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캔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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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강의가 끝났다. 변태처럼 헉헉거리며 너자의 종아리를 조져 놨던 콜로프가 강의 자료를 갈무리하고 문밖으로 나가자 밖에 있던 너자가 화들짝 놀라며 잰걸음으로 옆으로 피했다.
그레머가 맥켄지의 짐을 정리해 주고 다음에 있을 강의를 말하며 맥켄지에게 움직일 것을 권했다. 맥켄지가 느긋한 맹수처럼 일어나며 그레머에게 말했다.
“저 노예한테 글 좀 알려 줘.”
“네?”
“말이 안 통해서 불편하네.”
솔직히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쩌면 너자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맥켄지가 판단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의 가훈은 ‘도노반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였고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이용해 득을 취한다는 선대 미켈란 도노반의 유언을 맥켄지는 그 누구보다 잘 따랐다.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는 살짝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곧 유순하게 알겠다 답했다. 솔직히 그레머도 말이 통하지 않아 불편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샬로메가 계속해서 직립해 있는 것이 좀이 쑤셨었는지 다음 수업 시간에 도서관에 다녀오겠다 말했다. 원칙대로라면 샬로메는 맥켄지의 곁을 절대 떠나면 안 되었으나 아까 너자를 상대해 보니 걱정이 되지 않았다. 샬로메의 막연한 감에, 맥켄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자가 알아서 처리할 거 같았다.
샬로메가 동의를 구하듯 맥켄지를 바라보니 맥켄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실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맥켄지가 일어나 강의실 문을 향해 걸으니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길을 터줬다. 이 또한 맥켄지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맥켄지가 고갯짓을 해 멍청히 서 있던 너자에게 따라올 것을 종용했다.
너자도 별말 없이 그들을 따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캔디스가 아직도 분해하는 비아에게 은밀히 말했다.
“지금부터 도노반을 미행해라. 그리고 어떻게든 저놈의 강의 시간표를 알아 와. 못 알아 오면 바로 잘라 버릴 줄 알아.”
오만한 캔디스의 명령에 비아가 비장한 표정으로 묵례를 했다.
* * *
다행히 다음 수업에서도, 다다음 수업에서도 너자가 맞을 일은 없었다. 아침 소란의 소문은 이미 제국 아카데미 내에 모두 퍼져 있어 쓸데없는 패기로 맥켄지를 건드는 간 큰 놈은 없었다. 거기에 곰같이 커다란 너자가 다리를 쩔뚝이며 걷는 모습도 한몫했다. 맥켄지와 캔디스마냥 모든 학생이 휘핑보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 자제님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질 수 있는 체벌에 몸을 사렸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제국 아카데미는 비록 허울뿐이라도 평등을 지향해 모든 학생은 학생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귀족가의 귀한 자제들이었기 때문에 학생 식당의 질은 상당히 좋았다. 학생 식당에는 총 네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관은 학생들 전용, 2관은 시종들 전용, 3관은 제국 아카데미 임직원 전용, 4관은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평민들을 위한 관이었다.
그레머는 야무지게 어퍼 클래스를 위한 테이블 중 제일 좋은 테이블에 재빨리 달려가 자리를 잡았고 맥켄지의 식사를 받으러 뛰어갔다. 너자가 멍청히 서 있자 샬로메가 너자의 등에 손을 대고 4관이라 쓰여 있는 푯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넌 저기에서 밥을 먹으면 돼.”
“밥?”
“응. 먹을 거.”
먹을 거라는 말에 지금까지 음울하게 있던 너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펴졌다. 한순간에 확 트인 표정에 샬로메가 어이없다는 듯 노예를 바라보았다. 너자는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여 묵례를 한 후 빠르게 뛰어갔다.
방금까지 종아리가 아파 설겅설겅 걷던 놈 같지 않은 발놀림이었다. 샬로메는 저도 모르게 픽 웃으며 배식을 받으러 2관으로 걸어갔다.
너자는 방금까지 죽을 것같이 서러웠고 화가 났었다. 하지만 코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에 부정한 마음들은 눈이 녹듯 사라졌다.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허기짐은 자각을 하는 순간 엄청난 굶주림이 되었다.
“히익!”
“아… 악마다!”
너자가 기세 좋게 뛰어와 줄을 서자 줄을 서려던 사용인들과 줄을 섰던 사용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정신이 조금 남아 있다면 너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미안해 쭈뼛거렸을 텐데 너자는 배가 너무 고팠다. 어제저녁에 먹은 말라비틀어진 빵과 우유 빼고는 먹은 게 없던 탓이었다.
제국 아카데미는 온갖 곳에서 기부금을 받고 재단 자체가 부유했기 때문에 사용인들에게 너그러운 편이었다. 제4관의 배식 방법은 뷔페식이어서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양껏 퍼서 담는 형식이었다.
너자가 눈치껏 식판을 집어 음식들이 담겨 있는 통에 가 먹고 싶은 것을 모조리 담았다. 그리고 제4관의 제일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먹기 시작했다.
너자는 행복했다.
너자 딴에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눈에 띄지 않게 먹고 있지만 너자의 온 행동거지는 학생 식당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집중을 받았다. 너자는 소문의 야만인 노예인 것과 별개로 여기 있는 모든 사람보다 머리통 두 개를 쌓은 만큼 컸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야무지게 꼭꼭 씹어먹는 게 퍽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품위를 생각하며 식사를 하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너자가 하는 행동은 모든 게 유별났다.
맥켄지는 대각선으로 보이는 너자의 모습에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며 먹던 것을 멈추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멧돼지야 뭐야….”
존나게 처먹네… 맥켄지의 생에 저렇게 걸신들린 듯 처먹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맥켄지 기준으로 너자가 먹는 음식은 쓰레기 같았고, 그것을 저렇게 먹어대는 것에 너무 비위가 상했다.
맥켄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시종인 그레머가 눈치껏 먹던 것을 멈추고 맥켄지에게 다가가 맥켄지의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레머가 식기를 치우며 맥켄지가 손도 대지 않은 고급 디저트인 마카롱도 버리려고 손을 댔을 때 맥켄지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건 버리지 마.”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가 어안이 벙벙해져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하지만 도련님 단 후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시잖아요?”
단맛을 여간 싫어하는 게 아닌 맥켄지였다. 일단 맥켄지가 말한 대로 정성껏 포장된 마카롱을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레머의 말에 맥켄지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중얼거렸다.
“멧돼지한테 줘 보려고.”
맥켄지의 말에 유능하고 눈치가 빠른 그레머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그레머도 궁금하기는 했다. 저딴 질 낮은 음식을 좋다고 처먹어 대는 노예 새끼가 마카롱을 먹고 보이는 반응이.
샬로메는 조금 남은 학식을 흡입하듯 빠르게 다 먹었다. 그리고 아직도 먹고 있는 노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제 가야 해. 일어나.”
너자는 대강 눈치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금 남아 있는 달짝지근한 콩을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났다. 얼굴에 살이 없어 갸름하던 노예의 얼굴이 별안간 양 볼이 터질 것같이 튀어나온 모습이 재밌었다.
샬로메는 저도 모르게 친절을 베풀어 식판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노예를 이끌어 식판 넣는 곳에 데려다줬다. 너자는 콩을 마저 삼키며 샬로메에게 묵례를 하고 다 먹은 식판을 가져다 놓았다.
샬로메와 너자가 같이 맥켄지에게로 갔다. 그 모습을 보던 맥켄지가 툭 하고 말했다.
“그냥 그 마카롱도 버려 버려.”
“네? 하지만….”
“오늘따라 버릇이 없네, 너.”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가 기겁을 하며 잘 포장된 마카롱을 쥐어 정리했던 배식판에 버렸다. 그리고 허겁지겁 배식판을 가져다 놓고 왔다.
저 얼굴 때문인가?
아까 음울했던 표정이 사라지고 입꼬리까지 올라간 노예의 말간 표정에 맥켄지의 속이 이상하게 끓었다. 이런 이상한 충동이 처음이라 맥켄지는 내심 당황스러웠고 빨리 이 감정을 어떻게 해 버리고 싶었다.
맥켄지는 아까 계획했던 것을 실행키로 마음먹었다.
* * *
모든 정규 수업이 끝났다. 모든 수업의 질은 매우 좋았으며 과제가 있는 것들도 있었고 실습을 하는 것도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노을이 져 주홍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맥켄지는 뻐근한 목을 풀며 샬로메에게 말했다.
“캔디스네 모지리 좀 데려와 봐.”
맥켄지의 말에 샬로메가 아까부터 신경 줄에 거슬리던 놈을 드디어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쏜살같이 달려갔다. 맥켄지가 벤치에 앉으며 한 번 하품하고 제법 선선한 바람에 재킷을 벗어 그레머에게 내밀 때 샬로메가 애써 침착한 척을 하는 비아를 데리고 맥켄지에게 대령했다.
자작가의 자제에 불과한 비아는 나른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맥켄지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비아가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동원해 맥켄지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도노반 님.”
“왜 자꾸 따라다니니?”
“…….”
맹랑하게 치고 들어오는 맥켄지에 말에 비아의 말문이 막혔다. 비아는 차마, 내가 모시는 도련님이 너를 미행해서 너의 시간표를 알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찌질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내 시종에게 볼 일이라도 있나, 도노반?”
비아가 이유를 대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캔디스가 무리를 대동한 채 맥켄지의 앞에 섰다.
맥켄지는 그런 캔디스의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저놈은 꼭 저같이 모자란 새끼들만 끌고 다녔다. 캔디스의 추종자들은 사교계 내에서도 꽤 유명했었다. 이베아 제국 내의 또래 후작가, 백작가, 자작가들의 영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원래 끌고 다니던 추종자들과 제국 아카데미에서 만난 다른 왕국 자제들도 추가됐다.
저놈은 할 줄 아는 게 여왕벌 놀음뿐이었다. 그리고 분하지만 자신이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었다.
사실 맥켄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계획했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은밀해 아무도 몰랐어야 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저런 여왕벌 노릇을 하는 놈이 필요했다. 사실 여왕벌이 없다면 없는 대로 할 생각이었지만, 손에 패가 있고 그 패를 사용해 써먹을 수 있는 자원이 있는데 그 자원을 써먹지 못하면 그건 천치였다.
맥켄지는 자신에게 쏘아붙이면서도 눈은 맥켄지의 뒤에 있는 노예에게서 떼지 못하고 있는 캔디스에게 말했다.
“스와포네, 귀 좀.”
맥켄지의 느닷없는 명령에 캔디스가 질색을 하며 짜증냈다.
“이게 어디서 이래라저래라야.”
캔디스의 짜증에 맥켄지가 화도 내지 않고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어.”
그의 말에 노예만을 바라보던 캔디스의 눈이 맥켄지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홀린 듯 맥켄지에게 다가가 귀를 가져다 댔다.
맥켄지가 나른히 말했다.
“따먹게 해 줄게. 저 노예.”
“…!”
“그런데 처음부터 따먹게 해 줄 수는 없어. 네가 얼마나 쓸모있는 새끼인지 나한테 증명해야 하고, 나에게 쓸모있는 새끼가 돼야 해.”
“…….”
캔디스의 눈이 욕망과 혼란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며 맥켄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선 선급금으로 내가 같이 있다는 전제하에, 저 노예를 보고 자위하는 것까지는 허락해 줄게. 종아리를 핥는 것 정도는 서비스로 주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으며 황홀해하는 캔디스를 보며 맥켄지가 사냥에 성공한 재규어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그 재수 없는 미소에 정신을 차린 캔디스가 내숭을 떨어댔다.
“글쎄, 난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그럴 리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것이다. 맥켄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캔디스를 보며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표정만 갈무리하면 뭐 하나, 눈깔에서 안달 난 게 티가 나는데. 당장에라도 비꼬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빠질 때였다.
“오늘 밤 자정에 내 독채로 와.”
“…….”
맥켄지는 내숭을 떠는 캔디스를 보며 말했다.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야.”
“…….”
맥켄지가 가뿐하게 일어서 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캔디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잘 가게.”
대외적인 말과 표정을 지은 맥켄지가 벤치를 떠났다. 나른히 걸음을 옮기는 맥켄지의 뒤에 그레머와 샬로메, 그리고….
“개 같은 놈.”
캔디스는 저를 손안에 두고 굴리려는 맥켄지의 의도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큰 선심 쓰는 척,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애롭게 베푸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원하는 게 있어서 뇌물을 청탁하는 거였다.
얼마나 자신을 좆같이 봤으면 저따위 제안을 하는가! 분명 저 새끼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부탁하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일이 하찮은 것은 아닐 터였다.
맥켄지 도노반은 공작 가문인 자신과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는 이베아 제국 내 최고 실세인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이었다. 오죽하면 이베아 제국의 3개 있는 공작 가문 중 제일 권위가 높은 스와포네 가문도 도노반 후작 가문의 총을 구매하고, 스와포네 영지에서 판매하려면 온갖 서류와 공작 가에서도 지출하기 꺼려지는 개런티를 주고 매입해야 했다.
그리고 대륙전쟁의 일등 공신인 도노만 가문은 곧 공작 가문이 될 터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뿌리부터 귀족 가문이었던 스와포네 가문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가문 따위가….
아무튼 맥켄지 도노반은 아쉬운 것이 전혀 없는 재수 터진 놈이었고 캔디스가 알기로 맥켄지가 사적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처음인 일이었다.
“시팔….”
캔디스가 이를 부득 갈았다. 분명 맥켄지의 제안을 덥썩 물면 자신이 좆 될 게 분명했다. 맥켄지가 착즙하듯 자신을 부려 먹을 미래가 보였다.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가훈은 ‘스와포네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였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스와포네 가문을 적으로 돌리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적인 상대를 멸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스와포네 가문에게 도움을 준 것에게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 배에 상응하는 포상을 내려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스와포네 가문의 가훈에 세뇌된 캔디스는 상벌에 능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가훈을 행했다. 비록 사생이지만 스와포네의 아이를 밴 하녀를 무일푼으로 내쫓지 않고 스와포네의 씨를 함구하는 대신 일반 평민이라면 감히 꿈꾸지도 못할, 분에 넘칠 만한 돈을 줘 상을 내렸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것을 감히 넘봐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낸 하녀와 그녀의 일족을 멸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렇듯 캔디스는 무언가를 받으면 꼭 그에 배에 달하는 무언가를 주었다.
그런 캔디스였기에 맥켄지를 돕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노예가 너무 탐이 났다.
캔디스는 오늘 하루 미칠 지경이었다. 캔디스 역시 원하고자 하는 것은 별 노력 없이, 아니 아무 어려움 없이 바로 가졌다. 이베아 제국의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인 캔디스가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것을 제외하곤 없었다. 하지만 저 노예는 예외였다.
저 노예는 맥켄지 도노반의 것이었다. 스와포네의 이름을 걸고 맥켄지에게 저 노예를 달라고 떼를 쓴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스와포네 가문과 도노반 가문은 형식적으로 좋은 관계를 흉내 내고 있었다. 가문의 자녀들이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제국을 위해 필수적으로 연기해야 했다. 또 만약 캔디스가 스와포네 가문의 가주가 되어도 도노반 가문과 영지의 경제를 위해 수교를 해야 했고 정치를 하는 러트 도노만에게도 친애의 얼굴을 해야 했다. 이것은 도노반 가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이는 제국의 균형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은밀히 저 노예를 훔칠 수도 없었다. 맥켄지의 호위기사인 샬로메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혔던 라이징 기사였고 설사 훔친다 해도 만약 스와포네 가문이 도노반 가문의 노예를 훔쳤다는 게 들통나면 이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만약 캔디스가 맥켄지의 노예를 훔쳤다는 게 사교계에 알려진다면 캔디스는 주저하지 않고 목을 매 자살할 것이다.
하지만 캔디스는 계속해서 생각나는 매를 맞는 노예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노예는 마치 퓨리아가 만든 전쟁의 신 드뷔시 상이 인간으로 현신한 것 같았다.
퓨리아는 1세기 전 금녀의 직업인 조각 일을 생업으로 했던 이베아 내 최초의 여성 조각가였으며 이베아 내 최고의 조각가로 찬사를 받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조각가로서 승승장구하던 퓨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이는 퓨리아가 신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 벼락처럼 나타난 전쟁의 신 드뷔시 때문이었다. 그 아름답고도 황홀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퓨리아는 광인처럼 6년 동안 작업실에 처박혀 드뷔시 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캔디스는 어렸을 때 종종 가주인 아버지를 따라 왕국에 놀러 간 적이 많았고 왕과 알현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알현실에서 놀았는데, 알현실에는 그 천재 조각가 퓨리아가 만든 드뷔시 상이 있었다. 캔디스는 그 드뷔시 상을 정말 좋아했고 가지고 싶어 했다. 국보인지라 그 드뷔시 상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노예는 그 드뷔시 상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종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키와 허름한 옷으로 가려 놓아도 태가 나는 근육질의 몸은 캔디스를 안달 나게 했다.
캔디스가 심각한 얼굴로 이제는 보이지 않는 맥켄지가 떠난 자리를 노려보고 있을 때 맥켄지와 캔디스의 대화를 듣지 못한 그의 추종자 무리는 기분이 나빠 보이는 캔디스의 똥구멍을 빨기 위해 맥켄지를 욕했다. 그러다 필연적으로 노예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야만인 노예 새끼 처맞는 거 보셨습니까?”
“네, 봤지요. 이상한 소리 내는데 역겨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야만인이라더니 정말 야만적이게 생겼더군요.”
“그 기분이 나쁠 정도로 까만 머리카락이라니….”
그러다 어느 순간 음담패설로 넘어간 패거리는 귀족으로서의 명예도 생각지 않고 채신머리없이 깔깔 웃으며 노예를 대상화시켜 대기 시작했다.
“그 노예 새끼 젖통 보신 분 계십니까?”
“네, 아주 젖소처럼 크던데요. 셔츠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추종자 중 하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마 정액도 까만 정액을 쌀 겁니다.”
그 말에 모든 추종자 무리의 자제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리고 캔디스는 순식간에 피가 몰리는 아랫도리에 깊고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맥켄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독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옆에 따르던 샬로메에게 말했다.
“교제는 구했니?”
“네. 구했습니다.”
“도련님, 오늘 바로 시작할까요?”
품속에서 제국어 기본 회화 교재를 꺼내는 샬로메와 오늘 당장 시작하느냐 물어보는 그레머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아니. 오늘은 안 할 거야. 저녁에 노예가 할 일이 있거든.”
의외의 말에 그레머가 눈을 치켜뜨고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맥켄지는 알아서 마구간으로 기어들어 가는 노예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오늘 자정쯤에 스와포네가 올 거야.”
갈수록 놀라운 말에 그레머가 아닌 옆에서 잠자코 있던 샬로메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캔디스 스와포네가 왜요?”
사이가 안 좋으신 거 아니었습니까? 뭐 예쁘다고 스와포네가 도련님 독채에 온답니까? 그것도 자정에? 우다다 내뱉어지는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 새끼를 좀 써야 하는 하는 일이 있어서.”
“…….”
“그리고 그레머, 저 노예놈 좀 씻겨라. 똥구멍까지 다.”
“…네.”
머리도 좀 다듬고. 머리털이 저게 뭐야. 짧게 쳐 버려.
갈수록 의외인 맥켄지의 말에 샬로메와 그레머는 혼란스러웠다. 맥켄지는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을 무시하며 샬로메에게 물었다.
“저놈 기본적인 회화는 되니?”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기본적인 단어만 알고 있을 겁니다.”
“안 돼, 가만히 있어. 이런 건 아니?”
맥켄지의 말에 샬로메가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는 알 겁니다.”
샬로메의 말에 맥켄지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거면 됐어.”
그레머는 맥켄지의 명대로 노예를 빡빡 씻겼다. 너자는 자신이 씻을 수 있다는 것을 몸짓으로 어필했지만 그레머는 무시했다. 우물가에서 거칠게 비누칠을 당하는 너자는 당황스러워했지만 하얀 거품이 문대지는 느낌이 꽤 재밌어서 금방 몸에 힘을 빼고 받아들였다. 그레머의 손이 너자의 은밀한 곳까지 닿았지만 성적인 의도는 이만큼도 없이 정말 물건을 닦듯이 문지르는 그레머의 손길에 너자는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마치 개를 씻기는 것 같다고 그레머가 생각하며 비누칠을 다 한 뒤 길어 놓은 찬물을 노예에게 끼얹었다. 노예의 두툼한 가슴이 놀란 듯 부풀어 오른 것을 모른 체하고 그레머는 비누 거품이 없어질 때까지 물을 끼얹었다. 대여섯 번 물을 끼얹으니 거품이 완전히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레머가 큰 수건으로 거칠게 너자의 몸을 닦아내고 머리를 말렸다.
그런 노예를 보는 그레머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도련님이 아까 한 말 때문이었다. 노예가 미친년 꽃다발처럼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다니든, 노예가 꼬질꼬질하든 아무 상관 하지 않았던 도련님이 왜 노예를 씻기게 했을까. 그것도 은밀한 곳까지 구석구석.
“…….”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느새 자정이 되어 갔다.
이것저것을 준비하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다. 그레머가 너자의 어깨까지 오는 더벅머리를 짧게 치기 시작했다. 노예는 기특하게도 거부감 없이 고분고분 있었다. 그렇게 너자의 머리카락을 짧게 치다가 코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눈썹 위로 칠까, 아니면 그대로 둘까 고민하다 흑요석같이 까맣게 빛나는 눈 때문에 저도 모르게 앞머리를 눈썹 밑으로 잘랐다.
너자는 개운한 몸과 한껏 가벼워진 머리통에 기분이 좋아졌다. 난생처음 해 보는 짧은 머리는 좀 어색했지만 거슬리지 않는 머리칼과 가벼워진 무게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 슬슬 잠이 와 너자가 중얼거렸다.
“졸려.”
“안 돼.”
답을 해 줄 거로 생각하지 않은 너자가 그레머의 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안 돼?”
“응, 안 돼.”
‘왜?’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너자의 회화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너자가 고개를 갸웃이며 그레머를 바라보자 그레머는 왠지 모를 기분에 노예의 눈을 피하며 그를 독채로 데려갔다.
처음 들어가 보는 독채는 무척이나 안락했고 쾌적했다. 독채의 안은 꽤 넓었고 방도 두어 개 정도 되었다. 독채의 거실 테이블에 맥켄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독채 안은 초로 안을 밝혔었는데 어두운 공간 속, 제일 환하게 빛나는 곳에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코만치족의 전설에 나오는 미와 지혜의 여신 같은 모습이었다. 꿀 같은 머리 색은 어둠과 촛불의 색에 적절히 녹아 있었고 눈을 내리깔고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지혜로워 보였다. 맥켄지의 피부는 어둠에 묻히지 않고 여전히 하얘 환상 같았다.
너자는 예전부터 예쁜 것에 감흥이 없는 편이었다. 예쁘다고 일컬어지는 꽃이라든가 털복숭이 동물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오고 맥켄지를 볼 때마다 감탄했다.
너자가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감흥이 없던 것은 정말 아름답고 귀여운 것을 보지 못해서였다고. 그는 인제야 부족민들이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고 손에 넣으려는 것을 조금 이해했다.
맥켄지가 고개를 들어 독채 안에 들어온 노예를 보았다. 그레머는 역시 유능한 시종이었다. 훨씬 말끔해지고 사람 같아진 노예의 모습이 퍽 봐 줄 만했다.
유능한 장기 말에게 줄 포상으로 충분해 보였다. 스와포네는 이미 맥켄지의 침실 안에 있었다. 맥켄지는 그레머에게 침실로 가 스와포네에게 노예가 왔다는 말을 전하라고 명했다. 그레머가 유순히 고개를 숙이며 맥켄지의 침실로 들어갔다. 제 방으로 들어가는 시종의 모습을 보며 맥켄지가 옆에 대기하고 있던 샬로메에게 노예를 데려오라 명했다.
샬로메는 충견처럼 현관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노예를 데리고 와 맥켄지의 앞에 세웠다. 맥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에 온 노예에게 말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일?”
“그래. 일.”
맥켄지는 반말을 찍찍해 대는 노예가 거슬렸지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했다. 말투야 천천히 교정하면 되는 일이었고 침실에 있는 스와포네의 아랫도리가 터지기 전에 데려가야 했다. 맥켄지가 말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되묻는 노예에 맥켄지가 가볍게 그의 정강이를 찼다. 노예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치자 더욱 세게 그의 정강이를 찼다. 안 돼. 가만히 있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게 검지를 눈앞에 대고 단호히 말하며 뒤로 간 맥켄지가 노예의 양팔을 붙잡고 원래 있던 자리에 세웠다.
“가만히 있어.”
그 말을 한 후 다시 한번 노예의 정강이를 찼다. 똑같은 일을 세네 번 반복하자 노예가 뒷걸음질을 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게 가만히 있어야.”
“응. 가만히 있어.”
미약하게 겁을 먹은 노예를 보며 샬로메에게 말했다.
“가자.”
“네.”
맥켄지가 침실 문 밖에 오자 그 앞에서 대기 중이던 그레머가 공손히 침실의 문을 열었다. 침실은 단 한 개의 초만이 켜져 있었는데 침대 옆 소파에 캔디스가 굳은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있었고 그 뒤에 비아가 서 있었다.
맥켄지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조소를 흘렸다. 맥켄지가 침실에 들어가니 그 뒤를 샬로메와 너자가 따라갔다. 너자는 굳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캔디스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저 노란 머리와 맥켄지의 사이가 나빠 보였는데 이런 야심한 시각에 방문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너자에 캔디스가 이를 뿌득 갈았다.
노예는 더욱 자신의 취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고양감에 숨을 내쉬자 맥켄지가 널따란 침대 모서리에 앉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지? 그러니까 정각에 오라니까.”
“…….”
뭐 한다고 일찍 쳐와서 기다리고 있냐는 말을 돌려 한 맥켄지에 캔디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캔디스에 맥켄지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샬로메. 노예의 옷을 벗기렴.”
맥켄지의 명령에 샬로메가 문가에 멀뚱히 서 있는 노예의 팔을 끌어 캔디스의 바로 앞에 세웠다. 너자의 바로 앞에는 눈이 벌게져 있는 캔디스가 있었고 두어 걸음 뒤에는 커다란 침대의 끝부분이 있었다. 유순히 자신의 행동에 따라오는 노예의 모습에 샬로메가 착잡한 마음을 빨리 갈무리하고 노예의 얇은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
너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벗기는 샬로메의 행동에 온몸을 굳혔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알았다. 아마 저들이 자신의 몸에 채찍질할 것인가 보다. 하지만,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갑자기…?
너자가 당황스러움에 시원스레 뜯어지는 단추를 한 손으로 여미며 샬로메를 쳐다보았다. 그런 샬로메보다 빠르게 맥켄지가 노예의 앞에 다가가 뺨을 세게 쳤다.
어찌나 힘이 센지 오른쪽으로 휙 돌아간 뺨에 너자가 놀라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때 맥켄지가 너자의 머리채를 잡아 자신을 보게 말들었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가만히 있어.”
그 흉흉한 말에 너자가 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꽉 동여매고 있던 셔츠를 놓았다. 맥켄지가 뒤로 물러나자 샬로메가 너자의 옷가지를 시원스레 다 벗겨졌다. 마지막 속옷을 벗길 때 너자가 다시 몸을 굳혔으나 내려가는 속옷을 붙잡지는 않았다.
제 임무를 마친 샬로메가 너자의 곁에서 도망치듯 떨어졌다.
캔디스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너자의 알몸에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짐승처럼 일어나 너자의 가슴팍을 밀어 침대에 쓰러뜨렸다. 가만히 있으라는 제 주인의 말에 너자가 거부감을 억눌렀다. 알몸인 상태에서 저 노란 머리에게 맞는 것인가 보다.
너자가 곧 내려질 폭력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호기심과 두려움에 너자가 질끈 감았던 눈을 아주 살짝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기함했다.
헉… 후….
노란색 머리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자지를 꺼내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흉흉한 모습에 너자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캔디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의 순진한 눈망울에 캔디스가 더욱 발정했다. 캔디스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욕망에 참지 못하고 너자의 몸에 올라타려는 순간 맥켄지가 말했다.
“자위뿐만이랬어.”
“…시팔! 저걸 두고 어떻게 자위만 해!”
“안 돼. 네가 나한테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할 때. 그때 쑤시게 해 줄 거야.”
단호한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속으로 온갖 욕을 쏟아부었다. 자지가 터질 것 같았다. 무구한 표정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노예의 구멍에 자지를 쑤셔 넣고 싶었다. 분명 싫어서 울 거야. 엉엉 울면서 나를 밀어내겠지. 처음일 것이 분명한 구멍은 자신의 자지를 끊어 낼 듯 물어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억지로 밀어서 뚫어내고 씹질을 하다 노예의 후장에 정액을 싸겠지.
시발, 상상만으로도 쌀 것 같았다.
캔디스가 절박하게 외쳤다.
“다리, 다리는 핥아도 된댔지?”
으, 징그러운 새끼. 맥켄지가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그리고 부글부글 끓는 속에 잠시 이를 갈다가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칫했다. …내가 화가 날 일이 뭐가 있지? 이건 좋은 게 아닌가?
맥켄지가 잠시 드는 의문에 캔디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있자 캔디스가 다시 외쳤다.
“시팔! 야!”
다급하게 소리 지르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정신 차리고 평안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물론이지. 마음껏 즐겨.”
맥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캔디스가 한 손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노예의 발목을 잡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다른 곳은 다 크고 굵은데 발목만큼은 너무도 얇아 캔디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캔디스는 한 손에 잡히는 발목에 더욱 발정하며 세게 끌어당겼다.
“……!”
캔디스의 강한 힘에 너자의 몸이 그가 끄는 곳으로 힘없이 끌려갔다. 캔디스는 이토록 조각 같은 몸이, 전사 같은 몸이 자신의 몸 아래에서 꼼짝을 하지 못하며 자신이 함부로 쥐어도 된다는 사실에 정말 쌀 것 같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상황과 자신을 보며 자지를 훑어대는 캔디스에 너자가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꽉 감았다.
캔디스가 그런 노예를 보며 자지를 더욱 빠르고 세게 훑고 자위했다. 그리고 노예의 발목을 들어 올려 뼈가 불거진 복숭아뼈, 피가 터져 새파랗게 멍든 종아리, 그리고 정강이 부분을 물어뜯었다.
마치 뼈에 달라 붙어 있는 고기를 발라먹는 것 같은 추잡한 소리가 캔디스의 입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너자가 종아리를 혀로 핥으며 깨무는 캔디스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 시… 시러!”
서툴게 말하는 너자의 싫다는 제국어에, 그리고 잔뜩 겁먹은 너자의 목소리에 캔디스가 마지막으로 완급을 조절하며 자지를 흔들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움츠린 노예의 양 무릎을 거칠게 벌리고 노예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줘 엉덩이를 위로 들어올렸다. 캔디스가 빼꼼히 보이는 노예의 꽉 다물린 구멍에 자지를 맞추고 정액을 싸기 시작했다.
“……제기랄….”
