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워린 (1) (5/9)

5. 워린 (1)

워린은 벌꿀에 절여진 것 같은 색깔의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나른한 얼굴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흠….”

야만인은 자신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 보았던 야만인은 정말 악마의 하수인 같았다. 야만인의 눈과 머리는 마치 잉크를 쏟아 놓은 듯 새까맸으며 곰같이 커다란 몸은 마치 이베아 왕국 최고의 조각가 퓨리아가 만든 드뷔시 상 같았다. 마치 손으로 조각을 한듯 근육의 라인과 몸의 선은 이 세상 것 같지 않았다. 저것은 분명 직접 구르고 싸우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근육일 것이다. 그리고 보통 저렇게 몸집이 크면 행동이 둔해야 하는데 야만인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우아했다.

야만인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압감을 흘렸다. 거기에 항상 집채만 한 늑대를 타고 다니고 두문불출하며 기사들을 제거하는 모습은 마치 악의 화신 같았다.

전쟁이란 온종일 싸우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싸움이었다. 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아침에 서로 습격해 싸웠고 초저녁이 될 때쯤에는 서로 퇴각해 각자의 진영을 정리했고, 피해를 받은 것을 메꾸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서로 눈치싸움을 하며 먼저 선제 공격을 날리거나 공격을 막았다. 그 짓을 무려 일 년간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 속에 워린은 야만인들의 수장인 저 까만 야만인이 무서웠고 또 누구보다 죽이고 싶었다.

그는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까만 야만인이 생각났다. 그의 머리통에는 항상 까만 야만인밖에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외쳐대는 까만 야만인이, 저같이 성질머리 더러워 보이는 늑대를 타며 달려오는 까만 야만인이, 폭탄에 휘말렸는지 온몸이 거멓게 칠갑된 채 비틀거리던 까만 야만인이, 자신의 동료들을, 이베아 왕국의 기사들을 찢어 죽이는 야만인이, 치료를 해도 곧 뒈질 것 같은 동료를 차마 버릴 수 없어 탄창이 쏟아지는 곳에 아득바득 기어들어 와 야만인 동료를 데리고 도망가는 까만 야만인이 떠올랐다.

워린은 그게 너무 싫었다. 머릿속에 온통 놈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그는 그게 증오라고 생각했고 까만 야만인을 죽여야 자신의 머릿속에서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새끼는 내가 죽인다. 워린은 밤마다 전쟁용으로 보급된 머스킷과 리볼버에 기름칠하며 야만인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생각만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까만 야만인을 이겼다. 까만 야만인은 어리석게도 아직 어려 보이는 야만인을 지키다가 총에 맞았다. 배에 한 발, 어깨에 스치듯 한 발을 맞은 까만 야만인은 발악하듯 바닥에 쓰러진 몸뚱이를 일으키려 아등바등했다.

워린은 이 징글징글한 싸움을 끝낼 것을 생각하며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그리고 까만 야만인이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어린 야만인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마지막 남은 동료의 머리통이 터진 것을 본 까만 야만인의 몸부림이 멈췄다.

망연자실하게 머리가 터진 어린놈을 보며 까만 야만인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흙먼지가 여기저기 묻고 피에 엉겨 붙은 기다란 머리카락이 승리를 축하하듯 불어오는 미풍에 휘날렸다.

멍청하니 동료를 바라보는 까만 야만인의 머리통에 리볼버를 겨누며 다가갔다. 동료 기사들은 워린이 까만 야만인을 죽이는 날만을 기대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마지막 한 발을 상관에게 양보했다.

항상 멀리서 보았던 까만 야만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곰 같은 덩치 탓에 산적처럼 우락부락한 얼굴일 줄 알았다. 워린의 상상 속 까만 야만인은 얼굴은 네모나고 부리부리한 도깨비 같은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젊었다. 자신의 또래 같았다.

까만 야만인의 머리통은 작았고 작은 얼굴에 꽉꽉 채워져 있는 이목구비는 꽤 준수했다. 높은 코와 눈썹은 잘생겼는데, 내리깐 눈매가 애처로워 보였다. 머리가 터진 어린 야만인을 바라보다 코앞에 온 자신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까만 야만인의 얼굴이 어딘가 섬세했다.

까만 야만인은 살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죽어 버린 어린 야만인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에서 울컥 나오는 피에 잠시 몸을 비틀다 바닥에 쓰러졌다.

까만 야만인의 자그마한 입에서 피가 역류했다. 그렇지. 총을 두 방이나 맞았는데 죽지 않을 리 없었다. 워린의 입에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자신이 승리했노라, 우리가 이겼노라 고했다.

사방에서 함성이 들렸다. 자신은 이제 부자가 될 것이고 지금껏 품어 왔던 야망을 실현할 것이다. 방계의 영식이라고, 고작 남작 가문의 쓸모없는 영식이라고 손가락질받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을 이룰 차례였다. 상황은 만들어졌고 자신과 함께 대업을 이룰 인력도 있었다.

제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꽃길뿐이었다. 워린이 확인 사살로 까만 야만인의 코앞에 다가가 리볼버를 겨누었다. 그리고 자신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까만 야만인의 면상을 날려 버리려 방아쇠를 누르려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참을 까만 야만인과 눈을 마주치고 서 있었다. 부단장인 레너드가 다가와 뭐하시냐며 어서 머리통을 날려 버리라고 닦달했다. 집에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워린의 손가락은 차마 움직이지 않았다. 워린의 입에서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이건 내 전리품으로 가져갈래.

-…미치셨습니까?

-아니, 완전 멀쩡한데?

-저런 거 가져가 봤자 뭐 하시려구요!

워린은 소리를 꽥 지르는 자신의 부관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글쎄, 서커스라도 열어서 마지막 남은 야만인이라고 투어를 돌까?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거야.

-단장님!

-…그리고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없어.

레너드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야만인의 몸이 다 나아 단장의 모가지를 따 버리면 어떡하느냐며, 사람들이 집 안에서 이상한 걸 키운다고 손가락질을 할 거라며 당장 죽이라고 발작했다. 하지만 워린은 레너드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감히 전쟁 영웅에게 누가 뭐라고 할까!

일 년 동안 징글징글하게 자신을 괴롭힌 몹쓸 놈이었다. 이제 자신이 이놈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며 괴롭힐 것이다. 너무 괴로워서, 너무 힘들어서 더는 살고 싶지 않게 만들 것이다.

워린은 유쾌함에 씩 웃으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까만 야만인의 구멍 뚫린 배를 공을 차듯 빵 찼다. 그리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 에르베성에 가져다 두었는데, 그놈이 감히 자신의 전리품을, 자신의 노예를 홀랑 가져가 버렸다.

워린이 발끝으로 바닥에 엎어진 야만인의 머리를 밀었다. 야만인은 힘없이 워린의 발길질에 옆으로 굴렀다. 바닥에 처박혀 있던 야만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야만인의 머리카락이 평민 남성처럼 잘려 있었다. 그 머리채를 잡고 뺨을 치고 싶었는데. 워린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허접해졌네.”

까만색의 헐렁한 옷 때문에 야만인의 몸 라인이 드러났다. 그토록 위협적이던 근육이 거의 다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꽤 두툼했지만 워린은 아쉬웠다. 그 터질 것 같은 근육에 담배를 지져 보고 싶었다.

맥켄지 그놈은 어렸을 때와 바뀐 것이 없었다. 제 잘난 맛에 살고 남에 대한 배려가 개미 오줌만도 없다. 이익을 위한다는 교차점만 없었어도 바로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빌려준 셈을 쳐도 이건 너무했다.

워린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남의 것을 빼앗아 가고 이렇게 별 볼 일 없이 만들어놨다. 그러다 워린의 눈에 야만인의 얇실한 발목이 들어왔다. 워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야만인의 발목 쪽으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까만 바짓단 밑에 보이는 발목은 특이하게도 몸에 비해 무척 얇았다. 하얗고 얇은 발목에, 뱀이 휘감긴 듯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건, 손자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워린이 다시 야만인의 머리맡에 가 양아치처럼 쭈그려 앉았다.

야만인의 목덜미에 씹힌 자국이 여럿 있었다. 워린의 손이 뻗어져 야만인의 까만색 상의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렸다.

“…개새끼가….”

하얗고 두툼한 몸은 마치 병에 걸린 듯 울긋불긋했고, 야만인의 젖꼭지는 상처에 딱쟁이가 져 있었으며, 마치 수유 중인 여인의 젖가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의 다홍색 눈이 불이 붙은 듯 불타올랐다.

그때였다.

“단장님! 그렇게 가 버리시면 어떻… 헉….”

레너드가 쓰러져 있는 누군가의 앞에 쭈그려 앉은 상관의 모습에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재빨리 뒤에서 따라오는 9대대 기사들에게 말했다.

“…단장님 사고 치셨다. 사람들 잘 따돌린 거 맞지?”

“네! 아직 주위에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 바리케이드 치고 아무도 못 오게 해.”

“네, 알겠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원들의 모습에 레너드가 한숨을 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쌌다. 저 망아지 같은 미친놈이 또 사고를 쳤다. 민간인을 죽이다니! 지금 전쟁 영웅으로 귀환했는데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전쟁 영웅은 순식간에 악마에 들렸다며 대역죄인이 될 것이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앞날에, 아니 이제 막 빛을 보려는 9대대의 앞날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 저 시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다 다짐하며 워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거 성질머리 좀 죽이시라니까… 제가 처리하겠….”

“…….”

“…….”

레너드는 민간인의 웃통을 거의 헐벗긴 상관의 모습에 속으로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민간인 강간….”

“…….”

“가…강간하려다 죽였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레너드에 워린이 입을 열었다.

“자꾸 잡소리 할래?”

그럼 왜 웃통은 벗겼느냐며 매도를 하려다 레너드의 머리가 불쌍하게 땅바닥에 구르고 있는 민간인의 모습을 인식했다. 어디에서 많이 본 몸집과… 까맣고 짧은 머리칼은…….

“이게 왜 여기에 있어요?”

맥켄지 도노반이 가져간 것 아니었어요? 그새 질려서 버렸나? 어느새 흥미로운 표정으로 기절해 있는 야만인을 한 번에 훑으며 레너드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몸뚱이가 왜 이래? 성노로 쓰였나?”

워린은 다홍색 눈을 또륵 굴려 야만인의 가슴을 뚫어져라 보는 레너드의 눈에 라이트훅을 날렸다. 악! 하며 눈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는 레너드를 무시한 채 그가 가슴 위까지 올렸던 옷자락을 내렸다.

“…….”

그리고 자신의 제복 위 끝에 걸려 있는 붉은 망토를 떼어내 야만인의 몸통을 가리고 한 손에 야만인을 어깨에 둘러멨다.

레너드는 시큰거리는 눈을 꾹꾹 누르며 상관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야리야리해 보이는 몸과 그리 크지 않은 키의 상관은 힘이 무척 셌다. 제 몸의 두 배인 야만인을 마치 밀가루 포대를 옮기는 것같이 둘러멘 그의 괴력에 혀를 내두른 레너드가 물었다.

“그거, 가지고 갈 건가요? 사람 손이 그렇게 탔는데?”

레너드의 말에 어깨에 야만인을 둘러멘 워린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

말도 타던 말이 아니면 타지 않았고 숟가락도 자신이 쓰던 게 아니면 절대 먹지도 않는 까탈스러운 놈이, 뭐?

레너드가 멍청히 되묻자 워린이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레너드에게 말했다.

“이건 내 거야. 내 것이니 가져가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물론, 함부로 몸을 굴린 건 혼나야지.”

자살하고 싶어질 만큼.

레너드는 소름 돋는 말을 해대는 자신의 상관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친놈이 미친 짓을 하는 게 한두 번인가. 자신은 그저 상관을 따르면 되었다. 레너드는 앞장서 마차로 가는 워린의 뒤를 공손히 뒤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단장님, 그거… 교회에 가져갈 겁니까?”

“응.”

“…교회엔 맥켄지 도노반과… 그 일가들이 있을 텐데요. 만약 맥켄지 도노반이 야만인을 내친 게 아니라 야만인이 도망친 것이었다면요?”

레너드의 말에 워린이 무심히 대꾸했다.

“내가 내 걸 가져가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단장님 ‘그 일’을 하기 전엔 그 집안 사람들과 분쟁을 만들지 않는 게 좋죠. 그래서 온갖 귀한 것들은 그 일가에게 바친 것 아닙니까?”

“…….”

“…아무리 애송이라고 해도 그는 ‘서쪽의 미친개’ 아닙니까. 러트 도노반 같은 머저리가 아닙니다. 거기에 최근 나오는 신제품들의 구상과 설계는 그놈이 다 하니까요.”

“…그렇긴 하지.”

“‘그 일’을 하기 전 놈의 적의를 살 행동은 하지 마십시다.”

레너드는 몸을 쓰는 것보다는 전략을 잘 짜는 책사였다. 레너드가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그쪽 일가를 쓱싹하더라도 도노반 리피팅 암즈를 굴리려면 얼마간은 맥켄지 도노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놈을 살려 두는 게 아닙니까. 분하지만 놈보다 뛰어난 설계사는 없습니다. 놈을 묶어 놓을 밧줄이 필요합니다만….”

워린과 레너드는 마차에 탔다. 레너드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워린이 밀가루 포대처럼 어깨에 진 야만인을 대충 구석에 던져놨다. 야만인은 넓은 마차의 좌석 덕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를 꽁꽁 동여맸던 워린의 망토가 스륵 흘러내렸다.

“제가 알기로 놈은 지금껏 누군가와 교제를 한다거나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사교계에서 꽤 유명했거든요. 아무리 유혹해도 도무지 넘어오지 않는 철옹성으로. 그런데… 맥켄지 도노반은 야만인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요.”

“참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워린에 레너드는 손가락을 들어 야만인의 목덜미 쪽을 가리켰다. 야만인의 고개가 푹 숙어진 탓에 헐렁한 옷깃 안으로 보이는 하얀 피부에는 마치 발진이 돋은 것처럼 불그스름한 자국이 빼곡히 찍혀 있었다. 얼마나 이로 씹고 빨아댔으면 저리 선명하게 새겨진 것일까. 레너드가 야만인의 울혈을 보며 말했다.

“딱 봐도 각 나오지 않습니까. 단장님도 해 보셨을 것 아닙니까. 저거 집착 수준으로 물고 빨아야 생기는 거.”

레너드의 말에 워린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다 저렇게 되지 않아?”

“…오, 제가 단장의 성적 취향까지 알게 되었네요.”

얼마나 상대를 물고 빨면… 징그러워 죽겠네. 거기다가 워린은 그 행위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레너드는 싫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몸서리를 쳤다. 워린이 말했다.

“…다 안 저래?”

“안 저래요. 나는 저렇게 귀찮아서 안 해요.”

“…그래?”

“넵.”

마치 간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에 레너드가 곧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튼, 맥켄지 도노반은 저 야만인의 몸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자국을 보면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버릴 확률은 낮죠. 그러니 저 야만인은 제 발로 도망쳤다고 생각됩니다.”

흠, 하고 턱을 만지작거리는 워린을 보며 레너드가 씩 웃으며 말했다.

“…잘하면, 맥켄지 도노반의 목줄을 살짝 잡을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퍼레이드를 마친 워린의 마차는 제국 중앙 교회의 안뜰에 정차해 잠시간의 점검을 받았다. 본래는 전쟁 영웅의 퍼레이드인 만큼 중앙 교회에서 특별히 준비한 백마와 하얀색의 커다란 마차가 제공되려 했으나 마차 겉면이 금박으로 세공되어 온갖 귀한 꽃으로 두른 휘황찬란한 마차를 본 워린이 저 천박한 것을 타고 돌아야 한다면 아예 퍼레이드를 돌지 않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그에 퍼레이드용 마차를 준비한 사제는 부제로 폄강되었고 중앙 교회 관리자와 워린은 전쟁 내내 썼던 전용 군마와 전용 마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도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제국민은 왕국에서 제국으로 승격시켜 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도노반 후작 가문과 그에 귀속된 워린 도노반을 추앙했다. 제국민들은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총기를 경외했고 그 비싼 총기를 적은 이윤으로 보급해 준 후작 가문의 호탕함에 대리 만족을 얻었다. 또 전쟁 영웅인 워린은 새로운 작위가 아닌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기를 원해, 직계에 귀속되기를 바란다는 그의 검소함과 충성스러움에 더욱 열광했다.

워린은 검은 군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제국의 수도 록시 안을 구석구석 누볐다.

그가 기사단에 입단하기 전 사교계에서 했던 것이라고는 가문과 가문 간의 교류가 아니라 그의 잘생긴 얼굴과 좋은 체격을 선망한 영애나 마담들의 종마 노릇이었다. 그 짓에 질려 입단한 기사단은 종마보다는 취급이 괜찮았으나 그가 속한 제9대대는 기사 승급 시험에서 성적이 좋지 않은 떨거지들이 가거나 행실이 기사답지 않고 후진 가문의 자제들이 유배차 가는 기사단이었다. 한마디로 천덕꾸러기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품위 유지비라든가 봉급, 그리고 왕국 재정에서 기사단에게 보급되는 보급품 또한 제일 싸고 질이 안 좋은 것들이었다.

사방에서 꽃이 던져졌고 그를 추앙하는 제국민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고작해야 다 쓰러져 가는 남작 가문의 영식에 불과했던 워린은 이러한 관심과 숭배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추앙하는 분위기에 취해 고양되었다.

제국민은 새까만 군마를 타고 호쾌하게 웃는, 아름다우면서도 잘생긴 워린을 보며 홀린 듯 소리 질렀다. 그날 도성의 화가들은 워린의 초상화를 그려댔고 그의 초상화는 지금껏 팔린 캔디스의 초상화 누계를 단 하루 만에 뛰어넘었다.

워린은 사방에서 던져대는 꽃들을 맞으며 고개를 들어 나른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겠어.”

그는 이 짜릿한 권력의 맛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그의 퍼레이드는 초저녁에 시작되어 늦은 밤이 돼서야 끝이 났다. 그가 지나간 길은 영웅이 지나간 길이라며 사람들이 입을 맞췄고, 그에 따른 낙수효과로 록시의 상권은 이베아 건국 이래로 최대 매출을 찍었다. 야심한 새벽이 되어서도 축제는 끝이 나지 않았다.

퍼레이드를 끝낸 워린과 9대대 기사단 단원들이 중앙 교회에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자 중앙 교회의 인력인 만큼 최고의 점검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워린의 마차와 군마의 외양과 편자를 손보았다. 부서지고 색이 바랜 투박한 마차에 최고급 나무판자를 덧대고 나무 수액을 칠했고,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갈기가 엉킨 워린의 군마의 털을 정성스럽게 빗질하고 먼지를 털어냈다.

워린이 땀에 전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뒤로 쓸어올리며 천천히 중앙 교회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가 찾는 것은 끝내 없었다. 워린은 입맛을 다시며 나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쉽네. 그 귀하신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레너드의 말대로 놈은 야만인을 아꼈을까? 아무리 깨트리려고 해도 절대 깨지지 않는 그 고고한 얼굴이 노예가 없어져 조바심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을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을까.

