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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예 (1/9)

1. 노예

“저 검은 머리카락 색을 보라지. 악마의 하수인이 틀림없어.”

“몸집은 또 왜 저리 무식하게 큰 거람?”

너자는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하얀 사람들의 눈초리에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더욱 빳빳하게 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말은 아닐 것이다. 너자는 당장에라도 이 역겨운 공간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너자는 본래 대평원에 있던 코만치라는 부족의 전사였다. 코만치는 드넓은 평원에 천으로 된 움막을 지어 생활했고 늑대를 길들여 키웠다. 푸릇한 땅과 파란 하늘,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의 시원하고 넓은 강이 있는 대평원은 평화로웠으며, 소수민족이지만 짐승을 기르고 길들이는 데 탁월한 소질이 있는 민족이었기에 때때로 발생하는 소수민족 간의 싸움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용맹한 부족이었다.

그는 태어나기를 남들보다 기골이 장대했으며 힘이 셌다. 남들이 세 발자국 갈 때 너자는 한 발자국에 당도했고, 남들이 대여섯 번 주먹을 휘두르며 쓰러뜨릴 때 그는 주먹을 세 번 휘둘러 적을 쓰러뜨렸다. 또 짐승을 길들이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그의 늑대는 다른 전사들의 늑대보다 더욱 명령에 잘 복종했다. 그런 그는 부족 내 최고 전사인 늑대 전사의 칭호를 단 전사였다.

코만치는 자급자족하며 살아왔고 타 부족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출몰한 하얀 사람들에, 코만치의 평화가 점점 사라졌다.

그들은 어느 순간 그들의 터전에 들어와 농작물을 훔쳐 가거나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부족민들을 관찰하고 때때로 이상한 행동을 하며 괴롭혔다. 어느 순간 나타나 시비를 거는 하얀 사람들에 부족민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거슬리지만 그렇다고 죽일 정도는 아니라 그럴 때마다 너자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늑대를 대동하여 적당히 겁을 주고 쫓아냈다.

그러기를 거의 반년이었다. 어느 날 부족 내 구석에 못 보던 직물이 버려져 있었다.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느 집의 직물이 바람에 날아간 것인 줄 알고 그 직물의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직물은 부족 내 직물과는 달랐다. 부족은 자급자족했으며 그들은 원색의 화려한 수로 짜였다는 특징이 있는 직물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직물은 아무리 봐도 부족 내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직물이었다.

부족의 아이들은 처음 보는 직물에 신기해하며 그 직물을 망토처럼 두르거나 휘두르며 놀았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었고 그래 봤자 직물 따위라 부족민들은 그것의 출처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적당한 곳에 치웠다. 하지만 그 직물이 부족에서 발견된 이후로 사람들이 차츰 죽어 나갔다.

사람들의 몸이 썩어 갔고 종래에는 힘없이 죽어 갔다. 갑자기 일어난 전염병에 부족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너자는 갑자기 퍼진 전염병에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병은 부족 내에서 처음이었다. 처음 겪는 질병 같은 재앙은 그들이 가진 의학지식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부족이 죽음의 병에 난리가 난 와중에, 어느 날 두 번째 재앙이 나타났다.

어스름한 새벽에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침입자들의 고함이 부족을 뒤흔들었다. 이유 없이 학살당하는 부족민들의 비명이 코만치의 터를 울렸다.

잠귀가 밝은 너자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다른 전사들도 싸울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너자는 전사들을 대동해 용맹하게 싸웠다. 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불을 뿜어내는 검은 막대기에 많은 늑대와 전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 너자는 힘과 전략으로 하얀 침입자의 우두머리 같은 사람을 죽였다. 우두머리가 죽자 하얀 사람들은 갈팡질팡했다. 그 틈을 타 너자는 추장과 그의 자녀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을 전사들과 합심하여 데리고 도망쳤다.

그 후는 지루할 정도로 쫓고 쫓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얀 사람들은 코만치의 땅을 뺏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마치 코만치 부족민 전체를 학살하려는 듯 끈질기게 쫓아왔고 공격했다.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다. 부족민들은 전의를 상실했지만 너자와 전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싸웠다. 하지만 제한된 식량, 적은 전사들의 수, 부상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용맹한 전사들이라도 지치기 마련이었다. 거의 일 년이라는 시간을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너자는 살아남은 후계와 어린아이들을 딱 두 필 남은 말에 태워 야밤에 도주시켰다.

너자는 엉엉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의젓하게 눈물을 참는 후계에 말했다.

“제발 살아남아 주세요.”

“응.”

“복수 따위 생각하지 말고… 살아 있기만 해 주세요.”

너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다른 말에 탄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후계는 울음을 삼키며 의젓하게 아이들을 달랬다. 그런 후계의 모습을 보며 너자는 미소를 지었다. 너자의 잘생긴 얼굴은 거듭된 전투와 스트레스로 살이 빠져 홀쭉해졌지만 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후계는 상황도 잊고 야무지게 외쳤다.

“죽지 마! 내가… 내가 꼭 데리러 올게!”

마치 고백과도 같은 당찬 말에 너자는 상황도 잊고 잠시 흐드러지게 웃었다.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저렇게 늠름하게 자랐다. 너자는 정말 기뻤지만 감상에 젖어 들 시간 따위는 없었다. 너자가 말들의 궁둥이를 쳤다.

“!”

놀란 말들이 울며 달려갔다. 놀라 뒤돌아 자신을 보려 뭐라 외치려는 후계에 너자는 검지로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 너자는 미소를 지우며 남은 전사들과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지형을 이용한 전술과 몇 남지 않은 늑대들을 활용한 전투였다. 아마 이번 전투가 마지막이겠지. 전사들 모두 이 사실을 알 것이나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들려오는 총소리에 서로 마지막 포옹을 했다. 늑대들은 호승심에 투레질하며 뛰어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전사 중 늑대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이제 너자뿐이었다. 너자가 알파 늑대의 주둥이에 입 맞추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전사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지옥에서 보자!”

패기로운 너자의 말에 전사들이 소리 질렀다.

날카로운 총성이, 귀를 찢었다.

* * *

결과는 참패였다. 너자 외 모든 전사가, 마지막 남은 늑대가 죽었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켰다. 코만치는 대륙 어딘가에서 태어날 것이고 비밀스럽게 코만치의 정신이, 핏줄이 전승될 것이다.

너자는 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질질 흘렸다. 콜록, 콜록 죽어 가는 몸뚱이에서 쌔액거리는 소리가 가련하게 퍼졌다. 걸레짝이 되어 죽어 가는 너자의 곁으로 하얀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다가왔다. 거의 일 년이다. 일 년간 저자와 싸웠고 너자는 졌다.

분한 마음에 너자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넘어갈 듯 가팔라졌다. 그런 너자의 모습을 보며 우두머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즐거운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뭐… 기쁨의 독백 이런 건가 보지.

“_…-…!”

“-…~…!”

“…….”

그들은 죽어 가는 너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흠, 기쁨의 독백치고는 화난 것 같다. 그들의 목소리가 꽤 높고 날카로운 게 좋은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너자는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다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코만치의 아이들은 살렸다. 하지만 코만치의 주민들은, 전사들은, 동물들은 모두 죽어 버렸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고 코만치도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불시에, 아무 이유 없이, 잔인하게 학살이 될 줄은 몰랐다.