캔디스의 눈이 시뻘게져 마지막 한 방울까지 노예의 구멍에 정액을 뿌려댔다. 시팔, 내 정액이 진짜 노예의 후장 안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결코 좁지 않은 맥켄지의 방에 후덥지근한 공기와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맥켄지는 숨을 헉헉거리고 정액에 범벅된 노예의 구멍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캔디스의 모습을 보며 역겨워했고, 샬로메와 비아는 이 미친 상황이 거북하기만 했다. 서로의 기분만을 생각하며 이 정신 나간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너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캔디스가 땀에 전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내성이 생긴 그였지만 오랜만에 경험하는 아찔한 쾌락에 몸이 나른했다. 마치 처음 자위를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자위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진짜 씹질을 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캔디스가 나른하게 웃었다.
샬로메는 땀에 전 채 웃고 있는 캔디스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미친놈이었다. 어떻게 고급 교육을 받을 대로 받은 새끼가 저렇게 도덕성이 없지? 스와포네 공작 가문은 신앙심이 꽤 좋아 성하 휘하의 수도원이나 기타 시설에 기부금을 뿌린다고 들었다. 그런 집안에서 저런 개망나니가 태어났다니 믿을 수 없었다. 또 자위나 성행위는 은밀하고도 프라이버시한 행위였다.
샬로메는 돈을 다발로 줘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방에서, 거기다 같은 게 달린 노예 새끼를 보고 자위를 할 수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반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캔디스 스와포네는 이베아 제국 내에서 맥켄지와 함께 손에 꼽히는 미남자였고 이성에 관심 자체가 없는 맥켄지와 달리 캔디스는 몸에 밴 매너와 끝없는 입담으로 이베아 내의 영애들은 물론 영식들에게도 인기가 아주 많았다.
서쪽의 맥켄지 도노반은 환상적인 플래티넘 블론드의 꽃사슴 같은 이목구비의 미인으로 유명했고, 동쪽의 캔디스 스와포네는 애쉬 블론드의 호남형의 미남자로 유명했다.
참고로 샬로메의 동생도 캔디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도성 내의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가 있었는데, 바로 이베아 제국 내 영식들의 초상화를 파는 것이었다. 사춘기인 소녀들에게 미지의 세계인 귀족 가문의 영식들은 우상이며 사랑이었다.
샬로메는 휴가 때 집에 가면 당장에 동생의 방 안에 있는 저 변태 새끼의 초상화를 찢어발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샬로메가 이 끔찍한 일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맥켄지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소파에 늘어져 있는 캔디스에게 말했다.
“만족하냐?”
맥켄지의 물음에 캔디스가 진심으로 미소 지으며 답했다.
“어. 존나 쩔더라.”
“그럼 다행이고.”
영혼 없이 답하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며 소파 턱걸이에 오른쪽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며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노예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 맥켄지의 술수에 걸려 줄까 말까 했다. 맥켄지의 방 안에서 노예를 기다리며 엄청나게 갈등을 했다. 지금 내가 실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위 한 번에 살을 내주라고? 도노반 저 음침한 놈이 뭘 시킬 줄 알고? 역시 이건 아니다 싶어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들어온 맥켄지의 시종에게서 노예가 왔다는 말을 듣고 그래,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자 해서 다시 앉았다.
그리고 깔끔해진 노예가 제 발로 침실 안으로 들어와 눈앞에 서서 순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 한순간에 발기했다.
지금도 다시 한 발 빼고 싶은 것을 정말 인내하는 것이다. 캔디스가 시선을 내려 노예를 바라보다 맥켄지에게 말했다.
“야, 보는 건 되지?”
“…좋을 대로.”
마지못한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뒤에 대기하고 있는 비아에게 명령했다.
“초를 하나 켜서 노예 옆에 가 있어 봐.”
아…. 시종을 데려올걸. 캔디스의 말에 비아가 싫은 표정을 서둘러 갈무리하고 항상 여분으로 갖고 다니는 작은 초를 켜 노예에게 다가갔다. 노예에게 다가갈수록 기분 나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비아가 그 더러운 꼴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 처리를 열심히 하며 노예의 옆에 섰다. 비아의 초가 노예를 환하게 비췄다. 노예는 양팔로 눈가를 가리고 있었고 양다리를 모아 웅크리고 있었다.
캔디스가 비아에게 명령했다.
“다리 쪽을 비춰 봐.”
비아가 재빠르게 초를 노예가 모로 모은 정강이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노예는 가만히 있으라는 제 주인의 말을 잘 시행 중이었다. 노예의 왼쪽 다리의 모습이 처참했다. 희끄무레한 종아리의 겉면이 이빨 자국과 침 자국으로 번들거렸다.
캔디스는 아까 했던 행위를 떠올리며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노예의 피부는 뜻밖에 쫀득했고 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언뜻 노예의 몸을 봤을 때 체모가 성기 부분을 제외하고 아예 없었다. 야만인들은 다 털이 없는 편인가? 캔디스가 침을 삼켰다.
아, 한 번 더 하고 싶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씹어먹고 싶었다. 하지만 맥켄지가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캔디스가 배부른 사자처럼 웃었다. 그리고 맥켄지에게 물었다.
“화대는 하지. 원하는 게 뭐야?”
기다렸던 말에 맥켄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티를 내면 안 됐다. 맥켄지가 툭 하고 말했다.
“별거 아니야. 너희 스와포네 가에서 도노반 가와 같이하는 사업의 지분.”
“…뭐?”
엄청난 말을 하면서 마치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처돌았냐? 그걸 내가 어떻게 줘. 나 아직 가주도 아니야.”
“하지만 네가 가주가 될 거잖아.”
“…그게 언제 될 줄 알고, 새끼야. 아버지 아직 정정하시다. 아버지 하시는 꼴 보면 나 30살 돼도 가주 자리에서 안 내려오실걸.”
캔디스의 내숭에 맥켄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진짜 별거 아니야. 너희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전체 지분 말고, 너도 조금 갖고 있잖아. 내가 알기로 너 생일에 10% 받았다고 하던데?”
“.…그 정도의 지분이 있기는 하지. 그런데 그 10%로 뭐를 할 수는 없을 텐데? 아니, 그전에… 네가 그 지분을 가지고 뭐 하려고?”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알 건 없고. 그거 줘. 체험판 화대로는 충분하지 않아?”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했다. 총기사업 지분의 고작 10%다. 이걸 넘겨줘 봤자 그다지 위험 리스크는 없었다. 지분의 10%도 캔디스의 아버지인 프럼이 사업 교육용으로 넘겨준 지분이었다. 이 지분을 날리든, 불리든 상관없다 하셨다.
그런데 대체 무슨 속셈이지. 캔디스가 잘생긴 눈썹을 찡그리며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흠, 간 보려고 하나? 아무튼 캔디스가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캔디스가 사업용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
시원스러운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말했다.
“그럼 글피에 지분을 받을게. 준비해 놔.”
“알았어.”
괜히 고민했군. 일단 손해 없는 거래를 했다. 담백하게 끝난 거래에 캔디스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맥켄지에게 물었다.
“계속 나랑 거래할 거야?”
캔디스의 물음에 맥켄지가 아까의 캔디스처럼 사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래서, 진짜 원하는 게 뭔데?”
“협상의 기본이 안 돼 있네. 내가 제일 필요한 패를 까라고? 너네 아버지한테 뭐 배웠냐?”
“새끼가, 내가 너보다 정치 수업, 사업 수업, 실습을 천 번은 더 했어. 차남 새끼가 뭘 믿고 나대는지 모르겠다….”
“그 차남 새끼한테 노예 때문에 몸 닳아서 거래해 달라고 부탁하는 새끼가….”
“아, 야. 너 시간표 좀 알려 줘.”
“으, 네가 알아서 뭐하게.”
“내가 너 보려고 하는 줄 아냐? 아 좆같은 소리하지 말고 내놔.”
“흠, 그래. 그레머한테 받아가.”
“알았어. 그런데… 어디까지 해 주면 저 노예 따먹게 해 줄 거야?”
“새끼가… 네 대가리로 어떻게 가주를 할지 걱정이다.”
“시팔… 안 통하네.”
캔디스와 맥켄지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둘의 은밀한 거래가 시작되었다.
너자는 부족이 멸망하고 그 악마 같던 하얀 사람에 의해 하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끌려와 온갖 수모를 다 당했다.
너자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과 수단이 없었다. 마지막 전쟁에서 패하고 처음 보는 곳에서 눈을 떴을 때, 지금껏 너자와 그의 부족을 아주 징글징글하게 괴롭히던 하얀 사람들이 경멸의 눈으로 너자를 보았다. 너자가 이 상황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그들은 다수로 몰려와 너자를 학대했다.
너자는 마지막 전투에서 큰 부상을 얻었고 그 부상은 치명적인 흠이 되어 너자의 내장을 갉아먹었다. 예전만큼 체력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끝없는 학대를 하며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너자가 최초로 반항했을 때 그들은 다수로 몰려들어 너자의 머리를 돌로 찍어대며 그를 죽기 전까지 몰아갔다. 반항하면 안 돼. 정말 죽을 거야. 저들은 나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너자의 정신이 조금씩 썩어 들어갔다.
다람쥐 쳇바퀴 굴러가듯 너자의 일상은 항상 시궁창이었다. 그런데 그 쳇바퀴가 어느 순간 멈췄다.
이곳에 오기 전 그날도 시킨 것을 잘한 것 같았는데 혼났다. 다짜고짜 채찍질을 하려는 남자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폭력을 당할 줄 알았는데, 어디에선가 나타난 천사 같은 남자에 의해 구원받았다.
너자에게는 그때의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다. 항상 맞기만 했던 너자를 누군가가 나서서 구해 준 것은 처음이었다.
꿈꾸는 것 같은 금색 머리칼을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을 데려갔고 때에 절어 있는 자신을 씻겨 줬다. 비록 마구간이지만 곰팡내가 진동하고 미쳐 버리기에 십상인 밀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고 좋은 밥을 먹게 해 줬다.
자신을 사람 취급하지 않을지언정 폭력은 행하지 않았고 버러지처럼 볼지라도, 방치하지 않고 꼭 챙겨 주었다.
…회초리를 맞은 기억은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너자는 아무래도 좋았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주인이 된 아이가 잘못하면 자신이 대신 맞는 것 같았다. 괜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을 만 했다. 떼거리로 몰려와 돌로 머리를 찍어대는 것도 아닌데, 참을 만했다. 또 자신을 그 무서운 곳에서 빼내 준 대가라고 생각하면 속이 좀 편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너자는 엉덩이에 흐르는 감촉에 기절할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모욕에 턱이 달달 떨렸다. 꼭 너자의 깊은 내면 중요한 무언가가 산산이 조각 난 느낌이었다.
하지만 너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이 ‘가만히 있으라’ 했기 때문이었다.
너자는 그나마 손에 쥔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손안에 쥔 평화가 속이 곪아 썩어 버린 계란일지언정 너자는 그마저도 소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주인 아이와 미친놈의 이야기 소리가 멈췄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마 갈 것인가 보다. 너자가 눈가를 가렸던 팔을 내려 눈을 살금 뜨다 다시 질끈 감았다.
“…….”
미친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떨렸다. 직접적인 상해를 입히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서웠다.
계속해서 생각났다. 꼭 잡아먹힐 것 같았다. 벌게진 눈으로 씹어먹을 것같이 쳐다보았다. 아침에 언뜻 보았던 유리구슬 같은 초록색 눈은 욕망에 침식되어 기괴하게 빛났었다. 처음 겪어 보는 성적 대상화에 토할 것 같았다.
빼꼼히 떠졌던 까만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꽉 닫힌 채 파르르 떠는 게 보였다. 캔디스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꼬리 치네 저게.”
지금 저거 나한테 끼 떠는 거지? 나 유혹하는 거지?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참지 않고 말했다.
“너 안 가냐?”
냉정히 내려진 축객령에 캔디스가 억울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니! 저게 진짜 나한테 꼬리 쳤다고. 나랑 눈 마주치니까 눈 샥 감는 거 못 봤어? 지금 나 유혹한 거잖아.”
“가라.”
경멸에 찌든 맥켄지의 목소리에 캔디스가 한탄하며 일어났다.
“시팔, 사교 활동도 안 하고 일할 때 빼고는 맨날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니까 섹슈얼 포인트도 못 읽지.”
별안간 자신을 사회 부적응자로 몰아가는 캔디스에게 맥켄지가 순간 울컥해 반박하려 했으나 반박을 하면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계속 지속이 될 것이었다. 그는 얼른 제 영역에서 저 머저리를 내쫓고 싶었다.
“…….”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제 금빛 머리카락을 뒤로 쓸며 말했다.
“간다, 가!”
그리고 아쉽다는 듯 노예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질끈 감은 눈꺼풀이 얇아 보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속눈썹도 꽤 많은 편 같았다. 꾹 감은 눈꺼풀 아래에 빗자루 같은 음영이 파르르 떨렸다.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샬로메가 얼른 나가라는 듯 아예 침실의 문을 열었다. 캔디스가 나가려다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근데, 노예는 어디에서 자냐?”
캔디스의 물음에 맥켄지가 담백히 말했다.
“마구간.”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구간… 마구간이라. 그러다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같이 나가면 되겠네. 야, 데려다줄게. 같이 나가자.”
“…!”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와 샬로메가 정말 더러운 것을 들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맥켄지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왔다.
정신이 나가도 한참이 나갔다. 저 새끼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꼭 사랑에 빠져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얼간이 같았다.
저게 나한테 꼬리를 쳤다는 둥, 데려다주겠다는 둥,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디 할 게 없어서 노예 따위한테 에스코트란 말인가!
맥켄지와 샬로메의 표정이 역겨움에 일그러진 것을 보는 둥 마는 둥 한 캔디스가 아직도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노예에게 다시 말했다.
“야. 같이 나가자고.”
“…….”
하지만 노예는 요지부동이었다. 캔디스가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게 튕기네.”
안달 나게스리.
끝까지 정신이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캔디스를 보다 못한 맥켄지가 말했다.
“아, 꺼져. 빨리 꺼지라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말 아쉽다는 듯 노예를 바라보다 비아를 대동하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그레머가 실실 웃으며 나오는 캔디스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다 현관으로 가 문을 열어 그를 마중했다. 캔디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캔디스가 나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너자가 눈을 살금, 떴다가 정말 캔디스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눈치를 살살 보다 왠지 기분 나빠 보이는 맥켄지와 샬로메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일으켰다.
“…!”
말 못 할 곳에 차갑게 식은 게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천천히 너자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타고 흘렀다. 그 역겨운 기분에 너자가 이를 악물었다. 얼른 이걸 씻고 싶었다.
맥켄지가 웅크렸던 몸을 일으키는 노예를 보았다. 노예는 기척을 최대한 죽이며 침대에서 나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옷도 입지 않고 옷가지를 끌어안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하는 꼬라지는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나가 주는 게 꽤 기특했다. 멍청한 줄 알았는데 눈치가 있었다.
맥켄지는 곧 노예에게 관심을 끄고 그레머에게 침대 시트를 갈라고 명령을 하려고 할 때, 문득 침실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
맥켄지가 샬로메에게 말했다.
“노예를 나가게 하지 마.”
맥켄지의 말에 샬로메가 재빨리 침실 밖으로 나가 노예를 붙잡았다.
“…!”
얼른 마구간 우물로 가 몸을 씻으려 했던 너자가 별안간 자신을 붙잡는 샬로메를 바라보았다. 샬로메도 맥켄지의 명을 따른 것뿐이라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 샬로메도 문득 창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나는 마구간이 눈에 띄어 바라보다 맥켄지가 왜 노예를 나가지 못하게 했는지 깨달았다. 샬로메가 중얼거렸다.
“와… 저기에서 기다리고 있네….”
자신의 독채로 간 줄 알았던 캔디스가 맥켄지의 마구간 앞에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실에서 나온 맥켄지가 이를 갈았다.
“저 새끼… 어디에서 날로 먹으려고.”
“…….”
“저거 치졸한 새끼네.”
노예는 꽤 괜찮은 거래품이었고 노예를 통해 얻을 이득이 꽤 컸었다. 정말 뜻밖에 쓸모 있는 캔디스를 장기 말로 해 청사진을 완성하려고 했던 맥켄지가 분노했다.
“지 애비랑 똑같네.”
캔디스의 아버지 프럼 스와포네와 하는 짓이 똑같았다. 프럼 스와포네는 도노반 가문과 계약을 할 때도 앞에서는 계약을 잘 이행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안 쓰면 어떻게든 횡령과 배임을 일삼았다. 그것도 어찌나 치밀하게 하는지 문서로 절대 범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도노반 가문은 몇 대에 걸쳐 스와포네 가문과 거래를 하지만 항상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런 프럼 스와포네를 보고 자란 캔디스는 어떻게든 저의 손해를 줄이고 횡령을 하려고 드릉드릉거리는 것이었다. 절대 안 될 일이지. 너는 아직 나한테 해 줘야 할 일이 아주 많거든.
맥켄지가 말했다.
“이제부터 노예는 독채에서 지낸다.”
“…네?”
“대충 거실에서 찌그러져 자라고 해.”
교활한 스와포네가 자신의 물건을 홀랑 집어삼키고 튈 것이다. 맥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머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불만 있니?”
“아니요! 아닙니다!”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제 주인에 그레머가 재빨리 부정했다. 그리고 맥켄지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여분의 침대 시트를 가져와 맥켄지의 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역시 유능한 시종이었다.
샬로메가 그 모습을 보다 노예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자.”
“자?”
자라는 말은 아나 보네. 샬로메가 손가락으로 거실의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저기에서.”
“자.”
눈치껏 알아들은 너자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마구간도 좋았다. 하지만 이런 쾌적하고, 냄새도 안 나고, 따듯한 공간에서 자게 되다니. 정말 좋았다.
너자는 사실 꽤 단순해 슬픈 일이라든가 분한 일은 금방 잊어먹었다. 코만치족의 너자였을 때도 그랬고 노예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너자가 미치지 않은 것은 이런 단순함 덕분일 수 있었다.
좋아서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너자를 보며 샬로메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아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제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야만인들을 이끄는 최고 전사라고 하던데 거짓말이 아닌가 싶다. 뭐, 아침에 기사인 샬로메와 비아를 한 손에 제압한 것을 보면 거짓말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힘은 곧 권력이었다. 분명 부족 내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 노예는.
샬로메가 처음으로 노예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게 멈추지 않고 평소라면 베풀지 않을 친절을 행했다. 샬로메가 거실 테이블에 있던 휴지를 몇 장 떼 너자에게 건넸다.
너자가 손에 들린 휴지를 보며 멍청히 있자 샬로메가 너자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의 손짓을 이해한 너자가 아, 하며 고맙다는 듯 눈인사했다.
샬로메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난 자러 간다. 너도 자.”
“자.”
“응. 자.”
그 말만 하고 사라진 샬로메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맥켄지, 거실 구석에 서 있는 너자를 보며 별말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그레머, 그리고 밑을 더럽힌 것을 닦아낸 너자가 밑을 닦느라 밑에 떨어뜨린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가 하품을 하며 거실 구석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그리고 곧 깊이 잠들었다.
어둠이 깊게 내린 밤이었다.
날이 밝았다. 그레머는 이른 새벽 부지런히 일어나 맥켄지의 수업 준비를 했다. 교복을 정성스레 다리고 가방에 넣은 필기구를 확인했다. 맥켄지는 의외로 수업을 잘 듣는 편이었다. 벌써 반이나 없어진 만년필의 잉크를 확인하고 서랍장에 넣어 놓은 여분의 만년필 잉크를 가져와 손바닥의 반만 한 잉크 통을 담는 상자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쓱 훑어보았다. 단정하게 휘갈겨진 글씨체가 우아했다. 음, 혹시 모르니 노트를 여분으로 하나 더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그레머는 수업에 필요한 필기구와 노트를 모두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 장갑.”
사격에 필요한 장갑을 깜빡할 뻔했다. 그레머가 순간 뒤에 흐르는 땀을 무시하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각형의 최고급 반둘리에(캐리어)에 넣어 놨다. 그레머는 조심스럽게 사각형의 반둘리에를 감싸고 있는 가죽에 달린 최고급 금장의 고리를 열었다. 흠집이 나면 손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다. 이 반둘리에는 그레머가 여섯 달을 뼈빠지게 일해야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의 반둘리에였다.
그레머가 조심스럽게 반둘리에를 열어 내용물을 헤집었다. 마침내 찾는 게 보였다. 그레머가 손톱에 하얀색의 가죽 케이스가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검은색의 양가죽 Target Shooting 글로브였다. 글로브의 기장은 손목을 덮었고 디자인은 한 짝씩 달랐다. 왼손에 끼는 글로브는 손등의 부분이 드러나고 손가락 부분은 모두 막혀 있었지만, 오른쪽에 끼는 글로브는 일반 글로브와 같이 평범하면서도 엄지와 검지 부분이 뚫려 있었다.
이 장갑은 도노반 가문에서만 생산되는 슈팅 글로브였다. 일반 글로브는 모두 손가락이 막혀 있는 데다 두껍고 탄력이 없는 가죽 때문에 총기를 다루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글로브였으나 일반인이 만든 글로브와는 내구성과 기능성에서 차이가 났다.
도노반 가문만의 기술로 총기를 쓸 때도 전혀 거슬림이 없었고 디자인도 훌륭했다. 또 가죽의 늘어나는 유연성도 도노반 가문만의 특별한 공정 법이 담겨 있었다. 이 또한 그레머가 두 달을 뼈빠지게 일해야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사실 슈팅 글로브 이외에도 가슴에 차는 보호구와 팔뚝에 차는 보호구도 있었지만 제국 아카데미에서는 글로브 이외에는 반입을 금했다. 학생 간의 상대적 박탈감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취지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이 제국 아카데미에 있는 총기류와 기타 아이템 모두 도노반 가문에서 구매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딱 봐도 비싸 보이고 아름다운 슈팅 글로브는 출시도 하지 않은 모델이었다. 도노반 후작 부인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막내아들을 위해 기술자들을 달달 볶아 만든 것으로 무려 제작 기간도 4개월에 달했다.
그레머는 그 아름다운 슈팅 글로브의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하얀색의 가죽 케이스를 닫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거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노예를 발끝으로 밀었다. 너자는 사실 그레머가 일어났을 때 같이 일어났으나 너무 아늑하고 포근한 거실 바닥을 떠나기 아쉬워 미적거리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가차 없는 그레머의 발에 미적미적 일어났다.
노예가 일어나는 것을 본 그레머가 샬로메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미 깨 있던 샬로메가 피곤한 얼굴로 방 안에서 나왔다. 그레머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샬로메에게 얼른 씻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독채의 욕실은 제일 크고 좋은 곳과 사용인을 위한 자그마한 욕실 한 개가 있었다. 샬로메가 그레머의 닦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려다 멍하니 앉아 있는 노예를 보고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노예를 데리고 사용인들의 욕실에 갔다. 노예는 자그마한 방에 달려 있는 커다란 욕조와 바가지를 보고 이곳이 씻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샬로메가 말했다.
“빨리 씻어.”
“씻어.”
“빨리 제국어를 알려 줘야겠네….”
앵무새처럼 답하는 너자를 보며 샬로메가 중얼거렸다.
오후 수업 5분 전이었다. 식사를 마친 맥켄지가 향한 곳은 제국 아카데미 건물의 뒷부분이었다. 건물의 뒷부분은 널따란 초원의 부지가 있었고 약 9미터 뒤에는 숲이 울거져 있었다. 한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숲의 중간쯤에 높은 울타리가 쳐 있어 학생들의 이탈과 야외 수업 중 길 잃음을 방지한다고 했다.
금일 일정은 이 수업이 끝이었다. 다른 수업은 한 과목에 1시간 30분씩이었지만 이 과목은 무려 5시간짜리였다. 바로 사격 수업이었다. 이 사격 수업은 제국 아카데미의 커리큘럼 중 제일 인기가 좋아 수강을 신청하는 것 또한 경쟁이 치열했다.
많은 왕국의 영식들이 제국 아카데미에 오려고 한 이유는 첫째로는 사교 및 외교의 이유였고, 둘째로 바로 이 사격 수업이었다.
대륙 내 총기를 처음 발명한 것은 이베아 제국의 도노반 후작 가문이었다. 다른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도노반 후작 가문의 총을 똑같이 만들려고 했지만 도노반 후작 가문의 특별한 기술력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외관과 기능은 비슷할지라도 오리지널 총기의 정확성, 내구성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다른 왕국에서 만드는 총은 1대 도노반이 만든 머스킷을 겨우 따라 한 정도였다.
1대 미켈란 도노반이 만든 총기류도 나쁘지 않았지만 4대에 걸친 지금의 총기류는 그때의 총과 차원이 달랐다. 지금껏 만들어 온 테크니션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이베아 제국은 통상적으로 외국에 수출하는 총기류는 권총과 장총만을 허용했는데, 이 총기류의 제국 내수용 총기와 수출용 총기는 내구성과 기술력이 또 달랐다. 이베아 제국만의 기술력을 유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베아 제국의 내수용 총기류를 외국으로 밀수출하는 사람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만큼 보안에 신경 쓰는 도노반 후작 가문의 내수용 총을 만질 수 있고, 이베아 제국의 저명한 사격 기사가 교수로 있는 제국 아카데미의 사격 수업은 모르는 척할 수 없는 매력적인 수업이었다.
사격장에는 약 2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생의 얼굴에 모두 설렘과 긴장감이 역력했다. 그들은 어찌나 긴장했던지 사격장 안에 있는 야외 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 잔뜩 고양돼 서로 떠들며 발을 동동 구르는 바라는 모습을 보니, 아마 외국 영식들이리라.
맥켄지가 사격장에 나타나니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학생들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맥켄지 도노반….”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순간 학생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떠들어댔다. ‘그’ 맥켄지 도노반이다. 이베아 제국에서 개발한, 아니 전 대륙 최초로 총을 개발한 미켈란 도노반의 후손, 이베아 제국 최고의 실세 도노반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 도노반 후작 가문이 운영 중인 도노반 리피팅 암즈Donovan Repeating Arms의 차석 대표 맥켄지 도노반이었다.
맥켄지 도노반의 사격 실력은 이베아 제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라고 했다. 그럴만했다. 그의 가문을 시작으로 총이 발명되었으니, 그에 따른 테크니션도 가문만의 기술이 있을 것이다. 맥켄지의 사격 실력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수업에 참가한 의의가 있다. 총기를 빼돌릴 수는 없어도, 그의 기술은 훔쳐갈 수 있을 것이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사격장에 맥켄지가 나른히 걸어왔다. 수십 개의 눈이 저를 쳐다보는 것은 꽤 부담될 일이었지만 맥켄지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맥켄지가 샬로메와 그레머, 그리고 너자를 거느리며 사격장 부지에 있는 야외 테라스 테이블 의자에 나른히 앉았다. 볕이 제일 들지 않는 상석이었다.
나른히 야외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과녁판을 바라보는 맥켄지의 앞좌석이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곳에 앉을 수 없었다. 모두 눈치를 보며 그곳을 노리고 있을 때, 약 열댓 명의 무리를 거느린 키가 큰 미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맥켄지의 바로 앞좌석에 앉았다.
캔디스가 맥켄지의 맞은편에 자리하자 그의 무리가 각자 그들의 양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에 서 있던 영식들이 부랴부랴 최대한 맥켄지와 가까운 곳에 앉으려 소란을 떨었다.
맥켄지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짜증 나는 면상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틀렸다. 한숨을 쉬는 맥켄지의 모습은 꽤 냉하였다. 아름답고 섬세한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모습은 맥켄지의 맞은편에 앉은 캔디스의 무리마저 움찔하게 하는 권위적인 모습이었으나 캔디스는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캔디스의 시선은 오직 맥켄지의 뒤에서 새파랗게 굳은 채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노예에게만 닿았다. 캔디스가 야릇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어제 안 나왔어?”
“…….”
“나 어제 꽤 오래 기다렸는데.”
마치 여인을 유혹하듯 끈적하게 말하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테이블 중간에 놓여 있는 간식거리 한 개를 쥐고 캔디스에게 던졌다.
제법 빠르고 묵직하게 날아간 그 간식은 허무하게 비아의 커다란 손에 막혔고 바닥으로 버려졌다. 그 모습에 갑자기 호승심이 타오른 샬로메가 어깨를 풀었다. 혹시 모를 비아, 혹은 캔디스의 반격에 대한 대비였다.
자칫하면 귀족의 결투가 될 만한 시비였다. 먹을 것을 사람에게 집어 던지는 것은 큰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샬로메가 몸을 날릴 일은 없었다. 캔디스는 화가 나지도 않는지 씩씩거리는 맥켄지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발발 떠는 노예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제는 성욕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노예의 모습이 지금은 아주 잘 보였다. 부랑자처럼 지저분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음침한 검은 머리칼은 평민 남성처럼 짧게 쳐져 있었는데 얼굴이 시원하게 보여 목도 길어 보였다. 노예의 이목구비가 꽤 섬세했다.
어둡고 야릇한 분위기의 침실에서 보는 것보다 밝은 채광이 비추는 밖에서 보는 노예가 더 생기 있어 보였다.
그 모습 또한 마음에 들었다. 캔디스는 계속해서 눈이 가는 노예를 보며 말했다.
“어제의 너는 정말 야했지.”
“…….”
“내가 싸 준 정액은 닦았어? 네 손으로 직접 닦았어, 아니면 시종이 닦아 줬어? 도노반, 너도 노예한테 쌌어?”
그의 미친 소리를 듣다 못한 맥켄지가 짜증을 내려 할 때, 타이밍 좋게 사격 교수인 이스트가 어시스턴트 네 명과 힘쓰는 잡역부들 열댓 명을 대동한 채 사격장에 나타났다. 잡역부들은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철제 상자 네 개를 끌고 와 이스트의 옆에 내려놓고 철제 상자를 열었다.
오오…!
어시스턴트들이 철제 상자 안에서 꺼내는 매끈하고 긴 머스킷을 보며 학생들이 열광했다. 저게 바로 이베아 제국 내수용 산탄총과 머스킷이었다.
두 개의 디자인은 엇비슷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새까만 장신으로 총 자체 또한 아름다웠다. 외국의 수출용으로 팔리는 머스킷과는 외관부터 달랐다. 내수용 산탄총과 머스킷의 개머리판은 최고급 우드로 되어 있어 보였고 순도가 낮은 금으로 개머리판의 가장자리 부분과 바디 부분에 음각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기다란 총열과 프레임의 재질과 모양도 미세하게 달랐다.
어시스턴트들이 지지대에 약 30개의 산탄총과 머스킷을 세워 놓기 시작할 때 잡역부들은 보호 장비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슈팅 글로브와 가슴 보호구와 팔 보호구였다. 그것들은 튼튼해 보이는 까만색 가죽으로 된 보호구들이었다.
사격 교수인 이스트가 테이블 앞에 서며 말했다.
“저는 사격 기사인 이스트입니다. 현 제국 내 사격부단장으로 있지만 황제 폐하의 명으로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전혀 영광스럽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한 이스트가 말을 이었다.
