 따르면 기업의, 가문의 총 책임자는 대표이자 가주이며… 가문의 부정에 대한 사법적 재판은 대표이자 가주가 받는답니다.”
러트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러트를 보며 맥켄지가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만 작게 속삭였다.
“오늘 있었던 일…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
러트는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맥켄지를 바라보다 그가 건넨 조져진 대구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되기 싫으시면,”
“…내가, 내가….”
“알아서 몸 사리세요.”
“…!”
모호한 제 동생의 말에 러트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자신과 워린을 왜 묶어서 말하느냐며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을 물으면 제 동생의 입에서 제가 꾸민 짓이 모조리 밝혀질 것 같았다. 러트가 자신을 보며 예쁘게 웃는 동생을 멍청하니 바라보자 맥켄지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항상 형님의 편이니, 제가 알아서 다 수정해 놓겠습니다.”
“…….”
맥켄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과 러트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으며 제 옆에 있는 와인잔을 들었다. 러트와 유착관계인 워린이 맥켄지에게 발려먹기 일보 직전인 러트에 숨을 죽이고 혹시라도 제 뒤가 밟힐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호가니에 있던 모든 이들의 고개가 소리의 근원지로 돌려졌다.
“헉… 허억… 흐….”
소리의 근원지에는 너자가 있었다.
너자는 귓전에서 울리는 맥켄지와 러트의 대화 소리에 고개를 다시 숙였다. 아까 러트에게 쥔 턱이 가려웠다. 마치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감각에 너자가 손을 들어 턱을 박박 닦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턱을 손가락으로 문질렀음에도 간지러운 게 더욱 심해졌다.
뭐지? 점점 심해지는 가려움과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마셔야겠다. 너자는 눈치를 보던 것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앞에 놓인 목이 긴 잔을 들었다. 목이 긴 투명한 유리잔에는 붉은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너자는 와인잔에 있는 와인을 한꺼번에 들이 삼켰다. 액체의 맛은 무척 쓰고 요상했지만 덕분에 타는 듯한 갈증은 가라앉은 듯했다. 코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너자가 손가락을 들어 코를 마구 문질렀다. 이제는 코까지 간지러웠다. 처음 느껴 보는 간지러움에 너자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내쉬어지는 것 같았다.
“…….”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확 돌기 시작했다. 너무 더웠다. 얼굴에 열이 확 뻗치는 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귓가에 맥켄지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회삿돈으로 창녀를 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창기 업체 이름을 그대로 장부에 쓰시다니요.”
창녀… 창기….
-창놈도 너보다 더 정숙할 거다. 이 구멍으로 스와포네에게 자지를 달라고 졸라댔니?
맥켄지와 몸을 섞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맥켄지는 저 말을 한 후 제 안에 뜨거운 것을 쏟아 주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붉히고 제 입술을 집어삼키며 혀를 섞었다. 마치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그때의 감촉이 떠올랐다. 맥켄지의 입술은 부드럽고 차가웠다. 그리고 그의 혀는 매우 뜨거웠으며 미끈거렸다. 아찔했던 그때의 기억에 너자의 밑이 움찔거리며 무언가를 질질 흘리는 것 같았다. 너자는 두려웠다. 지금 내가 뭐를 싸고 있나? 냄새가 나면 어떡하지? 아니…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너자의 몸에 마치 불이 난 것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목에 채워진 새빨간 목줄이 너무 답답했다. 이것만 아니면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밭은 숨을 내쉬며 너자가 양손을 들어 개 목줄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풀어지지 않았다. 너자의 속이 타들어 갔다.
괴로워…. 더워… 뜨거워…….
너자의 양 손끝이 목을 박박 긁었다. 그의 하얀 목에 새빨간 손톱자국이 죽죽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너무 뜨겁고 더웠다.
결국 너자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에 앞에 있던 접시들이 바닥을 굴렀다.
러트와 맥켄지를 신경 쓰고 있던 워린이 그제야 너자를 응시했다. 그의 입이 비열하게 미소 지어졌다. 레너드가 일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워린이 테이블을 구르고 있는 너자의 모습을 팔짱을 끼고 방관했다.
“헉… 허억… 으….”
너자의 신음 소리가 더욱 커졌다.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은 터라 야만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과 귀가 터질 듯 빨개져 있었다. 야만인이 몸을 비트느라 목에 걸린 쇠사슬이 마호가니 테이블에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음을 만들어냈다.
워린이 고개를 들어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맥켄지의 나른했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무엇을 참는 듯이 그 예쁜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야만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럽지? 기분 나쁘지? 밥상머리에서 갑자기 발정이 나서 몸을 비트는 야만인이 역겨워 죽겠지?
워린은 그 나른하고 당당했던 맥켄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 것을 보며 황홀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워린은 저런 맥켄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너자의 쇠 목줄을 주워 들어 마호가니 테이블에 던지며 말했다.
“이런… 색노가 갑자기 발정기가 왔나 봅니다.”
야만인은 다 이런 걸까요? 천박하기 그지없군요. 밥 처먹다가 발정을 하다니. 워린의 역겹다는 목소리에 러트가 눈을 크게 뜨며 너자를 응시했다. 그랬다. 저건 발정이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저 혼자.
워린이 맥켄지를 욕보이기 위해 픽 웃으며 일부러 크게 말했다.
“이것, 막내 도련님의 색노이지요?”
워린의 말에 러트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 맥, 저거 색노로 쓰고 있었어?!”
아니, 내가 네 앞에서 섹스를 하고 난리를 쳐도 눈 하나 까딱 안 했잖니! 내가 그렇게 같이 떡 치자고 해도 더럽다고 싫어했으면서, 어떻게!
러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지른 탓에 다이닝룸에 있던 모든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들은 제 고고한 차석 대표의 성생활에 두 귀를 활짝 열었다. 맥켄지는 사교계에서도, 기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였다. 그런 이의 성생활이 떠벌려진 것이었다.
쪽팔리지? 당장 도망치고 싶지? 고고한 도노반 후작 가문의 도련님이 야만인 색노를, 그것도 사내놈을 쓴다는 게, 창피해 죽겠지?
워린의 홍안이 흥분에 불타올랐다. 분명 맥켄지는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린 노예에게 욕하며 침을 뱉을 것이다. 맥켄지의 좌절을 얼른 보고 싶었다. 워린은 끙끙 앓으며 괴로워하는 너자의 목덜미를 확 잡아챘다. 그리고 힘을 줘 너자를 마호가니 테이블 위로 끌어 올렸다. 그의 발에 챈 접시가 바닥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흐아… 응…!”
너자는 순간적으로 졸려지는 목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뒷목을 잡느라 손톱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긁어 버린 워린의 손길에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가려워, 뜨거워, 무서워….
이로써 다이닝룸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너자에게로 쏠렸다. 음식물을 온몸에 묻히고 몸을 웅크리며 발정하는 야만인의 모습이 너무도 이질적이며 야릿했다. 너자의 하얗고 굵은 목덜미가 불에 타오르는 듯 시뻘겋게 타올랐다. 워린이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인 너자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아…!”
너자의 하얀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너자의 잘생긴 얼굴이 잔뜩 달아올라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눈썹이 모로 휘며 파들파들 떨렸고 섬세한 입술에서 침이 질질 흘렀다. 헐렁한 옷을 입혔음에도 탄탄한 몸이 잔뜩 팽창되어 그의 몸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그 외설적인 모습은 창기 그 자체 같았다.
워린이 말했다.
“이것… 도련님의 색노 맞으시지요?”
아니라고 부정하겠지. 더러운 것을 얼른 치우라며 난리를 피우겠지. 그 더러운 창놈을 치….
“응.”
비열하게 웃고 있던 워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잘못 들었나? 워린의 눈썹이 처참히 일그러질 때 맥켄지가 잔뜩 일그러뜨렸던 눈썹을 펴며 픽 하고 웃었다. 맥켄지가 자신을 멍청하니 바라보는 워린의 눈을 똑바로 맞추며 말했다.
“내 노예 맞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
“그건 ‘내’ 노예야. ‘내’ 색노고.”
맥켄지는 벌레 같은 것들이 제 노예의 야한 모습을 보는 게 싫을 뿐이었다. 맥켄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는 너자의 밤하늘 같은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온.”
맥켄지의 명령에, 너자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 고개를 흔들어 워린의 손길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호가니 테이블을 개처럼 기며 맥켄지의 앞까지 갔다. 너자의 움직임은 몹시 굼떴다. 하지만 맥켄지는 그런 너자를 보채지 않았다. 그저 펑펑 울면서 자신을 바라보며 기어오는 너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개처럼 기며 맥켄지에게 다가가는 너자에게 향했다. 몸을 떨며 기는 그의 몸은 마치 짐승을 사냥하러 몸을 낮추며 기어가는 재규어 같았다. 물론 그의 얼굴은 발정이 나 그 당당한 모습과는 달랐지만 말이다.
마침내 너자가 맥켄지의 앞까지 당도했다. 맥켄지가 나른히 웃으며 양손을 뻗었다. 너자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멍하니 테이블에서 내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너자보다 한참이나 작은 맥켄지였다. 하지만 맥켄지에게 몸을 기대며 안긴 너자의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맥켄지는 잔뜩 발기한 자신의 것이 너자의 엉덩이에 압박되는 것을 느끼며 진실 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손은 들어 너자의 까맣고 작은 머리통을 마치 개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쓸었다. 맥켄지는 자신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을 내쉬는 너자에게 속삭였다.
“착하다.”
