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제국 아카데미 (2/9)

2. 제국 아카데미

입학식 당일이었다. 제1기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식이라 그 규모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성대했고 요란했다. 돈을 바른 티가 역력한 아카데미 건물과 계절을 타지 않는 수목과 꽃들이 아름다웠다. 입학식은 강당에서 열렸고 온갖 왕국의 귀족 자제들로 넘쳐났다.

그중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이베아 제국의 고위 귀족 자제들인 도노반 후작성의 맥켄지 도노반과 스와포네 공작성의 캔디스 스와포네였다. 캔디스는 스와포네 공작 성의 외동아들이었다. 스와포네 가문도 손이 귀했기에 스와포네 부부는 캔디스를 갖기 위해 5년이라는 시간을 고생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겨우 얻은 자식은 아들이었고 공작 부부 내외는 그런 아들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캔디스라 이름 지었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강당의 맨 윗줄 상석이었고 의자 또한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줄을 제외하곤 일반 나무 의자였으나 그 부분에 불만을 표하는 자제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레머는 어제저녁에 정성스레 다린 교복을 입은 도련님을 보며 우월감에 휩싸였다. 저 고귀한 핏줄인 캔디스와 비교를 해도 우리 도련님이 훨씬 잘생겼고 귀해 보였다.

시종들의 서열은 모시는 주인의 서열에 따라 갈렸다. 맥켄지의 서열이 곧 그레머의 서열이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그레머가 바짝 긴장한 채 직립 부동자세로 서 있는 다른 시종, 시녀들을 보며 흐흐흐 하고 음침하게 웃었다.

그런 그레머의 모습에 샬로메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웃기는 놈이었다. 샬로메는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을 입지 않고 그레머와 같은 시종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제국 아카데미의 창립 이념에 의한 것이었는데 원칙적으로는 어떠한 학생이라도 호위를 데리고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샬로메가 시종으로 위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이베아 제국 학생들과 다른 왕국의 학생들도 샬로메가 기사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 그런 것이다. 또 저기 캔디스의 시종도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기사 견습생 때 동기였다. 참고로 저놈과 샬로메는 사이가 정말 좋지 않았다. 샬로메가 저를 노려보는 동기에 마찬가지로 눈에 힘을 주어 노려보아 주었다.

맥켄지가 푹신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의자 받침에 턱을 괸 채 연설하는 늙은 남자를 보았다.

저놈은 발기부전으로 유명한 놈이었다. 한때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는 외래종인 자라가 한순간에 없어진 일이 있었다. 생긴 게 특이해서 아무 생각 없이 수입해 왔는데 제국 내 고유 생태계가 자라 때문에 박살이 났었다. 거기에 번식력도 높은 탓에 아무리 잡아대도 자라의 개체 수가 줄어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씨가 말라 갔다. 사람들과 학자들이 그 많던 자라가 없어진 것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을 무렵, 제국 내 하천을 경비하고 있던 기사들이 야밤을 틈타 자라를 포획하는 무리를 잡아들였는데 알고 보니 저놈의 소행이었다.

황제는 비록 생태계 교란종이나 제국 내의 동물을 무단으로 잡아간 놈에게 벌금을 명했다. 하지만 저놈은 재판에서 ‘저는 이베아의 생태계를 살리려고 자라를 포획한 것입니다! 절대 발기부전 같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자라를 잡아 와 고아 먹은 게 아닙니다. 저는 환경을 지킨 것이니 벌금은 못 냅니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여 발기부전 미친놈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런 놈이 제국 아카데미의 총장이 되었다.

맥켄지가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제 얼굴에 성가시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캔디스 스와포네.

재수 없는 새끼였다. 머리통에 든 것도 없으면서 꼴에 공작 가문 외동아들이라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꼴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맥켄지와 캔디스는 데뷔탕트 동기였고 이베아 내의 최고 실세 가문의 자제였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징그럽게 비교되며 엮였다.

하지만 맥켄지는 캔디스를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능, 얼굴, 체술, 가문 모두 제가 나았다. 봐줄 만한 것은 공작 가문이라는 후광밖에 없는 놈이었고 벌써부터 사생아를 만들고 다니는 머저리였기 때문이었다.

기억나네, 저 새끼 사생아 만들어서 공작가가 뒤집혔던 거.

맥켄지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배를 잡고 굴러다니며 웃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도 이런 봄날이었다. 스와포네 가에서 주최하는 친선 무도회에 초대받았다. 원래는 형인 러트 도노반에게 간 초대장이었지만 러트 도노반은 다른 나라에 외교관 자격으로 가 있던 상황이었다. 받은 초대장을 그대로 반송해 버리는 것은 귀족 간의 예의가 아니었기에 맥켄지는 후작 부인의 애타는 부탁으로 초대장을 받았고, 한 달 뒤 형의 대리인으로 무도회에 참석했다.