너자는 멍청하니 눈만 깜빡이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다 하얀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너자는 숨만 꼴딱이며 우두머리를 응시했다. 하얀 우두머리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단정한 턱을 문질렀다. 그의 홍안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너자에게 다가가,

빠악.

“-…!”

총알에 뚫려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너자의 배를 발로 찼다.

* * *

“악마 새끼야! 당장 마을에서 꺼져!”

“…….”

너자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아이들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하얀 사람들은 정말 못돼 처먹었다. 코만치에서는 사람을 따돌리면 바로 엄하게 벌했다. 거기에 사람에게 돌을 던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곳은, 코만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 뭘 봐!”

“어디 노예 새끼가 눈을 흘겨!”

아이들은 한숨을 쉬며 제 갈 길을 가는 너자를 보며 더욱 방방 뛰며 쫓아갔다. 처음에는 돌을 던져 너자를 공격하는 정도였으나 아무런 타격감이 없어 보이는 너자에게 바짝 약이 오른 어린아이들이 솜방망이 같은 손과 발로 너자의 정강이를 차댔다.

곰처럼 우뚝 선 노예는 악마처럼 머리카락이 시꺼멨다. 거기에 일반 성인 남성의 키보다 머리통 두 개가 더 달린 것처럼 큰 키는 위압적이었다. 저건 야만인이고 노예였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니 돌을 던져도 됐고 욕을 해도 된다. 어른들도 야만인 노예를 보면 침을 뱉고 욕을 하니 자신들도 그래도 되는 것이었다.

너자는 그런 아이들을 치지 않게 조심히 걸으며 커다란 성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더 따라가서 노예를 괴롭히고 싶었으나 문지기들의 엄한 눈빛에 입을 내밀었고, 이만 집에 가라는 문지기들의 명령에 뿔뿔이 흩어졌다.

도노반 후작 가문의 방계 에르베 성에 새로 들어온 노예는 대륙의 야만인이었다. 왕국이었던 이베아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대륙 초원의 원주민들을 학살해 영토를 빼앗았다. 드넓은 대륙을 토벌한 이베아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칭제했다. 또 겹경사로 엄청난 땅덩이뿐만 아니라 대륙 초원 땅 안에 매립된 엄청난 양의 금과 대륙의 풍부한 자원은 제국을 더욱 강하고 풍족하게 만들었다. 이베아는 주변 나라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막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중 도노반 가문은 대륙 야만인 토벌의 일등 공신인 가문이었다.

도노반 가문은 유서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었다. 선조인 미켈란 도노반이 총(머스킷)이라는 무기를 발명해 그 개런티로 귀족 못지않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미켈란 도노반은 그 돈으로 후작이라는 작위를 샀다. 그때 당시의 왕 이베아 5세는 허영심과 사치가 심해 빠르게 국고를 탕진시켰다. 거기에 정치에도 영 재능이 없어 귀족들의 무시를 받았고, 귀족들은 각 영지에서 쥐어짠 세금을 고대로 바치지 않았다. 그 짓이 약 8년이었다.

이베아는 정말 돈이 없었고 이베아 5세는 엄청난 기부금을 내며 작위를 요구하는 도노반을 무시하지 못했다. 천한 놈들이 돈으로 작위를 산다며 거품을 물었던 귀족님들 또한 도노반의 뇌물을 받아 입을 다무는 대신 재산을 불렸다. 이것이 도노반 후작 가문의 탄생이었다.

도노반 후작 가문은 근본 없는 천한 귀족 가문이 생겨났다고 이베아 내 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총이라는 무기는 원시적으로 칼과 활을 휘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살상력을 발휘했고, 그것은 곧 이베아 왕국만의 독보적인 무기가 되었다.

철로 된 검과 나무로 된 활과 창만을 쓰던 왕국의 기사들은 총이라는 새로운 무기에 열광했다. 리볼버는 근거리에서 쏴도 확실하게 생명을 앗아갔고 머스킷(장총)은 먼 거리에서 쏴도 화살보다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았으며, 활보다 앞으로 나가는 힘이 강해 표적의 숨통을 한 번에 끊어놨다. 사람들은 미켈란 도노반이 발명한 총에 사로잡혔다.

왕국 내에서 도노반 후작 가문의 입지가 점점 견고해졌다. 거기에 유례없던 대륙 정복이라는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는 무기가 필요했고 활이나 칼보다 도노반 가문의 총이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거기에 전쟁의 무기는 모두 도노반 가문에서 후원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 무기로만 가문의 이름을 떨친 게 아니었다. 직계 혈통이 아닌 방계 혈통인 워린은 도노반이 가지고 있는 영지 중 제일 작고 볼품없는 영지의 장손이었고 이름뿐인 자작이었다.

도노반 가문의 가주인 러트 도노반은 본가에서 파티를 열어도 방계 장손인 워린을 초대하지 않았다. 아마 직계인 러트 도노반은 워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지도 모를 것이다.

또 워린은 왕국 기사단 중 제일 힘이 없고 서열이 낮은 제9대대 기사단장에 불과했다.

그가 처음 기사가 된 계기도 왕국의 영광이 될 것이라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었다. 머리는 나쁜 쪽으로는 잘 돌아가는데 경영으로는 영 젬병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말로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것과 싸움질뿐이었다.

외동아들 워린은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었지만, 방계 가문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고 자신이라도 일하지 않으면 정말 쥐 오줌만 한 영토를 굴릴 수 없어 왕국의 기사단에 입단을 했다. 다행히도 워린에게 기사단 생활은 잘 맞았다. 그렇게 기사단에서 구르고 후작 가문의 방계라는 후광에 9대대 최연소 기사단장이 될 수 있었다.

야만인 토벌 전쟁이 시작되었다. 대륙 토벌에 앞장섰던 1대대 기사단장인 메이트 인디고 공작의 죽음과 야만인들의 격렬한 반격에 왕국 군은 와해될 뻔했다. 잦은 탈영과 전의 상실에 좀먹어 가고 있던 왕국 군을 보다 못한 워린이(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었으나 워린의 머리는 이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자신의 신분 상승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전쟁의 선두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야만인들의 부족 중 제일 악랄하고 강대한 코만치 부족을 몰살시켰다.

전쟁 무기를 유일하게 찍어 생산하는 후작 가문의 후광, 그리고 비록 방계 혈통이지만 야만인 토벌의 일등 공신인 워린의 무공으로 도노반 가문은 다시금 황제의 눈에 들었고, 전쟁이 끝나면 도노반 가문은 공작 가문이 된다는 황제의 약속을 받아냈다.

왕국이 제국이 되었으나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전쟁통에 호시탐탐 제국을 해치려는 주변 왕국과 숨어 있는 야만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워린은 사경을 헤매는 전쟁포로 너자를 에르베성 앞마당에 쓰레기를 버리듯 버려 놓고 어안이 벙벙해하는 시종들에게 살려서 노예로 쓰라는 말만 하고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너자는 워린이 가져온 전리품이었다.