너자는 코에 들이마셔지는 맥켄지의 냄새에 집중했다. 그에게서는 항상 무서운 냄새가 났었다. 그 냄새는 전쟁터에서 질리도록 맡은 인조적이며 싸한 연기 냄새였다. 너자는 그 냄새를 너무 싫어했다. 그 냄새가 풍기면 제 동료가 하나둘씩 죽어 갔으니까.
하지만 묘하게 달랐다. 맥켄지에게서는 그 메캐한 연기 냄새와 함께 나무 냄새가 풍겼다. 마치 울창한 숲속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코만치의 숲속에서 이런 냄새가 났던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지는 녹음과 높게 뻗은 나무, 그곳을 달리며 들이마신 숨에는 튼튼히 자란 나무의, 숲의 냄새가 났었다.
“흡… 하….”
그리고 그 냄새는 너자를 안정케 하였다. 워린의 성에서 학대를 당하며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너자를 꺼내 온 게 맥켄지였다. 대머리 시종에게 채찍질을 당하며 짐승처럼 몸을 웅크렸을 때 예민한 너자의 후각에 알싸한 연기 냄새가 맡아졌다. 등이 불에 지져지는 것 같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무서운 냄새에 고개를 퍼뜩 쳐올렸다.
지금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남자가 매캐한 연기 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그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사랑의 여신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걸레같이 구르고 있는 자신을 보며 그 예쁜 이마를 찌푸렸었다.
아픔도 잊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메캐한 연기 냄새와 함께 나무 냄새가 났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지옥 같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건물에 들어갔고, 맞았고, 캔디스에게 강간당했고, 글을 배웠고, 그와 몸을 섞었고, 그에게 다리가 부러졌다.
어디에 있든 항상 몸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으면 그나마 몸과 마음이 편했다. 그가 저를 보고 스치듯 미소를 짓는 게 좋았다. 그와 함께 있는 이들과 조금씩 대화를 하고, 그들과 있으며 익숙해지자 덜 외로웠다. 코에 맡아지는 희미한 나무 냄새가 좋았다.
있을 곳이 사라지고, 지킬 것이 사라진 너자에게 맥켄지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어느 곳에 소속되지 못하는 너자를 받아 준 유일한 사람.
자신의 부족을 학살되게 만든 장본인인 맥켄지 도노반인 것을 너자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맥켄지 도노반은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자 너자의 유일한 구원자였다.
너자는 맥켄지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비며 개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맥켄지는 알 수 없는 너자의 행동에 예전에 딱 한 번 키웠던 개를 떠올렸다. 그 개는 크고 까맸다. 그 개는 맥켄지를 참으로 잘 따랐다. 별다른 행동 교정을 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맥켄지의 명령에 따랐고 그 커다란 몸뚱이를 바닥에 비벼 배를 뒤집어 까며 맥켄지에게 애교를 부려댔다.
맥켄지는 그 개가 좋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고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으면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개가 스와포네에게 똑같이 그 귀여운 몸뚱이를 날려 가며 애교를 부려대는 것에 심장이 차게 식었다. 더는 그 복슬복슬한 털을 만지기도 싫었고 귀여웠던 그 생물이 역겨워 보였다. 그래서 스와포네가 보는 앞에서 돌로 개를 찍어 죽였었다. 맥켄지는 깨갱거리며 죽어 가는 개를 보며 무감하게 피에 전 돌을 던졌다. 그토록 좋아했던 개였는데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후부터 맥켄지는 짐승을 키우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왜 돌로 찍어 죽일 생각이 들지 않을까.
맥켄지는 잔뜩 발정하여 개처럼 몸을 비비며 끙끙거리는 너자의 작은 머리통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머리털의 감촉은 무척이나 부드러웠고 살랑거렸다.
그 개가 스와포네에게 꼬리를 치며 달려갔을 때, 스와포네에게 배를 보이며 헥헥거렸을 때 그렇게 역겹고 기분이 나빴는데 스와포네에게 구멍을 벌려 준 너자는 역겹지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내가 먼저 해야 했는데. 나는 처음이었는데, 너는 처음이 아니네.
저열하고 치졸한 감정이 맥켄지를 옭아맸다.
생각해 보면 스와포네 한 놈이 아니었다. 음침하고 역겨운 에르베의 자지도 허락했다고 했지. 그것도 자신이 머저리 러트와 승전미사를 준비하려 놈의 침실에 방문했을 때.
“…으응… 좋아….”
너자의 머리털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던 맥켄지가 갑작스럽게 너자의 머리털을 꽉 쥐었다. 너자는 자신의 머리채를 꽉 쥐는 맥켄지의 행동에 단 신음을 내쉬었다. 온몸이 뜨거웠는데, 맥켄지가 머리채를 꽉 쥐여 주어 시원했다.
맥켄지는 되레 아양을 떨어대는 너자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만큼 흥분됐다. 너자는 맥켄지와의 관계를 원한다며 먼저 몸을 부대껴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너자는 교태를 흘리며 제 중심에 엉덩이를 꾸욱 눌러댔다.
성에 담백했던 이가 색에 빠지면 그 누구보다 정열적이게 되는 법이었다. 맥켄지는 제 처음을 가져간 너자를 너무도 원했다. 아니, 너자가 좋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밤, 오늘 이렇게 제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맥켄지는 꽤나 냉철했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그는 감정적으로 움직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감정이 결여됐다고 생각될 만큼 이해득실을 따졌고 제 가족에게도 깊은 정과 사랑이 없었다. 하지만 너자가 없어지고, 개 목줄을 차고 에르베에게 목줄이 쥐어진 너자의 모습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성을 놓았고 머저리처럼 굴었다. 승냥이처럼 자신을 물어뜯으려는 러트와 에르베에게 애송이처럼 목을 훤히 드러냈다. 베타미의 앞에서, 스와포네 부자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얕보이기 십상인 머저리 같은 행동이었다.
사실 지금도 머저리 같은 행동을 했다. 잘게 조져 놓은 대구살처럼 되기 싫으면 짜져 있으라 큰소리 땅땅 쳐놨지만 맥켄지는 러트보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으며 증거도 없었다. 스와포네의 힘을 빌려도, 지금부터 증거를 싹싹 긁어모아도 놈들이 일을 치기 전까지 준비를 마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러트에게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었다. 모르는 척 증거가 완벽히 모일 때까지 러트에게, 에르베에게 고분하게 굴며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이 뜯긴 채로 다이닝룸의 문짝에 개구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너자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워서, 화가 나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그래서 맥켄지는 도박을 했다.
일생 동안 찾지도 않은 신에게 제발 러트에게 지성을 주지 말라고, 러트에게 내 허풍을 들키지 않게 해 달라고, 에르베가 끼어들지 못하게, 자신의 말에 있는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달라며 기도했다.
신의 힘일까, 아니면 팔 년간 다비드를 따라 열심히 프레젠테이션과 영업으로 다져온 자신의 허풍 덕분일까 러트는 그대로 머저리였고, 워린은 러트의 머저리 짓에 말려든 데다 제가 판 함정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맥… 매액….”
너자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맥켄지의 손에 되레 머리를 비비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고… 하고 싶어….”
맥켄지에게 아양을 부려댔다. 얼른 자신을 예뻐해 달라고, 내 불타는 몸을 달래 달라고, 그때처럼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맥켄지가 하던 생각을 멈추고 그 예쁜 눈으로 너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창백했던 얼굴에 장밋빛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인형 같은 맥켄지의 얼굴에 사람다운 열기가 서리는 것에 너자는 구멍과 자지에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너자는 애가 타 미칠 것 같았다. 너자가 힘없이 떨구었던 양팔을 들어 맥켄지의 단단한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날 사랑해 줘.”
맥켄지의 견고한 이성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모두 꺼져.”
“맥….”
정염이 깃든 맥켄지의 말에 러트가 구경하면 안 되냐고 머저리같이 애원하려는 순간 맥켄지가 서슬 퍼렇게 말했다.
“구경하고 싶으면 해. 하지만 내 눈에 너자를 보는 눈깔이 보이기만 하면 바로 그 눈깔을 터트려 버릴 거야.”
맥켄지는 이곳에 있는 기사들보다 덩치가 작고 야리야리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힘은 한평생 사람의 머리 위에 서 있고 명령을 하는 자의 것이었다. 등골이 오싹한 맥켄지의 명령에 1대대는 수저를 놓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9대대는 맥켄지의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맥켄지의 말에 응하는 것은 그에게의 복종을 뜻했고 그것은 워린에게 반하는 것이었다.
맥켄지가 끙끙 앓고 있는 너자의 머리통을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하였다. 너자의 왼쪽 귀가 맥켄지의 단단한 가슴에 꽉 눌렸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은색의 리볼버를 들었다. 그 리볼버는 지금 기사들이 차고 사용하고 있는 리볼버와는 달랐다. 그것은 맥켄지가 극비리에 개발 중이던 자동식 리볼버 콜트였다. 이것은 며칠 전 겨우 3차 테스트를 완료한 후 대량 양산을 앞둔 제품이었고 지금은 개발팀에 표본용으로 한 정, 맥켄지의 손에 한 정, 샬로메의 손에 한 정, 티모시의 손에 한 정이 있었다.
맥켄지의 길고 단단한 하얀색 손가락이 콜트의 손잡이 후방에 있는 그립 세이브티를 눌렀다. 콕앤록이 해제되었다. 그가 슬라이드를 당겼다. 철컥, 하며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울 거야.”
맥켄지가 너자의 오른쪽 귓가에 속삭였다. 너자는 귓가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과 청아한 목소리에 더욱 발정했다. 맥켄지는 자신의 중심부에 닿는 너자의 엉덩이가 점점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고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한 손에는 콜트를, 한 손은 장전을 마친 후 너자의 오른쪽 귀에 꽉 가져다 대 막았다.
