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93화 (93/159)

93화

박기범 상무가 회의를 끝내고 서류를 뒤적일 무렵, 여의도 국회의사당 국회의원회관.

지난해 2002년도 국회의원 재보권 선거에서 대구지역구를 기반으로 당선된 최천식 의원은 금뱃지를 자랑스럽게 매만지면서 45평 규모의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 흐뭇하게 앉아있었다.

"국회의원이란게 좋기는 좋구나."

그는 창 밖을 내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지난 90년 말. 한국개발공사 총재를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야인의 몸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롤백하게 되었다.

"의원님."

보좌관이 다가왔다. 그는 최 의원에게 서류한장을 건넸다.

"이게 뭔가?"

"네. 대한석유공사가 보낸 서류입니다."

당시 대한석유공사는 중동에서 원유를 거대한 규모로 사들이고 있었다. 일본 다음가는 수입국이며 단일 거래규모로는 세계 최대를 기록하는 대한석유공사는 매년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석유를 도입한 후 이를 석유 회사들에게 배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무등그룹의 경영지원실 상무로 승진한 박기범 상무는 원유를 직접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는 대한석유공사와 충돌을 빚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등그룹은 원유를 직접 도입해 원하는 만큼 나프타를 생산하고 남는 휘발유등의 부산물은 수출을 해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고 하고 있었다.

박기범 상무가 추진하는 것이었다. 석유의 확보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중요했다. 최악의 경우, 석유공급라인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어떠한 위험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석유공사 등 국내 공기업의 위치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무등그룹."

그는 한번 중얼거렸다.

"하여간 정부 말 더럽게 듣지 않지."

대한석유공사 사장실. 새로 부임한 대한석유공사 사장은 오연세 전 산업은행 국장이었다. 이후 개발공사 부총재를 역임 야인생활 이후, 로비 끝에 대한석유공사 사장자리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그는 이날 아침부터 짜증나는 보고를 받았다.

"뭐요? 무등그룹이 이제 독자적으로 석유를 공급받겠다?"

"그렇습니다. 다른 석유관련 기업들은 사과박스에 돈을 실어서 사장님도 드리고 여기 임원들에게도 돌리지만 거기는 그런거 없이 뻔뻔하게 석유를 요구하죠. 오히려 잘된 거 아닌가요?"

임원급 하나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무등그룹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면 이제 다른 기업들도 석유 직배를 하게 될 것이고. 석유공사의 존재의미가 사라집니다. 젠장. 이 석유공사 사장자리 꿰찰려고 내가 얼마를 뿌렸는데. 안돼."

무등그룹이 독자적으로 석유도입을 추진한다는 말은 오연세 석유공사 총재를 아주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소식을 접하고 난 후, 급히 차를 타고 최천식 국회의원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이야."

최천식 국회의원이 금뱃지를 자랑스럽게 들이밀면서 오연세 석유공사 총재를 반겼다.

"요즘 제가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그렇겠지. 대한석유공사 총재라는 직함이 바빠야 하는 걸테니까요. 하하하."

자초지종을 오연세 총재로부터 듣고 난 뒤 최천식 국회의원은 이를 갈았다.

"좋아. 지금 IMF겪고 민간주도 경제다 뭐다 해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날뛰는 모양인데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말한 최 의원은 본격적으로 무등그룹을 굴복시키기 위해 나섰다.

5일 후, 대한 석유공사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무등그룹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다.

"뭐야? 석유공급을 끊겠다니."

"저희가 추진중인 사우디 원유직배도입을 취소하지 않으면 3개월 뒤에 받을 물량을 주지 않겠답니다. 그렇게 되면 타격이 큽니다."

"좋아. 일단 공개적으로는 석유직배도입을 취소한다고 해. 어떻하겠어? 원유는 들여와야지. 그러나 뒤로는 직배추진해. 어려운거 아니잖아. 선도계약이나 선물계약 따면 되는거 아니야? 국내 증권사 보지 말고 국내 진출한 미국 투자회사나 은행 통해서 알아봐"

"알겠습니다."

강석천 과장을 일단 내보내고 나서 박기범 상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정적인 원료조달은 기업의 입장에서 아주 중요했다. 특히나 석유의 확보는 중요한 과제였다.

전까지 한국석유공사에 의지해서 원료를 조달받았다면 이제는 사우디에서 직접 석유를 도입해야 했다.

============================ 작품 후기 ============================

아까 92화에서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하면서 '늙은 유럽'이라고 조롱했죠. 당시 국내언론들-반미/진보-는 이 말에 분개했지만 사실 맞는걸요. 프랑스와 독일은 저출산으로 늙어가고, 미국은 저출산 우려가 하나도 없었죠. 맞는말 한겁니다.

그리고 이 때 프렌치 프라이를 '리버티 프라이', 혹은 '프리덤 프라이'라고 미국에서는 부르게 됩니다. 오히려 저도 프렌치 프라이보다는 프리덤 프라이가 말은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