* * *

너자는 긍지 높은 코만치의 전사였으나 지금은 천한 노예였다. 늑대를 타며 산과 들을 달렸던 너자는 개처럼 기며 사람들의 혐오에 움츠러들었다. 너자의 긍지는 꺾인 지 오래였다.

곰과 같은 덩치와 팽팽하게 부푼 조각 같았던 근육들은 워린과의 마지막 전투에 상해 버려 위협적인 근육들이 많이 빠졌다. 하지만 하얀 사람들보다는 여전히 위협적인 키와 몸뚱이였다.

에르베 가문의 시종장은 너자에게 일부로 밥을 제때 주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몸뚱이를 좀 죽여 놔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린이 노예로 쓰라고 했지만 달리 쓸 곳도 없었다. 말도 통하지도 않아 무언가를 시키기에도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너자가 에르베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험해서 일반 시종들에게 시키지 못하는 힘쓰는 일과… 스트레스로 돌아 버린 아랫것들의 화풀이 인형 일이었다.

통상적으로 에르베성 내에서 사용인들끼리의 다툼과 괴롭힘은 금지였고 이를 들킬 경우 엄하게 벌했다. 그들은 방계 귀족의 사용인이었고 귀족의 시종과 시녀는 우아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너자는 노예였다. 시종장은 노예를 괴롭히든, 노예를 욕하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았다.

너자는 강한 전사였지만 정신적인 괴롭힘은 처음이었기에 힘들었다. 때로는 육체적인 괴로움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이 더욱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들은 온갖 꼬투리를 잡으면서 너자를 모함하고 괴롭혔다. 그들은 더 나아가 너자를 육체적으로도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당한 짓을 당하더라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을뿐더러 다수의 괴롭힘은 혼자이며 노예인 너자가 이길 수 없었다. 또 제때 치료받지 못한 정신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가 썩어 갔다.

너자는 걸핏하면 에르베성 아름다운 잔디 광장의 커다란 나무에 묶여 등을 채찍으로 처맞았다. 그들은 너자가 아파하고 너자의 등이 난도질당하는 것을 보며 통쾌해했다.

오늘도 너자를 괴롭힐 생각에 들떠 있던 필립스는 저 멀리 보이는 악마같이 새까만 노예에게 빽 하니 소리 질렀다.

“너 이 새끼! 왜 이제야 왔어! 너 내가 가져오라는 건 가져온 거야? 분명 못 가져왔겠지! 그걸 어떻게 가져…. 왔네?”

필립스는 너자를 엿 먹일 생각으로 끌 것을 주지 않은 채 맨몸으로 성 밖으로 나가 가죽들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했다. 그가 가져오라고 한 가죽은 보통 성인 남성의 키와 같았고 가죽의 두께 때문에 엄청나게 무거워 성인 남자가 가죽 한 덩이를 드는 것도 버거웠다. 그런 가죽들이 무려 십여 개가 되었는데 너자는 그 가죽들을 거뜬하게 양손으로 가져왔다. 너자를 괴롭힐 생각에 내내 즐거웠던 필립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걸 어떻게 가져온 거야!”

“?”

너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맞을 텐데… 가라고 한 곳의 가게는 예전에 한번 같이 갔던 가게라 길을 외우고 있었고 저자가 쥐여 준 종이를 그 가게의 주인에게 주니 가게 주인은 땅에 침을 뱉으면서도 종이에 적힌 것을 건네주었다(아마도 맞을 것이다. 종이를 보고 가져 온 것이니).

너자는 일단 양손에 한 아름 들고 있던 가죽들을 화를 내는 시종에게 건네며 아직은 서툰 제국어로 뜨문뜨문 말했다.

“말한다. 대머리. 가져와.”

“이게 누구보고 대머리래!”

결코 늙은 나이가 아닌 그의 맨들맨들한 이마가 시뻘게지며 파들파들 떨렸다. 필립스의 이마는 남들보다 길었고 정수리에 머리털 또한 적었다. 그래서 동기 시종들이 지어 준 별명이 대머리였다.

너자는 다른 시종들이 그를 칭할 때 대머리 대머리 해서 그의 이름을 대머리로 인식했을 뿐이었다.

“대머리.”

“이 새끼가!”

필립스는 분노하며 손에 쥔 채찍을 들었다. 어차피 가죽 심부름은 핑계였다. 노예가 심부름을 잘했든 못했든 체벌을 할 생각이었다. 필립스는 저 잘생기고 매끈한 얼굴이 당황으로, 두려움으로 잠식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허공을 가르는 채찍이 너자의 얼굴과 상체를 찢었다. 너자는 소리도 지르지 않고 바닥에 쓰러졌다.

초반에 그들이 내리는 폭력에 반항했고 피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체벌은 심해졌고 정말 죽지 않을 만큼만 맞았다.

강했던 너자는 마지막 전투 이후로 몸이 걸레짝이 되었으며 심리적인 압박감과 수많은 시종들의 구타는 그의 정신을 찢어 놓기 충분했다. 그때 이후로 너자는 그들이 때릴 때 절대 피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너자의 몸뚱이에 수십 개의 뱀이 기어갔다. 아픈 것은 익숙했다. 이까짓 채찍질은 너자가 사냥을 하며, 다른 부족과 싸우며 입은 상처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하지만 너자는 너무 지쳤다.

아무리 단단한 나무라도 수백 번의 도끼질에는 꺾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외로움을, 두려움을 티 낼 수는 없었다. 틈을 보이면….

“아이고, 도련님! 가시면 안 됩니다!”

일순간 채찍질이 멈췄다. 필립스는 자신의 근처로 온 사내를 보곤 사색이 되어 팔이 뻐근하도록 휘두르던 채찍을 숨기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도… 도련님!”

“…….”

너자는 자신을 아프도록 때렸던 채찍이 멈춘 것에 공벌레처럼 웅크렸던 몸을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한 청년이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에 있는 듯한 남자였다. 남자의 금색 머리카락은 마치 햇빛을 머금은 듯 찬란히 빛났고 새파란 눈동자는 햇빛을 머금은 새파란 강이 물결치는 것같이 애수에 차 있었다.

너자는 저렇게 예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너자는 채찍질에 온몸이 찢어질 것같이 욱신거리는 것마저 잊고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예가 제 주제도 모르고 귀하신 분을 버릇없이 보기에 맥켄지의 옆에 있던 두 명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인 샬로메가 노예의 머리통에 커다란 손을 얹어 억지로 밑으로 숙이게 했다. 그리고 맥켄지의 시종이 노예에게 호통쳤다.

“무엄하다! 노예 주제에 감히 도련님의 얼굴을 보다니!”

시종의 말을 아주 약간 알아들은 너자가 멍청하니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노예는 나니까 저 남자는 나에게 화내는 것이다. 천사 같은 남자를 보니 옆에 있던 전사가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눌렀다. 그럼 나는 저 남자와 눈도 마주치면 안 되는 것이니까… 귀하신 분이겠구나 싶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추리하는 너자를 보며 맥켄지가 무심히 말했다.

“악마라고 하더니, 그냥 사람이구나.”