그곳에 있던 기사들은 맥켄지의 이상한 행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리볼버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리볼버였고 보통의 리볼버는 실린더에 총알을 하나하나씩 장전해야 한다. 그리고.
-탕!
기존 리볼버의 배가 되는 강렬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워린의 뺨을 스쳐 그의 뒤에 있던 커다란 음식 트레이를 맞췄다. 쇠로 된 트레이가 구겨지고 산산이 찢기며 사방으로 튀었다. 뒤에 멀거니 서 있던 악단이 비명을 지르며 다이닝룸에서 튀어 나갔다.
엄청난 타격력이었다. 맥켄지의 기행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실린더를 돌리지 않고 가스도 빼지 않았다. 그는 총의 윗부분을 빠르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또다시 근처에 있는 화병을 깨트렸다.
-탕!
화병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며 나뒹굴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기사는 맥켄지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에 걸려 있는 리볼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빠르고 정확하고 엄청난 공격력이었다. 맥켄지가 실린더를 한 번 더 밀었다.
맥켄지가 말했다.
“다음엔 네 대가리에 맞는다.”
워린은 자신에게 겨누어진 검은색의 리볼버를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대체… 저게….
“새끼야, 나가라잖아!”
러트가 참지 못하고 기어코 벌떡 일어나 워린을 끌고 도망갔다. 워린은 정신이 빠진 듯 러트의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도 맥켄지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의 리볼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9대대는 워린이 러트의 손에 붙들려 나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몸을 일으켜 제 단장을 따라갔다.
샬로메는 러트와 제9대대가 홀랑 나간 것을 보고 저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콜트를 빼 들고 서 있는 1대대 기사들에게 말했다.
“정신 안 차리냐? 대기해, 대기! 저 새끼들 다시 들어오면 어쩔 거야?”
샬로메의 윽박에 1대대 대원들이 빠르게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샬로메와 함께 다이닝룸의 앞에 일렬로 섰다.
맥켄지는 마호가니 테이블에 있는 접시들을 한쪽 팔로 쓸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제 자지를 축축한 엉덩이로 비비고 있는 너자를 그 위로 들어 올렸다. 너자는 그 와중에 자신을 들어 올리는 맥켄지의 악력에 깜짝 놀라 눈물이 방울방울진 밤하늘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맥켄지가 자신을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는 너자를 보며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답답하게 옭아매고 있는 제 재킷과 셔츠를 황급하게 벗어 바닥에 버렸다. 너자도 그런 맥켄지를 보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편없이 떨리는 손가락 때문에 단추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너자가 결국 제 셔츠를 강하게 잡아 뜯었다. 투투둑, 하고 너자의 커다란 손에 의해 단추가 사방으로 튀며 셔츠가 풀어졌다.
맥켄지는 흥분에 못 이겨 자신의 손으로 셔츠를 뜯어 버린 너자의 행동에, 검은 셔츠 안에 봉긋하게 튀어나와 있는 커다란 가슴에, 마치 드뷔시 상처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같이 짜여 만들어진 것 같은 아름답고 멋있는 근육질의 몸에… 그리고.
“그대는….”
박력 있게 제 셔츠를 찢어발긴 행동과 다르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수줍은 듯 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알을 도륵거리며 굴리는 너자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나를 미치게 만들어.”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맥켄지의 이성이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너자는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맥켄지의 그 아름답고 고귀한 얼굴이 흥분에 절어 자신의 젖가슴을 보며, 젖꼭지에 귀두를 맞추고 마치 추삽질을 하듯 찌르며 자위를 하는 모습에 너자의 자지가 파르르 떨리며 정액을 찔끔찔끔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젖꼭지에 느껴지는 귀두에서 미끈미끈한 액체가 질질 흘렀다. 그리고 맥켄지의 어린애 팔뚝만 한 자지가 마치 정액을 쏟아낼 듯 크게 움찔거렸다.
“… 너자, 가슴을 모아 볼래?”
“응….”
맥켄지의 말에 너자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가슴을 모로 모았다. 너자의 가슴은 크고 두툼해 모아 놓으니 마치 여성의 것처럼 굴곡이 졌다. 맥켄지는 그 야해 빠진 젖가슴을 보며 바짝 마른 입술에 혀로 침을 적시고 그 틈바구니에 제 자지를 끼워 넣었다.
“아… 응…!”
“하….”
기분 좋아… 맥켄지의 입에서 꿈결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자가 그런 맥켄지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모은 손에 힘을 더 줘 젖가슴 사이에 끼어 있는 맥켄지의 자지에 압박감을 주었다. 맥켄지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가슴을 더욱 모아 주는 너자의 모습에 살풋 미소를 지으며 추삽질을 시작했다.
너자에게는 성적 자극이 하나 가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심적으로 만족감이 너무도 높았다. 그리고 맥켄지의 추삽질이 강해질수록, 맥켄지의 자지에서 정액이 질금질금 나오며 제 가슴골에 조금씩 뿌려지며 추삽질이 점점 격렬해질수록, 여린 살 안에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자지의 감촉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지에 찔려지는 가슴의 피부가 찌릿찌릿했다.
아… 으응… 응…. 너자의 입에서 단 소리가 나왔다. 맥켄지는 가슴이 범해지며 신음을 흘리는 너자의 모습에 결국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정액을 싸 버렸다.
“아…….”
“…….”
맥켄지의 정액이 너자의 가슴을 더럽히고 턱 끝까지 튀었다. 그리고, 자신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는 맥켄지의 얼굴에,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너자도 사정하고 말았다.
맥켄지의 혀가 너자의 구멍을 샅샅이 핥으며 빨아댔다. 원래는 남성의 구멍에서 나올 수 없는 액체가 질질 흘러나와 맥켄지의 입속에 들어갔다. 맥켄지의 입에서, 너자의 구멍에서 추잡한 소리가 들렸다. 너자는 구멍을 잔뜩 빨리며 또다시 정액을 싸 버렸다.
“좋니?”
그가 너자의 배에 씬 묽은 정액을 펴바르며 아름답게 웃었다. 너자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맥켄지의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양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앙탈을 부리는 것 같은 너자의 모습에 맥켄지가 작게 욕을 짓이기며 너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너자는 구멍에 닿는 뜨거운 자지의 감촉에 깊은숨을 내쉬며 곧 느껴질 고통에, 뇌가 녹을 만큼 느껴질 쾌락을 기대했다. 하지만 맥켄지의 자지가 너자의 구멍만을 비빌 뿐 들어오지 않았다.
애가 탄 너자가 눈을 가리고 있던 양팔을 내려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
맥켄지가 너자의 오른발을 살며시 감싸 쥐고 뼈가 엇갈려 울퉁불퉁한 발목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자는 순간 떠오르는 무서운 기억에 오른발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오른 발목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맥켄지에, 그의 손에 들린 오른발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미안해.”
“…….”
그가 한 번 더 너자의 오른 발목에 입 맞추며 말했다.
“질투가 나서 그랬어.”
너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너자의 입이 발발 떨리며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나빴어.”
“응. 내가 나빴어.”
“너 나빠.”
너자의 울음에 맥켄지가 너자의 오른 발목을 내려놓고 상체를 위로 올려 너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펑펑 울고 있는 너자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추며 말했다.
“미안해, 좋아해.”
너자가 서러움을 담아 맥켄지의 가슴을 콱 끌어안았다.
다이닝룸에는 음식물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속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묘한 냄새가 공기 중에 퍼졌다. 그리고 그 냄새는 꽉 닫은 다이닝룸의 밖으로 질금질금 새나갔다.
워린은 다이닝룸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야만인의 교태 섞인 비명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당장에라도 다이닝룸으로 들어가 제 것을 탐하고 있는 맥켄지의 멱을 따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맥켄지의 자지에 자지러지는 야만인의 뺨을 세게 갈기고, 음탕하게 붉어져 있을 그 야성적인 몸에 채찍질하며 허벌창같이 풀린 구멍 안에 제 자지를 집어넣고 싶었다. 그리고 너의 주인은 나라며 게게 풀린 얼굴에 침을 뱉고 야만인의 내장이 정액으로 꽉 찰 때까지 범하고 싶었다.
“셋째 도련님, 안 가십니까?”
변태이십니까? 남이 씹질하는 소리를 듣고 있게? 워린은 자신을 보며 사격 자세를 취하려는 붉은 머리의 기사를 노려보았다. 붉은 머리의 기사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처음 보는 디자인의 총기였다. 맥켄지가 가지고 있던 리볼버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아마 맥켄지가 허락한 소수의 인간만이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또, 다이닝룸에 일렬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1대대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최정예 부대였고 자신이 매수하지 못한 부대였다.
워린은 마찬가지로 사격 준비를 취하고 있는 9대대 단원들, 제 기사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지.”
기회는 언제든지 돌아올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이 치욕은 어떻게든 꼭 갚아 줄 것이다.
* * *
맥켄지가 침대 맡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멍한 정신 속에서 쨍하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니 나뭇가지 위에 새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탁 트인 전경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이 담긴 커다란 창문은 도노반 후작 성의 그 어떤 방보다 컸다. 창문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전경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창문에 걸린 나무 잎사귀 틈새로 햇빛이 쨍하게 들어왔다. 맥켄지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 풍경을 나른한 눈으로 바라보다 침침한 눈을 한 손으로 꾹꾹 눌렀다.
이틀을 자지 못했다. 하루는 러트가 개떡같이 쓴 연설문을 뜯어고치느라, 도망간 너자를 잡으려 머리를 굴리느라 날려 버렸고 하루는….