“…수업에 필요한 총, 보호구, 클레이, 사격판 모두 이베아 제국의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물건이며 수업에 맞게 특별히 개조된 것입니다. 외관은 실제 내수용 총기와 비슷하지만 개조된 특별한 총기이며 탄환 또한 실제 탄환이 아니라 수업용에 맞게 살상 능력이 별로 없는 특별 탄환입니다. 살상 능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 실제로 사람을 맞춰 쏠 경우 중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또, 수업의 총기류는 모두 고유 번호가 있고 학생에게 또한 고유 번호가 있습니다. 수업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저에게 번호를 말하고 반납해야 합니다. 이는 혹시 모를 도난에 방지한 것이니 유의해 주십시오. 또,”
이스트가 학생 한 명 한 명을 보며 강조했다.
“만약 수업 내 총기로 상해 사고가 날 경우엔 벌점 15점을 받을 것이고 도난을 할 경우, 당할 경우 모두 퇴학 조치가 됩니다.”
이스트의 엄숙한 경고 후, 본 수업이 시작되었다.
약 한 시간가량 이스트는 총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 그리고 보호구를 장착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한 시간 동안 총에 탄환을 넣는 법, 총을 쏘는 기본 자세, 주의사항을 설명하며 실습이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초급자와 상급자로 나뉘었는데 맥켄지와 캔디스는 당연히 상급자였다. 초급자는 그대로 5시까지 기본 머스킷을 이용해 고무로 된 탄환으로 사격판을 맞추는 것을 했고 상급자는 산탄총을 배정받아 클레이 사격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 이베아 제국의 영식들이 상급자였다. 당연한 결과였다.
수업은 자율 시간으로 넘어갔다. 이스트와 어시스트들은 한쪽에서 감독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안 보는 척했지만 맥켄지 도노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맥켄지 도노반이 사격을 하지 않을 때는 자기들 할 일을 했고, 맥켄지가 산탄총을 잡을 때는 사격장 안에 있는 모든 학생이 움직임을 멈췄다.
맥켄지가 쉬느라 잠시 벗어 놓았던 슈팅 글로브를 다시 끼었다. 유려하지만 마디가 굵은 엄지와 검지가 까만색 슈팅 글로브와 대비돼 아름다웠다. 맥켄지가 슈팅 글로브를 다 끼자 그레머가 유순히 산탄총을 내밀었다.
맥켄지가 교재용 산탄총을 보며 혀를 찼다. 이 쓰레기를 교재용으로 팔았다. 이 산탄총은 출시 막판에 중단된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총괄 담당은 예비 가주이며 사업체의 수석 대표 러트 도노반이었다. 개발은 순조로워 보였으나 도면을 본 맥켄지가 이 도면으로 만든다면 결함이 생길 여지가 있다며 발언했으나 러트와 후작은 문제가 없다며 차남의 발언을 무시했다. 이후 개발은 순조로웠고 시험 단계 피딩에서는 문제가 안 보였다. 그러다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 피딩 때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다.
이딴 걸 출시했다가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명예가 진창에 처박힐 거라고 도노반 후작이 길길이 날뛰었고, 러트 도노반의 프로젝트 산탄총은 전량 폐기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다 폐기된 줄 알았는데 이걸 개조해서 팔았네.
이 정도 쓰레기면 유출돼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자 있는 걸 따라서 만들어 봤자 똑같은 하자 있는 쓰레기가 만들어질 뿐이었으니.
참고로 지금의 산탄총은 맥켄지가 내놓은 ‘샷건’이라는 프로젝트로 출시 전이었다.
맥켄지가 제 형의 비운의 작품을 만지작거리다 픽 하고 웃으며 타오르는 태양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는 정확한 조준을 위해 동공을 좁히기 위함이었다. 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맥켄지의 단정한 이마를 덮은 가르마 탄 플래티넘 블론드색 머리카락이 꿈결처럼 휘날렸다. 집중하느라 모인 눈썹과 높게 솟은 코, 그리고 앙다물린 입술이 여성스러우면서도 남성스러웠다.
슉, 하고 위로 쏘아져 올라온 클레이를 보며 맥켄지가 고개를 쳐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탕-!
도자기로 구워진 클레이가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단 한 방의 탄환으로. 그는 연속으로 날아가는 클레이 여섯 개를 오발 하나 없이 모두 쏴 맞혔다.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당연한 것을 했다는 듯 맥켄지가 무표정으로 산탄총을 내려놓았다. 캔디스가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새끼 재수 없는 거 봐 봐….”
야유하는 캔디스에 대꾸조차 하지 않은 맥켄지가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모습에 캔디스가 굴하지 않고 물었다.
“야, 기술 좀 알려 줘.”
“넌 자존심도 없나 보다.”
신랄하게 비꼬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고개를 갸웃이며 말했다.
“이게 왜 자존심이 상해? 나보다 네가 잘하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이렇게 물어보다 진짜 알려 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쉬운 거지.”
“…….”
“그리고 너는 나랑 이제 사업 파트너 아니냐? 파트너끼리 뭘.”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캔디스에 어제 맺었던 은밀한 동맹을 떠올렸다. 그러다, 무언가 공허한 걸 느꼈다. 무언가가 없어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맥켄지가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훑자 캔디스도 따라서 사방을 훑었다. 그리고 맥켄지에게 물었다.
“야, 네 노예 어디 갔냐.”
맥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맥켄지가 캔디스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샬로메를 불렀다.
“샬로메!”
맥켄지의 부름에도 샬로메는 보이지 않았다. 맥켄지는 순간 밀려오는 분노와 짜증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분노가 일었고 슈팅 글로브를 낀 기다랗고 커다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캔디스가 심상치 않은 맥켄지의 모습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캔디스와 맥켄지는 이베아 제국 내에서 알아주는 라이벌이었다. 같은 나이와 제국 내의 가장 귀한 가문의 영식이라는 교차점은 둘을 끈질기게 엮었다. 그들은 잘하든 못하든 서로 비교되며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자연적으로 캔디스와 맥켄지는 상대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역겨워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둘은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았다. 스와포네 공작가와 도노반 후작가는 공생 관계였다. 서로를 역겨워할지언정 서로의 가문은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스와포네 공작 가문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총기를 제국 내에서 제일 많이 매입하는 거래처였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신제품 개발 비용의 반을 거의 스와포네 공작 가문에서 기부했고, 개발이 되면 우선 그 신제품을 매입하는 식으로 가문의 혹시 모를 손실을 막았다(샬로메의 상단은 평민 상단이어서 예외였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스와포네 공작 가문과 도노반 후작가는 서로 왕래가 잦았고 캔디스와 맥켄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았고 겪었다. 물론, 서로가 원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 말이다.
캔디스는 오랜만에 정말 화가 나 보이는 맥켄지의 모습에 턱을 쓰다듬으며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또 노예가 걱정되기는 했다. 아직 따먹어 보지도 못했는데 도노반의 손에 죽게 생겼다. 도노반은 옛날부터 자신의 것이 남의 손을 타는 걸 싫어했다.
“흠…?”
하지만 이건 모순인데?
어렸던 날, 도노반이 기르던 개가 사업차 아버지와 함께 방문했던 자신을 보고 꼬리 치는 모습에 저 손으로 직접 자신의 눈앞에서 돌로 개의 머리를 쳐 죽였던 미친놈이 바로 저놈이었다. 도노반은 제 손으로 노예를 직접 거래품으로 내밀었었다.
그렇다면 도노반은 왜 화가 난 것일까?
단순히 자신과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져서? 하지만 저놈이라면 대체품을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캔디스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며 추론을 하고 있을 때 숲 쪽에서 커다란 인영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 손바닥을 꾹꾹 누르며 화를 억누르는 맥켄지에게 캔디스가 말했다.
“도노반. 저거 네 호위 아니야?”
“…….”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고개를 들어 달려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세워 놓았던 산탄총을 들고 다가오는 샬로메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그레머가 숨을 삼켰다. 맥켄지의 눈이 당장에라도 산탄총으로 샬로메를 쏴 죽일 듯 음산하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개머리판을 한 손에 꽉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맥켄지를 보며 캔디스가 그에게 물었다.
“너 그걸로 쟤 쏘게?”
“…….”
주변에 사람만 없었다면 바닥을 구르며 웃었을 것이다. 저놈 성격 교정하려고 제국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성격이 더 진창이 돼서 왔다고 제국 아카데미를 상대로 고소할 도노반의 아버지가 생각났고, 맥켄지가 퇴학당하면 당장에 파티를 열어 통쾌해할 자신의 아버지가 상상돼서였다.
캔디스가 곧 닥칠 미래에 피실피실 웃으며 박장대소를 하고 싶은 걸 이를 꽉 깨물고 참고 있을 때, 맥켄지는 입을 다문 채 탄창을 열었다. 아까 쐈던 탄환이 마지막 탄환이었다. 맥켄지가 앞으로 나가며 옆에서 두려운 표정으로 따라오는 그레머에게 말했다.
“탄환 좀 줄래?”
“하… 하지만…….”
주저하는 그레머에게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네 아가리에 갈겨 버리기 전에 주라.”
맥켄지의 잔인한 말에 그레머가 거의 울면서 그에게 탄환 다섯 개를 건넸다. 맥켄지는 차분히 탄환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마지막 한 발까지 장전한 맥켄지가 산탄총을 들어 가늠자 안으로 샬로메의 머리를 조준했다.
“…!”
탄환을 장전하는 모습에, 그리고 총구를 시종 옷을 입은 남자에게 조준하는 모습에 몰래 그를 간음하고 있던 학생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맥켄지가 장전을 할 때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장전하고 겨눴다.
엄청난 상황에 캔디스 외에 그 누구도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를 말릴 수 있는 캔디스는 그를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 웃으며 맥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공포에 얼어붙은 사격장을 모르고 멀리서 다급히 뛰어오던 샬로메가 자신을 향해 총구를 들이민 맥켄지를 보고 기겁을 하며 그 자리에서 멈추고 양손을 높이 들었다. 샬로메의 오른손에 들린 피 묻은 옷자락이 펄럭였다.
샬로메는 기사였기에 총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았다. 샬로메가 2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을 때 사격기사단이 따로 있었는데 시비 걸기를 좋아하고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1기사단의 단장마저 사격기사단의 단장에게 시비를 걸지 못했다.
사격장의 소란을 알아차린 이스트 교수가 호루라기를 불며 엄청난 속도로 뛰어와 진정하라는 듯 맥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걸었다.
“도노반 님. 그 총 내려놓으세요.”
현직 교수이자 사격기사단 부단장의 명령이었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그의 힘에, 권력에 바로 총을 내려놨겠지만 맥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맥켄지가 아름다운 얼굴을 비릿하게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니?”
오만한 맥켄지의 목소리에 이스트의 입매가 굳었다. 그럼 명령이지, 부탁이냐? 이스트는 차오르는 분노와 튀어나오려는 비꼼을 애써 눌렀다. 제국의 최고 엘리트 사격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제국 아카데미 교수인 그였지만, 맥켄지 도노반에게는 그의 권력 따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는 맥켄지 도노반이었다.
이스트가 최대한 분노를 내리누르며 맥켄지를 달래듯 말했다.
“…도노반 님 그 총을 쏘시면, 벌점이 15점입니다. 제가 알기로 도노반 님께선 이미 벌점이 3점이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 이상 벌점이 쌓이면….”
“야.”
“…….”
맥켄지가 되바라지게 이스트의 말을 끊었다. 그 맹랑함에 이스트가 스트레스로 과호흡이 왔다. 숨을 거칠게 쉬는 이스트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이제 도노반 리피팅 암즈는 제국 아카데미에 총을 납품하지 않을 거야.”
“……!”
“네 주둥이 때문에.”
“…도… 도노….”
분노에 일그러졌던 이스트의 얼굴이 순간 풀렸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하얘진 이스트에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못 할 것 같니?”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입 여물고 있으렴.”
교권이 처참하게 무너진 광경을 흥미롭게 쳐다보던 캔디스가 재밌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저씨 뒷목 잡고 쓰러지겠네.”
진심이었다.
너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더울 만큼 쨍하게 떴던 해는 어느새 떨어져 공기는 제법 선선해졌지만, 피부에는 식은땀이 맺혔고 굵어진 땀 몇 방울이 주룩 하고 밑으로 떨어졌다. 몸은 열기로 뜨거운데 정신은 물을 끼얹은 듯 차가웠다.
바스락, 하는 소리에 너자의 신경이 곤두섰다.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건은 두어 시간 전에 일어났다. 너자는 어제와 다름이 없이 아침에 일어나 지정된 검은색 옷을 입은 뒤 맥켄지를 졸졸 따라다녔다. 다행히 어제 오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식당에는 여전히 먹을 것이 풍족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장소를 옮기는 맥켄지를 또 따라갔다. 이번에는 건물 안이 아닌 밖이었다. 검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로 무장을 한 터라 쨍하게 뜬 해 때문에 더웠지만,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미약한 바람에 참을 만했다.
잔디가 심어진 후원의 부지는 넓었으며 그 중간에 하얀색의 넓고 기다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아마 저기에서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듯했다. 또 책상과 의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원형의 과녁이 있었다.
과녁은 하얬지만 원 안에 작은 원이, 그리고 그보다 작은 원이, 또 그보다 작은 원이 수십 개가 그려져 있었고 가운데의 작은 원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눈에 익은 과녁이었다.
코만치에서도 저런 과녁에 활을 쐈다. 아마 오늘은 활을 쏘는 것을 배우는가 싶었다. 코만치의 후계였던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작았지만 기마술과 활을 쏘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자그마하지만 강단 있었던 여자아이는 코만치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갔을 것이다.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일에 너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처연하게 내려갔다. 그때였다. 너자의 신경에 날카롭게 각인된 인기척이, 냄새가 느껴졌다. 너자는 타인보다 코가 발달했다.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사람 특유의 체취는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진한 사향노루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사향노루 특유의 관능적인 냄새였는데 그 속에서 미약하게 맡아지는 꽃향기는 마치 밤에 흐드러지게 핀 분꽃 냄새도 맡아지는 것 같았다.
그 미친놈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수려하게 생긴 얼굴이 너자에게는 어젯밤 보았던 짐승 같았던 얼굴과 겹쳐 보였다. 너자는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어두웠던 방 안, 사향노루 냄새가 진하게 났었다. 미친놈에게 깨물렸던 왼쪽 종아리와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땅겼다. 놈이 새긴 자국은 아침이 되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아찔했던 어젯밤의 기억이 강렬하게 살아났다. 그 역겨웠던 기억에 너자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열댓 명의 사람들이 후원에 몰려왔고,
“…미친….”
너자는 저도 모르게 코만치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람들이 가져온 커다란 상자에서 검은색의 악마들이 수없이 꺼내졌기 때문이었다.
평화로웠던 코만치, 한순간에 병이 돌아 줄줄이 죽어 나가던 코만치, 검은 악마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던 코만치. 그때의 기억에 속 안이 썩어들어 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같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너자를 얽매었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강인했던 너자는 사라지고 겁쟁이 너자만 존재했다.
사방에서 탕, 탕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너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폈다. 하지만 그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총 소리가 날 때마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몸에 난 상처는 아물었지만, 미처 치료하지 못한 정신은 썩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너자에게 신경을 쓰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캔디스는 자신의 라이벌인 맥켄지의 사격술을 보며 자신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저 새끼는 어떻게 저렇게 잘 쏘고 맞추는지 추론을 하고 있었고, 그레머는 옆에서 맥켄지의 시중을 드는 데 정신이 없었으며, 샬로메는 맥켄지와 그레머의 주변에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했다.
갑자기 쨍하게 비춰 오는 강렬한 태양 빛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너자가 해일처럼 밀려오는 현기증에 눈을 감고 있자 맥켄지와 그레머를 살피고 있던 샬로메가 용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 다가가 툭 하고 물었다.
“너 어디 아프냐?”
“…….”
노예가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그제야 노예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샬로메가 잠시 고민을 했다.
귀찮은데 그냥 무시할까? 하지만 샬로메가 생각하기에도 어제의 상황이 노예에게 충격이었을 것 같았다. 노예가 산탄총과 머스킷의 총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모르는 샬로메는 어제 캔디스의 충격적인 행위에 노예가 그를 불편해한다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샬로메는 의외로 도덕심이 높은 기사였고, 노예의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초리가 이상하게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게 했다. 어제의 그 역겨운 체험을 시킨 당사자가 같은 공간에 있으니 분명 현기증이 나는 것이겠지.
샬로메가 노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별안간 갑자기 자신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는 샬로메에 너자가 몸을 굳혔다. 하지만 샬로메에게는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가 향하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뭐, 샬로메가 억한 심정을 가지고 너자를 때려도 너자는 저항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샬로메는 노예가 총소리에 놀라지 않을까 싶어 그를 후원의 끝쪽 숲이 시작되는 곳 근처에 끌고 와 그늘이 넓어 보이는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그리고 노예의 양어깨를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앉으라는 건가? 너자는 총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도 잊고 자신을 내리누르는 샬로메의 힘에 버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샬로메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이 새끼….”
꽤 힘을 주어 내리누르는데 노예의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노예를 내리누르는데 온 힘을 쏟고 있던 샬로메가 그냥 손짓으로 의사소통할까 생각했지만 곧 포기했다. 이건 자존심 문제였다.
너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샬로메에 혹시 싶어 다리에 힘을 풀고 주저앉았다. 앉아 버리는 노예의 모습에 샬로메가 흡, 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노예에게 말했다.
“기다려.”
“응.”
어젯밤 기다리라는 말을 배운 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샬로메가 미련 없이 뒤돌아 후원 부지에서 총알을 갈기는 맥켄지에게 달려갔다.
쉬게 해 주는 건가? 샬로메의 의미 모를 행동에 너자가 코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너자는 샬로메의 배려에 아까보다는 작게 들리는 총소리에 한숨을 쉬며 나무에 등을 기댔다. 역시 좋은 사람이었다.
나무에 기대 멀리에서 바라보니 맥켄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평균을 웃도는 기다란 키와 바람에 살랑 휘날리는 머리칼의 색은 빛의 세기에 따라 달랐다. 해가 구름에 가려지면 맥켄지의 머리카락은 꿀을 머금은 듯한 색이 되었고 해가 다시 떠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면 하얘 보이기까지 했다. 연한 색의 옷을 입은 몸은 언뜻 말라 보였지만 의외로 다부졌다. 남들보다 옆 통이 굵고 어깨도 넓었다. 그의 손과 발은 몸보다 조금 더 컸는데 아마 아이는 더 자랄 것이다.
맥켄지 특유의 나른한 행동거지가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방정맞게 행동을 하지 않고 마치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듯 움직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그의 행동에 너자는 시선을 빼앗겼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달라 보이는 검은 악마를 쥐었다. 너자는 저 손에 들린 검은 악마를 당장에라도 빼앗아 멀리 던져 버리고 싶었다. 너무 위험한 물건이었다.
그때였다. 맥켄지의 머리 위로 원형의 무언가가 쏘아 올려졌고 맥켄지가 고개를 천천히 올리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리고 검은 악마를 눈가에 가져다 댔다.
탕! 다른 학생들의 검은 악마와는 다른 커다란 파열음에 너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 바로 위에 올라진 원형의 무언가가 산산이 조각났다.
“…!”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어떤 동작도 달리 취하지 않고, 단 한 번에 저걸 검은 악마로 깨트렸다. 우연인가 싶었지만 연달아 올려지는 여섯 개의 원반을 그는 너무도 쉽게 검은 악마로 맞춰 깨트렸다.
그는 훌륭한 전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저 검은 악마는 너무 위험했다.
너자는 전쟁을 하며 보았다. 늑대를 타며 다가오는 너자에 어떤 하얀 사람은 급하게 검은 악마의 몸통에 돌멩이 같은 걸 집어넣었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간 무언가를 다시 올리다가 손가락이 그곳에 끼어 버려 손가락이 잘렸다. 전투가 끝나고 퇴각할 때 손가락이 잘린 시신들이 꽤 있었다.
너자가 생각할 때 저 검은 악마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물건이었다. 대체 저 검은 악마를 하얀 사람들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하얀 사람들의 전쟁 신이 내려 준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니다. 신이 내린 검은 악마는 자신이 수호할 하얀 사람들을 좀먹어 가고 언젠가 하얀 사람들마저 파멸시킬 물건이었다. 너자는 진심으로 저 검은 악마를 탄생시킨 신을 저주했다.
그때였다.
“…오랜만이야.”
“…!”
너자의 관자놀이에 원통의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너자는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검은 악마였다.
너자가 숨을 들이켜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가 말했다.
“나 기억나? 나는 널 아는데.”
“…….”
“하루도 널 잊어 본 적이 없어. 이 씹새끼야.”
“…….”
이를 갈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살의와 분노에 차 있었다. 분명 저 남자가 하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닐 것이다. 너자가 눈을 또륵, 굴리며 남자를 쳐다보려고 할 때 남자가 총구를 너자의 머리통으로 더 세게 밀었다. 너자가 눈을 다시 유순하게 감고 떨리는 손을 억지로 옥여쥐어 자신이 겁먹었다는 것을 최대한 숨겼다.
남자가 제 밑에 유순하게 있는 야만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늑대를 타고 달려왔던 야만인들의 우두머리가 그렇게 무서웠었다. 짐승들을 부리며 위협적인 저 몸으로 동료들을 죽이던 그놈이, 휘핑보이의 옷을 입고 무력하게 있는 모습이 처량했다. 남자가 마음껏 비웃었다.
“뒈져 버린 줄 알았는데, 네가 살아 있다는 걸 듣고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
남자가 픽 웃으며 총구를 너자의 관자놀이에서 뗐다. 너자가 별안간 떨어지는 검은 악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너자가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남자가 황홀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술래잡기를 할 거야. 내가 술래가 돼서 너를 찾는 거지. 그리고 내가 널 찾으면, 너는 그때 뒈지는 거야.”
너자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검은 악마를 들고 있는 저 남자는 자신이 당해 낼 수 없다.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 저 남자를 제압할까 생각하고 있는 너자에게 남자가 씩 웃으며 권총을 들었다. 그리고,
탕!
총알은 너자의 옆구리를 살짝 날려 먹고 너자의 뒤편에 있던 나무에 꽂혔다.
“아악!”
스쳐 뚫린 오른쪽 옆구리가 타는 것같이 아파 왔다. 너자는 이미 겪어 본 적이 있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풀리는 다리에 어떻게든 힘을 주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너자의 강인한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너자의 몸이 밑으로 떨어졌다.
“벌써 잡히면 안 되지.”
남자가 재밌다는 듯 말하며 너자에게 다가갔다. 너자는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났다. 남자는 너자를 놀리듯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남자의 손이 몸을 피하는 너자의 검은색 셔츠를 강하게 쥐어 잡았다.
아윽! 너자는 뒤로 당겨지는 셔츠에, 셔츠가 뚫린 옆구리를 아프게 짓누르는 것에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뒤에서 남자가 킬킬 웃으며 셔츠를 더 강하게 잡아당겼다. 너자는 있는 힘을 다해 이미 앞부분이 뜯어진 단추의 양옆을 잡아당겼다. 투툭, 하고 단추가 사방으로 날리며 너자의 셔츠가 벌어졌다. 너자는 재빨리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비명을 질러대는 몸을 무시하고 숲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손에 쥐어진 야만인의 피 묻은 검은색 셔츠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흥분하기 시작한 아랫도리를 느끼며 흐흐흐, 하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이제, 야만인이 사냥될 차례였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 먹은 빌어먹을 야만인에게 정의를 구현할 것이다.
남자가 고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찾는다~!”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샬로메의 등 뒤로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렀다. 저건 미쳤다. 항상 나른히 풀려 있던 새파란 눈이 형형하게 빛이 나는 게 위협이 아니었다. 정말 저 산탄총을 자신에게 쏴 갈길 것이다.
다행히 저 탄환은 실제 탄환이 아니라 교육용으로 개조된 탄환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날아가는 클레이를 한 번에 산산조각 내는 것이지만…. 맞아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 머리를 향해 겨눠진 맥켄지의 총구가 실수로 흔들려서 탄환이 몸통에 맞을지.
“제기랄….”
그럴 리가 없다. 샬로메는 아까부터 날아가는 클레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죄다 깨부순 맥켄지의 사격 실력을 떠올리고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죽지는 않겠지?
샬로메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사지 멀쩡하게 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첫째는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자기보다 어린 맥켄지 도노반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음… 이건 아닌 것 같군. 샬로메는 첫 번째 계획을 바로 포기했다.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민인 내가 자존심이 어딨어. 총에만 맞지 않는다면 뒷구르기를 하며 싹싹 빌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맥켄지 도노반은 감성이 메마른 놈이라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자신의 호위를 벌레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쏴 갈길 것이다.
둘째는 도망가는 것이다. 음, 바로 뒤통수가 깨져 뒈져 버리겠군.
세 번째는 이 상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한 후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맥켄지 도노반은 손속이 맵고 사람의 생명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놈이지만 의외로 냉정…….
다 소용없어!
샬로메는 대가리가 깨져 볼썽사납게 붕대를 칭칭 감고 맥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 대가리가 깨진 자신을 보며 통쾌해할 비아를 생각하니 열 받아 기절할 것 같았다.
“이 새끼…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샬로메는 이 사달을 낸 노예를 생각했다. 그토록 암울해 보이던 노예의 얼굴은 처음이었다. 항상 무표정인 노예는 의외로 단순했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훌훌 털어 버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제만 해도 그렇게 울면서 훌쩍거렸어도 마구간이 아니라 독채에서 지내라고 하니 방싯방싯 웃으며 좋아했다.
그런데 후원에 오고 캔디스를 본 후로 노예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내 탓도 아닌데 괜히 신경 쓰이더라. 그래서 샬로메는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노예를 끌고 캔디스와 멀리 떨어진 후원의 끝 숲이 시작하는 곳에 데려다 놓았다. 실제로 노예가 캔디스와 멀어지자 많이 안심한 듯 표정이 풀렸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곳에나 던져 놓고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다. 샬로메는 간간이 노예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노예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근처에 있는 잡초를 뽑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또 그러다 좀이 쑤시는지 어깨와 양다리를 주무르며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정말 얌전히 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볼일 보러 갔나? 싶어 별생각이 없었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 보이지 않는 노예의 모습에 사색이 되어 노예가 있던 후원의 끝으로 달려갔다.
“……!”
노예가 있던 곳에는 옆구리가 터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검은색 셔츠와 밑에 미처 추스르지 못한 핏자국이 고여 있었다. 샬로메는 놀랐지만 곧 기사의 감으로 정신을 차렸다.
아마 스스로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다. 바닥에 고여 있는 피 웅덩이를 보면 꽤 깊은 상처가 났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스스로 자해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에 공격당했지? 짐승인가? 하지만 이곳은 제국 아카데미가 관리하는 후원의 숲이었다. 샬로메가 알기로 사람을 해칠 만한 짐승은 없다. 있어 봤자 사슴이나 토끼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짓일 것이었다. 샬로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이게 뭐야.”
노예의 피가 고여 있는 곳 바로 뒤의 나무 하단 부분의 껍데기가 까진 곳에 박혀 있는 탄환을 발견했다.
샬로메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바닥을 구르고 있는 노예의 셔츠를 움켜쥐었고 한가롭게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는 제 사용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 맥켄지에 기겁을 하며 양손을 높이 들었다.
맥켄지는 잠시 고민했다. 약 오 년 동안 자신과 동고동락을 하고 자신을 지켜 준 호위기사를 쏠까, 말까? 라는 도덕적인 고민도 아니고 제 부모가 어렵사리 모셔 온 인재의 대가리를 쏴도 되겠느냐는 효심이 지극한 이유도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궁금했다.
샬로메는 꽤 유능한 기사였다. 맥켄지가 알기로 기사단은 파벌 밭이었고 귀족이 아닌 이가 입단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그런데 저 평민은 자기의 실력으로(집안이 빵빵한 거는 별개로 치자) 입단을 했다. 거기에 평민치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갔고 눈치도 좋았다.
그런 놈이 왜 노예를 잃어버렸을까?
노예의 머리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숙련된 기사 샬로메의 눈을 어떻게 피한 것일까? 노예 스스로 도망간 것일까? 아니면,
노예를 가련하게 생각한 샬로메가 노예를 도망치게 한 것일까?
“…저 시팔 것이.”
어쩐지 샬로메가 노예를 대하는 게 유했다. 노예에 대해 모든 걸 알았고 멍청하게 구는 노예를 챙겨 주더랬지. 또 어젯밤 노예를 캔디스에게 던져 줬을 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 마치 제 암컷을 뺏긴 듯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지. 그리고 캔디스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감히 내 걸 넘봐?
항상 촉촉하게 젖어 있던 맥켄지의 호수 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노기로 일렁였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본 캔디스가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흘렸다.
맥켄지가 자세를 바르게 잡았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어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
저 행동은 맥켄지의 버릇 같은 거였다. 그는 사격할 때 항상 하늘을 바라보아 동공을 좁게 만들어 목표물의 타격점을 좁혔다. 뜨거운 한숨을 내쉰 맥켄지가 고민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악! 샬로메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의 대가리에 꽂힐 고무 탄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고무 탄환은 바로 자신의 왼쪽 볼 바로 옆으로 쏘아졌다.
“세상에! 위대한 전쟁의 신 드뷔시여!”
샬로메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께 영광을 바쳤다. 내 대가리는 무사하다! 역시 오 년의 시간은 맥켄지의 잔인한 성정을 피하게….
“이거 안 놔?!”
아니었다. 오 년의 시간은 헛된 거였다. 샬로메가 차가운 눈으로 저 멀리서 실랑이를 벌이는 캔디스와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아마 캔디스가 맥켄지가 자신을 쏴 갈길 때 총구를 옆으로 민 것 같았다.
뭐야. 저 변태 새끼가 왜? 샬로메는 고맙다기보다는 적대감이 먼저 일었다. 그리고 더 열 받는 것은 옆에서 아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비아였다. 내 언젠가 저 새끼를 조져 버릴 것이다.
샬로메가 비아에게 적의를 불태우고 있을 때 맥켄지는 정말 열이 뻗칠 대로 뻗쳤다. 안 그래도 열 받아 죽겠는데 스와포네까지 지랄이다. 아, 안 되겠다. 저 새끼의 잘난 면상에 주먹이라도 꽂아야겠다.
맥켄지가 이를 갈며 캔디스의 면상에 주먹을 휘두르려고 할 때 캔디스가 말했다.
“저 새끼 손에 들린 거 안 보이냐?”
“저 새끼가 뭘 들던 내가 뭔 상관인데.”
“오호….”
캔디스의 눈이 맥켄지를 위아래로 훑었다. 뭐야, 왜 이렇게 화났어? 아예 이성이 날아간 것 같은데? 캔디스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그리고 잠시간 말이 없다가 말을 이었다.
“저 옷, 네 노예 거잖아.”
“…….”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맥켄지의 눈알이 다급하게 샬로메를 위아래로 훑다 어느 한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산탄총을 어깨에 메고 샬로메에게 친히 가기 시작했다.
“하.”
그 모습을 보고 캔디스가 정말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못된 생각을 했다.
저 새끼가 노예를 따먹으면 저 이상한 집착이 사라질까? 아니면….
더 집착하게 될까?