“아휴, 도련님! 악마 맞습니다! 저놈이 그놈이에요. 야만족 중에 최후로 살아남은 악귀 같은 전사 놈! 저놈 손에 우리 이베아 기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요!”

“…….”

손사래를 처대며 기겁을 하는 시종의 말에 맥켄지가 노예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했다.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어도 한눈에 보기에 풍채가 좋았다. 멍석말이를 당해도 뒈지지는 않겠다 싶었다. 또 아까 채찍으로 처맞았을 때도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분명 독한 놈일 것이고 호위인 샬로메가 머리통을 강제로 처박아도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항의의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노예는 유순하며 멍청했다. 매 맞는 아이로 딱이었다.

맥켄지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져가지.”

맥켄지의 말에 시종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말을 늘어뜨렸다.

“원하신다면 가져가긴 하는데… 그래도 영 꺼림칙해서….”

우유부단한 시종의 말에 맥켄지가 말했다.

“영 꺼림칙하면 죽이면 된다. 시간이 없다. 가져가지.”

단호한 맥켄지의 말에 샬로메가 노예의 머리칼을 한 손에 쥐어 잡고 위로 끌었다. 아! 갑작스러운 두피의 통증에 너자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너자의 작은 비명 소리에 맥켄지의 눈이 묘해졌다. 하지만 샬로메는 그런 맥켄지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부산을 떨며 빨리 데려가자고 총총거리며 앞장서는 시종에 노예를 일으켜 성 밖에 대기해 놓은 짐마차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

맥켄지가 팔짱을 끼며 점점 멀어지는 세 명의 뒷모습을 보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필립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여전히 자신의 옆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호위기사인 티모시에게 명령했다.

“저자의 눈알을 뽑아버려라.”

“네.”

필립스가 저를 향해 잔인한 말을 내뱉은 맥켄지에 소스라치며 안 된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손을 싹싹 빌며 애원했지만, 곧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맥켄지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떴다.

너자와 샬로메, 그리고 시종은 성 앞에 세워 놨던 마차에 도착했다. 샬로메는 짐마차 쪽에 너자를 세웠다. 너자가 눈치껏 짐마차 쪽에 타라는 것으로 알아들어 제 발로 짐칸에 타려고 할 때 샬로메가 그를 저지하고 짐칸 구석에 굴러다니는 밧줄을 주워 들며 말했다.

“양손을 등 뒤로 가져다 대라.”

“…….”

“어서.”

샬로메의 말을 너자는 따르지 않았다. 말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자가 멍청하니 호위기사인 샬로메를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시종이 노발대발하며 너자에게 소리 질렀다.

“버릇없는 새끼! 얼른 샬로메 경의 말에 따르지 못해?”

시종의 꾸지람에도 너자가 멍청하니 있자 다혈질인 시종이 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자 샬로메가 시종에게 그만하라 손짓을 했다. 그리고 맹하니 있는 노예에게 자신의 양손을 보여 주며 간단하게 말했다.

“손.”

너자는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양손을 보며 자신의 양손을 샬로메의 앞에 내밀었다. 샬로메가 자신의 양손을 뒷짐 지듯 넘기자 너자도 그를 따라 자신의 양손을 뒤로 넘겼고 샬로메는 구렁이 담 넘듯 순식간에 그의 양 손목에 밧줄을 단단히 묶었다.

“…!”

살기가 없어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았던 너자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양 손목이 묶인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눈썹이 억울하다는 듯 내려가자 샬로메는 그를 못 본 척하며 그에게 손가락으로 짐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

세 살배기 꼬마도 알 수 있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손짓이었다. 샬로메의 말뜻을 알아들은 너자가 입을 삐죽이며 짐칸에 올라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짐칸이 꽤 높아 양손으로 짐칸의 모서리를 잡고 버둥이며 오를 텐데 너자는 키가 큰 탓에 높은 짐칸도 도움닫기 한 번에 껑충 올라서 적당한 곳에 쭈그려 앉을 수 있었다. 이 상황이 갑작스러울 만한데 너자는 이제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있든, 다른 어느 곳에 있든 지금 상황보다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자의 이지는 단조롭고 학대받는 일상에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졌다.

“…….”

그 모습을 계속해서 뒤에서 지켜보던 맥켄지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노예를 다루는 샬로메의 모습이 마치 개를 다루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노예는 까만 짐승 같았다. 그 모습에 맥켄지가 어렸을 적 길렀던 크고 까맸던 개를 떠올렸다.

야성적인 외양과 대비되게 애교 있는 개의 성격에 맥켄지는 그 개를 꽤나 아꼈다. 하지만 키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개의 머리를 돌로 찍어 죽여 버렸었다.

그 개는 아무 사람이나 보면 꼬리를 흔들던 멍청한 개였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른한 걸음으로 마차로 향하는 맥켄지에게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정복에 작은 피 얼룩을 단 채 기척 없이 다가온 티모시가 물었다. 맥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무시에 티모시는 묵례했다.

맥켄지가 언뜻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시종과 샬로메가 따라 들어갔고, 티모시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따로 타고 온 하얀색 말에 올라탔다.

마부는 솜씨 좋게 부드럽게 말을 몰았다. 그들을 실은 마차와 짐마차는 곧 작고 허름한 에르베성을 빠져나왔다.

* * *

마차는 거의 반나절을 달려 도노반성에 도착했다. 좁은 짐마차 구석에 껴 있던 터라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피곤함에 반쯤 죽어가던 너자가 눈치껏 짐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성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자가 지금껏 있었던 에르베성도 꽤 크고 웅장한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성은 건축물에 문외한이고, 살아온 문화 때문에 건축물의 아름다움 따위 전혀 모르는 너자가 보기에도 정말 크고 멋졌고 아름다웠다.

도노반 성은 후작성이지만 그 크기와 외관은 공작성 못지않았다. 선조 미켈란 도노반은 후작 작위를 산 후 받은 허름한 성을 돈으로 처바르기 시작했다. 미켈란 도노반의 의지를 이어받은 도노반 2세는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 성을 증축했고 도노반 3세에 모든 공사를 완료했다. 귀족들은 천한 핏줄이 발악한다며 무시했지만 완공된 도노반 후작성을 보며 질투했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일 년 내외로 모든 게 끝날 것이다. 또 전쟁의 일등 공신인 도노반 가문은 정복한 대륙의 엄청난 부지의 땅과 황제가 내리는 엄청난 하사금과 공작위를 수여할 것이다.

이베아 제국의 숨은 실세는 도노반 공작 가문이 될 것이 분명했다.

도노반 후작 가문에는 후작 부부 아래로 장남 러트 도노반, 막내 맥켄지 도노반이 있다. 장남은 어렸을 때부터 말주변이 좋고 머리 회전이 빨라 장자로서 배우는 정치학, 경제학을 막힘없이 흡수했고, 장성하자 바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후작 부인은 몸이 약해 장남 외로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장자가 14살 때 막내를 임신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임신에 후작 부부는 기뻐했고 장남도 본인이 장성하더라도 막내는 애새끼에 불과해 자신의 앞날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장남은 사랑스러운 막내를 아꼈다.

