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맥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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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가 쿡쿡 쑤셔 오는 머리에 예쁜 눈썹을 찌그러뜨리며 만년필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양손 끝으로 머리를 꾹꾹 마사지를 했다. 그레머는 서류 정리를 하다가 말고 머리를 만지는 도련님께 물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조심스러운 시종의 질문에 맥켄지가 말했다. 머리가 아프구나. 제 주인의 말에 그레머가 호들갑을 떨며 상비약이 있다며 짐을 가져다 놓은 작은 방으로 달려갔고 그의 뒤에서 서 있던 샬로메가 우려스럽다는 듯 말했다.
“나흘 동안 쉬지도 못하고 일하셔서 피곤하신 것 같네요.”
“…….”
그런 것 같았다. 실제로 맥켄지는 러트 도노반이 사사건건 제 방에 들어와 검토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장부를 보고 훈수를 두며 그의 속을 살살 긁어대는 통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일을 했다. 얼른 러트 도노반이 있는 후작 성을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급한 대로 제일 중요한 장부와 프로젝트 건의 건만 처리하고 차선으로 밀린 일감을 모아서 제국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맥켄지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렇게 아득바득 후작 성에 붙어 있으려고 했는데, 제 발로 제국 아카데미에 도망치듯 다시 들어오다니.
사실 맥켄지는 죽어도 제국 아카데미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러트 도노반은 아비에게 사회성을 강조하며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동생을 제국 아카데미에 보내 사회성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비와 어미는 장남의 말을 철석같이 따랐다. 러트 도노반은 후작 부부의 지지로 싫다는 맥켄지를 마치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강제로 입학시켰다. 정말 제 동생을 걱정했던 것이라면 휘핑보이도 진작에 구해서 붙여 줬을 것이다.
제국의 숨은 실세 도노반 후작 가문이다. 그리고 대륙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신의 가문으로 전쟁이 마무리 지어지면 곧 공작 가문으로 명명될 가문이었다. 아무리 휘핑보이를 구하기 힘들다 한들 가문이 가진 권력은 그것을 상쇄시킬 만큼 엄청났다.
하지만 러트 도노반은 말만 본인이 구해 준다고 하고 실제로 입학 이틀 전까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다.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 시키는 것은 하루 반나절 만에 해냈으면서 제일 중요한 휘핑보이를 구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위대한 가문의 영식이 휘핑보이 없이 입학한다는 것은 그 영식의 존재가 미미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엿 먹어 보라는 러트 도노반의 행동에 맥켄지 도노반은 결국 스스로 움직였다. 대충 암시장에 가서 어린 노예를 하나 사 노예의 혀와 귀를 자를 생각이었다.
혀를 자름은 감히 불만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분명 러트 도노반이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하는 휘핑보이에게 자신의 행동을 보고시키려고 할 게 분명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귀를 자르는 것은 자신의 행동거지를 전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말 그대로 휘핑보이의 일만 할 수 있는 노예를 사려고 했는데, 풍문으로 방계 혈통인 워린이 야만인 노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 솔직히 반 충동적으로 워린의 노예를 가지고 왔다.
맥켄지는 워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워린 도노반의 이름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도노반이기는 했으나 방계 혈통이었다. 멀쩡한 에르베란 이름이 있었다. 지금에야 그가 있는 영지가 도노반 후작령에 귀속이 돼 있지만 불과 오 개월 전까지는 붕 뜬 영지였다.
그가 속한 후작령의 이름은 에르베령이었고 가주는 에르베 남작이었다. 그의 적법한 이름은 워린 에르베지만 대륙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워린 에르베에게 황제는 1차로 워린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 했다.
황제의 치하에 워린은 자신의 남작령은 에르베지만 그 뿌리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것이라며 에르베 남작령이 도노반 후작령에 귀속이 되기를 청했다. 그의 청에 황제는 적잖이 놀랐다.
보통의 야심가라면 품계를 높여 달라며, 자신의 에르베 가문이 후작 가문이 될 수 있도록 청하는데 워린은 자신의 가문이, 자신이 도노반 후작령에 귀속되기를 청한 것이었다. 황제가 그걸로 되겠냐며 묻자 워린은 위대하신 도노반 후작 가문의 귀속이 되는 것이 자신의 소원이라며 겸양을 떨었고 황제는 워린의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사 에르베령이 도노반 후작 가문에 귀속되도록 명했다. 또한 이례적으로 워린 에르베에게만 도노반이라는 성을 쓰도록 했다.
남들이 본다면 방계의 충신이 도노반 후작 가문을 수호한다며 그의 충성심에 박수를 쳤겠지만 맥켄지는 그를 경계했다.
맥켄지는 워린을 파티에서 딱 한 번 보았다. 오 개월 전 전쟁 중에 에르베령이 도노반 후작 가문이 귀속되는 파티를 황제가 직접 열어 줘 전쟁터에서 굴러야 할 워린 에르베가 파티에 얼굴을 드러냈다.
근본 없는 남작 가문의 방계 영식이 도노반의 성을 가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자신의 가문에 일언반구도 없이 독단적으로 명령한 황제 때문에 후작 가문도 난리가 났지만 황제의 직언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워린 에르베는 전쟁 영웅이었다.
도노반 가문은 워린을 경계했지만, 파티에서 만난 이후로 그는 전쟁통에서 구르며 대륙을 약탈하고 다니며 얻은 온갖 진귀한 보석들을 바쳤다.
도노반 후작 부부와 러트 도노반에게 간이고 쓸개고 바칠 것 같이 구는 워린에 그들의 경계심은 풀어졌다. 그들은 어느새 워린 에르베를 워린 도노반이라고, 복덩이가 넝쿨째 들어왔다며 매우 기뻐했다. 실제로 워린 에르베가 워린 도노반이 되자 제국 내에서 도노반 후작 가문의 평판과 입지가 하늘을 뚫을 듯 올라갔다. 하지만 맥켄지는 워린의 생글생글 웃는 하얀 얼굴이, 온갖 것을 이유 없이 바치는 그의 행동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속에 칼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워린 도노반의 것을 가져왔다. 호기심도 호기심일뿐더러 워린 도노반이 제 것을 함부로 가져간 맥켄지를 어떻게 응대할까, 궁금했다. 하지만 노예를 데리고 나온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러트 도노반은 무능했지만 자신이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는 머저리였다. 러트 도노반은 워린이 노예를 찾는다고 했지만, 본인이 다 해결했다며 호언장담을 하는 것을 보면 워린 도노반도 그렇게 노예를 되돌려받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맥켄지가 거실 구석에서 멍하니 책을 보는 노예를 곁눈질하고 있을 때 그레머가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쭈뼛쭈뼛 걸어와 제 주인의 옆에 섰다. 맥켄지가 무심한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니 그레머가 몹시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상비약이 없습니다. 의무실에 가서 약을 받아오겠습니다.”
그레머의 말에 맥켄지는 눈을 감았다. 사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고 이런 두통은 꽤 익숙했다. 샬로메가 말한 것처럼 그저 스트레스성 두통일 뿐이었다. 그냥 자 버릴까. 나흘 동안 좆빠지게 고생했는데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
맥켄지는 건조해져 눈을 감은 것이었지만 아무 말 없이 눈을 감는 주인의 행동에 고용인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레머는 당장 의무실에 다녀온다며 겉옷을 챙겼고 샬로메는 독채와 의무실이 꽤 멀고 밤눈이 어두운 그레머를 위해 같이 갔다 온다며 나갈 채비를 했다.
맥켄지로서는 다녀온다는 그들을 굳이 말리지 않고 나른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그들이 하는 것을 구경했다. 하지만 그레머는 제 주인의 심기가 몹시 상했다고 생각하여 입술을 앙물며 어쩌지 하다가 곧 ‘아!’ 하며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져왔다. 그레머의 손에 들린 것은 팔뚝만 한 양주병이었다.
그레머가 간단한 간식거리와 작은 양주잔을 꺼내 테이블에 곱게 세팅했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맥켄지에게 그레머가 말했다.
“큰 도련님께서 도련님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드리라고 한 약주입니다. 특별한 곳에서 어렵게 공수한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형님이?”
“네. 큰 도련님께서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하시며 주신 약주입니다. 큰 도련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분명 좋은 술일 겁니다. 간단한 두통에 약주도 도움이 되는 법이지요.”
맥켄지는 러트 도노반이 특별한 곳에서 어렵게 공수했다는 문구가 거슬렸지만 곧 무시했다. 아마 암살은 아닐 것이다. 러트 도노반은 아직 총기에 대한 공포증을 이겨내지 못했을뿐더러 도노반 리피팅 암즈를 먹을 기반이 약했다. 러트 도노반에게는 아직 맥켄지가 필요했다. 아마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뇌물 같은 것이겠지.
그레머가 제 주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부분 학생들이 성인들이었지만 교육을 위하여 제국 아카데미는 주류 반입이 안 됐다. 그 때문에 꽤 애주가였던 맥켄지는 그동안 술을 입에 대지 못했다. 거기에 집에 돌아갔을 때도 너무 바빠 차마 입에 술을 대지 못했는데 지금 술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꽤 즐거우실 것이다.
…큰 도련님이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주라고 했지만 별거 아닐 것이다. 큰 도련님은 술을 드실 때 항상 여자와 함께 먹으니 이성에 관심이 없는 제 동생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했을 것이다. 그레머는 살짝 거슬리는 큰 도련님의 말을 무시했다.
그레머는 코르크 마개를 솜씨 좋게 따내어 작은 양주잔에 술을 따랐다. 졸졸 하며 청아한 소리가 났고 향도 정말 좋았다. 큰 도련님이 특별히 하사한 술다웠다. 맥켄지 때문에 여러 술을 접했지만 이렇게 향긋하고 달큰한 냄새의 술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맥켄지도 마찬가지인지 정리하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곤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맥켄지가 중얼거렸다.
“…맛이 좋군.”
다행이다. 도련님의 기분이 풀린 것 같다. 그레머와 샬로메는 멍하니 자신들을 바라보는 노예에게 의무실에 다녀올 것이니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며 당부했다. 그리고 부리나케 길을 나섰다.
적막감이 감도는 독채 안에는 맥켄지가 조용히 술을 들이켜는 소리와 너자가 종이를 팔랑이며 넘기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멍하니 종이만 넘기던 너자의 귓가에 툭,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커다란 창문을 보니 물기가 묻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 몇 개만 켜 놓은 어두운 방이 번쩍하며 빛났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질 것같이 천둥 소리가 나며 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가 오네. 그레머와 샬로메가 비에 젖어 감기에 걸릴까 우려되었다. 마치 유리창을 부술 듯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너자가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맥켄지가 들고 마시던 술잔이 바닥에 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맥켄지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손으로 쥐고 있었다.
너자가 깜짝 놀라 바닥에서 일어나 맥켄지에게 다가갔다. 아까 들으니 맥켄지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마 머리가 아픈 것이 도진 것 같았다. 맥켄지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의 발이 허우적거리다가 밑에 깨져 버린 술잔을 밟으려 한 것이 보였다.
“…!”
너자가 재빨리 몸을 날려 맥켄지의 하얀 발을 한 손에 쥐어 잡았다. 하지만 맥켄지가 휘청거리는 탓에 너자의 손등에 깨진 유리 파편이 박혀 버렸다. 아윽, 하고 너자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너자는 일단 유리 파편을 손등으로 쓸어 맥켄지의 발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 치웠다.
“괜찮으세요?”
“…….”
너자의 물음에 맥켄지는 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자는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위에서 헉헉거리는 맥켄지의 숨소리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일단 그의 발이 더 걱정되었다. 초만 몇 개 켜 놓았기 때문에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너자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맥켄지의 다리 사이에 기어 들어가서 그의 발을 들어 올려 혹시라도 어디 상처가 난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 몸에 비해 커다란 발은 하얬고 매끈했다. 다행히 유리 파편이 튀어서 긁힌 곳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너자가 별안간 머리채가 아프게 잡아 올려지는 것에 숨을 들이켰다. 아파요! 나흘 동안의 교육 때문에 입에 붙어 버린 너자의 입이 존대를 내뱉었다. 하지만 맥켄지는 말이 없었다.
콰르릉, 하고 어두웠던 방 안이 천둥과 번개 때문에 순식간에 환하게 빛났다.
“…!”
“…하….”
항상 나른하고 무심하게 풀려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발갛게 익어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입에서 밭은 숨이 내뱉어졌다. 너자는 저 표정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캔디스….”
아찔해지는 기분에 너자가 중얼거리자 맥켄지가 이를 뿌득 갈며 너자의 머리채를 위로 끌어 올렸다. 저 가련한 몸에 어떻게 이런 힘이 있는지 모르겠다. 너자가 일으켜 세워지자 맥켄지가 손을 내려 너자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아 자신에게 끌었다.
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지는 탓에 너자가 쓰러졌다. 어떻게든 몸을 지지해 그를 깔아뭉개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엉덩이를 잡아채며 자신의 고간 사이에 앉히는 맥켄지 때문에 너자는 바짝 굳고 말았다.
이건 말이 안 됐다. 맥켄지가 자신을 제 위에 앉힐 리 없었다. 맥켄지가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를 리가 없었다. 엉덩이 사이에 닿는 그것이… 이렇게….
“말도 안 돼….”
너자가 아찔한 이 상황에 신음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맥켄지는 그런 너자를 풀린 눈으로 쳐다보다 몸에 비해 큰 손으로 노예의 엉덩이를 함부로 쥐었다. 옷에 쌓여 있지만 쫀득하게 감겨 오는 엉덩이 살에 맥켄지의 속에 불이 일었다.
맥켄지는 속이 너무 뜨거웠다. 숨을 들이쉬면 폐로 들어간 공기가 불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터질 것같이 발기되는 자지에 바짝 말라 오는 입술을 핥았다. 품에 안긴 몸뚱이가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게가 맥켄지에게 참을 수 없는 욕정을 주었다.
맥켄지의 하얀 손이 노예의 허리를 쓸었다. 너자는 순간 전기가 달리는 것같이 아찔한 자극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헉 하고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자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만진 적은 없었다. 아무도 이렇게 유혹하듯 자신을 만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맥켄지가 자신을 쓰다듬고 있었다. 잔뜩 욕정한 표정으로… 대체 이 애가 왜 이러지…? 맥켄지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눈가를 털어댔다. 그런데 왜?
너무도 혼란스럽고 자신을 야릇하게 쓰다듬는 맥켄지가 이상해 너자가 몸을 움찔이며 맥켄지에게 벗어나려 맥켄지의 무릎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자 맥켄지가 너자의 귓가에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쉬…”
“…앗…!”
“가만히….”
마치 한없이 약한 영애를 달래듯 맥켄지가 너자를 달랬다. 너자는 처음 들어보는 맥켄지의 유혹하듯 어르는 목소리에, 귓가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에 기절할 것 같았다. 너자가 천박한 소리를 낼까 무서워 피가 질질 흐르는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꾹 눌렀다.
그리고.
“도… 도련님! 안 돼요!”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춰 핥기 시작하는 맥켄지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다. 너자의 비명에 맥켄지의 눈이 위험하게 풀렸다.
창문을 때리며 쏟아지던 빗줄기가 더욱 강해졌다.
너자는 나른하면서도 유혹적인 얼굴로 제 손에 깍지를 끼며 아직도 피가 질질 흐르는 손등에 입을 맞추는 맥켄지에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어둠에 잘 보이지도 않건만 그의 이목구비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너자의 손등에 맥켄지의 말캉하면서도 뜨거운 혀가 애무하듯 미끄러졌다. 그 이상야릇한 느낌에 너자가 신음을 흘렸다.
“아….”
잔뜩 억눌린 노예의 신음에 맥켄지의 배에 불이 났다. 배꼽 아래서부터 심장까지 불이 난 것같이 뜨거웠다. 맥켄지는 목이 말랐다. 그래서 노예의 상처가 생명수라도 되는 듯 쭉쭉 빨았다.
너자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대체 어느 사람이 피를 마시는가! 너자는 제 손등을 잡아 빼고 기겁을 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맥켄지가 너자를 어르듯 바람 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쉬… 괜찮아.”
“아… 안 괜찮아요….”
맥켄지는 노예의 어수룩한 말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 밑에서 수분기가 바짝 말라 버린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입안에 조금씩 빨려 오는 쇠 맛의 액체가 감질났다.
목이 타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노예의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손을 풀어 테이블로 뻗어 술병을 쥐고 한 번에 들이켰다.
꼴깍, 꼴깍, 그의 목젖이 수없이 흔들렸다. 너자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켜는 맥켄지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술병에 있던 술은 작살이 난 상태였다.
이 술주정뱅이! 너자가 저도 모르게 모국어로 외쳤을 때 그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
곧 느껴질 강한 충격에 너자가 이를 악물었지만 상상한 것보다 미미한 통증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다 자신의 등에 감싸진 맥켄지의 강한 팔을 느꼈다. 아마 떨어진 충격이 그의 팔로 다 간 모양이었다.
너자가 너무도 놀라 퍼덕였다. 너자가 생각하기에 맥켄지는 너무도 여렸고 자신의 커다란 덩치가 그의 팔뚝을 깔아뭉개 몹시 아플 것이다.
죄송하다며 얼른 일어나려고 할 때 흉통을 조이는 강한 힘에 너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숨이 막히도록 조여 오는 가슴에, 그리고 가슴에 느껴지는 묵직하면서 자그마한 무게에 너자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머리인가? 가슴에 얹어진 간질간질한 무게에 너자의 눈알이 도륵 굴려질 때 가슴에 느껴지던 무게가 서서히 사라졌다. 아마 맥켄지가 고개를 든 것 같았다.
사방은 어두웠다. 무슨 일인지 거실 쪽에 켜져 있던 초가 꺼져 있었다.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미세한 달빛만이 공간을 조금씩 채웠다. 하지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빛줄기에 그 달빛도 희미했다.
너자가 눈을 깜빡이며 어두운 시야에 적응하고 있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보였다.
헉…!
너자가 숨을 들이켰다.
바로 눈앞에서 맥켄지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인지하자 코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과 그 숨결 속에 배어 있는 달콤하면서도 독한 술 냄새에 너자가 얼음처럼 굳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잊어버린 섹슈얼한 분위기에 너자는 압도당했다. 너자의 입이 발발 떨렸다.
