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하지만 산업은행은 재경부의 제동에 결코 굴하지 않았다.
1998년 3월 7일 토요일 저녁7시. 산업은행 출입기자들은 깜짝 놀랐다.
산업은행은 기자회견을 열고 무등그룹에 팔공그룹을 넘기기로 깜짝 발표를 한 것이다.
산업은행은 이 조치로 인해 5천억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정리할 수 있고 국내 산업계의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화가 난 것은 재정경제부였으나 새정부가 구성된지 채 한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가 많았기에 재정경제부는 여기까지 신경을 쓸 수 없었다.
그래도 산업은행이 재정경제부의 체면을 꺾었기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담당자인 최철용 부장을 해임하는 선으로 무마했다. 물론 그는 무등그룹에 상무급으로 영입되었다.
1998년 7월 1일. 하반기 경영을 논의할 임원회의. 이제 팔공그룹마저 인수한 무등그룹은 재계 10위의 재벌로 성장했고 큰 무리없이 기업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팔공이야. 거긴 경영이 너무 비효율적이어서 큰일이야."
황영식 부사장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일단 제약이 없이 사들인만큼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어차피 팔공인력은 과잉이잖아요."
박기범 이사의 말에 기획실 류준혁 상무도 대답했다.
"그건 그렇죠. 무등그룹의 인당 매출액이 대략 7.5억인데 거긴 4.7억이에요. 잘라버려야 할텐데요. 어차피 이제 해고도 쉬워진 만큼 잉여인력은 잘라야 할겁니다. 이제 IMF이전처럼 종신고용 같은 물러터진 방법으로는 안됩니다. 일본만 해도 종신고용 같은 짓거리 하니 기업이 활력을 잃지. 무능하면 가차없이 보내야지."
우리 조직에 흡수되었으면 무등그룹이 지켜온 종신고용이라는 울타리안에서 공존하며 발전을 할 방법을 고심하던 황 부사장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류 상무와 박 이사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았다.
조만간 조직 확장으로 오남현 현 사장은 회장으로, 자신은 사장으로, 다들 직급이 높아질 것이 확실시 되는 분위기에서 많은 임원들-특히 기획/재무-이 차가운 마음으로 움직이는 경영기계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약간은 침울해졌다.
"너무 차갑군. 이제 합병한지 서너달인데 벌써 자르다니."
"하지만 팔공은 무능해서 망한만큼 가차없는 패널티가 주어져야 한다고......."
"그만해. 박 이사."
말을 막은 황 부사장은 새로운 조직개편안을 제시했다.
"각 사업본부로 기존 팔공인력을 재배치하고, 조선, 화학은 유지하도록 해요. 그래도 인력이 남는다면 생각해봅시다. 벌써부터 생산성 저하의 이유로 해고하는건 바람직하지 못해. 오 사장님도 지나친 해고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시는 만큼 다른 방법을 한번 고심해보는게 좋을 겁니다."
이미 오남현 사장은 나이가 들어 회장직에 곧 오르고 실질적인 모든 권한은 황영식 부사장에 위임한 상태다.
그래서 말로는 오남현 사장을 들먹이지만 황 부사장의 생각이라는 점을 다들 이해했다. 박 이사도 그걸 알았다.
"오 사장이나 황 부사장이나 고리타분한 일본식 경영에 매진하니 원."
회의가 끝나고 자기자리로 와서 혼자 투덜거린 그는 자기와 생각이 같은 류준혁 상무가 팔공그룹의 구조조정을 맡을 태스크포스 팀을 기획실에 꾸린다고 할때 반겼다.
'내가 해도 되지만'
그는 생각했다.
'나보다 끝발이 센 사람이 해야 옳겠지.'
그러면서도 투덜거렸다.
"진짜 돌아버리시겠네. 기존 팔공인력들을 전부 짤라버려도 모자란 판국에 껴안다니. 부사장님은 중성자탄 잭도 모르나?"
그렇다 해도 황 부사장의 말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그는 이 기업의 역사와 함께한 산 증인이고 박기범 이사의 상사였다. 신입사원시절, 자신의 부장님이었다.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그래도 부사장님이신데. 이제 임원 말단인 나와 생각이 다를거야. 더 큰 대국적 마인드로 보고 계시겠지."
이써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인수된 팔공그룹에 대한 정리는 무등그룹 기획실에서 담당했다. 원래 류준혁 상무는 전격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려 했다.
그래서 1차로 2500명에 달하는 팔공그룹 직원을 내보내고, 2차로 2500명, 3차로 2500명 등 총 7500명을 해고해 조직을 슬림하게 바꾸는 방안을 기획했다.
하지만 이 기획안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보인 사람은 황영식 사장이었다.
"해고는 자제하도록 해."
"하지만..."
말긑을 얼버무리며 저항해보려 했지만 황 사장의 카리스마 앞에서 류 상무는 힘없이 무너졌다.
"이 사람아. 왜 자꾸 누굴 해고하려 드나? 자네야 상무고 당장 짤린다 해도 먹고 살 걱정은 크지 않겠지. 은행 금리도 높으니 퇴직금만 넣어놓아도 은행이자가 한달에 돈 백은 그냥 나오니까. 살고 있는 48평 아파트를 팔고 35평으로만 내려가도 잘 살 수 있다고."
류 상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황 사장은 보란듯이 우쭐거리며 대답했다.
"봐. 역지사지라고. 솔직하게 말해서 자네도 오래오래 다니고 싶잖아."
============================ 작품 후기 ============================
중성자탄 잭 : 미국의 GE 최고경영자인 잭 웰치(1935~)를 뜻합니다. 1981년 46세로 CEO에 취임한 그는 2등상품, 2등 사업부를 모조리 없애버리고 1등에 전력을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을 기반으로 GE를 세계최대 대기업으로 일구죠.
1981년부터 2001년 은퇴할때까지 GE의 기업가치는 무려 4000%나 올랐으며 본인도 7억 2천만 달러의 재산을 가진 부자가 되었습니다.
1981년 당시 주주자본주의가 경영학계에서 등장합니다. 저도 경영학도여서 배웠는데 기업은 주주의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막말로 은행에서 빌린돈 먼저 갚고, 종업원 월급 다음으로 주고, 차떼고 포떼고 남는 돈을 주주가 가져가기 때문에 주주가 가장 큰 위험을 떠앉는다고 교과서에 나오죠.
쉽게 말하면 남의돈 다 갚고, 월급 다 주고 남은 잔여지분에 대한 최종 청구권은 주주이고, 그 때문에 리스크(위험)을 가장 많이 지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직원들이야 회사 망해도 어디 가면되고, 채권자야 제일먼저 채권받아가지만 주주는 한강 다이빙이거든요. 이러한 논리가 1970년대 수많은 재무학자/경제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현대재무관리의 기초로 이어지면서 주주가치=기업가치라는 생각이 지금도 경영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제기한 미국의 경영학자들은 다 노벨상 받았습니다. 경영학과 전공이라면 재무관리야 늘 머리맡에 두는 책일테고, 비경영전공이시라면 친구에게 부탁해서 재무관리를 한번 공부해도록 하세요.
대개 경영학과 출신들은 냉철하게 합리적으로 사고하는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경제학 원론과 바로 이 재무관리 덕이죠.
비경영전공자 중에도 재무관리를 배운 사람들은 경영학과 못지않게 합리적으로 사고합니다. 물론 재무관리 안배운 경영학과 출신은 비합리적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