14년 만에 찾아온 막둥이에 후작 부부와 장남은 막내를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막내 맥켄지는 어렸을 때부터 원하는 게 없었다. 원하기 전에 그의 손에는 무엇이든 쥐어졌다. 게다가 막내 맥켄지의 외모는 후작 부인을 쏙 빼닮아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아이를 보는 사람 모두가 아이의 관심을 받기를 원했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달콤한 허니블론드와 햇빛을 머금은 것 같은 새파란 눈동자는 보는 사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아이의 달콤한 목소리는 천상의 소리와 같았다.

아이는 무언가를 잘하든, 잘못하든 칭찬받았고 사랑받았다. 사랑을 차고 넘치도록 받은 맥켄지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아이로 자라났다.

맥켄지는 살아오면서 남의 눈치 따위 본 적이 없으며 사람들의 추앙과 존대가 익숙한 아이였다. 아이는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민치 않고 버렸고 살아 있는 것을 상처 입히는 것에 죄책감이 없었다. 그는 그래도 됐다.

그는 맥켄지 도노반이었으므로.

맥켄지의 냉정한 기질은 타고난 것이었다. 후작이 아이를 키우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아이의 타고난 기질은 더욱 안 좋은 쪽으로 물들었으며 이미 대가리가 너무 커 버린 아이의 성격을 교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천사같이 생긴 아이의 외면과 달리 내면은 너무도 오만했고 악랄했다. 그리고 성인이 된 그의 성격은 한결같았다.

그러던 중 이베아 왕국이 이베아 제국으로 칭제하며 제국 아카메디를 설립했다. 교육의 목적이 아닌 제국과 타 왕국의 귀족 자제들의 사교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적게는 13세부터 많게는 25세까지 입학 허용 연령대는 다양했다.

맥켄지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해 기본 소양과 고급 소양을 모두 학습한 상태였지만 그의 사회화는 처참했다. 죽어라 파티에 내보내고 파티를 주최해도 그는 또래와 어울리지 않았다. 가문의 본업을 행함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교 행위도 귀족의 덕목이었다.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생을 모집할 때 후작 부부는 장남과 상의 후 맥켄지를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시키기로 했다.

제국 아카데미가 설립되니 알아서 입학생들이 모였다. 온갖 나라의 귀족 자제들이 입학을 지원했다. 이제 이들은 추후에 이베아 제국의 쓸모있는 패들이 될 것이다. 그런 아카데미에 이베아 제국의 실세 도노반 가문이 빠질 수 없었다.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차석대표이자 도노반 후작 가문의 차남 맥켄지의 사회화가 성공한다면 제국 아카데미에 있는 각 왕국의 귀족들은 새로운 돈줄이 될 것이다.

청사진을 계획한 후작 부부 내외가 다음으로 할 일은 매 맞는 아이를 들이는 일이었다.

보통의 귀족 자제들은 매 맞는 아이를 들이는 일이 없었다. 제국 아카데미의 목적은 말 그대로 아카데미라 학생 본인의 힘으로 사회화를 배우는 것이다. 학생이 잘못하면 당연히 학생이 체벌을 받아야 하지만 고위 귀족의 자제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국 아카데미의 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은 왕국, 제국의 고위급 미래 가주들을 이어 줄 연결 다리일 뿐이었다. 나머지 일반 귀족 자제들은 이들을 위한 체스 말에 불과했다. 그런 고위 귀족 자제들이 체벌을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매 맞는 아이를 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출신이 하찮았아야 했으며 입도 무거워야 한다. 또 죽더라도 아무 탈이 없어야 한다. 아무리 천민이라도 심한 체벌로 몸이 불구가 된다거나 죽어 버리면 제국법에 의해 재판에 회부가 된다. 그렇다고 고아를 들이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충성심 따위 없고 돈과 욕망에 휘둘리기에 십상이었다.

한참을 찾았지만 마땅히 시킬 아이가 없어 후작 부부는 애가 탔다.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식은 바로 사흘 뒤인데 매 맞는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분명 매 맞는 아이를 못 구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는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낼 것이다. 엄청난 부와 권세를 가진 도노반 후작 가문은 출신이 천하다 하여 뒷욕을 듣는데 매 맞는 아이를 구하지 못하면 역시 근본이 없어 그렇다며 뒷욕을 뒤지게 먹을 게 분명했다.

그러던 중 찾은 게 방계 도노반 일족 워린 에르베가 가져온 노예였다. 사실 아무리 방계라도 주인인 워린의 허락을 받아야 했지만 워린은 전쟁 영웅이라 지금 대륙 어딘가에서 싸움질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풍문으로 듣기로는 노예를 방치하고 있다고 들었다. 전리품으로 가져왔지만 잊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너자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도노반 후작 성 앞에 있는 것이었다.

맥켄지는 촌놈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노예를 잠시 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까만 머리와 커다란 덩치 탓에 조금 흥미가 일었지만 저런 싼 반응을 보이는 노예에게 금세 흥미를 잃었다. 저런 모자란 놈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게 맥켄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작은 주인이 성안으로 들어오자 안에 있던 시종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후작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귀해 보였다. 딱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재질의 옷과 통통히 살이 오른 사람들의 볼은 풍족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사실 너자는 이런 하얀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코만치에도 신분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코만치를 다스리는 족장, 족장의 후계, 신성한 제사를 치르는 주술사,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치료사, 코만치족을 지키는 전사들, 그리고 일반 주민들. 신분이 있기는 하되 그것은 부족민들 개개인이 할 줄 아는 일, 해야 하는 일을 나눈 것에 불과했다. 위계질서라고 해도 어린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눠 주고 곧 부족을 이끌어 갈 그들을 존중하는 것, 서로 할 줄 아는 일이 다르기에 내가 못 하는 것을 저 사람이 해 주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존중이 다였다. 물론 사람이기에 못된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질서를 다스리는 전사들에 의해 벌을 받았고 그런 행동을 교정받았다.

하지만 하얀 사람들은 달랐다. 하얀 사람들의 사회 구성은 마치 삼각형 같았다. 맨 아래에 있는 사람, 그 위에 있는 사람, 또 그 위 위에 있는 사람, 또 위 위 위에 있는 사람… 위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존재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래에 있는 사람을 함부로 대했고 아래에 있는 사람은 불만을 표시하면 안 됐다.

남자는 사용인들의 공손한 인사를 무시한 채 노예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너자는 자신을 데리고 온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야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경험상 하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있는 걸 싫어했다.

너자가 손이 뒤로 묶인 채 멀거니 서 있자 맥켄지의 시종이 혀를 쯧 차며 대기 중인 샬로메에게 말했다.

“저는 노예를 씻기고 가겠습니다. 도련님께 먼저 가세요.”

정중한 시종의 말에 샬로메가 고개를 까닥이다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시종에게 말했다.

“동행하겠습니다. 노예가 도망갈까 걱정입니다.”

“…….”

“도련님껜 티모시 경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샬로메의 말에 시종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지금까지는 호위이자 기사들인 샬로메와 티모시가 있기에 자신이 노예에게 소리 지르며 호통쳤지만, 저들이 없다면 만만해 보이는 저 악마 같은 노예가 해코지할지도 몰랐다. 아마 야만인 노예가 억한 마음을 먹고 자신을 공격한다면 순식간에 목이 따일 것이 분명했다.

