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인력이요?"
"그래. 기존 팔공인력을 어떻게 할건데? 뭔가 관리를 해야지. 자를건지, 다 끌고 갈 것인지."
이 말에 박기범 이사는 잠시 눈을 굴렸다.
"까짓거 우리 인력을 보내고 최대한 다 잘라버리죠. 무능하니 망한 모양인데 그리고 칼자루를 우리가 쥔 만큼 다 잘라버린다 해서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황 부사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살짝 웃었다. 아직 이사라는, 임원 단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아서 잘 모르는 모양이라고 본 모양이었다.
"그러면 산업은행이 넘겨준다고 하던? 거기는 5천억만 준다고 넘겨주지 않아. 고용조건도 따지겠지. 자네처럼 잘라버린다고 하면 안 줄걸? 지금 벌써 대량해고가 이어지면서 문제가 생기는데 또 자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 필요가 없는 셈이 될텐데요."
그 말에 황 부사장은 계속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게 아니래두. M&A는 쉬운게 아니야. 그 조건들 때문에 난리가 나지. 자네처럼 잘라버린다고 하면 팔공그룹도 반발할거야. 그러면 설사 우리가 먹는다 해도 극심한 파업으로 몸살을 앓겠지."
황 부사장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박기범 이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직 임원 말단이니 모르겠지. 산업은행가서 가격 이외의 조건들도 알아봐. 내 생각엔 산은은 고용조건을 물고 늘어질 거 같다. 지금 팔공은 이도저도 아니어서 고용은 유지되지만 말이지."
박기범 이사는 자리로 돌아가서 황 부사장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가 M&A에 대해 자료를 여러 경제신문들로부터 모았을 때 대개의 경우 인력감축이 뒤따른다. 그건 당연한 걸로 생각했다.
그럴수 있는 것이 당시 한국의 현실에서 정리해고, M&A의 개념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해서 미국의 사례를 참고했기 때문이다.
"You're Fired"이 말한마디에 그냥 잘라버리고 담담하게 회사를 나가면 누군가 와서 '당신 채용되었소'라고 하며 데려가는 것이 당연한 미국과 아직 해고를 겪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속에서 뭐가 옳은지 아직은 잘 몰랐다.
"경영합리화를 하긴 해야겠는데."
다시 택시를 타고 산업은행으로 간 박기범 이사는 보다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산업은행 최철용 부장은 이 건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금액은 5천억 선으로 맞출 수 있겠지만 고용문제나 이런게 걱정이 되어서요. 인수 후 다른 제약조건이 있는지도 궁금하고요."
"별 다른건 없습니다. 저희는 부실채권을 덜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5천억에 사신다면 저희야 좋죠. 이후의 문제. 관리라든지 그런 것은 무등그룹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그냥 슈퍼에서 물건 사시듯 사면 됩니다."
아주 희망적인 말이었다. 그냥 사면 이후 문제에 그 누구도 간여할 수 없다.
"그럼 인수 후에 인력을 구조조정해도...."
"그런 문제는 귓의 문제죠. 저희는 부실채권만 정리하면 됩니다. 그 외의 문제는 관심이 아에 없어요."
최철용 부장의 말을 듣고 나서 박기범 이사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악수를 했다.
"조만간 인수를 할 수 있겠군요. 그러면 우선인수협상대상자를 신청하지요. 다른 기업에서는 왔나요?"
경제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만큼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단독입찰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회사로 복귀한 박기범 이사는 이 말을 황 부사장에게 전했다. 황 부사장은 기뻐하면서 방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럼 5천억만 준비하면 된다 이거지. 알겠어. 일단 4600억하고 스위스계좌에서 400억만 인출해서 지급계좌에 몰아넣어. 산은에게 일시에 다 보내게."
"알겠습니다."
황 부사장의 지시대로 그는 계좌에 돈을 이체하도록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팔공그룹을 인수한 이후의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산업은행은 표면적으로 인수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려고 했지만 무등그룹을 제외하고 응시한 회사가 없었다. 사실 산업은행은 이 대상자 선정부터 비밀로 붙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국자본의 입찰을 막기 위함이었다.
라인하트 데커는 산업은행보다는 재경부를 상대했는데, 산업은행이 독자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고 결국 감독관청인 재정경제부를 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당시 상황이 너무 급했고 산업은행은 1조원이 안되는 작은 규모는 독자적으로 행동해야 업무 부담이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공개입찰이 아닌 비밀입찰이 되어버렸지만 무등그룹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회사를 사서 기업의 규모를 키우고 경영합리화를 추진해 도약시키야 한다는 지상명령만이 있었다.
하지만 산업은행의 이같은 움직임에 재정경제부는 제동을 걸었고 재경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산은의 독자행동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 날은 1998년 3월 4일 수요일이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미 계약서까지 다 쓴 마당에 재경부가 뒤통수를 치다니."
박기범 이사는 허탈해했다. 하지만 더 허탈해 한 사람은 황 부사장이었다. 기업인수로 그는 몇조원짜리 대박을 터트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게 좌절되는 것은 그에겐 충격이었다. 산업은행도 마찬가지였다.
============================ 작품 후기 ============================
이제 박기범 이사는 정말 이사. 즉 임원의 마인드를 가지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구조조정을 알게 되고, 이를 무기로 경영합리화를 추진하려 합니다.
박기범 이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경영기법을 도입하려는 쪽이고 황영식 부사장은 일본식 경영기법-종신고용-을 유지하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기범 이사는 앞으로 승진할 수록 더욱 철저한 미국식 경영기법을 추종하는 기업인으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노조를 싫어하고 귀족노조라면 이를 가는 전형적인 회사원으로 캐릭터가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업인은 피터지게 노력하는데 희망버스인지 절망버스인지 타고 쇠파이프 휘두르는게 이 나라의 얼굴이라면 정말 부끄러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