워린이 아는 맥켄지는 그런 인간적인 놈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고고한 맥켄지가 야만인을 취했다니, 놈은 저보다 품계가 낮으면 천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니, 놈은 자신 외의 인간은 모두 쓰레기로 보는 경향이 있는 재수 없는 새끼였다. 워린의 분노는 궁금증으로 변했다. 정말이지 궁금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방계의 영식은 직계의 영식에게 묘한 열패감을 가지고 있었다. 워린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맥켄지의 모습에 발을 구르고 있자 대원들 케어를 모두 한 레너드가 그의 옆에 와서 슬며시 말했다.

“내일이면 볼 텐데요.”

“아니, 난 지금 보고 싶어.”

“누가 보면 애틋한 사이인 줄 알겠습니다.”

“특별한 사이긴 하지. 놈과 나는 신의로 묶여 있는 사이라고.”

“허이고, 그렇게 신의가 있어서 남의 것을 홀랑 가져가 버립니까? 거기다 단장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놈이?”

그때 승전 파티 때 놈이 단장님 보던 표정 벌써 잊으셨습니까? 벌레 보듯 보던데. 레너드의 핀잔에 워린이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됐다. 네가 뭘 알겠니.”

아까는 그렇게 맥켄지에게 분노했으면서 지금은 또 아무렇지도 않게 군다.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까지 속을 숨기는 건지 모르겠는 워린에 레너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게 행동하는 제 상관을 이상한 눈으로 보다 곧 생각을 껐다. 미친놈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정력 낭비였다. 워린이 이상한 것은 오늘 하루 일이 아니었다.

레너드가 자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던 워린이 레너드의 귓가로 고개를 숙이며 작게 물었다.

“야만인은?”

은밀한 그의 물음에 레너드가 워린을 보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단장님의 침실에 잘 묶어 뒀습니다.”

“가만히 있대?”

“아주 잘…. 묶어 놨다고 합니다.”

레너드의 말에 워린이 정말 즐겁다는 듯 씩 웃었다. 몸을 함부로 굴린 노예에게 정의를 보여 줄 시간이 왔다. 깃털처럼 가벼운 야만인의 눈물을 쏙 빼놓을 것을 상상한 워린의 붉은 입술에서 뜨거운 숨이 내쉬어졌다.

“워린 도노반 님!”

“워린 님!”

워린이 퍼레이드를 마치고 중앙 교회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국 내 귀족들이 체통도 잊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국과 타국의 귀하신 분들이었고, 내일 있을 승전 축하 미사에 초청된 특별 내빈들이었다.

그들은 제국 권력의 축이 될 워린 도노반과의 연을 잡기 위해 부나방처럼 몰려들었다. 평소의 워린이라면 그들을 웃는 낯으로 한 명 한 명 응대했겠지만, 그의 정신은 콩밭에 가 있었다. 레너드는 귀하신 분들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응접실로 향하는 워린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9대대 대원들에게 말했다.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고 잘 막아라. 절대 우리를 쫓아오게 만들지 마.”

간단하고 명료한 레너드의 명령에 충실한 대원들이 거수경례를 한 후 마치 메뚜기떼가 몰려오는 것처럼 우르르 몰려오는 귀족들을 막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쪽수가 조금 더 많았지만 그들은 하는 것 없이 먹고 놀며 신선놀음을 하는 귀하신 분들이었고 대원들은 지금껏 야만인들과 전쟁을 치르다 온 노련하고 커다란 기사들이었다. 워린을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귀족들과 안 된다며 그들을 몸집으로 막아대는 대원들의 모습을 레너드가 질린다는 얼굴로 보다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워린의 뒤를 급하게 쫓았다.

워린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어느새 뒤에 따라붙은 레너드에게 물었다.

“내 방은 어디야?”

“기도실이 붙어 있는 제일 끝 방입니다. 원래는 중앙에 있는 제일 큰 방을 배정해 주었는데 그렇게 되면 야만인을 숨기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제일 끝 방으로 바꿨습니다.”

“잘했다.”

기다란 다리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의 침실에 다다랐다. 레너드가 침실의 문을 묘한 박자로 두드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침실의 문이 열리며 앳된 얼굴의 기사가 밖으로 나와 그들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에 워린이 대충 고개를 까닥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안에 입성한 워린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야만인은 아까 잡아 온 그대로의 차림으로 양손과 양발이 밧줄로 묶여 있었고 머리에는 배게 시트가 뒤집어쓰여 있었다.

기절해 있던 야만인이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몸을 비틀며 끙끙거렸다. 아마 해리가 야만인의 입에 재갈을 물려 놓은 모양이었다.

워린이 천천히 너자에게 다가갔다. 사지를 결박한 무언가에 몸을 비틀어대며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던 너자가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인기척에 몸부림을 멈췄다. 한눈에 보기에도 야만인의 너른 어깨가 긴장감에 뻣뻣하게 굳는 게 보였다.

이윽고 워린이 너자가 눕혀져 있는 침대에 다다랐다. 너자는 침대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모습에 워린이 픽 웃었다. 꼭 모양새가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는 음식의 꼴이었다. 워린의 손이 쭉 뻗어져 너자의 양 발목을 꽁꽁 동여매고 있는 천 쪼가리를 함부로 잡았다.

“…!”

안 그래도 부러져서 겨우 붙은 오른 발목의 뼈가 무언가에 아프도록 묶여 있어서 피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거칠게 잡은 탓에 겨우 익숙해졌던 고통이 다시금 치고 올라왔다.

뼈가 시큰거리며 당장에라도 발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질러 아픔을 승화시키고 싶었지만, 입에 물린 재갈에 제대로 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너자의 입에서 잔뜩 억눌린 신음이 나왔다. 그런 너자의 앓는 소리에 워린이 말했다.

“이거 봐라?”

“…!”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너자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꿈인가 싶었다. ‘그’를 본 게.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귀에 생생히 들려오는 악귀 같은 목소리에 너자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그런 야만인의 모양새에 워린이 말했다.

“야, 왜 연약한 척을 해?”

“…….”

“미친 새끼, 징그럽게.”

거친 말과는 대비되게 워린의 목소리가 달콤했다. 그는 이 상황이 재밌어 죽을 것 같았다. 야만인은 호전적이고 강했다. 뒈져 가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폭격처럼 쏟아지는 탄피의 비에도 용맹하게 달려와 구해내던 놈이었고 바로 코앞에 다가온 죽음도 의연하게 받아들인 게 바로 이 야만인이었다. 겨우 6개월이다. 야만인이 제집에서 떠난 게. 그런데 이렇게 비굴해져 있다.

이렇게 만든 게 자신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어디, 맥켄지 도노반의 솜씨 좀 봐 볼까?”

그의 입가가 즐거움에 파르르 떨렸다. 워린이 오른손을 뻗어 야만인의 머리에 뒤집어쓰인 배게 시트를 거칠게 벗겨냈다.

“……!”

시트를 벗겨내자 두려움에 젖은 눈을 한, 흑발을 가진 우울한 인상의 미남자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워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만인의 피부는 6개월간 햇볕을 잘 보지 못했는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하얀 재갈이 물린 입 바로 밑에 길게 뻗어진 굵은 목에는 벌레에 물린 듯 붉은 울혈이 수두룩했다.

골목길에서 야만인을 보았을 때는 그저 대가도 받지 못하고 강탈당한 전리품에 하자까지 나 있던 것에 정신이 팔린 터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

늑대를 타고 수많은 기사들을 죽였던 전사 야만인은 온데간데없고 성노로 전락해 버린 야만인이 덜덜 떨며 자신을 음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워린이 알고 있던 그 당당했던 야만인은 더 이상 없었다. 그 간극에 워린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너자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는, 타오르는 것 같은 홍안紅顔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니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자신은 당당했고 무서운 것이 없었었다. 옆에는 동료들이 있었고 그에게는 지킬 것이 있었다.

한때는 호적수로 싸웠었던 전사였다. 반년 만에 만난 그는 그대로였다. 벌꿀을 녹여 놓은 것 같은 머리카락은 여전히 찬란했으며, 그를 감싼 자신감과 오만한 말투도 여전했다. 불타는 것 같은 저 눈은 그대로인데, 자신만 이렇게 변했다.

저 전사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다. 저 전사로 인해 자신의 친구들, 자신의 이웃들, 자신의 늑대들이 모조리 죽었다. 의식적으로 억눌렀던 증오와 분노가 그의 마음 심연 속에서 조금씩 치솟으며 올라왔다.

저 남자가 온 후로 부족에 역병이 돌았다. 저 남자가 온 후로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었다. 저 남자만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두려움에 우울하게 침전돼 있던 너자의 표정에 점점 독이 올랐다. 워린은 우울하게 일그러져 있던 야만인의 얼굴이 점점 표독스럽게 변하는 것을 보고 이것 봐라, 하며 픽 웃었다.

다행이었다. 아직 맥켄지 도노반이 야만인을 완전히 망가뜨린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야만인을 망가뜨릴 기회가 있었다.

잔뜩 독이 오른 저 얼굴을 두려움과 절망으로 물들이면 얼마나 황홀할까. 워린은 아까 보았던 야만인의 유약한 표정이, 절망에 침식된 얼굴이 보고 싶었다. 워린이 말했다.

“어디 노예 새끼가 감히 주인의 얼굴을 함부로 보지?”

그의 말에 너자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어 갔다. 재갈이 물린 야만인의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억울해 보이는 야만인의 표정에 워린이 씩 웃으며 손을 뻗어 입가에 물려 놓은 재갈을 턱 아래로 거칠게 내렸다. 그리고 어디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듯 나른하게 웃으며 코를 찡긋였다.

너자는 재갈이 풀려 자유가 된 입술을 움직여 내가 왜 너의 노예냐며 한마디를 하려 했으나 오랜 시간 입이 벌려진 채 재갈에 물려 있던 탓에 그의 입안에는 침이 한가득 고여 있었고, 그것을 막고 있던 재갈이 풀려 버리니 안에 있던 침이 왈칵 새어 나왔다.

“…흐아….”

마치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입에 고인 침을 그대로 흘리는 것 같은 모양새에 워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네. 워린은 야만인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가지가지 한다, 병신아. 치매 걸린 노인네도 너보다는 나을 거다. 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거 아니야?”

마치 뒷골목 시정잡배가 하는 말처럼 워린의 입에서 천박한 말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너자는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너자의 언어 교육을 담당한 샬로메와 그레머는 간혹 욕지거리는 내뱉어도 저딴 천박한 말 따위는 쓰지 않는 고아한 후작 가문의 사용인이었다.

너자는 그의 말투와 자신을 길거리의 문둥이를 바라보듯 하는 워린의 눈빛에 그가 결코 좋은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장에라도 그에게 무엇인가 못된 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너자가 구사할 줄 아는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캔디스에게 수없이 들었던 성적인 욕은 그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고, 자신을 보며 항상 화를 냈던 맥켄지도 항상 고아한 말로 자신을 탓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국어로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놈이 알아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너자의 생각에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침을 꼴깍이며 반항적인 눈으로 워린을 쳐다본 너자가 그레머에게 배웠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또박또박 그에게 말했다.

“너 나빠. 왜 말을 그렇게 해?”

“…뭐?”

야만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대단한 말로 증오를 퍼부을까 기대한 워린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좋아했으나 그가 제일 재밌어하고 잘하는 것은 입으로 상대의 인격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상대를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의 칼 같은 혀는 매운 주먹보다 더욱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워린은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야만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문단과 단어를 백서른두 가지나 생각하고 있었고, 야만인이 어떤 말로 자신을 욕해도 바로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노려보며 한참을 생각하다 내뱉은 야만인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하고 워린이 야만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야만인의 표정은 진지했고, 정말 화가 난 것처럼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양손이 결박되고 탐스러운 짧은 흑발이 아무렇게나 뻗친 채 침대에 힘없이 누워 표정만 표독스러운 야만인의 모습과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야만인의 말이 퍽 웃기면서…….

“…미친….”

워린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단어를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의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빈정대던 워린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자 너자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네 것이 아니야.”

너자는 어떻게든 워린에게 자신은 하나의 인격체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자가 건드린 것은 워린의 지뢰였다. 너자의 말에 힘차게 뛰어대던 워린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갔다.

야만인의 깜찍한 말에, 앙큼하게 변해 가는 야만인의 표정에 잠시 정신을 빼앗겨 머저리처럼 있던 워린의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방어 본능이 다시 발동한 탓이었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한 낯을 만들어 냈다. 그의 표정은 누군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너자는 턱을 치켜들고 나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의 모습에 겹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흠칫 떨었다.

워린은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을, 맥켄지 도노반을 겹쳐 보는 게 분명한 야만인의 모습에 속이 뒤집어졌다. 워린은 자신의 외관이 맥켄지 도노반과 닮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먼 친척 관계였지만 그들의 외양은 신기하게도 많이 닮아 있었다.

한때 워린은 맥켄지를 닮은 자신의 외양을 좋아했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도노반’의 성을 가지고 장남보다 뛰어난 차남을 닮았다는 게 퍽 자랑스러웠었다.

코흘리개 때 비밀 사교클럽에서 서로의 얼굴을 알지 못한 채 서로의 욕망을 이야기했었던 적이 있었다. 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었다. 항상 먼발치에서 보았던 놈이 그렇게 위대해 보였는데 놈의 안에 있는 열등감이 제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비슷하다는 것을 안 순간 웃기게도 동질감이 들었다. 동시에 놈이 안타깝기도 했다. 언젠가 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상을 호령할 것을 기대했다.

비렁뱅이가 왕자님을 걱정하는 꼴이었지.

그래 봤자 놈은 후작 가문의 가업을 승계받는 고아하신 도련님이고 자신은 쥐 오줌만 하고 빈곤한 남작 가문의 하찮은 영식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멍청했던 그 시절, 자신은 정말 놈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했었다.

하지만 놈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고 몇 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는 자신을 거리를 활보하는 문둥이를 보는 듯 바라보았다. 시팔, 생각해 보니 열 받네. 워린의 표정이 점점 썩어 갔다.

워린의 열등감은 그것 외로도 많았다. 생에 처음 사교계에 데뷔를 해 좀 더 나은 삶을 꿈꿨다. 하지만 그가 사교계에서 한 것이라고는 귀부인들의 종마 노릇이었다. 사교계의 영식들은 그의 아름답고 잘생긴 얼굴을 질투했고, 고작해야 남작 가문의 영식을 무리에 끼워 주지도 않았다. 거기에 사교계의 영애들과 마나님들은 도노반 후작 가문의 숨은 실세 맥켄지 도노반을 원했다. 하지만 맥켄지 도노반은 그런 그들에게 한 톨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그들은 맥켄지 도노반과 비슷하게 생긴 워린에게 눈을 돌렸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은 워린을 무력하게 했고, 도피처로 선택한 게 기사단이었다. 뭐, 꽤 고생했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다행이었다.

워린의 속에 내재되어 있던 열등감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야만인에 의해 더욱 크기를 키워 갔다.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넣은 것 같은 야만인의 유리알같이 까만 눈에는 수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애정일까? 애증일까. 무서워하나?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애절하다.

레너드의 말은 개똥만치도 맞는 게 없었다. 맥켄지가 노예에게 집착을 하는 게 아니다. 야만인이 맥켄지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야만인과 일 년 동안 좆 빠지게 싸워서 이긴 것은 자신이고 야만인을 포로로 잡아 온 것도 자신이었다. 아끼고 아껴서 괴롭히려고 했는데, 놈이 자신의 것을 말도 안 하고 홀랑 가져가 침을 발라놓았다.

워린은 자신을 볼 때와 확연히 다른 야만인의 표정에 뜻을 모를 분노가 타올랐고 그 분노는 그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다. 워린은 마치 벼락에 맞은 듯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에,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같이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의 모습에 잔뜩 약이 올랐다.

워린은 자신의 속이 뒤집어진 만큼 야만인의 속도 뒤집어지기를 바랐다. 워린은 기억 속에 있는 맥켄지의 표정을 따라 하며 야만인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너자는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파고들어 하체를 딱 붙이며 상체를 숙여 양팔로 자신을 가둔 워린의 행동에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저를 표독스럽게 바라본 게 바로 전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짓을 처음 해 보는 처녀처럼 몸을 잔뜩 굳히며 겁을 집어먹는다. 닳고 닳은 주제에 순진한 척이라니, 우습지도 않다.

워린이 픽 웃으며 왼쪽 팔꿈치는 침대에 지지하고 오른쪽 손을 들어 손등으로 너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놈이라면 어떻게 할까, 싶어 시험 삼아 하얗게 질린 뺨을 만져 봤는데, 손등에 닿는 야만인의 피부가 무척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사내새끼답지 않게 요철 하나 없는 매끄러운 피부에 워린이 홀린 듯 이번에는 손끝으로 너자의 뺨을 꾹꾹 눌렀다. 그에 너자의 잘생긴 눈썹이 일그러지며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여전히 앙큼하게 순진한 척이었다. 이런 건 맥켄지의 취향이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워린이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눈을 피하는 야만인의 턱을 한 손에 쥐어 자신을 바라보도록 세게 돌렸다.

야만인의 하관이 워린의 커다란 손에 모두 막혀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밤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은 눈알에 자신의 상이 보이자 분노에 차갑게 식어 갔던 심장이 점점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너자는 맥켄지를 닮은 전사가 맥켄지처럼 굴어 미칠 것 같았다. 너자는 이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은근히 만져대며 잡아먹을 것처럼 구는 전사의 모습에는 캔디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맥켄지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아까 잠시 치솟았던 분노? 그것은 전사의 얼굴에 맥켄지의 얼굴이 투영되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학습된 공포가 너자를 집어삼켰다. 당장에라도 저 맥켄지를 닮은 전사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함부로 굴 것 같았다. 너자의 눈에 절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워린은 손바닥에 느껴지는 야만인의 매끄럽고 두툼한 입술의 감촉에, 아까 미처 닦지 못한 침의 감촉에, 숨을 내쉬느라 뜨거운 숨결의 느낌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앙큼한 새끼. 워린이 끼를 있는 대로 떨어대는 야만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 손이 닿는 게 싫어?”

-내 손이 닿는 게 싫어?

“맥켄지가 만져 줬으면 좋겠어서 그래?”

-스와포네가 만져 줬으면 좋겠어?

“……!”

너자는 기억에 있던 말을 기가 막히게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워린의 빈정거림에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떻게 말하는 것 까지 저리 똑같지? 밧줄에 꽁꽁 묶여 가슴에 고이 놓인 너자의 양손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잔뜩 독이 올라 있던 야만인의 눈이 두려움에 침전되어 갔다. 되바라진 말을 하며 호전적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던 야만인은 금세 우울한 인상의 미남자가 되어 있었다.

워린은 그 모습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던 망아지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제 주제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너무도 짜릿했다.

좀 더, 좀 더 싫어했으면 좋겠다. 좀 더 아파했으면 좋겠다. 좀 더 무서워했으면 좋겠다. 워린의 홍안이 폭력적인 욕망에 잠식되었다.