사교계 내에서 맥켄지의 인기는 상상 초월이었으나 막상 그에게 댄스 신청을 하는 영애는 몇 없었다. 그의 잔인한 성정과 비록 후작 가문이지만 스와포네 공작 가문과 비교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가문의 힘, 그리고 이성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맥켄지는 아직 사춘기를 보내는 영애들에게는 높고도 어려운 산이었기 때문이었다.

파티장에 맥켄지가 들어서자 수많은 영애들이 얼굴을 붉히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그 모습에 캔디스가 이를 갈며 웃는 낯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추잡했다.

재수 없는 새끼. 근본 없는 가문의 차남 주제에 왜 인기가 많은 거야! 원래 귀족 가문의 차남은 본래 정략결혼으로도 팔리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말이다.

데뷔탕트를 치르고 자신보다 인기가 많았던 맥켄지를 질투한 캔디스는 맥켄지가 후작성 영지 내에서 일으키는 크고 작은 일들을 고대로 사교계에 뿌리기 시작했다.

도노반 가문에서 맥켄지의 명예에 누가 되는 발언을 계속하는 캔디스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스와포네 가문이 취하는 태도는 한결같았다. 없는 말을 지어서 한 것도 아니고, 부풀려서 한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냐는 입장이었다. 스와포네 가문의 말이 맞았다.

캔디스가 흘리고 다니는 이야기는 모두 맥켄지가 일으키고 다닌 일이 맞았고 소문 또한 과장되지 않고 간결했다. 그 간결한 내용이 누구의 혀를 뽑아 버렸다, 기르던 개가 다른 사람에게 꼬리 치는 것을 보며 맥켄지가 직접 돌려 쳐 죽였다 등등… 모두 사실이었다.

“저 새끼….”

캔디스가 가증스러운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수많은 영애들의 댄스 신청을 거부하지 않고 계속해서 춤을 추는 맥켄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번 파티에서 캔디스는 꼭 맥켄지를 엿 먹이고 싶었다. 그래서 캔디스는 스와포네 방계 영애들과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겠다는 말로 친분이 있는 영애들에게 그에게 댄스 신청을 하라며 꼬드겼다. 영애들은 개인이라면 할 수 없었겠지만, 수많은 동지들과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지겠다는 캔디스의 말에 우르르 몰려가 맥켄지에게 댄스 신청을 했더랬다.

캔디스는 수많은 영애들을 상처 입히는 개새끼를 단죄하려는 큰 그림을 그렸으나 캔디스의 계략을 눈치챈 맥켄지가 천사같이 웃으며 자신에게 댄스 신청을 하는 영애들을 모두 수락했다. 평소의 맥켄지였다면 무시로 일관했겠지만 그때의 맥켄지는 감히 자신을 엿 먹이려는 캔디스에게 역으로 엿을 먹이고 싶었었다.

분해 어찌할 줄을 모르는 캔디스와 저 재수 없는 놈을 우아하게 엿 먹였다는 즐거움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맥켄지가 서로를 병신이라며 속으로 비웃고 있을 때, 파티장이 소란스러워졌었다.

“이 미친 여자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마지막 영애와 춤을 마치고 인사를 하고 있던 맥켄지가 소란스러워지는 장내에 의문을 품고 소리가 나는 무도회장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독기가 가득 차 보이는 여인이 기사들과 몸싸움 중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몸으로 사내의 몸인 기사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여인이 밖으로 끌려가려고 할 때 여인이 엄청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제가! 제가 캔디스 도련님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엄청난 목청, 그리고 엄청난 발언에 무도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큰 소란이 일었다. 마치 평민들이 있는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워진 회장은 평소 교양 있고 체통 있어 보이려는 귀족들의 마음가짐을 한순간에 뿌리 뽑았다.

그리고 그 뒤로 별거 없었다. 공작부인은 졸도하며 쓰러졌고 아마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한 캔디스는 여인에게 얼른 꺼지라며, 여인 하나 못 내쫓냐며 진땀을 흘리는 기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공작은 두통에 비틀거렸었다. 무도회는 순식간에 파장되었다. 그다음 날 무도회에 참석했던 모든 귀족들의 성에 꽤 많은 액수의 금과 보석이 도착했다. 스와포네 공작 가문이 보내는 뇌물이었다.

그 웃기면서 한심했던 상황을 떠올린 맥켄지가 조소를 흘렸다.