이런 분위기, 나는 모른다.
너자가 너무도 거북한 분위기에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달콤한 술 냄새가 강하게 풍겨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에 느껴지는 뜨거우면서도 매끈한 무언가의 감촉에 숨을 멈췄다.
그 매끈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너자의 입술 위에 얹어 있을 뿐이었다. 코에서 따듯한 숨이 느껴졌다.
너자의 인지가 부조화를 일으켰다. 맥켄지가, 맥켄지가….
“흡…!”
입술 위에 꾹 하고 눌린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입술 위에 매끈한 무언가가 조심스럽게 닿았다. 마치 고양이가 핥듯 너자의 입술을 그의 혀가 조심스럽게 핥았다. 급하지도 않게, 천천히 굴려지는 혀의 감촉에 너자의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너자도 키스를 해 본 건 캔디스와 섹스를 하며 물리듯 당한 경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맥켄지의 키스는 그가 경험했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마치….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너자의 가슴에 불이 질러졌다. 기분이…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맥켄지는 모든 것을 잘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의 키스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해 보는 행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느낌이었다.
감질나게 제 입술을 혀로 핥는 맥켄지의 행위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입안에… 입안에 넣어 줬으면 좋겠다. 조심스럽게 입술 위를 핥는 저 혀가 입안도 핥아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꾹 다물려 있던 너자의 입이 절로 열렸다.
천천히 벌려지는 너자의 입에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을 핥던 맥켄지의 턱이 돌아가며 너자의 입안에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각도를 찾기 시작했다.
갑자기 급박해진 맥켄지의 행동에 너자의 앞니와 그의 앞니가 부딪혔다. 마침내 그의 혀가 너자의 입안 깊숙이 내려갔고 그들의 혀가 닿았다.
흐읍…! 으…. 이상하고 야릇한 감촉에 너자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맥켄지는 그 애달픈 소리에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혀와 너자의 혀가 부딫히며 비벼졌다.
쪽… 쪽… 쪼옥…. 시끄럽게 쏟아지는 폭우 소리에 침 소리가, 혀가 섞이는 야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몹시도 이상했다. 맥켄지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도 이상했고 맥켄지가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대체 왜? 나랑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는 남자가 대체 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게 아닌가?
너자는 이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가슴이 터질 듯 떨렸다. 그리고 솜털이 삐죽 설 것 같은 그 야릇하면서… 기분 좋은 느낌에 너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좋아… 아…!”
너자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나왔다. 정신없이 혀를 섞던 맥켄지의 입이 급박하게 떨어져 너자의 목 주위를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야릇한 손길로 목 끝까지 꼭꼭 채운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할 때,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풀어져 수동적으로 맥켄지와의 키스를 받아들이던 너자의 눈이 번뜩 뜨였다.
보일 것이다.
나흘 동안 캔디스에게 졸리고 물어뜯겼던 더러운 몸뚱이를 들킬 것이다. 들키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몸을 굴린 노예를 그가 용서할 리 없었다.
“아… 안 돼!”
너자가 맥켄지의 상체를 강하게 밀었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맥켄지의 조용하게 타오르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맥켄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까 전에는 타는 듯 갈증이 일었지만 두 번째로 술을 들이켜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속이 너무 뜨거웠고 온 신경이 자지로 몰리는 것 같았다.
당장 싸 버리고 싶으면서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물고 빨고 싶었고 무언가를 억누르고 싶었다. 무언가… 더 자극이 필요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게 노예였다. 워린의 영지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더럽게 신경이 쓰였다.
스와포네의 밑에서 엉엉 울며 흔들리는 노예가 신경이 쓰였다. 얼마나 좋으면 저 도도한 스와포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 가며,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노예를 탐하는 것일까?
제 형이 눈앞에서 씹질을 할 때는 더럽고 역겨웠다. 자신도 저런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좋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노예가 사냥꾼에게 총을 맞고 스와포네에게 강간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의무실에서 곤히 잠든 노예의 가련한 모습이 눈에 밟혔다.
침대에 몸이 다 들어가지 않아 밖으로 삐쭉 나온 발이 웃겼다. 그런데 그 발이 이상하게 야했다. 노예의 발은 컸다. 하지만 얄쌍하게 빠진 그 발 모양이, 하얀 피부가, 그 밑에 툭 하고 불거진 푸른 핏줄의 모습이, 노예의 목덜미에 짓이겨진 붉은 자국들이, 충동적으로 만진 노예의 눈매가… 자신을 보며 살풋 접히는 노예의 눈이….
신경이 쓰이는 존재도, 이런 이상한 욕망도, 참을 수 없는 열기와 묵직하게 몰리는 자지의 느낌도.
맥켄지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입술을 비볐다. 닿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살짝 열리는 노예의 입안에 혀를 넣어 조신하게 있는 혀와 맞닿으니 더 좋았다. 이렇게 좋은 행위를 왜 지금에야 할까 싶었다.
더한 게 하고 싶었다. 지금도 이렇게 황홀한데 러트 도노반이, 스와포네가 한 것처럼 구멍에 자지를 처박으면 얼마나 더 짜릿할까?
그런데 노예가 거부한다. 맥켄지의 속 안에서 무언가가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맥켄지가 노예의 양 손목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함부로 쥐고 손목을 끊어지도록 쥐어짜 내듯 잡은 맥켄지의 거친 행동에 너자의 입에서 기어코 비명이 나왔다.
맥켄지가 말했다.
“내가 스와포네가 아니라 싫어?”
“…네?”
너자는 별안간 나오는 캔디스의 이름에 반항하던 것을 멈추고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그 새끼한테는 다 줬잖아.”
“…무슨….”
너자가 거부감에 잡혀 버린 양팔을 빼려고 아등바등하자 맥켄지가 너자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으르렁거렸다.
“나한테도 대 줘.”
“…….”
“넌 내 노예잖아.”
맥켄지의 눈빛이 짐승처럼 빛났다. 마치 제 암컷을 다른 수컷에게 빼앗겨 버린 것처럼 분노에 찬 그의 행동에, 그의 목소리에 너자가 숨을 멈췄다.
맥켄지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너자는 맥켄지의 명령에, 기껏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캔디스의 앞에 던져 놓았던 그가, 뺨을 사정없이 때리며 캔디스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던 그가, 살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가만히 있으라며 강간당하는 자신을 쓰레기 보듯 바라보던 그가.
커다랗게 뜨인 너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하고 흐르며 몸부림을 치던 너자의 몸이 잠잠해졌다.
자신의 말에 유순히 따르는 너자의 모습이 맥켄지의 목이 다시 탔다.
싫어하며 거부하는 노예의 모습이 너무도 짜증이 났다. 하지만 상처 받은 듯 우는 노예의 모습을 보니 애가 탔다.
내가 스와포네가 아니라 싫은 거야? 더러운 새끼, 그놈의 자지에 주인도 못 알아보나 보지? 천하고 더러운 야만인다웠다. 맥켄지의 가슴속에서 불이 났다. 맥켄지는 그 불길이 자신을 집아먹을까 두려웠다.
“역겨운 새끼….”
그는 망설임 없이 너자의 뺨을 쳤다. 너자는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맥켄지의 폭력을 그저 받아냈다. 아까의 설레임과 야릇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밖에서 천둥이 쳤다.
숨도 쉬지 못하고 밑에서 벌벌 떠는 노예의 모습이 맥켄지의 가슴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빨리, 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내 것으로 싸 놔야 했다. 맥켄지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 노예의 얼굴을 움켜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네 주인은 스와포네가 아니라, 바로 나야.”
맥켄지의 목소리가 마치 짐승처럼 그르릉거렸다.
억센 손길로 하나둘씩 벗겨지는 옷자락에 너자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맥켄지와 너자는 침대에서 지독하게 얽혀 있었다. 너자의 온몸은 맥켄지가 험하게 만져대고 때려대는 통에 울긋불긋했다. 너자는 너무 어두워 형태만 겨우 보이는 천장의 장식물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다행이었다. 그가 때려대는 통에 캔디스가 남겨 놓은 멍 자국과 잇자국이 가려지고 있으니까. 아마 들켜도 맥켄지는 자신이 그랬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맥켄지의 손길은 서툴렀다. 마치 어떻게 만져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애무가 아니라 살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멍이 드는 듯했다.
하지만 더 아픈 곳은 맥켄지의 자지에 뚫린 구멍이었다. 너자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이자 가득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철퍽이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하… 씹… 헉….”
잔뜩 흥분한 맥켄지의 신음 소리가 너자의 억눌린 비명 소리를 눌렀다. 너자의 몸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캔디스가 사흘 내내 뚫어댄 탓에 맥켄지의 자지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캔디스와의 관계가 없었다면 정말 죽어 버렸을 것이었다.
캔디스는 경험이 많은 창놈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그가 너자를 함부로 안아도 그 나름의 요령으로 뚫어서 몸에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맥켄지는 그 요령도 없어 너자의 몸에 무리를 주었다.
거기다가 맥켄지의 자지는 괴물 같았다. 유약한 여인같이 아름다운 그의 외양과는 달리 너무도 길고 두꺼웠다. 마치 어린애 팔뚝만 한 자지를 세우며 너자의 구멍을 찔러대며 들어오려는 맥켄지에 너자가 울며불며 반항했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쑤셔 넣는 그의 자지에 너자는 잠시 기절했다.
하지만 길고 두꺼운 자지가 내장을 파열시킬 것처럼 미친 듯이 쑤셔대는 탓에 그의 정신이 억지로 깼다. 맥켄지의 자지가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핏줄기가 조금씩 흘러나와 침대 시트를 적셨다.
너자가 힘없이 널브러진 양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에 얹었다. 하지만 눈가를 가린 너자의 양손이 맥켄지의 손에 의해 머리 양옆으로 벌어져 눌렸다. 맥켄지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너자의 눈을 보며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무슨 생각 해?”
“…….”
너자는 귓가에 들리는 맥켄지의 억눌린 목소리에 침을 꼴깍이며 생각했다.
아까부터 지독하게 물어왔다. 누구를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눈을 보고 말하지 않는다며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뺨을 때렸다. 너무 아프고 억울해서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고 아픈 티를 내지 않자 그는 내게는 소리도 들려주기 싫은 거냐며 트집을 잡았다. 네 앞에 있는 건 난데 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 그놈이 생각날까 봐 그러는 거 아니야? 너자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자 맥켄지는 화냈다. 왜 말도 못 하냐고, 그 새끼가 생각나서 목이 메는 거냐고.
말을 잘 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너자의 입이 벌벌 떨렸다.
모르겠어, 어떻게 말을 해야 맥켄지가 화를 내지 않을지 모르겠어.
그저 눈물만 흘리며 자신의 눈을 피하는 노예의 모습에 맥켄지가 이를 갈며 다시 거칠게 허리 짓을 했다. 아! 아! 아파, 아…악! 너자의 입에서 비명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하… 시팔….”
“…흑….”
그는 처음 느껴 보는 해방감에, 자신의 자지를 황홀하게 조여대는 뜨끈하고 미끌미끌한 노예의 구멍 안에 너무도 쉽게 싸 버렸다. 맥켄지의 엉덩이가 파르르 떨리며 그의 정액이 너자의 구멍 안을 가득 채웠다.
너자는 구멍 안에 잔뜩 채워지는 정액의 느낌에 눈을 감았다. 끝났다. 드디어 끝났다.
정액을 싸느라 게게 풀려 버린 몸 탓에 너자의 손목을 쥐고 있던 맥켄지의 손이 쉽게 풀렸다. 너자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아귀에서 양손을 빼내 질질 흐르는 눈물을 씩씩하게 닦았다.
그리고 맥켄지의 아래에 꿰뚫려 있는 하체를 떼어내려고 몸을 움직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며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너자의 구멍 안에서 잠시 풀이 죽어 있던 맥켄지의 자지가 조금씩 힘을 받아 딱딱해졌다.
너무도 질려 버린 너자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싫어… 싫!”
아! 너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완전히 서 버린 흉기 같은 자지가 배 속을 터뜨릴 것같이 채웠기 때문이었다.
더 하면 정말 몸이 망가질 것 같았다. 너자가 두려움에 못 이겨 몸부림을 쳤으나 맥켄지는 너무도 쉽게 그를 제압했다.
발버둥을 치는 너자의 양 허벅지를 팔 사이에 끼우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황홀한 노예의 구멍에 자지를 처박기 시작했다.
* * *
너자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고통에 잔뜩 곱아 들었던 그의 발가락이 반듯하기 펴졌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맥켄지는 서툴렀고 처음 경험해 보는 섹스에 조금만 움직여도 찍찍 싸댔다. 하지만 아다 특유의 혈기에 금방 발기가 되어 너자의 구멍을 쑤셨고 하면 할수록 그의 사정은 늦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노예의 허리를 잡거나 싫어하는 노예의 손목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씹질만 했으나 지금은 사정을 조절할 수 있게 돼서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맥켄지는 자지를 푹푹 박아대며 노예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문득 울며불며 싫어하는 노예의 얼굴이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못생긴 노예의 얼굴이 펑펑 울어대서 눈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분명 처음 키스를 했을 때는 저런 얼굴이 아니었다.
맥켄지는 멍하니 자지를 쑤셔 박다가 충동적으로 안타까운 비명을 질러대는 노예에게 키스를 했다. 노예의 입은 비명을 질러대느라 벌어져 있어 입안에 혀를 집어 넣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맥켄지의 혀가 안에 숨어 있는 노예의 혀에 닿았다. 미끄럽고 따듯한 것의 감촉에 그가 눈을 감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고개의 각도를 돌려가며 노예의 혀를 빨아댔다. 뜨겁고 음습한 노예의 입안은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고 자지는 노예의 뜨거운 내벽이 오물오물 물어댔다.
맥켄지의 위아래가 황홀했다. 그냥 자지만 쓰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았다. 술에 탄 약의 기운과 너자와의 행위에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혼자서는 느낄 수 없는 황홀경에 정신없이 허리 짓을 하고 있던 맥켄지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구멍이 자지로 따먹힐 때는 쉴 새 없이 울어대며 싫다고 거절하며 고통으로만 일그러져 있던 노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던 안색이 점점 풀어졌다. 어둠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얼굴에 피가 몰렸다. 잔뜩 풀어져 키스를 받아들이고 있는 노예의 얼굴이 띠고 있는 것은 분명, 쾌락이었다.
시팔… 조금 진정이 되었던 맥켄지의 가슴의 불이 다시 거세게 타올랐다.
아직 부족했다. 잔뜩 풀어져… 그래, 맥켄지는 노예의 눈가를 만졌을 때 수줍게 미소를 지었던 그 모습이 보고 싶었다. 노예의 표정이 좀 더 쾌락으로 물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켄지는 처음 하는 섹스라 그가 아는 방법이라곤 키스를 하는 것밖에 없었고 어깨 너머로 본 것은 스와포네가 짐승처럼 노예의 젖꼭지와 종아리를 물고 빠는 것이었는데 노예는 싫어했다.
그러다 불현듯 러트 도노반이 제 눈 앞에서 여자와 섹스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너무 역겹고 제 침대에서 저 지랄을 떠는 게 기분이 나빴던 기억밖에 없었는데 여자는 러트 도노반과 하는 내내 자지러졌다.
그때 아마….
그는 키스를 하던 것을 멈추고 너자의 구멍에 처박았던 자지를 빼냈다. 배려 없이 한 번에 쑥 빼낸 터라 너자가 급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소리를 질렀다. 아직 힘이 들어가 빳빳하게 서 있는 자지가 빠지자 곧 너자의 구멍에서 분홍색이 도는 정액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 외설적인 모습에 맥켄지가 순간적으로 다시 자지를 처박을 뻔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손으로만 제 자지를 추켰다. 한참이 지나도 정액이 흘러나왔다. 하도 싸댄 탓이었다. 맥켄지는 정액이 저절로 빠지기를 기다리다가 참지 못하고 노예의 구멍에 손가락을 쳐넣었다.
“…아! 도… 도….”
“…….”
평소의 그라면 이런 더럽고 불결한 짓을 하지 않았겠으나 지금의 맥켄지는 약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그는 이 행위를 하는 것에 불결함을 느끼지 못했다. 되레 손가락에 느껴지는 두툼하게 부은 노예의 구멍 입구 살과 손가락을 사정없이 조여대는 내벽의 느낌과 제가 싸 놓은 물컹한 정액의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빨리 그걸 해 보고 싶었다.
맥켄지는 너자의 구멍에 넣은 손가락을 고리처럼 구부려 안에 있는 정액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자지보다는 훨씬 얇은 두께지만 손가락으로 내벽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그의 행동에 너자가 이를 악물고 발발 떨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을 드나드는 것 같았다. 그와 하는 행위는 너무 아팠고… 간혹 가다 그가 키스해 줄 때면 너무 좋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사랑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의 혀가 자신의 혀와 섞일 때면 아픈 몸도, 슬픈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은 몸이 너무도 아팠다. 너자가 다시 그가 키스를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순간 배 속에서 짜릿하게 울리는 무언가에 숨을 들이켰다.
“흡…!”
너자의 날카로운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지며 몸이 발발 떨렸다. 뭔가, 뭔가 이상했다.
맥켄지는 순간 자신의 손가락을 꽉 조이며 몸이 발발 떨리는 노예의 몸에 손짓을 멈췄다. 손가락을 조여대는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아까까지는 끊어먹을 듯 조여댔는데 지금은 마치 무언가를 원하듯 조여댔다.
이상함에 뭐지, 하고 맥켄지가 아까 긁어대던 곳에 손가락을 다시 가져다 댔다. 그리고 곧 몸을 비틀며 신음을 내지르는 노예의 모습에 손가락질을 멈췄다.
아아아! 마치 애가 타는 것같이 신음을 지르는 노예의 모습에 그가 멍하니 생각했다. 좋은 건가? 맥켄지가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자 노예의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둠 속이지만 확연하게 보이는 그 모습, 자신의 아래에서 몸부림을 치며 달게 우는 노예의 모습, 그리고 행위 내내 죽어 있던 노예의 자지가 서 있는 것을 본 맥켄지의 머리가 하얘졌다.