워린은 끙끙거리며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너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응? 내가 만져서 이렇게 싫어하는 거야? 맥켄지가 만져 줬으면 좋아서 질질 싸려나?”

모욕적인 워린의 언사에 너자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워린은 굴욕감에 벌벌 떠는 너자의 모습에 점점 더 흥분하기 싫어했다.

더, 더 싫어해 봐.

워린이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더욱 깊게 너자의 가랑이 사이에 파고들었다. 워린의 하반신이 너자의 엉덩이 부근에 완전히 닿았다. 싫어! 너자가 자신의 엉덩이를 꾹꾹 누르는 뜨거운 것에 질겁을 했다. 워린은 자신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야만인의 뜨거운 숨과 꼼질 거리는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짜릿한 감촉에 워린이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너자의 입가를 막고 있던 손바닥을 내려 헐렁하게 목쯤을 가리고 있는 옷깃을 밑으로 내렸다.

“흐…!”

워린의 딱딱하지만 고운 손끝이 너자의 굵은 목줄기를 깃털처럼 쓸었다. 그 찌릿한 감촉에 너자의 어깨가 모로 세워지며 워린의 품에서 벗어나려 요동쳐졌다. 하지만 어느새 몸을 일으켜 침대를 지지하고 있던 왼손을 너자의 배에 꾹 누르며 말했다.

“걔랑 몇 번이나 했어?”

“…….”

“응? 걔 거 넣는 거 좋았어? 말해 봐.”

워린의 모욕적인 언사에 너자가 듣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매섭게 날아온 손바닥에 너자의 얼굴이 힘없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어디 주인님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감히 눈을 감아.”

골이 울릴 만큼 강하게 맞은 탓에 너자가 끙끙 앓았다. 작게 앓는 너자의 신음에 워린의 행동이 더욱 거칠어졌다. 워린은 너자가 바로 답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너자의 뺨을 한 번 갈겼다. 너자가 통증에 작게 비명을 지르자 이번에는 감히 비명을 지른다며 한 대 더 갈기며 말했다.

“왜… 내 허락도 없이… 그 새끼한테 대 줬어? 몸이 이게 뭐야? 완전 허벌창이 다 됐잖아?”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그런 말 하지 말라며 대꾸를 하려던 너자의 입가를 그가 다시 콱 쥐어 잡았다. 어딜 감히,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자의 입을 막은 워린이 폭격기처럼 입을 움직였다.

“맥켄지랑 하루에 몇 번 했어? 언제부터 섹스했어? 걔가 원해서 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원해서 하는 거야?”

야만인의 얼굴이 굴욕으로 물들어 갔다. 워린은 그런 야만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워린은 점점 우울하게 변하는 야만인의 낯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만인의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상이 점점 커지는 게 그렇게 짜릿할 수 없어 그는 거의 이마를 너자의 이마에까지 붙였다. 이마에 느껴지는 뜨끈하고 매끄러운 피부가 미치도록 마음에 들었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에게서… 도망친 거야?”

“…!”

“아니면 맥켄지가 널 버린 건가?”

워린의 질문에 너자의 동공이 떨리기 시작했다. 슬퍼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아니면 두려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워린은 무척 궁금했다.

“응? 말해 봐?”

워린이 속삭이며 너자의 입가를 내리눌렀던 손을 뗐다. 하지만 너자의 작은 입술은 꾹 닫힌 채였다. 그런 너자의 모습에 워린이 쿡쿡 웃으며 다시 속삭였다.

“맥켄지가 허벌창이 이제는 질렸대? 아니면 허벌창이 되기 싫어서 도망 나온 거야?”

말해 보라니까? 응? 내가 묻고 있잖아. 왜 말 안 해? 말해 보라니까? 아까는 잘만 말했잖아. 그런 말 하지 마? 너 나빠? 야, 말해봐. 응? 야~ 입 계속 처닫고 있을 거야?

저거 또 시작이네… 레너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건 워린의 버릇이자 취미였다. 그는 남작 가의 영식답지 않게 천박한 말을 즐겼으며, 타인의 정신을 찢어 놓는 것을 좋아했다. 전혀 귀족답지 않은 행실에 다른 대대의 기사들이 워린을 욕하고 헐뜯었지만, 적은 수요로 그런 워린을 찬양하는 무리도 있었다.

문가에 서서 야만인을 성희롱해대는 자신의 상관을 질린 눈으로 보던 레너드가 점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풀려 가는 홍안을 발견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큼… 큼….”

레너드가 본인의 존재를 소극적으로 호소했지만 워린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의 존재를 잊으셨나요…. 레너드는 당장에라도 야만인을 뒤집어엎어 몸을 탐할 것 같은 워린의 모습에 자리를 피해 줘야 하나 싶어 괜히 문가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문가에서 들리는 특정한 박자의 두드림에 눈을 급하게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끼익, 하고 문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리가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맥켄지 도노반과 러트 도노반이 오고 있습니다. 아마 4분 내외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뭐?!”

레너드가 기함했다. 그놈이 여기에 왜 와? 혹시 야만인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나? 어떻게? 기사단 안에 배신자가 있나?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레너드는 문을 확 닫고 그들이 뒹굴고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워린은 발을 쾅쾅 구르며 다가오는 레너드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야만인을 희롱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레너드가 말했다.

“…맥켄지 도노반이 온답니다!”

레너드의 외침에 그제야 워린이 실실 웃으며 너자의 마음을 찢어 놓던 것을 멈췄다. 레너드는 이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워린에게 속삭였다.

“4분 내외로 러트 도노반과 함께 온답니다. 야만인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요?”

대가리에 총을 맞지 않은 이상 놈이 대장을 찾아올 리가 없잖습니까! 레너드가 말을 끝마치자 워린이 픽 웃으며 이제는 숨조차 쉬지 못하는 야만인을 바라보았다. 야만인의 몸이 덜덜 떨리며 작은 입술에서는 밭은 숨이 쉬어졌다.

두려워하는군. 맥켄지 도노반에게서 도망친 거야.

워린은 그런 너자의 모습에 묘한 안도감이 생겼고, 가라앉았던 그의 기분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뻗어 물가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뻐금거리는 너자의 작은 입안에 검지를 처넣고 혀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에 레너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장! 그 새끼가 온다니까요? 이걸 들키면….”

“들었니?”

제기랄, 레너드는 자신의 말을 씹어 버리고 자신의 세계로 빠진 워린을 파들거리며 바라보았다. 저 새끼는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야만인은 맥켄지에게서 도망친 모양이고 맥켄지가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놈이 야만인을 무척 아끼고 있음을 방증한다. 자신의 상관은 거리에서 야만인을 주웠지만, 놈이 볼 때는 야만인을 워린이 훔쳐 갔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좆 됐다. 이건 진짜 좆 됐다. 아무리 맷돌을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과 위기의식이 쥐똥만큼도 없는 상관의 모습에 레너드가 이를 갈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애가 타는 레너드를 본체만체한 워린이 너자의 입안에 넣었던 손가락을 좀 더 깊이 쑤셔 넣었다. 목젖까지 집어넣은 굵고 단단한 손가락에 너자가 웩 하며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워린은 자신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조이는 너자의 목구멍에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꼭 거기 구멍 같네. 내 걸 쥐어짜는 것 같아.

워린은 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걸 넣어 보고 싶었다. 닳고 닳은 놈이니 밤 기술도 훌륭하겠지.

4분, 시간은 충분했다.

그가 말했다.

“곧 맥켄지가 이리로 온대.”

“…흡… 웩!”

“맥켄지가… 너랑 나랑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행동할까? 분명 재밌을 거야. 그치?”

너자의 얼굴이 점점 공포로 질려 갔다. 손가락으로 사정없이 목구멍을 쑤시는 그의 행동보다, 이곳에 올 맥켄지가 그는 더 무서웠다.

“헉… 허억… 욱… 헉….”

너자의 눈에 기어코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죽어도 자신의 옆에서 죽으라고 했다. 절대 도망갈 생각 따위 하지 말라고 했다. 마음대로 그의 허락도 없이 도망쳤는데, 분명 화를 낼 거다. 아니, 화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겨우 붙여 놓은 다리를 다시 부러뜨리고 나머지 성한 발목도 부러뜨릴 것이다. 아니지,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지.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의 밑에 굴러먹는 이 꼴을 본다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암울한 미래에 너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박아 놓은 것 같은 우울한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 워린이 황홀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끝으로 너자의 눈가를 쓱, 훑으며 말했다.

“구해 줄까?”

“…….”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너자의 눈이 이제야 워린을 담았다. 워린이 다시 말했다.

“구해 줄까? 네 입으로 말해 봐.”

너자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워린이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어서… 시간 없어.”

“…….”

조가비처럼 꾹 다물렸던 너자의 입술이 조금 떼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워린이 재촉하듯 너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레너드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제기랄! 와요! 온다고요!”

워린은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에게 말했다.

“마지막이야.”

“…….”

“어떻게… 해 줄까?”

“…….”

너자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 곧 워린이 흥미를 잃었다는 표정을 지었고, 미련 없이 너자의 입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어내 몸을 일으켰다. 그때.

“…살려 주세요….”

“…….”

“살려… 살… 앗!”

워린이 침대에 무력하게 눕혀져 있는 너자의 등에 양손을 끼워 번쩍 들어 올렸다. 워린은 자신보다 머리통이 하나 더 큰 너자를 가뿐히 들어 올렸다. 그가 야만인의 등과 허벅지를 끌어안고 침실 옆에 붙어 있는 기도실로 성큼성큼 걸었다. 문틈 사이로 밖을 보고 있던 레너드가 외쳤다.

“곧, 곧 들어옵니다!”

“네가 알아서 상대하고 있어.”

“네?!”

뭔 좆같은 소리야! 기함을 하는 레너드에게 워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들키면 다 네 탓이다?”

“단장님!”

“수고.”

워린은 보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멋지게 웃고는 기도실의 얇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시… 시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기도실을 바라보던 레너드의 귀에 정갈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팔자야…….

레너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굳게 닫혀 있던 침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틈 새로 해리의 바짝 긴장한 얼굴이 보였다. 레너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해리를 바라보며 눈가를 툭툭 쳤다. 표정을 풀라는 뜻이었다. 그에 해리가 아까보다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완전히 문을 열었다.

해리가 완전히 연 문 안으로 러트가 먼저 들어왔고 그의 시종들과 호위기사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바싹 마른 고수 색의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러트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거드름을 피우고 워린의 침실에 들어오며 파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운을 뗐다.

“전쟁 영웅이 지낼 방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지 않나?”

그에 레너드가 공손히 말했다.

“단장이 워낙 소탈하시고 기도하는 것을 즐기시는 터라… 어서 오십시오.”

칼 같은 자세와 사무적인 표정인 레너드가 귀하신 분에게 테이블에 앉으라 권하려고 할 때, 그의 뒤로 환상적인 플래티넘 블론드의 미인이 들어섰다. 그에 레너드의 사무적인 표정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초라한 침실을 바라보는 러트의 옆에 그보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남자가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채 환상적인 플래티넘 블론드를 거칠게 쓸어 올리는 꽃사슴같이 생긴 미인이었다.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머리 뒤로 넘어가며 꿈과 같은 머리칼이 뒤로 넘겨졌다. 그에 앞머리에 가려진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치 신화 속 지혜와 달의 여신을 닮은 미인이었다. 눈매와 입술, 코가 무척 아름다웠으나 툭 불거진 눈썹 뼈와 단정히 그려진 것 같은 눈썹이 남성적이었다.

레너드는 먼발치에서 보았던 맥켄지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어서 저도 모르게 맥켄지를 뚫어져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드러난 그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사람 하나를 찢어발길 것 같은 표정이라 다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마음을 다잡았다.

서쪽의 미친개 맥켄지 도노반이었다. 그의 잔인한 성정과 비범한 머리는 그의 얼굴만큼이나 유명했다. 눈가가 벌게진 맥켄지가 고개를 들어 레너드를 노려보았다.

“워린은 어디에 있지?”

와, 목소리도 환상적이네. 레너드가 저도 모르게 생각하며 답했다.

“기도실에서 기도 중이십니다.”

레너드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러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의외인데? 전쟁 영웅이 신을 섬기는 신자라니.”

전쟁 영웅이라고 아무리 금칠을 해도, 결국은 살인광인 거잖아? 레너드는 자신의 상관을 깎아내리는 러트에게 속에서 분노가 욱하고 차올랐지만 그는 노련한 기사이며 책사였다. 그가 공손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9대대 대원들을 비롯해 대장은 드뷔시 신을 섬기는 종입니다. 저희가 승리를 한 것도 다 그분의 덕이지요.”

러트가 눈썹을 위로 추어올리며 평온한 표정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라? 그의 얼굴이 싸하게 굳어 갔다. 감히 기사 나부랭이가 제 말을 유하게 넘기네?

성격이 좋지 않은 러트가 자신만의 핀트가 상해 자신의 시비를 유하게 넘긴 기사에게 트집을 잡으려 할 때, 맥켄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워린을 불러.”

오만한 맥켄지의 명령에 레너드의 눈썹이 살짝 움찔였다. 하지만 다시 본래의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 됩니다.”

“뭐?”

“기도 중에는 아무도 방해를 할 수 없습니다.”

맥켄지가 자신을 바라보며 사무적으로 말하는 레너드에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감히 기사 따위가 나의 말에 불복한다는 말인가?”

듣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천사 같은 얼굴과 대비된 소름 끼치는 기세와 목소리에 노련한 기사인 레너드마저 긴장이 되었다. 평생 누군가의 위에서 군림한 자의 기세였다. 하지만 레너드는 그저 그런 뜨내기가 아니었다.

레너드가 최대한 공손한 표정으로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안 됩니다. 단장님은 기도 중이십니다.”

“불러오래도?”

“안 됩니다.”

“이 새끼가…?”

맥켄지의 입에서 기어코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에 레너드는 평온함을 가장한 채 물러서지 않고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새끼야! 들릴 거 아니야! 빨리 처나오라고!

맥켄지가 레너드를 보며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기도실로 성큼성큼 향하기 시작했다. 그에 레너드가 기겁을 하며 기도실의 문짝에 달려가 등을 맞댔다.

-앗… 아….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

레너드는 작게 들리는 앓는 소리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이 와중에 그런 짓을 하고 있다. 미친 거 아니야?

-하지 마… 아!

“안 됩니다!”

레너드가 야만인의 신음 소리가 들릴세라 크게 외쳤다.

“정신 나갔니?”

맥켄지는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문을 막는 레너드에 점점 열이 올랐다. 안 그래도 그는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자신은 이딴 곳에서 허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도망간 노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자신을 떠나간

내,

노예,

너자.

맥켄지의 머리가 스트레스로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의 얄팍한 인내심이 산산조각 났다. 안 그래도 그 재수 없는 새끼의 부하였다. 거기에 감히 자신의 말에 토를 단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항상 꽂혀 있는 총집의 리볼버를 꺼내려는 순간 러트의 목소리가 그를 저지했다.

“그쯤 해 두렴.”

“…….”

맥켄지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저 좆도 아닌 게, 감히 자신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더 열 받는 것은 놈의 말에 따라야 하는 자신의 처지였다. 맥켄지는 당장에라도 이 방 안에 있는 것들에게 총을 쏴 갈기고 싶었다.

러트가 한숨을 쉬며 침실 안에 있는 테이블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리고 기도실 앞에서 버티고 있는 레너드를 보며 말했다.

“이 소란이 일어났는데 워린은 왜 안 나오는 거지? 우리를 무시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라도 있는 건가? 고작 기도하는 게?”

레너드는 자신을 바라보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침을 삼켰다.

본인으로선 중대할 걸요… 야만인을 따먹어야 하니까….

하지만 그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레너드가 몇 초간의 생각 끝에 끝내주는 핑곗거리를 만들어 말했다.

“사실, 대장의 몸엔 온갖 부정이 씌어 있습니다.”

엄숙한 레너드의 말에 러트가 호오,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같잖은 이유를 들어 납득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손으로 쏴 죽일 생각이었다. 러트가 물었다.

“어떤 부정이지?”

“대륙 전쟁 중 대장은 야만인 주술사에 의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저녁만 되면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괴로워하시죠. 그래서 대장은 그 후부터 사제를 모시고 다니며 저녁마다 축복을 받았고, 지금은 혼자서 거동을 할 정도는 되지만 저녁마다 신께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그 저주가 다시 발동됩니다.”

“저런….”

러트가 진정성이 있는 레너드의 말에 안타까워했다. 소문에 의하면 워린은 싸움에 항상 사제를 데리고 다녔고 그는 밖으로 잘 나돌지 않는다 하였다.

오졌다. 레너드는 자신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러트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 러트가 맥켄지에게 말했다.

“워린이 매우 고생하는구나. 그가 일부러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니 너도 화를 풀렴. 곧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될 아이잖니.”

“…….”

“거기에 그만 서 있고 너도 여기에 앉으렴.”

러트의 명령에 맥켄지가 한숨을 쉬며 그의 옆에 앉았다. 놈이 저주에 걸리든 말든 제 알 바 아녔으나 맥켄지는 얼른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지금쯤 샬로메와 티모시가 록시 안을 쥐잡듯 뒤지고 있을 터였다. 자신도 그곳에 합류해야 했다.

맥켄지가 양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의 심장 절반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워린은 너자의 등 뒤를 기도실 문에 강하게 밀었다. 그에 너자는 기도실의 문에 얼굴이 눌렸고, 앞으로 결박된 양손이 문에 바짝 붙었다. 너자가 답답함과 저려 오는 오른쪽 발에 몸을 움찔였으나 뒤에서 워린이 강하게 붙어 밀어대는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왔나 보네?”

“…….”

“그가 보고 싶지는 않아?”

귀에 속삭이는 워린의 목소리에 너자가 눈을 꽉 감았다. 그래,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따위 꼴을 보이면 자신의 머리통은 그 사냥꾼처럼 날아갈 것이다.

워린은 대꾸를 하지 않는 야만인의 뒷목을 입술로 꾹 눌렀다.

“…헉…!”

너자는 뒷목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과 입술의 감촉에 숨을 집어삼켰다. 그에 워린이 픽 웃으며 그의 목덜미에 혀를 갖다 대어 핥기 시작했다. 너자는 그 소름 끼치는 감촉에 소리가 나올세라 이를 악물었다. 워린은 자신의 품 안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너자에게 목을 핥고 있던 것을 멈추고 속삭였다.

“문… 열어 버릴까?”

그의 말에 야만인의 몸부림이 멎었다. 비굴하다, 비굴해. 워린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너자는 워린의 말에 감히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너자의 윗옷 안으로 손을 넣어 뱀처럼 손이 위로 스멀스멀 올라온 탓이었다.

너자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워린은 자신의 품 안에서 달달 떠는 야만인의 귓속에 혀를 넣어 핥으며 말했다.

“가만히 안 있으면….”

“…….”

“맥켄지 앞에서 후장 따 버릴 줄 알아.”

워린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야만인의 근육으로 뒤덮인 가슴을 꽉 쥐었다. 기억보다 조금 빠진 가슴이지만 일반 사내와 비교를 해도 월등히 커다란 가슴이었다. 워린이 양손에 잡히는 두툼한 가슴에 실실 웃으며 야만인의 귓불을 빨았다.