“으응….”
햇빛 때문일까, 목청 좋게 지저귀는 새 때문일까. 맥켄지의 가슴팍에 왼쪽 뺨을 대고 정신없이 자던 너자가 잠투정을 부렸다. 슬쩍 보이는 너자의 퉁퉁 부은 눈에, 몹시 피곤해 보이는 안색에 맥켄지는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들을 쏴 죽일 셈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은 콜트를 쥐려고 했으나 총소리가 새소리보다 크다는 것을 떠올렸다.
역시 잠을 못 자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맥켄지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끙끙거리는 너자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더 자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너자의 잠투정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떠질랑 말랑 파르르 떨리던 너자의 눈꺼풀이 다시 온전히 눈동자를 덮었다. 너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맥켄지의 손길이 좋은지 아까보다 좋아진 안색으로 맥켄지의 가슴팍에 더 파고들었다.
맥켄지는 가슴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피곤해서 신경질적으로 변했던 표정을 느슨히 풀었다. 평소의 맥켄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아침에 오감이 저조한 편이었고 무척 신경이 날카로웠다. 그래서 수년간 맥켄지를 모신 그레머조차도 아침에 가볍게 맥켄지가 자고 있는 문을 두드리고 몇 분 후에 들어가는 편이었다. 아침의 맥켄지는 신경질적이라 별것도 아닌 일로 쥐 잡듯 잡혔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그의 표정이 평화롭게, 달콤하게 풀려 갔다. 그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머리털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잠들어 있는 너자의 모습을 응시했다.
똑똑.
부드럽게 풀린 맥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갔다. 그 사실을 모르는 노크의 주인이 말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작은 도련님.”
샬로메와 티모시였다. 맥켄지가 평소의 신경질적인 낯이 되었다. 샬로메는 그 저조한 주인의 모습에 바싹 타오르는 목에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너자를 보지 않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처리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티모시는 제 주인이 너자를 얼마나 아끼는 줄 몰랐다. 샬로메야 그와 함께 생활하며 너자 때문에 눈깔이 파이고 대가리에 총을 맞을 뻔하고, 제 얼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총알을 겪었지만 티모시는 아니었다.
샬로메보다 두어 살 어린 티모시는 그보다 냉정하고, 맥켄지의 명령이라면 죽는 시늉을 할 만큼 충성도가 높았지만 눈치가 없었다.
티모시는 저도 모르게 맥켄지에게 다가가며 그의 가슴팍에 엎어져 색색 잠들어 있는 너자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제 작은 주인보다 몇 배는 큰 야만인이었지만 주인의 품에 안겨 있는 폼이 어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꺼풀과 코가 퉁퉁 부어 있었지만 표정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검은색의 짧은 머리가락이 잠버릇 때문에 위로 뻗쳐 까치집이 져 있었다.
야만인의 남자다운 눈썹뼈와 우뚝 서 있는 코는 무척이나 잘생겼지만 부어 발개진 눈꺼풀과 입매가 묘하게 색스러웠다. 거기에 그 밑으로 쭉 뻗어 있는 하얀 목줄기와 질투 나도록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볼만하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의 옆구리를 확 찌르는 샬로메의 팔꿈치와 안면에 그대로 강타한 꽃병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티모시의 비명이 그의 입안에서 머물렀다 사라졌다. 여기에서 비명까지 지르면 정말 목이 따일 것 같았다. 티모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하고 밑으로 떨어지려는 비싼 꽃병을 잡아챘다.
맥켄지는 얼굴이 시뻘게져 꽃병을 들고 시선을 돌린 티모시를 응시하다 샬로메에게 말했다.
“내가 방해하지 말라 했을 텐데.”
잔뜩 날이 선 맥켄지의 목소리에 샬로메가 조심히 말했다.
“지시하신 사항 때문에 부득이하게 들어왔습니다.”
샬로메의 답에 맥켄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날카롭게 지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 모습에 샬로메가 티모시에게 보고하라 일렀다.
티모시가 갈색으로 고불거리는 머리를 뒤로 쓸며 늦은 경례를 했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작은 도련님께서 말씀하신 지점에 제6대대의 수색기사 몇 명을 꾸려 정찰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말씀하신 대로 어린 야만인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구금 중입니다.”
“어린?”
의아한 맥켄지의 목소리에 티모시가 답했다.
“네. 열세 살이 될까 말까 한 여자아이 네 명에 남자아이 두 명이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나이가 더 적은 것 같았습니다. 국경 지역 외곽의 산속 동굴에서 발견되었으며 동굴에서 몸을 은신하며 주변에 있는 열매와 풀을 뜯어먹으며 산 것으로 보입니다. 또 여자아이는 활을….”
“그 애들은 어디에 가둬 놨지?”
“아직 너무 어린 아이들이라….”
머뭇거리는 티모시의 말에 맥켄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제대로 말 못 하나?”
“…도노반 소유의 사냥터 망루 옆 산장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티모시의 말에 맥켄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도망가면 어찌하려고? 그곳은 사방이 울창한 숲이며 야만인 아이들은 몇 개월 간 국경의 숲속에 숨어 있다고 했지. 그 말은 아이들이 은신을 꽤 잘한다는 말이다. 몸도 작고 은신에 도가 튼 아이들을 다시 잡아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게 분명한데?”
“…지금 수색기사 두 명이서 교대로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애석하군.”
“…네?”
긴장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티모시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꽤 쓸모 있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맥켄지의 타박에 티모시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그의 기분과 같이 아래로 점점 처졌다. 티모시는 성정이 잔인했다. 그래서 티모시는 맥켄지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명령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행했다.
하지만 티모시는 어린아이들에게 약했다.
그는 록시에 나갈 때면 도노반 성에 있는 어린 시녀, 시종들에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과 간식을 사서 들어왔고 그것들을 고사리 같은 손에 쥐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페리가 그런 티모시의 모습을 꽤 좋아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맥켄지가 차가운 눈으로 티모시를 보며 말했다.
“이제 워린 에르베가 제6대대 수색 기사 몇 명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겠군.”
“…….”
“결국 에르베는 수색대원들이 있는 곳을 찾을 테고, 그곳에 내가 무엇을 숨겼는지도 알아차리고 내가 하는 일에 훼방을 놓겠지. 경이 일을 처리하면서 이런 생각은 못 하였나?”
맥켄지의 말은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었다. 티모시가 다시 한번 깊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경에게 콜트를 준 것은, 경에 대한 내 신뢰를 표한 것이다.”
“네.”
“그 신뢰를 저버리지 말길.”
제 작은 주인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말에 티모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장 극비리에 끌고 와 본관 지하 감옥에 처넣겠습니다.”
그 어린 야만인들이 너자와 관계가 있을지, 없을지 맥켄지는 몰랐다. 하지만 너자를 제 옆에 붙들어 놓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마 저와 관계가 없는 어린아이들일지라도 순두부같이 물러터진 너자의 성격에 저와 비슷한 종족의 어린아이들을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건대 어린아이들은 필요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맥켄지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너자가 없어졌던 그때가 생생히 떠올랐다.
맥켄지는 너자를 안는 내내 계속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나를 떠나갔던 것이었냐고, 아니면 에르베가 너를 납치해 간 것이냐고. 하지만 그는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너자의 입에서 네가 너무 미워서 가 버린 거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무서웠다. 그 말을 들으면 분노에 눈이 돌아가 너자에게 해코지를 할 것만 같았다.
“…….”
또 어린아이들이니 관리 안 된 숲속의 별장에 있는 것보다는 도노반 후작 성의 지하에 있는 게 나았다. 곧 있으면 추운 겨울이니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은 한정적일 것이고, 추위에 죽어 버릴 여지가 있었으니까. 차라리 지하 감옥의 깊숙한 곳에 데려다 놓고 삼시 세끼 먹여 주고 불을 때워 주는 게 나을 것이다.
“별관 지하 감옥으로 하지. 그곳은 집안 정신병자를 넣었던 곳으로 쓰인 곳이니 본관 지하 감옥보다 몇 배는 시설이 좋을 것이다. 또 흉흉한 소문이 돌아 집안의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가지 않지. 에르베가 그곳의 존재를 알아도 별달리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네!”
후에 덧붙여진 맥켄지의 말에 티모시의 얼굴이 풀렸다. 역시 제 작은 도련님은 큰 도련님보다 너그러우셨고 똘똘한 분이셨다.
티모시가 맥켄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명을 이행하겠다 하며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맥켄지의 방을 나선 티모시를 바라보던 샬로메도 맥켄지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곤 맥켄지의 방을 나섰다.
맥켄지가 그들이 사라진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고개를 숙여 너자의 까만 머리통에 코를 가져다 대었다. 볕에 잘 말린 천의 냄새가 났다.
그가 너자의 머리채를 꽉 쥐었다.
“응… 맥….”