맥켄지가 노예의 구멍 내벽을 눌러대던 것을 멈추고 그의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러트 도노반이 했던 것처럼 노예의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의 입술이 빨갛게 부어오른 구멍을 꾹꾹 눌렸다.
도련님! 마치 발작하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노예의 목소리가 너무도 달아 입술만 비비던 것을 멈추고 혀를 내밀어 빨기 시작했다.
“아… 아아…! 시… 싫어…! 시….”
맥켄지는 감히 자신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엉엉 울며 신음을 내지르는 노예의 행동에 제재를 하지 않았다. 역할 것 같았는데 전혀 역하지 않았다. 그가 몸부림을 치는 노예의 허벅지를 내리누르며 구멍을 쭉쭉 빨았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추잡한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침실 안을 울렸다. 맥켄지는 노예의 구멍을 빨며 멍하니 생각했다. 이상했다. 자신의 자지에 자극이 하나도 없는데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죽기는커녕 더욱 부피를 키운 자신의 자지가 기가 막혔다.
좀 더 노예가 자지러지는 것을 보고 싶었으나 이제 참을 수 없었다. 맥켄지는 마지막으로 게게 풀린 구멍을 츕 빨고는 팽팽하게 선 자신의 자지를 가져다 대었다.
“…흐….”
맥켄지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너자의 손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곧 다가올 고통에 입술을 깨물고 각오했다. 맥켄지는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떨고 있는 노예를 보며 눈을 도륵 굴리다가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처박았다.
크읏… 으…. 너자의 앙다물린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에 너자가 곧 다가올 고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까와 달리 천천히 자지를 문지르는 맥켄지의 행동에 꽉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다, 구멍을 꾹꾹 누르던 맥켄지의 괴물 같은 자지가 아까 손가락이 문질러진 곳을 쿡 하고 박는 순간 너자의 입에서 비명이 내질러졌다.
“하, 시팔….”
맥켄지는 마치 자지를 녹여 버릴 것같이 쫀득하게 조여 오는 노예의 구멍에, 잔뜩 흥분해서 내질러지는 노예의 앓는 소리에 눈을 감았다. 잠시 숨을 고른 맥켄지가 이를 으드득 갈며 그곳을 미친 듯이 찔렀다.
자지러지는 노예의 신음 소리가, 황홀한 구멍 안이, 게게 풀려 침과 눈물을 질질 흘려대는 노예의 얼굴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 * *
맥켄지는 마지막으로 힘껏 허리를 쳐올리며 정액을 싸질렀다. 노예는 정신을 잃은 지 오래였다. 더 하고 싶었지만 팔다리에 힘이 풀렸고 엄청난 탈력감에 그가 한숨을 쉬며 노예의 가슴에 엎어졌다.
“…뜨겁네.”
노예의 가슴은 크고 두툼했다. 얼굴을 비비니 매끈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뺨에 들러붙었다. 자신보다 노예의 몸집이 더 커 마치 자신이 노예의 품에 안겨 버린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으나 지금은 상관없었다.
맥켄지가 노예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못 빌려주겠네….”
만약 또 빌려 달라고 지랄하면 스와포네의 대가리에 총을 쏴 갈겨야겠다.
어느새 창문을 부술 듯 두드려 대던 빗줄기는 약해졌고 해가 떠올랐다. 맥켄지는 새근대는 노예의 숨소리와 일정하게 들리는 빗소리에 까무룩 잠들었다. 평온한 아침이었다.
그레머와 샬로메는 밤새 억수처럼 내리는 비 때문에 제국 아카데미 의무실에 발이 묶여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비와 질리도록 내리치는 천둥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폭풍을 뚫고 아파할 주인에게 가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제 주인이 두통으로 쓰러지는 것보다 자신들이 벼락을 맞아 뒈질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벽이 돼서야 제국 아카데미 건물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레머와 샬로메는 개지랄을 떨 주인을 생각하며 이를 깍 깨물고 달렸다. 보통 걸어서 40분 거리지만 불같이 화를 낼 주인의 성질머리를 생각하며 그들은 15분 만에 독채로 달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니 역시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분명 노예가 있어야 했는데 없었다. 노예는 보통 거실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씻나? 싶었지만 독채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아까 올 때 슬쩍 본 마구간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리고 테이블에는 술병이 내용물을 다 빨린 채 나뒹굴고 있었다. 저 많은 술을 주인이 조진 모양이다. 테이블 아래에는 그레머가 어제저녁에 꺼내 놓은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샬로메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성질머리 못 이기고 집어 던졌나 보네….”
우리가 안 와서. 샬로메의 말에 그레머가 그의 팔뚝을 팔꿈치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조용히 하세요.. 도련님이 들으시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레머의 핀잔에 샬로메가 눈을 도륵 굴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레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의 주인은 귀가 밝았다.
시간을 보니 주인이 일어날 시간이 한참 넘어 있었다. 아마 침실에서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레머와 샬로메는 한숨을 쉬며 잠시 망설이다가 공손하게 굳게 닫혀 있는 침실을 두드렸다. 안에 인기척이 있었다. 그들은 문을 열며 최대한 비굴해 보이는 표정과 동작을 취하며 그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그레머가 허리를 연신 굽히며 말했다.
“아이고, 도련님. 정말 빨리 오려고 했….”
샬로메는 도끼눈을 뜨며 자신을 볼 주인의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처음부터 허리를 숙이며 들어갔다. 그리고 잘못을 비는 그레머의 말에 헤드뱅잉을 하며 굽신거리고 있는데 잘못을 빌어야 할 그레머가 말을 멈춘 것에 의아해했다. 이놈이 이럴 놈이 아닌데.
그가 궁금증에 시선을 아래에 처박고 헤드뱅잉을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떠졌다.
“…….”
“…….”
“…….”
맥켄지가 침대 헤드에 허리를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맥켄지의 조막만 하고 아름다운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어찌 보면 사슴을 닮은 여인 같아 보였지만 높은 코 때문에 미묘한 남성성이 있었다. 그는 왼쪽 손으로 머리칼을 뒤로 쓸어올리며 그레머와 샬로메를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짓에 뒤로 넘어갔던 머리카락이 중력 때문에 다시 맥켄지의 눈가로 돌아왔다. 창문에서 내리쬐는 햇볕으로 맥켄지의 꿈같은 플래티넘 블론드가 찬란히 빛났다. 마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맨몸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주인은 지금껏 잠을 잘 때 한 번도 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여려 보이지만 꽤 근육이 잡혀 있는 몸이 튼튼해 보였다. 샬로메는 꽤 탄탄한 제 주인의 몸을 보며 신기해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는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희한하네, 근육이 있긴 하시네.
그쪽 취향이 아닌 샬로메지만 마치 한 폭의 명화같이 아름다운 그의 모습에 시선을 뺏겨 버렸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눈살을 찌푸리며 맥켄지를 보던 샬로메의 시선이 맥켄지의 오른쪽 어깨에 까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까만 무언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넓고 하얀 맥켄지의 어깨에 푹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은 노예였다.
“…눈알 파 버리기 전에 눈 돌리지?”
샬로메는 소름이 끼치는 말을 하는 제 주인의 목소리에 재빨리 노예를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어느새 고개를 밑으로 깔고 있는 그레머를 따라 눈알을 밑으로 내렸다.
샬로메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였다.
그의 머릿속에 방금 본 모습이 떠올랐다. 노예의 희끄무레한 얼굴은 발그스레했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분명 노예보다 맥켄지의 몸집이 작은데도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노예는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노예의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감고 있음에도 퉁퉁 부은 게 보였다. 또 희끄무레하고 굵은 노예의 목에는 졸린 자국이 선명했고 그의 몸뚱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맥켄지의 손자국이 분명한 멍 자국이 노예의 몸 곳곳에 들어 있었다.
“…….”
그렇지만 샬로메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맥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노예의 어깨를 끌어안은 오른쪽 손으로 마치 아이를 재우는 듯 느리게 툭툭 치고 있었다.
저 모습은 그거였다. 섹스를 마친 후의 모습이었다. 그가 맥켄지의 호위기사가 되고 몇 년을 따라다녔지만 맥켄지는 한 번도 누군가를 자신의 침대에 들이지 않았고, 누군가를 저렇게 끌어안은 적도 없었다.
말도 안 돼….
샬로메가 엄청난 것을 보고 제 주인의 미친 행각에 헉헉거리고 있을 때, 그들의 귓가에 맥켄지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레머.”
“예!”
그레머가 재깍 제 주인의 말에 답했다. 그 또한 몹시 놀랐지만 그는 프로였다. 싹싹하게 답한 그레머에게 맥켄지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인 후 물었다.
“오늘 강의가 어떻게 되더라?”
“네, 오전 군사학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가 봤자 소용없을 듯하고, 오후 1시경에 사격 수업이 있습니다.”
“…….”
그레머의 말에 맥켄지가 귀찮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베고 곤히 잠들어 있는 노예의 코를 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쥐고 거칠게 흔들었다.
“으으…!”
거친 맥켄지의 행동에 노곤하게 풀려 잠들어 있던 노예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노예의 눈이 퉁퉁 부어 못생겨 보였다. 거기에 멍청하니 풀려 있는 눈매 때문에 더 못생겨 보였다. 맥켄지가 혀를 쯧, 차고 노예의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일어나.”
앞머리를 뽑을 듯 강하게 잡아당기는 탓에 너자의 정신이 탁 트였다. 꿈속을 헤매던 너자의 흐리멍덩했던 눈이 점점 총기를 되찾았다. 이윽고 또랑또랑해진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너자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머와 샬로메를, 그리고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게 누구인지 인지했다. 그의 얼굴이 푸르댕댕하게 창백해지다가 붉어지다가를 반복했다.
결국 너자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슬그머니 맥켄지의 품속에서 나왔다. 그리고 엉망으로 멍이 든 자신의 몸을 숨기고 싶어 발밑에 굴러다니는 이불을 끌어 조용히 몸을 가렸다.
하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노예가 공 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맥켄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노예를 바라보았다.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의 머릿속도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혼란스러웠다.
쏟아지는 햇살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기분 좋게 정신을 차렸다. 묘하게 개운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품에 안겨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매끈하면서도 따듯하고 두툼한 게 기분 좋아 눈을 뜨기 싫을 정도였다.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 느껴 보는 거라 신기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늦장을 부렸다. 눈을 뜨지 않은 채 뜨끈뜨끈한 것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불현듯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
맥켄지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미친…. 그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품 안에는 눈이 퉁퉁 부어 잠들어 있는 노예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의 자신은 미쳤었다. 맥켄지에게 노예는 가축과 같았다. 그런 노예를 따먹다니, 말도 안 됐다.
“러트 도노반…!”
그 죽여도 시원치 않은 새끼가 발정제가 섞인 술을 준 것이다. 안 그래도 제 형을 증오하는 맥켄지의 안에서 러트 도노반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으로 승격됐다. 언젠가 그놈의 대가리에 술병을 내리꽂겠다는 다짐을 한 맥켄지가 감히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노예를 굴려 버리려고 했으나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행동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음울하게 침전되어 있던 노예가, 엉엉 울며 아파하던 노예가.
잔뜩 달아올라 흥분해서 자신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앙앙 울던 노예가, 키스를 해 주면 얼굴을 잔뜩 물들이며 유순하게 자신을 끌어안던 노예가…….
“…제기랄.”
맥켄지는 공 벌레같이 웅크린 노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에 노예가 꾸물거리며 이불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항상 창백하게 질려 있던 노예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수줍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 맥켄지의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그가 눈썹을 찌그러트렸다. 또, 그 기분이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장에 손을 집어넣고 마구 주물러 대는 기분이었다. 그는 도통 이게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역겨운 건가?
역겨운 건가 보다. 맥켄지는 그렇게 단정 짓곤 자신의 기분을 역겹게 만든 노예의 머리를 함부로 밀며 말했다.
“정신 안 차릴래?”
“…죄…죄송….”
순식간에 무섭게 돌변한 맥켄지의 모습에 수줍게 물들었던 너자의 얼굴이 금방 죽어 갔다.
생명력이 넘치던 노예의 얼굴이 금방 풀 죽어 평소의 음울한 표정으로 돌아가자 맥켄지의 속이 더 강하게 뒤집혔다. 맥켄지는 널뛰는 심장에 얼른 저것을 자신의 경계선에서 쫓아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발끝으로 노예를 밀어내며 말했다.
“당장 꺼져.”
마치 더러운 것을 내쫓는 것 같은 행동에, 도저히 뜨거웠던 하룻밤을 같이 지낸 사람 같지 않은 맥켄지의 모습에 너자가 고개를 숙이며 그의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냉정한 시선들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면 캔디스도 그랬었다. 그도 그렇게 뜨겁게, 자신이 아니면 안 될 것같이 굴다가 볼 장을 다 보니 쫓아냈고 홀랑 떠나 버렸다. 당연한 거였다.
너자의 얼굴에 체념이 뒤덮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캔디스가 만들어 놓은 멍들과 잇자국은 맥켄지가 새로 새겨 놓은 흉들로 지워졌다. 캔디스와 붙어먹은 것도 들키지 않았다. 적어도 한순간에 처분당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안도를 해야 했는데 기쁘지 않았다.
“…더러워.”
온갖 흉으로 뒤덮인 자신의 손목과 발목을 쓱 훑어보던 너자가 중얼거렸다. 맥켄지가 싫어할 만했다.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푸르고 빨간 몸은 자신이 봐도 징그러웠다.
너자가 자신의 몸에 자책을 하며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을 때, 침실에 있던 맥켄지는 아직도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레머와 샬로메에게 말했다.
“오후 수업에 들어갈 거야. 준비해 놔.”
그레머가 맥켄지의 말에 유순히 답했다. 그리고 몸을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려는 맥켄지에게 저도 모르게 말했다.
“…노예도 데려가는 겁니까?”
그레머의 물음에 욕실 문을 열던 맥켄지의 손이 멈췄다. 그레머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맥켄지의 모습에 숨을 꼴깍였다.
색사한 티가 나는 노예를 신성한 강의실에 가져갈 리 없었다. 그리고 대귀족인 맥켄지가 노예를 취했다는 것을 동네방네 티 내며 다닐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떨어질 일 같은 것을 지독히도 싫어했다.
암, 말도 안 되지. 멍청한 질문을 했다. 그레머가 자신의 모자란 질문에 자책하고 있을 때 맥켄지가 말했다.
“말 같잖은 소리 자꾸 지껄일래?”
“죄송합니다, 도련….”
“당연히 데려가야지.”
그의 말에 그레머는 물론 샬로메까지 말을 잃었다. 그런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맥켄지가 중얼거렸다.
“저 남창이 다른 놈들을 끌어들이면 어떡하려고.”
저 엉덩이가 가벼운 놈은 자신이 없으면 발정이 나서 아무 좆 달린 것들한테 다리를 벌릴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끼고 다니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저놈은 휘핑보이니 항상 자신의 곁에 있어야 했다.
맥켄지는 제가 할 말만 하고 홀랑 욕실로 들어갔다.
샬로메는 맥켄지가 한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저놈이 미쳤구나….”
“…….”
그레머가 말없이 샬로메의 팔뚝을 팔꿈치로 쿡 찍었다.
맥켄지는 시종들과 노예를 끌고 사격 수업장에 들어섰다. 역시나 그가 사격장에 등장하자 시장바닥 같았던 곳이 한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맥켄지는 그 당연한 모습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자신의 지정석으로 향했다. 그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그는 오늘 특히 더 아름다웠다. 그의 하얀 피부는 광이 나는 듯했고 나른하게 걷는 그의 걸음걸이 또한 요정이 사뿐사뿐 걷는 것 같았다.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인 듯한 그의 외모와 분위기에 영식들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맥켄지는 그런 시선 또한 익숙했다. 그는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영식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릿발 같은 그의 표정에 영식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그들은 그제야 맥켄지의 뒤에 음침하게 있는 검은 야만인을 알아차렸다.
야만인의 모습이 묘했다. 강인하고 음울해 보이는 야만인의 얼굴이 묘하게 풀려 있었다. 마치 색사를 마친 뒤 쓰러질 것 같은 그의 표정과 셔츠를 목 끝까지 채웠음에도 보이는 잇자국과 손자국을 알아차린 영식들이 입을 손가로 가져다 대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충 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너자의 얼굴이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맥켄지는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좆같은 음담패설에 발끝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찼다.
쾅! 하고 사정없이 들썩이는 테이블에 영식들의 주둥이가 멈췄다. 마치 수컷이 제 암컷을 넘보지 말라는 것 같은 그의 행동에 사격장의 분위기가 더욱 묘해졌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가라앉은 사격장에 키가 커다란 남자와 그의 뒤를 따르는 영식들의 무리가 끼어들었다.
캔디스였다.
캔디스는 맥켄지의 뒤에 우울하게 서서 몸을 말고 있는 노예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화나 보이는 맥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 새끼 또 지랄이네, 하며 익숙하게 맥켄지를 무시한 캔디스가 노예를 바라본 순간 밝았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
캔디스의 잘생긴 얼굴이 날카롭게 변해 노예를 샅샅이 훑어내렸다. 그러다 픽 하고 웃었다.
“…이야….”
“…….”
저건 자신이 만든 자국이 아니었다.
노예의 굵은 목에는 시뻘겋게 조여진 손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턱밑과 그 밑으로 이어지는 목줄기에 벌레가 물린 듯 얼룩이 번져 있었다. 자신은 분명 도노반에게 들킬까 봐 목 뒤에 물어뜯듯 만든 자국 하나만 남겼다.
캔디스의 속이 뒤집혔다. 저번에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심장에 누군가가 차가운 얼음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캔디스의 눈에 이상한 정염이 깃들기 시작했다. 캔디스가 픽 웃으며 턱에 손을 괴어 맥켄지를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색사가 분명해 보이는 노예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모르는 체하라고, 그냥 무시하라고 외쳤지만 캔디스의 입이 기어이 사고를 쳤다.
“이야… 대단한데?”
캔디스의 목소리에 맥켄지가 등을 의자 등받이에 깊게 대고 팔짱을 꼈다. 캔디스는 맥켄지의 만족한 듯 나른해 보이는 눈깔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한번 지껄여 봐라, 하며 불손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도노반의 표정도 좆같았다.