캔디스는, 그것이 정말 궁금해졌다.
* * *
너자가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양팔을 아프게 쥐어 잡은 사냥꾼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 재빠르게 무릎으로 너자의 환부를 찍어 올렸다. 질퍽, 하고 환부에 쑤셔 넣은 천 쪼가리가 미처 흡수하지 못한 피가 울컥하고 새어 나왔다. 너자는 끔찍한 고통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뒤로 넘어간 너자의 허리에 올라탄 사냥꾼이 너자의 목을 양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컥컥거리며 너자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양손을 바들거리며 붙들었다. 하지만 물에 빠진 듯 몸은 무겁기만 하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냥꾼은 자신의 양손을 안타깝게 붙드는 야만인을 보고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야만인의 목을 조르던 오른손을 떼어 눈알이 뒤로 넘어가기 직전인 야만인에게 들이밀었다.
“컥……!”
들이밀어진 사냥꾼의 오른손에는 엄지가 없었다.
전쟁에서 이 천한 야만인 때문에 오른손 엄지가 잘렸다. 늑대를 타고 오는 야만인에 너무 놀라 리볼버를 장전하다가 리볼버의 실린더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갔고 방아쇠를 눌러 버렸다. 그리고 바로 방출되는 고압의 가스에 엄지가 절단되어 날아갔다. 너무도 아프고 야만인이 당장에라도 들고 있는 검으로 자신을 죽일 것 같아 두려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야만인이 타고 있던 늑대가 터져 날아가는 손가락을 먹은 다음 자신의 왼쪽 어깨의 반을 삼켜 버렸다.
“이래도 나 생각 안 나?”
너자는 그때의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방금까지 맥켄지를 보며 떠올린 전쟁 중에 손가락이 검은 악마에 의해 절단된 전사가, 바로 사냥꾼인 것 같았다.
“…!”
그제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자신을 알아본 야만인에 사냥꾼이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있던 기사단은 아예 없어졌어. 그리고 나는 명예퇴직이나 당해 집구석에 처박혀 연금이나 까먹는 한심한 새끼가 돼 버렸지.”
“…….”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나는 전쟁 영웅이 되었을 거라고!”
터져 버린 감정에 사냥꾼의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야만인의 목을 조르는 손아귀에 힘을 더욱 줬다. 굵은 야만인의 목덜미에 핏줄이 툭, 하고 돋아나왔고 새의 맥박처럼 가녀리게 퍼덕였다. 야만인은 숨이 막혀 참을 수 없는지 미친 듯 버둥거리다가 이내 힘이 빠져가는지 눈을 까뒤집었다.
사냥꾼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의 야만인은 악귀 그 자체였는데 지금 맞닥뜨린 야만인은 가녀린 새보다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사냥꾼에게 더없는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악귀가, 자신의 손 아래에서 죽어 가고 있다.
사냥꾼이 황홀한 눈으로 사냥감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은 얼굴에서 핏기가 쫙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자그마한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고, 강인해 보이는 몸이 종잇장처럼 굴렀다.
그러고 보니, 야만인의 피부가 매우 매끄러웠다.
사냥꾼이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결정을 내렸다. 사냥꾼은 야만인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놓았다.
켁! 켁! 너자의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기침을 했다. 갑자기 들이쉬어지는 숨에 사레가 들린 탓이었고 기침을 하니 자동적으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안 그래도 타오르는 것같이 아픈데 기침 때문에 복근이 움직여 환부를 더 쥐어짰다.
너자는 양손이, 목이 자유로워졌지만 도망칠 수도, 사냥꾼에게 공격할 수도 없었다.
야만인이 얼굴이 시뻘게져 바닥을 구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사냥꾼이 제 허리춤에 있는 벨트를 풀었다. 허리춤에 달려 있는 리볼버가 거슬려 대충 뒤편에 던져 두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가 없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재빠르게 움직여 엎드려 헉헉거리고 있는 야만인의 양팔을 하나로 모아 손목을 벨트로 꽁꽁 묶었다.
너자는 아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자신의 손목이 결박되는 모양새에 밭은 숨을 내쉬고 몸을 비틀며 사냥꾼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오려고 버르적거렸다.
정말 죽을 것이다. 사냥꾼이 당장에라도 검은 악마를 빼 들어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것이다. 너자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무서웠다.
눈을 꽉 감고 죽음의 공포에 덜덜 떨던 너자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악!”
사냥꾼이 너자의 목덜미를 강하게 물었다. 마치 짐승이 고기를 씹는 듯 강하게 문 사냥꾼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상황이 너무 놀라 아픈 것도, 두려운 것도 잊고 눈을 뜨고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사냥꾼의 손이 너자의 두툼하고 매끄러운 상체를 함부로 만져대며 콱 물어 버린 목덜미에 혀를 내밀어 게걸스럽게 빨아댔다.
“…헉…!”
너자의 머릿속에 순간 어제의 아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노란 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보며 자위하던 기억이, 자신의 다리를 깨물며 빨아댔던 그 기억이, 구멍에 뿌려진 미적지근하면서도 뜨겁게 느껴지던 정액이.
“하…하지 마!”
사냥꾼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너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심한 부상을 당한 몸에는 힘이 더는 들어가지 않았고, 강하게 얼굴을 때리는 사냥꾼의 주먹에 혀가 깨물렸다.
꾸륵, 하며 이상한 소리와 함께 너자의 작은 입에서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나왔다. 사냥꾼은 그 모습을 보곤 더욱 흥분했다.
너자의 희끄무레한 피부가 사냥꾼의 폭력에 까만 보랏빛의 피멍으로 물들었고, 터진 옆구리 때문에 시뻘건 피가 흥건했다.
이상했다. 노예는 시뻘게질수록 더욱 야해 보였다.
사냥꾼이 게걸스럽게 야만인의 목덜미를 물고 빨았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목덜미를 깨문 것인데 예상외로 피부가 너무 약해 깨무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요철도 없는 매끈한 피부는 빨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야만인의 목을 물고 빨던 사냥꾼이 제 작품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빨간 게 어울렸다. 야만인의 하얀 목덜미가 잇자국과 함께 붉게 부어 침이 질질 흐르는 게 그렇게 야했다.
그가 시선을 내려 야만인의 두툼한 가슴을 보았다.
“제기랄, 젖도 존나 크네.”
야만인의 가슴은 근육이 올라가 두툼하게 부풀었고 그 중간에 박혀 있는 젖꼭지는 기막히게도 불그스름했다. 사냥꾼의 입에 저절로 침이 고였다.
사냥꾼은 참지 않고 한입에 야만인의 한쪽 젖꼭지를 입에 물고 강하게 빨았다. 그리고 함부로 깨물고 빨아댔다.
장난으로도, 호기심으로도 가슴을 만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깨물고 빨고 있다.
젖꼭지는 피부가 얇은 것인지 자극이 너무 컸다. 그리고 계속해서 씹어대는 사냥꾼의 이 때문에 젖꼭지가 떨어질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
너자가 엉엉 울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살려 주세요….”
너무 싫었다. 나는 같은 거 달린 남자인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라리 머리를 터뜨려 죽이지… 너자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고 무서웠다.
사냥꾼은 거칠게 숨을 내쉬곤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내렸다. 그러자 용수철이 튀기는 것처럼 한껏 발기한 사냥꾼의 자지가 꺼떡이며 나왔다. 검붉은 색 자지의 주둥이에서는 묽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기랄… 넣을래… 넣을 거야….”
사냥꾼은 미친 것처럼 중얼거리며 너자의 젖꼭지를 강하게 빨았다. 그리고 아직 벗겨지지 않은 너자의 엉덩이 사이에 자지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너자가 기겁을 하며 양다리를 마구 움직여 댔다.
싫어하는 야만인에 더욱 흥분한 사냥꾼은 야만인의 반대쪽 가슴을 쪽쪽 빨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야만인의 바지춤에 손을 댔다.
“…! 하지 마! 하지 마!”
이 바지가 벗겨지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너자가 정말 온 힘을 다해 반항했다. 하지만 그 반항은 너자가 느끼기에만 격렬했고 실제로 너자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옆구리에, 바지가 밑으로 내려가는 느낌에 너자가 너무 두려워 눈을 꽉 감고 몸을 웅크리려 애썼다. 차라리… 차라리 죽였으면….
탕! 바로 코앞에서 검은 악마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 찢어지는 소리에 너자는 자신이 검은 악마에게 맞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사냥꾼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쏜 거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생각할 수 있고, 상체만 묵직할 뿐 더는 아프지 않았다. 몸의 고통이 역치값을 느껴서일까? 하지만 정말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에 너자가 꽉 웅크린 두 눈을 살며시 떴다. 그리고, 머리의 반이 날아간 사냥꾼의 시체가 자신의 가슴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함을 할 수밖에 없었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악!
너자는 머리통의 반이 날아가 안에 있는 내용물이 자신의 가슴팍에 흘러내린 것을 보며 기절할 것 같았다. 전쟁을 겪어 볼 대로 겪어 본 너자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머릿속에 있어야 할 것들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해할 냉혈한은 아니었다.
대체… 대체 이게 어떻게…….
“…….”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망연하게 헉헉거리고 있던 너자가, 어디에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시체를 내려 보던 것에서 고개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파란 눈을 빛내며 바로 코앞에 서 있는 맥켄지를 보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악마에, 검은 악마의 주둥이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고 까무룩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맥켄지의 뒤에서 검지로 제 양 귀를 막고 있던 캔디스가 쓱 하고 그의 옆에 서며 말했다.
“완전히 걸레가 됐는데?”
맥켄지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발끝을 들어 노예의 위에 엎어져 있는 시체를 세게 차 옆으로 굴렸다. 데굴, 하며 시체가 옆으로 떨어질 때 뚜껑이 열린 머리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마저 흘러나와 노예의 가슴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본 캔디스가 ‘지지다 지지~’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노예의 가슴에 떨어진 그것을 발로 찼다. 그것은 캔디스의 발길질에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캔디스가 생각했다. 아까 머리가 터진 시체를 보며 비명이란 비명은 다 질러대며 까무룩 기절해 버리는 것이, 노예는 심약한 것 같았다. 기절한 게 다행이었다.
“어허… 어린놈의 새끼들이…….”
“저… 저….”
샬로메와 비아는 시체를 발로 차고 굴리는 어린 귀족들을 오만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았다. 시체가 역겨워서, 시체가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시체는 죽을 만했고 그들은 살생이 익숙한 노련한 기사였다.
다만, 사람의 생명을 꺼뜨리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어린 귀족들의 모습에 그들이 장성해 그들이 다스릴 영지가, 아니 이베아 제국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영식들을 보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성인들은 꿈에도 모른 채 그들은 시체를 발로 툭툭 치며 대화를 이었다. 캔디스가 시체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건…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지?”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무심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리볼버를 보며 말했다.
“이거 대륙전쟁 때 보급됐던 리볼버야.”
“아하.”
“아마 퇴역기사겠지.”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차 없이 말했다.
“인생 패배자 새끼가 발작한 거였네.”
“…….”
맥켄지는 캔디스의 말에 답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이었다. 맥켄지가 묘한 눈으로 노예를 내려다보았다.
노예는 무척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옅은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는 얼핏 보기에도 많았다.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러다 뒈져 버리겠는데.”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안 된다며 소란을 떨었다.
“안 돼! 나 아직 이거 따먹어 보지도 못했는데, 안 돼!”
그리고 맥켄지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비아를 불렀다.
“비아!”
“네!”
캔디스의 호출에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비아가 한달음에 달려갔다. 물론 혐오스럽다는 표정은 지우고 충직한 호위의 탈을 쓴 채였다. 부름 받은 개처럼 한달음에 달려가는 비아를 보다가 샬로메도 모르는 척 그들에게 다가갔다. 노예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캔디스가 자신의 옆으로 달려온 비아에게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해?”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비아가 한심한 말을 하는 캔디스를 보다가 돈과 가문끼리의 약속을 생각하며 말했다.
“…의무실에 데려가야겠죠?”
“가는 길에 뒈지는 거 아니야?”
캔디스의 한없이 가벼운 말에 비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야. 일해야지…. 비아가 고개를 내려 노예를 바라보았다.
노예의 안색은 허옇게 질려 있었고 숨이 넘어갈 듯 꼴딱거렸다. 그리고 아마 노예가 한 것이 분명한, 환부에 쑤셔 넣어진 천 쪼가리는 이미 푹 젖은 채 미처 흡수하지 못한 피가 울컥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아가 조심히 말했다.
“그럴 여지가 많습니다.”
“…….”
“솔직히… 지금 이 노예가 살아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흠.”
비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노예를 바라보는 제 주인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새끼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생각을 할 때마다 고운 꼴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서….”
“야, 도노반.”
노예를 살리고 싶으면 어서 의무실에 데려가 치료를 해야 한다는 비아의 말을 잘라먹은 캔디스가 옆에서 묘한 눈으로 노예를 바라보는 맥켄지를 불렀다. 노예를 구경하던 맥켄지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왜.”
무심한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말했다.
“너, 아카데미에서 살인하면… 퇴학인 거 아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순간 말문이 막혀 캔디스를 보다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상관없어. 집에 가지, 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맥켄지에게 캔디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떠보기 시작했다.
“아닌데… 너 나랑 동업하자고 했잖아.”
“…그런데?”
“그럼 너,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 아니야? 너희 집안에서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원하는 거지?”
“…….”
맥켄지의 무심한 얼굴이 비틀어졌다. 캔디스가 그런 맥켄지를 보며 독사같이 말했다.
“집안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너희 집안 내부 문제일 거고… 나한테 동업을 같이하자는 건 아마, 내 집안보다 너희 집안에 맞설 수 있는 집안이 없다는 거겠지.”
“…….”
“그런데 너 퇴학당하면 나랑 어떻게 동업할 거야? 너랑 나, 솔직히 친구는 아니잖아. 너네 아버지, 너네 어머니도 우리 사이 나쁜 거 아시는데 너랑 내가 계속 만나고 있는 걸 알면….”
“스와포네.”
“…….”
본래의 캔디스라면 자신의 말을 끊어 버린 맥켄지에게 지랄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덫에 걸린 쥐새끼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맥켄지를 바라보는 캔디스의 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도노반.”
캔디스가 야릇하게 웃으며 묻자 맥켄지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무심히 말했다.
“원하는 게 뭐야?”
맥켄지의 물음에 캔디스의 잘생긴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리고 시원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나 지금 이거 따먹을래.”
“…지금 다 죽어 가는 놈 구멍에 처박겠다고?”
“어. 이거 지금 죽으면 어떻게 해. 죽기 전에 한번 먹어 봐야지.”
“너는 이걸 보고 자지가 서냐?”
“어. 꽤… 야해 보이지 않아?”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는 캔디스를 보며 맥켄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고 노예가 정신 차리면 그때 따먹으라고 보류를 권하려고 할 때, 잠자코 그들의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샬로메가 캔디스의 미친 소리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
샬로메의 만류를 들은 맥켄지가 살짝 벌렸던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말을 내뱉었다.
“허락하지.”
“좋아!”
맥켄지의 허락에 캔디스가 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그가 널브러져 있는 노예의 위에 올라타려고 하자 그 비아마저 그를 말렸다.
“아… 안 돼요! 진짜 죽어요!”
“그러니까 지금 따먹어야지.”
“아니… 일단 살리고…!”
“아… 너도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런데 안 돼. 나도 겨우 먹어 보는걸. 캔디스가 야릇하게 웃으며 비아를 보고 속삭이자 비아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다. 원래 정신이 나간 새끼기는 했는데 노예를 본 후로 나사가 다섯 개는 더 풀린 듯했다.
비아는 야만인 노예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근래에 제 미친 주인에게 콱 물려 온갖 더러운 꼴을 당하는 노예에게 가여움을 느꼈다. 비아가 미쳐 있는 제 주인에게 권했다.
“그…그럼 그 노예 새끼 지혈이라도 하게 해 주세요!”
‘그러다 진짜 죽는다니까요?’라며 외치려던 비아가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는 무언가에 본능적으로 그것을 밀치려고 했지만, 그 손의 주인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몸을 바르게 했다.
“…너는 그 노예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네?”
비아는 자신의 어깨를 엄청난 손아귀 힘으로 짓누르는 맥켄지에 깜짝 놀랐다. 이… 이 새끼는 또 왜 이래!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비아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너 이 새끼… 노예랑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냐뇨….”
아무 사이도 아니죠… 저 이 노예랑 말 한번 해 본 적이 없어요…. 비아가 침통하게 말했다.
비아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두 놈들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지금 미친 성욕이 중요한가?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살리려고 하는 게 인간의 본분 아닌가? 또 희귀한 야만인 노예가 뒈지려는 걸 치료하려는 자신에게 왜 화를 내는 것인가? 맥켄지 도노반은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해도 모자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비아를 구해 준 것은 캔디스였다.
“그래, 하다가 죽어버리면 시간屍姦을 하는게 되니까.”
고깃덩어리에 씹질은 하기 싫다며 노예를 얼른 지혈하라고 명령하는 캔디스에게 비아가 어색하게 맥켄지의 손에서 빠져나와 재빨리 노예와 캔디스에게로 달려갔다.
“…….”
그 모습을 본 맥켄지의 속이 뒤집혔다. 안 그러는 척하면서 저 노예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가? 말도 안 되지. 나에게 아무런 이득도 줄 수 없는 새끼한테 내가 가지고 있는 상품을 넘길 수는 없었다.
저 새끼… 자작가의 장남이었지. 아무리 자신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자작가의 장남의 대가리를 부숴 버리면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샬로메는 눈을 암울하게 빛내며 양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 하는 제 주인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건, 맥켄지가 머리끝까지 화났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캔디스의 말에 냉큼 달려와 노예의 곁에 앉은 비아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자세히 보니 더 처참했다. 비단 옆구리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노예의 울긋불긋한 목덜미가, 잇자국과 침 자국이 범벅이 된 노예의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몸을 보니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비아라도 노예가 안쓰러워 보였다.
…이래서 샬로메 저 새끼가 노예를 싸고돈 것인가? 비아는 저도 모르게 노예를 동정하는 자신을 보며 최근 이해가 되지 않았던 샬로메의 행동을 이해했다. 저 오만한 평민 새끼는 예전부터 남이 쥐어 터지든 제가 쥐어 터지든 별 상관없다는 듯 행동했고 기사단 내에서도 독종으로 소문이 난 놈이었다. 그런데 노예를 대하는 샬로메의 행동은 흐물흐물 녹아 액체가 되기 일보 직전인 버터를 쥐고 옮기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아, 생각하지 말자. 여기에 동화되면 나까지 미쳐 버릴 거야. 비아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노예의 옆구리 쪽으로 다가가 상처를 보았다.
“…천을 갈아야 하겠는데.”
혼잣말을 한 비아가 깨끗한 천이 없나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캔디스는 노예를 치료하지 않고 본인의 몸을 더듬고 있는 비아를 보며 물었다.
“뭐하냐?”
캔디스의 말에 비아가 말했다.
“깨끗한 천이 있나 찾고 있었습니다. 아쉽네요. 리먼이라면 손수건이라도 갖고 있었을 텐데.”
비아는 사격장에 놓고 온 시종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리먼은 허우대는 멀쩡해 보였으나 몸이 굼뜬 시종이었다. 그런 걸 데리고 다니기에는 너무 거슬려 놓고 왔었는데 이 상황이 되니 좀 아쉬웠다. 그놈은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 항상 커다란 봇짐 같은 것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는데 그 봇짐에는 온갖 물건이 들어 있었다. 수통, 간식거리, 수건, 옷가지 등 수없이 꺼내지는 물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감각한 비아도 박수를 칠 정도였다.
아쉬워하는 비아의 말에 캔디스가 툭 하고 말했다.
“야, 스카프도 돼?”
캔디스의 물음에 비아가 노예에서 시선을 떼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스카프? 나 스카프 없는데? 비아가 자신에게는 스카프가 없다고 말을 하려다 곧 캔디스가 자신의 목덜미에 얌전히 감겨 있는 흰색의 목면 스카프를 푸는 것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말이 없어? 이거 되냐고.”
“예? …아, 실크가 아니라 다행…? 입니다. 그건 목면이라 괜찮습니다만….”
정말 그 귀한 걸? 제정신입니까? 비아는 캔디스에게 비아냥거리려는 자신의 주둥이를 이성으로 참아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이베아 제국 패션 의류 쪽 최고 권위자 셀린트가 캔디스만을 위해 만든 최고급 목면 스카프였다.
실크 의류도 눈 돌아가게 비싸지만, 순면으로 만든 저 최고급 목면 스카프는 제국 내 딱 하나 있는 스카프였다. 실크보다 더욱 부드럽고 포근포근한 감촉에 까탈스러운 캔디스도 인정한 최고급 스카프로 캔디스가 꽤 아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걸? 비아가 제 주인의 대가리가 순간 정말 돌아 버렸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캔디스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기다란 스카프를 비아에게 내밀었다.
“뭐하냐? 안 써? 뒈진다며. 그냥 박아 버리면.”
비아는 자신을 머저리 보듯 바라보는 캔디스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저 새끼가 돌은 짓을 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까. 질리거나 그런 거겠지. 캔디스는 질리는 게 빠른 영식이었다.
비아가 캔디스가 내민, 꽤 길이가 긴 목면 스카프를 공손히 집어 들고 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피에 푹 전 천을 끄집어냈다. 언뜻 보니 노예의 왼쪽 바지춤이 뜯겨 있었는데 아마 그것일 것이다. 비아가 피에 전 바짓단을 옆으로 던지니 철퍽,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비아는 재빨리 노예의 환부에 묻어 있는 흙먼지 등을 털어내고 손에 쥔 목면 스카프를 욱여넣기 시작했다.
“…아…으….”
기절한 상태인데도 고통이 상당한지 노예가 움찔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일반 사람이라면 그 안쓰러운 모습에 손을 멈췄겠지만 비아의 손놀림에는 자비가 없었다. 이런 건 빨리 끝내야 했고 괜한 동정심에 미적거리면 환자가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목면 스카프가 꾸륵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노예의 환부에 완전히 쑤셔졌다. 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였다. 비아는 망설이지 않고 제 시종 옷의 베스트를 벗어 펼쳤다. 그리고 대충 노예의 환부를 감싸 꽉 묶었다.
노예의 몸통이 꽤 굵고 넓어 베스트가 빠듯하게 묶였고 안 하느니만 못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는 편이 나았다. 비아가 열심히 처치를 하고 고개를 들다가 눈깔이 돌아 버린 제 주인을 보고 재빠르게 그들의 옆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캔디스가 자리를 피해 주려는 비아에게 말했다.
“근데, 이거 좀 더럽지 않아?”
“네?”
비아가 얼치기처럼 되물었다. 그런 비아의 물음에 흠, 하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에게 말했다.
“야, 네 거 좀 닦는다?”
맥켄지는 캔디스의 말에 답했다.
“좋을 대로.”
긍정의 답변을 들은 캔디스가 비아에게 말했다.
“야, 걔 좀 데리고 와 봐.”
캔디스는 그 말만 하고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아가 제 주인의 명령에 사경을 헤매는 노예를 들려다 잠시 멈칫했다. 보통 노예는 짐짝처럼 옮기는 게 옳았다. 하지만 밀가루 포대처럼 어깨에 걸치면 애써 치료해 놓은 상처가 터질 것 같았다. 비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 여인을 안듯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비아는 예상대로 묵직한 노예의 몸에 숨을 들이켰다. 노예는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가 컸고 몸통도 두툼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기사로서, 자작가의 장남으로서 노예를 들어 올리며 끙차, 라든가 힘든 내색을 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업을걸, 하는 후회를 은밀히 한 비아가 홀랑 자리를 떠 버린 캔디스를 따라갔다. 그런 그들을 보다 맥켄지가 말했다.
“따라가지.”
“네.”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 걸음을 옮기는 제 주인을 보며 샬로메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캔디스는 노예를 찾아다니다 근처에서 흐르는 냇물을 봤었다. 이쯤이었는데… 몇 분을 걷자 아까 보았던 맑은 물이 흐르는 냇물이 보였다.
언제 이런 걸 다 봤대. 비아가 헉헉거리며 노예를 들고 따라와 제 주인의 옆에 섰다. 그런 비아에게 캔디스가 말했다.
“노예를 줘.”
비아는 캔디스의 명령에 살짝 걱정이 일었다. 꽤 무거울 텐데. 괜찮으려나. 하지만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설사 캔디스가 무거워서 노예를 놓친다면 아랫것의 덕목으로 눈감아 주면 되는 것이었다. 뭐, 뒤에서 보고 있는 맥켄지 도노반과 샬로메는 주인을 비웃겠지만 제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비아의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캔디스는 전혀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노예를 건네받아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보니 어느새 이렇게 커 버린 캔디스가 조금은 대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캔디스를 호위한 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런데 노예를 건네준 비아가 생각했다. 어떻게 씻기려고? 저놈은 제가 키우는 동물도 목욕 한번 시켜 준 적이 없는 귀족 영식인데? 그냥 내려놔서 물로 좀 적시면….
“얼른 일어나~”
미친…! 비아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허억…!”
물에 처박힌 노예가 정신을 차리고 물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시체처럼 미동도 없던 노예가 생명력 넘치게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캔디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역시, 힘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도 좋지만 저렇게 필사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노예가 보기 좋았다.
정신을 잃었던 너자가 별안간 콧속으로, 폐로 흘러들어 오는 차가운 물에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머리는, 아니 몸은 물에 처박혀 있었다. 윙윙거리며 들리는 물살에 너자는 폭발적인 본능으로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물은 바닥에 주저앉은 너자의 허리춤까지 오는 얕은 물이었다.
“뭐… 뭐야!”
너무 놀라 모국어로 소리를 지른 너자가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노란 머리의 미친놈이, 그리고 물가 근처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과 샬로메, 그리고 노란 머리의 전사가 보였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너무 놀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사냥꾼한테 죽을… 아니, 사냥꾼은 죽었다. 맥켄지가 쏜 검은 악마에 의해 대가리가 깨졌다. 그리고 자신은 기절했는데…? 자신은 왜 물속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너자의 이성으로는 기껏 살린 사람을 물속에 처박는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물에 담근 것도 아니고 아예 죽으라고 빠뜨렸다. 그럼 맥켄지는 나를 왜 살린 거지? 자기가 직접 죽이려고?
“더 씻자.”
캔디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밭은 숨을 쉬는 노예의 가슴에 기다란 발을 얹어 놓고 내리눌렀다.
첨벙! 너자의 몸이 힘없이 물속으로 다시 처박혔다.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물속에 박힌 탓에 숨이 부족했다. 너자는 도리질을 치고 꾸르륵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을 때 캔디스가 물속에 손을 넣어 노예의 짧은 머리채를 잡아 육지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대충 깨끗해 보이는 바닥에 노예를 질질 끌고 왔다.
콜록, 콜록! 숲속에는 숨이 넘어갈 것같이 기침을 해대는 노예의 비명 같은 기침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노예가 기침을 할 때마다 비아의 푸른색 베스트가 조금씩 얼룩졌다.
비아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맥켄지가 다가오며 말했다.
“내 노예를 죽일 셈이야?”
“아니, 씻긴 거야.”
맥켄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당당히 말하는 캔디스를 노려보았다. 화가 나 보이는 맥켄지의 얼굴에 캔디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야, 너 화났냐?”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순간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캔디스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내가? 눈깔 장식이냐?”
날카로운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화난 거 같은데? 내가 네 노예를 함부로 대해서?”
“뭐?”
“네가 싫다면 그냥 내버려 둘게. 네가 사람을 쏴 죽인 것도 말 안 하고. 뭐, 앞으로 동업할 놈한테 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하지.”
“…….”
“그런데 너 노예를 꽤 아끼는구나? 내가 노예를 함부로 했다고 네가 화도 내고.”
뱀처럼 말하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새끼가 지금 나를 떠보네? 캔디스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맥켄지에게 노예의 가치가 높다고 생각을 하면 노예를 매개체로 원하는 거래의 질을 뜻하기도 했고, 그것을 어떻게든 약점으로 잡아 노예를 취하되 자신이 잃을 것을 최대한 줄일 것이다. 협상의 기본은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패를 보이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현저히 떨어진다. 맥켄지는 캔디스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내가 노예를 아낀다고?”
“어.”
맥켄지가 정말 역겹다는 듯 말했다.
“지랄 마. 저건 내 물건이고, 죽여도 내가 죽일 수 있어. ‘그건’ 너와 나의 거래를 이어 주는 매개체이니 나에게는 꽤 쓸모있는 물건이야. 그리고 방금 네가 내 물건을 감히 죽이려고 했어. 그건 ‘내’ 물건이자 ‘내’ 노예야, 나는 그걸 지적한 것뿐이야.”
캔디스는 웃겨 죽을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네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그걸 나한테 구구절절하게 설명한다는 거 자체가 나한테 들킨 거야! 항상 잘난 듯 다녀 봤자, 예비 가주와 차남이 받는 교육의 질은 달랐다. 제가 그래 봤자 차남 새끼지.
본인은 아직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건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캔디스는 맥켄지를 파멸로 몰아세울 물건을 손에 쥐며 머지않을 미래에 맥켄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노예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온몸에 힘이 빠질 대로 빠지고 다시금 아파져 오는 상처에,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아픈 폐에 너자는 거부조차 하지 못했다. 캔디스는 유순하게 안겨 오는 노예의 모습에 식었던 자지가 발기하는 걸 느꼈다. 유쾌했다.
캔디스가 자신의 속내를 익숙하게 숨기며 말했다.
“내가 착각했나 봐. 그럼, 이제 내 볼일 본다?”
“그러든가.”
캔디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를 바라보며 노예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캔디스는 적잖이 놀랐다. 사실 입을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저 도노반의 반응이 궁금해서, 놀리려고 장난으로 입을 맞댔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러…!”
“……..”
기겁하며 서툰 제국어로 자신을 밀어내는 노예가, 입술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폭신한 감촉이, 말을 하느라 벌어진 입속에서 빼꼼히 나온 노예의 도톰하고 뜨거운 혀의 감촉이, 캔디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시팔….”
“…앗….”
정말 천한 노예에게 키스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캔디스가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마치 얼뜨기 시절 사교 모임에 나갔을 때 처음 먹어 보는 술에 머리끝까지 취했고 어쩌다 보게 된 성숙해 보이는 영애의 하얀 다리를 봤을 때 흥분한 자신을 보며 성숙한 영애가 살풋 웃으며 치맛자락을 올렸을 때, 남의 집 파티장의 빈방에서 환상적인 첫 경험을 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싫어하는 노예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어 노예를 바라보았다. 노예의 얼굴은 자그마했고 툭 불거진 눈썹 뼈와 코는 남자답게 잘생겼다. 그런데 이 눈매와 입매가 요망했다. 고양이처럼 위로 올라간 커다란 눈이 섬세했다. 작은 입은 붉은 기가 진했고 오밀조밀한 게 예뻤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야?”
“…하지 마, 하지 마.”
울먹이며 서툰 제국어로 자신에게 애원하는 노예를 본 캔디스가 정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너 다 알면서 일부러 순진한 척하는 거지?”
“…하지 마.”