너자는 싫어하지 않았다. 너자는 저를 꽉 압박하는 맥켄지의 품에 더욱 파고들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한 번은 도망쳤더라도, 두 번은 없다. 자신이 놓아주지 않는 한 다시는 노예가 제 눈앞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맥켄지는 매우 똘똘했고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은, 너자를 알지 못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 * *
다비드는 여전히 사경을 헤맸고 굴러들어 온 워린과 그 휘하의 기사단이 도노반 후작 성을 누볐다. 맥켄지와 샬로메의 경계 속에 일주일이 지났고, 이 주일이 지났고, 한 달이 지났다. 도노반 후작 성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샬로메는 알고 있었다.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 음침하고 간악하기 짝이 없는 워린 에르베가 제 주인에게 큰 엿을 날릴 것이다. 샬로메와 티모시는 은밀하게 움직여 러트와 워린의 유착관계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맥켄지의 예상대로였다. 도노반 후작 가문 앞으로 약속어음이 발행된 명세를 찾았고, 맥켄지는 이 주일 동안 야심한 새벽 짧은 시간 내로 샬로메와 함께 가문의 회개실의 장부를 탈탈 털어냈다. 수상한 내용의 영수증은 물론 너무 작다 싶고 너무 크다 싶은 금액과 날짜를 모조리 외워 맥켄지의 방으로 들어가 그 내용을 종이에 모조리 써내었다. 조금씩 무형의 무언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러트가 개발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러트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표면적인 수석 대표이지만 그는 총기를 설계할 지능이 되지 않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그것을 끝까지 성사시킨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겉핥기식으로 개발실에 들어와 맥켄지가 하는 것에 훈수를 두며 맥켄지의 기획안을 둘러보기라도 했지만, 그가 기획한 ‘산탄’ 프로젝트를 장렬하게 말아먹은 후로는 그가 1개발실에 발걸음을 들인 적이 없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1~5개발실에는 개발 소속 직원들과 도노반 후작 가문의 직계 가족과 초대된 일부의 손님들이 출입할 수 있었고, 그곳은 제7대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수석 개발실은 차석 대표인 맥켄지와 그의 호위 샬로메, 가주 다비드와 현재 가주의 대리 페리만이 들어올 수 있었다. 수석 개발실에는 1대 도노반이 남겨 놓았던 문서부터 지금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이자 설계자인 맥켄지가 기록해 놓은 자료가 있었다.
그 문서의 양은 무척이나 많았는데, 100평이 넘는 방의 서재에 그 모든 자료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래서 제7대대 단장과 7대대 기사 중 제일 뛰어난 네 명이 교대로 수석 개발실 앞을 지켰다.
그곳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심장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의 도노반 후작 가문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 러트가, 다비드의 성화에 체면치레로 가끔 오던 러트가 개발실에 자주 방문했다. 아마 한 달 전 만찬에서 맥켄지가 사용한 콜트의 존재 때문일 것이었다.
일시적으로 제국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는 맥켄지는 수석 개발실에 출퇴근하며 지냈다. 그의 마음 같아서는 너자를 1개발실에 데려다 놓고 싶었지만, 너자는 총을 보기만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덜덜 떨어댔다. 그런 너자를 사방이 총인 곳에 데려다 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석 개발실에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수석 개발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아무리 맥켄지라도 제 애인을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맥켄지는 가문을 먹여 살리는 장기 말이었고 한가롭게 제 애인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또 사사건건 별 같잖은 것에 시비를 걸어대는 러트와 워린을 쳐내는 것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너자는 제2대대 단장 메트와 부단장 패트의 비호를 받으며 맥켄지의 방 안에 갇혀 지냈다.
패트와 메트는 제 주인이 아끼는 성노에게 농을 건넬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말이 많은 타입들도 아니었다. 패트는 맥켄지의 방 안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책을 읽거나 재활 훈련을 하는 너자를 감시했고 메트는 방문 밖에 서서 외부에서의 침입을 방지했다.
너자와 맥켄지는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그레머와 시종들이 가져오는 조식을 함께 먹고 맥켄지는 개발실로 출근한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다시 제 방에 와 너자와 함께 중식을 먹고 또다시 개발실로 가 일을 하고 석식에 맞춰 퇴근하고 너자와 함께 석식을 먹었다.
맥켄지는 할 일이 아주 많았지만 너자는 할 일이 없었다.
너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커다랗고 넓은 방에서 맥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단출하고, 반복되는 시간이었다.
너자가 창가에 걸터앉아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노반 후작 성의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정원은 푸르렀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시녀와 시종들, 그곳을 가볍게 뛰는 기사들이 보였다.
툭, 너자의 이마가 유리창에 닿았다. 안 그래도 하얬던 그의 얼굴이 햇빛을 보지 못해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제국 아카데미에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그때도 너자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너자는 무조건 맥켄지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고 제 의지로 다른 장소에 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꽤 재밌었다.
맥켄지는 수업을 고루고루 잘 듣는 편이어서 그가 아카데미를 누비는 행동반경이 넓었다. 너자는 맥켄지와 그레머, 샬로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직은 신기한 제국의 건물을, 학생들을, 나무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또 아카데미와 식당은 거리가 좀 먼 편이었는데, 인위적으로 꾸며 놓은 조경은 너자의 눈에 보기 좋았다.
비록 지금은 다리를 절어 그때만큼 빨빨거리며 누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밖에 나가 걷고 싶었다. 맥켄지의 방 안을 아침 운동을 하는 노인네처럼 뱅뱅 도는 것이 아니라, 맨발로 풀을 밟아 보고 싶었다.
창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맡는 게 아니라 직접 밖으로 나가 대지를 느끼고 싶었다.
너자도 밖에 나가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그들을 막아설 수는 있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리를 절었다.
처맞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괜히 붙잡혀 맥켄지의 약점이 되면 안 됐다. 그레머가 말하기를 맥켄지는 이 집안의 귀한 사람이라 했다. 그런데 자신이 말썽을 일으키면 맥켄지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했었다.
하지만 너무 답답했다.
너자가 멍하니 생각했다.
목줄만 없을 뿐이지, 방 안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 같다고.
너자가 창가에 팔을 괴고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하루 일정을 마치고 온 맥켄지가 방문 앞에서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하는 미세한 소리에 너자가 귀를 쫑긋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절뚝이며 방문 앞으로 열심히 걸어갔다. 들뜬 마음과 다르게 몸이 잘 따라 주지 않아 느렸다.
하지만 맥켄지가 비싼 돈을 주고 록시에서 데려온 재활 닥터가 정성스럽게 발목을 마사지해 주고 약물과 물리치료를 병행한 덕분에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던 통증은 거의 없어졌고, 그의 걸음걸이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맥!”
맥켄지는 창백하고 우울한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띠고 자신을 향해 열심히 걸어오는 너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
너자는 자신을 보며 웃어 주는 맥켄지를 보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언제든지 버려지고 폐기될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조심하렴.”
부드러운 맥켄지의 목소리와 자신을 부축하는 그의 손길에 너자가 미소를 지었다.
항상 음울하게 침전되고 하루걸러 울어서 항상 눈가가 발갰는데,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몹시 안정적인 표정이었다.
맥켄지가 너자에게 양손을 뻗었다. 맥켄지의 모습에 너자는 습관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너자와 맥켄지의 덩치는 차이가 나는 편이어서 너자의 품에 맥켄지가 쏙 안기었다. 평범한 영식이었다면 그런 제 모습에 수치를 느꼈겠지만 맥켄지는 아니었다.
맥켄지는 자신을 부드럽게 끌어안은 너자의 따땃한 온기와 뺨에 느껴지는 너자의 두툼하고 말랑한 가슴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제 어미인 페리도 저를 이렇게 꽉 끌어안아 준 적이 없었다. 맥켄지가 뺨에 느껴지는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들을 보고 있던 패트와 메트가 눈치껏 방을 나섰다. 샬로메도 그 눈꼴 시린 모습에 그들을 따라 방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맥켄지의 호위 기사였고 그의 명령이 없으면 그의 근처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옆에 있는 그레머도 마찬가지였다.
“…….”
“…….”
그레머와 샬로메는 익숙한 듯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격렬한 포옹을 마친 너자가 맥켄지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그가 너자를 침대에 끌어 앉혔다. 너자의 발목에 무리가 갈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맥켄지가 너자에게 오늘은 무얼 했느냐며 물으려고 할 때 그의 시선에 커다란 창문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닿았다.
근 한 달간 저 의자는 창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가 무심코 말했다.
“항상 창밖을 보나 보구나. 할 게 없니?”
“응.”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렴.”
맥켄지는 너자가 심심해서 고양이같이 창가를 구경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레머에게 너자에게 놀 거리를 더 가져다주라고 명령을 하려고 할 때, 너자가 자신을 보며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눈치챘다.
“…….”
귀여워 미치겠네.
대체 무얼 가져다 달라고 저리 눈치를 보는 것일까. 맥켄지가 고개를 숙이고 눈만 또륵 굴려 자신을 쳐다보는 너자의 모습에 부드럽게 말했다.
“말만 하렴.”
“저….”
맥켄지는 너자가 별 쓰잘데기 없는 부탁을 해도, 터무니없는 것을 가져다 달라 부탁을 해도 들어줄 것이다. 너자가 원하니까.
대륙에 있는 풀떼기가 갖고 싶다고 말을 해도 그는 가문의 기사를 보내 뽑아 오라 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너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좋았던 기분을 한 번에 땅바닥에 패대기치기에 충분했다.
“나가고 싶어.”
“…….”
너자의 말에 뒤에서 둘이 연애하는 것을 곁눈질로 구경하고 있던 그레머와 샬로메가 숨을 멈췄다.
부드럽게 풀렸던 제 작은 주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서릿발같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요구하던 너자였기 때문에 맥켄지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맥켄지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기에 괜찮다고 착각을 했다. 너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가고 싶어. 너무 심심해. 당신이 올 때까지 너무….”
“그만.”
“…!”
아무 감정이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은 맥켄지의 목소리에 너자의 고개가 번뜩 들렸다.
그리고 수줍게 풀려 있던 너자의 얼굴이, 두려움에 점점 침전되었다.
“…….”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의 표정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표정과 같았다.
남자답게 각진 단단한 너자의 턱이 긴장했는지 파르르 떨렸다. 이를 꽉 깨물었는지 동그랗게 잘 튀어나온 귓불 밑의 귀밑 턱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얼굴 살이 없는 너자라 그 턱이 더욱 눈에 띄었다.