캔디스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점잖게 물었다.
“좋았냐?”
그의 물음에 맥켄지가 같잖다는 듯 말했다.
“무슨 말인지?”
불손한 말투와 앙큼하게 모르는 척을 하는 게 좆같았다. 캔디스의 속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계속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그는 맥켄지의 입을 열게 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새끼… 모르는 척하는거 봐라, 지 형 닮아서 아주 좆같아.”
“지금 시비 거냐, 새끼야?”
맥켄지는 별안간 자신을 제 형에 비유하며 비꼬는 캔디스의 말에 열이 올랐다. 그는 빈말이라도 그 저능아 같은 러트 도노반과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캔디스에게 대꾸를 하지 않겠다고 했던 다짐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 시팔놈이… 어디서 그딴 좆같은 말을.”
“하하….”
발작하는 맥켄지를 보며 캔디스가 억지로 웃었다. 하지만 곧 참을 수 없는지 바로 정색을 하며 물었다.
“따먹었어?”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
“…더럽다더니? 더럽다고 안 처먹었던 거 아니었어?”
이를 갈며 말하는 캔디스에게 맥켄지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내 걸 먹는데, 네가 왜 지랄이야?”
“…….”
“네가 하도 노예한테 목매서 궁금했어. 대체 저 닳고 닳은 새끼가 발정 나서 안달복달 못 하는지.”
툭하니 말하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
“어땠어?”
무언가 안달이 나 보이는 캔디스의 표정이 맥켄지는 너무도 통쾌했다. 캔디스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정통 있는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영식이었고,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후계자 수업을 들은 덕에 맥켄지보다 본심을 숨기는 것도, 세 치 혀를 휘두르는 것에도 능숙했다. 그것은 맥켄지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었다.
그런데 그 스와포네가 잔뜩 안달이 나서 오줌 마려운 개처럼 낑낑거리는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는 매우 유쾌했다. 그래서 캔디스의 속을 더 긁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말했다.
“별거 아니던데?”
“…….”
“개 눈에는 개만 보인다고, 너랑 딱 수준이 맞나 보다. 저 새끼가.”
캔디스가 자신을 모욕하는 맥켄지의 싹퉁바가지 없는 주둥이를 주먹으로 갈기려고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멈췄다.
그의 시선에는 창백하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노예가 보였다.
노예의 표정이 처참했다. 잔뜩 상처 받은 것이 분명한 그 가련한 모습에 캔디스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리고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차츰 펴졌다.
스와포네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
캔디스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너자는 맥켄지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져 클레이를 사격하는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탕탕거리며 총이 갈겨지는 소리가 났다.
너자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그의 정신을 갈퀴고 들어오는 무서운 총의 소리와 조금 전에 들었던 너무도 아팠던 말이 떠올랐다.
-별거 아니던데?
-…….
-개 눈에는 개만 보인다고, 너랑 딱 수준이 맞나 보다. 저 새끼가.
너자는 제국어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맥켄지가 내뱉은 말은 아주 잘 이해했다. 맥켄지에게 있어 자신은 천한 개새끼와 같았고 캔디스와 자신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했다.
너자는 넘어올 것 같은 속에 입가를 양손으로 꾹 내리눌렀다.
혼란스러웠다. 어제는 대체 뭐였지?
그렇게 달콤하게 키스해 줬으면서, 더러운 곳을 맛있다는 듯 핥고 빨았으면서, 미친 듯이 자신을 탐했으면서, 믿을 수 없는 쾌락을 나한테 알려 줬으면서….
아침에 세뇌하듯 괜찮다고 자신을 타일렀다. 하지만 본인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그 말은 너무도 아팠다.
그때였다. 멍청하니 서 있는 그의 손을 누군가가 커다란 손으로 부여잡고 숲 안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너자는 자신의 손을 뜨거운 손으로 맞잡은 그 손의 감촉에, 자신을 강하게 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넓은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밝은색으로 빛나는 애쉬 블론드의 짧은 머리카락이, 어느새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며 싱긋 웃고 있는 미남자에 이를 악물었다.
캔디스는 눈물을 훌쩍이며 고개를 수그리고 순진하게 자신을 따라오는 노예를 보며 뱀처럼 웃었다.
교활한 스와포네는 노예를 데리고 숲 안으로 들어오기 전, 방해받을 것 같은 모든 경우의 수를 차단했다. 그는 일단 수업에 따라가지 못하는 저능아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격 기사 이스트에게 가 넌지시 권했다.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학우들을 위해, 제국의 자랑!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 맥켄지 도노반 씨에게 제대로 된 시범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게 어떱니까?
사격장 안의 모든 학우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한 캔디스 때문에 지금껏 곁눈질로만 맥켄지를 보며 그의 기술을 훔쳐가려던 영식들이 눈을 크게 떴다. 캔디스는 한순간에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황홀감을 느꼈다. 덤으로 묵묵히 클레이를 조지다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쳐다보는 도노반의 표정 또한 짜릿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솔직히 다른 제국의 영식들이 이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유가 사격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요.
스와포네 가문 특유의 화려하고도 사람을 홀리는 언변은 짧은 시간에 군중을 사로잡았다. 캔디스는 점점 달아오르는 군중심리를 마음껏 이용하며 말했다.
-그러면 선민의식을 보여 드려야죠, 우리 이베아 제국의 보석 맥켄지 도노반 씨의 시범 사격!
그의 말에 다른 왕국의 영식들은 물론 제국 내 캔디스의 무리 영식들까지 열광했다. 평소라면 맥켄지의 눈치를 보느라 억눌렸겠지만 캔디스 스와포네는 맥켄지 도노반과 같이 이베아 제국의 정통 있는 공작 가문의 예비 가주였다. 도노반 후작 가문보다, 혹은 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영식이 판을 깔아 주니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사격장은 금세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워졌다. 캔디스의 말을 들은 사격 기사 이스트도 구미가 당기는지 어이없는 얼굴로 서 있는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사격 기사 이스트가 그를 바라보니 사격장에 있는 모든 이가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캔디스가 마무리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 맥켄지 도노반 씨가 시범 사격을 보여 주시면 귀사의 평판과 그것을 총괄하는 도노반 씨의 명예가 크게 올라갈 것이지요.
-…뭔 좆같은….
-도노반 씨가 차남이라 모르나 본데, 보통 가문의 예비 가주들은 이런 자리에 스스럼없이 나선답니다.
-…….
맥켄지는 쉴 새 없이 정신이 나간 소리를 해대는 캔디스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가 앉으려고 했다. 분명 아까 자신이 말로 엿먹인 것의 복수다. 응할 가치가 없었다. 그가 더러운 것을 들었다는 듯 귀를 털어내며 뒤돌려는데 곧 이어지는 캔디스의 도발에 멈춰 섰다.
-…러트 도노반 씨랑 이것마저 똑같네요.
맥켄지의 역린을 들먹인 캔디스는 스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러트 도노반 씨도 잘 해 보라고 판을 깔아 줘도 받아먹질 못하던데요. 주목받는 것에 잔뜩 얼어서는 벌벌 떠는 게 어찌나 가엽던지….
너무 가여워 저번 예비 가주 모임에서 일찍 집에 보내드렸지요. 캔디스의 말에 학우들이 술렁였다. ‘그’ 도노반 가문의 예비 가주 말이야? 도노반 가문의 가주가 그랬대? 그런 사람이 가주가 될 수 있나? 도노반 가문의 가주가 그 정도면 다른 가족도….
그의 개수작에 말려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맥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일자로 세워 놨던 산탄총을 들고 장전하며 말했다.
-수업에 쓰이는 모든 총을 가져와.
맥켄지의 행동에 사격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열광했다.
물론, 캔디스도.
맥켄지는 불이 붙은 듯 앞에 나서서 아주 세밀하고 중요한 정보만 빼고 총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사업 개요서에도 필수로 들어가는 항목이고 이 정도는 다른 왕국의 기술팀도 아는 사실이다. 뭐, 그리고 시범 사격을 보여 줘 봤자 이것을 제대로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맥켄지는 다른 가문에, 다른 나라의 기업과 왕실에 수출용 총기를 팔 때 하던 프레젠테이션을 그대로 행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 대표는 맥켄지 도노반이었고 그는 15살 무렵부터 가주를 따라다니며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했다. 그에게 이런 것은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것보다 쉬웠다. 그의 말은 물이 흐르듯 매끄럽고 쓸데없는 어구 없이 필요한 단어만 골라 말했다.
어떤 영식은 맥켄지의 프레젠테이션을 필기까지 해 가며 듣고 있었고, 기억력이 좋지 않고 필기구가 없었던 어떤 영식들은 맥켄지의 말을 구간을 나눠 외웠다.
제국 아카데미에서 그 어떤 과목의 강의 시간도 이렇게 뜨겁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캔디스가 열등감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자신의 손에 들어올 노예와 맥켄지 도노반을 거하게 엿 먹일 상상을 한 그가 빙긋 웃었다.
캔디스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먼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고 조용히 말했다.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그의 말에 캔디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 행정부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사격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직원은 맥켄지의 프레젠테이션을 정신없이 듣고 있던 이스트에게 가 무슨 말을 했고, 이스트가 한참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맥켄지에게 조용히 다가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스트의 말을 듣는 맥켄지의 나른한 얼굴이 귀찮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에 뒤에서 같이 듣고 있던 그레머가 맥켄지에게 뭐라 말을 하더니 그레머는 행정부 직원과 함께 사격장을 나섰다. 그러다 맥켄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근처에 대기 중이던 샬로메를 불러 무언가 말했다. 그리고 샬로메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레머와 행정부 직원의 뒤를 따랐다.
끝맺음이 확실한 맥켄지는 잠시 멈춘 프레젠테이션에 양해를 구하고 다시 자리에 가 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 새끼는 어렸을 때부터 영업을 하러 다녀서 제 프레젠테이션을 무조건 완벽하게 하려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 맥켄지 도노반은 섬세한 부분에서 아둔했다.
그렇게 노예에게 집착하면서 노예를 나흘 동안 혼자 아카데미에 처박아 놓고 색사의 냄새가 가득한 노예를 수업에 데려왔다. 노예에게 애착이 있다면 그러면 안 됐다. 아예 꽁꽁 싸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박아 놓거나 아예 무관심한 척으로 일관해야 했다. 이따위로 애매하게 구니 나 같은 놈이 튀어나온 것이다.
분명 자신이 노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 야심한 밤에, 아무도 없을 때 손을 쓰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까 네가 차남인 거야.
캔디스는 싱긋 웃으며 비아에게 제 아카데미 재킷을 건넸다. 재킷을 건네받은 비아는 그것을 공손히 받아들고 제 시종 옷 베스트 위에 걸쳐 맥켄지의 시선이 바로 닿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고개를 숙이고 팔을 괸 채 가만히 있었다.
비아는 머리카락 색과 덩치가 캔디스와 비슷했다.
캔디스는 약간의 시간을 두다가 비아를 힐끔 보는 맥켄지의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원래 거사는 벌건 대낮에 이루어진단다. 애송아.”
그러니 네가 차남인 거야.
캔디스는 구석에서 음울한 얼굴을 하고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맥켄지의 휘핑보이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너자를 끌고 가는 캔디스는 쉴 새 없이 걸었다. 말이 걷는 것이지 거의 뛰는 것과 진배없었다. 너자는 자신을 데리고 가는 캔디스에 처음에는 아무 반항 없이 따라갔다. 하지만 점점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와 허벅지에 정신이 점점 들었다.
아까는 맥켄지의 아픈 말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너자가 캔디스에 대한 거부감과 다시 맥켄지에게 돌아가고 싶어 잡힌 손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의외로 캔디스의 강한 악력과 나흘 동안 캔디스와 맥켄지에게 육체적으로 학대를 당한 너자의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코만치에 있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너자는 코만치 전사 중 알파였다. 그만큼 체력과 힘이 가장 셌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 때 그 하얬던 기사에게 갈겨 맞은 총알 두 발이 너자의 몸을 좀먹어 갔다.
“…어?”
너자의 입에서 묘한 탄성이 뱉어졌다. 그때 그 기사… 뭔가 떠오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 년 동안 아주 징글징글하게 봤던 놈이었는데 마치 뇌가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듯 그 기사의 모습이 흐리멍덩하게 생각났다.
그때 앞에서 너자를 끌고 가던 캔디스의 걸음걸이가 더욱 빨라졌다. 그의 행동에 너자는 쓸데없는 생각을 멈췄다.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자는 캔디스의 걸음을 멈추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몸을 뒤로 빼 그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리알 같은 까만 눈알이 도르륵거리며 사방을 훑었다.
몸과 정신은 썩어 갔지만 지능은 그대로였다. 너자는 아까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지나왔던 길과 지금 지나는 길을 빠르게 복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걸음이 멈췄다. 너자는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꽤 깊은 산중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열 걸음 떨어진 정도의 길에 묘한 경계선이 있고 푹 꺼진 것 같은 시야를 보건대 아마 높이가 꽤 되는 절벽이거나 아래에 단층이 있는 곳 같았다. 어렴풋이 물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너자는 캔디스가 자신을 데려온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땀이 조금씩 뱄다. 아까 캔디스와 맥켄지의 언성이 높았고 그들은 당장에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 같았다. 눈치로 보건대 캔디스는 이 나라의 꽤 높은 가문의 영식일 것이다. 그런데 맥켄지에게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받은 게 열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없애 버리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강간하거나.
제대로 된 반항을 할 수 있을까. 만약 캔디스를 상처 입히면 자신의 목쯤은 홀랑 잘려 버릴 것이다. 도망도 제대로 못 칠 것이고 최악의 경우 귀한 집안의 영식인 캔디스를 해한 죄를 범한 노예를 가진 맥켄지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사실 너자는 캔디스가 무서웠다. 아무리 그가 살가운 척 굴어도,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물어봤고 불러 줬어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단 캔디를 입에 넣어 줬어도, 맥켄지가 내뱉은 아픈 말에 당장에라도 사라져 버리고 싶었을 때 자신을 데리고 도망쳐 줬어도, 조금이라도 그가 표정을 굳히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쏟아질 폭력과 옷을 벗긴 후 강간할 그 행동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캔디스는 잔뜩 예민해진 노예의 표정을 힐끔 바라보았다. 항상 음울하게 내려앉은 노예의 얼굴이 꼬리를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캔디스의 음심을 꽤 동하게 했다.
그가 마주 잡은 노예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
너자는 자신이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싼 그의 행동에 몸을 더 굳혔다. 잔뜩 독이 오른 고양이 같았던 너자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렇게 무서워했으면서 이렇게 조금 잘해 준다고 마음이 풀어진다. 마치 주인에게 학대당한 개가 주인을 무서워하면서도 주인이 제 입에 고기를 물려 주면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자신의 꼴에 맥켄지가 자신을 가축 취급하는 게 이해되었다.
그런 노예의 감정 상태는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캔디스에게 훤히 읽혔다. 이렇게 어수룩하다. 때리고 강간을 하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꼬리를 흔들어댔다. 도노반은 참으로 멍청했다. 이렇게 다루기 쉬운 놈을 그따위로 다루니 애가 이러지.
그놈의 정신 상태가 멀쩡했으면 노예라도 제가 애정하는 것에게 사랑을 쏟았을 것이다. 나라면 그랬을 거야. 노예를 정부로 맞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손가락질 조금 받으면 되는 거였다. 온갖 귀한 것으로 노예를 둘둘 싸서 마음을 흐물흐물하게 녹여 나만 바라보게 할 것이다. 그러면 별 잡스러운 놈팡이가 들러붙어도 콧대가 높아진 노예는 상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겨우 손 한번 부드럽게 잡아 줬다고 철옹성 같은 마음이 땡볕 밑에서 녹아 버린 버터처럼 풀어져 괴로워하지 않을 테지.
하지만 맥켄지의 행동도 조금은 이해가 가기는 했다. 노예는 학대하면 학대할수록 뭔가 처연하게 물들었고 그 처연한 느낌이 너무도 야했다. 마치 드뷔시같이 용맹하고 아름다운 남자가 제 손에 울고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사내를 미치게 하였다.
캔디스는 노예가 도도하게 구는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아주 조그마한 친절에도 감동받아 꼬리를 흔들며 처연한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뭐, 평생 노예에게 어린애 같은 집착만 할 것 같았던 놈이 노예를 따먹은 건 의외였다.
캔디스의 속이 또 뒤집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좀 달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는 한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누군가가 차가운 얼음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마치 심장이 온찜질과 냉찜질을 반복적으로 하는 듯한 그 좆같은 느낌에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너자는 별안간 손을 부러뜨릴 것같이 세게 쥐어 잡은 캔디스에게 그만하라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캔디스의 손아귀 힘은 더욱 강해졌다. 너자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파요….”
억지로 빼내려다가 결국은 아프다며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자신이 애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실제로 캔디스는 아프게 누르던 손아귀의 힘을 뺐다. 하지만 너자가 손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캔디스는 화난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하고 너자를 바라보았다. 둘의 키는 엇비슷했기 때문에 눈을 맞추는 시선이 같았다. 결국 먼저 눈을 돌린 건 너자였다.
캔디스는 기본적으로 비굴한 사람을 역겨워했다. 그런데 눈앞의 노예는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들었다. 캔디스가 노예의 손등에 얹어 놨던 커다란 손을 노예의 왼쪽 뺨에 가져다 댔다.
너자는 바로 뺨에 느껴지는 뜨끈한 손바닥의 온기에, 이윽고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캔디스가 유순히 내리깔린 노예의 유리알 같은 눈을 보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좋았니?”
앞뒤 다 잘라먹고 묻는 캔디스의 질문에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던 까만 너자의 눈이 그의 눈과 맞닿았다. 마치 잡아먹을 듯 나른하게 웃는 캔디스의 얼굴에 너자의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지금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너자의 눈이 황급하게 내려갔다. 너자의 입안에 별안간 침이 고였다. 그의 미소를 본 순간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보았던 캔디의 달콤함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마치 순진한 시골 처녀처럼 구는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의 여유로운 낯짝이 일그러졌다. 캔디스가 아까보다 좀 더 뜨거워진 손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노예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차마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노예에게 말했다.