츕, 츄웁 하는 추잡한 소리가 너자의 귓속을 울렸다. 너자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끄럽고 뜨거운 혀가 귀를 빨아대는 느낌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상했고 그의 양 손가락이 자신의 젖꼭지를 강하게, 때로는 살살 꼬집어 대며 주물거리는 탓이었다.

거기에 더욱 미칠 것 같은 이유는 그가 만져 주는 가슴이, 너무 기분 좋았기 때문이었다.

“…….”

완급을 조절해 대며 너자의 양 젖통과 젖꼭지를 유린하는 워린의 손놀림은 도가 텄다. 그는 다년간 원숙한 마님들의 종마였다. 남자의 가슴과 여자의 가슴은 다름이 없었다. 워린은 뒷목이 빨개져 끙끙거리는 야만인의 앓는 소리에 미소 지었다.

야만인의 가슴은 환상적이었다. 그는 남자는 처음이었으나 만져지는 젖통은 일반 남성의 가슴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손에 넘치도록 잡히는 가슴은 딱딱했으나 묘하게 말랑말랑했고 작게 튀어나온 젖꼭지는 여성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워린은 손가락 안에 굴려지는 작은 젖꼭지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입을 내려 맥켄지가 잔뜩 남겨 놓은 잇자국을 다시 덧대며 양손에 부여잡은 젖꼭지를 앞으로 밀어내 기도실의 문 앞에 비볐다.

“…하지 마…!”

젖꼭지에 느껴지는 차가운 문의 감촉에 너자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에 워린이 픽 웃고 너자의 목덜미를 핥으며 말했다.

“들렸겠다.”

“…….”

그의 말에 너자가 울먹이며 묶인 양팔을 얼굴 위까지 들어 손목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때, 맥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가!

분노에 침전된 목소리였다. 워린의 애무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너자의 몸이 한순간에 식었다.

맥켄지가,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았나? 맥켄지가, 맥켄지가 나를… 나를 죽일 거야.

두려움에 너자의 숨이 점점 밭아졌다. 워린은 공황상태에 걸린 너자의 상태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지금이면 힘이 빠져 구멍에 처박기 쉽겠다는 생각을 했다.

워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야심가였다. 그가 함부로 주무르던 너자의 가슴에서 손을 떼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이 너자의 바지 단추에 닿았고, 그것을 손쉽게 풀어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지와 속옷을 밑으로 끌어 내렸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엉망이 된 야만인의 엉덩이에 픽 웃었다.

“개창놈 같은 새끼.”

야만인의 하얀 엉덩이는 한 손에 잡힐 만큼 작고 하얬다. 하지만 엉덩이와 허리, 허벅지는 잇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닳고 닳은 몸. 맥켄지가 그렇게 물고 빠는 몸. 한때, 내 것이었던 전리품.

워린은 야만인을 잔뜩 능욕하며 따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엉망이 된 채로 엉덩이를 내밀며 훌쩍이며 울고 있는 야만인의 모습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자지가 야만인의 굴러먹은 몸을 본 순간 쌀 것같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워린은 바지춤을 풀어 자지만을 꺼냈다. 손에 잡힌 자신의 자지가 당장에라도 쌀 것같이 꺼떡이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검지에 침을 뱉고는 자신의 귀두에 흥건히 발랐다. 그리고 꽉 다물린 너자의 구멍에 비비며 말했다.

“힘 빼라?”

“…모… 못 해요….”

애절하게 말하는 너자의 목소리에 워린이 힘을 줘 그의 구멍에 자지를 처박기 시작했다.

“……!”

너자는 자신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너무도 큰 자지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탓에 끙끙 앓았다. 그에 워린이 자신의 귀두를 끊어먹을 듯 조여대는 아찔하고 뜨거운 너자의 구멍에 이를 악물었다.

귀두만 들어갔지만 당장에라도 쌀 것 같았다. 시팔, 존나 조여. 존나 좋아. 존나 뜨거워. 미친 새끼. 워린이 환상적으로 자신의 귀두를 조이는 야만인의 구멍에 안달이 났다. 그가 밀어 넣는 자지에 힘을 주며 너자에게 속삭였다.

“한 번에 안 들어가면 당장 문 열어서 맥켄지 앞에서 널 따먹을 거야.”

“…!”

“잘해라?”

너자가 워린의 으름장에 온몸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하지만 왼발로만 몸을 지지해 그게 쉽지 않았다. 사정없이 들어오는 커다란 자지에 힘이 풀리면 겨우 걸치고만 있는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고, 발목이 터질 것같이 아려 왔다.

워린은 기특하게도 몸에 힘을 풀려는 너자에 씩 웃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허벅지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워린의 허벅지와 너자의 허벅지가 닿아 그는 알 수 있었다. 왼쪽에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가끔 오른쪽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는데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 왼쪽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생각해 보니, 야만인의 오른발에 뱀같이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었지.

워린은 그제야 너자의 오른발이 망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워린이 자지를 집어넣다 말고 시선을 내려 파들파들 떨리는 너자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바지와 속옷이 떨어진 탓에 발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워린은 작게 혀를 차고 겨우 집어넣은 귀두를 빼냈다.

너자는 제 속을 뒤집어 놓았던 게 빠지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제 어깨를 잡아 거칠게 뒤로 돌리는 탓에 이를 악물었다. 몸이 예상치 못하게 돌려진 탓에 저도 모르게 오른발을 지지대로 썼기 때문이었다.

골을 울리는 고통에 너자의 눈이 확 감겼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파들파들 떠는 꼴이 퍽 가련해 보였다. 하지만 워린은 너자가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허리를 숙여 너자의 허리를 한 손에 끌어안고 오른발로 너자의 양 발목에 걸린 속옷과 바지를 벗겨내 옆으로 밀었다.

드디어 너자의 발목이 드러났지만 너자가 왼발로 급하게 중심을 잡는 바람에 그의 몸이 옆으로 쏠렸다. 너자는 무게중심이 흐트러져 이대로 옆으로 구른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워린의 팔뚝 근육이 땅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새끼, 칠칠치 못하긴.”

워린은 하마터면 야만인의 몸뚱이에 부딪혀 기도실의 벽면 장식물들이 떨어져 소리를 낼 뻔한 것을 막았다. 너자에게는 저는 들키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 굴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른 하던 걸 마저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헉…! 뭐… 뭐…!”

“가만히 있어.”

워린은 너자의 오른쪽 허벅지를 왼쪽 팔로 끼워 들어 올렸고 그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기도실의 문에 닿게 해 너자를 문과 자신의 사이에 끼는 형태로 만들었다. 그에 아래에 있어 잘 보이지 않던 너자의 발목이 덜렁이며 위로 들어 올려졌다.

워린이 너자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빼내어 아예 그의 등을 문에 붙였다. 지지할 곳이 생긴 너자의 몸이 뒤로 쏠린 탓에 워린과 너자의 사이가 좀 멀어졌다.

그가 너자의 발목을 한 손에 그러쥐었다.

순간 확 쥐어지는 발목에 너자가 재빨리 양 손목을 들어 올려 깨물었다. 고통에 비명이 나올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발로만 지지하는 탓에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워린은 제 손안에 덜렁 들린 야만인의 발목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야만인의 발목은 몸에 비해 가늘었다. 이 커다란 몸을 이 가느다란 발목이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얼치기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발목 위로 근육 잡힌 종아리가 매끈하게 올라가 있었다. 기억 속의 종아리는 좀 더 굵었었는데.

워린이 너자의 발목과 종아리를 핥을 듯 바라보다 발목에 새겨진 붉은 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손자국이 맞았다. 워린의 눈이 묘하게 변해 갔다.

너자는 손목을 다시 물게 되었다. 발목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힘껏 깨물린 너자의 손목에 피가 맺혔다.

발목을 삔 것이 아니다. 부러졌었던 것 같다. 한 번에 부러뜨린 것 아닌 듯했다. 몇 번에 나눠 부러뜨렸을 것이다. 반대쪽 발목의 복숭아뼈보다 묘하게 울퉁불퉁하고 어긋난 것 같았다. 비틀어서 부러뜨렸었나.

그의 다홍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타올랐다.

워린의 이가 갈렸다.

내가 했었어야 했는데.

야만인의 첫 경험을 모두 그 새끼가 가져갔다. 전쟁이 끝나면 음미하듯 천천히 제가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놈이 멋대로 가져가 모조리 다 해 놨다. 어렴풋이 들리는 레너드와 맥켄지의 대화에 이가 으드득 갈렸다.

이건 내 건데.

“…시… 싫어요.”

“닳고 닳은 새끼가, 순진한 척하지 마.”

워린이 고개를 저으며 손에 들린 발목을 뒤로 빼려는 너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던 거 계속해야지.”

“…!”

질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만인에 눈 맞춤을 하며 워린이 몸을 너자에게 바짝 붙여 그의 오른 허벅지를 자신의 왼쪽 팔에 끼었다.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자지를 붙잡아 한 번에 밀어 넣었다.

너자의 눈이 꽉 감겼다. 워린은 자신의 가슴께를 묶인 양손으로 밀어내는 너자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양팔을 자신의 목에 끼우게 했다.

“…!”

“잘 붙잡아라? 나랑 하면 다리에 힘 풀려서 쓰러질걸?”

너자가 워린의 목을 끌어안은 듯한 형태가 되었다. 너자는 그와 이런 식으로 가깝고 마치 친밀하듯 붙은 게 너무도 거북했다. 그래서 아래의 통증도 잊고 그의 목에 두른 양팔을 위로 올려 다시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의 자지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급하게 끝까지 치고 들어오는 탓에 워린의 목을 급하게 끌어안았다.

워린은 자신을 꽉 끌어안는 야만인의 행동에, 자신의 자지를 조르듯 감싸는 미끄럽고 울퉁불퉁한 야만인의 내벽에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요령 있게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빼낼 때는 천천히, 그리고 다시 집어넣을 때는 급하고 강하게 넣었다. 그의 허리 짓에는 힘이 있었으며 묘한 기교가 있었다. 어떨 때는 잘고 얕게 털어냈으며 어떨 때는 강하고 깊게 털어댔다.

너자는 밑을 치고 올라오는 굵고 긴 자지에, 내벽을 감질나게 쳐대다 깊게 집어넣는 워린의 기교에 점점 숨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여기저기 찔러대던 그의 자지가 ‘그곳’을 확 하고 찌른 순간 온몸을 크게 퍼덕였다.

“……-!”

하마터면 비명이 나올 뻔했다. 너자가 워린의 목을 콱 끌어안고 파들파들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끙끙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칠 것 같았다.

워린도 미칠 것 같았다. 미친 새끼 존나 깊은 곳에 있네. 존나 야한 새끼. 여자도 이렇게 깊게 안 있는데. 태생부터 야해 빠진 창놈 새끼다.

“나 잘하지? 기분 좋지? 질질 쌀 것 같지?”

워린이 졸라대듯 조여대는 너자의 구멍에, 자신의 귓가에 잔뜩 억눌린 신음을 내뱉는 야만인의 뜨거운 숨에, 자신이 마치 생명줄인 듯 꽉 끌어안고 파들파들 떨어대는 너자의 양팔에 잔뜩 고양됐다. 워린이 이를 악물고 너자의 극점을 박아 댔다.

“흐읍… 흐… 흑… 응… 으…!”

“제기랄, 조용히 해, 들려.”

너자는 미칠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좋은 곳이 콱콱 자극된다.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 자신의 몸을 잠식했다.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싫은데, 이런 짓 정말 싫은데 그곳을 찔리니 수치심이니, 고통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알려 준 쾌감이었다.

거기에,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아대는 놈의 모습이,

“흐… 으응… 윽… 흐…!”

그와 하는 것 같아서,

“맥……켄지……!”

자신이 너무 역겨웠다.

맥켄지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등받이에 눕듯이 등을 기댔다. 그에 러트가 레너드에게 서류를 주며 설명을 하다 동생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려 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서류를 건네받은 레너드에게 말했다.

“식의 순서는 이렇게 된다.”

레너드는 제게 건네진 서류 뭉치를 빠르게 속독하기 시작했다. 식의 개요, 식의 순서, 입장 대열, 입장하는 방향 등 모든 게 적힌 문서였다.

러트가 자신이 건넨 서류를 눈알을 굴려대며 열심히 읽는 레너드에게 말했다.

“내가 후작 가문의 예비 가주로서 낭독문을 읽을 거야. 시간은 아마 10분 정도 될 것이고, 내가 낭독문을 다 읽으면 맥이 칙서를 들고 내 옆에 서.”

“네.”

“그리고 마무리 멘트를 하면 성하께서 기도를 하실 것이고, 맥이 칙서를 성하께 건넨다. 그러면 성하께서 칙서에 축복을 내릴 거야. 그때 워린 도노반과 너희 대원들이 우리의 앞으로 와. 대형 맞춰서. 군인이니 그런 건 잘할 수 있겠지?”

“네.”

“워린은 물론 너희 9대대는 제국 기사단 정복을 입지 않을 거야. 우리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을 입어야 한다.”

별거 아니라는 러트의 말에 유순히 듣고 있던 레너드의 고개가 올려졌다. 레너드가 할 말이 있는 듯 자신을 바라보자 러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워린은 이미 ‘워린 도노반’이잖나. 우리 후작 가문의 일원이니 폐하께서도 별다른 말씀 없으실 것이다.”

“…네.”

레너드는 묘한 얼굴로 수긍했다. 이것이 진심인지는 잘 분간이 가지는 않았으나 표면적으로는 워린이 후작 가문의 얼간이에게 꽤 신뢰를 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레너드의 귀에 무언가 억눌린 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이 빠르게 앞에 앉은 러트와 맥켄지, 그리고 뒤에 있는 그들의 사용인들을 훑었다. 다행히 그들은 눈치를 챈 것 같지…….

“…….”

관심 없다는 듯 숙어져 있던 맥켄지의 하얀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그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레너드가 속으로 워린에게 쌍욕을 해대며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오늘은 단장에게 걸린 저주가 특히 지독한가 보군요.”

그의 말에 러트가 말을 잇다 말고 레너드를 주시했다. 레너드가 비통한 얼굴을 만들어 내며 말했다.

“지독한 야만인 놈들, 어찌나 지독한 저주를 걸었는지… 어떨 때는 저렇게 소리를 지르시며 괴로워하신답니다… 위대한 드뷔시 님께서 저희 단장을 어루만져 주셔야 할 텐데….”

레너드는 자신을 빤히 주시하는 네 쌍의 냉정한 눈알을 보며 좀 더 영혼을 담아 눈알에 힘을 빡 주었다. 눈알이 시린다… 시린다… 나온다… 나왔다!

자신의 상관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레너드를 차갑게 바라보던 러트가 생각했다. 기껏 가문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종마를 얻었는데 저렇게 비실거려서야… 러트가 혀를 찼다.

레너드는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려 자기가 할 말을 하는 러트에 일차로 안심을 하고, 다시금 맥켄지의 호수 같은 눈이 관심 없다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에 이차로 안심했다.

러트의 설명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몇십 분이 지나서야 마지막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러트는 마찬가지로 마지막 서류를 내려놓은 레너드에게 말했다.

“내가 말한 사항은 빠짐없이 워린에게 전해야 할 것이야.”

그의 말에 레너드가 알겠다며 입을 열려는 순간, 지금껏 인형처럼 앉아 있던 맥켄지가 일어났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러트와 레너드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시종과 함께 침실을 빠져나갔다. 뒤돌아 나가는 맥켄지의 발걸음이 무언가 다급했다.

대귀족의 영식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레너드가 거침없이 문을 나서는 맥켄지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자, 러트가 콧등에 걸친 안경을 벗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아기라니까.”

레너드는 맥켄지에게 절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러트에 마찬가지로 그를 찡그린 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러트에 재빨리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묵례했다.

러트는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뒤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이 테이블에 너저분하게 놓인 서류를 정리하곤 간다는 말도 없이 침실을 빠져나가는 러트의 뒤를 따라나섰다.

모든 사람이 침실을 빠져나가자 레너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목숨이 세 개, 아니 여덟 개라도 모자랐다.

레너드가 문가로 다가가 특정한 박자로 문을 두드렸다. 이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해리가 문을 조금 열어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며 이상기류는 없다고 전했다.

해리의 말에 레너드가 미소 짓고는 계속 수고하라는 말을 남긴 뒤 문을 닫았다. 드디어 끝난 상황에 기지개를 피려는 순간, 기도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하반신만을 벗은 워린이 자지를 꺼덕이며 나체의 야만인을 짐짝처럼 들어 올려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내 눈! 레너드가 그들의 못 볼꼴에 칠색 팔색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일 끝났으면 그 흉한 것을 집어넣으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야만인을 침대에 던져 놓고 본격적인 것을 하려는 자신의 상관에 입을 닫았다.

워린의 타오르는 홍안이 기이하게 빛나며, 그 섬세하고 잘생긴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다년간 워린을 모신 레너드는 그런 상태의 상관을 아주 잘 알았기에 입을 다물고 재빨리 침실을 빠져나갔다.

“부단장님?”

해리가 바퀴벌레처럼 빠르고 부드럽게 문을 빠져나오는 레너드에 무슨 일이냐는 듯 물었다. 그때 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야만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해리가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레너드는 희미하게 들리는 너자의 애달픈 앓는 소리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해리 또한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해리는 일부러 흠흠, 거리며 오늘 하루 질리도록 보았던 복도의 미술품을 흥미롭다는 듯 보기 시작했다.

-흐응… 흐… 싫….

-이렇게 질질 싸면서?

레너드가 참지 못하고 해리에게 말을 걸었다.

“아~ 해리, 뭐 재밌는 얘기 없어?”

-아… 악! 아파!

해리도 참을 수 없는 민망함과 어색함에 운을 뗐다.

“제… 제가 그러니까….”

-개새끼야, 다시 한 번 말해 봐. 내가 누구라고?

-……!

레너드와 해리의 어색한 대화가 끊겼다.

맥켄지가 손에 들린 만년필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베아 제국에 딱 다섯 자루가 있던 만년필은 이제부로 네 자루가 되었다. 일반 평민의 집 하나쯤은 우습게 살 정도로 비싼 만년필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새까만 잉크를 쏟아냈다.

위대한 신을 찬양하는 수가 놓인 빨간 카펫에 까만색 잉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맥켄지는 신의 얼굴이 까맣게 물드는 것을 보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발을 들어 구둣발로 까맣게 물든 신의 얼굴을 짓이겼다.

자칫하면 신성모독으로 재판에 회부가 될 여지가 있는 행동을 그레머가 못 본 체하며 허리를 숙였다. 이럴 때는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그레머가 최대한 맥켄지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주변에 동화하고 있을 때, 구둣발로 신의 얼굴을 밟아대던 맥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귓가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함에 새빨갛게 물든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어두웠던 밤이 가시고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의 신경을 더 거슬리게 하였다.

