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날 저녁. 고급 식당에 모습을 나타낸 장관은 최천식 의원과 오 연세 사장을 보자마자 인사를 하기도 전에 용건부터 말했다.
"오셨군요. 듣자하니 무등그룹이 석유개발을 하는데 지금 반대하 신다고요?"
"장관님. 다 반대하는 이유가 있어서요."
최천식 의원이 목소리를 낮게 유지하자 외무장관은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반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내 생각엔 반대짓거리를 그만두셔야 할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외무장관의 말에 둘 다 서로를 쳐다보면서 의아해했다.
"당신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등그룹의 석유개발에 반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거 때문에 외교마찰이 생기면 각오하시오."
"아니. 외교마찰이라니?"
최천식 의원이 다소 거친 어투로 말했다. 외무장관은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무등그룹이 일본 킨키와 인도네시아 석유공사와 손을 합한 그 유전건. 지금 인도네시아의 국책 사업이랍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적극적으로 밀고 있다는 소리요."
아직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듯 오연세 사장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외무장관이 말했다.
"무등그룹이 여기서 손을 떼면 우리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믿을 수 없다는 국가로 인식됩니다. 인도네시아 국영석유공사와 손을 잡았는데 국회에서 훼방을 놓는다면 거기가 우릴 뭘로 보겠소? 대통령도 곧 동남아 순방을 가는데 어떻게 되겠어요. 게다가 인도네시아 정부는 벌서 한국산 철강과 자동차에 대한 수입금지를 준비중이고, 신규 프리깃함 건조도 일본조선소로 넘길거라고도 하고. 대한민국의 철강산업과 조선산업, 자동차 산업을 붕괴시킬 작정입니까? 게다가 일본의 경제산업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군요."
"경제산업성?"
최천식 의원은 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20년전인 1983년. 한일 경협자금 배분 당시 통산국장이 여기에 개입했었다.
무등그룹은 원래 돈을 받아갈 수 없지만 서류의 절차대로 진행하라는 통산국장의 호통과, 밀실에서 합의한다는 점을 본국에 보고하려했기에 무등그룹에게도 돈을 주었다.
"경제산업성이면 과거의 통산성인데. 이거 문제가 쉽지 않군요."
최 의원의 말에 외무장관이 동의했다.
"물론이요. 경제산업성이 움직인다면 분명히 주일대사가 일본 외무성으로 불려갈겁니다. 일본의 거대기업인 킨키상사가 개입되어있는 문제 아닙니까? 당신네들, 무등그룹을 너무 잘못 보았어요. 거긴 외국기업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요. 무등그룹의 이익은 한국을 넘어서 일본, 인도네시아의 국익과도 연관되어있소. 당신들이 경제산업성과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국회에서 무등그룹을 괴롭히는 짓은 중단해야겠군."
낙담한 듯 최천식 의원이 중얼거리자 외무장관이 소리쳤다.
"당연하죠. 만에 하나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때 이 문제가 거론되면 당신들도 끝장이요. 국내 여론이 가만히 있겠어요?"
"알겠습니다. 장관님. 일단 우리 대한석유공사는 무등그룹을 건드리지 않을겁니다. 최 의원님도 아시겠죠."
최천식 의원은 답답하다는 듯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20년전.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면 알아서 박박기던 기업들이 이제는 아니었다.
주자학에 근거해 사농공상의 철저한 계급제 사회의 관습이 아직도 몸에 배인 최천식 의원에게 이 같은 변화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니야. 우리가 물러나서는 안돼. 국회에서 다시 이를 제기하겠소. 장관이 대통령의 외교순방을 운운하지만, 어차피 대통령은 우리와 정당이 달라. 어차피 정치쟁점으로 몰고 가면 총선에서도 유리해. 어차피 장관 당신도 386 아니냐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가 일어났다. 이 모습을 본 오연세 사장이 말했다.
"의원님."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무등그룹이 정부를 우습게 아는데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거야. 장관. 386 밑에서 놀아나지 말고 대국적으로 봐요. 그대도 외무고시 출신 아닌가? 고시 출신끼리 이러면 안되지."
격하게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나가자 오연세 사장도 그를 붙잡으러 나갔다. 장관은 고심에 잠긴 채 잔에 담긴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아직 이 비밀회동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오남현 무등그룹 회장은 저녁약속 때문에 급히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나이가 많아서 경영을 이끌기에는 벅찼다. 그러나 그의 역량은 여전히 뛰어났다. 무엇보다 지난 2001년. 닷컴버블이 붕괴되기 직전. 무등그룹이 보유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을 전부 매각한 것은 여전히 재계에 회자되고 있었다.
오남현 회장이 탄 71년형 시보레 카프리스가 호텔로비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돈이 많기 때문에 벤츠나 렉서스를 탈 수 있었지만 오 회장은 미국차를 고집했다.
특히나 과거 70년대에 나온 풀사이즈 세단을 좋아했다. 그래서 미국에 갔다가 헐값에 내놓은 차를 덥석 사들인 것이다.
물론 엔진에 쌓인 때를 제거하고 보링작업에, 페인트칠도 다시하고, 차의 직물시트를 최고급 가죽시트로 바꾸고, 전체적인 작업을 다시해야 했다. 그 돈이면 벤츠 S클래스를 살 수 있었다.
71년형 시보레 카프리스는 정말 거대했다. 8기통 6600cc의 대형 엔진에 연비는 휘발유 1리터로 4km이상은 갈 수 없었다.
길이가 5400mm나 되었는데 국내에서 5미터가 넘는 길이의 차는 보기 드문 탓에 그는 이 차를 소유한 것을 아주 뿌듯하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최천식 국회의원은 보수정당 국회의원입니다. 처음에는 이 캐릭터를 죽여버릴까도 고심했는데 어떻게가 문제더군요. 암살을 할 수도 없고.
주자학이 나라 망쳤죠. 공자왈 맹자왈 씨부릴때 유럽인들은 원소기호를 발명하고, 민주주의를 발명하고 자본주의를 꽃피웠죠. 중학교 때 Fe, Al, Au, Ag, 이런거 배우고 라부아지에 법칙이니, 아보가드로 법칙이니 파스칼 법칙, 이런거 배울때 과학선생님이 그러시대요.
"18세기때 유럽인들이 이런걸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연구할때, 우리 조상은 공자왈 맹자왈만 씨부리다 조선이 망해버렸다고요. 그래서 조상들은 참으로 멍청했지만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서양인들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이 되라"
참으로 멋진 말이죠. 아직까지도 저 자신이 백인들을 능가할 위업을 보여주지 못하는게 마음에 찔리죠. 나중에 내 자식이나 손자가
"일본이나 미국, 유럽은 잘먹고 잘사는데 대체 우리 조상세대는 뭐했길래 아직도 허덕여?"
라고 할때 할말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