“자… 나 봐야지. 지금 끼 부릴 때가 아니야.”
너자의 눈이 껌뻑였다. 가끔 캔디스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사용했다. 끼가 뭐지, 하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캔디스가 미치겠다는 듯 노예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풀고는 비어 있는 오른쪽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게 말했다.
“작정하고 홀리네, 나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속해서 이상한 질문을 해대는 캔디스에게 너자가 그때 배웠던 존대를 기억해 내며 유순히 말했다. 캔디스는 그런 노예의 순진한 모습에 애가 탔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캔디스가 다시 말했다.
“도노반이랑 떡 쳤어?”
“…….”
또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너자가 잘생긴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캔디스를 바라보자 그가 픽 하고 웃었다. 그리고 너자의 한쪽 뺨을 잡았던 오른손을 내려 그의 한쪽 엉덩이를 옷 위로 꽉 쥐었다.
“…하지 마세요.”
거부하는 말에도 캔디스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노예의 눈에 눈을 맞추며 엉덩이를 함부로 주물거렸다. 그러다 손바닥을 좀 옮겨 중지를 노예의 엉덩이골 사이에 가져다 댔다.
경기를 일으키는 노예의 몸을 순간적으로 양손으로 끌어안고 노예의 귓가에 단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랑 했던 거, 도노반이랑도 한 거야?”
“…….”
이제야 알아들은 너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달아올랐다. 노예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맞대었던 캔디스는 점점 따끈해지는 노예의 피부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노예에게 도노반의 색노가 되라고 부추긴 건 본인이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노예를 마음껏 따먹었다. 자신도 노예가 홀랑 뒈져 버려 아까운 구멍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도노반이 노예를 색노로 쓴다면 자신도 부담 없이 노예를 불러내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자는 자신의 허리춤과 엉덩이를 쥐고 있는 캔디스의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캔디스는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노예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노예가 버거운 듯 억, 하고 소리를 냈지만, 그것은 알 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속이 너무 답답했다. 그래서 그걸 당장에라도 분출해야 했다. 그가 말했다.
“좋았어?”
너자는 캔디스의 무례한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쳤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너자를 근처에 있는 나무에 콱 밀었다.
윽! 너자는 단단하고 거친 나무에 세게 박은 탓에 비명을 질렀다. 나흘 내내 캔디스와 맥켄지에게 혹사당한 허리와 엉덩이가 작살 날 듯 아팠다. 너자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캔디스는 자신과 나무 사이에 끼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노예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내가 알려 준 건 잘 써먹었니?”
“…….”
“빠는 것도 알려 주고, 엉덩이 벌리는 것도 알려 줬잖아. 잘했지?”
수치스러운 말을 지껄여대는 캔디스에 너자가 질겁을 하며 도리질을 했다. 그런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가 달게 웃었다. 그러다 자신의 무릎을 이용해 노예의 중심부를 세게 눌렀다.
“아… 아파요…!”
급소를 눌려 아파하는 노예에게 캔디스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아프라고 한 건데.”
“…하지 마세요….”
“싫어.”
캔디스의 무릎에 힘이 더 들어갔다. 생물학적으로 제일 취약한 곳을 눌린 노예가 괴로워했다. 성적인 의도도 없이 고통만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그리고 캔디스는 그런 노예의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냥 떼 버리자. 너 어차피 이거 쓸 일도 없잖아.”
“시… 싫….”
“…그거 알아? 우리 제국에는 별의별 게 다 있어. 우리는 네가 무서워하는 총도 있고, 엄청나게 신성한 신도 있어. 신들의 사제는 기적을 행하지, 또 신성력으로 병자를 치료하지 못할 때는 사람의 기술로 치료를 하는 닥터도 있어. 왜, 너 배에 구멍 뚫려서 뒈질 뻔했을 때,”
캔디스의 손이 겨우 아물어 피부가 붙은 노예의 상처에 닿았다. 그리고 꽉 눌렀다.
“악!”
“여기 치료한 사람이 닥터야. 그런데 있지….”
“아파… 아파!”
“…‘특별한’ 닥터도 있어.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캔디스가 괴로워하는 너자의 뺨에 자신의 뺨을 비비다가 노예의 귀에 입술을 맞댔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남자 자지를 떼서, 여자의 질처럼 만들 수 있는 닥터가 있대.”
“…아프다고!”
“그런데 소문으로는… 안에 자궁도 만들어 낼 수 있다더라.”
그런데 무지하게 비싸대. 웬만한 성 한 채 값이라던데. 캔디스는 너자의 몸부림을 앙탈로 받아들이다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난 돈이 많으니까… 할 수 있어.”
“아! 저리… 악!”
“네가 내 애를 임신하면 얼마나 좋을까.”
너자는 아파 죽겠는데 개소리를 해대는 캔디스를 달달 떨리는 양손으로 밀어냈다.
“…어떻게 해야 도노반이 널 버릴까.”
“아파… 아파요… 제발 놔주세요.”
제발요. 너자의 입에서 굴종의 말이 새어 나왔다. 캔디스의 눈이 번쩍였다.
윽! 으! 하지 마!
너자가 입술에 닿는 캔디스의 입술에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할 정도로 노예의 고갯짓에 따라다녔고 결국 노예의 입술을 탐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노예의 양 뺨을 세게 쥐어 눌렀다. 여린 살이 눌리며 치아가 벌어졌다. 그는 달달 떨려대는 노예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어 함부로 섞었다.
노예는 몸이 아프지도 않은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제 중심부가 아프게 눌리는데도 씩씩하게 반항했다. 그리고 그 반항이 캔디스의 음심을 자극했다.
그때였다.
캔디스는 자신의 뒤통수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감았던 눈을 떴다.
맥켄지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장 떨어져라, 창놈아.”
“…아, 왜 이렇게 빨리 와.”
“…진짜 대가리 터지고 싶냐?”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캔디스가 웃으면서 노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너자는 드디어 떨어진 캔디스의 몸뚱이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싫었는지 노예의 눈에는 물기가 한가득이었다.
맥켄지의 호수 같은 눈이 더욱 새파래졌다.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캔디스에게 리볼버를 갈겼다. 탕! 하고 그의 리볼버에서 장전된 총알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의 총알은 캔디스를 맞히지 못했다.
비아가 자신의 주인을 총선에서 비켜나가게 한 탓이었다. 비아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다. 비아는 자신의 허리춤에 숨긴 단도를 빼냈고 어느새 같이 달려온 샬로메가 맥켄지의 앞을 가로막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캔디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시팔, 진짜 대가리 터트리려고 했네! 이게.”
“좆같은 놈아, 내가 개수작 부리지 말랬지.”
맥켄지와 캔디스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캔디스가 꼴사납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던 몸을 일으키고 이를 갈며 말했다.
“감히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예비 가주를 죽이려고 했어?”
“너야말로 내 물건을 훔쳐가?”
그들의 해묵은 증오가 분출되었다. 샬로메와 비아는 제 주인들의 분노가 좀 가라앉기를 원했다. 여기에서 싸움이 번지면 서로 좋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제 주인의 안위를 위했다. 그래서 서로 칼을 빼 들고 있었지만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샬로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련님, 도련님의 손에 더러운 피를 묻힐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이 커지면 저 가문과 지독하게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 노예를 가지고 들어가는 게 좋습니다. …살인 미수는 정말 큰 죄입니다….”
비아도 입을 열었다.
“주인님,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가주님께서 경을 치실 겁니다. …노예 절도는 꽤 큰 범죄입니다….”
그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서로 저지른 죄질이 나빴다. 그들은 끓는 점이 낮을 뿐 머저리는 아니었다.
맥켄지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캔디스를 노려봤다. 그리고 잔뜩 겁먹은 노예의 손목을 함부로 쥐어 끌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에 노예가 제대로 서지 못하자 맥켄지가 제대로 서지 못하겠냐고 윽박지르려고 할 때 뒤에 있던 캔디스가 노예의 몸을 끌어안아 제대로 서게 했다.
그에 맥켄지가 발작을 하려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캔디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자가 무서워하잖아. 조심히 다뤄 줄래?”
“…뭐?”
“너자가 무서워한다고.”
“뭔 좆같은 소리야. 그게 뭔데.”
알아듣지 못하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네 노예 이름도 몰라?”
“…뭐?”
맥켄지가 머저리같이 되물었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너자가 그의 표정에 겁먹고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캔디스가 싱긋 웃으며 너자의 어깨를 상냥하게 쥐어 맥켄지의 앞으로 밀었다.
맥켄지가 잔뜩 얼어붙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노예의 모습을 보며 캔디스에게 물었다.
“…노예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화가 난 게 분명한 맥켄지의 목소리에 캔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너자가 알려 줬어. 그치? 네가 나흘 전에 알려 줬잖아.”
“…….”
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탓에 너자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너자가 머저리같이 아무 말 못 하고 있을 때 가만히 듣고 있던 맥켄지의 눈이 조용히 캔디스와 노예를 훑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나흘 전?”
그의 물음에 캔디스가 답했다.
“어. 나흘 전에 네 독채에 놀러 갔는데 얘 혼자 있더라고.”
“…….”
“그래서, 같이 놀았지. 사흘 내내.”
“…뭐?”
캔디스가 근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 썼다. 사흘 동안.”
“…….”
“아, 나 먹튀 하고 그런 상도덕 없는 놈 아니야. 내가 너 원하는 것 다 들어줄게. 그 뭐지? 너 전에 너희 회사 지분 더 갖고 싶다고 했지? 그걸로 하자. 나 사실 몇 주 더 있거든.”
“…….”
“다른 것도 괜찮아. 한번 생각해 보고 나 찾아라?”
캔디스가 몸을 떨어대는 노예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버려지면 나한테 와. 네가 손발 하나 정도 잘려서 없어도 기쁘게 받아들여 줄게.”
캔디스가 얼이 빠져 자신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노예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비아와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캔디스가 사라졌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조용한 자리는 소름 끼치는 적막감만 감돌았다.
맥켄지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노예의 앞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헉, 하고 노예가 잔뜩 겁먹어 숨을 들이 삼키는 것을 보며 맥켄지가 조용히 물었다.
“스와포네가 한 말, 사실이야?”
“…….”
“…나 없는 사흘 동안, 저 새끼랑 붙어먹었어?”
샬로메는 답도 하지 못하고 창백하게 질려 있는 노예를 보며 신음을 내뱉었다.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스와포네가 노예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했는데 설마 주인이 없는 집에 무단침입을 해서 노예를 강간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 있던 샬로메의 귀에 노예의 비명이 들렸다. 정신을 차린 샬로메가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련님!”
샬로메가 사색이 되어 맥켄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노예의 오른쪽 발목을 밟고 있는 제 주인을 감히 말렸다. 그의 귀에 맥켄지가 중얼거리게 들렸다.
“내가 너무 물렀지.”
“…네?”
“사지가 멀쩡하니까 몸을 굴려 먹을 생각을 하는 거야.”
샬로메는 순간 자신이 들은 미친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최대한 맥켄지를 말리려고 할 때 맥켄지의 눈알이 또륵, 하고 샬로메에게 향했다.
“…….”
그는 자신보다 작았고 마치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런데 엄청난 위압감이 들었다. 샬로메가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에 그의 팔을 잡아당기던 것을 멈췄다. 공손한 샬로메의 모습에 맥켄지가 말했다.
“…집에서 키우는 새는 날개를 잘라야… 못 도망가지.”
“…….”
“노예의 오른쪽 다리를 부러뜨리렴.”
“…….”
샬로메가 아찔한 정신에 눈을 꽉 감았다. 그는 제 주인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래, 이건 맥켄지 치고는 아주 가벼운 벌이였다. 맥켄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불손하게 보는 사람의 눈을 망설임 없이 뽑아 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였다.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뼈는 다시 붙는다.
샬로메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말하며 그의 오른발을 집어 들었다.
“미안하다. 금방 끝내 줄게.”
가뿐한 마음으로 걷던 캔디스는 멀리서 들려오는 노예의 비명 소리에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샬로메의 손이 물렀다. 그래서 너자는 한 번에 발목이 부러지지 않아 더 고통받았다. 하지만 새파란 멍과 검붉게 감겨 있는 손자국에 그의 양심이 못하겠다며 샬로메의 행동을 무르게 만들었다.
“욱… 으… 으으…!”
샬로메는 체념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노예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수록 노예는 더 고통받는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예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가 노예의 오른발에 신긴 신발을 벗겨냈다. 발목 밑까지 오는 신발을 벗겨내니 양말을 신지 않아 노예의 하얀 살결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드러난 노예의 발은 햇볕을 잘 받지 않은 부분이어서인지 다른 곳보다 하얬고 커다란 발등에 툭 하고 불거진 핏줄은 하얀 피부 덕에 더욱 파래 보였다.
샬로메의 눈알이 또륵 하고 저도 모르게 노예의 발등부터 까만 바지 밑단에 슬쩍 보이는 복숭아뼈를 훑었다. 한 손에 잡은 노예의 발목은 몸집보다 얇았고 그 얇은 발목에 뱀처럼 감겨 있는 손자국이 야해 보였다. 그 묘한 간극에 샬로메의 손바닥이 땀에 절어 갔다.
그가 주인의 명령을 행하려 노예의 발등을 잡으려는 순간 그의 머리통에 소름이 끼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침착하게 노예의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통에 리볼버를 댄 주인에게 말했다.
“저는 노예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아닌데.”
냉정하게 부정하는 맥켄지에 샬로메가 최대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맥켄지는 감히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는 샬로메의 머리통을 날리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그는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는 주인에게 말했다.
“저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무표정을 지었다. 맥켄지의 눈썹이 위로 까딱이며 리볼버의 해머(공이치기)를 엄지로 뒤로 당겼다. 격발 준비였다.
딸각, 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한 방에 부러뜨릴까 견적 내고 있었습니다.”
“…….”
“정말입니다.”
“…….”
샬로메는 살고자 하는 진심을 담아 맥켄지에게 말했다.
“살려 주세요.”
맥켄지가 차가운 눈으로 샬로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로메의 면상에 겨누었던 리볼버를 내렸다. 그리고 실린더를 밀고 약실을 개방하며 말했다.
“눈깔 조심해라.”
세상에, 위대한 드뷔시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속으로 자신에게 운을 내려 준 전쟁의 신에게 찬사를 한 샬로메가 재빠르게 답했다.
“넵.”
맥켄지는 냉정한 표정으로 혹시 모를 오발을 방지하기 위해 실린더 축을 눌러 탄피를 빼며 조곤조곤 말했다.
“내가 요즘 자동식 리볼버 개발 중인 거 아니?”
“넵. 모를 리 없죠.”
2차 테스트 완료됐고 마지막 3차 테스트만 통과되면 바로 양산되는 거잖습니까. 그리고 그 프로젝트로 도련님은 총기 설계 천재라고 찬사를 받고 있구요. 큰 도련님께서 이것 때문에 한참 발작하셨잖아요.
샬로메는 살기 위해 아양을 부렸다. 하지만 꿀에 발린 듯 매끄러운 그의 찬사에도 맥켄지의 얼굴은 요지부동이었다. 샬로메의 손바닥에 땀이 좔좔 흐르기 시작할 때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게 콜트(자동식 리볼버)였으면 네 대가리는 진즉 터졌을 거야.”
소름이 끼치는 말을 조곤조곤히 하는 맥켄지에 샬로메가 재빠르게 고개를 땅에 대며 말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해라.”
“넵!”
씩씩하게 말한 샬로메가 다시 노예의 발을 부러뜨리려 그의 발을 집으려고 할 때 맥켄지가 말했다.
“멈춰.”
넵! 샬로메가 재빠르게 양손을 위로 올렸다. 샬로메는 제 목숨이 너무도 귀해서 수치도 모르고 굽신거렸다. 맥켄지라면 평민인 샬로메를 죽여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신을 아직도 죽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맥켄지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착즙한 샬로메가 제 주인의 길에 방해가 될까 봐 옆으로 구르듯 비켰다.
비아가 먼저 떠나 버린 게 다행이었다. 이 우스운 꼴을 보였다면 샬로메는 수치심에 자살했을 것이다. 샬로메가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맥켄지가 노예의 앞에 양아치처럼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눈을 꽉 감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예를 바라보며 말했다.
“눈 떠.”
맥켄지의 말에 감겨 있던 너자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얇은 눈꺼풀이 올라가며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나자 맥켄지의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배가 뜨겁게 들끓었다.
저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자신의 허락도 없이 감히 스와포네와 붙어먹었다. 그것도 자신이 안기 전에 사흘 내내 안겼다고 했다. 그 더러운 곳에 제 것을 집어넣었다.
맥켄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노예의 발목을 함부로 들어 올리고 남은 한 손으로 노예의 하얀 발을 억세게 잡았다.
흡… 노예의 숨이 급하게 들이쉬어지며 눈이 감기려고 하자 맥켄지가 말했다.
“발 잘라 버리기 전에 눈 떠.”
소름이 끼치도록 냉정한 그의 목소리에 너자가 억지로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 맥켄지는 눈물이 고인 음울한 표정의 노예에 화가 불같이 났다. 잘못은 노예가 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스와포네에게 가고 싶은 건가? 그러고 보면 노예는 몇 번이나 그놈과 붙어먹었다. 그놈의 자지가 좋은 게 틀림없다. 그 창놈 새끼는 사생아나 만들고 여러 사람과 난잡한 관계를 가지는 쓰레기 같은 새끼였다. 내가 그놈보다 못한 게 뭔데? 너는 내 건데? 안 뺏겨. 너는 내 노예야.
비뚤어진 욕망이 맥켄지의 사고를 뒤덮었다. 맥켄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노예의 발목을 물에 젖은 빨래를 쥐어짜듯 비틀었다.
우드득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노예의 낮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바뀌어 비명을 질렀다.
노예의 발은 정상적인 발이라면 절대로 될 수 없는 각도가 되었다. 하지만 맥켄지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비틀었다.
아아악!
노예는 무척 괴로워하며 결국 눈을 뒤집어 까고 정신을 잃었다.
그 냉정하고 소름 끼치는 맥켄지의 행동을 본 샬로메가 고개를 숙였다. 다 제 탓이었다. 자신이 처음부터 제대로 한 번에 노예의 발을 부러뜨렸다면, 깨끗하게 부러뜨렸다면 그래도 뼈가 잘 붙었을 것이다.