금방 찾을 거라 생각했다. 전쟁 영웅을 보려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의 파도에 맥켄지는 샬로메의 보호를 받으며 곁눈질로 노예를 바라보았다. 노예의 키는 몹시 커 수많은 사람들에게 파묻혀 있어도 그의 얼굴은 껑충 보였기 때문이었다. 노예는 몹시 난감한 표정으로 목을 길게 빼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곰같이 커다란 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꼴이 안쓰럽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원래의 노예였다면 그 긴 다리로 마치 재규어처럼 사뿐이며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서 자신에게 왔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는 그러지 못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별안간 맥켄지의 명치 부근이 몹시 울렁거렸다. 그는 처음 느껴 보는 그 거북함이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맥켄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예를 외면했고, 이런 기분을 들게 한 괘씸한 노예를 탓했다.

멍청한 놈. 이거 하나 못 헤쳐 와? 쓸모없기 그지없어. 어쩔 수 없지. 내가 데리고 와야겠어. 맥켄지는 괜히 속으로 노예를 욕하며 반대쪽으로 돌렸던 고개를 노예를 향해 다시 돌렸다.

-어?

맥켄지의 입에서 정말 드물게 얼빠진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맥켄지를 온몸으로 보호하고 있던 샬로메가, 저 멀리 쓸려갔던 그레머가 간신히 맥켄지에게 다가와 그를 보았을 때, 맥켄지가 멀거니 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분명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을 보며 얼빠진 표정으로 그곳을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맥켄지가 고함을 지르는 것에 혼비백산해 사람들을 헤쳐 나가며 노예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노예는 없었다. 맥켄지의 숨이 점점 밭아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주인의 모습에 샬로메가 그를 달래듯 말했다.

-사…사람들 틈에 휩쓸렸나 봅니다.

그레머가 맞장구를 쳤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치여서 바닥을 구르고 있거나요… 얼른, 얼른 찾아보겠습니다. 사람들한테 밟히면 아무리 그 큰 노예라도….

뜨내기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그들에게 맥켄지가 고함을 질렀다.

-당장 찾아!

그의 고함에 샬로메가 용수철이 튕기는 것같이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는 재빨리 마차가 있던 곳으로 가 마부에게 말을 강탈하듯 빌려 타고 사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레머는 분노에 몸을 떨어대는 맥켄지를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모시고 가려 할 때, 그의 하얀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것에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여기에서 발포하면 큰일 나요!

-…거슬려….

이 새끼들 때문에 노예가 보이지 않잖아. 그가 무심히 말하며 한 손에 쥔 리볼버의 실린더를 내려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탄환을 하나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가 장전을 끝냈다. 그레머가 기겁을 하며 주인을 만류했다.

-도련님! 안 돼요!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평민들을 아무 이유 없이 사살하면 재판에 넘겨집니다!

-내… 노예가….

그가 약실 구멍이 위로 가게끔 총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으며 약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철컥.

-사라졌어.

맥켄지가 리볼버의 해머(공이치기)를 엄지로 뒤로 당겼다. 격발 준비였다. 그에 그레머가 제발 진정하시라고, 발도 성치 않은 노예니 멀리 휩쓸려가지도 못했을 거라고, 샬로메 경이 곧 데리고 올 거라며 외치려고 할 때, 마치 기적처럼 그들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비켜났다.

-맥?

-…후작님! 큰 도련님!

그레머가 도노반 후작 가문의 호위기사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끌고 온 다비드 도노반 후작과 러트 도노반에 더는 감격스러울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망아지 같은 맥켄지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있어 거동이 불편한 제 아버지보다 러트가 먼저 맥켄지의 앞에 다가와 섰다. 러트는 제가 왔음에도 아직도 손에 리볼버를 장전한 채로 자신을 응시하는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러트 또한 도노반 가문의 망나니라 제 동생이 평민들에게 총질을 하든 말든 상관 없었다. 솔직한 말이라면 제 동생이 사고를 거하게 쳐 재판에 넘겨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에서 잘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불손하게 바라보는 제 동생의 주제넘은 행동이 거슬렸다.

인형같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제 사랑스러운 동생은 어느 순간부터 제 말을 듣지 않았고, 저를 밀치고 가문의 기둥이 되었다. 그건 원래 내 자리였는데. 제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이 그를 좀먹어 갔다. 러트가 맥켄지를 바라보는 그 표정이 어찌나 서릿발 같은지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레머가 두려움에 절로 어깨를 움츠렸다.

러트는 당장에라도 제 동생에게 어디 못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며 창피를 주고 싶었지만 제 아비 다비드 도노반이 헐레벌떡 뛰어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막내아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바로 표정을 바꿨다.

마치 쓰레기를 보듯 서릿발같이 휘몰아치던 그의 표정이 봄의 햇살처럼 사근사근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제 아버지에게 보라는 듯 눈을 휘며 웃으며 제 동생에게 말했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우리 꼬맹이가 이럴까?

-…….

-위험하니, 자, 그거 내놓으렴.

아직 맥은 아직 아기네, 아기야. 맥켄지는 러트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사랑스러운 동생을 달래듯 행동하는 것에 속이 더욱 뒤집혔다.

일머리는 없지만 이런 쪽으로 영악한 러트는 견제의 목적으로 맥켄지를 인형 취급했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동생이라는 인식을 심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저 개새끼, 아버지만 곁에 있으면 저 지랄이네.

맥켄지의 호수 같은 파란 눈이 잘 벼려진 칼날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없어진 노예 때문에 그의 마음에 불이 났는데, 러트가 그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평소라면 제 형의 말에 겉치레라도 순응했겠지만 맥켄지에게 그런 여유 따위 없었다.

제 아비가 보든 말든 그가 신경 끄라며 없어진 제 노예를 찾으려고 발을 떼려는 순간, 러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네 노예가 안 보이는구나.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맥켄지는 본능적으로 러트에게 노예의 행방을, 아니 노예의 존재를 알리면 안 된다고 느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손에 쥔 리볼버의 실린더를 개방해 탄환을 거둬들였다.

-제가 경황이 없어 지금 인사드립니다.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여, 정신이 다른 곳으로 샜나 봅니다.

-그래, 너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지. 이렇게 유약한 아이가 어찌 영업을 다니는지. …그런데 노예는 어디에 놓았느냐? 형도 한번 보고 싶구나.

-제국 아카데미에 있습니다.

-…궁금했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감히 야만인을 제국 중앙 교회에 들이다니요. 신성 모독입니다.

냉정한 맥켄지의 목소리에 러트가 눈썹을 까딱이며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러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제 동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렇구나. 하긴, 감히 야만인이 신성한 록시에, 제국 중앙 교회에 발을 들게 할 수 없지.

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창가를 응시하던 맥켄지가 뒤에 대기 중이던 그레머에게 물었다.

“…샬로메는.”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듣기 좋은 중저음이던 그의 목소리는 피곤함과 스트레스에 절어 마치 현이 풀려 버린 바이올린처럼 형편없이 샜다. 그 안쓰러운 목소리에 그레머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샬로메 경은 록시 밖 산지를 수색 중이고 티모시 경은 록시 내를 수색 중입니다.”

“결과는?”

“…죄송합니다.”

침통한 그레머의 목소리에 맥켄지의 눈이 스륵 감겼다. 맥켄지가 참을 수 없는 피곤함에 짙은 한숨을 쉬며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집착처럼 연설문을 정리했다. 이런 쪽에 영 소질이 없는 러트 탓에 다비드가 명령한 일이었다.

그에 그레머가 조심히 말했다.

“도련님 두 시간 뒤면 미사가 시작됩니다.”

“…….”

“뭐라도 드셔야지요. 어제 점심부터 한 끼도 자시지 않으셨잖습니까.”

“됐다.”

그레머는 단호히 거절하는 제 주인에 안절부절못했다. 맥켄지가 지친 눈으로 연설문을 훑어보다 시종에게 말했다.

“…미사 준비하자.”

할 건 해야지. 그는 손에 쥔 게 많은 남자였다.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가 그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그레머는 익숙한 손길로 그를 미지근한 물에 적신 거즈로 몸을 닦아 주고 머리를 감겨 주었다. 마무리로 거즈보다 더 얇은 면에 민트를 으깬 약초로 그의 입안을 닦아 주었다.

기본적인 것을 마친 그의 몸에 오늘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휘황찬란한 제복을 입혔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이었다. 맥켄지는 워낙 본체가 아름다워 따로 외적으로 꾸밀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귀족보다 준비 시간이 적었다.

모든 것을 끝낸 그레머가 제 주인에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됐다.”

그레머는 맥켄지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모셨다. 하지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는 맥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맥켄지는 무슨 일인지 노예의 존재를 큰 도련님과 주인님께 알리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는 러트가 모르게 티모시와 샬로메를 쥐어짜며 증발해 버린 노예를 찾았다. 하지만 노예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누가 가져간 게 아닐까? 그레머가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맥켄지가 중얼거렸다.

“…도망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가져간 것일까.”

“…….”

“노예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한순간에 증발할 수 있을까?”

“…그렇지요.”

그렇게 윽박질러도, 그렇게 재활 치료를 해도 뛰는 것은커녕 보통 사람처럼 걷지도 못한 노예였다.

하지만 누가? 내가 록시에 올 시간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지? 그 짧은 시간에 그 커다란 노예를 어떻게 잡아가지?

그렇다면 제 발로 도망갔다는 게 되는데.

맥켄지가 느리게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 말했다.

“…어제 스와포네 가문은 록시에 오지 않았다고 했지.”

“네. 오늘 새벽에도 확인을 해 봤는데 아직 그 가문은 록시에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레머의 말에 맥켄지가 그 아름다운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기기 시작했다. 초췌한 미인이 독기를 품으며 입술을 물어뜯는 모습에는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에 그레머는 상황도 잊고 제 주인을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을 부르는 맥켄지에 다급하게 답했다.

“네, 도련님.”

“해 줄 게 있어.”

“지시하십시오.”

“언뜻 듣기로 대륙의 야만인들이 완벽히 정복된 게 아니라 들었다.”

“그게 무슨?”

맹하니 되묻는 그레머에 맥켄지가 말했다.

“분명 야만인 중에 생존자가 있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러트와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었거든. 이베아 외곽 쪽 아니면 대륙 끄트머리 옆의 리스 왕국 경계 쪽에서 검은 머리의 야만인들이 목격되었다고 하더군.”

“…….”

“가문의 기사들 몇을 은밀히 풀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 와. 그리고 샬로메에게 대가리를 터트리지 않을 테니 얼른 들어오라고 하고, 내가 말한 것을 전달해라.”

“…네.”

유순히 고개를 숙이는 그레머를 보고 맥켄지가 뻐근한 목을 풀며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의로 도망을 갔든, 납치를 당했든 그 깃털 같은 엉덩이를 아예 찢어 놓을 것이다.

미사 30분 전이었다. 그레머는 마지막으로 제 주인의 매무새를 점검했다. 하얀색의 재킷은 소매 부분과 끝단에 금사로 장식이 멋스럽게 되어 있었고, 기다란 다리를 감싼 바지 또한 흰색으로 핀턱이 곧게 들어가 있었다.

맥켄지가 입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은 이베아 제국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쟈델이 디자인하고 직접 제작한 단 세 벌의 맞춤옷 중 한 벌이었다.

이 흰색의 정복은 도노반 후작 가문의 가주 다비드 도노반, 예비 가주 러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 맥켄지 도노반만이 입을 수 있었고, 그 외의 기사들은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하위 버전인 검은색의 정복을 입게 되었다.

그레머가 맥켄지의 발밑에 주저앉아 그의 발에 신겨 있는 목이 낮은 구두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옆에 준비해 놓은 반둘리에를 열어 목이 긴 부츠를 꺼내 그의 발에 신기기 시작했다. 목이 긴 부츠는 맥켄지의 종아리 반까지 오는 검은색 가죽 부츠였다. 그레머는 섬세한 손길로 부츠의 끈을 동여매었다.

양 부츠를 모두 신기니 맥켄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에 그레머는 옷걸이에 단정히 걸어 놓은 흰색의 케이프를 들었다. 케이프는 정복과 마찬가지로 새하얬다. 케이프의 끝단은 금사로 고급스럽게 장식이 되어 있었고, 안감 또한 금색으로 되어 있었다.

그레머가 까치발을 들어 널따란 맥켄지의 어깨에 케이프를 걸쳐 주었다. 흰색의 케이프는 그의 무릎까지 닿았다.

그 모습을 본 그레머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도련님 키가 크셨군요.”

그레머의 말에 맥켄지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머는 맥켄지의 무시에도 제 딴에는 꽤 감격스러웠는지 말을 이었다.

“여섯 달 전에 치수를 잴 때는 케이프가 정강이까지 오도록 맞췄었는데, 이렇게 크시다니요.”

“…….”

“역시 바지 밑단을 길게 빼길 잘했습니다. …어쩐지 분명 바지를 복숭아뼈 밑까지 쟀었는데 밑단이 발목 위로 짧더군요. 저는 쟈델이 실수를 한 줄 알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도련님의 어깨와 소매도 조금 짧네요. 하지만 케이프로 가려져서 괜찮습니다.”

맥켄지는 자신의 케이프의 주름을 손으로 펴며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그레머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레머는 꾸밀 맛이 나는 제 주인의 외양에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어차피 바지 밑단은 부츠 때문에 보이지 않으니 괜찮군요. 오늘 미사가 끝나면 쟈델을 다시 불러 옷을 다시 맞춰야겠습니다.”

맥켄지가 끝없이 나불거리는 저 입에 총구를 처넣을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레머의 수다가 마무리되었다.

“자, 이제 이 금줄로 장식만 하면… 끝났습니다.”

“…….”

맥켄지는 케이프의 윗단추와 재킷의 왼쪽 주머니 고리에 체인을 걸고 저를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레머에 한숨을 쉬었다.

그레머는 정복을 완벽히 입혀 놓은 제 주인의 자태에 감탄을 내뱉었다. 아까 러트의 시녀 웬다에게 완성된 정복을 건네받았을 때 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순백의 색상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금사에 이딴 걸 어떻게 입나 싶었다. 육 개월 전 쟈델이 표본으로 가져온 정복보다 더욱 화려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표본을 본 샬로메가 바닥을 구르며 웃어댔었는데… 그러나 정복과 장신구를 완벽히 입혀 놓은 맥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이 아름다웠다.

허리까지 오는 플래티넘 골드의 머리카락은 항상 정갈히 묶어 놓았지만, 오늘은 제가 정성스럽게 빗겨 풀어 놓은 덕에 그가 걸을 때마다 마치 금사같이 물결쳤다. 그리고 하루 사이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핼쑥해진 그의 얼굴에서는 예의 장밋빛 홍조가 사라졌고 창백하리만치 하얬는데, 그게 또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귀한 가문의 영식이 아니라 얼핏 보면 영애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나 떡 벌어진 어깨와 평균을 웃도는 키가 그가 영식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제 주인의 미모는 모시는 자의 자랑거리와도 같았기에 그레머의 어깨가 절로 펴졌다.

노예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텐데. 분명 항상 우울하게 침전되어 있던 표정이 사라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뭐 마려운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맥켄지를 훔쳐보았을 것이다.

노예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므로 그가 맥켄지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그레머와 샬로메가 모를 수 없었다.

“…….”

그러다 그레머는 무의식적으로 노예의 생각을 하는 저에게 흠칫 놀랐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레머는 모르는 척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래.”

맥켄지는 얼굴에 거슬리게 붙는 머리칼을 거칠게 넘기며 문으로 향했다.

샬로메는 머리의 물기를 제대로 닦지 못한 채 빠른 걸음으로 예배실로 향했다. 그의 타는 것 같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록시 밖의 산지를 쥐잡듯 쑤셔도, 록시 안을 모조리 쏘다녀도 노예는 보이지 않았다. 그 성치 않은 발로는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는 주인의 명령대로 밖을 수색하며 생각했다.

누가 가져간 거 아니야? 그렇다면 주변 인물, 제일 의심이 가는 캔디스를 족쳐야 했는데 제 주인은 밖을 수색하라니 그 말을 어길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성과 없이 말을 타고 산을 수색하면서 제 동료인 티모시를 닦달해 록시 안을 수백 번을 수색했다. 하지만 노예의 검은색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점점 아파져 오는 머리에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이미 해는 중천으로 떠올랐다. 분명 빈손으로 덜렁덜렁 돌아간다면 제 아름다운 주인이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미사는 참여해야 했다. 샬로메의 모친은 제국 승전 미사에 참여하는 제 아들의 이름을 팔며 사업을 불렸다. 제 자식의 명예는 평민 상단의 가치를 하늘 끝까지 올려 줬다.

샬로메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중앙 교회의 입구를 서성였다. 다행히도 그의 자애롭고 아름다운 주인은 제 머리통을 날리지 않을 테니 눈치 보지 말고 들어오라 명했다.

…이 넓은 대륙에 숨어 있는 야만인들을 찾아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몹시 아팠지만, 자신의 대가리는 멀쩡했고 제 상단의 명예 또한 지켜졌다.

아마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영광스러운 날을 이대로 날릴 수는 없었다. 평민인 샬로메가 제국 중앙 교회에 입성을 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었다. 제국 중앙 교회는 제국의 귀족들만이 입성할 수 있는 신성한 곳이었다.

샬로메는 숙소에 들어가 재빨리 온몸을 씻었고 이날을 위해 맞춰 놓았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을 입었다. 캬, 기깔 난다. 잘생겼다. 이거 입고 나가면 영애들 뒤집어지겠다.

검은색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은 샬로메의 타오르는 불꽃 같은 머리칼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였으며, 그를 위해 맞춰진 옷은 그의 몸을 더욱 탄탄하고 멋지게 보이게 해 줬다.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샬로메는 문을 두드리며 얼른 출발하기를 종용하는 티모시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예배실로 향했다. 영광적인 날은 날씨까지 좋았다. 푸릇한 하늘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그들의 검은색 케이프를 살랑이게 만들었다.

샬로메와 티모시가 나오자 교회 정원에 대기 중이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하위 기사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제들의 숙소와 중앙 교회 본관은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그들이 본관으로 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고 온 샬로메와 티모시는 예배실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제 앞에 섰다. 사제는 자신의 앞에 선 검은 장정들을 보며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따라오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예배당의 뒤 복도를 거닐었다. 본관은 이미 제국의 귀족들과 특별히 초청을 받은 외국 귀족들로 꽉 찼다. 기다란 의자는 물론 구석구석 서 있는 치들도 있었다. 평소의 엄숙하며 조용한 예배실답지 않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도노반 가문의 기사들이 본관과 연결되어 있는 커다란 대기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번 전쟁에 큰 활약을 한 사격기사단의 단장과 제국 아카데미 사격 수업을 지휘하는 부단장 에이트, 그리고 하위 기사들 20명이 제국군의 정복을 입고 기립해 있었다.

샬로메와 티모시는 사격기사단 옆에 자리했다. 사격기사단은 고작 가문의 기사단이 자신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제국의 정식 기사단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번 제국 기사단에 몸담았던 샬로메는 자신을 재수 없게 노려보는 사격기사단 단장의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쳐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미스터 왕이 번다고 하지. 샬로메는 그들의 적의가 우스웠다.