시종은 샬로메의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마구간으로 가시죠.”

“마구간?”

“네. 마구간이요. 뒤뜰에 있는.”

“왜 마구간으로 갑니까? 시종들 공용 욕실이 있잖습니까.”

샬로메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시종에게 되물으니 시종이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노예가 감히 시종들의 욕실을 씁니까?”

“…….”

“마구간에 말들을 씻기는 우물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갈 겁니다.”

샬로메는 잠시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짓다 수긍했다. 그리고 앞장서 먼저 걸어가는 시종을 보다 옆에 멍청하니 있는 노예를 응시했다.

노예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샬로메의 시선을 끌었다. 샬로메도 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야만인 노예는 샬로메보다 머리통 하나 더 얹은 만큼 컸고 허름하고 낡은 누더기 안에 숨길 수 없는 단단한 근육들이 균형이 잘 잡힌 게 보였다. 분명 저 근육은 보여 주기 위한 근육이 아니라 뛰고, 구르고, 싸우며 만들어진 근육일 것이다. 듣기로 제국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버티며 투항했던 전사라고 했다. 야만인치고 군사 작전에 능한 부족이라고 했다. 지형과 날씨를 이용한 전술은 제국군을 꽤 고전시켰고 짐승을 타고 부리며 전투했다고 했다.

샬로메는 한때 왕국군 제2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을 만큼 실력이 좋은 기사였다. 왕국의 기사단은 명예로워 귀족 가의 자제들만이 입단했다. 그런 기사단에 평민인 샬로메가 입단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샬로메의 어미는 장사꾼이었지만 수완이 아주 좋아 집안에 돈이 아주 많았다. 능력 있는 어미는 자식이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검술과 체술에 감명받아 일반 귀족들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왕국 최고 기사를 선생으로 모셔 자식을 가르쳤다.

훌륭한 선생과 아낌없는 지지로 샬로메는 곧 왕국 내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자가 되었고 평민이지만 특례로 기사단에 입단하여 제2기사단의 부단장을 맡았다. 호리호리한 외형과 평민이라는 타이틀에 기사 견습생이었을 때는 무시를 당했지만, 곧 가차 없이 응징하는 샬로메에 그를 얕보는 무리는 사라졌다. 젊은 나이에 부단장이 된 샬로메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샬로메의 아비가 어미 몰래 잘못된 투자를 했고 그 투자는 막대한 지출이 되어 빚만 쌓여갔다. 가세가 휘청했고 샬로메와 형제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으로는 그 빚을 충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금지옥엽 맥켄지를 지킬 실력 좋은 호위기사를 찾던 러트 도노반의 눈에 들었고, 샬로메의 집안과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

총기 제작을 독점으로 하는 도노반 가문은 샬로메를 갖기 위해 파격적으로 원래 받던 개런티의 3분의 1만 받고 도노반의 신제품 총기를 샬로메의 집안에 대가 없이 우선으로 납품해 줬다. 이것은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안 그래도 도노반의 총기를 팔 수 있는 가문은 몇 안 됐고 새로운 총기를 납품받으려면 그에 따른 돈을 추가로 더 내야 하는데 일반 평민 상단에 개런티를 조금 받고 심지어 신제품을 아무 대가 없이 우선적으로 납품해 주는 대우는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다. 이는 곧 상단의 명예가 올라가는 일이었고 명예는 돈을 불렀다. 안 그래도 평민치고는 꽤 컸던 상단은 귀족들의 상단 못지않게 몸집을 불려갔다. 덤으로 샬로메의 아비가 싸 놓은 똥도 모두 치웠다(이후 샬로메의 아비는 이혼을 당해 개털이 되어 쫓겨났다. 제국은 여성의 이혼, 재가에 너그러웠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샬로메는 도노반 가의 전속 호위기사가 되었다.

샬로메는 대륙전쟁에 참여하지 못했고(도노반 가의 사병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방계인 워린 에르베가 참여하는 것으로 교체되었다), 대신 다른 이들에게 유유자적하게 호위 노릇이나 한다고, 근본이 없는 집안들끼리 돈 따먹기를 한다며 기사가 지녀야 할 긍지를 들먹인 욕을 한 사발 처먹었다. 뭐, 불행인지 다행인지 샬로메가 있던 제2기사단은 대륙전쟁 중 전멸했다.

샬로메는 귀족들 특유의 오만함에 내색하지 않았지만 불만이 많았었다.

고아하신 귀족 나리들은 금으로 된 정액을 싸나 보지.

그런 샬로메기에 노예를 보는 시선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쥐똥만 하게 유했다. 샬로메는 노예에게 손짓하며 걸음을 옮겼다. 너자는 자신을 보며 손짓하는 샬로메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너자도 샬로메에게 흥미가 일었다. 샬로메는 다른 하얀 사람들처럼 너자를 보며 소리 지르지 않았고, 샬로메의 행동과 기세는 잘 닦여진 칼과 같았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유약해 보이는 샬로메의 얼굴과 몸은 자세히 보면 단단했다. 아마 전사일 것이다. 샬로메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장검과 엉덩이 쪽에 매달려 있는 손바닥만 한 까만 쇠붙이는 동족들을 몰살시킨 그 지독한 무기일 것이다.

샬로메의 기세에 심연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너자의 전사로서의 호승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저자가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고 저자도 동족들을 몰살시켰을까 하는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 분노도 곧 바람에 꺼지는 초처럼 꺼졌다.

사방에서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의해 너자의 자아는 다시 개처럼 기었다.

너자는 곧 마구간의 우물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시종이 말을 씻길 때 쓰는 욕조만 한 바가지에다 우물의 물을 길을 차였다. 시종이 멍청히 서 있는 너자의 팔뚝을 함부로 잡아끌었다.

너자는 순간적인 반발심에 몸을 굳혔으나 어느새 우물가에 와글와글 모여든 시종들의 모습에 힘없이 끌려갔다.

“저게 그 야만인이야?”

“씹… 더러워. 저 땟자국을 봐.”

“진짜 악마의 후손인가 봐. 어떻게 머리카락이 저렇게 까매?”

사방에서 온갖 부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자의 자아는 더욱 작아졌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너자가 곧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시종이 너자의 걸레 같은 윗옷을 함부로 벗겼다. 순식간에 벗겨지는 셔츠는 뒤로 묶인 손 때문에 양 손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너자가 당황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하… 하지 마!”

시종들은 난생처음 들어 보는 야만인들의 언어에 놀랐다. 그리고 곧 와글와글 비웃고 욕했다. 말하는 것 봐 봐, 존나 이상해! 너자는 아까보다 더 시끄럽게 떠들며 웃어대는 시종들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움츠렸다. 사실 맨몸을 보이는 것에 부끄러움은 없었다. 코만치족의 너자는 항상 웃통을 벗고 다녔고 하의는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로인클로스를 입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너자를 불편하고 서럽게 만들었다.

맥켄지의 시종이 제가 벗겨 놓은 노예의 몸을 눈으로 훑다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젖통 봐… 암소 같네.”