옆에서 열심히 자신을 째려보는 캔디스는 역시 상대할 껀덕지도 없는 한심한 새끼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맥켄지는 그 한심한 새끼 때문에 두통에 시달렸다.

아침 수업은 군사학이었다. 어제부터 아카데미를 쏘다니며 내부 강의실을 외운 그레머가 맥켄지와 샬로메, 그리고 노예를 데리고 군사학 강의실에 도착했다. 그레머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강의실의 문을 열었고,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맥켄지에게 쏠렸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면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맥켄지는 덤덤했다.

학생들은 소문의 ‘그’ 맥켄지 도노반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베아 왕국의 숨은 실세였던 도노반 후작 가문, 돈으로 산 신분에 불과한 미개한 후작 가문의 차남, 그리고 왕국에 불과했던 이베아를 총이라는 독점 무기를 개발해 전쟁 무기를 대고 실제로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기사가 있는 도노반 후작 가문.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대표.

전쟁이 마무리되면 그 공치사로 공작 가문으로 승격된다는 ‘그’ 소문의 도노반 가문의 금지옥엽 차남 맥켄지 도노반은 마치 여인처럼 선이 곱고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맥켄지의 얼굴은 남자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뽀얬고 기다란 팔다리는 마치 사슴 같았다. 꿀을 머금은 것 같은 허니 블론드는 결이 좋아 보였고 마치 햇볕이 내리쬐는 강처럼 푸른 눈은 애수에 차 있었다.

천사 같은 얼굴에 뱀 같은 내면을 가진 ‘그’ 맥켄지 도노반이었다.

맥켄지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해 보였다. 태생부터 고귀한 자만의 자신감이었다. 범인이 그랬다면 꼴값이었겠지만 그는 그게 당연한 것 같았다. 그 당당함에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강의실의 모든 학생들이 맥켄지에게 홀렸다. 그가 나비처럼 걸어 비어 있는 창가의 빈자리에 앉았다.

캔디스는 그런 맥켄지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놈은 항상 그랬다. 매사에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로 모두를 홀렸다. 놈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그에게 관심받기 바랐고 놈에게 무엇을 바치지 못해 안달이었다.

캔디스가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귀공자처럼 미소 짓는 그의 내면은 추악한 질투심에 휩싸인 채였다. 캔디스가 이를 갈았다.

두고 보라지. 기필코 저 재수 없는 새끼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캔디스가 사뿐히 일어나 맥켄지에게 걸어갔다. 자연스럽게 캔디스를 따르는 무리도 일어나 그를 우르르 따라갔다.

앙숙과 같은 둘의 사이는 제국 내에서 유명했지만, 다른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유명했다. 소문의 개싸움을 볼 수 있을까?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의 존재를 모르지 않을 텐데 맥켄지는 바로 앞까지 온 캔디스를 아는 척도 안 했다. 묘한 긴장감이 강의실에 퍼졌다. 캔디스가 여전히 재수 없게 구는 맥켄지의 면상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오랜만이다? 도노반.”

느물느물한 캔디스의 목소리에 맥켄지가 그제야 책상에 턱을 괸 채 캔디스를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 친목질을 한 것인지 스와포네는 벌써부터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저 새끼는 아직도 저러고 노네. 맥켄지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사실 귀족 자제들의 친목은 권장되는 일이었다. 그들의 친목은 곧 사업이 되었고 그것은 가문의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맥켄지는 여왕벌처럼 무리의 중심에서 우쭐한 표정으로 있는 캔디스를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무시했다. 그런 맥켄지에 캔디스가 말했다.

“재수 없는 새끼.”

캔디스의 폭언에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뭐래, 머저리 새끼가.”

되로 받아치는 맥켄지에 캔디스도 지지 않고 빈정거렸다.

“말하는 디자인 봐 봐. 천하기 그지없어. 근본이 없어서 그런가?”

“근본 있는 새끼가 사생아나 만들고 다니나?”

“이 새끼가!”

갑자기 죽창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맥켄지에 캔디스가 울컥해 그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헉! 팽팽했던 활시위처럼 위태로웠던 강의실의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맥켄지의 뒤에 유순히 있던 샬로메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거 안 놔?!”

시종복 차림인 샬로메가 맥켄지에게 뻗어진 캔디스의 손목을 재빠르게 잡았다. 그러니 캔디스의 뒤에 있던 시종 차림의 기사 비아가 샬로메의 손목을 쳐냈다. 샬로메와 비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굳어져 서로의 멱살을 잡았다.