시팔, 존나 귀엽네.
캔디스는 싫다며 웅얼거리는 작은 입술을 삼켰다. 입을 크게 벌려 자그마한 입술을 한 번에 빨았다. 쭉 빨리는 도톰하고 매끄러운 입술의 촉감이 좋아 얼뜨기처럼 노예의 입술을 쪽쪽거리며 빨았다. 노예의 입안에서 탁음이 들렸다. 혀도, 혀도 빨고 싶었다. 캔디스가 노예의 입술을 빨던 것을 멈추고 혀를 내밀어 노예의 입안으로 넣으려 했다. 하지만 절대로 열지 않는 노예의 입에 캔디스가 커다란 손으로 그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말했다.
“입 벌려.”
“…….”
이 새끼 또 튕기네. 캔디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노예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안달이 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평범한 영애가 그랬다면 어르고 달래서 그녀의 입술을 열었겠지만 이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캔디스가 살풋 웃으며 노예의 배에 올라탄 양 허벅지에 힘을 줬다.
“악!”
캔디스의 강인한 허벅지가 너자의 옆구리를 강하게 옥죄었다. 눈이 돌아가게 심한 고통에 너자가 몸부림을 쳤다. 아파, 아파! 왜 이러는 거야, 그만둬 미친놈아! 너자가 모국어로 소리 질렀다. 하지만 캔디스는 너자의 모국어를 몰랐고 설사 알았어도 너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까 사냥꾼도 그랬고, 이 미친놈도 그러고 대체 왜 자신한테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 너자는 그냥 이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기절해 버리면 저 미친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리고 기절해 버리면 정말 영영 못 깨어날 것 같았다.
너자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캔디스의 상체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의 반항은 캔디스의 마음에 불을 지를 뿐이었다.
캔디스는 노예의 상처를 찍어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허벅지로 노예의 허리를 조이며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아픔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노예의 얼굴을 함부로 잡고 다시 입을 맞춰 혀를 집어넣었다.
하, 시발….
역시 노예의 입속은 환상적이었다. 뜨겁고 축축한 입안은 차갑게 식은 노예의 몸과 정반대였다. 너자가 헉, 하며 입을 다물려고 할 때 캔디스가 너자의 허리를 조이고 있던 오른쪽 허벅지를 들어 이번에는 그 상처를 아예 찍어눌렀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를 너자의 입안에 쑤셔 넣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아…….”
쪽… 쪼옥… 쪽… 적막한 숲속 안에 캔디스가 노예의 입안을 탐하는 음란한 소리만이 들렸다. 그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지만 캔디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노예의 입안을 탐하던 캔디스가 멍하니 생각했다. 이 새끼 자지도 잘 빨 거 같네. 캔디스는 잠시 노예에게 펠라티오를 시킬까 하고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노예는 의외로 앙칼져서 지금 노예의 입안에 자지를 처박으면 물어 버릴 것 같았다.
“흠….”
캔디스는 노예의 매끄러운 목덜미를 물고 빨며 고민했다. 오, 이 새끼 피부도 매끄럽네. 요철과 털 하나 없는 노예의 목을 계속해서 물었다. 아까 그 병신 새끼가 남겨 놓은 울혈이 이해가 갔다. 캔디스는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 대던 얇은 목의 피부를 혀를 대어 빨기 시작했다.
“으응… 시러….”
캔디스가 너자의 귀밑 얇은 살을 혀로 핥고 빨아대자 너자는 목을 움츠리며 싫다고 밀어냈다. 그 미약한 반항에 캔디스가 결정했다.
“자지 빠는 거 보고 싶어.”
캔디스는 하고 싶은 거는 무조건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캔디스가 노예의 목을 빨아대던 얼굴을 들어 오만상을 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에게 말했다.
“너도 같이하자.”
“싫어.”
맥켄지는 더러운 것을 들었다는 듯 귀를 털어냈다. 캔디스가 말했다.
“너… 부끄럽냐?”
“뭐?”
“새끼… 순진하네.”
정신 나간 소리를 해대는 캔디스에 맥켄지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노예한테 발정하는 네가 이상한 거 아니냐?”
“아니? 이렇게 야한데 발정 안 하는 네가 이상한 거 아니야?”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남자의 대화는 묘하게 엇돌았다. 맥켄지는 정말 발기조차 되지 않았다. 저런 걸레 같은 노예에 어떻게 씹질을 해? 병에 걸리면 어떡하려고? 맥켄지에게 노예는 가축과 같았고 그런 노예에게 씹질을 한다는 건 수간을 하는 것과도 같아 보였다.
캔디스는 눈곱만치도 흥분하지 않은 맥켄지의 모습에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얘가 자지 빠는 거 보고 싶었는데…”
“네 자지 빨라고 해.”
“그러다 얘가 내 자지 물면 어떻게 해?”
맥켄지가 캔디스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내가 걔 입 벌려 주고 있을까?”
의외인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가 놀라 노예의 가슴을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 ‘뭐?’ 하며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얼치기 같은 표정을 지은 캔디스에 맥켄지가 말했다.
“내가 그 새끼 못 다물게 해 줄게.”
“…네가?”
정말 평온한 맥켄지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캔디스가 혼란에 빠졌다.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캔디스의 이론이 맞다면 맥켄지는 자각을 못 하고 있지만 노예를 꽤 아끼고 있는 상태였다. 분명 자신의 것을 따먹는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맥켄지가 픽 하고 웃으며 말했다.
“대신 네가 나한테 해 줘야 할 게 있어.”
“…….”
“거래를 제안하는 거야.”
“…뭐?”
캔디스가 맥켄지에게 되묻자 어느새 제 페이스를 되찾은 맥켄지가 나른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캔디스의 옆에 팔짱을 끼고 주저앉아 캔디스의 눈에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걸 하게 해 줄게.”
“…….”
“그러니 너도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줘.”
“…하.”
알 수 없는 맥켄지의 행동에 이제 혼란에 빠진 건 캔디스였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캔디스에게 맥켄지가 속삭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야, 스와포네.”
내 예상이 틀렸나? 캔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맥켄지의 모습은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처음 노예를 두고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했을 때처럼 말이다. 캔디스가 말했다.
“너, 괜찮은 거야?”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없잖아.”
“…….”
“‘그건’ 내 거고 너는 ‘내’ 거를 원하고 있어. 그리고 나는 ‘내’ 거를 통해 너한테 거래를 제안하는 거고.”
…정말 아까는 제 물건을 내가 대가도 없이 홀랑 가져가려고 해서 화가 났던 건가? 캔디스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맥켄지를 바라볼 때 맥켄지가 말했다.
“너 노예한테 네 자지 물려보고 싶다며.”
“…어.”
“내가 그렇게 해 줄게.”
캔디스는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캔디스는 오만했으나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빨랐고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것이다. 아까부터 쌀 것같이 부풀어 오른 제 자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캔디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좋아.”
노예의 입안을 혀로 헤집는 것도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노예가 제 자지를 물고 빨면 더 환상적일 것이다. 그걸 느낄 수 있다면 도노반이 원하는 거 하나쯤은 들어 줄 수 있다.
캔디스의 시원한 수긍에 맥켄지가 차가운 눈으로 노예를 바라보았다.
“…….”
노예는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가 죽은 듯 힘없이 내려간 눈썹과 눈물이 차오른 날카로운 눈이 애절했다. 작은 입이 파르르 떨리는 게 꼭 도와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맥켄지는 그 모습을 가볍게 무시하고 노예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가만히 있어.”
“…….”
답하지 않는 노예의 뺨을 맥켄지가 가볍게 때렸다. 그리고 노예의 입술을 검지와 중지로 벌리며 다시 말했다.
“가만히 있어.”
손끝에 느껴지는 뜨겁고 습한 감촉에 맥켄지가 충동적으로 손가락을 노예의 입안에 깊숙이 쑤셔 넣었다. 켁, 켁! 순간 목구멍 안쪽까지 들어온 손가락에 노예가 헛구역질하며 얼굴을 도리질 치려는데 맥켄지가 손가락을 넣지 않은 손으로 노예의 턱을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가만히 있어.”
“…가마히 이어….”
모든 걸 포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노예에게 맥켄지가 말했다.
“착하다.”
너자는 입안을 헤집는 자지에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앞에서는 노란 머리가 자지를 입안에 처넣고 있었고 뒤에는 나무가 있어 앞뒤로 자신을 눌러대는 통에 정말 숨이 막혔다.
냄새는 나지 않지만 캔디스의 자지는 너무도 컸다. 너자의 작은 입이 버거운지 기어이 찢어졌다. 따끔따끔 아려오는 입가가 거슬렸다. 이제 상처 부위는 아프지도 않았다. 너무 큰 고통은 너자의 역치값을 넘어 버렸고 감각마저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 짓은 왜 이렇게 힘들까?
너자가 자신의 입안을 범하는 자지에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다른 생각 하지 말라는 듯 목젖을 찔러 오는 뜨겁고 단단한 자지에 헛구역질을 했다.
웩! 우엑! 캔디스는 순간 강하게 조여 오는 노예의 목젖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시팔… 존나 좋다….”
마치 구멍을 범하는 것 같은 느낌에 황홀했다. 처음 자지를 노예의 입안에 쑤셔 넣을 때는 순진하게 눈을 일그러뜨리며 싫어했지만 반항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싫어하면서 반항하던 노예가 가만히 있으라는 맥켄지의 말에 유순해졌다.
도노반 새끼는 무슨 복이 있길래 이런 걸 가졌지. 제 주인에게 이런 싶은 충성심을 가진 노예는 드물었다. 잘만 길들이면 엄청난 색노가 될 것이었다.
눈을 감고 노예의 입안을 범하던 캔디스가 노예가 정말 숨이 막히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가녀리게 자신의 허벅지에 양손을 가져다 대는 감촉에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콜록, 콜록.”
한순간에 빠진 뜨거운 자지에 너자가 부족한 숨을 들이마시며 기침을 하고 있을 때 캔디스는 시원스럽게 노예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놀라서 몸부림치는 노예를 뒤집어 나무를 잡게 했다.
노예는 캔디스의 행동에 바들거리며 나무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캔디스가 싸기 일보 직전인 자지를 들어 노예의 엉덩이 사이에 비볐다.
“흐흑…!”
노예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예상한 듯 울먹이며 양손을 꽉 쥐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캔디스가 노예의 엉덩이 사이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노예가 다치지 않은 왼쪽 허리를 강하게 잡고 자지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
노예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온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캔디스를 더욱 흥분시켰다. 사실 캔디스의 취향은 노련한 파트너와 하는 불같은 섹스였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무토막같이 딱딱한 노예의 모습 또한 너무 마음에 들었다.
캔디스가 이를 악물고 자지를 밀어 넣었다. 악! 아악! 밑에서 노예가 질러대는 비명이 더욱 캔디스를 흥분시켰고 아파하는 노예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하….”
완전히 들어간 자지를 강하게 물어대는 노예의 구멍에 캔디스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자지를 끊어 낼 듯 물어대는 내벽은 너무도 좁고 뜨거웠다.
비명을 질러대는 노예를 억누르며 캔디스가 허리를 움직였다. 숨넘어가는 소리마저 야했다. 캔디스는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 느낌에 미칠 것 같았다. 노예의 목덜미를 강하게 물어대며 허리 짓을 하던 캔디스가 훌쩍이는 소리에 허리 짓을 멈추고 오른손을 들어 노예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보도록 노예의 얼굴을 돌렸는데,
“…흑…흐….”
“…….”
엉망으로 울고 있는 노예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싸 버렸다. 노예는 밑에 밀려오는 무언가에 더욱 오열했다. 그런 노예의 애달픈 모습에 캔디스가 저도 모르게 노예의 입에 자신을 입을 맞췄다.
쪼옥거리며 노예의 혀를 빨아댔다. 노예가 훌쩍이며 그 행동을 그저 견디고 있자 캔디스의 자지가 다시 힘을 받았다.
“…시…시러…!”
“한 번만 더 하자.”
질색하는 노예를 캔디스가 달래며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노예의 비명이 적막한 숲속에 다시 울렸다.
캔디스가 제 욕심을 다 채웠을 때는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사실 더 하고 싶었지만 뒤에서 불을 켜고 지켜보는 맥켄지의 시선과 더는 움직이지 않는 노예 때문에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캔디스의 취향은 불타는 섹스였지 나무토막과의 섹스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후….”
이렇게 진이 빠질 때까지 싼 게 몇 년 만이더라…. 어지간한 자극에는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서로 즐기며 하는 게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싫어하는 노예를 억누르며 하는 섹스도 퍽 마음에 들었다.
시간은 많고 자신은 가진 게 많았다. 그토록 기대했던 노예의 몸은 캔디스 예상과 같았다. 훌륭한 외관과 훌륭한 구멍이라니 화대를 낼 가치가 있었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맥켄지의 어떤 요구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노예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그가 땀에 전 앞머리를 뒤로 쓱 넘기며 노예에게서 떨어지자 지지할 것이 없어진 노예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노예를 보는 척도 하지 않으며 캔디스가 옷을 마저 추슬렀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는 노예의 몸을 발끝으로 밀었다. 노예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뒈졌나?”
캔디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끝에 힘을 줘 노예를 위를 향하도록 굴렸다. 차인 어깨가 아플 만하지만 노예는 미동이 없었다.
아, 노예가 죽으면 저 새끼가 지랄할 텐데… 물어내라고 하면 어쩌지. 야만인 노예를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캔디스가 무심히 중얼거리며 쭈그려 앉아 검지로 노예의 곧은 코에 대었다.
“쌕… 쌕….”
다행히 숨은 붙어 있다. 미약한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노예는 평온해 보였다. 캔디스는 더러워진 발끝을 땅바닥에 문지르며 비아를 불렀다.
“야, 이거 의무실에 데려다 놔.”
캔디스의 명령에 비아가 콜을 받은 개처럼 재빠르게 달려왔다. 비아가 노예의 근처에 온 걸 본 캔디스가 중얼거렸다. 잘 썼으니 이제 화대를 내야지. 그토록 노예에게 집착하고 노예가 기절할 때까지 욕심을 채운 캔디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운한 몸에 기지개를 쭉 켜며 맥켄지에게 다가가 물었다.
“잘 썼다. 원하는 게 뭐냐?”
“가면서 얘기하지.”
맥켄지의 말에 캔디스는 팔짱을 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맥켄지와 캔디스는 노예 따위 잊어버리고 아카데미 후원으로 향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인류애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에 샬로메가 앞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노예가 걱정이었다. 어제 캔디스 저 변태 새끼 때문에 많이 놀랐었는데,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 심한 짓을 당했는데… 자신이 괜한 오지랖을 부렸기에 노예가 저렇게 된 것 같아 입이 썼다. 혼자 두지 않았다면 총에 맞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일은 벌어졌고 자신은 계약에 따라 맥켄지를 지켰어야 했다. 노예는 캔디스가 명령한 것처럼 비아가 데리고 올 것이다. 샬로메는 비아를 믿지는 않았지만 캔디스에 대한 충성심은 믿었다. 비아는 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주인이 씹질을 하고 있을 때 사냥꾼의 시체를 토막내어 숲속 구석구석에 매장했다. 아마 제 주인의 명령이니 노예를 의무실에 무사히 데려다 놓을 것이다.
깊은 한숨을 쉰 샬로메는 점점 멀어져 가는 주인을 놓칠세라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런 샬로메를 보며 비아는 제 주인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널브러져 있는 노예를 일으키려 했다.
“…….”
명줄도 길지. 이런 꼴로 살아서 뭐하나.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텐데. 비아는 한숨을 쉬며 성한 곳이 하나 없는 노예의 몸을 바라보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의무실에 데려가야 하는데 좀 씻겨야 하나 싶었지만 노예를 손수 씻겨 주는 건 말이 안 됐다. 자신이 명령을 받은 건 의무실에 가져다 놓는 것이지 노예를 보살피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데려가기 전에 노예의 몸을 가리기는 해야 했다. 노예가 홀딱 벗은 상태에서 아카데미 안에 데려가면 안 그래도 눈에 띄는 노예는 더욱 눈에 띌 것이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성애의 흔적이 있고 넝마가 된 노예의 몸은 자랑할 것이 못 되었다.
“대체 이게 뭐라고….”
비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 반반하다. 몸? 꽤 탱탱하고 잘 빠졌다. 그런데 그게 뭐? 같은 거 달린 남자인데? 천한 노예인데? 거기에 야만인이다. 미개하고 멍청한 초원의 야만인.
예전부터 비아는 제 주인의 성벽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고상한 대-귀족 나리의 머릿속을 일개 자작 집안 기사인 제가 이해할 리가 없었다. 비아는 곧 노예에 관한 관심을 껐다.
비아는 노예의 몸을 가릴 무언가를 찾다 제 주인이 씹질을 하다가 거슬린다고 벗어 던진 재킷을 발견했다. 흠, 어차피 리먼이 여분의 교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비아가 대충 캔디스의 재킷으로 노예의 몸 위에 덮어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학생들을 염려해서였다. 낯짝이 아무리 두꺼운 비아라도 홀딱 벗은 노예를 안고 돌아다니면 엄청나게 쏟아질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비아가 아카데미 부지에 도착했을 때 학생들은 이미 기숙사로 돌아간 후였고, 아카데미 안에 남아 있는 사람도 없었다. 비아가 기사 특유의 민첩성으로 근근이 보이는 학생들과 임직원을 회피하고 의무실에 노예를 데려가니 의무실 안은 발칵 뒤집혔다.
성직자가 있으면 신성력으로 겉의 상처만이라도 말끔하게 봉합을 하고 노예에게 기력을 부여해 주었겠지만 공교롭게도 신성력이 있던 단 한 명뿐이던 성직자는 다음 달 있을 성하의 방문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러 수도에 있는 수도원에 간 상태였다.
당직이던 닥터뿐만이 아니라 교대로 쉬고 있던 닥터와 시종까지 모조리 콜을 당했다. 닥터와 시종은 성직자가 하지 못하는 치료나 그들이 없을 때 도구와 약물로 치료를 했는데 의학문을 무척 어려워한 왕국에 닥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나 제국 아카데미는 귀하신 자제님들이 오는 곳이라 닥터는 삼 교대로 항시 있었다. 노예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노예의 부상에 의무실은 물론 아카데미가 발칵 뒤집혔다. 그냥 다친 것도 아니고 총에 의한 부상이었다. 총기 사고가 일어났다는 보고에 그 늦은 시각에 아카데미의 총장이 마차를 타고 아카데미에 당도했다. 정석대로라면 제국의 기사단을 호출하고 이것에 대한 경위서, 그리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의 가문에도 연락을 해야 했다.
하지만 상처를 입은 것이 야만인 노예라는 사실과 그 노예의 주인이 ‘그’ 맥켄지 도노반 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건에 엮인 영식이 ‘그’ 캔디스 스와포네라는 것에 되레 임직원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지만 총기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고 그 사건의 중심인 맥켄지와 캔디스는 후에 경위서 한 장 달랑 쓴 것이 다였다. 아무런 제재도,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아카데미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했고 맥켄지와 캔디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노예는 눈을 뜨지 못했다.
* * *
캔디스가 턱을 괴고 강의실 문밖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강의실 문 상단쯤에 뚫려 있는 유리창 구멍에, 벽면에 뚫려 있는 창문에 까만색 머리통이 톡 하고 보일 것이다. 노예가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은 지 3일 째였다.
“…….”
노예를 관찰했던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노예 자체를 본 것도 며칠 안 됐고 직접적으로 마주쳤던 것도 드물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도노반과 시간표를 맞추기 이전에도 도노반의 강의실과 항상 근처였다.
항상 복도 쪽 창가를 바라보면 까만 노예가 보였다. 노예는 항상 곧게 서 있었다. 귀족인 캔디스마저 중간중간 집중력이 깨져 허리를 굽히거나 책상에 턱을 괴거나 해 자세를 흩트렸지만, 노예는 항상 올곧았다.
자세만큼은 귀족인 자신보다 좋았다. 그래, 처음 노예가 휘핑보이로서 처맞았을 때도 그랬다. 아파서 어깨가 굽어질지언정 허리는 꼿꼿했다.
그래서 그 곧게 펴진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는 걸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도노반이 미친 제안을 했을 때, 몸도 몸이지만 노예 주제에 꼿꼿하고 당당하게 있는 노예를 망가뜨려 보고 싶었다.
첫 계약이 성립해 늦은 밤 도노반의 침실 소파에서 돌아갈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노예가 들어왔다. 주인 없이 길가를 떠도는 삽살개처럼 지저분했던 노예는 이제 주인이 생긴 개처럼 멀끔한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노예는 도노반의 침실 소파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며 이게 왜 여기 있나, 라는 표정을 지었다. 항상 암울하게 침전돼 있던 눈이 순진하게 뜨여져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처음으로 떠오른 표정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것이, 그것이 캔디스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노예를 밑에 두고 처음 자위를 했을 때, 마치 처음 자위를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내성이 생긴 그였지만 오랜만에 경험하는 아찔한 쾌락에 몸이 나른했었다. 자위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진짜 씹질을 하면 얼마나 짜릿할까 싶었다.
정말 환상적이었지. 종아리에 피가 터지도록 처맞아도 독하게 얼굴만 찌푸리며 별 반응이 없었던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던 목소리가, 너무 아파서 나무를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던 그 모습이 순진해 보였다.
교활한 야만인이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꾸민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취향에 맞을 리가 없었다.
잠깐 생각한 것인데 믿을 수 없게도 한 번에 발기해 버렸다. 거 참, 하도 자지를 놀려 어지간한 자극 아니면 서지도 않았던 게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빨리 일어나라.”
아직 부족했다. 노예를 더 따먹고 싶었다.
노예라는 매개체가 없으니 도노반과 마주칠 일도 없었고 마주친다고 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식사하러 학생 식당에 오니 도노반은 이미 식사 중이었다. 그 재수 없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4관 식당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자나 보네.”
남들보다 머리통 두 개는 크고 덩치마저 곰 같아 노예는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눈에 띄었다. 까만 머리통이 살랑거리며, 걷는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노예는 캔디스 기준에 음식물 쓰레기들을 식판에 한 무더기를 쌓았다.
항상 우울해 보이던 표정이 밥을 먹을 때는 묘하게 밝아졌다. 묘하게 안색이 밝아진 모습이 웃겼다. 캔디스는 보기 싫어도 보이는 노예의 식사 모습에 자신의 밥을 깨작이며 정신없이 구경했다. 그 작은 입에 풀떼기들이 와아압 들어가는데 그게 또 신기했다.
“주인님, 식사 다 하신 겁니까?”
먼저 식사를 끝낸 리먼이 다가와 물었다. 리먼의 물음에 접시를 바라보았다. 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스테이크는 끝 부분만 잘려 있을 뿐 전혀 줄지 않았다. 양고기는 자신이 꽤 좋아하는 고기였고 아카데미의 식사는 까탈스러운 자신의 입맛에도 꽤 맞는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예는 항상 풀떼기와 이름 모를 이상한 것만 먹어댔다. 이상하게 생긴 그 음식은 평민들이 먹는 음식 같은데 일평생 대 귀족 자제로 살아온 탓에 그것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캔디스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음식물 쓰레기 같았다. 그런 걸 노예는 잘도 먹어댔다. 그런 후진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 먹는데, 이런 고기를 먹으면 기뻐서 우는 거 아니야?
노예의 기뻐하는 표정을 상상해 보려고 했는데,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주먹만 한 하얀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노예가 웃는 걸 도노반은 본 적이 있을까?
캔디스는 순간 나빠지는 기분에 리먼에게 말했다.
“치워 버리렴.”
제 주인의 명령에 리먼이 유순하게 명을 따랐다. 캔디스가 나른하게 의자에 일어나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 옷을 입고 있는 비아가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캔디스가 비아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노예가 깨어났는지 알아보라고 할까?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라고 할까? 얼른 일어나야… 씹질을 하는데?
그래, 자신이 이렇게 노예를 신경 쓰는 건 그 환상적이던 노예의 구멍에 홀려서다.
캔디스는 비아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어련히 잘 일어나겠지. 안 죽었다잖아. 그리고 그 멧돼지 같은 몸을 생각해 봐. 그걸로 죽겠어? 엄살떠느라고 정신을 차렸는데도 아픈 척하는 것일 수도 있어.
노예가 일어나지 않은 지 4일째였다. 캔디스가 제 앞에 놓인 식판을 손도 대지 않은 채 리먼에게 버리도록 명령했다.
노예가 일어나지 않은 지 5일째, 캔디스는 결국 참을 수 없는 그리움과 호기심에 제국의 아카데미 의무실로 향했다.
노예가 보고 싶었다.
너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둥둥 떠다니며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별이 대여섯 개쯤이 콕콕 박혀있었다. 여기는 코만치가 아닌가 보네. 하얀 사람들의 땅과 코만치의 땅은 달랐다. 코만치의 밤하늘은 새까맣고 반짝이는 별들이 무수히 많았고 너자는 그것을 보는 걸 좋아했다.
모두가 잠든 깊은 저녁 불침번을 서며 보았던 그 밤하늘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더 그리웠고 애틋했다. 코만치의 밤하늘은 마치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내리쬔 햇빛에 물결이 부서지는 것처럼 반짝였다. 코만치의 밤하늘을 상상하던 너자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무언가가 지나갔고 너자는 그것을 알았다. 그건 그 애였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의 금사 같은 머리카락은 찬란히 빛났고 새파란 눈동자는 햇빛을 머금은 새파란 강이 물결치는 것같이 애수에 차 있었다. 이십여 년의 인생 중 그렇게 예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머리의 자비 없는 채찍질에 온몸이 찢어질 것같이 욱신거리는 것마저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채찍에 맞던 자신을 구해 줬다. 그가 그 거지 같았던 성에서 나를 빼내 ‘아카데미’라는 곳에 데려왔다. 그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그는 나를 데리고 다녀 줬고 그를 따라다니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자신이 있는 공간에 들여줬다. 그는
진창을 구르고 있던 나를 구원해 준 남자였다.
그로 인해 맞는다고 해도 화나지 않았다. 이곳에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내가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 애가 내 몸을 대가로 노란 머리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받아내도 참았다. 너무 아팠지만, 내 안의 중요한 게 깨진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참았다. 내가 그한테 쓸모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길거리의 문둥이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았던 그때는 너무 부끄러웠다. 노란 머리에 착취를 당할 때 문득 마주쳤던 그 차가웠던 눈이 너무 서러웠다.
가만히 있으래서 반항도 안 했다. 그가 원하는 거니까. 그런데, 말을 잘 들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차갑기만 했다. 나는 그 눈빛을 안다.
그는 나를 싫어했다. 에르베성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과 똑같았고 일 년간 죽어라 싸워 자신을 진창에 처박아 놨던 그 전사의 표정도 그랬다.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만큼 더 아픈 것은 없었지만 미련하게 다시 한 번 그를 떠올렸다.
그가 보고 싶었다.
너자가 눈을 떴다. 우습게도 눈을 떠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초점이 잘 맞지 않는 탓에 계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눈에 뭐가 꼈나… 너자가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했으나 온몸에 힘이 안 들어가 몸만 움찔거릴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또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오른쪽 옆구리가 너무 욱신거리고 아팠다. 또다시 느껴 보니 말 못 할 곳도 너무 아팠다.
안 아픈 곳이 없네…. 너자가 힘없이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뱉고 있는 힘을 다해 오른손을 들어 올려 눈을 비볐다. 대충 눈곱이 떨어져 시야가 좀 좋아졌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때도 이랬다. 허벅지와 배에 검은 구슬을 맞고 이제 죽는구나, 이 징글징글한 싸움이 끝나는구나 싶어 눈을 감았다. 너무 지쳤었다. 코만치의 미래는 살려 도망 보냈으니 내가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은 죽지 않았고 눈을 떠 보니 더럽고 냄새나는 밀실 바닥에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후 계속해서 싸워 왔던 하얀 사람이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만 지금은 더럽고 냄새나는 밀실이 아니라 쾌적하고 창가가 있는 곳이었고 딱딱한 바닥이 아니라 푹신하고 부드러운 천이 깔린 곳의 위에서였다. 몸에 덮여 있는 모포도 감촉이 좋았다.
자신이 올라가 있는 곳은 매우 푹신했다. 코만치도 이런 비슷한 게 있었지만, 그것은 짚을 쌓아 놓은 것에 부드러운 천을 엎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너자는 몸이 아픈 것도 잊고 그 푹신하고 보드라운 감촉을 더 느끼고 싶어 낑낑거리며 무릎을 접어 부드러운 천에 맨발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처음 느껴 보는 폭신한 무언가에 너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함….”
그러다 체력이 달리는지 하품을 크게 한 후 눈을 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정한 숨소리가 쌕쌕 났다.
“…참나.”
커다란 창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노예를 내려다보고 있던 맥켄지가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단순한 놈이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핼쑥했던 얼굴이 정신 한 번 차렸다고 환해졌다.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노예의 다리가 하도 길어 침대 밖으로 빼꼼 삐져나와 있었는데 아까 깨어나고 감촉이 마음에 들었었는지 발끝으로 침대 시트를 문질렀고 지금은 무릎을 접어 양발을 침대 끝에 간신히 올려놓았다. 핏줄이 불거진 커다란 발가락 끝이 꼼지락거렸다.
맥켄지는 팔짱을 끼며 뒤통수를 창문에 기댔다. 다리를 꼬느라 들려진 오른 다리를 까닥이며 고른 숨을 쉬며 잠든 노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닷새 동안 일어나지 않는 노예의 상태가 궁금하다든가 노예에게 죄책감이 생겨서 온 게 아니었다. 맥켄지는 실제로 닷새 동안 샬로메나 그레머에게 노예의 상태를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의무실에 온 것은 별거 아니었다. 사격 수업이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후작 가문의 차남은 팔리지 않는 상품이었고 혹여나 장남에게 해를 가할까 봐 기본적인 교육만 했지 경영이나 사업의 실전 및 이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맥켄지는 귀족 가문의 영식으로서 느낄 수 있는 권력의 욕망, 배움의 욕망을 거세당했고 그저 후작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이 되어 인형처럼 키워졌다. 그저 인형처럼 제 부모에게, 제 형에게 아양을 떨며 한심하게 살아갔다.
제 형 러트 도노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사냥을 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늑대 때문에 머스킷을 장전하다 실수로 제 엄지를 날려 먹었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러트 도노반은 더는 총을 장전하지 못했고 사격을 하지 못했다. 총을 쥐려고만 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때문에 손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덜덜 떨리며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의 가업은 총기 개발 및 판매였다. 평민에 불과했던 미켈란 도노반은 총 하나로 후작이라는 작위를 샀다. 그리고 총 하나로 이베아를, 아니 머지않아 대륙을 휘두를 것이었다.
그런 가문의 장남이 총을 무서워한다? 설계도조차 그리지 못한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맥켄지의 아비 다비드 도노반은 제 아들이 백치가 되었다며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지금껏 가주로 키우던 장남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장남은 그대로 후작이 되어 가주가 될 것이고 가문의 기술은 차남이 이을 수 있게 하기로 다짐했다.