시종의 목소리가 높고 큰 편이라 그의 발언은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듣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큰 소란이 되었다. 시종들이 온갖 저열한 말을 하며 비웃었다.

“…어서 씻기고 가지요.”

샬로메가 맥켄지의 시종 그레머에게 빨리 노예를 씻길 것을 명했다. 노예에 대한 측은함이라든가 동정심 따위가 아니었다. 별안간 떠오른 제 왕국 기사 시절 때문이었다. 뭐만 하면 놀림 받았고 뭐만 하면 욕먹었었다. 참 좆같았던 나날이었다. 출신만으로 샬로메는 저보다 실력 없는 새끼들에게 매도를 당했다.

낄낄대며 노예의 몸을 훑던 그레머가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실세 샬로메의 말에 비웃던 것을 멈추고 얼른 욕조같이 큰 나무통에 있는 물을 떠 노예에게 뿌렸다.

헉! 너자가 갑자기 머리통에 쏟아진 차가운 물에 화들짝 놀랐다. 뼈까지 시린 차가움에 너자가 몸을 휘청이자 그레머는 아예 너자를 나무통에 밀었다. 손이 뒤로 묶여 있는 탓에 피할 새도 없었던 너자가 차가운 물이 담겨 있는 나무통에 빠졌다.

차가움에 몸부림치는 너자를 그레머는 손재주 있게 씻겼다. 아니, 빨래하듯 빨았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그레머는 마치 빨랫감을 빨듯 노예를 씻겼고 오랜 시간 씻지 못해 꼬질꼬질했던 너자의 땟국물 때문에 나무통의 물이 금방 더러워졌다.

그 모습을 보던 시종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야유했고 그레머는 도와주지도 않는 것들이 시끄럽게 지랄한다고 짜증 냈다. 몹시 짜증 나고 귀찮다는 행동과 말투였지만 그의 손은 부지런하게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너자를 씻겼다.

한참 노예를 빨았다. 점점 구정물이 나오지 않고 투명한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그레머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수건으로 노예의 몸에 흘러내리는 물기를 대충 닦아 냈다.

음침하게 얼굴을 다 덮고 있던 까만 머리칼을 뒤로 넘겨 버린 그레머가 잠깐 행동을 멈췄다.

“…….”

땟국물에 얼굴이 까매 더러워 보였고 기름에 찌들었던 까만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자 뜻밖에 깨끗하고 하얀 얼굴이 나왔다. 이 상황이 속상한지 내려간 눈썹은 잘생겼고 머리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이목구비는 섬세했다.

음울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노예의 몸은 마치 잘 조각해 놓은 예술품 같았다. 여기저기 흉이 많은 몸통이었지만 그것마저 어울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우물가에 외설적인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샬로메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기류였다. 음, 잘 빨아졌군. 다가가도 병균 같은 게 옮지 않겠어.

구정물이 튈까 봐 저 멀리 있었던 샬로메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노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노예의 뒤편으로 가 귀찮게 매달려 있는 셔츠를 힘을 줘 찢어발겨 바닥에 버렸다. 그는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적막한 우물가에 젖은 넝마가 철퍽이며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노예의 바지가 물에 젖어 보는 사람이 불편해 보일 정도로 달라붙어 있었다.

“밑에도 씻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기왕 씻길 거 다 씻겨야지. 샬로메가 아무 악의 없이 말하며 노예의 고무줄 바지를 한 번에 내렸다. 마찬가지로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샬로메의 행위에 너자도 순순히 양발을 털어내어 바지를 벗었다. 너자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시종들의 모습에 거부감을 느낀 것이지 옷을 벗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미친….”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머에게 노예를 씻길 것을 명령하려 했던 샬로메가 그제야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

…지금 이 노예한테 섹스 텐션을 느끼는 거야? 샬로메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샬로메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노예는… 남자인데? 샬로메가 이 미친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너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레머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더 안 씻겨 주느냐는 표정에 마찬가지로 노예의 몸을 훑고 있던 그레머가 답지 않게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어… 어… 씻어야지.”

그레머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거즈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튼실하고 기다란 다리를 거즈로 슥 닦아 내릴 때 샬로메가 그레머의 손을 잡아채 노예의 몸에서 떼어내며 자신의 정복 재킷을 벗어 노예의 어깨에 대충 걸쳐 노예의 몸을 가렸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시종들에게 소리 질렀다.

“다들 안 꺼져?!”

고급 교양, 고급 도덕, 고급 신학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샬로메로서는 남자가 남자에게, 그것도 가축과도 같은 노예에게 발정하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이 노할 일이었다.

샬로메의 호통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종들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을 터줬다. 그에 샬로메가 노예의 팔뚝을 잡고 어디론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샬로메의 행동에 너자는 별다른 이의 없이 그를 따랐다. 샬로메가 자신을 따라오는 노예를 쓱 훑고는 우물가에서 거즈를 들고 눈만 깜빡이는 그레머에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죠.”

그의 냉정한 말에 그레머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샬로메와 노예의 뒤를 따랐다.

너자는 갑자기 화를 내는 전사와 자신을 씻기던 남자가 우물가를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사실 너자는 자신을 보며 비웃는 하얀 사람들 때문에 속상했지만, 온몸에 찌들었던 때가 벗겨져 가는 것에 살짝 기분이 좋아졌었다.

너자도 자신이 불쾌할 정도로 더러운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씻는 것은 사치여서 고양이 세수하듯 물로 대충 씻기만 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고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성안의 낡고 냄새나는 방 안이었다.

큰 부상을 치료하는 김에 한 번 씻긴 것을 제외하고 너자는 눈칫밥에 제대로 씻지 못했다.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은 너자에게 씻을 곳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조금 익숙해진 너자는 눈치껏 하얀 사람들이 잘 시간에 몰래 나와 우물가에서 재빨리 물만 끼얹는 수준으로 씻기만 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소리만 질러대던 작은 남자가 저를 시원하게 닦아 줬다. 시끄럽지만 좋은 사람이었다.

더 씻겨 주면 좋을 텐데… 아니, 양손에 묶인 밧줄만이라도 풀어주면 알아서 씻을 텐데… 너자는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찌들었던 때가 벗겨지고 불편한 옷들이 없어지니 너자의 걸음이 날아갈 듯 가뿐해졌다. 깨끗해진 너자에게 수많은 시선이 달라붙었다.

야만인 노예가 왔다는 소식에 후작 성의 시종, 시녀들이 아까보다 더 몰려와 후작 성 부지의 정원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너자는 일반 성인 남자들보다 키가 머리통 두 개를 얹어 놓은 것 이상으로 높았고 몸집 또한 컸다. 너자의 새까만 머리칼은 제국 내에서 아예 볼 수 없는 색깔이었으며, 홀랑 벗고 있는 탓에 더욱 눈에 띄었다. 의외로 노예의 피부가 창백했다.

샬로메는 성별 가리지 않고 노예를 홀린 듯 쳐다보는 사용인들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그레머에게 말했다.

“시종들이 쓰는 욕실로 가지요.”

샬로메의 말에 그레머가 머리통을 격하게 흔들었다. 그레머는 아까 홀린 듯 노예를 바라보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자긍심 높은 자신이 노예 따위에게 섹스 텐션을 느낀 것이 수치스러웠다. 아까 무언가에 홀린 게 분명했다.