몸싸움으로 이어진 것에 겁먹은 학생이 소리 질렀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강의실은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다. 샬로메와 비아가 멱살을 잡으며 몸싸움을 벌이거나 말거나 맥켄지와 캔디스는 서로 노려보며 눈싸움 중이었다.

평화롭던 아침 강의실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졌다. 소문으로 맥켄지와 캔디스가 개싸움으로 유명하다고 듣기는 들었는데 진짜 개싸움인 줄 몰랐던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강의실 밖에서 멍하니 서 있던 너자가 주먹다짐을 하려는 전사들을 보며 본능적으로 강의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악마다! 태산같이 커다랗고 위협적인 몸뚱이에 새까만 머리칼과 새까만 눈을 가진 너자가 등장하니 학생들이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자가 그 긴 다리로 몸싸움 중인 샬로메와 비아에게 다가가 둘의 뒷목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떨어뜨렸다!

샬로메와 비아의 몸집은 꽤 큰 편이었는데 너자가 어린아이 싸움 말리듯 뒷목을 잡아떼었다. 혼돈과 같았던 강의실이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샬로메와 비아는 별안간 뒷목을 엄청나게 강한 힘이 잡아당기는 탓에 주먹질하던 것을 멈추고 소리 질렀다.

“야! 이거 안 놔?!”

“제기랄, 뭐야!”

너자는 자신을 보며 빽하니 소리 지르는 샬로메에게 고개를 저으며 서툰 제국어로 말했다.

“안 돼! 나빠!”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이 말하는 너자에 샬로메가 어이가 없어 화를 내던 것도 멈추고 너자를 째려보았다. 그러다 뒤에 있던 비아가 이를 악물고 노예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너자에게 비키라고 하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너자가 알아서 몸을 피했고 그 커다란 손으로 비아의 오른 손목을 순식간에 부여잡아 앞으로 당겼다.

억! 너자의 엄청난 힘에 종잇장처럼 앞으로 나뒹굴며 꼴사납게 바닥을 구른 비아가 눈을 부라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너자가 가뿐하게 비아의 배 위에 올라타 팔꿈치로 비아의 가슴께를 강하게 눌렀다. 마치 메뚜기처럼 날뛰는 비아를 억누르며 너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했다.

맥켄지와 샬로메가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너자도 그들을 따라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레머가 너자의 가슴팍에 손을 대 밀어내며 ‘안 돼’라고 말했다. ‘안 돼’를 아는 너자가 ‘안 돼?’라고 되물으니 너자를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 감이 온 그레머가 최대한 단호하고 쉽게 말했다. 응. 안 돼. 여기에 있어. 그레머의 말 ‘여기에 있어’를 알아듣지 못한 너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레머가 개에게 말하듯이 오른손 손가락으로 매 맞는 아이들, 휘핑보이들이 서 있는 복도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다려.”

느낌상 여기에 있으라는 것 같아 너자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너자가 유순하게 아이들이 일렬로 서 있는 곳에 가자 그레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너자는 멍하니 체구가 작은, 아니 어린아이들과 같이 복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10살을 넘길까 말까 한 아이들이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큰 건물 안으로 올 때까지 마주친 하얀 사람들은 15살에서 30살 안팎인 것 같았는데…. 그런데 아이들의 옷이 자신이 입은 옷과 같았다. 검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그리고 복숭아뼈 바로 밑에 솔이 있는 낮은 신발이었는데, 아마 신분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맥켄지와 수많은 아이들은 연푸른색의 귀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샬로메와 그레머는 연푸른색의 귀해 보이는 옷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들과 똑같은 회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이 어린애들과 무언가를 한다는 건가? 이렇게 작은 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아이들은 마르고 음울해 보였다. 안 그래도 슬퍼 보이는 아이들은 자신이 옆에 서 있자 불편해하고 무서워해 너자는 난감했다.

자신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 미안해 아이들과 최대한 떨어져 섰다. 그리고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을 때 강의실 안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들고 강의실의 문 위에 뚫려 있는 곳으로 안을 유심히 봤다. 뭐지, 하고 눈을 찌푸려 소란의 주범인 듯한 뭉텅이를 보니, 그것은 자신을 데려온 전사가 주먹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싸워! 너자가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강의실 문을 열고 쏜살같이 샬로메에게 달려갔다. 코만치족의 너자는 늑대 전사였고 늑대 전사들을 통제하는 알파였다. 알파인 너자는 부족에 침입하는 적들에 선두로서 싸웠고 싸움에 필요한 전술을 짰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늑대 전사들의 규율을 통제하기도 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늑대 전사들은 툭하면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워댔고 너자는 그런 전사들의 싸운 이유를 듣고, 이유가 있어 싸웠다면 그것을 해결해 주었고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싸움질을 한 거면 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렸다.

