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대한민국의 모든 오피스 건물에서 나오는 사무용지만 모아서 다시 가공해 되팔아도 돈이 많이 남겠어."
비록 작고 자잘한 것이지만 이런데서도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아이템을 생각내는 황 사장의 두뇌에 혀를 내두르면서 박기범 이사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새로운 사업자등록을 마친 무등오피스는 무등그룹이 필요로 하는 소모성자재를 일괄구매했다. 필기구, 메모지, 사무용지, 모니터, 컴퓨터, 컴퓨터 자재 등의 구매대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비록 무등그룹이 100%를 소유한 자회사지만 사장도 있고 전무, 상무등 직책은 있기에 임원급들 중에서 승진연차가 다 찼지만 아직 승진을 못했거나 부장급 들 중에서도 일부는 이 곳으로 배치되었다.
물론 약간의 직급 인플레이션은 되었다. 부장은 이사대우로, 이사는 상무대우로 조금은 직책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룹전체 기준으로 보면 변동은 없었다.
그래도 기업이 확대되면서 생겨나는 일인데다가 어쨌든 명목상으로도 직급이 올라가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IMF외환위기로 경제전반이 크게 흔들리고 실업자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런 조치는 경영합리화라는 명분아래 잉여인력을 새로운 사업부서로 재배치하고 동시에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무등오피스가 생겨나면서 사원경비 지급전표가 줄었다. 88%나 감소했는걸?"
인사팀 황 부장이 박기범 이사에게 말했다. 기존의 총무부장은 일을 그다지 잘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무등오피스의 총무부장으로 좌천되었다.
"전임 부장이 안됐죠. 원래는 그 사람이 이런 일을 하도록 저희와 논의를 했어야 했는데요"
안타까워하며 말하자 황 부장이 대답했다.
"그렇겠지. 뭐 손해본건 없어. 무등오피스도 괜찮고, 뭐 급여나 복리후생은 다 같아. 결국 기존 총무부서가 확대된것 뿐이지 뭐. 나쁘게 말하면 임원들 자리만들어주려는거 아니겠어?"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전 같으면 그냥 총무부에서 할 일이지만 이렇게 개편되면서 직책도 늘고 직원도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더 효과적으로 운영이 되면서 절감된 시간, 돈을 생각하면 이렇게 분사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벌써 재계 일부 그룹들이 우리 흉내내는데? 자기 아들이나 손자에게 이런 MRO를 하나 차려준다고 하던데 잘 모르겠어."
황 부장이 투덜대듯 말했다.
"우리야 조직개편과 경영효율화인데 다른회사는 그게 아닌 모양이지? 그나저나 벌써부터 정리해고 등으로 어느덧 경영합리화라는 단어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지."
"그런가요? 저야 바빠서 잘 몰랐는데."
박기범 이사가 대충 얼버무리자 황 부장은 자신이 인사팀 담당자라는 점을 각인시키면서 현재의 세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경영합리화라는 말을 꺼내면 그 기업에 일하는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대. 결국 45세 이상은 다 나가라는 말과 동의라고."
"그런게 아니잖아요. 원래 말 뜻은."
"사람들이 어디 그런가? 실제로 경영합리화나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게 해고거든."
이러한 움직임이 잘못되고 있다는 점을 직접 눈으로 본 황 부장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이래가지고서야. 일본기업들처럼 장기종신고용을 하던가, 미국처럼 사회의 역동성이 높아서 오늘 짤려도 내일 취직이 되던가 해야지, 우리나라는 지금 이도 저도 아니야."
"과도기라고 보면 되겠지 뭐"
박기범 이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황 부장을 웃으며 쳐다보았다.
"황 형은 너무 걱정이 많아. 그런거 신경쓰지 마요. 황 형이 무슨 정부 관료도 아니고 남들이야 짤려서 길바닥에 나앉든 말든 다 자기사정이지. 황 형은 너무 마음이 넓어."
이렇게 말하고 크게 웃자 황 부장도 같이 따라 웃으면서 "그래. 박 이사 말이 맞어"라고 대답했다.
"헌데 과도기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는거야. 그 과정에서 해고가 되거나 하면 정말 어떡하냐고. 그러니 자살하기도 하고 대기업에서 번듯하게 다니다가 빈민가로 쫓겨가는거야. 사실 그런건 개인에게나 기업에게나 국가에게나 큰 손해야. 안타까워"
============================ 작품 후기 ============================
무등그룹의 MRO인 무등 오피스. 여기 이사대우라고 해봐야 본사 부장급입니다. 그래도 듣기는 좋지요.
MRO : Maintenance Repair, Operation약자로 해석해보세요. 필자는 참고로 대표적인 MRO인 아이마켓코리아 최종면접에서 탈락한 기억이 나는군요. 거기 대졸초봉이 3800만원에 성과급까지 합하면 4500만원선인데.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채권평가사에 다니면서 한국투자증권과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라 한국투자증권 빌딩에서 일하는데 보니까 29~30살로 보이는 여직원분이 미니쿠퍼를 타고, 30대 초반 대리급이 BMW(버스, 메트로, 워크 이따위가 아닌 진짜 독일 BMW)타는 걸 보고 참 부러웠답니다.
제조업 자금팀에서 근무하다 채평사로 옮겼지만 거기는 4800만원이면 대리 말호봉 연봉인데 한투는 대졸 초임이더군요. 말이 그렇지 한투 초봉이 4800이면, 지금 주식시장이 나빠도 이정도니 주식시장만 활황이면 신입사원도 벤츠를 탄다는 소리인데. 막말로 한투 과장달면 1억이란 소리 아니겠어요? 그런게 재벌이죠.
코리아 펀드 : 88년에 출시한 펀드로 미국뉴욕 주식시장에 한국 기업들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를 가르치기도 했던 모 서울대 경영학 교수와 (지금 신한은행 쪽에 계시죠. 제가 서울대 나왔다는건 아닙니다. 그러면 한투다니며 돈방석에 앉았겠죠) 정부에서 추진했다고 해서 한번 꾸며보았습니다.
종신고용 : IMF전까지 우리도 종신고용이었죠. 일본은 지금도 종신고용합니다. 그래서 일본간 사람들이 그러죠. "일본은 40에 과장. 50에 부장. 재미없게 산다. 우리처럼 35에 과장, 45에 부장. 50에 임원 달아야 재미있지"라고요.
저는 미국경영학으로 공부해서(교수들이 다 미국대학파)또 우리나라의 기업경영이 미국영향을 받은 탓에 일본처럼 종신고용 하는건 조금 미련하고 덜떨어진 거라고 봅니다. 무능력자에게도 고액의 임금을 줘가며 고용하는 셈이니까요.
뭐 사람마다 다르겠죠. 이 IMF를 계기로 지금처럼 직장인들의 평균 퇴직시기가 45로 낮추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