맥켄지는 너자를 한입에 넣어 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 자꾸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지? 내 옆에 있는 게… 싫은 건가? 맥켄지의 가슴 한편에 억눌렀던 불안함이 부피를 키웠다. 맥켄지의 호수같이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지금껏 억눌렀던 것이 맥켄지의 안에서 터져 버렸다. 그가 물었다.
“록시에서 왜 도망갔어?”
“…….”
“응? 말해 봐.”
너자는 그의 입에서 나온 금기어에 숨을 쉴 수 없었다. 지금껏 맥켄지는 그에게 왜 도망갔는지, 왜 그가 워린과 함께 있었는지, 자신이 워린의 침실에 방문했을 때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너자 또한 의식적으로 그때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종의 약속이었다. 서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대신 이 평화를 계속 간직하자는 약속.
하지만 너자가 그 약속을 먼저 깨 버렸다. 비록 너자가 그런 의도로 맥켄지에게 나가고 싶다고 부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맥켄지의 입장에서 너자가 ‘나가고’ 싶다고 한 것은 그의 심장에 칼을 꽂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너자의 어깨를 꽉 움켜쥔 맥켄지의 손아귀 힘이 더욱 세졌다. 결국 너자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아파요.”
“아프니?”
너자가 맥켄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어깨를 잡고 있던 맥켄지의 오른손이 너자의 왼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께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방금 당신이,”
“…….”
“이 부근에 칼을 박아 놓았어.”
아주 깊이. 맥켄지의 이가 뿌득 갈렸다. 그리고 너자의 왼손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의 심장 부근을 쿵, 쿵, 하고 치기 시작했다. 그 자학적인 행동에 너자가 맥켄지에게 잡힌 손에 힘을 확 주어 빼내었다. 그의 피부가 상할까 염려해서였다.
“날… 거부해?”
하지만 맥켄지는 너자가 자신을 뿌리쳤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맥켄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충격에 하얗게 질려 갔다.
그가 충격에 고개를 숙였다. 맥켄지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이 가녀려 보였다. 가늘고 결이 좋은 플래티넘 블론드를 묶은 머리끈이 타이밍 좋게 끊어지며 단정히 묶었던 머리칼이 풀려 그의 얼굴을 가렸다.
훈기가 가득했던 그의 방이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다.
그의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 사륵, 하고 침대에 떨어졌다. 머리카락 때문에 위에 올라탄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인지 몰라 애가 탔다. 너자가 그 모습에 멍하니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가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려 몸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을 때였다.
맥켄지의 손이 매섭게 너자의 손등을 쳐냈다.
“…흐….”
그리고 덜덜 떨리는 맥켄지의 하얀 손이 너자의 목에 닿았다. 처음에는 그저 닿기만 했던 그의 양 손끝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힘은 꼬집는 정도의 힘이어서 압박되기만 할 뿐 숨이 졸리지는 않았다.
너자는 애가 탔다. 목이 압박되는 와중에도, 안달이 났다.
자신의 뺨에 툭, 툭 떨어지는 그것은,
눈물이었다.
“…도련님!”
뒤에서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보던 샬로메가 급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감히 제 주인의 몸에 손을 대 그를 떨어뜨렸다. 맥켄지는 의외로 너자에게서 쉽게 떨어졌다.
너자의 얼 빠진 눈이 맥켄지를 멍하니 응시했다. 샬로메가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다 너자에게 손을 뻗어 괜찮으냐고 물으려 할 때 자신의 등 옷가지를 확 잡아당기는 맥켄지의 손에 바짝 굳었다.
그때였다. 샬로메의 뒤에 가려져 있던 맥켄지가 양손을 얼굴로 가져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몸을 덜덜 떨어댔다.
“흑… 흐….”
“…도련님?”
맥켄지의 눈물에 샬로메가 굳어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것은 그레머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상황에 몹시 놀랐지만 수년간 맥켄지를 돌봐 왔던 그들은, 맥켄지가 오열하는 것을 멍청하니 응시했다.
코흘리개 시절에도, 청년이 되었을 때도 그들이 아는 한 맥켄지는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그 어렸던 나이에 사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승마용 마편으로 손등에 피가 나도록 처맞았을 때도, 총기 설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폭언을 들었을 때도, 장부를 정리하며 계산이 틀렸을 때 그 벌로 지금껏 정리했던 장부가 눈앞에서 불태워져 다시금 기억을 더듬어 장부를 한 줄씩 기재했을 때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을 가린 손가락의 틈새에서 좌절의 말이 나왔다.
“내가… 내가….”
“…….”
“목을….”
몹시 혼란스러운 목소리였다. 맥켄지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사용인들이 처음 보는 제 주인의 눈물에 순간 굳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밭은 숨을 헥헥거리던 너자가 비틀거리며 맥켄지에게 기어갔다. 그리고 그 큰 손을 뻗어 맥켄지의 양손을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너자의 강인한 힘에 맥켄지의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힘없이 떨어졌다. 너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울지 마….”
맥켄지의 푸른 눈에 고여 있는 눈물을 제 손으로 직접 닦아 주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미적지근한 물방울에 너자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의 눈물을 닦아 주는 너자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맥켄지가 그 예쁜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내가…….”
“…….”
“내가….”
너자가 복잡한 눈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맥켄지는 자신을 응시하는 너자를 보고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흘리며 떠듬떠듬 말했다.
“미안해… 네가 다시 날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
“너무… 너무 무서….”
맥켄지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너자가 맥켄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었다. 맥켄지가 놀란 눈으로 눈을 감고 자신의 입에 입을 맞춘 너자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동안 입술만을 마주한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술을 떼어낸 것은 너자였다. 너자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가녀리게 떨고 있는 맥켄지에게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그러니까 울지 마요.”
정말이었다. 맥켄지는 정말 목에 손만 가져다 대었을 뿐 힘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다.
“미안….”
“쉬….”
“미안해….”
맥켄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마치 믿지 못하겠다는 듯 형편없이 떨렸다. 너자는 그런 맥켄지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저 여린 사람을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다시는….”
“…….”
“다시는 나가겠다는 말 하지 않을게.”
“…흑….”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요. 너자가 맥켄지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그의 말에 맥켄지가 더욱 훌쩍였다.
너자가 몹시 당황해하며 맥켄지를 꽉 끌어안았다.
“…….”
절절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둘을 보며 샬로메가 숙연하게 협탁에 있는 휴지를 뽑아 제 주인에게 가져다주려다 곧 몸을 돌려 그레머에게 다가가 어서 나가자며 그의 팔을 끌었다.
너자는 보지 못했다.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맥켄지의 얼굴이 황홀하다는 듯 웃고 있는 것을.
* * *
맥켄지가 곤히 잠든 너자의 얼굴을 응시하다 그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에 느껴지는 감촉이 매끈하며 뜨끈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개가 입질을 하듯 너자의 이마에 이를 대어 깨물 듯 꾹 눌렀다.
하지 마… 너자가 이마에 느껴지는 감촉에 웅얼거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그 탓에 잘 접혀 침대 위에 수납되었던 너자의 왼쪽 발이 침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맥켄지의 침대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너자의 기다란 다리는 그 침대에 온전히 담기지 못했다.
맥켄지가 고개를 돌려 너자의 툭 튀어나온 왼쪽 발목과 발등을 응시하다 곧이어 몸을 뒤척이느라 잘 접혀 있던 너자의 오른쪽 발목이 침대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맥켄지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손을 뻗었다.
다행히 맥켄지의 섬섬옥수 같은 손바닥에 너자의 오른 발목이 잡혔다. 맥켄지가 손에 쥐어진 뼈가 불거진 오른쪽 발목을 응시했다. 왼쪽 발목의 복숭아뼈와 달리 울퉁불퉁했고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만들면 도망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맥켄지는 때때로 너자의 반대쪽 발목을 부러트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똑똑.
공손한 노크 소리에 맥켄지가 조심히 너자의 정강이를 모로 모아 잡았다. 그 덕에 너자의 양발은 침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졌다.
샬로메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흐리게 만든 뒤 손에 들린 편지를 맥켄지에게 건넸다.
맥켄지가 숙였던 몸을 일으켜 샬로메가 건네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지를 봉하고 있는 왁스에는 스와포네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맥켄지가 귀찮게 흘러내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뒤로 넘겼다.
스륵, 금사 같은 머리칼이 뒤로 넘겨지며 환히 보이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샬로메는 제 주인의 겉모습을 잠시간 홀린 듯 바라보다 혀를 찼다. 노예가 제 주인에게 홀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성격만 좀 유순하면 더 좋았을 텐데, 저 성질머리가 얼굴을 죽였다.
샬로메가 자신에게 망측한 생각을 하든 말든 맥켄지는 편지봉투를 북 찢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특유의 속독으로 꽤 많은 분량의 편지를 한숨에 읽은 맥켄지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편지지를 샬로메에게 건네며 말했다.
“태워.”
제 주인의 명령에 샬로메가 협탁 위에 올려져 있는 촛대를 들어 올려 편지지를 그 위에 가져다 대었다. 화륵, 하고 편지지에 불이 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지의 반이 태워졌다. 그리고 제 손가락께로 올라온 불티를 바라보다 솜씨 좋게 손목을 털어 위로 올렸다.
위로 던져진 편지지는 순식간에 불에 태워져 재가 되어 사라졌다. 공중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는 편지지를 보다 맥켄지가 말했다.
“오늘 스와포네가 방문한다.”
“스와포네가요?”
의외라는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가 찌뿌둥한 목을 두둑이며 풀며 말했다.