코만치의 알파였던 너자가 몸에 밴 습관 때문에 살벌하게 주먹질을 하고 있는 샬로메와 비아를 떼어냈다. 본능적으로 싸우고 있는 둘을 떼어냈기는 했는데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너자는 자신을 원처럼 에워싸고 자신을 보며 소리 지르거나 기겁을 하는 연푸른색의 옷을 입은 아이들에, 입을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머에, 책상에 앉아 천사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켄지에 식은땀이 났다. 맥켄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너자의 본능이 저건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거 큰일 난 것 같다.

너자가 화가 나 보이는 맥켄지의 모습에 그의 눈을 피하며 아직도 자신을 치워 버리고 공격할 의지가 많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억눌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화가 많이 나 보이는 이 남자가 샬로메를 때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너자는 샬로메가 퍽 좋았다.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 좀!”

비아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게졌다.

이베아 자작가의 자제인 비아는 수치심과 호승심에 이를 갈았다. 어서 빨리 이 곰 같은 놈의 면상에 주먹을 먹여 주고 싶었다. 어디에서 굴러들어온지도 모르는 놈에게 제압당해 바닥을 기고 있는 건 비아가 처음 겪는 수치였다!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는 놈을 치워 버리고 싶은데 그게 되지 않았다. 멧돼지도 이것보다는 가벼울 것이다. 비아의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너자에게 깔려 아등바등거리는 비아의 모습에 샬로메가 저도 모르게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낙하산 맞았지?!”

“제기랄! 지랄 마!”

낙하산이라는 샬로메의 말에 비아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샬로메와 비아는 기사 견습생 동기였고 동년배였다. 하지만 둘이 말을 섞은 적은 극히 드물었다. 명문 자작가의 프라이버시를 가진 비아는 어디에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르는 평민 새끼와 말을 섞기 싫었고 평민인 샬로메는 자신을 구더기 보듯 바라보는 귀족 새끼가 싫었다. 그래 봤자 자작가면서 더럽게 완장질한다 싶었다.

거기에 샬로메가 보기에 비아의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그래서 ‘아, 저 좆같은 놈 분명 승급 못 하겠다. 저 새끼랑 더 마주칠 일은 없겠다’ 하고 안심했더랬다. 그런데 저놈도 기사 승급시험에 통과했다. 대체 저 실력으로 어떻게…?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때 저놈의 실력이 갑자기 일취월장하고 시험관의 눈을 피해 편법으로 어떻게 수작질을 부려 승급시험에 통과했다고 했다 쳐도 몇 년 후 자신이 허벌나게 구르고 피똥 싸가면서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었을 때 저놈은 이미 자신보다 일 년 전에 제3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어 있었다. 샬로메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저 꼬락서니를 보니 역시 낙하산으로 부단장을 한 것이 맞다. 그러니 실력이 없어 제3기사단의 단장과 기사들에게 조리돌림 당해서 제대한 게 분명하다. 그렇게 기사도를 운운하고 최고 영광의 자리에 있다며 주접을 다발로 떨던 놈이 제대해 공작가 자제의 호위기사 따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샬로메 본인도 후작가 자제의 호위기사 따위 하고 있으면서 시종 옷을 입고 노예에게 제압당해 꼼짝도 못 하는 비아를 비웃었다.

발작하는 비아에 샬로메가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비아를 약 올리고 있을 때 제 호위기사를 제압하고 있는 너자를 보며 캔디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저게 그 야만인 노예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건만 캔디스의 목소리에 학생들이 더욱 흥분했다. 다른 왕국에서도 대륙의 야만인들은 미지의 존재였고 이베아 제국에 의해 멸종했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그 소문의 야만인이 캔디스의 호위기사(시종 옷을 입고 있지만)를 한 손에 제압하고 있다!

야만인 노예가 있대! 전술학 강의실의 소란에 근처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이 어슬렁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야만인이라고 해서 시뻘건 피부에 짐승의 대가리를 단 괴물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다. 캔디스는 자신의 호위기사의 배에 올라타 그를 억누르고 있는 노예를 묘한 표정을 지으며 노예를 훑었다.