다비드 도노반은 인형처럼 키우던 열 살 아이를 ‘형의 대역’으로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맥켄지를 닦달했다. 물론 다비드 도노반은 제 막내아들을 사랑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었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었다. 하지만 아들을 사랑해 주는 것과 아들을 쓸모있는 대역으로 만드는 것은 별개였다. 어렸던 맥켄지 도노반은 손바닥 뒤집듯 휙휙 변하는 아비의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금지옥엽으로 키워졌던 그 작은 아이는 한순간에 돌변한 제 아비의 모습에, 제가 아비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쏟아지는 인격적인 모독에 자아가 비틀어져 갔다.
맥켄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손에 물집이 잡혀 가도록, 손에 굳은살이 생기고 피가 날 때까지 의무적으로 모든 종류의 총을 수천 번 수만 번 분해했고, 모든 종류의 총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수석 설계사의 지도하에 설계도를 수천 번 그렸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온종일 보석처럼 가만히 있던 맥켄지는 종일 클레이 사격을 하든 과녁판을 맞추는 클래식한 사격을 하든 강제적으로 총을 쏴 갈겼다. 그의 실력은 천부적인 재능도 있었지만 끝없는 노력이 쌓인 결과였다. 또 다행히 맥켄지는 총의 설계도를 그리고 계산하는 것을, 총을 쏘고 분해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되레 좋아했다. 형은 제가 사격을 할 때와 설계도를 그릴 때 열등감에 휩싸인 듯 굴었고, 맥켄지는 그런 형의 한심한 모습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의 정서적 학대로 무얼 하든, 무얼 보든 감흥이 없는 맥켄지였지만 맥켄지는 총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어떤 종류의 사격이든, 어떤 종류의 총이든 매끈한 총신을 잡고 무언가를 깨부수고 있노라면 항상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을 고양시켜 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재미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총을 잡는데 이상하게 신경질이 났다. 까만 무언가가 자꾸 눈 끝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으로 총을 든다면 사고를 낼 것 같았다. 캔디스가 오늘 수업을 빠진 게 다행이었다. 그가 있다면 바로 그에게 총알을 갈겼을 것이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파괴적인 기분에 총을 어시스턴트에게 던지고 수업을 그대로 쨌다. 뒤에서 이스트가 뒷목을 잡고 쉭쉭거리는 것이 보였지만 알 바 아니었다.
이상하게 자꾸 가슴에 무엇이 얹힌 듯 답답했고 모든 게 거슬렸다. 맥켄지는 자신을 따라오는 그레머와 샬로메에게 이 이상 따라오면 리볼버로 대가리를 깨 버리겠다고 통보를 하고 무작정 걸었다.
더는 그를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독채로 가면 분명 거슬리는 저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걷기도 싫었다. 어디를 갈까 했는데, 순간 기억 한편에 처박아 두었던 게 생각났다.
경위서를 쓰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느라 캔디스와 총장과 같이 갔던 의무실이 생각났다.
“…의무실에 침대가 있었지.”
맥켄지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노예는 쌕쌕거리며 잘만 잤다. 맥켄지 특유의 나른한 눈이 오묘한 빛을 냈다. 그는 꼰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 턱을 괴며 알 수 없는 눈으로 노예를 바라보았다.
맥켄지는 양손을 버릇처럼 느리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발에 채고 차이는 게 노예였다. 실제로 도노반 후작 가문의 성에도 수많은 노예가 존재했지만, 그는 병균과도 같은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 범위 내에 끼워 넣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여기에 왜 왔을까?
처음 계획대로 의무실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그런데 나는 왜 수많은 의무실 중 이곳에 기어들어 와서 노예를 바라보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으응….”
노예가 몸을 꿈질이며 뒤척였다. 그런 노예의 모습을 보며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멍청해 보여.”
노예는 신경이 쇠심줄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흘러가는 말로 샬로메가 하는 말이 야만인 노예는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기 전에는 전사였다고 했다. 이 둔한 놈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항상 음울하게 서 있는 놈이? 세상 편안하게 자고 있는 놈이? 맥켄지는 살면서 이렇게 둔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노예를 보며 맥켄지는 문득 생각했다.
대체 캔디스나 그 대가리가 뚫려 뒤진 새끼나 이 노예의 뭐가 좋다고 그 난리일까? 그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게 너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가축으로 보였다.
쓸데없이 큰 키와 커다란 덩치는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했고, 말도 할 줄 몰랐고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다. 차라리 키우는 개가 말을 더 잘 알아들을 것이다.
몸 때문인가? 노예의 몸은 흉이 많았지만 몸매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 것 같았다. 하지만 두툼한 가슴과 적당히 근육이 잡혀 남성적이게 일자로 쭉 뻗은 허리는 백번 양보해 동경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성적인 매력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적인 행위를 해 본 적이 없는 맥켄지였지만 그의 심미안은 작고 아담하고 아름다운 것을 선호했다. 그는 농담이라도 이런 몸에 전혀 흥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사교계에 데뷔하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많은 파티에 참여했다. 그가 파티장에,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면 수많은 아름다운 영애들이, 틈새시장을 노리는 예쁘장한 영식들이 맥켄지의 주변을 맴돌았다. 맥켄지는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품을 생각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뼛속부터 귀족이었고 자신과 동급이 아닌 것들과는 엮여 캔디스와 같은 더러운 꼴을 보기는 싫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베아 제국 내에서 맥켄지와 급이 맞거나 높은 가문은 몇 없었고 맥켄지의 또래 영애 또한 없었다.
장남인 러트 도노반은 그 나이 먹도록 아무런 경험이 없는 제 동생이 가여워 영지 내 제일 잘나가는 창녀를 사서 제 동생의 방에 넣어 줬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 고운 자태와 요염한 행동에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를 탐했겠지만 맥켄지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방에서 내쫓았다.
러트 도노반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쫓아낸 자신의 동생에 기함하다 ‘아, 내 동생이 자지를 쓸 줄 몰라서 안 하는 거’라는 대단한 착각을 해 쫓겨난 창녀를 데리고 동생의 방에 들어가 동생을 침대 옆에 앉히고 그가 직접 창녀와 관계를 맺었다.
보통의 사내라면 그 자극적인 광경에 자지를 세웠겠지만 맥켄지는 발기 한 번 하지 않고 냉정하게 그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맥켄지는 당장 그들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장남은 그때 차남의 증오에 불을 더 붙여 놨었다. 그렇다고 맥켄지의 성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발기했고 쌌다.
그런 맥켄지여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치도 모르고 제 동생 앞에서 씹질을 하는 제 형이나 더러운 노예를 따먹고 싶어서 발정이 난 캔디스도 역겹기 마찬가지였다.
맥켄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짐승처럼 붙어먹던 캔디스와 노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노예가 잠결에 뒤척였다. 침대 안에 구겨 넣었던 기다란 노예의 양발이 다시금 침대 밖으로 튀어나와 그의 시선이 절로 핏줄이 불거진 노예의 커다란 발에 닿았다.
노예의 오른쪽 발목에 손자국이 나 있었다. 저건 캔디스가 만들었던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노예의 발목을 함부로 쥐어 당겨 잡았었다.
문득 맥켄지의 머릿속에 캔디스의 밑에 짓눌려 울며 흔들리던 노예의 모습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항상 암울하게 침전되어 있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서럽게 눈물을 흘려대던 것이,
의외로 허여멀건 피부에 꽃처럼 피어났던 멍 자국들이,
몸에 비해 턱없이 작았던 엉덩이가,
마치 구해 달라는 듯 애절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던 노예의 까만 눈이,
“…….”
맥켄지가 한숨과도 같은 숨을 쉬며 충동적으로 창가에서 내려와 노예의 목까지 덮어져 있던 모포를 잡아 가슴께까지 내렸다.
노예의 굵은 목덜미에 얼룩처럼 번진 울혈은 마치 피부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이 가련해 보였다.
성애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은 노예의 목에 맥켄지의 손가락이 닿았다.
손끝에 닿은 노예의 피부가 차가우면서도,
“부드럽네.”
매우 부드러웠다.
그가 노예의 목덜미에서 손을 거둬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맥켄지의 기분이 이상하게 날뛰었다. 이런 기분, 지금껏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내장에 손을 집어넣어 손으로 마구 주무르는 것 같았다. 맥켄지는 마치 널뛰는 것 같은 감정에,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충동과도 같은 이 감정에 거부감이 들었다.
맥켄지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거’랑 엮여서는 안 된다고.
맥켄지는 자신의 감을 잘 믿는 편이었고 실제로도 잘 맞았다. 그는 더 이상 노예와 상종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노예가 오 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든, 노예가 뒈지든 말든, 노예가 누군가에게 처맞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무시하면 되는 거였다.
그가 서둘러 의무실에서 나가려 할 때, 의무실의 미닫이가 열렸다.
“…….”
“…….”
바로 코앞에서 맞닥뜨린 맥켄지와 캔디스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맥켄지가 잠시 고민했다. 그냥 이대로 무시하고 나가 버릴까? 하지만 그건 맥켄지의 프라이드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한시적 동맹이었지만 지난 십여 년간 경쟁자였고 박 터지게 싸워 왔었다. 아니,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점유한 이곳에서 내가 먼저 나간다? 마치 싸움에서 도망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캔디스였다.
“네가 여기에 와 있을 줄 몰랐네.”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가 지지 않고 말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이유야 없지. 그런데….”
“그런데?”
날카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에게 캔디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웃겨서.”
“뭐가 웃기는데?”
“너 노예한테 관심 없다면서, 사실 관심 많네? 내숭 그만 떨지 그래? 혼자 노예한테 관심 없는 척, 고결한 척하지 마.”
“뭐?”
맥켄지가 더러운 것을 들었다는 듯 질색을 하며 귀를 털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노예에게 성적인 관심이 있어서 껄떡댄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하는가! 분명 대가리에 총을 맞은 게 분명했다.
캔디스의 좆같은 말에 맥켄지가 대꾸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리고 그냥 지나쳐 나가려고 하는데, 이어지는 캔디스의 말에 맥켄지는 걸음을 멈췄다.
“너도 사실 노예한테 자지를 박고 싶지?”
“…….”
“이미 한 거 아니야?”
맥켄지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그가 한순간에 위로 올라오는 열에 가르마 탄 앞머리를 뒤로 쓸어올렸다. 결이 좋고 고운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 올라가자 그의 잘생긴 이마가 보였다. 그리고 사정없이 구겨진 그의 눈썹도.
정말 질색하며 맥켄지가 말했다
“시팔, 좆같은 소리 좀 그만 처해.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미친 새끼야.”
“나 같은 게 어떤 건데?”
“고작 노예 새끼한테 발정 나서 껄떡거리잖아.”
“뭐, 발정?”
그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맥켄지는 자신을 쏘아보는 캔디스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여기에 왜 처왔는데? 지금 날로 먹으려고 온 거 아니야? 내 눈 피해서?”
“…….”
“시팔, 대답 못 하는 거 봐!”
맥켄지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 질렀다.
“맞네, 이 상도덕 없는 새끼, 날로 먹으려고 해?”
“…아니야, 난….”
“그럼 여기에 왜 처왔는데. 이거 지 애비 닮아서 하는 짓 더러운 거 봐 봐!”
캔디스는 별안간 처맞은 자신의 아비에 분노했다. 캔디스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여기에서 내 애비 얘기가 왜 나오는데!”
그에 맥켄지가 지지 않고 말했다.
“너희 집안이랑 거래를 하기만 하면 장부에 구멍이 질질 나! 너네 집안이 했던 횡령, 배임 다 내가 밝힐 거야. 지금껏 손해가 얼마나 났는 줄 알아? 그거 다 돈으로 환산하면 너네 영지의 5분의 1을 뱉어내야 할 거다.”
“증거가 없잖아. 증거 가져와 봐, 새끼야!”
“부정 안 하는 거 봐, 기본적인 말싸움도 못 하는구나. 멍청한 스와포네. 네 대가리로 어떻게 가주를 할까 모르겠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장부는 맥켄지가 15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관리하고 있었다. 그의 저녁 일정은 모조리 장부를 정리하는 것이라 맥켄지는 눈을 감고도 몇 년 몇 월에 어느 거래가 있었고 손실이 어느 해가 제일 컸고 제일 적었는지 그래프로 단번에 그려낼 수도 있었다.
맥켄지의 경험상 교묘하게 비슷한 금액이 번번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횡령의 징조였다. 그런데 지금껏 굉장히 교묘하여 심증만 있던 스와포네의 계산서 조작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석 달 전 밤을 새워 가며 스와포네 가문에서 발행된 계산서를 보며 장부를 정리하던 맥켄지가 만년필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 새끼가 한 거네.”
스와포네 공작의 건강이 나빠져 간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스와포네 공작과 수하들이 계산서 조작을 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캔디스에게 간 모양이었다. 교묘하지만 묘하게 꼬리가 잡힐 듯 말 듯 한 발행서는 아무리 봐도 노련한 스와포네 공작의 실력이 아니었다.
맥켄지의 추궁에 캔디스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굳었다. 하지만 곧 평소의 페이스대로 돌아온 캔디스가 빈정거렸다.
“나야말로 차남 새끼가 뭘 할 줄 안다고 이렇게 깝치는지 모르겠다.”
“그 차남 새끼한테 장부 조작한 거 털린 거 인정하냐? 어찌 된 게 너는 장부 조작도 제대로 못 하냐?”
“말만 하지 말고 증거를 가져오라니까?”
“그러니까 네가 안 된다는 거야. 이 치졸한 새끼야.”
“이 새끼가…?”
미친 듯이 서로를 물어뜯던 둘 사이에 잔뜩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치료를 해야 하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불같은 둘의 눈길이 소리가 들린 근원지에 닿았다. 캔디스의 뒤에는 닥터와 시종이 서 있었다. 이베아 제국의 ‘그’ 개망나니 영식들의 눈길을 한 번에 받은 시종의 등 뒤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종이 끌차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달달 떨고 있자 뒤에 서 있던 늙은 닥터가 쓱 앞으로 나와 말했다.
“환부를 소독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어서 꺼져 달라는 말을 눈빛으로 전한 늙은 닥터가 그 비싼 안경을 추어올리고 의무실 안으로 들어왔고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끌차를 끌고 뒤따라왔다. 그들은 멱살잡이를 할 것 같은 둘을 지나치고 노예에게 가 환부를 소독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한숨을 쉬며 다시금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 의무실을 나서려는데 뒤에 있는 놈이 따라 나오지 않는 것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
눈으로 떡 치나….
캔디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옷이 벗겨지는 노예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순간 속이 역해진 맥켄지가 바로 자리를 뜨려 했으나 역시 그냥 가면 안 되겠다. 그가 캔디스의 뒷정강이를 구둣발로 치며 말했다.
“야, 나와.”
“너나 가.”
정강이를 차인 것에 길길이 날뛸 법도 한데 캔디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지금 나가 버리면 저 파렴치한 놈이 치료를 하고 있는 닥터와 시종을 내쫓고 노예를 강간할 것 같았다. 말도 안 되었다. ‘저건’ 엄연히 상품이었다. 상품을 값도 안 내고 쓴다? 맥켄지의 사전에 그딴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맥켄지가 캔디스에게 말했다.
“너 안 나오면 다시는 저 새끼 너한테 안 굴릴 거야.”
“새끼… 치사하게.”
캔디스는 결국 눈으로 너자를 범하던 것을 멈추고 맥켄지와 함께 의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등 돌려 제 갈 길을 향했다.
너자가 완전히 눈을 뜬 것은 이튿날 뒤였다. 너자의 회복력에 늙은 닥터가 안경을 위로 추어올리며 놀라워했다.
“자네, 사람이 맞긴 맞는가?”
“…….”
제국어를 모르는 너자가 닥터의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제 앞의 늙은이가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너자는 늙은이가 자신에게 겁먹을까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보통 하얀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행히 늙은 닥터는 너자의 행동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혼잣말이 취미인 듯 혼자 중얼거리며 벌써 아물기 시작한 너자의 환부를 보고 감탄하면서 소독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달간은 병상에서 요양해야 겨우 일어날 정도의 부상이었지만 너자는 그것에 해당하지 않았다. 상처는 유능한 닥터가 꼼꼼히 봉합을 한 덕에 터지는 것 없이 잘 아물고 있었고 좋은 이부자리에서 푹 자니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최후의 전쟁이 끝났을 때 너자는 상체와 하체에 각 두 발씩 총에 맞았고 제대로 된 케어를 받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살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고 대충 꿰매 곰팡내가 나는 골방에 갇혀 제대로 먹을 것도 먹지 못했건만 살아남았었다.
너자는 늙은이가 자신의 상처 부위에 물먹은 솜 덩어리 같은 것을 문지르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너자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른히 풀렸다. 유순하게 풀려 눈을 깜빡이는 너자의 모습을 보며 늙은 닥터가 너자의 눈앞에 손을 휘휘 휘둘렀다. 너자는 자신의 주의를 끄는 늙은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늙은 닥터가 나른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너자에게 문밖을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 나은 것 같으니 나가게.”
“…….”
너자가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는 늙은이의 행동에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늙은 닥터는 그런 너자의 행동에 집에서 기르는 자신의 개를 떠올렸다. 적적한 마음에 키우기 시작했던 뽀삐는 어느새 자신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가족이었다. 그런데 요즘 뽀삐가 자신보다 아내를 더 따랐다. 그럴 만도 했다. 본인이 나가서 돈을 벌 때 뽀삐를 챙겨 주는 건 아내였으니까. 자신보다 아내를 더 따르는 뽀삐를 양손에 들어 올리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어르면 뽀삐는 그 귀여운 대가리를 양옆으로 갸웃이며 자신을 바라보곤 했다.
거참, 좀 챙겨 줘야겠네. 늙은 닥터가 옆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말했다.
“도노반네 시종 좀 데리고 오너라.”
늙은 닥터의 말에 시종이 툴툴거렸다.
“그 동네 시종이 어디 있는 줄 알고 데려와요….”
아카데미가 이렇게 넓은데 대-귀족님의 시종을 어떻게 찾느냐는 시종에게 늙은 닥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허, 오늘 강의 없는 날이잖나. 그럼 독채에 있겠지.”
“…아….”
“자네 그 머리통으로 어떻게 시중을 드는 건가?”
그러다가 평생 시중만 들다 죽는다며 늙은 닥터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시종이 재빨리 손에 들려 있던 붕대를 끌 것에 내려놓고 문밖으로 홀랑 향하며 말했다.
“모셔 올게요.”
저놈은 항상 굼뜨지만 도망갈 때는 빨랐다. 보통의 닥터라면 저렇게 뺀질거리는 시종을 꾸짖고 파면했겠지만 늙은 닥터의 눈에 시종은 너무도 어렸다. 자신의 손주뻘인 시종이 안타깝기도 했고 귀여웠다. 그리고.
눈앞의 야만인도 그랬다.
늙은 닥터는 내리쬐는 햇볕에 꾸벅꾸벅 다시 조는 야만인을 보며 자신도 의자를 벽 쪽으로 끌어 등을 기대어 앉고 눈을 감았다.
절대, 일하기 싫어서 도노반의 시종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늙은 닥터도 너자와 함께 볕을 쐬며 꾸벅꾸벅 졸았다.
잠들었던 너자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니 공간이 또 바뀌어 있었다. 비몽사몽 한 눈으로 일어나 주변을 바라보니 어디선가에서 본 곳이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에 눈을 문지르며 오만상을 찌푸리는 너자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어….”
그였다.
너자가 맥켄지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흐릿했던 시야가 탁 트였다. 윙윙거리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귀에 맥켄지가 노트에 필기하는 소리가 사각이며 들려왔다. 너자가 넋을 놓고 맥켄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쏟아지는 채광을 받으며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서 책을 넘기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앞으로 넘어오는 앞머리가 거슬리는지 섬섬옥수 같은 기다란 손으로 앞머리를 대충 쓱 넘기자 숱 많은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은빛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자 곧은 이마와 남자답게 튀어나온 눈썹 뼈가 섬세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꿈같은 광경이었다.
맥켄지는 너자가 잠에서 깨 일어난 것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돌멩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해서 아는 체를 하는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노예는 할 일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레머.”
“네.”
너자는 어디선가에서 튀어나온 시종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지금껏 맥켄지를 보느라 그 뒤에서 대기 중이던 샬로메와 그레머를 보지 못한 탓이었다. 너자가 자신의 시야가 이렇게 좁게 보였던 것이 처음이라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맥켄지가 말했다.
“노예에게 글을 가르쳐. 최대한 쓸모가 있게 만들어 놔.”
“네.”
그의 명령에 그레머가 유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샬로메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제국어 교재와 노트, 그리고 필기구를 가지고 노예의 앞에 앉았다.
너자는 자신의 앞에 앉아 책을 펼치는 그레머를 바라보았다. 그런 노예의 시선에 그레머가 말했다.
“이제부터 글을 배울 거야.”
“?”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예에게 그레머가 앞으로 노트를 밀어 주고 노예의 커다란 손에 연필을 쥐여 주었다.
뭐지? 뭘 쓰라는 건가? 너자가 알 수 없는 그레머의 행동에 아리송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너자의 모습에 그레머가 잠시 고민했다. 처음부터 문법 같은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건 무리였다. 그레머는 일단 사물의 이름 먼저 알려 주기로 했다.
그레머가 노예의 손에 쥐여준 연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필.”
“…….”
알아듣지 못하는 노예에게 그레머가 잠시 고민하다가 노예의 손에서 연필을 가져가며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연필.”
그레머의 의도를 어렴풋이 이해한 너자가 그가 말한 대로 따라 했다.
“연필.”
또박또박 따라 하는 노예의 모습에 그레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필.”
“연필.”
“이제 써야 해.”
“?”
그레머가 자신을 멀거니 바라보는 노예를 바라보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연필을 쥐고 흔들며 연필, 이라 말했다. 그리고 노예가 보는 앞에서 노트에 연필, 이라고 다시 복기하며 연필의 철자를 썼다.
그 모습에 너자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는 지금 자신에게 글과 말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너자는 방금 그레머가 써 놓은 연필 철자 밑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똑같이 따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레머의 제국어 특강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꽤 지났다. 너자가 찌뿌둥한 허리에 엎드려서 글씨를 쓰고 있던 것을 멈추었다. 아파져 오는 허리와 상처 부분에 작게 신음을 내뱉으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레머는 공부를 끝내려는 노예의 모습에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더 해야 해.”
“아파.”
어느새 ‘아프다’라는 말을 익힌 너자가 꽤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그레머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새끼 끼 떠는 거 봐….”
순식간에 귀를 스쳐 지나간 문장에 너자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노예에게 그레머가 손을 휘휘 저으며 다시 쓰라고 말을 하려고 할 때, 집에서 오늘 자로 날아온 계산서 사본을 보며 정리하고 있던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여기 테이블에서 해.”
믿기지 않는 맥켄지의 말에 그레머가 저도 모르게 예? 하며 얼치기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런 그레머에게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테이블 놔두고 왜 바닥에 엎드려서 공부하는 거야?”
“하지만 도련님이….”
“그런 자세로 하면 있는 집중력도 날아갈 거야. 그 새끼, 써먹을 데 많다고 내가 말했지?”
“네.”
“그러니까 빨리 말문 트이게 만들라고.”
귀찮다는 듯 말하는 맥켄지에 그레머가 서둘러 바닥에서 일어나 노예의 팔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김에 말했다.
“테이블.”
“테이블.”
그레머가 테이블을 만지며 하는 말을 너자가 그대로 따라 했다. 그런 너자의 모습에 그레머가 너자의 노트를 가져가 테이블의 철자를 썼다. 그리고 다시 너자에게 건넸다. 너자는 유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그레머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안간 일어나는 그레머에 맥켄지가 필기를 하고 있던 만년필을 멈췄다. 그 모습에 그레머가 몹시 송구스럽다는 듯 주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오전에 학부실에 와서 서류를 작성하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멍청하긴.”
날카롭게 눈을 뜨며 꾸짖는 맥켄지에 그레머가 허리를 숙이며 주인에게 자비를 빌었다. 맥켄지는 시종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마.”
“죄송합니다.”
“어서 다녀오렴.”
“네.”
맥켄지의 자비에 그레머가 냉큼 독채를 나섰다. 그레머가 나간 독채에는 맥켄지와 너자만이 있었다. 샬로메는 독채 주변을 돌며 호위기사의 본분을 다하는 중이었다.
거실은 적막했다. 너자는 순식간에 가라앉은 거실의 분위기에 눌려 가만히 앉아 있다가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연필을 잡아 아까 그레머에게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노트에 꾹꾹 눌러썼다.
연필, 노트, 소파, 화분, 나무, 밥, 침대, 테이블, 의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으며 글자를 써대는 너자였다. 장부를 정리하던 맥켄지가 그 소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노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하얀 종이에 쓰인 형편없는 글씨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픽, 하고 들리는 웃음소리에 너자의 얼굴이 순간 달아올랐다.
분명 내가 쓴 글씨를 보고 웃은 거였다. 평소라면 그런 거에 신경도 쓰지 않을 그였지만 맥켄지에게 어수룩한 꼴을 보였다는 것에 너자의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보다 더한 더럽고 추한 꼴도 보여 줬건만 너자는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너자의 허여멀건 얼굴이, 항상 암울하게 침전돼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열이 올라 붉어진 모습에 맥켄지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빨개졌네.”
“?”
맥켄지의 중얼거림에 너자의 까만 눈이 빛났다. 맥켄지는 자신을 보는 순진한 눈에 저도 모르게 노예의 눈가에 손을 뻗어 가져다 대었다.
“……!”
너자는 자신의 눈가에 닿아오는 서늘한 손가락에 숨을 집어삼켰다.
그의 손이 닿은 눈가가 마치 불에 덴 것같이 뜨겁게 느껴졌다. 맥켄지는 마치 겁먹은 짐승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한 눈에 무심코 말했다.
“눈.”
마치 수작질을 하는 듯한 자신의 목소리에 놀란 맥켄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숫자를 하도 봐서 머리가 터져 버렸나?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기가 차 손가락을 떼고 다시 장부를 정리하려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
“…….”
노예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맥켄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내쉬어졌다.
불과 이틀 전이었다. 저 노예를 무시하겠노라고 다짐한 게. 이런 건 자신답지 않았다. 예외가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내장을 손으로 마구 주무르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랫배가 조금씩 당겨왔고 제 자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맥켄지는 고자가 아니었으므로 발기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문제였다.
맥켄지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자신의 몸에 헛웃음을 지었다. 미친 것 같았다. 맥켄지는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너자가 이런 맥켄지의 혼란을 알 리가 없었다. 너자는 처음으로 자신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맥켄지의 모습에 너무 기뻤다.
마치 그때 같았다. 너자가 있던 코만치는 짐승을 길들여 사냥하고 전투를 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모른다. 코만치는 아주 예전부터 짐승을 길들였다고 했다. 코만치는 수많은 동물을 길들였으나 그중 제일 길들이기 어려운 것은 늑대였다.
아무리 늑대를 길들인다고 해도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 너자가 생각하기에 늑대는 길들여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을 알기에 따라 주는 것 같았다. 가려운 곳을 긁어 준다거나 같이 사냥을 가면 좀 더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 수많은 늑대를 길들이며 너자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또 늑대들은 사람들과 있으면 절대 짝짓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만치는 전성기의 늑대가 늙거나 짝짓기 철이 되면 야생에 방생했다. 자유의 몸이 된 늑대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무리를 형성하고 새끼를 낳았다. 그리고 사람은 다시 야생으로 찾아가 그것들이 낳은 새끼 늑대들을 데려와 길들였다.
처음 데려오는 새끼들은 매우 사납고 교화가 되지 않았다. 인간과 공생하면 자신들이 편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었고 교감을 하기에는 늑대 나름의 사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끼 늑대를 길들이려면 긴 시간과 인내, 그리고 물려도 죽지 않을 튼튼한 몸이 필요했다. 걸핏하면 물리고 서열 싸움을 했다. 그러다 서열 싸움에서 이기거나 늑대의 경계선 안에 들어가면 마침내 자신의 곁을 허락하고 꼬리를 흔들어 주었다.
마치 길들여지지 않던 새끼 늑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손바닥에 코를 부볐을 때가 생각났다. 수많은 늑대를 길들였지만 그때의 경험은 언제나 멋졌고 황홀했으며, 지금과 상황이 겹쳐 보였다.
내가 너의 마음에 닿은 거니? 너자의 안면이 부드럽게 풀렸다.
“…….”
날카로우면서도 큰 눈이, 마치 겨울의 깊은 저녁 어스름하게 해가 뜨기 전의 푸르면서도 까만 하늘의 색과 같은 그 눈이 스르륵 접혀 휘어졌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눈 밑의 살이 도톰하게 접혔다. 웃는 모습이 퍽 부드러워 보였다. 작은 얼굴에 퍼지는 미소 밑에 캔디스가 깨물어 댄 목의 울혈 자국이 유난히 돋보였다.
맥켄지의 심장이 불안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노예의 얼굴에 손을 날렸다. 짝, 별안간 내려진 폭력에 노예가 몹시 당황해하며 맞은 뺨에 손을 대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방금만 해도 생기가 넘쳤던 작은 얼굴이 두려움과 서러움에 얼룩졌다. 그 한심한 모습에 맥켄지가 한 번 더 노예를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노예는 감히 반항도 하지 않고 넓은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총명하게 빛나던 까만 눈이 탁하게 흐려지는 모습에 맥켄지는 속 안에서부터 뜨겁게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진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다.
반항 한번 하지 않고,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 쏟아질 폭력을 유순하게 기다리는 노예의 모습에 맥켄지의 맥이 풀렸다. 그래, 노예였다. 천한 노예.
맥켄지가 말했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의 말을 너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것을 안다. 너자는 혼란스러웠다. 먼저 웃어 주었다. 먼저 손을 내밀어 내 눈을 만져 주었다.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런데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작은 머리통을 굴리던 너자가 한 가지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눈은 까맸고, 내 머리카락도 까맸다. 마치 빛이 나는 것 같은 이곳 사람들의 외형과 정반대인 자신의 외형이 기분이 나쁠 수 있었다. 그랬다. 내 얼굴이, 내 외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먼저 있던 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칼을 잡아당겼고 눈이 마주치면 눈을 향해 침을 뱉었다.
너자는 자신의 모습이 저주스러웠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레머의 특강과 심심했던 샬로메의 오지랖 덕에 너자의 어휘력은 빠르게 좋아졌다. 쓰는 것은 잘 하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회화는 가능해졌다. 또 너자의 목에, 몸통에 낙인처럼 찍혀 있던 멍과 울혈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총상은 빠르게 아물어 꿰맸던 실밥도 풀었다. 오늘부터 너자는 정상적으로 맥켄지의 수업에 휘핑보이로 들어갔어야 했다.
너자는 독채 밖의 작은 정원에 주저앉아 잡초를 뽑았다. 독채 안에서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맥켄지와 그레머, 샬로메는 후작 성에 잠시 돌아간 상태였다.