“러트가 제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어떤’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며 제안을 했다더군.”
“…….”
“또 에르베도 승전미사 후 계속해서 거래하자고 졸랐고, 금품도 받았다고 하는구나.”
샬로메는 순간 떠오르는 무언가에 얼굴을 굳혔다. 설마 스와포네를 끌어들일 생각을 할 거라고는…. 심각한 샬로메의 표정과 다르게 맥켄지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맥켄지가 말했다.
“됐어. 예상한 일이었어.”
러트나 에르베나 피장파장이었다. 거기에 손을 잡으려면 확실하게 잘 좀 잡지. 맥켄지가 혀를 찼다.
“괜찮으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으며 말했다.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어?”
오만하게 웃는 맥켄지의 모습에는 두려움도, 떨림도 없었다. 샬로메는, 아니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은 그래서 맥켄지를 택했다.
도노반 후작 가문에는 두 가지 기사단이 있었다. 하나는 후작 가문의 일반 사기사단이었고, 하나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사기사단이었다.
일반 사기사단은 도노반 후작 가문 자체를 섬기는 일반 기사단이었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사기사단은 기업에 속한 사기사단이었다. 본래 도노반 후작 가문의 대표 기사단은 일반 사기사단이었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은 열 명도 되지 않는 기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맥켄지가 차석 대표로 취임하고, 그저 새로 만든 총을 검품하며 시연을 하는 기사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남는 인력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굴리고 사용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맥켄지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을 아예 한 대대 만들어 그들에게 멋들어진 제복을 입혔다. 그리고 사기사단과 함께 영지 내 순찰을 돌게 시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사기사단보다 무조건 빠르게 일을 해결하라 명령했다.
사기사단은 대대로 입어 왔던 제복과 검을 주로 사용하던 정통 기사단이었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은 맥켄지의 지휘 아래로 최신 디자인의 멋들어진 제복을 입었고 기다란 머스킷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영지민들은 기존에 보았던 사기사단 외로 멋들어진 제복을 입고 그 귀하다는 머스킷을 메고 다니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영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을 보며 열광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 기사단의 소문이 알음알음 주변 영지에 퍼졌고 왕국의 수도 록시에도 퍼졌다. 어느새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문에 대한 홍보가 되었고 젊은 영식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에 입단할 기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불과 10명 남짓한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은 기사단이 되어 어느새 제8대대까지 불어났다.
그중 샬로메는 맥켄지의 호위로써, 그리고 맨 처음 맥켄지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을 구상하고 계획을 실행할 때 투입된 인력이었다. 처음 샬로메는 고귀한 가문의 막내 아드님을 호위하는 것 때문에 왕국의 기사단을 제대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예쁘장한 외모의 맥켄지를 무시했다. 하지만 비상한 머리와 비정한 사고를 가진 맥켄지에게 매료되었다.
물론, 저 더러운 성질머리 아래에서 일하는 건 힘들었지만, 맥켄지의 밑에 붙어 있을 때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부와 명성을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또 샬로메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원년구성원이었고 제1대대의 단장이었다.
샬로메는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귀족 가문의 영식들을 보며 권력의 참맛을 알아갔다. 고작 평민에 불과한 자신에게 콧대 높은 귀족 영식들은 툴툴거리지도 않고 제가 하는 말에 죽는 척도 감내하며 딸랑이질을 했다.
그래서 도노반 후작 가문의 기사단은 두 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정통성 있는 러트를 따르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사기사단, 그리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을 창설한 맥켄지를 따르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
그들의 파벌은 표면적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하지만 러트의 간계로 평화는 위태위태해졌다. 물론 감히 에르베에게 붙은 찢어 죽일 것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의 신상은 모두 파악했고, 러트와 워린의 유착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것들은 아마 늦어도 요번 달 안에 일을 칠 것 같았다.
“샬로메.”
넵. 다른 생각을 하던 샬로메가 맥켄지의 말에 재빨리 답했다. 맥켄지가 말했다.
“아마 근래에, 아니… 어쩌면 오늘 내란이 일어날 수 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배신자들은… 내란이 시작되는 즉시 그 새끼들 먼저 머리를 터트려 버려. 잘 지휘할 수 있지?”
“네.”
“단장들에게 2 경계령을 내려. 은밀히.”
“네.”
“그리고….”
맥켄지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샬로메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얼마간의 침묵 후 맥켄지가 말했다.
“패트와 메트에게 너자를 데리고 스와포네가 오기 전에 산책시키라고 해.”
“…네?”
상황에 맞지 않는 맥켄지의 명령에 샬로메가 멍청히 되물었다. 오늘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노예의 산책이라니?
“…….”
그런 샬로메의 반응에 맥켄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맥켄지에 샬로메가 웃음이 나오려고 푸르르 떨리는 입술을 이로 깍 깨물며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 * *
잠에서 깬 너자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품 안이 휑했다. 맥켄지가 없었다. 손을 뻗어 침대 옆을 만져 보니 차가웠다. 그가 나간 지 꽤 된 것 같았다.
“맥….”
불러 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아쉬워서 멍하니 맥켄지를 부르며 베개에 뺨을 비비는데 묵직한 목소리가 조곤히 말해 왔다.
“도련님께서는 먼저 식사하시고 나가셨습니다.”
“…!”
민머리 기사 패트였다. 깜짝 놀란 너자가 용수철처럼 튕기며 몸을 일으켰다. 너자가 커다랗게 뜨인 눈을 깜빡이며 패트를 응시했다. 갸름한 얼굴형의 매끈하게 생긴 패트가 무뚝뚝한 얼굴로 묵례했다.
보통 패트가 너자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항상 함께해도 마치 사물처럼 구석에 서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패트가 너자에게 말을 걸었다. 너자가 멍하니 패트를 보다 자신도 묵례했다.
패트는 자신에게 묵례하는 너자를 눈을 깜빡이면서 응시하다 근처의 당김줄을 당겨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을 불렀다. 패트의 신호에 트레이에 조식을 담아온 시종 한 명과 너자의 옷을 입힐 시종 하나가 같이 들어왔다.
-너자의 편의를 신경 써서 봐 줘.
밖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패트에게 맥켄지가 단단히 이른 탓이었다. 어제 많이 놀란 너자를 위한 맥켄지의 서투른 배려였다. 보통의 기사라면 제 주인의 명령에 시종이 할 법한 일을 시킨다며 불만을 비쳤겠지만 패트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 맥켄지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저 커다랗고 멍청해 보이는 색노를 품는 제 주인의 취향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제 주인이 아끼는 것이었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으니 그는 제 주인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해야 했다.
패트가 어색히 자신에게 옷을 입히는 시종의 시중을 받으며 멍하니 있는 너자에게 말했다.
“도련님께서 오늘 산책하러 나가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
“혼자는 안 되고 저와 메트랑….”
함께 나가야 한다는 말을 이으려던 패트가 자신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 너자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대충 말을 뭉뚱그리며 고개를 돌려 잠시 메트에게 가 본다며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메트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나온 제 동생을 슬쩍 보며 말했다.
“뭐냐.”
“뭐가?”
“네 두피 존나 터질 것 같다?”
제 형의 무심한 타박에 패트가 황급히 제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촉이 뜨끈했다. 패트가 제 머리통을 만지며 당황해하고 있는 것을 보다 메트가 말했다.
“야… 좆 돼… 그 새끼 건들면…. 네 좆 도련님이 손수 잘라 버릴걸.”
“아, 그런 거 아니라고!”
패트가 저를 놀리는 메트에게 빽 소리 질렀다. 메트는 제게 성을 내는 동생을 더 놀리고 싶었지만, 정말 두피가 터질 것같이 빨개진 패트의 머리통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너자가 공격적으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씩씩하게 문 앞으로 걸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보통 패트가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문가로 가기만 하면 무서운 얼굴로 안 된다며 주의를 주던 통에 그는 문을 여는 행위를 지금껏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너자의 행동은 당당했다.
너자가 당차게 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패트와 메트가 색노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가를 풀고 쑥스럽게 웃으며 어서 가자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는 색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너자의 양옆에 섰다.
그들이 너자에게 팔짱만 끼면 딱 죄수를 이송시키는 그림 같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색노가 돌발 행동을 하면 쥐어패서라도 제압할 의사가 충분히 있었다. 너자의 양옆에 선 패트와 메트는 서로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드디어 너자가 후작 성의 문을 열고 나왔다.
“와….”
너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창문 안에서 보기만 했던 후작 성의 앞뜰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는 녹음, 인조적으로 가꾸어진 조경들, 돌을 깎아 만든 무언가의 조형물들, 커다란 분수가 보였다.
도심에 상경한 촌놈처럼 정원을 보고 있는 너자에게 메트가 말했다.
“너자 님께 허락된 곳은 후작 성의 앞뜰 정원과 후원의 정원뿐입니다.”
“맥에게도 갈 수 없어요?”
“네. 안 됩니다. 중요한 손님을 받고 계셔서요.”
무심히 말하는 메트에게 너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몸을 멈췄다. 그런 너자에게 메트가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잠깐만요.”
너자가 천천히 몸을 굽혀 시종이 곱게 신긴 검은색 가죽 신발을 벗고 그 안에 있는 양말을 벗었다. 그리고 양말을 잘 말아 가죽 신발 안에 넣고 왼손으로 신발들을 잡았다.
코만치는 평원 대륙의 민족이었다. 평원에서 신발을 신을 일은 없었다. 그는 맨발이 더 편했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맥켄지의 방 안에서 나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너자가 씩씩하게 말했다.
“가요!”
패트와 메트는 느릿느릿 걷는 너자의 발걸음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점잖이 그의 속도에 발을 맞췄다. 후작 성의 정원은 무척 넓었다.