검은색의 짧은 머리칼과 밤하늘보다 새까만 눈동자가 신기했다. 남자다운 코와 묘하게 섬세한 이목구비는 이베아나 다른 왕국의 인간들과는 무언가 달랐다. 까만 셔츠에 가려져 있지만, 노예는 탄탄한 몸의 윤곽선을 그대로 보여 줬고, 까만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하얀 손목과 뼈가 불거진 기다란 손가락이 비아의 가슴팍을 누르고 있는 게 묘했다. 비아의 허리에 타 단단한 허벅지가 팽팽히 올려 붙었고 바짓단 아래로 빼꼼히 보이는 발목은 의외로 얇았다. 아마, 자신의 손이라면 저 발목을 한 번에 쥐어 잡아 침대에 내리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먹는 데 남녀 가리지 않는 난봉꾼으로 유명한 캔디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마치 눈깔로 노예를 간하는 것 같은 캔디스의 모습에 맥켄지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저 노예는 내 것이었다.

맥켄지가 감히 자신의 것을 탐내는 캔디스에게 주의를 주려고 입을 열었을 때 시끄러웠던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야만인 노예를 구경하겠다고 우글우글했던 학생들은 정치학 교수와 제국 아카데미 경비대원 몇 명이 나타나자 시끄럽게 떠들던 것을 멈췄다. 강의실에 입장한 정치학 교수가 또박또박 확실히 말했다.

“수업 시작했습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

“입학식 때 총장님이 말씀하셨던 것 기억나시죠? 벌점 쌓이면 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지금 각 교수님께서 강의실에 도착하셔서 출석 체크를 할 것입니다. 출석 체크에 참여 못 하시면 벌점을 받습니다.”

정치학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입맛을 다시며 각자의 강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정치학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도 교수가 대동한 경비대원들의 살벌한 모습에 순순히 자리에 가 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소문의 ‘그’ 노예와 제국의 귀하신 분들이었다. 콜로프는 제국의 녹봉을 먹고 있는 제국 귀족이었고 그 귀하신 분들을 아주 잘 알았다.

콜로프가 뒤엉켜 있는 기사들과 기싸움을 하고 있는 젊은것들을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아마 사교계에서 하던 짓을 못 버리고 캔디스가 맥켄지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게 시종들의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그’ 소문의 노예가 비아를 제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만인 노예가 도노반 후작 가문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콜로프는 노예가 이빨이 빠진 채 벌레처럼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팔팔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었다. 정치학 교수이자 학자인 콜로프는 미지의 인물인 야만인 노예에게 흥미를 느꼈지만, 그것은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이었다.

콜로프는 아카데미 학생들의 기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었다. 콜로프가 뒤엉켜 있는 샬로메와 비아, 그리고 노예에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너자가 콜로프의 말을 못 알아들어 가만히 있자 아래에 깔려 있던 비아가 너자에게 비키라며 짜증을 냈다. 그런 비아에게 너자가 다시 힘을 줘 내리누르려고 하자 샬로메가 너자의 팔을 툭툭 치며 그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너자가 순순히 일어났고 아래에 깔려 있던 비아는 더러운 게 닿았다는 듯이 자신의 옷가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런 모습에 콜로프가 마치 남을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귀하신 분들에게 말했다.

“학생 간의 싸움은 교칙 위반입니다.”

“…….”

“벌로 캔디스 님, 맥켄지 님께 각각 벌점 3점을 주겠습니다.”

콜로프의 말에 두 귀하신 분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콜로프도 그런 그들에게 불만은 없었다. 원래 그런 놈들이었기에 아카데미라는 특수한 울타리에서도 고분고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제국 아카데미의 성적으로 추후 두 분께서 진출하실 이베아 제국 정치계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황제 폐하께서 승인하신 상벌제고, 귀하의 보호자님께서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콜로프의 말에 그제야 맥켄지와 캔디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콜로프가 고저 없이 말했다.

“그리고 벌점 외로, 아카데미 내 기강을 위해 체벌도 드릴 겁니다. 각 휘핑보이를 대동하세요.”

콜로프의 말에 캔디스의 시종이 재빠르게 복도로 달려가 복도에 대기 중이던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그레머가 멀뚱히 서 있는 노예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맞을 거야. 가만히 있어.”

너자는 그레머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지만 맞을 거야, 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너자가 에르베 영지에 있을 때 질리도록 들었던 게 ‘맞고 싶으냐’, ‘맞는다’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너자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그레머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눈썹을 늘어뜨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머가 말했다.

“네가 할 일이야.”

“할 일?”

“응. 매 맞는 거.”

“내가 할 일 맞는 거?”

“응”

그 외롭고 무서웠던 성을 빠져나왔다. 마구간이지만 자신이 지낼 멋진 공간도 생겼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 줘서 너무 좋았다. 그런데, 맞는 게 일이라고 한다.

너자는 담담히 말하는 그레머에 속이 상하기도 했고 분하기도 했다. 왜? 맞는 게 왜 내 일이야? 사람을 왜 때리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왜?

