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전경련 회의실로 들어간 수많은 다른 기업인들 역시 박기범 전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진정으로 기업을 사랑하고, 딸린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막중한 책임이 그들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박기범 전무의 눈에 그 짐들은 마치 귀신처럼 달라붙어있었다.
"최근 귀족노조의 전횡에 대해서 언론도 그렇고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늘 모임을 이끈 문상기 전무였다.
전년도인 2004년 극심한 노사분규로 인해 회사는 대규모 중국투자를 결심했고 내부적으로 국내공장을 폐쇄하려고 했다. 생산직 평균연봉이 7800만원으로 미국이나 일본의 경쟁사들보다도 급여가 높았다.
이 회사의 경쟁상대인 미국 텍사스 케미컬은 매출액이 엘튼 화학의 두배가 넘었지만 평균 급여수준은 5만 5천 달러. 일본의 라이벌인 홋카이도 케미칼은 매출액이 1.7배, 직원평균 급여는 5만 9천 달러였다. 하지만 엘튼 화학의 연봉은 무려 7만 8천 달러. 경쟁력이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대우를 받아야지, 게으름이나 피우고 쇠파이프나 휘두르는 작자들이 잘먹고 잘사는 나라가 되면 안됩니다. 여기가 뭐 소말리아입니까? AK47들고 설치는 해적떼가 그나라 최고 갑부라던데. 정확히 그게 대한민국이지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상위 1%가 누구요? 귀족노조 아닌가요?"
문 전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전경련 간부 중 하나가 일어서서 말했다.
"누군가 이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기업인 분들 중에서 신문이나 이런데 칼럼이나 기고를 통해 우리들의 생각을 알렸으면 합니다."
이 말이 나오자 마자 모두들 눈치만 살피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괜히 총대를 매기 싫었던 것이다.
"문상기 전무님 어떠세요?"
"나? 에이. 노조가 나를 그럼 아예 광화문에 목을 매달텐데?"
"그럼 한흥기 상무님은요?"
"흠. 난 글 솜씨가 없어놔서."
모두들 회피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박기범 전무 본인이 나서기로 했다.
"내가 하죠. 뭐 외국언론에도 기고해도 되면 그렇게 하지."
"상관없어요."
"그나저나 저 386들 영어는 읽어? 반미하느라 영어는 멀리할텐데. 하하하"
크게 웃고 나서는 모습을 본 충청도에 기반을 둔 다른 기업의 전무 하나가 말렸다. 2003년 대선때 지금의 386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아서요. 아서. 이. 그러다가 세무조사 당하구서 괜히 또 저기 뭐여 사찰당하면 어쩔려고. 원래 625때도 북한군이 죽인것 보다 완장찬 뿔갱이들이 사람 더 많이 죽였슈"
"지금이 전두환시대요? 박정희 시대요? 2005년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처음에는 걱정만 많은 임원들의 말로만 오해했으나 그 걱정들이 현실로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차를 타고 회사로 복귀했다. 차를 타고 본사로 돌아온 그는 경영관리팀 배상수 과장을 불렀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응. 서산 석유정제소와 각 공장들 내려가서 노조현황 좀 둘러보고 와."
"노조 현황이라니요?"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자 박기범 전무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전경련 회의 다녀왔는데, 노조가 아주 말썽이래. 마르크스와 레닌이 신나서 무덤에서 뛰쳐나올거라는군. 민주노총인지 뭔지가 우리회사를 망칠지 모르니 노조 움직임을 파악하라고."
역시 배상수 과장은 한발 빨랐다. 의미를 깨닫자 바로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아니. 왜?"
"일주일 전에 보고를 받았지만 서산공장에 민주노총 관계자가 다녀갔답니다. 거대한 노조조직을 만들자고요."
"그래서?"
"헌데, 거기 노조위원장이 그랬답니다. 우리는 외부인의 도움따위는 필요없다. 노조는 회사와 더불어 조합원들의 복리증진이지, 생산직만 챙기고 사무관리직은 쓰레기 쳐다보듯 하는 너네와는 손 안잡는다. 그리고 우리 충청도 사람들 성질 알지 않느냐. 외부인의 간섭은 싫다. 이렇게 말했다는데요?"
"그래? 그럼 걱정없겠네."
============================ 작품 후기 ============================
친노조 성향의 많은 독자분들의 활발한 의견개진이 있을 것 같은데 다들 주말이라 쉬시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