맥켄지는 노예의 뼈를 아예 으스러뜨려 놨다. 저건 가망이 없었다. 분명 노예는 뛰는 것은 물론 걷는 것도 잘 하지 못할 것이다.
“…….”
맥켄지는 까무룩 기절해 버린 노예의 가련한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위로 올라가며 웃는 낯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샬로메에게 말했다.
“가자.”
그는 먼저 앞장서 걸었다. 샬로메는 그 냉정한 주인의 모습에 다시 트집이 잡힐까 기절한 노예를 어깨에 들쳐메 빠른 걸음으로 주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그때 샬로메가 주저하며 말했다.
“…내일이면 사제가 돌아온다 들었습니다.”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가 냉정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그의 말에 샬로메가 대가리에 총에 맞을 각오를 하며 말했다. 이 사달이 난 건 제 탓이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사제를 모셔올까요?”
“…….”
불안하게 아무 말 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맥켄지의 모습에 샬로메가 변명을 하듯 말을 이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근육이 괴사해서 결국은 잘라야 할 것입니다.”
“…….”
“그래도 조금은 거동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발 한 짝 없는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도련님의 품위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도 제 발로 절뚝여서라도 걸어야 도련님께서 편할 것입니다.”
말을 끝맺은 샬로메가 재빠르게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맥켄지의 손은 리볼버를 꺼내려 허리춤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쉰 샬로메가 말했다.
“닥터에게 보여 줘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사제의 기도를 받는다고 해도 완전히 낫지는 않겠지?”
긍정적인 맥켄지의 답에 샬로메가 재빠르게 말했다.
“그럼요! 이건 회복 불가능합니다. 노예는 평생 뛸 수 없고 절름발이로 살 것입니다.”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는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샬로메의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한참이 흘러도 답이 없는 그에게 샬로메가 다시 말을 걸려 할 때 그가 말했다.
“그러렴.”
그레머는 일을 마치고 독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머는 일이 나도 크게 난 것 같은 기분에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꿀벌처럼 같은 자리를 뱅뱅 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피곤하구나. 방해하지 말렴.”
제 침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의 뜻을 알아차린 그레머가 재빠르게 알겠다 했다. 시종의 재빠른 처신에 맥켄지는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제 침실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레머가 재빠르게 현관을 나섰다.
“샬로메 경!”
그레머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샬로메를 보며 반색을 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려진 노예의 모습을 보고 몸을 굳혔다. 샬로메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묻는 그레머에게 말했다.
“도련님이 노예의 발목을 작살내 놨어.”
샬로메의 말에 그레머의 시선이 노예의 발목에 떨어졌다. 그리고 덜렁덜렁거리며 힘없이 흔들리는 보라색의 발목을 보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도 안 잘렸네.”
“어… 난 그 자리에서 발목을 잘라 버리거나 노예 머리통을 날려버릴 줄 알았다니까.”
도련님이 노예를 꽤 아끼나 봐. 제정신이 아닌 말을 해대며 그레머와 샬로메가 독채 안으로 들어갔다. 기절한 노예를 어디에 둘까 얘기를 하다 그레머의 방 침대에 놓기로 했을 때, 맥켄지가 침실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한참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그레머와 샬로메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서서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맥켄지가 말했다.
“이리 데려와.”
그 말을 한 뒤 침대 옆 일인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레머와 샬로메는 혹여라도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까 재빠르게 노예를 맥켄지의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내려놓는 것도 꽤 충격이 큰지 노예는 고통스럽게 앓았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명령했다.
“의무실에 가서 닥터를 데려와. 그리고 내일 사제가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바로 데려오고.”
그의 명령에 샬로메가 재빨리 침실을 나섰고 의무실을 향해 뛰어갔다. 그레머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가 욕실에 있는 작은 대야에 찬물을 담고 거즈를 챙겼다. 닥터와 사제를 데리고 오라고 하는 것은 치료를 위함이니 병간호를 해도 될 것이다. 그레머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앓아대는 노예를 닦일 요량이었다.
대야와 거즈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던 그레머가 걸음을 멈췄다.
“…….”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은 맥켄지가 노예의 덜렁이는 발목을 들어 올렸다.
…아예 뽑아내려고 하시나? 그레머가 불안함에 입술을 짓이기고 있을 때, 맥켄지가 기절한 노예의 얼굴을 보며 노예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
그레머가 조용히 침실 문을 닫았다.
치료를 받았음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너자는 극심한 고통에 괴로워했다. 고작 다리 하나 부러뜨린 것치고는 너무도 고통스러워하는 데다 이윽고 까무룩 기절해 버리는 노예에 맥켄지가 생각했다. 그냥 고치면 되는 거 아닌가?
맥켄지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것을 보듯이 노예의 치료를 하는 닥터와 손이 모자라 그레머와 샬로메까지 합심해 도와주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노예의 상태는 심각했다. 맥켄지가 뼈만 부러뜨린 게 아니라 그 주변 근육까지 찢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의 근육은 일차로 오른쪽을 중심축으로 빙 둘러져 찢어졌고 이차로 왼쪽을 중심축으로 빙 둘러져서 찢어졌다. 그에 너자의 근육은 끊어진 섬유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회생 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거기에 뼈까지 아작이 났다.
일부러라도 이렇게 못 만들겠다고 혀를 두른 닥터가 신경까지 잇지는 못하더라도 끊어진 근육을 급한 대로 붙여 보려 노력했으나, 제국 중앙관리병원도 아니고 고작 제국 아카데미의 의료시스템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노예를 제국 중앙관리병원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그곳은 제국 아카데미에서 약 삼 일을 달려서 가야 도착할 수 있었고 면역력과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노예가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닥터는 보라색으로 괴사가 시작된 노예의 발목을 보며 조심스럽게 발을 자르는 게 어떠냐 권했다. 그의 말에 지금껏 강 건너 불구경하듯 그들을 바라보던 맥켄지의 느긋한 얼굴에 서슬이 퍼렇게 벼려졌다.
닥터는 자신을 노려보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취했다. 안에 찬 고름을 짜고 죽은 피를 빼내고 항생제를 먹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노반 후작 가문의 미친개 맥켄지 도노반은 온갖 패악질을 부리며 당장 노예의 발을 고쳐 보라며, 노예의 눈을 뜨게 하라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에 샬로메가 도련님 고정하시라면서 그를 말렸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맥켄지를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난장판이 된 침실에 속에서 맥켄지는 닥터의 머리에 총구를 겨눠 만약 노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노예의 발을 잘라야 된다면 너의 대가리가 터지거나 너의 손모가지가 잘린다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난리도 아니었다. 젊은 닥터는 노예를 치료하며 내일 올 사제가 얼른 오기를 열심히 기도했고 샬로메는 혹여나 자신의 주인이 제국을 이끌어 나갈 귀한 닥터의 대가리를 터트릴까 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고, 그레머는 난리가 난 와중에도 착실하게 불덩이 같은 노예의 몸을 착실하게 차가운 거즈로 닦아냈다.
다행히 사제는 예정보다 일찍 왔다. 어제 맥켄지에게 끌려가기 전 닥터가 사제가 오면 바로 모시고 특별 독채로 와 달라는 부탁을 동료들에게 하여 사제는 제국 아카데미에 오자마자 맥켄지의 독채로 달려갔다. 그리고 맥켄지의 서슬 퍼런 모습과 그에게 달달 볶여 다 죽어 가는 닥터와 시종들의 모습에 ‘아, 내가 오늘 좆 됐구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제의 기도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사제는 노예의 괴사 직전인 발을 살려내고 뼈를 붙이긴 했지만 노예는 평생 발을 절 거라고 통보했다. 사제는 반기절 상태로 들것에 실려 맥켄지의 독채를 나갔다. 그리고 닥터는 사제가 반죽음 상태로 나간 이후로 꼬박 하루 뒤에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보라색으로 괴사가 되기 시작한 발목과 발은 다시 제 색을 찾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맥켄지가 쥐어 잡았던 발목과 발등은 뱀 같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무리 연고를 발라도 기도를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맥켄지는 그 흉이 꽤 마음에 들었다. 노예에게 자신의 존재가 각인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레머와 샬로메를 방에서 무른 후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아 잠들어 있는 노예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 땀을 한 바가지 흘렸었다.
곧은 숨을 색색 내뱉으며 잠들어 있는 노예를 보던 맥켄지가 손을 뻗어 손끝으로 노예의 뺨을 쓸었다. 매끈했던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둔덕처럼 매끄러웠던 노예의 입술은 부르터 있었다. 노예의 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가 대비가 돼 버려 더욱 안색이 나빠 보였다.
노예가 스와포네에게 도망갈 거라고 생각을 하니 노예의 발모가지 하나쯤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바에는 발목이 없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 스와포네도 사지 중 하나가 없는 노예의 모습에 정이 떨어져 노예에게 신경을 끌 거라고, 차라리 병신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팔이 같은 닥터가 노예의 발은 가망이 없다며 잘라 버리라고 권했을 때 화가 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노예가 곧 죽을 것처럼 숨을 껄덕였을 때 자신의 숨도 턱 막혀 왔다.
맥켄지는 이제야 인정했다.
자신은 노예에게 성애를 품고 있었다.
그가 손을 펴 노예의 뺨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뺨의 감촉과 뜨끈뜨끈한 온기에 그가 눈을 감았다. 이것은 스와포네가 종종 노예에게 하는 짓이었다. 놈이 왜 노예를 안을 때면 얼굴을 감싸 쥐는지 이해가 갔다. 그러다 불현듯 스와포네의 말이 떠올랐다.
-어. 나흘 전에 네 독채에 놀러 갔는데 얘 혼자 있더라고.
-그래서, 같이 놀았지. 사흘 내내.
-잘 썼다. 사흘 동안.
노예의 뺨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배 안이 부글부글 끓었고 심장에 누군가가 차가운 얼음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무언가를 때려 부수고 싶었다.
“…….”
그때였다. 너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밤하늘을 담아 놓은 것 같은 까만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자의 눈은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지 잠시간 흐리멍덩하다 곧 눈이 마구 깜빡였다. 맥켄지는 그런 너자의 모습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노예의 눈에 조금씩 총기가 돌았다. 노예는 천장을 말없이 바라보다 얼굴 근육을 움찔였다. 아마 뺨에 닿은 무언가를 이제야 자각한 듯했다.
노예의 눈이, 조금씩 옆으로 굴려지다 맥켄지의 눈과 맞았다. 그리고 노예는 소스라치게 놀라 하며 몸을 들썩였다.
“허억…!”
노예가 누웠던 몸을 일으키고 병자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벌떡 일어나 허리를 뒤로 뺐다. 필연적으로 맥켄지의 손에 닿았던 노예의 뺨이 사라졌다. 맥켄지는 그런 노예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허공에 뜬 손바닥을 꽉 쥐었다.
맥켄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너자의 눈과 표정에 심장이 쥐어뜯기는 고통을 느꼈다.
노예는 항상 자신을 대단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안달이 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손이 닿으면 좋아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런데 저 표정은 뭘까.
“헉… 허억… 헉….”
맥켄지의 속에서 뜨겁고 징그러운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침대에 올라탔다. 맥켄지의 무게에 침대가 끼익, 하며 스프링이 눌리는 소리가 울렸다. 노예의 숨소리가 더욱 가팔라졌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천천히 노예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 발짝 그가 다가가면 노예는 뒤로 몸을 뺐다. 그가 또다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노예가 또다시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또다시 그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노예의 등에 침대 헤드가 닿았다. 헉… 허억… 헉…. 노예의 숨소리가 비통하게 물들어 갔다. 맥켄지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의 양손이 위로 올랐다. 그에 노예가 비굴할 만큼 덜덜 떨며 애원했다.
“잘못, 자…. 잘못했어요.”
맥켄지는 그런 노예의 말에 답하지 않고 침대 헤드에 등을 붙이고 있는 노예의 얼굴 양옆에 양손을 대어 노예를 가두었다. 노예의 얼굴에 맥켄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노예가 다시 빌었다.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노예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런 노예를 내려다보며 맥켄지가 천천히 물었다.
“뭘 잘못했는데?”
“…캔디스랑 함부로 그… 그걸….”
“캔디스?”
맥켄지의 목소리가 형형해졌다. 그가 다시 물었다.
“캔디스라고 했어?”
“…네?”
“캔디스라고 했니? 스와포네랑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이름을 막 부르네? 둘이 꽤 친밀한가 봐?”
조곤조곤 말하는 맥켄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호수 같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너자는 그의 눈에 전의를 잃었다. 저 표정일 때의 맥켄지는 집요했고 무서웠다. 그에게 처음 안길 때도 그랬다. 그는 어떻게든 캔디스와 자신을 엮어댔고 무슨 말을 하든 화를 냈다. 지금도 그랬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아… 아니에요.”
“내가 둘 사이를 방해한 거니? 둘이… 서로 사랑하니?”
“아니에요!”
점점 이상한 말을 해대는 맥켄지에 너자가 부정했다. 하지만 맥켄지는 그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왜 그렇게 기겁을 하면서 부정해? 강한 부정이 긍정인 거 몰라? 정말 그런 거야?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맥켄지의 질문에 너자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맥켄지가 한쪽 손을 내려 창백하게 질린 노예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뜨거운 손이 차가운 뺨에 닿는 순간 너자는 크게 몸을 움찔였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눈을 또륵 굴렸다. 그리고 점점 더 큰 감정이 눌어붙은 목소리로 노예를 추궁했다.
“내 손이 닿는 게 싫어? 스와포네가 만져 줬으면 좋겠어?”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무서워해?”
“…….”
“그 새끼한테 가고 싶어?”
“아니요….”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노예의 얼굴을 맥켄지가 이윽고 양손으로 꼭 잡았다. 손에 잡히는 자그마한 얼굴이, 음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가 그의 마음을 긁어댔다. 노예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밤하늘을 닮은 까만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자그마한 입술이 벌려져 뻐끔거렸다. 잘생긴 턱이 파르르 떨렸다.
맥켄지는 노예의 저런 표정을 알고 있었다.
저 표정은 스와포네가 노예를 처음으로 강간하였을 때 지었던 표정이었다.
“왜 그 새끼랑 잤어?”
“…….”
“왜… 내 허락도 없이… 그 새끼한테 대 줬어?”
너자는 그의 말에 차마 답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너무도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쭉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당신한테 버림 받기 싫어서 그랬어요.
이 마음을 들키면 맥켄지는 질척이는 노예를 바로 버릴 것이다. 기분 나쁘다며 이번에는 발이 아니라 목을 비틀어서 죽일 것이다. 감히 자신을 마음에 담은 노예를 처분할 것이다.
너자는 죽어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맥켄지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노예의 모습에 정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 새끼가 좋은 거야. 남자든 여자든 처음을 뚫어 버린 사람에게 유대감이 생긴다고 했다. 노예도 그것일 것이다. 그 새끼의 자지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일 거야. 그 새끼랑 수없이 떡을 쳤잖아. 몸정도 들었을 거야.
노예의 얼굴을 부여잡은 맥켄지의 손에 힘이 점점 세게 들어갔다. 노예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짜는 것같이 잡은 맥켄지의 손아귀 힘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참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 얼굴을 흔들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맥켄지는 자신에게서 도망가려는 노예의 모습에 심장이 차게 내려앉았다. 그가 생각했다.
그 호래자식에게 노예를 빼앗길 수는 없어.
이건 내 거야. 절대 못 줘.
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그가 부여잡은 얼굴을 단단히 고정하고 잔뜩 부르튼 노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
놀라서 입을 다물 타이밍을 놓친 너자는 어느새 얼굴 각도를 틀어 자신의 입속에 들어온 맥켄지의 혀에 몸을 벌벌 떨었다. 너자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그의 키스에 호응도 하지 못한 채 목석같이 벌어져 있었다.
맥켄지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사흘 전 노예를 탐했을 때, 노예는 자신이 해 주는 키스를 참 좋아했다. 엉엉 울며 아파하면서도 적선 내리듯 키스를 해 주면 울던 것을 멈추고 같이 혀를 섞으며 흥분했었다.
덜덜 떨며 자신을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노예의 모습에 맥켄지의 속이 점점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가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해?”
“…헉… 허억….”
“내가 스와포네가 아니라서?”
너자는 또다시 이상한 말을 해대는 맥켄지에 아니라며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의 몸이, 그의 혀가 두려움에 잔뜩 굳어졌다. 무어라 하고 싶은데, 자꾸만 자신의 다리를 부러뜨린 맥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참으로 냉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발로 밟아댔다.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이 자신의 다리를 비틀었다. 사람의 뼈는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손짓에 자신의 다리는 평소라면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돌아갔다. 우드득, 하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했다.
너무 아파 비명을 질렀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다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비틀었다.
“사… 살려….”
“…….”
“살려 주세요….”
너자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흘러내렸다. 그가 무서웠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반대쪽 다리를 부러뜨릴까 봐,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까 봐 두려웠다. 너자는 그저 울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맥켄지의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그가 노예를 끌어 내려 침대에 눕혔다.
“못 가. 너는. 너는 내 곁에서 벗어날 수 없어.”
“…흑….”
“…죽어도 내 앞에서 죽어.”
“…….”
“내 눈 앞에서 말라 죽어 버려.”
그의 집착 어린 말에 노예가 더욱 서럽게 울었다. 맥켄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절대, 너는 나한테서 못 도망가.”
* * *
그의 머릿속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의 감정 중 분노와 쾌감은 비슷한 감정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언성을 높이고 때릴 때의 그 배출감과 섹스를 할 때의 그 배출감이 동일하다고 했다. 그때 그 구절을 읽으며 이게 무슨 정신이 나간 소리인가 싶었는데 노예를 보니 이제야 이해가 갔다.
분노에 차 있던 몸은 어느새 흥분해 있었고 자신은 노예를 정신없이 탐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노예를 탐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자신은 너무 좋아 찍찍 정액을 싸대며 쉴 새 없이 노예의 구멍에 자지를 처박았다. 그리고 노예는 고통에 눈이 뒤집혀 억억거렸었다.
