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120화 (120/159)

120화

경영지원실 맨 안쪽에 위치한 전무실로 걸어들어가면서 경영지원실 프린터기 옆에 있는 이면지 함에서 가득 쌓인 종이를 자주 가져와 자신의 프린터 카트리지 안에 넣었다.

이면지 위에 인쇄된 PDF파일의 내용은 강석천 부장이 알아낸 것으로 로젠바움 증권회사의 아시아 지부 매니저인 조니 박. 한국명 박동철이었다. PDF파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머리는 무지하게 좋구만. 어이구. 명문학교 출신이네. 명문 외국인학교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대학도 미국에서. 캘리포니아의 명문 중고등학교라."

순간 그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어딘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들은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자기 자녀를 외국인학교나 명문 사학에 입학시키려고 한다. 게다가 무리를 해서라도 미국에 있는 유명 중고등학교, 대학엘 보낸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키울 때도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1994년은 그가 아직 차장시절이었다. 당시에도 말로만 듣던 명문 사립 초등학교나 외국인 학교는 진짜 부유층만 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보낼 수가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자녀가 중학교에 다니던 2000년은 그가 이사시절. 막 강남으로 이사를 간 터라 학교도 근처의 공립학교에 보냈고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공립으로 보냈다. 아내가 공립학교 선생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남들은 다 하는 그 흔한 위장전입 하나 하지 않고 다 공립으로 보냈다.

이제 와서는 너무 바보 같이 살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미국으로 학교를 간다 하는데, 그냥 국내 대학을 보냈으니 과연 이게 자녀를 위한 것인지 의구심이 갔다.

"이래서 부모를 잘만나야해. 나도 빈민가 출신이지만 그렇게 노력했더니 이 나이 먹고 겨우 전무가 돼서 벤츠를 타? 누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자동차라고는 벤츠와 롤스로이스요, 그랜저는 장난감 이름으로만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에휴."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 강석천 부장이 들어왔다.

"강 부장. 그거 알아?"

"어떤 거 말씀이신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강 부장은 놀라서 되물었다.

"우리집은 가난해요. 운전수가 고작 하나에, 집사도 하나랍니다."

"하하. 갑자기 그 소리는 왜?"

"로젠바움 증권회사의 조니 박? 그 자식 나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마구 자극하고 있어. 반드시 박살내도록 해야겠어."

"그럼요. 그런데 갑자기 그 소리는 왜?"

"난 운전수가 없거든. 내 자녀도 남들처럼 그 좋은 명문 사립 초등학교나 외국인 학교에, 다 거리가 머니. 나처럼 또 서민이나 노동자의 자식들이나 다니는 그런 별 거지같은 3류 국공립엘 보내다니. 자식을 망친거 아니야?"

"그런 소리 마세요. 전무님."

강 부장이 말했다.

"그깟 놈의 유학이 뭐라고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거나 명문 초등학교 나온게 대단합니까?"

"대단하지. 초등학교 동창 중에 대통령 손자가 있다거나 한다면 얼마나 대단한거야. 인생이 탄탄대로지. 뭘 해도 벤츠를 탈걸? 젊은 나이에. 봐. 자네가 준 이 자료. 로젠바움의 아시아 매니저인 조니 박. 이 친구 일주일 주급이 내 연봉의 수십배는 될걸?"

가만히 서류를 들여다보던 박기범 사장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쳤다.

"봐. 난 이런 작자 따위에게 질 수 없어."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그가 말했다.

"일단 석유문제는 해결됐고. 좀 고심해야겠어."

"아. 전무님. 로젠바움의 조니 박이 우리 회사로 IR온다는데요?"

"그러면 IR 박정수 부장 들어오라고 하고."

다시 의자에 주저앉은 그는 여러번 프린트한 서류를 보고 또 보았다. 잠시 뒤, 박정수 부장이 들어왔다.

"전무님."

"조니 박인지 뭔지가 온다면서? IR나부랭이 하려고."

"그렇습니다. 알고 게셨군요."

"나랑 같이 들어가. 어떤 놈인지 좀 알아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