어젯밤 누군가가 독채에 찾아왔었다. 늦은 시간에 예의 없이 독채의 문을 마구 두드리는 누군가에 맥켄지의 수업 준비를 하던 그레머가 짜증을 내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색이 된 얼굴로 독채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서 장부 정리를 하던 맥켄지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맥켄지의 아름다운 얼굴이 귀찮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런 맥켄지에게 그레머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얼른 떠날 채비를 하겠다며 말했고 마지못해 허락한 맥켄지에 그레머는 작은 반둘리에에 짐을 챙겼다.
바닥에 누워 회화책을 읽고 쓰고 있던 너자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너무 빠르게 말한 터라 너자는 그레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샬로메에게 물어볼까? 싶어 샬로메를 바라보니 마찬가지로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너자가 바닥에서 일어나 샬로메와 맥켄지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샬로메가 너자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련님과 그레머, 그리고 나는 잠시 후작 성에 다녀올 거야.
-후작 성?
-후작 성. 아, 그… 집. 집에 다녀올 거야.
집에 다녀온다는 샬로메의 말에 너자가 물었다.
-왜?
-그놈의 장부가….
-…?
-그 중요한 걸 어쩌다….
장부는 아마 맥켄지가 항상 저녁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숫자를 적는 그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거는 여기에 있는데? 너자가 샬로메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이자 샬로메가 너자에게 말했다.
-아, 그런 게 있어. 이게 좀 중요한 거라, 지금 우리는 가 봐야 해. 너는 여기에서 남아 있어.
-나만?
-어. 집 지키고 있어.
-응.
-빨리 올게.
샬로메의 말에 너자의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왠지 기분이 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너자를 보며 샬로메가 말했다.
-아마 나흘쯤 걸릴 거야.
-응. 다녀와.
근래에 꽤 살가워진 그레머와 샬로메였다. 친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걸면 답해 주었고 눈이 마주치면 화를 내지 않고 되레 왜 그러냐며 물어왔다. 처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결과였다. 그레머는 너자를 보면 항상 화내기 일쑤였고 샬로메는 너자를 아는 체도 하지 않았었다. 그들에게 말을 배우며 일정 시간 항상 붙어 있으니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맥켄지와의 관계는 더욱 나빠져 갔다. 맥켄지는 그날 이후로 노예가 보이지 않는 양 행동했고 너자는 그런 맥켄지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숨도 조심히 쉬고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했다. 너자는 혹여 눈이 마주칠까, 아니 자신의 존재가 맥켄지에게 불쾌감을 줄까 전전긍긍했다.
너자는 맥켄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허리 아파….”
너자는 잡초를 뽑느라 장시간 숙인 탓에 쑤셔 오는 허리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심심했는지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쓱쓱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레머
-ㅅ ㅏ로매 샤 사 ㄹ 샬로메
-맥ㅋ
마지막으로 맥켄지의 이름을 쓰려던 너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개… 케… 게… 캔… 뭐였더라.
“뭐지….”
제일 중요한 이름을 까먹었다.
-맥 ㄱ ㅐ지
아, 비슷한데…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뭔가 이상했다. 너자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쥐었다 풀었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웃음기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개지가 뭐야, 개가 아니라 켄.”
“…….”
“‘ㄱ’에 획 하나를 더 긋고 밑에 ‘ㄴ’을 붙여야지.”
너자가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그때의 강렬한 기억이 너자의 몸을 잠식했다. 엉덩이 사이에 침을 뱉으며 안 들어가는 것을 억지로 들이밀었다. 너무 아파서 울며불며 그만둬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도망가려는 몸을 뒤집어 발목을 한 손에 쥐어 끌어냈다. 가만히 있으라며 아팠던 상처를 헤집으며 쑤셔댔다.
너자의 몸이 두려움에 발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너자의 모습을 보며 캔디스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너자의 앞에 쭈그려 앉아 너자의 귓바퀴를 야릇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사향노루 냄새가, 진하게 났다.
콧속에 맡아지는 사향노루 특유의 관능적인 냄새에, 그 속에서 미약하게 맡아지는 분꽃 냄새에 너자의 머리가 아득해졌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너자는 자신의 귀를 끈적하게 쓰다듬는 남자의 손에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캔디스의 손가락이 한층 더 대담해졌다. 뼈가 불거진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너자의 목덜미를 쓸었다. 그에 너자가 눈을 꽉 감고 몸을 움츠렸다. 처음 이놈에게 만져졌을 때 맥켄지가 명령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두 번째로 놈에게 강간당할 때도 맥켄지가 명령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두 번이나 명령했던 맥켄지의 말은 너자를 옭아매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무력하게 만져지고 있는 노예에 캔디스가 짜릿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유순한 노예의 모습이 그의 속 무언가를 계속 긁어댔다. 그래, 이 노예였다. 노예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혔고 그의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만져 보고 싶었고 그토록 한 번 보고 싶었다. 한 달 전 노예를 보러 갔던 때 이후로 처음 보는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의 가슴이 떨렸다. 거래하겠다며 노예를 담보로 내놓으라고 도노반의 독채에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노반은 상도덕을 지키지 않는 파트너는 필요 없다며 축객령을 내렸고, 그놈의 명을 받은 호위기사가 눈에 불을 켜며 독채를 배회하는 탓에 노예에게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도덕이 없는 건 도노반이었다. 어떤 기업 간이라도 이렇게 구두로 계약을 파기하는 법은 없었다. 적어도 서면으로 먼저 통보를 하고 조율을 하는 게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방법인데 이놈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했다. 물론 완전히 파기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이 계약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쇼일 것임이 분명했다.
근본이 없는 집안의 차남 새끼가 뭘 알까 싶었지만 그래도 캔디스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아쉬울 놈은 도노반 놈인데 이상하게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은 스와포네의 명예에 걸맞지 않은 대우였다.
맥켄지의 도발에 캔디스의 얄팍한 인내심이 끊어졌다. 그는 가문의 가훈을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와포네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한다. 감히 자신에게 시비를 건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지만 평소 성격대로 총을 쏴대며 분풀이를 한다면 스와포네 가문과 도노반 가문의 동맹 사업이 어그러질 것이며 가문의 이익이 반 토막이 나고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캔디스는 끓는점이 낮았지만 머저리는 아니었다.
캔디스는 어떻게 해야 도노반과 노예를 떨어뜨릴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 이틀에 한 번꼴로 도노반 후작 성에서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가장부와 계산서를 보내고 그것을 받은 도노반이 이틀 뒤 정리한 장부를 보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장부는 기업체의 심장이었고 그 장부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도노반도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캔디스는 즉시 비아에게 은밀하게 쓸 만한 용병을 구하고 집안의 기사를 하나 데려와 도노반이 쓴 장부를 실은 도노반 가문의 마차를 전복시키든, 불에 태우든 해서 어떻게든 장부를 없애라고 명령했다.
마부를 죽이면 일이 커질 여지가 많았다. 또 마부는 살아서 도노반에게 가 사고를 전해야 했다. 만약 마부까지 죽어 버린다면 감히 도노반 가문의 장부를 노린 역적을 찾으러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다 내린 계획은 고용한 용병이 ‘불의의 사고’를 일으켜 마차에 불을 지르든 마차를 전복시키든 장부에 손상을 입힌다. 그리고 용병을 미행하던 스와포네 가문의 기사가 그 용병을 죽여 입을 막는다, 라는 계획이었다.
분명 화가 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를 거다. 캔디스가 확신했다.
왜냐하면 캔디스 자신도 도노반처럼 이틀에 한 번꼴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꼴로 가장부와 계획서를 가문에서 받아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우며 그것을 정리해서 다시 보냈으니까. 그 좆같은 일을 두 번이나 한다니, 실속을 따지는 도노반 놈에게는 못 견딜 시간임이 분명했다.
이틀간의 고생이 날아간 것을 알게 되면 도노반이 얼마나 열 받아할까! 좆같은 놈, 엿 먹어 보라지. 캔디스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신을 찾으며 까무룩 뒤로 넘어갈 것이었다.
도노반은 날아간 장부를 다시 메꿔야 하니 직접 가문으로 가 장부를 다시 정리하고 올 것이었다. 아마, 나흘쯤 걸리지 않을까 싶었다.
사탄마저 ‘아, 저건 좀…’ 할 것 같은 짓을 한 캔디스가 음침하게 웃으며 떨고 있는 노예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 떨어?”
한없이 강해 보이는 노예가 두려움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은 수컷의 만족감을 채워 줬다. 경계심이 풀려 흐물흐물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 눈이 너무 보고 싶었는데, 겁에 질린 이 모습도 좋다 싶었다.
작고 섬세한 얼굴이 두려움에 창백해져 숨만 꼴딱꼴딱 쉬는 모습에 캔디스의 아랫배가 당겨 왔다. 캔디스는 노예가 자신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우리 종족은 야만인의 세계를 지배했고 자신은 노예의 몸을 지배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처음을 뚫어 버린 사람을 잊지 못하는 법이었다.
캔디스의 손끝이 너자의 목덜미를 가린 셔츠 중 제일 윗단추를 풀어냈다. 힘없이 벌어진 옷자락 안에 있는 목덜미는 강인해 보였다. 자신이 새긴 울혈이 다 없어져 있었다. 아쉽네, 열심히 물어서 만든 거였었는데.
이걸 어떻게 씹어서 먹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던 그가 문득 노예가 쓰던 글자를 보고 툭하고 물었다.
“너, 내 이름은 알아?”
그의 물음에 너자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몰라.”
“…어?”
서툰 제국어를 내뱉는 노예의 낮은 목소리에 캔디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처음이었다. 노예는 항상 캔디스의 말을 무시했고 그가 노예에게 들은 말은 싫다, 하지 마 정도뿐이었다.
캔디스는 자신의 말에 처음으로 답한 노예를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휘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장난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캔디스가 노예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캔디스.”
“…….”
“캔디스 스와포네.”
너자는 뜬금없이 통성명하는 캔디스를 경계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그레머와 샬로메에게 회화를 배우며 든 버릇이었다.
“달콤한 거?”
“…….”
먹어 본 적은 없는데 맥켄지가 먹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맥켄지는 저녁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어디에선가 가져오는 숫자가 적힌 종이를 보며 장부라는 것에 숫자를 써 댔다. 그러다 맥켄지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면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레머가 상의 안에 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엄지손톱만 한 무언가를 꺼내 그의 입에 물려 주고는 했다. 맥켄지는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먹었다.
그것을 입에 문 맥켄지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다. 너자는 그런 맥켄지의 모습에 그레머가 먹이는 동그랗고 매끄러운 것이 궁금해 순찰을 마치고 온 샬로메에게 물어봤었다.
그레머가 도련님을 괴롭힌다고. 대체 저게 뭐냐고.
그리고 샬로메는 너자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해 주었다. 도련님이 받아먹은 손톱 같은 것은 ‘사탕candy’라는 달콤한 것이고 그레머는 도련님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거라고, 사람은 힘들면 단것을 먹어야 힘이 나는데 그레머가 먹이는 것이 그 단것이라고. 다만 도련님이 단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저러시는 거라고 했다.
약간 모르는 말이 섞이기는 했지만 대충 이해한 너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은 달콤한 것이구나. 그런데 저 미친놈의 이름이 달콤한 것이라고 한다. 이름을 잘못 지은 듯했다.
너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혀 달콤하지 않은데, 너는.”
“뭐?”
캔디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런 캔디스의 표정을 본 너자가 잘생긴 눈썹을 찌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겁먹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너자에 캔디스가 눈을 깜빡였다. 이상했다. 지금껏 자신의 말을 무시로 일관했던 노예가 갑자기 말이 트인 것도 이상했고 무례하게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도 이상했다.
누구도 캔디스에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기분 나쁜 것 같으면서도 왠지 웃겼다. 캔디스가 꾸밈없이 진심으로 웃었다.
그가 말했다.
“이상한 새끼.”
“…….”
네가 더 이상하다. 나한테 이상한 짓이나 하고.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 너자가 예의 그 경계 어린 눈빛으로 캔디스를 쏘아봤지만 캔디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너는?”
“…?”
너자가 저도 모르게 얼치기 같은 소리를 내 버렸다. 자신이 들은 말이, 자신이 이해한 말이 맞나 싶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같이 살고 있는 그레머와 샬로메도 물어보지 않은걸 그가 물어봤다.
캔디스는 답하지 않고 눈만 깜빡거리는 너자에게 다시 물었다.
“네 이름은 뭔데?”
“…….”
“노예지만 너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너 이름 없어?”
여전히 답하지 않는 너자에게 캔디스가 쪼그려 앉은 채로 손을 턱에 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도노반 그놈도 너한테 노예, 노예 거렸지.”
“…….”
“뭐야… 진짜 없나 보네.”
도노반네는 노예한테 이름 하나 안 지어 주나 보다. 툭하니 내뱉는 캔디스의 말에 너자의 표정이 복잡하게 물들어 갔다. 그런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가 없으면 됐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가 작게 말했다.
“너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말하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캔디스는 너자의 이름을 혀 안에서 굴려 보았다. 뭔가 이질적인 음절의 희한한 이름이었다.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네 이름이 더 이상해.”
너자는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뒤로 뺐다. 목덜미를 쓰다듬던 손이 떨어졌다. 의외로 캔디스는 너자에게 더 붙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지 않는 캔디스에 너자가 엉덩이를 슬금슬금 뺐다.
캔디스가 그런 너자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물었다.
“도노반 녀석 오늘 수업에 안 나왔던데.”
“…….”
“어디 갔나 봐?”
캔디스가 모르는 척 너자를 떠봤다. 너자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응. 집에 갔다.”
반 토막이 난 너자의 말이 거슬릴 법도 한데 캔디스는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재수 없는 도노반에게 엿을 처먹였다. 분명 후작 성으로 돌아가는 도노반은 두 배로 불어난 일감을 생각하며 뒷목을 잡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화가 나 뒤로 넘어간 도노반을 상상하니 캔디스는 바닥을 구르며 웃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노예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왔다. 그렇게 신경질을 부렸지만 결국은 이렇게 방치해 놓고 갔다. 그렇게 아끼는 거였으면 가져갔었어야지. 나였으면 꽁꽁 감춰 놨을 것이다. 하긴, 차남 새끼가 그럼 그렇지.
캔디스는 매우 유쾌했다. 이제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을 할 시간이었다. 캔디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노예를 들쑤셨다.
“그런데 너는 왜 안 가져간 거야?”
“…….”
“필요 없어서?”
캔디스의 말에 너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너자가 아무 말 없이 땅만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이러다 도노반이 안 오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
“이베아에서 주인이 없어진 노예는 가축에 불과하지. 그래서 아예 죽여 버려 처분하거나….”
너자의 표정이 한없이 굳어지자 캔디스가 환하게 웃으며 너자의 뺨을 검지의 손등으로 쓱, 훑으며 말했다.
“새로운 주인을 맞거나.”
“…….”
“하지만 새로운 주인을 맞는 건 어려운 일이야. 노예를 살 수 있는 권력이 있는데 뭐하러 남이 쓰다 버린 걸 주워 가겠어? 내 생각에 너는 ‘처분’될 듯싶은데.”
캔디스가 멍청이처럼 눈만 깜빡거리는 너자를 보며 해맑게 말했다.
“도노반은 실득을 따지는 놈이라, 필요 없어진 것은 바로 버려 버리지. 아마… 그놈은 나한테 원하는 걸 다 착즙해 먹으면 필요 없어진 너를 처분할 거야.”
너자는 캔디스의 말에 멍하니 생각했다. 그럴 법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맥켄지는 냉정했고, 자신을 싫어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치며 뺨을 올려대는 주인인데 그러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또 야만인 노예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게 분명하니, 아마 죽겠지 난.
도망친다는 방법은 아예 생각지도 못한 너자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너자의 이지를 앗아갔다.
그런 너자를 보며 캔디스가 고개를 숙여 노예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
“…….”
“도노반의 성노가 되는 거야. 도노반도 남자인데 성욕이 없을 리 없지. 너는 남자니 임신 가능성도 없잖아? 너의 쓸모를 몸으로 구걸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리고 맥켄지 자체도 자신을 혐오했는데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너 재능 있어. 내가 너 따먹어 봐서 알잖아.”
“…….”
“분명, 도노반이 좋아할 거야.”
너자가 거부감에 싫다고 말을 하려고 할 때 캔디스가 다시 속삭였다.
“나랑, 연습하자. 내가 너 버림 안 받게 해 줄게.”
캔디스가 정신이 빠져 버린 노예를 보고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뒷덜미를 그 큰 손으로 쥐어 주저앉은 노예를 일으켰다. 너자는 자신을 위로 올리는 캔디스의 손길에 순순히 일어나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그는 노예를 끌고 맥켄지의 독채 안으로 들어가 침실로 향했다.
“…….”
캔디스는 너자를 침대에 던지는 대신 그의 뒷덜미를 잡은 손을 풀었다. 그리고 맥켄지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멀거니 서 있는 너자에게 그가 말했다.
“벗어.”
“…….”
“뭐해? 하기 싫어?”
어서 안 벗고 뭐하냐는 듯 그가 물으니 너자가 머뭇거렸다. 그한테 버림받기 싫다. 그런데 쟤랑 그… 그 짓을 하기는 싫었다. 도저히 손이 안 움직였다.
캔디스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멍청하게 서 있는 너자를 보며 픽 웃었다. 또 튕기네 저게. 캔디스가 손바닥을 천천히 쥐었다가 폈다. 사실 이렇게 참고 있는 것도 용했다 캔디스의 자지는 노예를 데리고 맥켄지의 침실에 왔을 때부터 팽팽하게 발기돼 있었다.
당장에라도 노예의 머리채를 쥐어 잡아 침대 안으로 처박고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내 박아 버리고 싶었다. 분명 싫어하겠지, 무서워서 엉엉 울 거야. 그만해 달라고 빌겠지, 그러다 계속되는 씹질에 얼굴이 게게 풀려 침대를 구르겠지.
그는 드물게 인내했다. 협상할 때는 상대방을 안달 나게 해야 했고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갖고 있어야 했다. 캔디스는 발기하다 못해 저리는 기분을 차라리 즐겼다.
캔디스가 옷자락을 쥐고만 있는 너자를 보며 일부러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한심하다는 것 같은 한숨 소리에 너자의 입술이 움찔였다. 캔디스가 말했다.
“못 하겠어?”
“…못 하겠어.”
쥐어짜듯 답하는 너자에게 캔디스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며 일어났다.
“그럼 됐어.”
“…!”
너무도 쉽게 물러가는 캔디스에 놀란 것은 되레 너자였다. 됐다는 말이, 안 한다는 건가? 그럼 나는? 나는….
“싫으면 됐어. 나는 아쉬운 거 없으니까. 다만….”
“…….”
“네가 죽는 건 좀 안타깝네. 너 꽤 맛있었거든. 그리고 일거양득 아니야? 너는 살고, 그 새끼는 임신 걱정 없이 싸고, 나는 재능 기부하면서 싸고.”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캔디스지만 받아들이는 너자는 그게 아니었다.
캔디스가 안 가르쳐 주면… 나는 어떻게 하지?
너자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코만치가 있던 땅은 화이트들이 점령을 했겠지. 그곳에 돌아간다 한들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화이트의 전사들에게 바로 살해당할 것이다.
도망을 치는 것도 무리였다. 사방에 화이트들이 있었다. 딱 봐도 까맣고 큰 자신은 어느 곳으로 도망을 가든 이질감이 들 것이고 금방 잡히거나 그 자리에서 죽을 게 분명했다.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총에 맞아 죽어 버릴 것이다.
또 새로운 곳에 가 봤자 또 맞을 거다.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 지냈던 곳처럼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침을 뱉고 돌로 머리를 찍을 거다. 또 머리가 터져 죽은 사냥꾼 같은 화이트가 있을 리 없다는 보장도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강간하고 죽일 거다. 죽기 싫었다. 버림받기 싫었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 외로웠다. 여기에 있으면, 적어도 그가 원치 않으면 그런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드물지만 그가 자신을 보며 웃어 주었다. 그 예쁘고 하얀 손가락이 펜을 쥐어 숫자를 써 내려가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총은 무서웠지만, 당장에라도 그 애의 손에 있는 총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그 애가 총을 쥐고 집중하는 모습이, 그 애의 나른한 얼굴이 순식간에 집중해 목표물을 정확히 쏴 맞히는 게 너무… 너무 멋있었다.
너자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질려 버렸다. 캔디스는 저 작은 머리통이 하는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캔디스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
“할 거야, 말 거야?”
미련 없다는 듯 말하는 캔디스에 너자의 속이 까맣게 타 버렸다.
너자의 코가 빨개졌다. 그의 작은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그 모습이 꼭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너자의 커다란 양손이 우스꽝스럽게 떨리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하….”
시팔, 존나… 캔디스가 얼굴이 새빨개져 울음을 참는 너자의 모습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건 진짜 좆같았다. 자신은 원래 싫어하는 애를 따먹는 취향이 아니었다. 모든 영애와 영식이 자신을 원했다. 자신은 간식을 고르듯 더 발랑 까진 것을 선택해 상대와 서로 즐기며 이런저런 체위를 즐기는 불꽃 같은 섹스를 선호했다.
저렇게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 흥이 식어야 하는데, 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더 싫어했으면 좋겠다. 엉엉 울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소리를 질렀으면 좋겠다. 너무 아파 정신이 나가 버려서 내 가슴을 퍽퍽 치며 제발 빼 달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걸 보고 싶다. 정신을 빼면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폭력성에 캔디스가 이를 악물고 참았다.
너자가 마침내 셔츠의 단추를 다 풀어냈고 어깨에 걸려 있는 셔츠를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까만 셔츠 안에 꽁꽁 감춰져 있던 하얗고 두툼한 상체가 드러났다.
캔디스가 완전히 드러난 너자의 하얗고 두툼한 가슴을, 넓고 두꺼운 어깨를, 그림처럼 잘 짜인 복근을, 바지 밑위 바로 위에 걸쳐져 있는 장골을 보며 넋을 잃었다. 숲속에서는 워낙 너자의 몸이 피투성이에 멍투성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노예를 처음 봤을 때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과 같았다. 역시, 드뷔시 상이었다. 그는 얼이 빠졌지만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배웠던 후계자 수업 덕분이었다. 캔디스는 고른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안면 근육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밑에도 벗어야지.”
“…밑에는….”
주저하는 너자의 목소리에 캔디스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렸다. 그리고 정말 미련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을 잡고 나가 버리려고 했다.
“…….”
“…미안….”
캔디스는 자신의 옷자락이 당겨지는 느낌에 정말 즐겁다는 듯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노예가 뒤에 있어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 게.
그가 재빠르게 표정을 꾸며내며 뒤돌았다. 귀찮아 보이기까지 한 그의 표정에 너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해. 가지 마.”
“…누가….”
속삭이듯 말하는 캔디스에 너자가 잘생긴 눈썹을 밑으로 늘어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진한 표정에, 안달이 난 노예의 표정에 결국.
“누가 반말하래, 새끼야.”
“…앗…!”
노예의 짧은 머리채를 잡고 맥켄지의 침대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강한 힘으로 밀쳐져 침대에 엎어진 너자가 깜짝 놀라며 엎어진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캔디스가 그의 등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침대 위에 고이 올려진 베개를 잡아 노예의 뒤통수에 대고 강하게 눌렀다.
너자는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안 그래도 침대 위에 얼굴이 정면으로 처박혀 코가 눌려 호흡이 잘 되지 않았는데 뒤통수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눌러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위에서 내리누르는 탓에 소용이 없었다.
숨이 막혀 아득해지는 정신에 너자의 발버둥이 조금씩 잦아들 때쯤에 캔디스가 내리누르던 베개를 옆으로 집어 던지며 너자의 머리채를 잡아 위로 끌어올 리며 말했다.
“일어나~”
“…헉…!”
마치 그때 같았다. 사냥꾼에게 강간당할 뻔하고 기절했을 때, 콧속에 들이마셔지는 물의 느낌에, 폐에 들어차는 물의 존재에 뇌가 아득해졌을 때,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차가운 물 속에서 있었고 그놈이, 캔디스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헉… 허……. 너자의 입에서 밭은 숨이 내뱉어졌다. 마치 물에 빠진 듯 너자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나오기 시작했다. 엎드려진 그의 맨 등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가녀린 모습에 캔디스가 깔깔 웃으며 뒤돌린 너자의 어깨를 함부로 잡아 돌렸다. 휙, 하고 돌려진 너자의 몸이 캔디스의 다리에 닿았다. 두려움에 질려 정신이 나가 버린 노예를 본 캔디스는 더는 참지 않았다.
캔디스가 너자의 통나무 같은 허리에 올라타 너자의 양 손목을 거칠게 쥐어 잡았다. 자신보다 더 굵은 손목이었다. 캔디스가 손에 느껴지는 남자다운 손목에 픽 웃었다. 다 부질없었다.
그가 노예의 양 손목을 터뜨릴 듯 억세게 쥐자 밑에 깔린 너자가 아픔에 신음을 흘렸다. 그는 기사는 아니었지만, 대귀족 스와포네 공작 가문의 하나뿐인 영식이었다.
맥켄지가 어렸을 때부터 토하도록 총을 쥐고 총을 쏘고 총을 분해했다면 그는 검을 쥐었었다. 대귀족의 소양은 검술도 수준급이어야 해서 어렸을 때부터 토 나오게 검을 쥐고 휘두르고 달리고 닦았다. 그런 덕에 당장에라도 기사단에 입단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비아보다 나았다.
다만 그가 그 이상을 정진하지 않는 이유는 기사단에 있는 놈들 대부분 야리야리하지도 않거니와 땀 냄새로 위생 상태가 불결했기 때문이었다. 캔디스는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안에서 폭발할 듯 엉켜 있던 욕망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그가 노예에게 말했다.
“새끼야, 내가 도와준다잖아. 그런데 왜 튕기는데.”
“…튀, 튕긴 적 없… 아!”
그렇지 않다며 부정하는 노예의 허벅지를 캔디스가 무릎으로 꽉 눌렀다. 아찔한 고통에 너자가 소리를 지르자 그가 윽박질렀다.
“누가 반말하래, 노예 새끼가.”
“…….”
아직 너자는 반말과 존댓말을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너자는 캔디스가 하는 말을 반은 알아듣고 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혼란스러웠다.
아까는 그렇게 도와준다고 친절하게… 친절하게 말해 줬으면서. 나를 걱정해 줬으면서, 내…….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서, 왜 이렇게 무섭게 하는 거야?
너자는 캔디스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자가 혼란스러움과 서러움에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려 버렸다. 그 맹랑한 모습에 캔디스가 윽박질렀다.
“시팔 또 튕기네! 내가 또 봐줄 줄 알아?”
“…….”
“내가….”
감히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튕기는 노예의 뺨을 망설임 없이 갈기려고 했으나 캔디스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어, 쳐야 하는데. 하고 생각한 캔디스가 자신의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것을 자각했다.
잔뜩 독이 올라 토라진 노예의 행동이, 상처 받은 듯 울먹이는 노예의 눈에 캔디스의 심장이 터질 듯 울렁거렸다. 캔디스가 멍하니 생각했다.
…부정맥이 왔나?
캔디스의 인생 중 이렇게 가슴이 미친 듯이 뛴 적은 없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 심장에 캔디스는 섹스가 끝난 후 의무실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와포네의 대를 자신이 끊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입맛에 천천히 맞추며 즐기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일단 한 발 빼고 시작해야겠다.
캔디스가 속박하고 있던 양손을 풀어 너자의 가슴에 올라탔다. 그리고 재빠르게 자신의 바지춤을 풀고 자지를 꺼내 아직 고개를 돌리고 있는 너자의 양 볼을 한 손에 잡아 돌렸다.
“……!”
너자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흉악한 것에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캔디스는 노예가 자신을 바라보며 자지를 빨아 주기를 원했다. 그가 이미 발기한 제 자지를 잡고 노예의 입가에 툭툭 치며 말했다.
“연습 안 할 거야?”
“…….”
“도노반 그 자식 못 하면 싫어할걸? 그냥 죽고 싶어?”
캔디스의 너스레에 너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앙다물린 너자의 작은 입이 조금씩 열렸다. 벌어진 입 구멍에 의외로 치열이 고른 앞니가 드러났고 어두침침한 동굴 안에는 새빨간 혀가 조신하게 있었다. 캔디스는 참지 않고 이미 발기해서 쿠퍼액을 뚝뚝 흘리는 자지를 너자의 입안에 처넣었다.
웩! 엑! 순식간에 치고 들어오는 뜨겁고 굵은 자지에 너자가 헛구역질을 했다. 캔디스는 헛구역질을 해대는 너자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더, 더 싫어했으면 좋겠다. 그는 참지 않고 샅과 너자의 코가 닿을 때까지 거칠게 밀어 넣었다.
“하….”
그의 입에서 단 숨이 내뱉어졌다. 마치 구멍에 넣은 것 같았다. 식도가 함부로 침입한 침입자를 밀어내기 위해 헛구역질을 해댔다. 덕분에 목구멍이 사정없이 조였고 역류한 침 덕분에 뭉근뭉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너자가 몹시 괴로워했으나 그것은 캔디스가 알 바 아녔다.
캔디스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너자의 머리통을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마치 씹질을 하듯 허리를 쾅쾅 올려 붙었다.
자신을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행위에 너자는 정말 죽을 것 같아 눈을 뒤집어 깠다. 너자의 입에서, 코에서, 눈에서 눈물과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숨을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었다.
힉힉거리며 넘어가기 일보 직전일 때 캔디스가 적선을 하듯 자지를 빼냈다. 그리고 너자의 가슴에서 일어나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기침을 해대는 너자에게 윽박질렀다.
“일어나.”
“콜록, 콜… 흑… 웩….”
“빨리 안 와?”
강압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캔디스에 너자가 일어나 캔디스의 앞으로 기어갔다. 반쯤 맛이 간 노예의 상태에 만족한 캔디스가 다리를 벌리며 말했다.
“네가 빨아 봐.”
“…내가?”
또 반 토막이 난 노예의 말에 캔디스가 트집을 잡을까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얼른 한 번 싸고 싶었고 시간은 많았기 때문이었다. 캔디스가 귀찮다는 듯 너자의 머리통을 한 번 갈긴 뒤 다시 강압적으로 말했다.
“말 안 들을래? 나 그냥 간다?”
“…….”
강압적인 캔디스의 말투에 너자가 서러워져 훌쩍였다. 코끝이 빨개지며 윽윽거리는 노예의 모습에 조금 진정됐던 캔디스의 심장이 다시 미칠 듯이 뛰어댔다. 시팔, 안 되는데. 복상사로 뒈진다면 행복하겠지만 부정맥으로 뒈지는 건 싫었다. 캔디스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한 손으로 꾸욱 누르며 다시 윽박질렀다.
“꾸물거릴래?”
“…미안해….”
정말 가 버릴 듯 엉덩이를 드는 캔디스의 모습에 너자가 무릎걸음으로 그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캔디스의 흉포한 자지를 쥐어 잡았다. 펄떡펄떡 맥이 치는 그 뜨거운 것에 너자가 기겁을 했다. 그러다 ‘나 간다?’ 하며 너자를 밀어내는 캔디스에 눈을 꽉 감고 그의 자지를 앙물었다.
“…하….”
뜨거운 입에 들어간 자지가 노예가 내쉬는 숨에 오싹해졌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그저 물고만 있는 너자의 모습에 캔디스가 말했다.