맥켄지가 자신의 밑에서 얼굴이 시뻘게져 울며 버르적거리는 노예를 거칠게 내리누르며 실실 웃었다. 그리고 노예의 귀를 씹으며 말했다.
“싫다며. 다리가 너무 아프다며, 하지 말라며.”
“시… 싫… 실….”
“그런데 왜 질질 싸?”
짓궂은 맥켄지의 말에 너자가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렸다. 너자가 너무도 부끄러워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맥켄지가 즐거워하며 노예의 구멍에 아까보다 더욱 세게 자지를 처박았다.
“……!”
노예의 몸이 둥글게 말리며 자지를 감싼 내벽이 사정없이 쥐어짜졌다. 그 아찔한 쾌감에 맥켄지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제 얼굴을 가린 노예의 양손을 거칠게 쥐곤 그의 머리 양옆으로 강하게 눌렀다.
창백했던 노예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잔뜩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항상 음울하게 가라앉은 노예의 눈이 게게 풀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맥켄지의 자지에 힘이 한껏 들어갔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노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노예의 목에 입술을 대 쪽쪽 빨았다.
온갖 추잡한 소리가 들렸다. 맥켄지의 자지가 정액 범벅이 된 노예의 구멍을 왕복하는 소리, 맥켄지의 혀가 노예의 목을 아기가 젖먹는 빨아 먹듯 하는 소리에 너자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자의 온몸이 따끔거렸다. 맥켄지가 너자를 탐하며 온몸을 물어대고 씹어댔기 때문이었다. 너자의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시뻘겋게 벌레가 물린 것처럼 얼룩졌다.
헉… 허억…! 헉…! 너자는 미칠 것 같은 쾌감에 몸에 경기를 일으켰다. 싫은데, 하기 싫은데… 그가 무서운데… 그가 행하는 이 행위가 미친 듯이 기분 좋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흥분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맥켄지가 쾌감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노예를 보며 목의 가죽을 씹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좋아서 질질 싸네.”
너자의 얼굴이 수치심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결국 너자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맥켄지의 비뚤어진 욕망이 더 자극됐다.
“거리의 남창도 너만큼 가볍지 않을 거야.”
“흑… 으…. 크흑….”
맥켄지가 기어코 너자를 울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맥켄지는 더욱 흥분했다. 맥켄지는 덜렁거리는 너자의 오른쪽 발목을 꽉 쥐었다.
악! 너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비웃으며 말했다.
“야, 안 아픈 거 다 알아.”
“아… 아니… 아… 아파….”
“시팔, 야 내가 사제한테 얼마를 줬는 줄 알아? 네 발 다 나았어.”
제국 아카데미의 닥터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무료였지만 사제는 아니었다. 사제의 기도는 비쌌다. 귀족이라도 부담스러워할 만한 금액을 내고 맥켄지는 노예의 발을 고쳤다. 평생 절게 될 거라고는 했지만 발이 잘리지는 않았다. 노예의 다리를 부러뜨린 것도 자신이고 노예의 다리를 치료한 것도 자신이다. 이렇게 대할 권리가 있었다.
그가 노예의 오른발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좆질을 하며 그의 발목을 콱콱 깨물기 시작했다.
아악! 악! 노예가 숨이 넘어갈 것같이 비명을 질렀다. 분명 연기일 것이다. 노예의 자지는 빳빳하게 서 있었다. 아주 앙큼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연기는 스와포네에게나 통했지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뜻 모를 도취감에 취한 맥켄지는 사정없이 노예의 발목을 이로 씹어댔다.
너자는 기절할 것 같았다. 그래, 뼈가 붙은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조금만 발목을 움직이면 뼈가 시큰거렸고 발목 근육과 이어진 신경이 찌릿하며 저려 왔다. 그런데 그런 발을 맥켄지는 함부로 쥐고 함부로 이로 씹어댔다. 그리고 발목의 고통과는 별개로 밑의 기분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그 큰 자지로 콱콱 찍어대며 자극을 주는 통에 너자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미워할 만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거리의 남창이 자신보다 정숙할 것이다.
너자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그레머와 샬로메는 테이블 중간에 있는 두 개의 편지를 마치 원수 바라보듯 노려보았다. 그들의 눈 밑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럴 만했다. 그들은 사흘 내내 주인의 패악질을 버텨냈고 닥터와 사제의 뒤치다꺼리를 해 가며 노예의 병간호를 했었다. 거기에 잠에 들려고 치면 노예와 주인의 성애 소리에 차마 잠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은데 시간 차를 두고 공격을 하는 청각 고문에 자지도 못하고 해가 뜨는 것을 보며 그들이 말라비틀어져 갈 때쯤 독채의 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에 테이블 의자에 앉아 엎어져 있던 그레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것은 제국 아카데미의 우정소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행정관리 부서의 최말단 우정소속이었는데 각 왕국과 제국 내에서 보내는 편지를 수거해 배달하는 일을 했다.
우정소 직원이 그레머에게 건넨 편지는 총 두 개였는데, 하나는 도노반 후작 성에서 보낸 편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제국 중앙 교회에서 보낸 편지였다.
영민한 그레머는 두 장의 편지가 어떤 의미인지 추리가 됐다.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대륙전쟁은 마무리가 돼 갈 무렵이었으니 중앙 교회에서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대륙전쟁을 끝마치는 것을 축하하는 미사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일 것이고, 도노반 성에서 보낸 편지는 그에 관한 편지일 것이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이 공작 가문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눈 밑이 거멓게 물든 그레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개의 편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독채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반 기절 상태로 널브러져 있던 샬로메가 눈알만 또륵 굴려 왠지 신이 나 보이는 그레머에게 물었다.
“뭐야, 뭔데 그렇게 좋아해?”
“편지가 두 통이나 왔습니다.”
“두 통이나? 무슨 일이래.”
지금껏 도련님한테는 편지 한 통 오지 않았다. 그런데 연속으로 두 통이라니? 샬로메가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와포네 가에서 고소장 날아온 거야?”
그쪽에서 고소해도 할 말 없지… 살인 미수인데… 주인마님 또 뒤로 넘어가시겠네… 샬로메가 아련한 표정으로 그레머의 손에 들려 있는, 척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지 봉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샬로메에게 그레머가 손을 휘저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불손한 말씀 하지 마세요!”
“그럼 뭔데?”
그레머는 농담 따위 하지 않는 놈이었다. 샬로메는 그레머가 실실 웃으며 품에 소중하게 안고 온 두 개의 편지에 궁금증이 일어 물먹은 듯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레머는 그가 잘 볼 수 있게 편지지 두 개를 가지런히 테이블에 놓았다.
“어디 보자….”
하나는 후작 성에서 왔고 하나는… 중앙 제국 교회? 여기에서 도련님한테 편지가 온다고? 중앙 제국 교회에서 왜?
샬로메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다 곧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얼굴에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짓고는 그레머에게 말했다.
“대륙전쟁이 끝났구나!”
채신머리없이 기뻐 소리 지르는 샬로메에 그레머도 기뻐 작게 소리 질렀다. 제국의 영광이었다. 거기다 승전미사에 도련님에게 초대장이 왔다는 것은 대륙전쟁에 필요한 총기 공급과 총기 개발, 그리고 후작 가문에 귀속된 전쟁 영웅이 속한 도노반 후작 가문에 대한 존중과 공을 치하한다는attribute glory 의미일 것이다.
도노반 후작 가문은 이제 도노반 공작 가문이 될 것이었고 그들은 후작 가문 소속이 아닌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공작 가문의 사용인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샬로메는 자신의 이름을 팔아 가업 상단이 더욱 잘 될 것을 기대하며 기뻐했다. 머리가 비상한 어머니는 분명 ‘대륙전쟁을 승리로 공작 가문의 직속 협력 상단! 또는 대륙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 신상 머스킷 독점 판매! 또는 나의 아들이 대륙전쟁 1등 공신 도노반 리피팅 암즈 차석 대표의 수석 호위기사!’라며 광고를 할 것이었고, 그것으로 상단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레머는 부모님이 자신들의 아들이 공작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의 수석 시종이라며 기뻐할 것이었고, 자신의 월급 또한 배가 될 것이었다. 부와 명예가 손에 차서 넘칠 것이다.
벌써부터 그려지는 꽃길이 펼쳐진 미래에 행복 회로가 불타는 듯했다. 그들은 서로 헤벌쭉하고 웃었지만, 곧 귓가에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그 미친 소리에 그들의 미소는 삽시간에 어그러졌다. 그들은 정색하며 각각 할 일을 찾아 소리를 외면했다. 샬로메는 몰래 반입한 단도에 기름칠을 하기 시작했고 그레머는 방에 먼지가 굴러다닌다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후, 드디어 앓는 소리가 멈췄다.
샬로메가 기름칠을 다 한 단도를 단도집에 넣으며 십 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누가… 가서 전할래?”
“…샬로메 경이….”
“아! 왜!”
기겁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샬로메가 그레머를 보며 말했다.
“이런 건 시종이 해야지!”
그런 게 어딨어요! 그레머도 벌떡 일어나 샬로메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 저 진짜 힘들어요. 저는 작고 연약한 시종인 걸요.”
“이거 징그럽게 왜 이래!”
그리고 작고 연약한은 또 뭐야! 고추에 털 달린 놈이! 징그러워! 샬로메가 귀를 닦는 시늉을 하자 그레머가 양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며 죽는소리를 했다.
“…진짜 저 좀 살려 주세요. 제가 어제저녁에 도련님 방에 가서 식사 넣어 드리고 왔잖아요… 난… 난 그걸 직방으로 봤다구요!”
그의 눈에 하얀 엉덩이 두 짝이 신기루처럼 뭉실거리며 떠올랐다. 아아악! 그가 자신의 눈을 손으로 마구 비비며 괴로워했다. 시종 일을 하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았지만, 그렇게 원색적인 장면은 쥐약이었다. 하지만 제일 괴롭고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눈물을 착즙해 내며 샬로메에게 애걸했다.
“한 번만 더 방해하면… 눈깔을 파 버린다고 하셨어요!”
저는 우리 집의 기둥인데 눈깔이 없으면 우리 부모님, 내 동생들은 어떻게 살아가요! 난 못 가요! 그레머가 못 간다며, 기사님이 가시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샬로메는 냉정하기만 했다. 그가 말했다.
“난 노예 발목 좀 봤다고 대가리 터질 뻔했어.”
“…….”
“도련님이… 나보고 앞으로 눈깔 조심 안 하면 리볼버로 대가리 터트린다고 하셨다.”
“…….”
“…너 대가리에 리볼버 총구 비벼 본 적 있냐? 난 있어.”
여기야, 바로 여기. 촉감 죽이더라. 그레머, 여기 좀 봐 봐. 나 여기 맞을 뻔했어. 샬로메는 자신을 외면하는 그레머를 끈질기게 불렀다. 그레머… 그레머 나 좀 봐… 한참을 불러서야 시종이 마지못해 자신을 보자 그에게 잘 보이게끔 친절하게 자신의 오른손으로 뒤통수를 툭툭 쳤다. 그런 샬로메를 본 그레머의 손이 저도 모르게 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에 샬로메가 아련하게 말했다.
“나는 대가리가 터지고, 너는 눈깔이 파지고.”
“…….”
“나는 죽고, 너는 살고.”
“큿…!”
그레머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쳤다.
그레머가 한 손에 편지를 소중히 쥐고 한 손은 주먹을 쥐었다. 문에 귀를 대 보니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끝났겠지? 그레머는 다시는 그 원색적인 장면을 보기 싫었다. 그가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하는 입에 억지로 침을 넘기고 손을 들어 침실의 문을 두드리려고 할 때 문이 열렸다.
“…!”
그레머가 손을 든 상태 그대로 멈췄다. 활짝 열린 문에 어스름한 침실이 보였다. 문이 침대 바로 앞에 있는 탓에 그레머의 눈에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노예의 하얀 몸이 보였다.
눈… 눈깔! 그레머의 시선이 재빠르게 노예의 몸에서 바로 위로 향했다.
맥켄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천장을 노려보는 그레머에 손가락을 들어 그의 가슴을 툭 하고 치며 말했다.
“나가.”
“넵.”
그레머는 주인의 말에 재빠르게 고개를 위로 쳐든 채로 뒤로 물러섰다. 맥켄지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서는 시종을 뒤로하고 침실의 문을 닫았다. 이내 나른한 걸음으로 소파로 향했고, 제일 상석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품에 안고 있던 편지 두 개를 공손히 내밀었다. 그는 시종이 전해 준 두 개의 편지를 건네받아 먼저 제국 중앙 교회에서 온 편지 봉투의 왁스를 뜯었다. 그의 유려한 손가락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편지지를 편지 봉투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서류를 읽기 시작한 탓에 그는 편지를 속독했다.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손에 쥔 편지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소파 옆 협탁에 올려놓았던 마지막 편지를 뜯어내 읽기 시작했다.
“…….”
그 모습에 그레머와 샬로메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지금껏 굴렸던 행복한 미래가 구겨진 듯했다. 뭐야, 진짜 고소장인가? 그들은 편지지의 내용이 궁금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짜증을 내시는 거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알 리 없는 맥켄지는 집에서 온 편지를 다 읽고 손안에 있는 편지지를 구기며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눈 밑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겼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온 샬로메와 그레머가 곁눈질을 하며 땅바닥에 떨어진 편지지의 활자를 읽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땅바닥에 구르는 편지지들은 엉망으로 구겨져 있는 탓에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샬로메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가 조심히 물었다.
“도련님, 무슨 내용인가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샬로메의 질문에 맥켄지가 눈가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귀찮네.”
“네?”
“대륙전쟁이 끝났다는구나.”
축제다! 분명 아주 으리으리하고 멋진 승전 축제가 열릴 것이다. 이베아 제국의 수도 록시의 길거리는 형형색색의 꽃이 장식할 것이었고 온갖 귀한 음식들이 넘쳐날 것이다. 거기에 전쟁 승리의 기쁨에 수도 내에 있는 처녀들이 한껏 꾸미고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샬로메와 그레머가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매서운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맥켄지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맥켄지가 한 소리를 하려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좋은 일이지.”
“네, 제국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제국 중앙 교회에서 축사를 하러 오라는구나.”
“가문의 영광입니다!”
“러트 도노반이랑 같이.”
아… 기뻐서 날뛰던 그레머와 샬로메가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공손히 섰다. 맥켄지는 짜증이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러트 도노반이 대체 뭘 했는데?”
“…….”
“시팔, 나 혼자 다 했다고. 내가 잠도 못 자 가면서 부족한 공장 증축해, 부족한 물자 구해, 그 와중에 하자 나는 거 보고받아서 이슈로 문서 작업해서 보고해, 장부 작성해, 공장 돌리는 데 필요한 인력 채워 넣어, 그에 따른 금전적 손실, 이득 다 따져….”
“…….”
“아, 짜증 나네.”
맥켄지는 전쟁통에 발생하는 손익을 보고받고 그에 대응했다. 물론 혼자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밑에는 제국 내에 최고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총 책임자는 맥켄지였다. 책임자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는 거의 일 년 내내 일거리에 파묻혀 제대로 쉬지도, 자지도 못했다. 조금 쉬려고 하면 크고 작은 일들이 죽죽 터진 탓이었다.
그에 반해 러트 도노반이 하는 것은 사교계에 가서 입만 털어대며 탱자탱자 노는 것이었다. 본인 말로는 영업을 하는 것이라는데 그딴 영업은 하지 않아도 됐다.
그의 아름다운 이마가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일 년간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돌아오는 건 공동 축사였다. 그 새끼와 옆에 나란히 서 축사를 하는 생각만 해도 역겨워 순간 가지 말까 생각했지만, 죽 쒀서 개를 줄 수는 없었다. 그는 혼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으스댈 제 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놈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거기에다…….
그놈도 오겠지. 전쟁 영웅이니 기사단을 이끌고 휘황찬란하게 록시에 입성을 할 것이다. 제국 내 제일 권위 있는 음악단이 그들의 뒤를 쫓으며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전쟁 영웅은 도시 곳곳을 순회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영웅 행세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래는 자신과 러트 도노반이 내리는 축사를 웃는 낯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고작 방계 나부랭이 따위가!
전쟁을 추진하고 물자를 댄 것은 자신과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물질 하나가 끼어 그 영광의 자리에 빈대가 붙었고 종래는 자신과 같은 성을 쓰게 되었다. 말이 안 됐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뜨렸던 편지지를 죽죽 찢기 시작했다. 그때 그레머가 조심히 제 주인에게 물었다.
“도련님… 하나 여쭈어봐도 될까요?”
공손한 시종의 말에 그가 말했다.
“말해.”
“축제가 언제부터죠?”
“일주일 뒤.”
그의 답에 그레머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노예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레머의 물음에 그가 죽죽 찢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서리가 내리니 더욱 섬뜩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레머가 방정맞은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당연히 안 데려가겠지. 절름발이를 데려가 봤자 짐이잖아. 아, 이 주둥이가 문제였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그레머가 송구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맥켄지가 말했다.
“너 요새 머리가 안 돌아가는구나.”
“죄송합니다.”
“당연히 데려가는 거 아닌가?”
그의 말에 바닥을 보고 있던 그레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샬로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제국 내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 될 터였다. 그런데 절름발이 야만인 노예를 끌고 다니는 모습은 제국민에게 보기 좋지 않을 여지가 있었다. 보통 귀족들도 공식적인 행사에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본인이 아무리 아끼는 노예라 할지라도 그것은 귀족의 품위에 맞지 않았다. 그레머가 그 사실을 고하려고 했으나 곧 이어진 그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다시는 그 새끼한테 빼앗기지 않아.”
이를 으드득 갈며 눈을 형형하게 빛내는 주인의 모습은 진심이었다.
너자는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맥켄지의 시선에 턱을 바르르 떨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겹쳐 자신을 안으며 보여 줬던 욕망 가득한 그 눈과 너무도 달랐다. 마치 쓸모없는 것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에 너자의 눈이 서럽게 흔들렸다.
그런 너자의 서러운 눈을 보면서도 맥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되레 우습다는 듯 그가 차갑게 말했다.
“어디에서 약한 척이야.”
“…그런 거 한 적 없어요.”