너자의 입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맴돌았으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너자의 말은 저들이 알아듣지 못했고 만약 알아듣는다고 해도 저들은 무시할 것이다. 너자는 노예였으니까. 그레머가 멀거니 서 있는 너자를 콜로프에게 밀었다. 너자는 순순히 콜로프의 앞에 섰다.

너자가 앞으로 미적미적 나오자 콜로프가 앞에 선 매 맞는 아이들을 보고 책상 안 수납장에 고이 모셔 놓은 회초리를 꺼냈다. 회초리는 성인 남자의 팔꿈치만 한 대나무에 옻칠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단하고도 유연한 대나무 회초리는 사람의 살에 효과 있게 달라붙으며 피부를 터트리는 것에 능했고 어지간한 일에는 절대 부러지지 않았다.

콜로프가 앞에서 발발 떨고 있는 캔디스의 휘핑보이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체벌은 벌점 1점당 10대입니다. 캔디스 님과 맥켄지 님은 각 벌점 3점씩 받았으니 휘핑보이는 30대를 맞을 겁니다. 아, 물론 이건 휘핑보이가 있는 분들께 해당하는 이야기인 거 아시죠? 휘핑보이가 없는 분들은 직접 맞으실 겁니다.”

캔디스의 휘핑보이가 콜로프의 옆에서 종아리를 걷어 올렸다. 아이의 종아리는 앙상했고 연약해 보였다. 콜로프는 입맛이 썼으나 어쩔 수 없었다. 저 귀하신 분들의 몸에 상처를 낸다면 자신의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었고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는 귀족님들의 자제님들에게 상벌의 무서움을 알려 줘야 했다.

“시작하겠습니다.”

휘익, 챱! 공기를 가르며 대나무가 휘둘리는 소리 하며 그 대나무가 아이의 피부를 찢는 소리가 무척이나 징그러웠다. 앗! 너무 따갑고 아파 아이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런 아이를 본 척도 하지 않으며 콜로프는 쉴 새 없이 팔을 휘둘렀다.

어느새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강의실 안은 아이가 맞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너자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대체 왜 아이를 때리는 거지? 저 애도 나처럼 맞는 게 일인 것인가? 잘못한 건 저 사람들인데 대체 왜 아이가 대신 맞는 거지? 대체….

너자가 분노에 이를 악물었다. 너자는 당장에라도 회초리를 휘두르는 남자를 저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자는 떠올렸다. 최초에 맞는 것에 반항했을 때 떼거리로 몰려들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온갖 물건으로 개처럼 처맞던 자신을. 눈이 벌게 저 자신의 머리를 돌로 찍어대던 남자들을.

아이는 안쓰러울 정도로 울었다. 강의실 안에 울리는 살을 쳐대는 소리와 아이가 훌쩍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콜로프는 마지막에 적당히 손에 힘을 빼 요령 있게 회초리를 휘둘렀다. 아무리 콜로프라 해도 아이를 때리는 것만큼은 입안이 썼기 때문이었다.

“끝났습니다. 나가도 좋습니다.”

콜로프의 말에 아이가 쩔뚝이며 강의실을 도망가듯 나갔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보며 너자가 아이가 있던 곳으로 걸어가 섰다.

너자가 강의실 앞에 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소문의 ‘그’ 노예였다. 학생들은 흥미롭게 노예를 훑어보았다. 노예의 단정한 얼굴이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콜로프가 가볍게 팔을 풀며 말했다.

“종아리를 걷으세요.”

너자는 콜로프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눈치껏 뒤돌아 통이 커 널널한 검은색 바지 단을 무릎 아래까지 접었다.

“호오….”

캔디스는 아까부터 감질나게 보였던 노예의 뼈가 불거져 튀어나왔던 복숭아뼈 위로 보이는 발목이, 점점 올라가는 검은색 바지 단 아래로 기다란 종아리가 보이자 말라 가는 입술에 혀를 적셨다.

캔디스는 성욕이 왕성한 편이었다. 그는 14살 때부터 집 안에 있던 하녀들을 건드리고 다녔다. 그리고 16살에 피임을 미처 하지 못했던 하녀가 임신해 적당히 돈을 주고 내쫓았다. 그러나 그 하녀는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난입해 훼방을 놓았고 아버지만 알고 있던 사실을 어머니까지 알게 되어 난리가 났었다.

그 후 캔디스는 차선책으로 임신 걱정이 없는 시종들이나 남창을 데려와 성욕을 풀었다. 처음에는 똥구멍에 처넣는 것이 찝찝했지만 곧 캔디스는 그 묘하고 배덕한 느낌에 중독됐다.