그래 봤자 이 가문에서 주는 총기로 저 자리까지 올라간 놈들이었다. 그리고 사격술로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이 훨씬 뛰어나다.

직접적인 고성과 시비는 오가지 않았지만, 대열을 맞춰 선 제국 사격기사단과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사기사단의 기 싸움이 오갔다. 하지만 그 기 싸움은 눈이 녹듯 사라졌다.

“도련님!”

샬로메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기실로 입장하는 제 주인에게 뛰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의 손에 들린 육포를 본 개새끼와 다름이 없었다.

채신머리없이 주인에게 뛰어간 샬로메의 첫 의도는 단순히 새끼들아, 우리 제국의 실세, 작은 주인님이 오셨으니 나대지 말아라! 였으나 맥켄지의 앞에 도착해 그를 자세히 인식한 샬로메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처음 쟈델이 대표용 정복 표본이 담겨 있는 상자를 열었을 때 얼핏 보이는 색깔을 본 그가 그레머의 옆구리를 찌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와, 하얀색… 벌칙 아니야?

-조용히 하세요. 들려요.

그리고 완전히 상자에서 나온 정복을 보는 순간 배가 찢어져라 웃어댔다.

-저런 창피한 걸 어떻게 입어!? 

-조용히 하세요. 들린다구요.

“와….”

샬로메는 아름다운 것에 약했다.

평소 제 주인이 몹시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 같은 성격과는 별개로 그는 그 ‘서쪽의 맥켄지’였으니까. 하지만 벌칙 같은 하얀색 정복을 입은 맥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평균을 웃도는 기다란 키와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은 여성의 것과도 같았지만 툭 튀어나온 눈썹 뼈와 날카로운 눈매가 남성다웠다.

노예가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노예는 질리지도 않는지 평소에도 맥켄지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제 주인을 바라보던 곰 같은 남자였다. 맥켄지가 다리를 부러뜨린 이후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샬로메는 불현듯 떠오른 노예에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곧 뒤이어 눈에 들어오는 새하얀 장정 두 명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이도 안 어울리는군.’

그는 끔찍한 옷을 입은 채로 걸어 들어온 러트와 가주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 저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샬로메는 노련한 기사였으므로 그들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때였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한없이 가볍고 교양 없는 목소리에 맥켄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다비드가 저에게 곰살맞게 인사를 해 주는 캔디스에게 활짝 웃었다.

“오, 캔디스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네~ 맥켄지랑 아카데미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비드는 프럼의 아들 캔디스를 꽤 예뻐하는 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와포네 가문과 도노반 가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비즈니스 관계였고 무뚝뚝한 제 아들들과 달리 캔디스는 애교가 있었다.

하지만 프럼 스와포네는 싫었다. 다비드는 캔디스를 대할 때와 달리 뒤따라온 프럼에게 툭 하니 말을 걸었다.

“…프럼 공작 오랜만이군요.”

“…다비드 후작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이베아 제국의 실세 프럼 스와포네와 다비드 도노반이 상투적인 덕담을 나누고 있을 때 캔디스는 발걸음을 옮겨 창피하기 짝이 없는 하얀색 제복을 입은 맥켄지에게 다가갔다.

그의 초원 같은 푸른 눈이 맥켄지의 주변을 훑다가 그의 근처를 배회했다.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맥켄지는 제 앞으로 온 애쉬 블론드의 근사한 미남자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서쪽의 맥켄지 도노반’과 ‘동쪽의 캔디스 스와포네’의 재회였다.

맥켄지와 캔디스는 사석은 물론 공석에서도 엮이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베아의 네 손가락에 드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고, 사업상 동업관계인 탓에 필연적으로 공석은 물론 사석에서도 마주쳤다.

그때마다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의 반경 200m 안에 들지 않게끔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할 때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다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떻게든 상대방의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거는 모습은 귀족들 사이에서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들은 서로를 탐색하듯 응시했고 서로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서로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서쪽의 맥켄지와 동쪽의 캔디스는 이베아 최고 가문의 영식들인 만큼 앙숙인 그들의 관계 또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이베아 제국 소속 사격기사단은 모조리 귀족 가문의 영식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사기사단과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사기사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는 인사가 싸움이라고 했다. 신성한 날에 번질 개싸움을 기대하며 겉으로는 점잔을 빼는 고고한 기사님마저 아닌 척 이베아 제국 최고 앙숙들의 싸움을 보기 위해 열심히 곁눈질했다.

맥켄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캔디스의 표정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캔디스의 재수 없는 미소도, 자신감에 넘치는 분위기도,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 캔디스가 맥켄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의외네.”

“뭐가?”

맥켄지의 대꾸에 캔디스는 제 앞에 선 아비를 의식이라도 하는 듯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말했다.

“너 하는 꼬락서니 보면 노예를 데리고 올 줄 알았는데.”

캔디스의 말에 맑은 날의 호수를 닮은 맥켄지의 파란색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그런 맥켄지를 곁눈질로 바라보던 캔디스가 무언가를 기대하듯 피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놓고 온 것 같지는 않던데.”

혹시 몰라서 네 독채에 가 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캔디스의 행동에 안 그래도 굳어지던 맥켄지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캔디스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그때 대기실 문 앞에 대기 중이던 사제가 외쳤다.

“입장하셔야 합니다!”

황제는 스와포네 가문과 도노반 가문의 서열을 정리하지 못했다. 애초에 절대왕정이 아니던 왕국이었다. 스와포네 공작 가문은 이베아 건국 초기부터 막강한 힘과 돈으로 왕정을 찍어 누르던 양아치 같은 가문이었고, 도노반 가문은 돈과 무기를 죽창처럼 휘두르며 위로 치고 올라와 왕정과 공작 가문을 위협했다. 그에 황제는 까딱하면 내란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가문의 입장 순서를 이례적으로 동시 입장으로 바꾸었다.

“입장-!”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며 사제들이 일렬로 서 기도를 하듯 양손을 맞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에 선두에 선 두 가문의 가주들이 동시에 발걸음을 옮겼다. 캔디스와 맥켄지는 기 싸움을 멈추고 정면을 바라보며 예배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본관의 입구는 몹시 크고 넓어 두 가문이 동시에 입장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들이 본관에 들어서자 웅장한 오르간 음이 시작됐다. 마치 천당에 온 것 같은 경건하고 웅장한 음악이 그들의 행진을 더욱 권위가 있어 보이게 만들었다.

제국의 기둥 스와포네 공작 가문과 도노반 후작 가문의 입장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예배당을 빼곡히 채운 귀족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미소를 띠며 걷고 있던 캔디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버렸니?”

“…….”

캔디스의 잔뜩 고양된 목소리에 앞을 보며 걷고 있던 맥켄지는 겨우 걸치고 있던 비즈니스 미소를 결국 일그러뜨렸다. 그는 어렴풋이 캔디스가 벌인 짓이 아니라는 것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하는 것과 명확한 진실의 크기는 달랐다.

스와포네가 아니라면 노예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록시 내부도 아니고 록시 외부도 아니다. 샬로메는 나사가 하나 빠진 것처럼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는 평민임에도 제국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한 놈이었고 그의 추적술은 뛰어난 편이었다.

노예 스스로 도망간 것이 맞다…. 제대로 걷지도, 뛰지도 못하는 노예가? 그렇게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나? 대체 어떻게?

맥켄지의 눈이 분노와 의문에 엉망으로 일렁였다. 하지만 그런 맥켄지의 표정을 보지 못한 캔디스는 앞만을 바라보며 무언가에 도취된 듯 말했다.

“그렇지? 버렸지? 아무리 너라도 함부로 굴러먹은 노예를 끼고 있을 리 없어.”

“…네가….”

“뭐?”

캔디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맥켄지의 목소리에 그제야 옆을 바라보았다.

“……!”

“…….”

캔디스는 저런 얼빠진 표정의 맥켄지를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그가 옆에서 얼이 빠진 채 앞을 보며 걷고 있는 맥켄지의 잘빠진 옆선을 응시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뭐?”

“…….”

“새끼야, 말을….”

“네가 아니라면 노예는 어디에 있는 거지?”

캔디스는 청천벽력 같은 맥켄지의 말에 품위도 잊고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햇빛이 내리쫴 생명력이 넘치는 초원 같은 그의 초록색 눈이 혼란에 뒤덮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캔디스가 부정하듯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좆같은 상상을 황급히 지워냈다. 머리로 피가 몰려 순간 건조해진 눈알에 캔디스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우우웅- 그의 귓구멍으로 묵직한 오르간 소리가 내리꽂혀 뇌리를 뒤흔들었다. 바로 전에만 해도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처럼 울리는 신성한 오르간 소리가 한순간에 절망의 소음으로 바뀌었다. 그가 부정하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개수작 마. 너 나한테….”

“…….”

여덟 살, 아니 아홉 살부터 놈과 항상 부딪혔다. 보기 싫어도 정기적으로 가지는 가문의 사업 때문에 질리도록 봐 왔다. 놈을 알게 된 지 십일 년이다. 캔디스는 근 십일 년 동안 맥켄지의 저런 표정은 보지 못했다.

지금 연기하는 거지? 그가 현실을 부정하듯 다시 고개를 돌려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아는 도노반은 연기로라도 저딴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래, 그는 맥켄지가 노예를 버리기를 열렬히 원했다. 그 자존심에 본인의 허락도 없이 뒷구멍을 대 주고 다닌 노예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도노반에게 폭탄 발언을 하고 튀었을 때 노예의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을 들었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성질머리로는 바로 죽이지 않고 발모가지나 손모가지 하나 자르고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죽이는 것보다 살아 있느니만 못한 것이 더욱 잔인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염탐을 마친 비아가 말하기를, 노예의 사지는 멀쩡했지만 도노반이 발모가지를 아예 작살을 내 노예는 제대로 걷지 못해 재활 치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절름발이가 된 노예지만 캔디스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노예는 평생 제 침대에 누워 자신이 올 때까지 침대를 데워 놓고 있을 거니까.

이제 도노반이 절름발이가 된 노예에 질려 버리기만 하면 됐다. 그래서 캔디스는 아예 가문에서 기사 두어 명을 데려와 도노반의 독채에 심어 놓고 내쫓겨질 노예를 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뜻밖에 오래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록시에 데리고 갔다고 했다.

기사를 더 붙여 록시에 있을 놈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하고 싶었지만, 록시에 이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이 도착해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감시로 붙인 기사들을 회수했다. 놈들은 뛰어난 사기사단들이었고 괜히 뒤를 밟고 있는 것을 들키면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캔디스는 괜찮았다. 네 근처에 버리기만 해. 너희 영지든, 록시 시내 바닥이든, 어떻게든 알아내서 가져가면 되니까. 버림받아 펑펑 울고 있을 노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노반의 표정을, 성깔을 보면 저놈도 노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저놈의 집안 놈들도 본인의 사기사단 뺨치도록 특출난 정예 기사 놈들일 터인데 지금껏 못 찾았단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다. 저 새끼도 못 찾은 걸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록시의 노예 상인은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놈들은 노예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가축 취급하며 길들인다는 명목으로 여성 노예는 성을 착취해 정신을 찢어 놓았으며 말을 듣지 않는 남성 노예는 죽지 않을 만큼 패거나 신체를 절단해 괴물 쇼로 보내 버렸다. 또 놈들은 은밀하여 제국 기사단 또한 놈들의 본거지를 알지 못했다.

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싸고돌던 애를 데리고 와 놓고 잃어버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애를 밖에 내버려 둔 거야? 사람에 휩쓸려서 깔려 죽으면 어쩌려고? 록시에 노예 상인이 얼마나 많은데, 놈들이 얼마나 은밀하고 악랄한데?

캔디스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병신 새끼, 지금 네 노예를 잃어버린 거냐고, 노예 어디에 있느냐고, 어디에서 잃어버렸느냐고, 제 노예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새끼는 주인 자격이 없다고, 내가 가져갈 거라고,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봤고 어디까지 찾아봤느냐고 악을 지르고 싶었다.

두 가주들은 예배실 앞 재단에 나란히 선 황제와 성하의 앞에 서 나란히 고개를 숙였고 맥켄지와 캔디스 또한 고개를 숙인 후 지정된 곳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뒤따라 온 사격기사단은 반대편의 지정된 공간에 각 잡아 섰다.

이곳은 제국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옆에는 황제와 성하가 있었고 사방이 뚫려 수백 개의 눈이 아닌 척 맥켄지와 캔디스를 주시했다. 캔디스는 참으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캔디스가 표정만은 미소를 지은 채 앞을 보며 맥켄지에게 들릴 만큼만 말했다.

“송충이도 너보다는 쓸모가 있을 거다, 병신 새끼야. 그렇게 싸고돌더만 애를 잃어버려?”

캔디스의 폭언에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던 맥켄지의 목에 핏대가 솟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좆같은데 좆같은 새끼가 옆에서 지랄을 해대니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그에 맥켄지가 마찬가지로 미소를 띠며 캔디스에게 남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암울한 미래나 걱정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캔디스는 맥켄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쉴 새 없이 쏘아댔다.

“꼬라지 보니까 존나 찾았는데도 안 보이는 거지? 이야~ 대단하신 병신 새끼.”

“뭐,”

맥켄지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고개를 캔디스 쪽으로 돌리자 캔디스도 고개를 돌려 그를 찢어 죽일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제대로 지켰어야지, 록시에 노예 상인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은밀한지 몰라? 새끼야, 제국 기사단도 여태까지 놈들 근거지를 못 찾아냈어요. …너자가 만약 그 새끼들한테 끌려갔으면 어쩔 건데? 어떻게 찾아낼 건데?”

“…….”

“네가 지금 여기에서 미사 드릴 때냐? 그렇게 싸고돌아서 존나 아끼는 줄 알았지. 그런데 애 다리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캔디스가 칼 같은 혀로 맥켄지를 찢어 놓고 있을 때 아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함성이 외쳐졌다.

귀족들은 채신머리없이 워린 도노반의 이름을 외쳤다. 그에 서로를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던 맥켄지와 캔디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들의 맞은편에서 검은색의 케이프를 휘날리며 워린 도노반이 제9대대 기사들을 이끌고 나른한 표정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물론 사제들도 제국의 영웅 워린을 무언가에 홀린 듯 바라보았다. 9대대 기사단을 이끌고 나른한 걸음걸이로 입장하는 워린은 검은색의 도노반 리피팅 암즈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은 워린이 제국 기사단에 속해 있지 않고 도노반 후작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황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륙 전쟁을 제안하고 승리로 이끌게 해 준 도노반 가문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도노반 후작 가문은 제국의 네 번째 공작 가문이 될 것이었다.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권세가 나날이 높아졌고 사사건건 황제가 하는 일에 개입하며 딴지를 걸어댔다. 이에 황제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는 도노반 후작 가문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황제는 감히 제 기사단에게 후작 가문의 사기사단 정복을 입히겠다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거래로 황제는 전쟁 후에 추진할 사업의 후원 가문을 도노반 가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제국의 주춧돌인 도노반 가문이 후원하는 사업에 다른 귀족들이 불나방처럼 너도나도 후원을 해대며 황제의 입지를 견고히 쌓아 줄 것이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이 없었다면 스와포네 가문이 황제의 권세가 높아질 것을 견제해 그 사업을 아예 추진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황제는 드디어 사사건건 딴지를 걸며 견제를 해대는 스와포네 가문을 저지할 잘 벼려진 칼날을 손에 얻은 것이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을 입은 워린의 모습은 그 자리에 있는 수많은 귀족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이제 미사가 끝나면 저 새털 같은 주둥이를 가진 귀족들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귀족들에게 말을 옮길 것이다.

돈으로 작위를 산 근본 없는 천한 가문. 뒤에서 은밀히 무시했던 도노반 후작 가문을 더는 무시하지 못한다. 황제가 도노반 가문을 비호한다. 제국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워린이 저를 두려운 눈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체 높은 나리들을 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그에 장내에 있던 귀족들은 물론 성하까지 꿈을 꾸는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평균을 웃도는 키와 야리야리한 체형을 가진 그였지만 딱 맞는 정복의 핏은 의외로 탄탄했다. 예배실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오는 햇빛이 그의 밝은색의 금발을 벌꿀처럼 달콤하게 빛나게 만들어 줬다. 곱실거리는 짧은 금발은 그가 걸을 때마다 춤을 추듯 움직였다. 거기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홍안이 박혀 있는 눈은 애교 있게 휘어 있었다. 표정이 없을 때는 굉장한 미남자였지만 픽 웃으면 여인처럼 달콤하고 섬세하게 보였다.

그가 황제와 성하 앞에 기립해 거수경례를 했다. 그에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귀족들의 입에서 교양 없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모든 이들이 전쟁 영웅을 보며 열광했다.

맥켄지와 캔디스만 빼고.

승전미사는 물 흐르듯 이루어졌다. 러트는 전쟁 후견인 대표로 맥켄지가 밤을 꼬박 새워 다시 작성한 감사 기도문과 황제에게 바치는 감사 기도를 떠듬떠듬 읊었고 다비드는 웃는 낯으로 주먹을 쥐었다.

다비드의 손바닥에 피가 맺혔다. 기도문을 읊던 러트가 제 아비의 분노를 보고 더욱 긴장해 아까보다 더 형편없이 낭독했다. 입을 파르르 떨며 러트를 바라보던 프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다비드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최악의 낭독 시간이 끝나고 황제의 차례가 되었다. 뒤에서 맥켄지가 칙서를 들고 성하에게 건넸고, 성하는 칙서를 공손히 받아들고 축복 기도를 했다.

기도는 오 분 내외로 엄숙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성하가 축복을 마친 칙서를 황제에게 건넸다. 황제는 돌돌 말린 칙서를 손에 쥐고 엄숙하게 말했다.

“전쟁 영웅 워린 에르베는 앞으로 나오라.”

“예.”

사격기사단 바로 옆에 대열을 맞춰 서 있던 워린이 황제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에 황제가 손에 들린 칙서를 워린의 머리에 한 번 대고 오른쪽 어깨, 왼쪽 어깨에 가볍게 대었다. 그 모습에 예배실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엄숙해졌다.

황제의 쪼그라든 입술이 열리며 말했다.

“워린 에르베는 이 시간부터 도노반 후작 가문의 일원이 된다. 이는 워린 에르베의 핏줄에 섞인 도노반의 피를 이베아 제국의 황제 나 베타미 글로리 이베아가 보증한다. 워린 도노반은 일어나 짐이 내리는 칙서를 받으라.”

공손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어 무릎을 꿇고 있던 워린이 천천히 일어났다. 황제가 불꽃처럼 일렁이는 워린의 홍안을 홀린 듯 바라보며 칙서를 건넸다.

워린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칙서를 받아들였다. 그에 황제가 말했다.

“모두 워린 도노반에게 축복의 박수를.”

워린 에르베가 워린 도노반으로 정식으로 명명된 순간이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에 황제가 상석에 앉아 말했다.

“그래, 전쟁 영웅 워린 도노반. 제국에 영광을 가져다주어 고맙다.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짐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겠다.”