매도하는 말에 억울하다는 듯 작게 항의하는 노예에게 그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나한텐 그딴 거 안 통한다고 했지. 어디서 끼를 부려.”
“…아니….”
“시끄럽고, 다시 해.”
“…….”
마치 서릿발이 휘날리는 것 같은 그의 냉정한 목소리에 너자가 음울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떻게든 상체를 일으키기는 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을 맥켄지에게 안긴 탓에 허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안을 때마다 허리를 있는 힘껏 쥐었는데 허리에 손자국이 아직도 붉게 남아 있었고 손자국을 중심으로 근육이 저렸다. 거기에 그의 무지막지한 것이 들락날락했던 구멍은 조금만 몸에 힘을 줘도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허리도 구멍도 아팠지만 제일 아픈 것은 역시 오른발이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으나 오른발에는 도통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오른발을 내디디고 걸으려고 하면 발목이 몸을 지지하지 못해 주저앉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노예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한 채 침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노예의 하얀 피부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노예는 정말 괴로운지 몸을 공 벌레처럼 웅크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감싸 쥐었다.
그런 노예를 보며 그는 평생 노예가 걷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걷지 못하면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스와포네에게 가고 싶어도 자신이 보내 주지 않으면 그의 곁에 가지도 못할 가련한 노예였고, 맥켄지 자신도 스와포네가 궤짝에 금은보화를 가득 채워 바친다 해도 노예의 몸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노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화가 나기도 했다. 노예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자신을 보며 음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자신을 탓하는 것 같았다. 노예는 제국인들보다 머리통 두 개 만큼 컸고 다리는 늘씬하여 길게 뻗어 있었다. 항상 잔뜩 움츠려 있지만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뛰어갈 때만큼은 당당하게 펴져 마치 재규어처럼 사뿐사뿐 뛰어다녔다.
항상 느릿느릿했고 곰같이 커다란 노예였다. 하지만 밥을 먹으러 뛰어갈 때만큼은 그렇게 우아했다. 검은색 바지로 가려졌음에도 탄탄해 보이는 긴 다리가 쭉 펴지며 사뿐사뿐하지만 빠르게 뛰는 모습에 맥켄지가 시선을 빼앗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마 노예는 다시는 자신을 보며 웃지 않을 것이다.
노예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욕망과 다시는 노예의 그 망아지 같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맥켄지의 속이 뒤집어졌다. 그는 이런 인간적인 감정에 면역력이 없었다. 그는 지금껏 달램을 받아 왔지 누군가를 달래 본 적 따위 한 번도 없었고… 누군가를 이렇게 열렬히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처음이었다. 그는 노예를 뼈째 씹어 먹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니 노예가 적어도 걸을 수는 있어야 했다. 노예는 이상한 새끼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상한 새끼는 틈만 나면 제 것을 빼앗으려 온갖 수작을 부렸다. 사흘 동안 노예가 그 새끼에게 안겼다는 생각을 하니 속에서 천불이 났고 당장에라도 그 새끼의 대가리를 터뜨려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됐다. 아직 자신은 도노반 ‘후작 가문’의 ‘차남’이었다.
하지만 도노반 ‘후작 가문’은 ‘공작 가문’이 될 것이고 ‘차남’이어서 ‘가주’가 되지 못하는 자신은 머지않은 시일 내에 ‘가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주’가 되는 그 순간 피의 숙청이 시작될 것이다.
맥켄지는 바닥에 공 벌레처럼 주저앉아 끙끙거리는 노예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노예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맥켄지는 노예의 머리채를 끌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노예의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말도 못 할 충족감과 쾌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고개를 틀어 노예의 입술을 취했다. 노예는 예전처럼 꿈을 헤매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고 먼저 해 달라고 입을 벌려 보채지 않았다.
노예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꼭 닫고 있었다.
예전의 노예가 더욱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고 그 모습이 보고 싶었지만 괜찮았다.
노예가 자신의 옆에 있으므로.
제국 아카데미는 이틀 전부터 임시 휴교였다. 사흘 후 있을 제국 승전식을 즐기라는 의의로 내려진 것이었다. 제국의 야만인 정벌이 마침내 끝이 난 것과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전쟁 영웅과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끌 귀족 가문들을 치하하는 축제였다. 축제는 오 일 밤낮으로 열릴 것이며 제국민뿐만 아니라 다른 왕국의 귀족들도 그 자리를 축하하러 올 중요한 축제였다.
맥켄지는 그 축제의 참석자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노예를 데리고 다녀야 그의 정신병이 도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애가 탔다. 노예가 걸을 수가 있어야 교활한 스와포네에게 노예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맥켄지의 닦달과 샬로메와 함께하는 재활 치료는 꽤 진전이 있었다. 샬로메는 제대하기 전 기사단의 부대장이었다. 기사단은 왕국민을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고 성안의 흉악한 인간들 혹은 성 밖에 있는 짐승들 그리고 가끔씩 난리를 쳐대는 산적들 또는 외국인을 소탕했다. 그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고, 한 번 출전할 때마다 다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에 다리를 다친 기사들도 왕왕 있었는데 샬로메는 그런 부상자들의 재활 치료를 도운 적도 많았다.
너자 입장에서는 무조건 걸으라며 닦달을 하던 맥켄지보다 꽤나 체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재활 치료를 도와주는 샬로메가 퍽 고마웠고 편했다. 맥켄지는 자신보다 샬로메에게 더 의지하는 노예의 모습에 다시 한번 리볼버를 들었으나 샬로메보다 더욱 경기를 일으키는 노예 탓에 리볼버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샬로메는 제 생명의 은인인 노예를 더욱 살갑게 대하고 재활 치료에 더욱 열과 성을 쏟았다.
덕분에 맥켄지의 속은 더욱 뒤집혔지만, 노예가 점점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그는 노예가 보지 않을 때 샬로메를 처리하겠다는 다짐을 답지 않게 포기했다.
소파에 앉은 채 양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표정을 풀었다. 노예가 혼자 서툴게 걷는 모습이 마치 아장아장 걷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겸사겸사 그레머도 노예의 재활 치료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영 몸을 쓰는 것에는 재능이 없는 그는 얼마 도와주지 못하고 힘들어서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노예를 바라보는 주인을 목격하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몸을 흠칫 떨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 직장인이었기에 그것을 표정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축제 당일이었다. 맥켄지나 그레머, 샬로메는 언제나 그랬듯이 노예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자고 있는 노예를 깨워 씻기고 독채에서 데리고 나왔다. 얼른 따라오라며 닦달을 하는 그레머에 쩔뚝이며 비몽사몽인 채로 그들을 따라가던 너자가 마차 앞에 당도했다.
처음 아카데미에 타고 왔을 때의 그 마차였던 것 같았다. 어디 가는 건가? 너자는 처음 타고 왔을 때와 같이 마차의 짐칸으로 발을 쩔뚝이며 향했다. 하지만 그의 몸이 별안간 뒤로 넘어갔다.
“…!”
“어디 가?”
너자의 뒷덜미를 잡아챈 맥켄지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주인의 표정에 너자는 조건반사적으로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못했어요….”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노예는 습관처럼 빌었다. 주인이 화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빌어대는 노예의 모습에 맥켄지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가 노예에게 말했다.
“왜 짐칸에 타지? 나랑 같이 있기도 싫다는 건가?”
“…네?”
너자는 또 트집을 잡아대는 맥켄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자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전 이곳에 올 때 짐칸을 타고 왔는걸요.”
타고 왔다기보다는 짐짝처럼 찌그러져 왔었다. 그리고 그레머가 말하기를 노예는 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처음 아카데미에 왔을 때도 자신은 마구간에서 지냈었다.
…그런 때도 있었다. 그때는 사지가 멀쩡했으나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밥도 제때 얻어먹지 못해 항상 예민했고 항상 배고팠다. 그러고 보면 그때의 자신은 제대로 씻지도 못해 많이 불쾌했을 텐데 맥켄지가 자신을 왜 데리고 왔을까 싶다.
맥켄지는 왜 자신을 데리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그러니 자신의 발을 부러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발을 부러뜨리는 것만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성적으로까지 괴롭혔다.
너무 아프다고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빌어도 맥켄지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며 괴롭혔다. 하지만 제일 싫은 건 그런 맥켄지의 행동에 머리끝까지 흥분해서 질질 싸며 바닥을 기는 자신이었다.
노예의 얼굴이 다시 음울하게 침전되었다. 노예는 맥켄지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맥켄지는 그런 노예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속이 뜨겁게 들끓었다. 그가 손을 뻗어 노예의 얼굴을 가볍게 쳤다.
이제 이런 손찌검쯤은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노예는 더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마치 빈껍데기처럼 고개가 돌아간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노예에게 조급증이 드는 건 맥켄지뿐이었다.
그가 노예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의 푸른 호수 같은 동공이 확장됐다. 너자는 이 상황에서도 환상적으로 빛이 나며 아름답게 변한 맥켄지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죽어도 내 앞에서 죽으라고.”
“…….”
“내 앞에서 말라 죽어. 다른 새끼 보지도 말고, 허튼 생각도 하지 말고,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내 옆에서 평생 살아가.”
맥켄지의 말은 마치 주박처럼 너자를 옭아맸다. 너자가 분노해도 아름다운 맥켄지의 얼굴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는 역시 자신을 역겨워했고 저주로 자신을 말려 죽일 셈이었다. 그에게 맞은 뺨이 아직도 따끔거렸다.
맥켄지가 멍청이처럼 가만히 있는 노예의 모습에 말했다.
“대답해야지.”
“…….”
“네 목숨은 누구 것이지?”
나에게 남은 건 몸뚱어리와 목숨뿐인데, 몸뚱어리의 자유는 이미 맥켄지가 앗아갔다. 그런데 이제는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너자가 멍하니 생각을 하다가 주인의 말에 감히 대답하지 않는 노예에게 화를 내려는 아름답고 잔인한 주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도련님 것입니다.”
“착하다.”
너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맥켄지의 손길에 토할 것 같았다.
거의 반나절을 달렸다. 너자는 마차 창가에 턱을 괴고 쉴 새 없이 변하는 풍경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코만치의 자신은 이런 풍경이 당연했다. 그는 코만치의 전사였고 제일 강하고 아름다운 늑대를 타며 너른 초원을 달렸다.
늑대의 등을 타고 늑대와 교감을 하며 같이 사냥하고 싸우던 그때가, 간혹 아무 이유 없이 미친 듯이 달렸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자유로웠고, 늑대를 타고 녹음이 짙은 초원을 사람은 달릴 수 없을 속도로 달렸었다.
풍경은 어느새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로 변했다. 보다 높고 아름다운 조형물은 화이트들 특유의 양식이었다. 너자는 이렇게 많고 높은 건물들과 이렇게 바글바글한 화이트들을 처음 보았다. 제국 아카데미의 사람들도 그렇게 많았는데 이곳은 그의 수십 배는 많았다. 아마 이곳이 저들의 수도일 것이었다.
창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항상 나른하게 풀려 있는 맥켄지의 얼굴 또한 무척 편안해 보였고 기뻐 보였다. 그레머와 샬로메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에서 살아갔다.
너자의 친구들은, 너자의 부족민은 어린아이들 몇 빼고 모두 죽었다. 사방에는 화이트들이 넘쳤고 그 사이에 있는 자신은 너무도 이질감이 들었다.
귓가에 그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의 친구들이 죽어 가는 소리가, 고통에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너자가 다시 재발한 광증에 몸을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
화이트들에게 모두가 죽고 혼자 동떨어져 그 성에 갇혀 있을 때 너자는 광증을 앓았다. 자꾸만 죽은 친구들이, 이웃들이 보였고 혼자 살아남은 그를 탓했다. 그에 너자가 선택한 것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행히 단순한 머리통을 가진 너자에게 그 방법은 꽤 성공적이었지만, 간혹가다 이렇게 광증이 재발했다.
몸이 아파서일까, 아니면 지금껏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의 줄이 점점 놓이는 것일까. 너자는 모든 게 다 귀찮았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슬펐다.
그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맥켄지는 며칠 뒤 있을 축사의 대본을 읽고 있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곧 만날 전쟁 영웅과 제 형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고 그레머와 샬로메는 축제를 즐길 생각에 들떠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노예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중앙 분수는 매우 시끄러웠고 모든 게 꽉 찼다. 미사는 이틀 뒤였지만 오늘부터 축제가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꽃가루가 뿌려졌으며 길 어귀에서는 온갖 먹을 것과 잡다한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가 광장에 도착했고 그들은 광장의 분수대에 내려 일정을 점검했다. 곧 있으면 먼저 도착한 러트 도노반과 도노반 후작이 그들을 데리러 와 제국 중앙 교회에 함께 들어갈 것이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지내며 다음 날 있을 미사의 예행연습을 할 예정이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사람이 일제히 한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맥켄지와 샬로메, 그레머는 순식간에 그들에게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샬로메가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우선적으로 맥켄지에게 뛰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막아냈다. 그레머와 노예는 알아서 처신을 잘할 것이다. 맥켄지는 정신 사납게 날뛰는 군중들을 보며 허리춤에 꽂혀 있는 리볼버로 다 쏴 갈길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전쟁 영웅이다! 전쟁 영웅이 행차하신다!”
사방에서 흥분한 사람들이 쏟아졌다. 수많은 사람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있던 너자는 다행히 키가 무척 크고 몸집 또한 커 쉽사리 휩쓸리지 않았다. 다만 그들을 헤쳐나가 저 멀리 휩쓸려 나가는 맥켄지에게 다시 가기에는 다리가 불편한 자신에게 험난한 여정일 게 분명했다.
사지만 멀쩡했다면 사람들을 밀어내며 그에게 가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었다. 저기에 어떻게 가지 고민을 하며 밭은 숨을 헉헉 쉬고 있던 너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왜 가지?
…지금이라면… 도망… 갈 수 있을 텐데…….
사방은 수많은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거기에 다 같은 화이트 들이었지만 그들의 피부색, 머리카락 색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드물지만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남자들도 꽤 있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내 손이 닿는 게 싫어? 스와포네가 만져 줬으면 좋겠어?
-왜… 내 허락도 없이… 그 새끼한테 대 줬어?
-거리의 남창도 너만큼 가볍지 않을 거야.
-싫다며. 다리가 너무 아프다며, 하지 말라며. 그런데 왜 질질 싸?
-내 앞에서 말라 죽어. 다른 새끼 보지도 말고, 허튼 생각도 하지 말고,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내 옆에서 평생 살아가.
“…싫어….”
자신에게 남은 건 다리를 저는 몸뚱어리와 목숨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목숨까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평생 맥켄지가 화를 내면 그의 화를 받아내고, 맥켄지가 캔디스에게 안기라고 명령하면 안기고 그의 성욕이 동하면 가끔가다 그의 성욕을 받아내고 거지에게 적선하듯 내리는 키스로 멍청이같이 혼자 가슴 설레하며 그것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에게 넌덜머리가 나게 질리면 그때 폐기 처분이 되듯 목숨을 잃는 것일까. 나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버림받기 전에, 먼저 내가 사라지면 되는 거 아닐까?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가 나를 증오하며 내 심장에 칼을 꽂는 꼴을 보기는 죽어도 싫다. 도망가면… 적어도 그 애 손에 죽지는 않지 않을까?
너자의 몸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 절뚝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오른발이 제발 그 정도만 하라며 엄청난 통증을 발하면서 멈추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오른발의 통증을 의식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렸다.
죽어도 그건 싫다. 죽어도, 그 애가 없는 곳에서 죽을 것이고 그 애에게 버림받기는 싫었다. 너자는 있는 힘을 다해 뜀박질을 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사이를 헤쳐나가며 분수에서 최대한 멀어져 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너자는 바닥에 떨어진 검고 커다란 천 쪼가리를 발견해 눈치껏 그것을 주워 머리에 둘러썼다. 그리고 이번에는 골목길 어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해 골목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언젠가 이렇게 앞으로 가다 보면 성벽이 나올 것이고 어떻게든 그 성벽을 빠져나가면 될 것이다. 지금은 축제이고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 성벽의 경비는 허술할 것이다. 들어오는 사람은 몰라도 나가는 사람은 그렇게 주의 깊게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의 명을 어기고 감히 도망간 노예를 알아차린 맥켄지가 자신을 잡으러 와서 리볼버로 자신의 머리통을 터뜨릴 것 같았다.
너자가 아무도 없는 골목 어귀의 버려진 책상 밑에 몸을 숨겼다. 그의 온몸이 식은땀에 축 절어 있었다. 어느새 앞머리가 땀에 절어 가닥가닥 뭉쳐 있었다. 그가 밭은 숨을 쉬며 검은색 천으로 앞머리를 빠르게 문질렀다.
조금 쉬었다 가야겠다. 너무 뛰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에서 열이 났고 더는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자가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렸다.
“…시원해….”
살랑, 불어오는 미풍에 너자의 앞머리가 살랑이며 흔들리며 그의 땀을 식혀 주었다. 바람을 조금 쐬니 미친 듯이 뛰어대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던 바람이 멈췄다.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고 감았던 눈을 스륵 떴을 때 자신의 앞에 보이는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에, 벌꿀처럼 달콤하게 물든 금발의 머리카락에, 자신을 바라보는 다홍색의 홍채에 얼어 버렸다.
다홍색의 눈을 가진 ‘그’가 손을 뻗어 너자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던 검은색 천을 함부로 젖혔다. 검은색 천이 젖혀지면서 너자의 얼굴이, 맥켄지가 입혀 놓은 커다랗고 헐렁한 옷 때문에 울긋불긋한 그의 목줄기가, 목에서부터 어깨로 내려가는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다홍색의 홍채가 마치 그곳을 어루만지듯 진득하니 훑어보다 기억에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잖아.”
“…….”
“사람 엿 먹이는 것도 여전해, 너는.”
거기다가 이렇게 굴러먹고 다니다니.
‘그’가 잔뜩 얼어붙어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리품을 보며 짜증이 난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뚫어 놓은 배를, 다시 강하게 찼다. 어찌나 세게 찼던지 너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의 기억이, 지옥처럼 다시 너자의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떠올리기 싫어… 너자가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주며 몸을 꿈틀이자 ‘그’가 혀를 쯧, 차며 다시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맞았던 곳을 다시 강하게 채인 너자는 까무룩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