“평생 그러고만 있을래?”
“…어으해….”
자지를 물고 우물거리는 탓에 아찔한 자극이 온 캔디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다 정말 미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머가…?”
“시팔 나 말려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캔디스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짓이기며 하는 말에 너자가 눈을 치켜뜨며 멍청하니 캔디스를 바라보았다. 창놈처럼 입에 자지를 물고 순진한 처녀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 캔디스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얼른 끝내야 했다. 캔디스는 맘 같아서는 노예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며 제대로 하라며 교육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혀로… 혀로 빨아.”
그의 명령에 너자가 눈을 유순하게 내리깔고 캔디스의 자지를 쪽쪽 빨았다. 마치 젖을 빨듯 빨아대는 너자의 혀에, 캔디스는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
너자의 입에서 빨리고 있는 제 자지를 거칠게 빼내 그를 밀었다. 강한 힘에 밀쳐진 탓에 침대에 눕혀진 너자의 다리 사이에 캔디스가 파고든 뒤 엉덩이를 위로 올렸다. 거의 너자를 접다시피 한 캔디스가 적나라하게 보이는 구멍에 침을 뱉었다.
“흐…!”
말 못 할 곳에 뱉어진 침의 느낌에 너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너자의 심장이 두려움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겨우 잊고 있던 그 고통의 기억이 해일처럼 너자를 덮쳤다. 노예의 엉덩이 밑 허벅다리를 내리누르고 있던 캔디스의 양손에 떨림이 전해졌다. 그 가녀린 떨림에, 캔디스가 도취된 듯 웃으며 자지를 밀어 넣었다.
악! 아아! 밑에서 너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른 열려야 하는데, 얼른 열려야 자지를 집어넣는데… 꾹 달린 구멍에 캔디스의 애가 타기 시작했다. 끝 부분도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풀어 줘야 하나 싶었지만 노예 따위에게 그런 수고로운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놈이었다.
캔디스가 한숨을 쉬며 생선처럼 퍼덕거리는 노예의 배를 눌렀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뚫었다.
막무가내로 파고들어 오는 자지가 기어코 너자의 구멍을 찢었다. 억지로 귀두를 집어넣는 것에 성공한 캔디스가 말라가는 입술에 혀를 내밀어 축이고 숨을 합, 하고 쉬었다.
“힘 빼.”
억지로 반쯤 넣는 것에 성공한 캔디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자는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자지에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입만 벌린 채 꺽꺽거리는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의 정신이 나가 버렸다.
별거 없었다. 캔디스는 노예의 허리를 잡고 미친 듯이 씹질을 했고 노예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노예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밤하늘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노예의 날카로운 눈이 흐리멍텅하게 풀려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프다며 죽을 것같이 소리를 질러대던 입이 숨을 간신히 뱉어냈다. 그 가련한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는 막무가내로 허리 짓을 했다. 상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섹스는 폭력이었다. 씹질을 하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꽉꽉 물기만 했던 구멍이 조금 풀어졌다.
엥 뭐지, 하고 시선을 내리니 노예의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자지에 피가 비친 게 보였다. 잘됐다. 피 덕에 수월해진 씹질에 캔디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캔디스는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도노반의 침대에서 그놈의 허락 없이 그놈의 것을 따먹는다, 이 얼마나 짜릿한가!
덤으로 노예의 구멍은 미칠 듯이 황홀했다. 인형처럼 흔들리는 몸은 눈요깃거리가 되었고, 물에 빠진 사람처럼 시퍼렇게 질려서 숨만 뱉어내는 노예의 얼굴도 마음에 들었다.
캔디스는, 너무 즐거웠다.
너자는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환했던 침실은 까매져 있었다. 저녁이 된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하며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런데 도무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천장이 흔들렸다. …아.
초점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내가 흔들리고 있구나.
그 사실을 인지하니 미처 느끼지 못했던 통각이 느껴졌다. 다행일까, 처음 했을 때만큼 아프지 않았다. 역치값을 넘겨 버린 너자의 몸은 고통을 느끼기를 거부했다.
“시팔, 이 구멍 뭔데.”
“…….”
“어디에서 이딴 게 굴러들어와서는,”
너자는 시선 끝에 걸리는 남자의 짙은 금발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저 색이 아니다. 좀 더 환하고 우아하고… 금사 같은 머리카락이었으면 좋겠다.
그 애랑도 이런 걸 해야 하는 걸까?
캔디스가 나를 싫어하면서 내 몸을 좋아하듯, 맥켄지도 내 몸을 좋아해 줄까? 하지만 그가 이런 짓을 하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너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아프게 하는 캔디스를 보고 까무룩 눈을 감았다.
캔디스는 옆에서 쌕쌕거리며 잠든 노예의 뺨을 툭툭 쳤다. 그만 일어나. 일해야지. 툭 하고 내뱉어진 그의 목소리에 노예가 악몽을 꾸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마치 앙탈을 부리듯 고개를 흔드는 노예의 모습에 캔디스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새끼야, 일어나라고.”
“…으…….”
이미 사흘 동안 노예를 탐했지만 아직 부족했다. 부정맥이 심해지기 전에 한 번 더 하고 싶었다. 캔디스는 침대 옆 탁상에 리먼이 가져다 놓은 찬물을 한 번에 들이켜고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구겨진 노예의 발목을 한 손에 쥐어 잡았다.
한 손에 잡은 노예의 발목은 시커멓게 부어 있었다. 사흘 동안 함부로 쥐고 발버둥을 치는 발목을 발로 밟은 탓이었다. 캔디스의 억센 손이 노예의 발목을 잡고 밑으로 끌어내리자 노예가 헉, 하며 눈을 떴다.
하도 울어 새빨개지고 퉁퉁 부은 눈꺼풀이 웃겼다. 하지만 그 밑에 있는 까만 눈은 여전히 예뻤다. 물기 때문에 촉촉해진 노예의 눈이 캔디스를 자극했다. 자지에 또다시 힘이 들어갔다. 기절했다가 눈을 뜬 너자가 흉흉하게 발기한 캔디스의 자지에 기겁하며 몸부림을 쳤다.
너자의 몸부림에 캔디스가 체위를 바꿔 볼까 싶어 몸부림을 쳐대는 노예의 발목을 놨다. 노예는 자신의 발목이 자유로워지자 몸을 굴러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쿵! 하고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무릎 깨진 거 아니야? 캔디스가 자지를 훑으며 노예를 따라갔다. 너자는 자위를 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캔디스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 오지 마세요….”
너자는 캔디스와 함께한 사흘 동안 존댓말을 배웠다. ‘하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못 해요’, ‘살려 주세요’, ‘이러지 마세요.’ 너자는 애원하는 말은 모조리 배웠다.
너자의 잔뜩 떨리는 애원을 들으며 캔디스가 경쾌하게 말했다.
“싫은데?”
캔디스의 억센 손이 노예의 손목을 쥐어 잡고 끌었다. 캔디스는 노예를 침대 끝에 상체만 닿게 한 채 엎드리게 했다.
엎드려 있는 노예의 상처투성이인 하얀 몸에 손자국과 멍 자국이 가득했다. 목덜미에 잇자국도 박아 버리고 싶었는데 도노반에게 걸리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꾹 참았다. 하지만…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캔디스가 짧은 고민 후에 노예의 엎드린 상체를 내리누르며 오른손으로 노예의 얼굴을 한 번에 감싸 왼쪽으로 획 꺾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갖다 댔다.
자… 자국 안 돼요! 노예가 새된 비명을 질렀으나 캔디스는 그 비명 때문에 더 흥분했다. 너자가 꽉 물리는 목덜미에 눈을 꽉 감았다. 마치 짐승이 물어뜯는 것 같았다. 얇은 가죽을 고기 뜯듯 물어대는 캔디스의 이가 피를 낼 것 같았다.
욱신거리며 아려오는 피부에 기겁을 할 때쯤에 그곳에 뜨거운 숨이 내리 앉았다. 통증이 일어나는 곳에 그 야릇한 숨이 내려앉자 몹시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너자가 감았던 눈을 떠 어깨를 움츠리려 했으나 어느새 캔디스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몸이 고정된 상태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노예의 목덜미에 캔디스가 혀를 내밀어 핥으며 쪽쪽 빨아댔다.
“…!”
그 오싹한 느낌에 너자가 몸서리를 쳤다. 너무 이상했다. 그만했으면 좋겠다. 너자가 힉힉거리며 몸을 떨고 있을 때 캔디스는 자위를 하고 있던 손을 멈추고 퉁퉁 부은 너자의 구멍에 자지를 가져다 대 한 번에 뚫었다.
아아! 숨넘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퉁퉁 붓고 뜨거운 구멍이 오물오물 캔디스의 자지를 물어댔다.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았다. 꽉꽉 물어대는 노예의 뒷구멍도 좋았으나 게게 풀려 부드럽게 감싸는 뒷구멍도 마음에 들었다.
노예가 울먹이며 제발 그만해 달라며 애원했다. 하지만 캔디스는 그 애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너자는 자신의 애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아프게 박아대는 캔디스에 훌쩍이며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으면 됐다. 언젠가 쌀 것이고… 조금만 더 참으면…. 그가 올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감내하던 너자가 결국 까무룩 기절하고 말았다.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결과였다. 캔디스는 기절해 버린 노예를 깨울까 하다 깨우지 않고 제 욕심만 채웠다. 얼마나 씹질을 했을까. 노예의 안에 정액을 싼 캔디스가 정말 만족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하루 남았다.
캔디스가 잠에서 깼다.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침구, 지저귀는 새의 소리,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새로웠다. 흠, 도노반의 침대나 침대 시트는 자신이 배정받은 것과 같은 것일 텐데 이상하게 더 좋은 듯했다.
바꾸자고 할까.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한 그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자신의 양팔이 무언가를 감싸고 있었다. 뭔가 오른쪽 팔뚝이 무척 무거웠다. 그리고 턱밑에, 뭔가가 살랑이며 간지러웠다.
귀찮아서 뜨지 않았던 눈을 억지로 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새까만 것에 캔디스의 잘생긴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야.”
잔뜩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기가 막힌 듯했다. 이게 왜 내 팔 위에 있어? 자신이 왜 노예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캔디스가 거부감에 얼른 팔을 빼내 노예를 옆으로 굴리려 했다. 하지만 노예가 작게 뒤척이며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것에 캔디스가 저도 모르게 행동을 멈췄다.
“…….”
노예가 마치 아이가 잠투정하듯 소리를 내며 캔디스의 목덜미에 머리를 비벼댔다. 품에 느껴지는 뜨끈함에 캔디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진짜 의무실에 가 봐야겠네.”
잦은 간격으로 심장이 쪼이는 듯한 통증에 캔디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면서도… 간질간질했다. 캔디스의 손이 저도 모르게 노예의 얼굴로 향했다. 사흘 새에 무척 수척해진 노예의 뺨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감기는 미끄럽고 차가운 피부가 마음에 들었다. 이 피부는 손자국도 잘나는 편이었다. 조금만 힘을 줘 강하게 누르면 허여멀건 피부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났다. 그래서 더 억누르고 쥐어 잡고 때렸을지 모른다.
그의 손끝이 노예의 뺨을 만지작거리다 옆으로 움직였다. 손끝에 감기는 높고 딱딱한 코뼈의 감촉이 재밌었다. 잘생긴 코와 남자다운 눈썹이 보기 좋았다. 감겨 있음에도 퉁퉁 부은 게 느껴지는 눈꺼풀은 불그스름했고 톡 튀어나온 입술이 먹음직스러웠다.
캔디스가 충동적으로 노예에게 입을 맞췄다. 차가우면서도 도톰한 입술의 느낌이 퍽 괜찮았다. 노예의 입술 감촉에 자신의 입술을 쿡쿡 누르며 확 키스해 버릴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그는 드물게 인내했다. 혀를 넣으면 더한 것을 하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곧 있으면 도노반이 올 것이었다.
유순히 잠이 든 노예의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다 캔디스가 비아와 리먼을 불렀다. 리먼과 비아는 제 주인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가 말했다.
“리먼은 노예를 씻기고 비아는 침대 시트를 갈으렴.”
캔디스의 명령에 그들은 유순하게 알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그들에 캔디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희 뭐해, 얼른 하지 않고?”
제 주인의 짜증에 리먼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심약한 리먼이 답을 하지 않으니 남은 것은 비아였다. 저놈은 말수가 적은 게 문제였다. 리먼을 대신해 비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나와 주셔야….”
비아의 말에 캔디스가 그제야 자신이 노예가 깰까 봐 꽉 끌어안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손은 노예의 부들부들한 머리털을 쓰다듬고 있었다. 채신머리없는 자신의 행동에 캔디스가 헛기침을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노예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빼냈다.
자신의 주인이 그제야 노예를 풀어 주자 대기하고 있던 리먼이 손을 뻗어 노예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리먼의 악력으로는 무겁고 기다란 노예를 들고 옮기는 것은 무리였다. 리먼이 용을 쓰고 노예를 옮기려 했으나 품에 안는 것처럼 끌어안는 것만 가능했다. 시종이 노예를 허술하게 끌어안자 곤히 잠든 노예가 뒤로 넘어갔다.
“…!”
캔디스가 본능적으로 뒤로 넘어갈 뻔한 노예의 머리통을 큰 손으로 한 번에 잡았다. 그리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리먼을 보며 혀를 찼다. 저놈은 비리비리한 게 문제다. 몸 단련을 시켜야겠어. 노예의 머리통이 깨질 뻔했다. 침대라 노예의 머리가 깨질 걱정이 전혀 없건만 캔디스는 그 생각까지 하지 못했다. 그가 다시 명령했다.
“비아가 씻기렴.”
“…네.”
비아는 귀-족 가문의, 그것도 자작가의 자제인 자신이! 기사가! 노예 따위를 씻기는 게 말이 되느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사회생활은 차가운 법이었다. 비아는 전혀 기분이 상한 티를 내지 않고 캔디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돈 주는 사람이 갑이지 뭐…. 비아가 씁쓸하게 노예를 받아들여 품에 안고 욕실로 향했다.
캔디스는 리먼이 침대 시트를 갈 수 있도록 침대에서 내려와 시종이 가져온 속옷과 바지를 입고서 침대 옆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
리먼이 침대 시트를 가는 것을 보며 캔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목구멍까지 꽉 찼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캔디스가 그 이상야릇한 기분에 자신의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것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누군가와 몸을 섞고 한 번도 같이 자 본 적이 없었다.
제 팔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게감이 떠올라 입안이 바짝 말라 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캔디스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노예를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비아에게 물었다.
“씻길 때도 이랬어?”
“네. 한 번을 안 깨던데요.”
“…….”
온갖 체액이 묻어 있던 몸은 감쪽같이 깨끗해져 있었고 차가운 물로 닦인 탓인지 빨갛게 부어 있던 눈과 코는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몸의 멍과 손자국은 그대로여서 이건 좀 위험했다. 노예의 후줄근한 셔츠의 단추 끝까지 꽉 채워 입혀 놓으니 그나마 괜찮아 보였다.
병든 닭처럼 잠들어 있는 너자의 모습에서는 격렬했던 사흘의 모습이 감쪽같이 없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캔디스의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캔디스는 충동적으로 올라오는 파괴적인 느낌에 잠든 너자의 뺨을 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어나.”
“…아….”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노예가 눈을 떴다. 비몽사몽 해 보이는 너자의 머리채를 잡은 캔디스가 강압적으로 말했다.
“정신 차려.”
“…….”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탓에 너자의 눈이 흐리멍덩하게 뜨였다가 다시금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캔디스의 목소리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캔디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캔디스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에 따른 체벌이 이어졌고, 너자는 그 체벌 때문에 사흘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시달려야 했다.
흐리멍덩하던 까만 눈이 눈을 깜빡거릴수록 선명해졌고 이지가 담겼다. 캔디스는 노예의 눈이 퍽 마음에 들어 잠시 동안 노예와 눈을 맞췄다. 그러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가 노예의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줘 당겼다.
아…. 너자의 턱이 위로 당겨지며 아래로 쏠렸다. 위태롭게 떨리는 너자의 까만 눈동자에 눈을 맞추며 캔디스가 말했다.
“나흘 동안 있었던 일은 비밀인 거 알지?”
“…네.”
“도노반에게 들키면 너를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숨겨.”
“네.”
유순하게 답하는 너자에 캔디스는 만족한 듯 픽 웃고는 머리채를 쥐고 있던 것을 풀어 줬다. 그리고 침울하게 가라앉은 노예의 자그마한 얼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제 존댓말도 잘하네.”
“…….”
되바라지던 말투는 한없이 유순하고 순종적이게 되었다. 눈을 마주치면 겁을 먹고 고개를 수그렸다. 강압적으로 말을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덜덜 떨었다.
제가 저렇게 만든 것이다.
캔디스의 얼굴이 황홀하게 미소 지어졌다. 비아는 맛이 간 제 주인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말도 섞기 싫었으나 슬슬 말을 할 때였다. 비아가 노예를 뚫어져라 보는 제 주인에게 말했다.
“이제 가 보셔야 합니다.”
“…….”
“한 시간 뒤면 도노반 일당이 올 겁니다.”
딱딱하게 말하는 비아에 캔디스가 미련이 덕지덕지 남은 눈빛으로 노예를 바라보았다. 그가 일어나자 리먼이 그의 셔츠와 재킷을 입혔다. 맨 상체에 바지만 걸치고 있어 방탕한 창놈처럼 보이던 캔디스는 순식간에 단정한 대귀족의 자제가 되었다.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미련없이 나가려고 했던 캔디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비아는 침실 밖으로 나가다 말고 멈춰서 다시 노예에게 돌아가는 제 주인의 모습에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저 머저리 놈이… 곧 집주인이 올 텐데…. 걸리면 정말 뼈도 못 추스르고 털릴 텐데…. 제국법에 따르면 가택 침입은 중죄였다. 캔디스는 비아와 리먼의 속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발발 떨고 있는 노예 앞에 섰다.
“…….”
너자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기다란 종아리에 이를 악물었다. 그 짧은 순간에 너자의 머릿속에서 자기 검열이 일어났다.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가? 배웅하지 않아서? 왜, 왜 다시 오지? 때리려나?
두려움이 파도가 되어 몰려와 너자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캔디스가 너자의 앞에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
너자가 눈앞에 보이는 주먹에 숨을 들이켜 고개를 자라처럼 움츠리는데, 입술에 느껴지는 매끄럽고 딱딱한 무언가에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캔디스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입 벌려 봐.”
그의 명령에 너자의 입이 순순히 열렸다. 캔디스가 동그랗고 딱딱한 무언가를 너자의 입안에 넣어줬다. 너자가 혀에 들어온 것을 조건반사적으로 입에 굴렸다.
날카로운 눈이 토끼처럼 커다랗게 뜨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에게 캔디스가 말했다.
“달지?”
너자는 입안에 굴려지는 혀가 아릴 정도로 단맛에 그에게 답도 하지 못했다. 코만치에도 수수로 만든 비슷한 게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한 단맛은 없었다. 그냥 단 게 아니라 무언가 과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너자가 멍하니 입에 굴려지는 그것을 빨고 있자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던 캔디스가 말했다.
“그게 사탕candy이야.”
“…….”
캔디는 무척 달았다.
그리고,
근사하게 웃는 캔디스의 얼굴도,
무척 달았다.
캔디스는 얼이 빠져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그리고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과 기사를 데리고 도노반의 독채를 빠져나갔다.
“…….”
샬로메의 말이 맞았다. 혀가 아릴 정도의 캔디를 먹으니 힘들었던 몸에 기운이 조금씩 나는 게 느껴졌다. 너자는 그들이 나가 휑해진 방 안에 주저앉아 꽤 오랫동안 멍하니 입안에 굴려지는 캔디의 달콤한 맛을 느끼다 곧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넘어올 것 같은 속에 너자가 퍼뜩 일어나 문밖으로 달려 나가 입안에 굴려지는 캔디를 얼른 뱉어냈다.
손질되다 만 잔디에 침 범벅이 되어 작아진 캔디가 뱉어졌다. 너자는 입안에서 날뛰던 달콤한 맛이 없어진 것에 안도를 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헛구역질에 숨이 넘어갈 듯 웩웩거렸다.
캔디스는 나흘 동안 너자를 안으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너자를 탐했고 계속해서 관계를 하다가 기력이 달릴 때 리먼이 가져온 작은 빵 쪼가리와 물만 간헐적으로 조금씩 먹었다.
캔디스는 기절 직전인 너자를 억지로 깨워 빵을 찢어 입에 넣어 억지로 밀어 넣었다. 너자는 억지로 넣어지는 빵 쪼가리에 고개를 흔들며 저항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먹이려는 캔디스가 기가 막혔다.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먹인다는 것은 그가 느끼기에는 기만이었다. 거기에 밑이 너무 아팠고 무언가를 먹으면 토해낼 것 같았다. 스트레스는 극에 달해 항상 촉촉하던 입안이 퍼석하게 바짝 말라 있었다. 저를 사람 취급도 해 주지 않은 채 범해대는 캔디스에 너자는 그냥 죽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캔디스는 먹기를 거부하는 너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캔디스는 고개를 흔들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너자의 양손에 한숨을 쉬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비아를 불러 그를 속박하도록 명령했다.
캔디스의 명령을 받은 비아가 너자의 머리맡에 올라타 그의 양손을 함부로 쥐어 잡아 침대에 내리눌렀다. 양손이 속박된 너자는 벗어나려 발악을 했지만 곧 호되게 뺨을 갈기는 캔디스에 서럽게 울었다.
캔디스는 엉엉 우는 너자의 턱을 그 큰 손으로 쥐어 잡으며 말했다.
-입안이 마르면 펠라티오를 못 하잖아.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너자에게 캔디스가 픽하고 웃으며 그의 턱을 잡지 않은 왼손의 중지와 검지를 붙여 너자의 입안에 함부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마치 피스톤질을 하듯 움직이자 캔디스가 한 말의 뜻을 깨달은 너자가 충격에 바들바들 떨었다.
인격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에 너자가 분노와 슬픔에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캔디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옆에 두었던 빵 덩어리를 작게 찢어 너자의 입안에 쑤셔 넣어 뱉으려고 하는 너자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가 말했다.
-먹어.
하지만 너자는 먹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먹기 싫은 것도 있었지만 입안이 너무 말라 퍼석한 빵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캔디스는 여전히 고분고분히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노예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침대 옆 탁상에 놓여진 물컵을 들어 노예의 양뺨을 세게 눌러 입이 벌어지게 했다. 그리고 물을 입에 쏟아 부었다.
너자가 코와 입안에 밀려 들어오는 물에 숨을 쉬지 못했다. 마치 고문을 받는 듯했다. 캔디스는 여전히 빵을 넘기지 못하는 노예의 모습에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 노예의 입안에 있던 빵을 손으로 건져내 자신의 입안에 넣어 두어 번 씹었다. 그리고 노예의 입을 억지로 벌려 입을 맞췄다.
마치 어미 새가 밥을 넘기지 못하는 아기 새의 입안에 먹이를 넣어주는 듯한 그 더러운 모습을 정면으로 봐 버린 비아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제정신의 캔디스라면 제 주인을 그따위 불손한 눈빛으로 보는 기사를 벌했겠지만 캔디스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캔디스는 함부로 혀를 섞고 음식물을 밀어 넣는 행위에 헛구역질하는 노예를 억눌렀고 빵이 다 없어질 때까지 그 짓을 반복했다.
속이 좋지 않은지 헛구역질을 하는 너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캔디스가 말했다.
-좋았지?
-…….
미친소리를 지껄이는 캔디스에 너자는 하나도 좋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눈깔이 맛이 간 것 같은 캔디스의 모습이 너자는 무서웠다. 좋지 않다고 하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답을 하지 않고 덜덜 떨고 있는 너자에 캔디스가 다시 물었다.
-좋았지? 내가 먹여 주니까 좋았잖아. 너 내가 이렇게 해 주길 원해서 안 먹은 거지?
집착 수준으로 좋으냐며 물어보는 캔디스에 결국 너자가 발발 떨리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좋았어요….
가련하게 말하는 노예에 캔디스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그리고 또다시 행위가 시작되었다.
너자는 악몽과 같았던 사흘을 떠올렸다. 속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이건 옳지 않다. 부실하게 먹은 빵 쪼가리는 진즉 소화된 지 오래였고 헛구역질을 하면 할수록 나오는 것은 멀건 위액이었다. 위액이 나올 때마다 그의 속이 뒤집어졌다. 그 무섭고 더러웠던 기억은 이 달콤한 맛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간극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말도 안 돼….”
그의 웃는 얼굴이 달콤해 보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너자의 죄책감과 인격과 자아가 이건 옳지 않다며 그에게 끝없이 외쳤다. 무너질 것 같은 정신에 너자가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목덜미가 위로 끌어 올려졌다.
“…!”
순간 위로 끌려지는 자신의 몸뚱이에 너자가 헛구역질을 하던 것을 멈췄다. 어느새 사방은 어둠에 물들었고 자신을 끌어 올린 게 캔디스인 듯 싶었다. 또다시 돌아와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그에게 몸부림을 치려고 할 때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지가지 한다.”
“…도련님?”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오는 노예의 목소리에 맥켄지가 그 매끈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노예가 감히 자신에게 말을 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맥켄지는 나흘 동안 감금되어 좆 빠지게 장부를 정리했다. 소실된 장부의 일자를 메꾸는 것은 매우 귀찮고 화가 나기는 했지만 이미 한번 한 작업이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곧바로 대령되는 새로운 일자의 일감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왕 온 거 나흘 뒤 보낼 일거리를 몰아서 하고 가라는 부친의 명령이었다.
그래, 장부를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산탄총 프로젝트를 말아먹은 뒤 자신을 부친 모르게 견제하며 긁어대는 형이 같잖았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장부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검토하느라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있는 제 동생의 방에 러트 도노반이 티 트레이를 든 시녀들을 대동하고 기별도 없이 들어왔다. 제 영역을 침범하고 기별도 없이 티타임을 행하려는 제 형님을 보며 맥켄지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런 제 동생을 본 러트 도노반은 제 동생의 책상 끝에 엉덩이를 걸치며 말했다.
-너 워린의 성에 있던 노예를 가져갔다며?
-네.
-형이 구해 준다니까.
-아카데미 입학 이틀 전이라서요. 기별이 없으시기에 제가 만들어 냈습니다.
구해 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만 처한다며 돌려 말한 맥켄지에 러트 도노반이 턱에 손을 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제 동생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워린 에르베가 제 노예를 찾는다는구나.
난리가 났다더구나. 휴가를 받아 집에 온 워린이 제 게 없어져서.
나직이 말하는 제 형에 맥켄지는 눈썹을 치켜뜨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봤자 방계 아닙니까. 그의 재산은 직계인 우리 것이지요.
-하지만 말은 했어야지. 그치가 그 노예를 꽤 아끼는 것 같던데.
맥켄지는 문득 떠오르는 노예의 모습에 툭 하니 말했다.
-그런 거 치고는 방치하고 있던데.
처음 노예를 봤을 때 노예는 워린 도노반의 식솔들에게 학대받고 있었다. 제대로 관리받지 못해 마치 짐승같이 꼬질꼬질했던 노예는 아무리 봐도 방치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렇다 해도 뭐? 방계의 재산은 직계의 것이다. 그걸 잡아온 것은 워린이지만 그것의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전혀 문젯거리가 될 게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제 동생에 러트 도노반이 픽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전쟁 영웅의 전리품이잖니.
-…….
-하지만 걱정 말거라. 곧 가주가 될 형이 알아서 해결했으니.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은 지금처럼 형을 도와주며 내 곁에 있으렴.
아직 가주도 아닌 주제에 가주 행세를 하며 온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제 형을 보며 맥켄지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분출하지 않고 그저 하던 대로 인형처럼 웃으며 제 형을 바라보았다. 맥켄지는 제 형을 보며 양손을 느리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나흘 동안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제국 아카데미로 돌아온 맥켄지는 당장 침대에 드러누워 자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마차가 간밤에 땅에 만들어진 홀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차가 홀에 빠져 뒤로 넘어가는 탓에 마차의 바퀴가 빠져 버렸다. 마부는 송구스러워 어찌할 줄을 모르며 시간을 주시면 해결한다며 마차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 한심한 상황에 맥켄지는 화를 내는 것도 귀찮았다. 또 어차피 조금만 걸으면 독채 기숙사였다. 그래서 마차에서 내려 먼저 간다며 휑하니 독채로 향했다. 그레머는 짐 때문에 맥켄지를 따르지 못했고 샬로메가 그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맥켄지는 샬로메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맥켄지는 근래에 샬로메가 거슬렸다. 샬로메는 노예를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인생 패배자 새끼에게 따먹히고 총에 맞아 뒈져 버릴 뻔한 것이 떠올라 그의 속이 끓어올랐다. 노예는 꽤 쓸모가 있는 패였다. 그리고….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오른손 손끝을 비볐다. 때때로 그때의 감촉이 불현듯 떠올랐다. 차갑지만 매끈했던 그 피부의 감촉이, 눈을 마주치자 눈이 가늘게 접히며 자신을 보며 야살스레 웃었던….
맥켄지는 도무지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예는 멍청했고 비실비실했다. 지금도 그랬다. 노예는 자신의 정원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위협적인 몸에 어울리지 않았다.
“…….”
맥켄지는 되바라지게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먼저 피한 건 노예였다. 너자는 강제로 들린 자신의 상체에 애매하게 들어 올려진 몸에 힘을 줘 제대로 섰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토악질을 해대는 사람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봤겠지만 맥켄지는 그런 상냥함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털어내며 독채 안으로 들어갔다.
“…헉….”
너자는 사라진 맥켄지의 뒷모습을 보다 소스라치며 놀랐다. 맥켄지가 목덜미를 쥐고 강하게 들어 올리느라 꼭꼭 채운 단추가 풀어졌기 때문이었다. 큰일이 날 뻔했다. 주위가 어두워서 망정이었지 주변이 환했다면 목 주변에 졸린 자국과 캔디스가 남긴 잇자국이 보일 뻔했다. 실이 터져 간신히 달려 있는 단추에 너자는 황급히 옷을 여몄다.
이 사실을 맥켄지가 알게 되면 경을 칠 것이다. 자신을 대가로 맥켄지는 캔디스에게 원하는 것을 얻어냈는데 지난 사흘간 자신은 대가도 받지 않고, 맥켄지의 허락도 없이 몸을 굴렸다. 감히 제 명령도 없이 함부로 몸을 굴린 노예를 어떻게 처분할지 어렴풋이 예상이 갔다.
아마 죽거나 죽지 않을 만큼 처맞겠지. 캔디스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이어야 한다. 숨기는 건 쉬울 것이다. 사실 맥켄지는 같은 곳에 살지만 너자를 무시로 일관했고 그레머와 샬로메도 너자의 몸에 별 관심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너자는 아직도 두려움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 멀리서 양손에 짐을 바리바리 들고 걸어오는 그레머와 샬로메에게 뛰어갔다. 너자는 그들이 가지고 온 짐들을 나누어 들며 생각했다.
별일 없을 것이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