황제의 말에 박수 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장내에 있던 수백 개의 눈동자가 워린에게 향했다.

엄청난 부를 원할까? 아니면 아름다운 황녀? 아니면 영지?

저마다 워린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그의 잘생긴 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워린의 입에서 나온 청은 너무도 하잘것없어 그들의 진을 빠지게 하였다.

“저는 제 새로운 가족이 된 도노반 성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의 말에 황제 또한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늠해 보았지만, 단호하고 즐거워 보이는 워린의 표정에 황제가 눈썹을 까딱이며 다시 말했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하라. 짐은 무엇이든 경에게 해 줄 수 있노라.”

하지만 워린의 답은 같았다. 워린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이루어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물건이나 재화는 받은 그 순간만 반짝 빛나며 그 의미를 퇴색시킵니다.”

“…….”

“하지만 핏줄은 다르지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방계 혈족인 탓에 제 뿌리의 근원인 도노반 후작 가문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고 드디어 후작 가문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어렸던 날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후작 성에 머물 수 있다면 저의 자아를 더욱 단단히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허어….”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워린의 말에는 사람을 홀리는 매력이 있었다. 귀족들은 검소하고 순종적인 워린의 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와 다비드, 러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호탕하게 웃으며 옆에 서 있던 다비드에게 말했다.

“들었는가? 자네의 충실한 세 번째 아들의 말을? 어떠한가, 셋째 아들의 청을 들어주겠는가?”

그에 다비드 또한 호탕하게 웃으며 수긍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러트는 호탕히 웃으며 좋아하는 제 아비를 보고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고 워린을 바라보며 무엇인가 중얼거렸다. 워린은 그 모습을 가볍게 넘기며 허리를 숙였다.

바람이 돌연 세게 불었다. 환기를 위해 열어 놓았던 제일 위에 있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사이로 돌풍이 불어와 사람들의 머리를 크게 흩트렸다. 영광적인 날 재미있는 연출이라며 황제가 웃었다.

황제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전쟁 영웅이 퍽 마음에 들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다시 미사를 재개해야 했지만 황제가 다리를 꼬며 지금껏 궁금했던 것들을 워린에게 물었다.

“한 야만인 부족을 획기적인 방법으로 몰살시켰다고 하던데, 그게 무엇인가.”

황제의 물음에 워린이 나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균입니다.”

“균?”

“네. 간단합니다. 역병이 돌게 하였습니다. 우리 왕국… 아니 제국에 오 년 전 크게 돌았던 역병 기억나십니까? 온몸이 썩어 가는 병 말입니다. 그 병 때문에 제국은 큰 피해를 보았었고 이 년 후에 겨우 해독제를 만들었지요.”

“…그랬었지.”

그 병은 천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온몸이 썩어들고 종내에는 목숨을 잃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별안간 불어닥친 역병은 당시 왕국이었던 이베아를 초토화했고 안 그래도 위태위태하던 왕권을 더욱 흔들리게 하였다.

왕이었던 베타미는 그때 당시 신에게 기도하지 않고 닥터들을 쥐어짜 댔다. 신앙심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신에게 기도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지 않고 온갖 연구 끝에 닥터들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해독제를 만들었고 흔들리던 왕권을 다시 견고히 쌓았다. 그리고 닥터 양성에 지지부진했던 정책을 보완해 기사단만큼이나 닥터 양성에 힘썼다.

황제는 아득히 떠오르는 저주 같았던 해에 이를 갈았다.

그에 워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우리도 그때 겨우 해독제를 만들어 살아남았는데, 원주민 따위가 그 병에 대한 면역력과 해독제가 있을 리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제국 내에 남아 있는 역병 환자가 쓰고 있던 담요를 가져와 야만인 부족의 본거지에 버렸지요.”

더럽고 치졸한 방법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워린에 황제가 질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위태위태하던 자신의 정권을 그가 견고히 쌓다 못해 위로 올려 준 은인이었다.

황제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경의 머리는 아주 뛰어나군. 그 누가 병균을 이용한 전쟁을 하겠는가!”

황제의 치켜세움에 워린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렸던 시절 친우에게 들었던 방법이었습니다.”

“대단한 친우를 두었군그래. 그 친우가 누구였나?”

황제의 물음에 워린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그에 황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 혀를 차며 떠오른 것을 다시 물었다.

“짐은 야만인을 본 적이 없다. 정말 악마처럼 이마에 뿔이 달렸고 피는 초록색이었나?”

황제의 물음에 귀족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높으신 분의 물음에 워린이 곁눈질로 딱딱하게 굳은 맥켄지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시간의 정적 뒤 워린의 입이 열렸다.

“보시겠습니까?”

“뭐?”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에 워린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만인이 저에게 있습니다.”

“…!”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캔디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워린은 그런 영식들을 무시한 채로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1대대를 몰살시키고 저와 1년 동안 징그럽게 싸워대던 야만인들의 알파,”

“기억나네! 다른 야만인들을 모조리 몰살시켰던 자네가 1년 동안 싸웠던….”

“네, 그 야만인들의 우두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왔지요.”

워린의 말에 황제가 크게 흥미를 느끼며 외쳤다.

“어서 보이라!”

황제의 말에 레너드가 한숨을 쉬며 고갯짓을 했다. 레너드의 고갯짓에 기사 한 명이 예배당의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에 미리 대기 중이던 해리가 쇠사슬을 끌고 예배당 안으로 입성했다.

자그락거리는 소리에 수백 개의 눈이,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제 주인을 말리는 샬로메가, 그런 샬로메에 보안상 리볼버를 반납해 버려 텅 빈 허리를 더듬거리던 맥켄지가, 비아가 혼신의 힘으로 부여잡고 있는 캔디스가,

‘그것’을 보게 되었다.

덩치가 몹시 큰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평민 남성처럼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머리카락이 짧은 탓에 쭉 뻗은 그의 목이 더욱 굵어 보였고 그의 목에 둘린 빨간색의 개 목줄이 돋보였다.

해리가 따라오기를 거부하는 야만인의 개목걸이에 걸린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검은색의 셔츠는 헐렁함에도 남자의 두툼한 팔뚝과 커다란 가슴을 숨기지 못했다. 남자는 걷는 게 힘든 듯 다리를 절었는데, 해리가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탓에 남자는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렇게나 접힌 남자의 다리는 매우 길었다. 검은색의 헐렁한 긴 바지 밑이 짧은 탓에 몸보다 얇은 발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복숭아뼈가 불거진 발목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매우 창백했는데, 오른쪽 발목에 마치 뱀처럼 붉은 자국이 휘감겨 있었다.

“아….”

잔뜩 움츠려진 목소리가 적막한 예배실을 울렸다. 해리가 귀찮다는 듯 쇠 목줄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주저앉은 남자의 팔을 함부로 잡아올려 질질 끌었다.

잘랑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남자가 질질 끌려오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해리는 남자를 워린의 옆에 던지듯 밀어 넣었다. 남자가 힘없이 워린의 옆에 쓰러졌다.

“자, 이게…”

워린이 해리에게 쇠사슬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짧은 머리채를 잡아 끌어올렸다.

밤하늘을 빼다 박은 것 같이 까만 눈이 두려움에 침전되어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흑발을 가진 우울한 인상의 미남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워린이 혼이 빠진 채로 야만인을 바라보는 맥켄지를 보며 말했다.

“제 전리품입니다.”

맥켄지의 눈이 분노로 뒤집혔다. 자신을 말리려는 샬로메와 티모시를 떼어내어 노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다시 한 번 돌풍이 불어닥쳤다.

“꺄아아악!”

“후… 후작님!”

러트의 외침에, 귀족들의 비명에, 맥켄지가 고개를 돌려 제 아비를 바라보았다. 

“…….”

아비의 입에서 피가 울컥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제 아비는 자신을 주시하다 힘없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이 튀어나왔다. 러트가 제 아비를 붙들고 고함을 질렀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예배실에서 대기 중이던 사격기사단이 황제를 지키듯 대열을 갖췄으며,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들이 재빨리 대열을 맞춰 제 주인들을 지키듯 감쌌다. 9대대 기사단은 창문과 예배당의 입구를 막아섰고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의 기사단은 제 주인과 예비 가주를 지키듯 감쌌다.

난리가 난 와중에 맥켄지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제 아비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바닥에 웅크려 덜덜 떨고 있는 노예를 응시했다. 맥켄지의 눈이 노예의 목에 둘린 빨간 개목줄을 보며 양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워린은 그런 맥켄지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야만인을 제 품에 안았다.

있는 대로 피를 토해내던 가주는 눈을 까뒤집은 채 미동이 없었고, 숨은 붙어 있었으나 무언가에 중독이 된 듯 얼굴이 시꺼메져 있었다. 다행히 다비드가 졸도를 한 곳은 신전 안이었다.

러트는 다비드를 일으키는 기사들을 모두 물리고 직접 제 아비를 업어 어느샌가 뛰어온 레너드가 깔아 놓은 망토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체력 때문에 이제는 직접 기도를 내리지 않는 성하였지만 쓰러진 인물이 남달랐다.

성하는 성치 않은 무릎을 꿇고 쪼글쪼글한 손으로 다비드의 양손을 잡고 다비드에게 기도를 내리기 시작했다.

성하는 성하였는지 일반 사제가 기도를 드리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성하가 기도를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드의 미약한 숨결이 조금씩 안정이 되었으며 까맣게 죽어 가던 피부도 조금씩 제 혈색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비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승전미사의 주인공인 가문에 일어난 참극이었다. 뱀 같은 주둥이를 가진 귀족들이 얼른 자리를 떠 제가 본 광경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곧 작위의 승격이 있을 가문이었다. 평민이었지만 엄청난 천재성으로 ‘머스킷’이라는 것을 발견하여 떼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무려 후작 작위를 샀다. 거기에 대를 거듭해 개발하는 총기의 종류는 벌써 10개가 넘었고 이베아 왕국을 이베아 제국으로 칭제를 할 수 있게 해 준 가문이었다.

곧 있을 이베아 제국의 네 번째 공작 가문이 될 가주가 명을 다해간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예비 가주인 러트는 땅을 구르며 제 아비에게 눈을 뜨시라고 외쳐 댔고 차남이자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 맥켄지는 정신이 빠졌는지 한 곳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타미 황제는 정신이 빠져 있는 젊은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였으니. 그때였다. 가만히 한쪽만을 멀거니 바라보던 차남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기사 티모시 펜실베흐는 속히 팀들과 함께 이번 사건을 조사하여라.”

“네.”

“그레머는 속히 움직여 교회 기숙사 안에 남아 있는 가문의 식솔들을 집합시켜 이번 사건에 대해 알리고 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네.”

“아버지는 지병이 달리 없으신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각혈하시며 쓰러진 경위에 의심이 간다. 아까 돌풍이 불었지?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 중 저주라든가 암수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는가?”

적막한 예배실에 맥켄지의 청아하지만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멍청하니 한 곳만을 바라보는 이 같지 않은 총명함이었다.

맥켄지의 말투는 평소와 달랐다. 차갑고 냉소적으로 말을 하는 맥켄지의 목소리에 너자의 몸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귀족의 언어는 상황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는 너자에게 맥켄지의 권위 있는 목소리와 어투는 독이었다. 너자는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워린은 품에 안은 제 야만인의 몸이 병자처럼 떨리는 것이 거슬렸다. 내가 있는데 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너는 내 것인데? 저놈이 감히 내 거에 손을 댈 수 있을 것 같아?

그에 개 목줄을 쥐고 있던 워린이 말했다.

“9대대 중 해리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의 집안이 대대로 암수를 행했지요. 저희 9대대에도 수사권을 나누어 주신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 알아내겠습니다.”

전쟁 영웅의 발언에 장내에 있던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의 흥미를 끄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실질적인 권력자 차남 맥켄지와 굴러들어 온 돌 전쟁 영웅 워린의 공조 수사는 만약 다비드가 사망할 경우 이번 수사로 가문의 권력 분배가 새롭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워린의 발언에 맥켄지의 깊게 가라앉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드디어 너자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되었다고 하려고 할 때 바닥을 구르고 있던 러트가 일어나 재빨리 외쳤다.

“전쟁 영웅이 도와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도노반 후작 가문의 예비 가주이자 현 가주님의 대행인 나 러트 도노반이 승인한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여 제 존재를 피력하려는 러트에, 엄연히 차남인 자신이 있음에도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일을 추진하는 장남에 맥켄지가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처럼 굴러다니고 있으라고, 너는 하등 쓸모가 없다며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괜히 작위 승격이 있기도 전에 형제들끼리 구설수에 오를 수는 없었다. 처리해도 은밀히 해야 했다. 맥켄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서릿발같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을 때, 뒤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프럼 스와포네가 맥켄지의 옆에 섰다.

맥켄지가 또다시 눈알만 굴려 프럼을 바라보았다. 그에 프럼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일어난 일은 몹시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다. 도노반 가문은 스와포네 가문과 형제 같은 가문이다. 한쪽 가문이 없었다면 지금의 가문이 없었겠지. 공생의 관계인 가문이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를 돕지 않으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

“내 후계인 캔디스 스와포네가 맥켄지 도노반이 지휘하는 사수사반에 동참하여 도움을 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우렁차게 외치는 러트를 눈으로 흘긴 프럼이 말했다.

“역시 맥켄지가 의젓하구나. 한 가문을, 아니 한 기업을 짊어진 대표답다.”

“…….”

맥켄지는 뜬금없이 자신을 띄우는 프럼에 무슨 수작이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역시나 보는 눈이 많았다. 그는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고분고분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황제 베타미가 말했다.

“경들의 아름다운 우애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군. 만약 이번 사건이 다비드의 천명이 다하여 일어난 촌극이 아니라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나 베타미 글로리 이베아가 책임지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황제의 엄숙한 말에 웅성거리던 장내가 엄숙해졌다. 그에 황제가 말을 이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의 차남 맥켄지 도노반, 어렸을 때부터는 물론 지금도 계속 자네를 주시하고 있노라. 지금과 같은 총명함을 잃지 말기를.”

맥켄지가 황제의 말에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에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상황을 보게 해 준 답례였다.

웅장한 예배실에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려왔고 황제는 아쉽지만 승전미사는 이것으로 마친다 공표했다. 사격기사단은 예배당 문 앞에 서서 초대된 내빈들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그들의 소지품을 검사했다.

본래 귀족들이었다면 감히 기사 따위가 제 몸을 수색하느냐며 난리를 피웠겠지만 ‘그’ 다비드 도노반 암살 미수 사건이었다. 그들은 조신히 조사를 받았다.

맥켄지는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파악하고 아직도 주제도 모르고 뻔뻔하게 서 있는 워린에게 다가갔다. 샬로메가 재빨리 맥켄지의 뒤를 따랐다. 혹시 모를 제 주인의 폭주를 막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샬로메의 눈도 워린의 손에 꼭 붙들려 있는 노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네가 그 새끼 옆에 왜 있는 거야! 노예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푹 꺼진 노예의 눈이 발그스레한 게 펑펑 운 듯싶었다.

노예는 워린의 팔에 붙들려 있음에도 결코 그의 품 안에 안기지 않으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가 버둥거릴 때마다 워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노예의 목에 걸린 목줄이 강하게 당겨졌다.

맥켄지가 그 모습을 보며 최대한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황제가 바로 옆에 있었다. 비록 꼭두각시에 불과한 황제였지만 그는 아직 정정했으며 이지가 트여 있었다. 괜히 눈 밖에 나면 지금껏 이루었던 것을 모두 잃을 여지가 있었다.

그가 워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게… 왜 너한테 있는 거지?”

맥켄지의 말에 워린이 배시시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은 몹시 상큼한 웃음이었다. 그에 맥켄지의 배알이 더욱 꼴려 이를 악물게 되었다. 워린이 그런 맥켄지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작은 도련님.”

“경은 머리가 몹시 안 좋은가 보군. 방금 내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칼 같은 맥켄지의 말에 워린이 픽 웃으며 되받아쳤다.

“네, 저는 멍청하기가 짝이 없어 기사가 된 몸입니다. 기사는 그저 싸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작은 도련님처럼 머리를 굴릴 줄 모릅니다.”

“자네 머리 괜찮나? 지능이 지렁이 못지않아.”

“가주님의 일은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제가 힘이 닿는 대로….”

“그만.”

냉정하게 잘라먹는 맥켄지의 말에 워린의 입이 유순하게 닫혔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그 노예는 내 거야.”

“이게 왜 도련님의 것이죠? 제가 잡아 오고 제 성에 있었습니다. 제 전리품입니다.”

“아니, 자네가 말했잖나. 내 가문에 귀속되고 싶다며. 내 가문에 귀속되어 있는 너의 물건은 모두 내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내 것이다.”

“아니요,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

맥켄지는 단호히 말하는 워린의 말에 답하지 않고 워린을 응시했다. 그에 워린의 이가 빠득 갈렸다.

네가 뭐 그리 잘났는데? 잘난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 빼고 너랑 나랑 다른 게 뭐가 있는데? 내 피에도 네 조상의 피가 섞여 있어. 네가 그런 눈으로 나를 볼 권리도 없고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할 권리도 없다.

날 때부터 권위를 가진 새끼의 자신감이 워린의 역린을 건드렸다.

되바라지게 자신은 대가리가 몹시 나쁘다고 말한 것과는 다르게 워린은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록시에 들어오기 전 그가 구상한 계획에는 아직은 맥켄지와 척을 질 이유가 없어 표면상이라도 유연한 관계를 맺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록시에 입성을 하고 도난당한 야만인을 주워 행렬을 하며 처음 겪은 사람들의 관심과 권력의 짜릿함에 그의 계획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야만인의 걸레 같은 몸을 취한 순간, 그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워린의 수정된 계획을 들은 레너드가 게거품을 물고 안 된다며 자살 행위라며 제발 고정하시라 만류를 했지만, 그는 워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워린은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정이었다.

워린은 아닌 척 자신을 노려보는 맥켄지를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한 기업의 차석 대표라는 놈이 이렇게 눈에 띄게 동요하면 어쩌란 거야? 전쟁터였다면 놈의 속은 단번에 간파가 되어 목이 따였을 것이다.

사실 맥켄지의 동요는 그를 십여 년간 지켜보았던 캔디스도, 그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보필하는 그레머와 샬로메도, 수없이 그와 몸을 섞었던 너자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뛰어난 기사이며 오랫동안 집착 수준으로 그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워린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유순’하고, ‘순종’적인 ‘전쟁 영웅’ 워린 도노반은 도노반 가문의 적자 맥켄지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에서부터 솟아오르는 호승심과 맥켄지의 눈치를 살살 보며 제 품을 벗어나려는 야만인이 ‘전쟁 영웅 워린 도노반’의 가면에 금이 가게 하였다.

