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85화 (85/159)

85화

"나 참."

회사 근처 보신탕 집에서 류준혁 상무는 박기범 이사를 앉혀놓고 투덜거렸다.

"3일간 밤을 새가며 기획실 직원들이 철야해서 내놓은게 인원감축안인데, 고작 내놓은 게 인력감축은 안된다? 그럼. 기획실은 뭐야? 우리가 뭣 때문에 고생을 해야해?"

아직도 분이 가시질 않는 듯, 류준혁 상무는 수육을 서너점을 한번에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상무님이 참으셔야죠. 저야 좋게 생각하려고요."

고기를 씹다가 잠깐 멈추고 자신을 쳐다보는 류 상무의 시선을 피하며 박기범 이사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황 부사장님이 괜히 그러시겠어요? 기획실 힘든거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신데요. 저야 이사고 그러니 경영만 보지만, 아마도 부사장님은 회사를 둘러싼 환경도 보는 모양이죠."

불쾌한 듯 류 상무가 말을 내뱉었다.

"환경?"

"네. 여론이나 정치권 말이에요. 괜히 대량해고를 단행하다가 거기 직원들이 들고 일어나기라도 하면 여론도 장담 못하겠죠. 그런 파업으로 설사 회사 업무가 마비라도 되면 더 타격이 크잖아요."

물론 당장 수습을 하기 위해 둘러댄 변명이지만 박기범 이사는 자기가 생각해도 그럴듯했다.

'조니 내쉬의 'I can see clearly now'가 맞아. 나 진짜 깨끗하게 보여.'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박기범 이사가 이렇게 말하자 류 상무도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

"그렇구만. 하긴 황 부사장. 생각이 깊지. 그래 맞아. 나도 들었어. 전무는 달아야 생각하는 폭이 상무와 다르다고. 그래서 전무출신들이 차기 사장이잖아."

"상무님도 마찬가지죠. 지금은 힘드시겠지만 분명 기획실이 고생하신 것 이상의 보답과 인정이 뒤따를겁니다. 전 그게 정말 깨끗하게 보여요. 제 눈을 가렸던 어두운 구름들이 사라지면요, 밝아질 겁니다. 정말요."

이 말에 류 상무는 모처럼 웃을 수 있었다.

"박 이사는 말을 아주 잘해. 달변가야."

"아. 이거 노래 가사에요. 조니 캐쉬의 72년 빌보드 1위곡요. 노래 가사가 제 마음을 그래도 반영하대요."

"박이사. 그 팝송 좋아하는 거 이런 때 쓸모있구만."

인수된 팔공그룹을 완전히 무등그룹의 문화, 시스템에 흡수하면서 정신없이 돌아간 덕에, 해고에 부정적인 황 부사장 덕에 정신없이 98년이 흘러갔고 1999년이 도래했다. 다행히 수출호조로 인해 경제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99년 3월 초순. 박기범 이사는 퇴근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던 중 인사팀 황 부장을 만났다. 2년 선배인 황 부장은 승진은 늦었기에 박기범 이사는 늘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황형. 퇴근해요?"

"응. 박 이사님. 나도 집에 가야지."

"술한잔 하시겠어요?"

"좋지. 박 이사가 사는 술로 하자고."

미소를 지으며 회사 건물 바로 앞에 있는 호프집에 들렀다.

"박 이사 담배 안피지?"

알면서도 늘 묻는 말이었다. 황 부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가지고 다니던 성냥을 꺼냈다. 박기범 이사는 늘 가지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오. 웬일이야."

"담배는 안 태워도 라이터는 필요하더라고."

자리에 앉은 황 부장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정말 마일드 세븐이 부드러운가요?"

"그런 거....몰라. 그냥 피는거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회사 앞 호프집은 무드가 있었다. 천장에 부착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로라 브래니건의 글로리아였다.

"괜찮네."

박기범 이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물을 한잔 마셨다.

"참. 인사팀하고 총무팀은 할만해요?"

이 말에 황 부장이 대답했다.

"말도 마. 인사팀은 그나마 낫지만 총무팀은 개판이야."

"아니."

박 이사는 몸을 앞으로 바싹 밀었다.

"얼마나 개판이길래요? 황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황 부장은 웃으면서 담배를 재떨이에 갖다 댔다.

"비품관리가 하나도 안돼. 원래 사무용지는 총무팀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해서 필요한 부서에서 대장을 작성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 자금팀도 그러잖아. 필요한 사무비품들 각자 구매하잖아."

"그쵸. 그렇게 해서 전표 올리고."

박 이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원래 무등그룹은 사무용 비품을 일괄 구매하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각 부서에서 조달하도록 되어있었다. 다만 사무용지나 복사기 토너는 예외였다.

"지난번에 인사문제 때문에, 잠깐 섬유본부 들렀더니 거기는 아주 사무용지도 자기들끼리 사더구만. 보니까 복사기 토너도 알아서 사고. 그러니까 돈이 이중으로 나가잖아."

"그런데 그걸 총무부장이 몰라요?"

박기범 이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했다.

"뭐 금액이 얼마나 되겠느냐만은. 관리가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이지. 무엇보다 관리가 안돼. 다 필요하니 그럴 수 있지만 일괄적으로 관리를 하는 것이 좋겠지."

황 부장은 의외로 다방면으로 회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문한 안주와 맥주가 나오자 그는 맥주잔을 들었다. 잔을 맞부딫힌 뒤 맥주를 쭉 들이키자 박기범 이사는 시원함을 느낌과 동시에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품관리라. 총무부에서 일괄구매를 하거나 그래야겠군요."

"얼핏 들으면 총무부에서 가장 싸고 좋은 것을 다 사야겠지만 그것도 어렵고. 뭐 인사팀인 내가 관여하기에는 문제도 있고."

"이건 자금에서 손을 봐야겠네요. 결국 돈이 나가는 문제니. 하긴 그런 전표만 해도 엄청날테지."

박이사의 말에 황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덕분에 팔공그룹도 사들이고 구조조정도 하고 나름 성과를 내고는 있지만. 매출액도 6조원에 달하는 등 나름 잘해가지만, 이렇게 회사의 한구석에서는 돈이 줄줄 새고 있다고."

"알아봐야겠군요."

이 말에 황 부장은

"그럴 필요 있어? 총무부에서 알아서 하겠지."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박기범 이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안 그래요. 형님."

그렇게 말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금이란게 뭐요? 경영지원 아니요? 기획에서 못하면 경지에서 해야 옳죠."

"듣고보니 그 말도 일리는 있어."

============================ 작품 후기 ============================

무등그룹의 기획실에 인사부서가 있답니다. 인사기획이기 때문입니다. 경지실은 경영지원실의 약어로 무등그룹의 경영지원실은 자금팀/회계팀/관리회계팀/법무팀으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기획실은 기획팀/인사팀/총무팀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무등그룹의 내부 구조를 파악한다면 헷갈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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