노예는 캔디스가 먹어 보지 못한 타입의 몸뚱이였다. 시종들은 빠짝 마르거나 토실했다. 남창은 몸에 공들인 티가 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노예처럼 키가 크고 옆 통이 굵지는 않았다.

저 노예의 가느다란 발목을 한 손에 쥐어 잡아 침대에 내리꽂고 당황해서 몸부림치는 몸을 억누르고 싶었다. 캔디스가 음험하게 눈을 빛내며 노예를 보고 있을 때 콜로프가 이를 악물고 회초리를 휘둘렀다.

빡!

“…-!”

너자가 멍하니 앞을 보다 종아리에 내다 꽂히는 아찔한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아까 캔디스의 휘핑보이를 때릴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였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던 학생들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아까처럼 가볍게 종아리를 치는 정도를 생각했지만 콜로프는 아니었다. 아이는 아이였고, 이 노예는 성인 노예였다. 콜로프는 체격과 완급에 따라 다르게 체벌을 해야 한다는 주의였고, 스트레스가 뻗칠 대로 뻗힌 콜로프는 이를 악물고 때렸다.

열 대 정도 때렸을까, 콜로프의 이마에 땀이 흘렀고 매질을 하던 팔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때, 너자가 숨을 들이켜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앗….”

마치 관계를 하는 것처럼 억눌리고 애달픈 목소리에 콜로프의 매질에 힘이 순간 들어갔다. 아까와는 비교하지 못하게 강하게 치는 콜로프에 너자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였다. 그 모습에 콜로프가 저도 모르게 비꼬며 팔을 휘둘렀다.

짝!

“누가,”

“큿….”

짝!

“자세를, 그따위로 하랬지?”

짝!

너자가 타는 듯한 통증과 은퇴 전에 기사였던 콜로프의 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휘청였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가려는 노예의 뒤통수를 잡고 칠판에 처박았다. 흑색 차가운 칠판에 오른쪽 볼이 짓눌린 너자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클로프가 강하게 밀었다. 너자의 양팔이 허우적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뺀 상태로 양손을 칠판에 댔다.

클로프는 마지막 다섯대를 강하게 친 후 피 묻은 회초리를 잘 갈무리했다. 너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헐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종아리에 감각이 없었다. 코만치의 너자는 수없이 다쳤고 맞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체벌은 처음이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체벌은 생각 외로 너무 아팠고 고통스러웠다.

너자는 감히 자세를 바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칠판에 가져다 댄 양손을 꾹 쥐며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너자는 힘이 풀려 칠판에 기대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마치 뒤치기를 하는 듯한 자세에 캔디스의 눈이 황홀하게 침식됐다.

"아..."

캔디스가 다짐했다.

저 노예를 어떻게든 따먹고 말 것이다.

맥켄지는 따사로운 햇살을 느끼며 나른한 기분을 만끽했다. 수업은 꽤 들을 만했다. 실력 없는 변태 새끼인 줄 알았는데 꽤 입담이 괜찮았다. 맥켄지가 만년필로 전공 책의 끝부분에 낙서를 하며 턱을 괴었다.

처음 강의실에 왔을 때의 즐겁고 설렘에 가득 찼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엄숙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 클로프의 폭주 때문이겠지. 클로프는 이것을 노렸을 것이다. 귀족 아드님, 따님들께 직접 주의를 주지 못하니 휘핑보이를 개 패듯 패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뭐, 마지막쯤에는 클로프의 변태적인 욕망도 묻어났기는 했지만 결과는 아주 좋았다. 학생들은 감히 다른 짓을 하지 못했다.

적막한 강의실은 클로프의 목소리와 간간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맥켄지의 시선이 문득 강의실 문 쪽으로 향했다. 소란의 주인공인 노예가 음울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클로프에게 처맞기 전에는 꽤 즐거워 보였었다. 만약 노예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미친 듯이 흔들렸을 것이었지만 지금의 노예는 눈썹이 밑으로 축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맥켄지의 알 바는 아니었다. 

맥켄지가 나른한 표정으로 시선을 다시 칠판으로 향하려고 했을 때 거슬리는 노란 머리통 하나에 눈살을 찌푸렸다.

캔디스가 뚫어져라 자신의 노예를 보고 있었다. 저 재수 없는 주둥이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까는 감히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자신의 것을 탐하는 캔디스에게 열 받아 자세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캔디스는 저 노예가 꽤 마음에 든 것처럼 보였다

“흐음….”

잘만 하면, 캔디스를 손안에 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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