‘전쟁 영웅 워린 도노반’의 가면 속에 있던 ‘열등감 덩어리 워린 에르베’의 맨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맥켄지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던 워린의 얼굴이 조금씩 변해 가기 시작했다. 백치처럼 예쁘장한 미소가 서서히 오만한 사자처럼 나른한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너무도 서서히 자연스럽게 바뀌어서 범인凡人은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선스러운 예배당이지만 워린과 맥켄지 사이의 시간은 마치 멈춘 것 같았다. 그들은 주변의 혼잡함에 전혀 개의치 않고 서로를 탐색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맥켄지는 서서히 바뀌는 워린의 표정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바뀐 워린의 표정과 분위기에 맥켄지가 저 모습이 워린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역시 상종 못 할 음침한 놈이었다. 어쩌면 캔디스보다….

“작은 도련님께서, 함부로 굴리셨더군요.”

넌지시 건네진 워린의 말에 맥켄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워린이 천연덕스럽게 홍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하십니다. 제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

워린이 왼손에 쥔 목줄을 갑작스럽게 자신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아! 너자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너자에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이에 어느새 워린의 앞에 다가온 레너드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샬로메는 감히 제 주인의 앞을 막아선 잿빛 머리의 기사에 분노해 허리춤 깊은 곳에 은밀히 숨겨 놓은 단도를 뽑을 자세를 취하며 레너드의 앞으로 대립하듯 섰다. 둘이 입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 케이프가 희극처럼 흔들렸다. 둘은 서로를 응시하며 제 주인이 내릴 명령에 대기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워린이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무엇이.”

워린은 저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분노에, 괴로움에, 절망에 침전되는 게 보고 싶었다. 워린이 모르는 척 오른손을 들어 너자의 등을 은밀히 쓸어 올렸다. 기다란 손끝으로 마치 애무를 하듯 쓰다듬는 워린의 손길에 너자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반응을 하지 않았다.

마치 닳고 닳은 남창이 자존심을 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에 워린의 입가에 잔뜩 고양된 미소가 일기 시작했다.

맥켄지는 알까? 어제 얇은 문 하나를 두고 제 노예가 걸레 같은 몸을 열어 제 자지를 받아들였던 것을? 맥켄지에게 들키기 싫어 손목을 물어뜯으면서 신음을 삼키던 야만인을? 자신과 야만인이 맥켄지를 기만했던 것을, 알까?

워린의 입이 열릴락 말락 하며 잔뜩 애를 태우는 탓에 맥켄지가 참지 못하고 결국 입을 열었다.

“새끼야, 말을 하려면 똑바로….”

“어제,”

워린의 의미심장한 운에 맥켄지의 보석같이 빛나는 푸른 동공이 조여들었다. 이제 워린은 저 호수에 돌을 던질 것이다.

“아… 안 돼….”

지금껏 잔뜩 움츠러들어 벌벌 떨고 있던 너자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줄곧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너자의 하얀 머리가 번뜩 들렸다.

야만인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돼요…. 애처롭게 떨리는 야만인의 목소리에 워린의 아래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워린이 너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돼.”

“……!”

워린이 야만인을 승전미사에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다. 아니, 데리고 가면 분명히 지금껏 열심히 세운 계획이 모두 어그러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워린은 저를 사색이 된 채 바라보는 야만인에게 달콤하게 웃어 주었다. 그에 야만인의 하얗고 우울한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작은 도련님, 어제… 제 방에 오셨지요?”

자신과 몸을 섞었음에도

감히 자신을 보며

맥켄지를 떠올리는 야만인에게 각인시켜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네가 다시 돌아갈 곳은 없다’는 사실을.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습니까?”

“……!”

맥켄지의 도자기 같은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맥켄지의 불안한 얼굴에, 절망에 침식되어 가는 얼굴에 워린의 얼굴이 황홀함에 물들어 갔다. 그는 이 도취감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아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몸부림을 치는 야만인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켁켁거리며 야만인이 몹시 괴로워했다. 기다랗고 하얀 목덜미가 맥켄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껏 개 목줄 때문에 음영이 져 잘 보이지 않았던 멍 자국들이 보였다.

맥켄지는 너자의 목에 집착했다. 그래서 너자의 목에는 항상 울긋불긋한 울혈이 피어 있었다. 하지만 이 모양대로 선명히 뜯겨 있는 저 상처들은, 딱쟁이가 지고 응고된 상처가 즐비한 저 상처들은, 제가 남긴 적이 없는 것이었다.

맥켄지의 입에서 밭은 숨이 내쉬어졌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느껴 본 적이 없는 해일과 같은 분노에 맥켄지가 압도당했다. 그에 워린이 정말 고맙다는 듯이 허리를 깍듯하게 숙이며 말했다.

“제가 딱히 길들일 필요도 없더군요. 작은 도련님께서 잘 뚫어 주셔서.”

“……워린….”

“어찌나 잘 길들여 주셨던지 제가 넣기만 해도 질질 싸….”

맥켄지의 단단한 주먹이 워린의 뺨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에 아닌 척 그들을 응시하고 있던 귀족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폭력사태에는 몸수색을 마치고 슬슬 돌아가려는 귀족들의 발길을 다시 돌리게 하였다.

무슨 일이냐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귀족들을 배제하고 워린의 9대대 기사들이 한달음에 달려와 맥켄지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것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같은 디자인의, 같은 색의 도노반 가문의 사기사단 정복을 입은 장정들이 서로 엉켜 유혈사태를 일으키려는 모양새에 그들을 관음하고 있던 프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 애가 저런 애가 아닌데. 프럼은 이성을 잃고 샬로메에게 붙잡힌 맥켄지를 보며 혀를 찼다.

그래, 그렇게 어른스러운 척해도 한계일 것이다. 제 명줄이 다한 것인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 채 제 아비가 눈앞에서 죽어 갔다.

물론 프럼은 너무도 똘똘해서 언젠가 제 아들의 앞날에 해가 될 맥켄지가 한순간에 천치가 되어 가업을 잇지 못하여 제 형에게 가업이 넘어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맥켄지의 입지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프럼은 다비드가 뒈지든 살아나든 아무 상관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왔던 제 아들 또래의 맥켄지에게는 꽤 정이 든 상태였다.

여기에서 더 소란을 피우면 멍청하고 온화한 황제라도 맥켄지에게 황실 모독죄를 물을 수 있었다. 감히 황제가 있는데 싸움질이라니, 불경한 일이었다. 프럼이 스와포네 코퍼레이션 그룹 기사단의 단장에게 저들의 싸움을 막으라고 지시하려고 할 때 의외의 인물이 그들을 제지했다.

“맥! 이게 무슨 짓이니!”

“…형님은 저리 빠지세요.”

“이 말썽꾸러기 같으니라고.”

기회를 보고 있던 러트가 고수머리를 휘날리며 단호한 손길로 워린과 맥켄지를 떼어냈다. 맥켄지는 이 순간에도 자신을 깎아내리며 애새끼 취급을 하는 제 형의 손을 되바라지게 쳐냈지만 워린은 다시금 ‘워린 도노반’의 가면을 쓴 채로 유순히 그의 손길에 뒤로 물러났다.

둘을 완전히 떼어낸 러트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에게 수없이 연습했던 문단을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연치가 어려 황제 폐하의 앞에서 실례를 저질렀나이다.”

“…….”

“이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예비 가주인 저의 탓이니 아이를 탓하지 마소서.”

청산유수처럼 죄를 고해바치는 러트에 황제의 얼굴이 조금은 풀렸다. 아랫것이, 그것도 도노반 후작 가문의 예비 가주가 저자세로 나오는데 질책을 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덕목에는 넓은 아량도 필요했다. 거기에,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베타미 황제는 맥켄지에게 불경죄를 묻지 않았다. 러트가 말하기를 맥켄지는 아직 어리다고 했다. 아까는 그렇게 듬직해 보였는데 그것이 맥켄지의 한계인 듯싶었다. 하긴, 제 눈앞에서 아비가 죽어 갔는데 아직 어린 맥켄지에게는 큰 상처일 것이었다.

베타미 황제가 말했다.

“다비드는 참 듬직한 예비 가주를 두었군.”

“과찬이십니다.”

“맥켄지, 자네가 괴로운 것은 짐도 알고 있다. 하지만 죄 없는 전쟁 영웅에게 화를 풀면 안 되지 않느냐.”

“…….”

“자중하라, 맥켄지 도노반.”

냉정한 베타미 황제의 말에 맥켄지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몹시 분한 듯 이를 악물고 있는 맥켄지의 모습은 마치 그토록 사랑했던 인간 남자에게 실연을 당해 울고 있는 사랑의 여신 프시케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보는 이마저 홀릴 것 같은 그 가련하고 아름다운 작태에 베타미는 맥켄지의 불경을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것에 약했다.

베타미가 황제가 자신을 자신감 있게 바라보는 러트에게 말했다.

“네 동생이 많이 상심한 듯싶구나. 그만 데리고 가 쉬게 하라.”

“네!”

“다시 한번 짐이 말한다. 내가 너희를 비호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황제폐하의 끝없는 자비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유순히 허리를 숙이는 러트의 입에 비열한 미소가 일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모든 소지품 검사를 끝낸 귀족들을 먼저 퇴장시켰다. 그 많던 귀족들이 모두 빠지니 소란스러웠던 예배당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 기사단과 제9대대 기사단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제 주인을 모시는 충성스러운 기사단이어서 9대대는 제 단장의 얼굴에 주먹을 갈긴 맥켄지에게 감히 적대감을 품었고,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기사단은 감히 가문의 차남을 화나게 해 황제에게 쓴소리를 받게 한 워린에게 적대감을 품었다. 특히 레너드와 샬로메의 기세가 남달랐다. 유난히 충성스러운 그들에게 이 상황은 결코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맥켄지와 워린의 기류보다는 유순했다. 그들은 무려 황제의 주의를 받은 탓에 가만히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서로를 찢어발길 듯했다. 누군가는 이 미친 상황을 중재해야 했다. 프럼은 도노반 가문이 우당탕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차남과 굴러들어 온 돌의 기 싸움을 한 발자국 빼서 즐겁게 관람을 하고 있었고, 아까 베타미 황제의 칭찬을 받은 러트 또한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어떤 것에 흥미를 느꼈는지 그들을 응시하기만 했다.

황제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예비 가주 러트에게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이야기가 길어질 여지가 있었다. 베타미는 어서 빨리 이 미친 상황에서 벗어나 황성에 들어가 토끼 같은 손주들의 재롱을 보고 싶었다.

러트에게 맡겨 봤자 교통정리가 끝나기는커녕 다시 싸움을 붙일 것 같은 기류라 제왕의 덕목을 발휘했다.

베타미가 말했다.

“주목하라.”

베타미의 말에 그곳에 있던 일동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황제에게 쏠렸다. 범인이라면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울 만했지만 그는 나이가 오십 넘은 황제였다. 그가 말했다.

”아까의 싸움으로 맥켄지와 워린의 감정이 상했을 터, 스와포네 공작 가가 도노반 후작 가의 맥켄지 도노반을 후작 성에 데려다주길. 맥켄지와 워린은 각자 떨어져 아까의 상황을 반성하라.”

“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다비드 도노반을 사격기사단이 직접 호위하여 후작 성에 모시고 가라. 또 이 신전에 있는 제일 품계가 높은 사제 두 명도 같이 동행하라.”

“네.”

“짐이 연락을 취하여 황성에 있는 닥터를 후작 성에 보내겠다. 도노반 가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베타미의 교통정리로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했던 긴장감이 조금은 완화되었다. 하지만 맥켄지는 그것에 납득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워린의 손에서 노예를 빼내어 제 곁에 두고 싶었다. 맥켄지가 황제에게 감히 반론하려고 할 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캔디스가 그런 맥켄지를 막아섰다.

맥켄지는 제 앞을 막아선 캔디스에게 꺼지라며 어깃장을 놓으려고 할 때 캔디스가 말했다.

“대가리 안 돌아가지?”

안 그래도 열 받는데 폭언으로 시비를 거는 캔디스에게 맥켄지가 지지 않고 맞서려고 할 때 그가 작게 말했다.

“황제의 말에 합당한 이유 없이 토를 달면 삼 일간 구금인 거 몰라? 특히 너는 관직도 없는 놈이라 바로 재판에 회부될 거다. 아무리 너희 가문이 날고 긴다 하더라도 이미 있는 법률에서 피해 갈 수는 없지.”

“…….”

“네놈이 구금되면 너자 혼자 저 새끼 옆에 있는 건데,”

“…….”

“참을 수 있겠냐?”

캔디스가 맥켄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절대 도노반이 예뻐서 말리는 게 아니었다. 신실한 신의 종인 그는 이른 아침에 한 번, 잠들기 전에 한 번 맥켄지의 인생이 좆창 나기를 드뷔시 신께 기도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놈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고 너자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는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였고 이곳에 있는 황제와 프럼 스와포네를 제외하면 제일 귀한 자였다.

‘아, 적어도 가주였으면 바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을 텐데.’

아비가 오늘내일해서 진작 자신에게 가주 자리를 주었다면 이런 귀찮은 상황에서도 멋지게 노예를 데리고 제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 그러면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해서 너자를 만나지 못했으려나?

캔디스의 패륜아스러운 생각은 곧 멈추었다. 다 망상에 불과했다. 저는 아직 예비 가주고 남의 집 노비를 아무 사유 없이 데리고 간다면, 혹여나 몰래 데려가다 걸리면 재물손괴죄와 은닉죄로 재판에 넘겨질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맥켄지를 만류하는 이유는, 감히 맥켄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워린의 품 안에서 덜덜 떨고 있는 너자가 너무도 가여웠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위축된 애가 더 위축된 것을 보니 캔디스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캔디스가 아는 너자는 단순했고 꽤 유쾌한 놈이었다. 아무리 괴롭혀도 너자는 금세 털어냈고 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댔다. 그리고 그 말대꾸도 굉장히 사랑스러워 너자가 말대꾸를 할 때마다 캔디스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서 너자를 더욱 괴롭혀 댔다.

그런 애가 지금 거부도 못 하고 발발 기고 있다. 안 그래도 하얬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으며 고양이같이 올라간 눈매는 어찌나 울었는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어찌 보면 처연했고 어찌 보면 퇴폐적인 것 같았다. 닳을 대로 닳은 놈이 저런 표정이라니,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몸과 달리 너자의 정신은 마치 숫총각처럼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처연함이, 그 간극이 캔디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너자의 처음은 모조리 자신이었다. 너자의 뒷구멍을 처음 뚫은 것도 나고, 너자의 입에 처음 입을 맞춘 것도 나다. 그런데 내가 왜 너자에게 개 목걸이를 채울 생각을 못 했을까?

굵지만 묘하게 얇실해 보이는 기다란 목줄기를 조인 빨간색 목줄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마치 덫에 걸린 고고한 검은 늑대 같았다.

빨간 개 목걸이 사이로 물린 자국이 한 가득이었다. 아마 워린이 한 짓일 것이다. 워린에게 강간당했겠지? 나에게 했던 것처럼 하지 말라고, 이러지 말라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엉뚱한 말을 했을까? 그래서 워린에게 개처럼 처맞고 더 심하게 강간을 당했을까?

지금도 저리 떨고 있는데, 톡 치면 닭똥 같은 눈물을 퐁퐁 쏟으며 기절할 것 같은데, 너자가 저 악질적인 놈과 단둘이 있게 된다면? 그건 안 된다.

때려도 내가 때리고 괴롭혀도 내가 괴롭혀야 했다. 무조건 내가 울려서 울어야 한다.

도노반에게 너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들었을 때 정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저 순진한 애가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도노반이 너자를 어떻게 잃어버렸을까?

어렸던 날 제 개가 저를 보고 꼬리를 친다는 이유로 주저 없이 돌을 들어 개의 머리를 찍어 죽인 놈이었다. 그런 집착의 화신인 도노반이 잃어버려?

그래, 우연한 기회로 둘이 떨어졌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너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자는 이 땅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외톨이였다. 너자가 돌아갈 곳은 없었고 너자가 있을 곳은 맥켄지의 곁밖에 없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신과 같이 너자를 노리는 놈팡이가 있거나….

너자 스스로 도노반에게서 도망갔다거나?

캔디스는 후자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잘하면… 잘하면 이 상황을 이용해 너자를 빼내 올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캔디스는 맥켄지를 말렸다. 저 새끼가 자신의 마차를 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지만, 저 좆같은 놈과 밀폐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빨아대며 함께 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너자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적어도 집안에서는 머저리 러트의 눈치를 보느라고 워린은 지금처럼 못된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곁눈질로 너자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캔디스가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널 뭘 믿고?”

생각도 하지 않고 부정하는 맥켄지를 캔디스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뱉어냈다.

“버러지보다 못한 새끼, 지금 네 처지 이해 못 했지?”

“내가 뭘?”

“지금 네 애비가 뒤지면 누가 너네 집 가주가 되겠냐?”

“……!”

지금껏 너자 때문에 온전히 회전하지 못했던 맥켄지의 머리가 이제야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하기 짝이 없어 그 예쁜 입술을 악물었다. 스와포네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대가리는 버러지보다 못하다.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맥켄지에게 캔디스가 말했다.

”분명 머저리 러트가 너를 찍어 누를 거다. 그래, 저 머저리라면 네가 알아서 잘 쳐냈겠지. 그런데 러트는 지금 혼자가 아니야. 저 새끼들 보여? 둘이 쪼개고 있잖아. 분명 둘이 유착관계가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분명 둘이서 너를 죽이려고, 네가 재기하지 못하게 온갖 술수를 부릴 거다.”

“…죽이진 않을걸.”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맥켄지에게 캔디스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그래, 고작 차남인 네놈은 ‘설계 천재’님이시니까. 네 설계 능력을 따라갈 놈이 없다고 하지. 네 알량한 재능에 감사해라. 다른 집안이었으면 네 목은 당장에 따였을 거다.”

“…….”

“너 너자를 매개체로 나한테 거래했던 것, 머저리 러트를 찍어 누르려고 밑밥 깔아 놓은 거였지? 너 나 아니었으면 그 지분 갖는 거, 네 세력 불리는 거 꿈도 못 꾸는 거 알지?”

“너 진짜 짜증 난다.”

저 스스로 공치사를 해대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역겹다는 듯 말했다. 캔디스는 그런 맥켄지를 무시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도와준다고 할 때 도움받아. 아버지가 황제에게 너희 집안을 돕겠다고 말했다. 너희 집안일에 정당하게 끼어들 권리가 생긴 거지. 네놈 새끼야 그냥 뒤져 버리면 좋겠지만… 너자를 저딴 쓰레기들한테 맡길 수는 없다.”

똥이 설사에게 말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맥켄지는 떠오른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분하지만 그는 캔디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기회였다. 나중에 어떤 좆같은 조건을 내세울지는 몰라도 당장 제게 필요한 권력은 스와포네에게 있었다. 도노반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맥켄지는 이 기회로 워린과 러트를 모조리 몰아낼 것이다. 그리고 노예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캔디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지만 제 말을 따르는 도노반을 보며 미소 지었다.

스와포네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준다. 그리고 적법하게 너자를 데려와 제 침대에 눕혀 평생 예뻐해 줄 것이다. 또 은밀히 알아보고 있는 ‘시술’도 본격적으로 준비해 놓을 것이다.

맥켄지와 캔디스의 깊고 끈끈한 유착관계가 시작되었다.

<3권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