그들이 후작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 들어온 소문의 노예의 망측한 모습에 후작 성 안에서 일하고 있던 사용인들 사이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항상 적막했던 후작 성이 지금만큼은 마치 영지 내의 시장 바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다 청명하게 울리는 막내 도련님의 목소리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란이지?”

외출복을 갈아입고 제국 아카데미에 가져갈 말을 고르러 내려온 맥켄지는 소란스러운 성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용인의 덕목은 침묵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란스럽다니 기강이 빠진 게 분명했다. 맥켄지가 눈매를 신경질적으로 찡그리자 시종과 시녀들이 허리를 숙였다.

마음에 안 드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맥켄지가 무언가를 인식했다.

자신의 타박에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샬로메와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레머, 그리고 그 뒤에 멀뚱히 서 있는 것은….

“…….”

땟국이 찌들어 꼬질꼬질하고 넝마 같은 옷을 입었던 노예는 맥켄지의 눈에는 가축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 본 노예는 의외로 멀끔했다. 맥켄지가 깨끗해진 노예를 보며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제 좀 사람 같군.

그게 다였다. 노예의 벌거벗은 것과 다름이 없는 몰골이라든가 노예의 넓은 어깨에 걸쳐진 도노반 리피팅 암즈의 재킷은 맥켄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발에 채는 돌멩이 따위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맥켄지가 무심히 멀뚱멀뚱 서 있는 노예를 보다 뽀얀 노예의 상체와 달리 아직 꼬질꼬질한 하체가 거슬려 툭 말했다.

“왜 노예를 씻기다 말았어?”

그레머가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하려고 할 때 맥켄지가 무심하게 말했다.

“거슬린다. 마저 씻겨.”

“네.”

“나는 내일 가져갈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방해하지 마라.”

자신의 할 말만 툭 내뱉고 제 갈 길을 가는 맥켄지에 그레머가 진땀을 닦았다. 다행히 벌을 받지 않았다. 그레머의 주인 맥켄지는 냉정한 성정이었다. 지금은 운이 좋아 그냥 넘어갔지만 한 번 더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손목이 날아갈 것이 분명했다.

* * *

고귀한 막내 도련님의 제국 아카데미 입학 하루 전이었다. 제국 아카데미는 도노반 후작 영지에서 약 5시간 거리인 곳이었기에 널널히 출발해도 됐다. 후작 부부 내외는 저 작은 것이 둥지를 떠난다는 생각에 손수건에 눈물을 묻히며 막둥이를 배웅했고 맥켄지는 살랑살랑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맥켄지는 제 부모에게만큼은 곰살맞게 굴었다. 아직 세력이 건재한 부모의 눈 밖에 나 좋은 게 하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천사같이 환하게 웃으며 부모에게 손을 흔들던 맥켄지는 부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표정을 풀고 귀찮다는 듯 마차의 폭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무료한 표정으로 휙휙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다 말했다.

“노예는 잘 씻겼니?”

맥켄지의 말에 맞은편에서 일지를 쓰던 시종이 씩씩하게 말했다.

“당연하죠! 비누가 반이나 닳아 없어졌습니다.”

얼마나 더러운 거야. 맥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질색을 했다. 하얗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일그러졌음에도 남자는 천사같이 아름다웠다. 장성했음에도 아직 어린 티가 났다. 맥켄지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돌봐 온 그레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하세요. 노예를 마주치는 일은 수업 때를 제외하고 없을 겁니다.”

“병이 옮지는 않겠지.”

맥켄지가 중얼거렸다. 기분 나쁠 정도로 까맸던 노예의 지저분한 머리카락과 눈알이 떠올라 그가 질색을 했다.

* * *

너자는 짐마차 안에서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너자는 기르는 가축 취급도 받지 못했다.

하루의 절반을 달려 제국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가문의 시종들은 딱 두어 시간 제국 아카데미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받아 막내 도련님의 짐만을 옮기고 떠났다.

제국 아카데미에는 맥켄지와 그의 직속 시종인 그레머, 호위기사인 샬로메, 그리고 매 맞는 아이 신분으로 온 노예 너자뿐이었다. 맥켄지는 제국 아카데미의 기숙사에서 제일 좋은 독채 별관 중 하나에 배정받았다.

기숙사의 부지는 두 부지였는데 한 부지는 평범한 귀족들을 모아 놓은 기숙사였고, 한 부지는 고위 귀족 자제들을 위한 독채 부지였다. 독채 하나당 마구간과 개인 정원이 따로 딸려 있었다.

제국의 실세인 맥켄지는 그 별채를 받음이 마땅했다.

맥켄지가 생각보다 괜찮은 독채 기숙사에 흡족해하고 있을 때, 샬로메는 다 죽어 가는 노예를 둘러매 마구간으로 옮겼다. 자신의 말과 맥켄지의 명마 칸 옆 구석진 곳에 꽤 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이 너자가 지낼 곳이었다. 샬로메가 멀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노예의 묶여 있던 밧줄을 칼로 풀었다. 너자는 드디어 풀린 양 손목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자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 이 마구간이 자신이 지낼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괜찮았다. 예전에 있던 방보다 백배는 나았다. 그곳은 너무 좁고 밀실이라 환기도 되지 않았으며 곰팡내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었다. 그에 비해 이 마구간은 새로 만든 것같이 쾌적하고 넓었다.

서까래와 지지대도 옻칠이 잘 돼 있는 새것이었고 지붕도 튼튼히 잘 만들어진 것 같았다. 푸릉거리는 말들의 소리와 구린내가 간헐적으로 풍겼지만 바람 잘 들고, 채광이 좋은 마구간은 너자의 마음에 꽤 들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에 분노하고 슬퍼했겠지만 너자는 이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사람들의 정신적인 학대는 너자를 이지를 좀먹어 갔기 때문이었다.

샬로메가 마구간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머가 손에 바구니를 들고 방문했다. 저녁 식사야. 너자는 그레머가 건네는 쪼그라든 빵 쪼가리와 마실 것에 감동받은 듯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너자에게 그레머가 말했다.

“내일부터 너는 도련님의 수업에 같이 참관할 거다.”

“…….”

“매 맞는 아이로 참관하는 것이니 그리 알아둬. 아마… 맞을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아무리 도련님이라도 제국 아카데미의 교수들에게 밉보일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도련님은 이해득실을 잘 따졌고 나중에 꽤 도움이 될 교수들에게 제 성격대로 난봉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수들 또한 제국의 실세인 맥켄지의 신경을 거스르는 짓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너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보며 뭐라 말을 하는 그레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하얀 사람들은 코만치족의 언어를 몰랐고 그간의 경험으로 눈치껏 배운 하얀 사람들의 언어를 말해 봤자 저자가 화를 낼 것 같았다. 천치처럼 눈만 깜빡거리는 너자를 보며 그레머가 한숨 쉬었다.

“내가 말도 못 알아 처먹는 놈한테 무슨 말을….”

그레머가 한숨을 쉬고 저를 말똥말똥 바라보는 너자를 무시하고 마구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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