너자는 산책을 하는 노인네처럼 천천히 걸으며 정원에 있는 식물들을 구경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다. 패트와 메트는 너자의 옆을 따르다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이 정확히 무엇인지 콕 짚을 수 없어 답답해하고 있을 때 천천히 걷고 있던 너자가 말했다.
“정원에 아무도 없네요.”
“…….”
“창문에서 봤을 때 정원엔 사람이 항상 많았는데….”
이상하다는 듯 말하는 너자의 목소리에 패트와 메트가 수신호를 주고받았다. 패트가 너자에게 말했다.
“다리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패트의 말에 너자가 잠시간 생각을 하다 말했다.
“괜찮….”
“아니요. 잠시 쉬지요.”
…그럴 거면 왜 물어봤지? 단호히 말하는 패트에 너자가 맹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너자의 수긍에 패트와 메트가 너자의 양팔에 손을 끼었다.
헉? 너자는 양옆에서 자신을 들어 올리는 두 기사에게 적잖이 당황해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을 해할 리 없다는 생각에 너자는 반항하지 않고 그들에게 상체와 하체를 맡긴 채 흔들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원의 구석진 곳에 있는 벤치였다.
패트와 메트가 너자를 벤치에 앉혔다. 바로 맥켄지의 방으로 데려가자니 하도 멀리 온 탓에 다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걸렸고, 수상한 상황에서 휑하니 뚫린 정원을 가로질러 가기에는 위험했다. 근 한 달간 예상하고 대비하던 상황일지도 모른다.
메트가 영문도 모른 채 벤치에 앉아 자신들을 바라보는 너자에게 말했다.
“…저는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패트.”
“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알지?”
“네.”
단호한 패트의 말에 메트가 픽 웃고는 너자에게 묵례를 한 뒤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사라진 메트의 뒷모습에 너자가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일 없습니다.”
다시금 단호하게 말하는 패트에 너자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었다. 이미 무뎌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전사의 감이 조금, 아주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자가 입을 꾹 다물고 벤치에 앉아 초조하게 앉아 있을 때,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삐이- 하고 너자의 귀에 이명이 들렸다. 무언가 위험했다. 위험을 감지한 너자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것은 패트도 마찬가지인지 어깨에 메었던 머스킷을 풀어 장전을 하려는데, 찢어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탕!
“……!”
너자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소리가 나왔다. 패트가 눈을 꿈뻑이며 아려 오다 못해 타는 것 같은 배를 바라보았다. 검은색의 제복에 물기가 가득했다.
시팔, 안 되는데. 패트가 너자를 보호하려 이를 악물고 너자의 앞에 서려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패트!”
너자가 벤치에서 쓰러지듯 떨어져 빠른 걸음으로 기며 패트에게 다가갔다. 패트가 밭은 숨을 쉬며 창백해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너자에게 말했다.
“도망… 도망가…!”
가래가 끓는지 패트가 말을 끝을 흐리다 피가래를 뱉어냈다. 너자의 숨이 거칠게 쉬어졌다.
아찔한 정신에 너자가 이를 악물고 눈을 꽉 감았다. 너자의 귓가에 근래에 잘 들리지 않았던 원망 소리가 들렸다.
-왜, 왜 너만 살아 있어?
-너 때문에 죽는 거야.
-너도 어서 죽어 버려!
이명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자가 눈을 꽉 감고 바들바들 떨 때 패트의 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도망….”
너자가 눈을 떴다. 그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패트의 제복 상의를 빠르게 벗기기 시작했다. 패트는 도망가라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자신의 제복 상의를 벗기는 너자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도망가라고 말할 때 너자가 외쳤다.
“치료해야 해!”
치료는 무슨… 뒤에 사람 온다고! 패트는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 속에 장거리에서 총을 쏘며 리볼버를 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검은색 무리들을 보다 너자에게 다시 도망치라고 외치려고 했다. 그때 자신의 배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헤집는 너자의 손에 이를 악물었다.
“이거… 이거 빼야 해… 안 그러면… 썩어서….”
너자는 이것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워린과 박 터지게 싸운 일 년간 너자는 이것에 박혀 허망하게 죽어 가던 동료들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이것이 몸에 박혀 있으면 상처는 아물지도 않았고 안에서 썩어 가 동료들을 죽여 나갔다.
뒤에서 점점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자는 미칠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빠르게 손가락을 헤집었다.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차가운 감촉의 물건에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그것을 빼냈다.
악! 패트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나왔다. 너자가 그런 패트에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차나. 내가 고쳐 줄게.”
너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패트의 환부에 셔츠를 인정사정없이 쑤셔 넣기 시작했다. 피를 멈추게 하는 것에는 이편이 나았다. 오늘 새로 입은 셔츠고 땀을 흘리지도 않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원래는 깨끗한 천으로 해야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이미 찢어진 살에 천을 욱여넣는 작업은 지혈을 해 주는 입장인 너자도 힘들었고 받는 패트도 힘들었다. 너자는 최대한 패트의 비명을 무시하고 꽤 크게 뚫린 구멍에 셔츠를 넣고 있는데, 너자의 귓전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색노… 꽤 야성적인데?”
“……!”
너자의 꽉 깨물린 턱이 달달 떨렸다. 하지만 패트의 상처에 셔츠를 욱여넣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였다.
“이 새끼 봐라?”
워린은 몸을 발발 떨면서도 민머리 기사의 배에 지혈을 멈추지 않는 너자를 보며 픽 웃었다.
그 강인했던 야만인은 색노로 전락했고, 그 용맹했던 이지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모습은 야만인과 벌였던 일 년 내내의 전쟁통에 보았던, 그 익숙했던 모습이었다. 야만인은 뒤지기 일보 직전인 동료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미련하게도 총알이 빗발치는 곳에 기어들어 와 시체를 끌고 도망갔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뒈질 놈에게 쏟는 정성이 부질없었다. 워린이 손을 들어 올려 민머리 기사를 죽이라고 신호를 보내려고 할 때, 너자가 민머리 기사를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워린이 말했다.
“야, 나와.”
“…….”
하지만 너자는 패트를 끌어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 봐라? 워린이 잘생긴 눈썹을 까닥였다. 워린이 손을 뻗어 너자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끌어 내려 했다. 하지만 너자는 패트의 몸에 찰싹 붙어 버티기를 시작했다.
평소의 워린이라면 발로 너자의 머리를 차 기절시키거나 부하들을 시켜 너자를 억눌렀겠지만 지금 워린의 기분은 아주 좋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렸다. 러트가 제 아비의 방에 숨어들어 그 심장에 총알을 먹여 주었다. 겨우 붙은 다비드의 숨을 제 아들이 끊어 버린 것이었다. 워린은 미친 듯이 웃는 러트의 모습에 미소를 짓다, 자신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내가 해냈노라고 외치는 러트의 대가리에 총알을 선물해 주었다.
두 놈을 해치웠다. 페리 차례였다. 페리는 이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듯 반항을 포기하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워린은 페리를 지하 감옥에 처넣으라 명령했다. 같은 시각 레너드와 부하들은 맥켄지가 있을 개발실로 몰려갔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 놈들도 거의 매수해 놨으니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이다. 워린은 당장에라도 맥켄지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도노반 리피팅 암즈를 굴리려면 아직은 맥켄지가 필요했다.
그는 자비롭게 맥켄지의 오른쪽 발목을 날려 버리라고 레너드에게 명령했다. 그와 함께 있을 캔디스 스와포네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승전미사 때부터 매수에 들어가 매수가 완료된 상태였다.
둘의 사이는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둘이 손을 잡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 워린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색노였다.
“일어나.”
“싫어.”
워린은 되바라지게 말대답을 하는 너자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자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그 새끼는 내버려 둘게.”
“…….”
“정말이야. 야, 리볼버 집어넣어.”
워린의 말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제9대대 기사들이 리볼버를 회수했다. 그 모습에 너자가 잔뜩 경계한 채로 고개를 돌려 워린을 응시했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워린의 모습에 너자의 속이 들끓었다.
맥켄지… 맥켄지는 괜찮겠지?
너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워린은 저 작은 머리통을 가진 너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한눈에 보였다. 워린이 타오르는 홍안을 굴려 지혈 때문에 상의를 탈의한 너자의 윗몸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하얬던 색노의 몸은 햇빛을 받지 못해 더욱 창백해졌고, 그의 울퉁불퉁한 몸에는 성애의 흔적이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더 열 받는 것은 한 달 사이에 푹 꺼졌던 색노의 얼굴에 포동포동 살이 오른 것이었다. 맥켄지와의 생활이 그리 좋았나?
안 되겠다. 양 발목을 날려 버리라고 해야겠어.
워린이 양손을 꽉 쥐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재밌는 거 보여 줄게.”
“싫어. 저리 가.”
너자는 워린의 말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잔뜩 날이 선 너자의 모습은 함부로 자신을 만지려 하는 인간에게 털을 잔뜩 곤두세운 채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 같았다. 그런 너자의 모습에 워린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안 보면 후회할 텐데?”
“싫….”
“네 친구들 보고 싶지 않아?”
“…뭐?”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경계하던 너자의 목소리가 잔뜩 떨리다 다시금 날을 세웠다.
“나는 친구 없는데? 누가 다 죽여 버려서.”
한이 맺힌 목소리였다. 그런 너자를 보다 워린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닌데. 작은 친구들, 기억 안 나?”
“…!”
워린의 말에 너자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런 너자를 보며 워린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따라와.”
너자가 워린의 목소리에 홀린 듯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워린이 그런 너자의 오른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어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