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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87화 (87/159)

87화

무등그룹이 자회사인 무등오피스를 설립하고 인력재배치 등 본격적인 사업확장을 꾀할 무렵, 국내 경기는 서서히 호전되어가고 있었다.

IMF위기는 조금씩 사라지고 경기회복은 눈에 띌 정도였다. 이 무렵, 1999년 초. 호텔 라운지에서 박기범 이사는 송영찬 재정경제부 부국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이사 되고, 팔공 인수하고 덕분에 나도 급여가 올랐어. 무등오피스 설립중인데, 다른 재벌들이 우리 따라해. 이사들 연봉 1억 주더라고."

"이야. 좋겠네."

송 부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넌 국장 언제 다냐?"

"영원히 국장 달 일은 없는 거 같은데?"

이 말에 박기범 이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승진이 왜 안돼?"

송 부국장의 눈빛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해낸 박기범 이사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공직생활 마감해야 할 것 같아."

"아니. 너 가만히 있어도 국장될텐데. 국장만 되어도 나중에 정부산하기관에 갈 수 있잖아. 농협이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 부국장이 말했다.

"IMF로 나라가 박살이 나고 서울역 갔더니 노숙자가 들끓더라고. TV에서 보면 남미 국가들, 거지가 들끓잖아. 그게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 전에도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일가족이 자살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이런 일이 발생하니...."

갑자기 목이 메인 듯 송 부국장은 입을 굳게 다물고 헛기침을 한 후 물을 한잔 마셨다.

"명색이 재정경제부 부국장으로서. 은행감독국 부국장으로 책임이 커. 결국 정부가 제대로 못한 거 아니야? 책임을 져야지. 난 공무원이라 월급 잘 나와. 국민들의 혈세로 월급 받는데, 그 국민들은저렇게 고통받고 있어. 내가 무슨 낮으로 월급 타가니?"

"너 그 이상한 책임감 버려. 장관 해임시키고, 차관도 짤렸잖아. 그럼 된거지. 정권까지 바뀌었는데 왜 애꿎은 실무자인 니가, 그것도 왜 스스로 그만둬?"

한번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 본 송영찬 부국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게...내 책임이지. 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고. 원래는 행정고시 쳐서 아무 부처나 다 들어가고 싶었는데, 언제였지? 77년도였나? 유신반대 데모할 때 너 만나서, 경찰피해서 니 하숙집에 쳐박혔다가 경영학쪽도 좋겠다 생각했지."

"그래. 참 그 때는 공부보다 데모만 했어. 그래도 머리가 있었으니 4년간 데모만 해도 결국 돌아가."

과거를 추억하며 박 이사가 말했다.

"난 사회학도로서 시위한 거고. 결국 니 영향받아서 재무관료되었지만. 정말 힘들어."

"그래도 그만두는 것은 안돼. 더 열심히 일을 해서 갚으면 되잖아. 안 그래?"

송 부국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직서 제출했어. 벌써. 다만 수리되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야. 반려될 가능성도 있다고는 하는데 모르지 뭐. 위안이 되는건 내 위의 국장도 사표 내더라고. 거긴 접대 좋아하고 그랬어도 양심은 있어. IMF터진지 1년 약간 넘었고, 이제 수습도 어느 정도 되었을 때 그만두어야 공무원으로서 도리를 다 하는거 같더라"

"좋아. 그럼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어?"

"걱정 마라. 나 미국간다. 공부하러."

더 뜬금없이 들렸기에 깜짝 놀란 박기범 이사는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건 안돼. 미국 학비가 얼마나 비싼데. 너 돈도 없잖아. 그리고 니 아내는 어떻하고. 애들은? 현실적으로..."

"괜찮아. 아내야 뭐 전업주부니. 애들 다 중학생이니 미국가도 좋을 듯 싶다. 다행히 지난 88년도에 코리아 펀드를 미국에 출시했을 때 그 때 선이 닿은 사람이 있어. 거기서도 오라고 하더라. 일단 올 9월부터 워턴 스쿨에서 공부 좀 하려고."

"오. 워턴은 좋아. 하버드와 맞먹는 경영대학원이잖아."

"일단 생활비가 문제가 되겠지만 워턴도 장학금 받고 가는 거라서. 이 나이에 학교를 다닌다는 게 좀 그렇지만 또 뭔가 길이 있겠지."

박기범 이사는 갑자기 슬퍼졌다. 친구도 미국으로 떠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서 잘 해. 보니까 서울대 나온 놈들은 머리가 있어서 다 하더라고. 아는 형님이 서울대 농대 나왔는데, 미국의 식품기업 취직할 때, 미국놈들은 다 계산기들고 오고 두들기고 그 형은 계산기 살 돈이 없어서 손으로 계산했는데 1등으로 들어갔어. 미국최대 식품기업이라는데. 그게 서울대야. 어지간한 미국놈보다 대가리는 더 좋거든."

"맞아. 그러니 책임감도 져야지. 그 좋은 머리로 나라 경제 망쳤잖아."

또 웃음이 흘러나오면서 슬퍼졌던 기분이 그나마 나아졌다.

"너 내가 미국갈 때 공항에 오지마. 너도 바쁘고 쉬어야지. 미국가서 편지 보내지 뭐."

호텔 라운지에 고객을 위해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다. 비틀즈의 'The Long And Winding Road'였다.

============================ 작품 후기 ============================

박기범 이사의 친구인 송영찬 재정경제부 부국장이 이제 공직을 그만두게 됩니다. IMF로 고통받는 국민들의 현실을 보고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그 좋은 재경부 관료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됩니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송 부국장 정도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등그룹의 MRO인 무등오피스는 잘 설립되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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