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82화 (82/159)

82화

송영찬 부국장과의 대화가 끝나고 지하철을 타고 박기범 이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단지 입구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 9시. 캄캄한 밤 하늘만이 보였다. 대한민국의 경제 현실도 바로 이 하늘처럼 까맸다.

1962년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이후 매년 두자릿수의 고도성장을 한 극동의 작은 나라.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고 엄청난 산출물을 세계 시장에 쏟아낸 나라.

비록 미국이나 일본, 서유럽국가들의 국민들보다 머리가 더 뛰어나거나 지능지수가 높지는 않아도, 백인들처럼 우월한 존재는 아닐지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 불굴의 의지, 군대와 같은 일사분란함,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일 수 있는 불도저와 같은 추진력으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일구었다.

일부 선진국은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웃었다. 아침 출근길의 만원전철에 시달리는 많은 직장인들의 모습을 보며 불쌍하다고 했다.

(영국 런던 지하철도 신도림수준으로 복잡함. 영국 지하철은 서울보다 더 작음, 프랑스 파리지엥도 대부분 만원전철로 통근함. 파리로 차끌고 가면 통행료만 몇만원임. 혼잡통행료. 뉴요커도 만원전철에 시달리면서 출근함. 대도시는 다 마찬가지임)매일 늦게 야근하는 한국직장인들을 '일벌레'라고 조롱했지만 그 조롱의 대상이었던 한국은 이제 그들 국가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성장했다.

전세계 어느 나라도 하지 못한 사우디 주베일 항만 공사를 완성시켰고,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싱가포르의 창이 국제공항도 국내 건설사가 만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단일 규모로 세계최대인 포항제철은 한때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만 여겨졌던 미국의 US스틸이나 베들레헴 철강으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을 파산위기로 몰아넣게 만들었다.

역시 단일 규모로 세계최대인 거제 옥포 조선소는 세계 2위의 조선강국을 일구어냈다. 1970년대만 하도 세계조선산업을 자랑하던 영국과 일본의 물량을 가차없이 낚아챘고 현대중공업의 강력한 도전에 영국조선업계는 완전히 사라진다.

한때 영국은 세계 오토바이 산업을 장악했지만 혼다와 가와사키 오토바이의 위력앞에 처참하게 무릎을 꿇었고 세계 조선산업을 장학했지만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위력앞에 눈물을 머금고 조선설비를 고철로 팔아넘겨야 했다.

하지만 IMF위기는 이 모든 위대한 번영과 영광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야이 망할 작가놈아. 그건 아니지. 설비와 두뇌는 남아있다고."

하늘을 쳐다보며 주먹을 한번 휘두른 그는 얼마 전 류준혁 상무에게 말했던 것처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여는데 무등그룹이 앞장서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그래. 이제 정부는 가만히 찌그러져 있는게 옳아. 한국경제를 케인즈이론대로 움직였다면 이제부터는 하이예크나 프리드먼의 길을 선택해야지. 그게 옳고."

이틀 후, 산업은행에 간 박기범 이사는 자신이 팔공그룹을 인수하기 위해서 이미 라인하트 데커와 접촉을 했다는 말을 했다. 산업은행 최철용 부장은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했다.

"그래서 그 데커는 뭐라고 하던가요?"

"노라고 하더군요. 이미 거기 선은 포기했고 산은을 통해야할겁니다. 우리도 팔공그룹이 우리의 품안으로 들어오는 게 좋다고 보고 있고요."

최 부장은 무등그룹이 사는 방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입니다. 저는 데커에게 2500억을 제시했는데, 거절하더군요. 그가 얼마를 부를지는 모르나 내 생각엔 팔공그룹의 채권에 90%의 할인을 적용해서 싸게 사고 결국 제값 받고 팔것 같아요. 팔공이 정말 일시적 유동성위기로 망한 거라면요."

박기범 이사는 이렇게 말했고 최철용 부장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외국 투자자. 특히 저런 헤지펀드들은 두세배의 이익은 1~2년 안에 내야 정상적이라고 여길 정도로 기준치가 높지요. 그런데 박 이사님은 너무 싸게 불렀군요."

"대안이 없어요. 산업은행은 대체 얼마 수준을 원하시는지요? 내가 비록 이사지만 결국 사장님 승인을 얻으려면 금액 레인지를 알아야 하거든요."

이 말에 최철용 부장은 바로 대답했다.

"저희는 5천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최고가격이죠."

"가격을 조금 더 낮출 수 있나요?"

"글쎄요. 우리 산은도 명분이 있어야 해서요. 너무 싸게 팔면 특혜시비가 일테니까요. 가뜩이나 지금 IMF로 외국자본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으니 라인하트를 통해 팔공그룹을 인수한다면 무등그룹도 이미지에 좋지는 않을겁니다. 일단 5천억 생각하시고, 지불방법을 통해서 서로 윈윈하도록 하죠."

산은측은 가격을 낮출 의도는 없었다. 최소한 5천억은 받아야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5천억 생각하라니.'

택시를 타고 본사로 돌아간 그는 이 사실을 황 부사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내용을 접한 황영식 부사장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5천억. 비싸기는 해도 할만 해. 자네가 외환투자로 4600억을 확보했으니 고작 400억만 더 확보하는 셈이야. 스위스 계좌에서 그 정도면 국내로 송금하면 될 듯 싶은데?"

하지만 산업은행이 달라는 대로 다 주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이를 박기범 이사의 표정에서 읽었는지 황 부사장은 어깨를 두드렸다.

"해봐. 지급조건을 내걸었으니까 한번 잘 해보고. 그리고 인수할 때 그 인력문제를 어떻게 할지도 알아보고."

============================ 작품 후기 ============================

사우디 주베일 항만 공사 : 이거 정주영씨가 계약한거죠. 1975년에 수주했는데 (현대건설) 이 당시 계약금액이 9억 달러 수준으로 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답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 : 동아건설이 따냈고 교과서에도 나왔죠.

창이 국제공항 : 이것도 현대건설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90년대 초반. 싱가포르에 여행가거나 출장간 사람들은 이 창이 국제공항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포항제철 : 포스코죠. 그래서 지금도 포철이라고 많이 합니다. 단일 규모로 세계최대인 제철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남 광양에 위치한 광양제철소는 포스코의 제 2공장이죠. 규모확대로 거기다가 지은거죠.

옥포 조선소 : 울산사람과 거제사람이 이걸 가지고 싸워요. 울산사람은 현대조선소가 세계최대, 거제사람은 대우조선해양의 옥포조선소가 세계최대. 저는 거제도에 친척이 있으니 거제도에 베팅하겠습니다.

하이예크 :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로 자유시장경제를 중시하는 학파의 거두입니다. 실제로 자유시장경제는 너무 완벽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죠. 정부개입은 늘 재양만 불러온다는 것은 입증했죠.

프리드먼 : 밀턴 프리드먼으로 인류가 낳은 최고의 경제학자입니다. 케인즈, 장하준, 조지프 스티글리츠, 크루그먼 이런 사람들은 프리드먼의 발끝에도 못미칩니다. 자하준은 발끝의 때에 앉아있는 박테리아만도 못하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