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1998년 1월 중순.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한 박기범 이사. 비록 이사급의 임원이지만 그의 자리는 변하지 않았다. 부장시절 그 자리에서 그냥 업무를 보았다.
“이사님. 서류 결제건입니다.”
역시 과장으로 승진한 류 과장이 서류결제철을 건넸다.
“참으로 드라마틱 했습니다.”
“뭐가?”
결제란에 도장을 찍고 나서 말했다.
“달러환율이요. 달러당 2천원까지 폭등한 환율이 1500원대로 안정되었으니까요.”
“그러게. 류 과장.”
이사가 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무직으로 승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라.”
그는 중얼거리면서 넥타이를 한번 매만졌다. 지금 IMF위기를 맞이해서 많은 기업들은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있다.
실업자가 무려 백만에 이를 정도로. 하지만 무등그룹은 단 한명의 실직자를 내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을 승진시킨 무등그룹의 막대한 이익은 재계에서 회자될 정도였다.
전경련 정기 모임을 비롯, 각 언론사들은 무등그룹의 막대한 환차익을 집중조명했고 그 덕분에 9시 뉴스에서 박기범 이사의 얼굴이 1초 동안 비추어지는 영광을 낳았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덕분에 오남현 사장은 바빠졌다. 여기저기서 그 환차익에 대한 혜안을 얻고자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에. 우리 회사는 작년이 문제가 아니라 올해가 문제겠어.”
1월에 열린 전사 팀장회의. 오남현 사장을 비롯 중역들과 부장급 임원들이 참석한 회의였다. 부장급은 경영지원실과 기획실에서, 나머지 부서는 전부 상무급 임원들이 참석했다.
“작년엔 어쨌든 경지실 자금팀의 박기범 부장이. 아니 이젠 이사가 됐지. 박 이사 덕에 떼돈을 벌었으니까.”
오남현 사장은 기분이 좋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뭐 IMF다 뭐다 해서 말들이 많지만 우린 우리대로 잘해나가면 되는거야. 남들이야 파산을 하건, 국가부도를 맞던 그 딴건 우리가 알바 아니지. 어쨌거나 올해는 힘들거 같은데.”
“올해 우리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할 것이 뻔합니다만. 곧 좋아지겠죠. 1970년대에 IMF를 맞은 영국은 제조업기반도 없고 산업경쟁력도 없는 변변찮은 국가여서 한참 걸렸다고 하지만 우리는 든든한 산업경쟁력이 있지 않습니까?”
황 부사장의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경공업사업본부는 어떤가?”
“뭐 저희 실적은 좋습니다. 섬유수출은 여전히 잘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희의 판단에도 비중은 줄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서서히 단가가 맞지 않습니다.”
경공업본부장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섬유업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희 사업구조상 달러당 770원이 수출 손익분기점이라 현재환율로는 앉아서 돈을 두배나 법니다. 전사 손익에도 기여할 수 있지요.”
무등그룹의 높은 경공업위주의 정책은 오히려 96년 들어 빚을 발했다. 1996년 들어서 반도체 가격이 폭락했고 거기다가 1995년 초 달러당 77엔~80엔을 오가던 엔화환율이 96년 들어서는 무려 110엔선으로 뛰었다.
일본은 96년 1/4분기에만 14%의 고도경제성장을 유지하며 조선, 자동차 등의 수출상품에서 우위를 보였고 자연히 한국기업들은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섬유는 경쟁대상이 되지 못했기에 경쟁자 없이 안전하게 수출판로를 뚫을 수 있었다.
“그래. 뭐 중공업이 돈이 된다고 하지만 엔화환율에 의해 경쟁력이 유지되는 실정이니 안전한 섬유가 더 낫군.”
“그렇지만 현재 환율 구조를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불리한건 아닙니다. 달러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수출은 잘되니까요. 물론 물가가 폭등하는 어려움은 있겠지만 국민모두가 조금씩 부담하니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오히려 국내 휘발유 가격도 리터당 1000원선으로 크게 올라서 쓸데없이 자동차 안타고 하니 차도 안막히고 좋죠. 잘됐습니다.”
박기범 이사의 말에 오남현 사장이 답했다.
“그래. 차가 안막혀서 좋기는 좋더군. 아. 박 이사. 듣자하니 팔공그룹이 부도가 났다면서?”
“예. 만기가 도래한 어음 42억을 못막았답니다. 가뜩이나 부실기업정리대상인데 드디어 파산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경지실하고 기획실하고 같이 팔공그룹을 이참에 인수해봐.”
오남현 사장의 새로운 지시였다. 드디어 그에게도 중대한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부도가 난 팔공그룹을 인수하는 것. 이사로 승진한지 채 한달도 안된 시점에서 그에게 부여된 중대한 임무였다.
============================ 작품 후기 ============================
실제로 영국은 1976년에 IMF금융지원을 받았죠. 아시다시피 영국은 과도한 복지병, 당시 유럽최강의 강성노조, 국영기업의 방만한 경영이 문제였죠. 어느나라나 노조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면 그 기업은, 나라는 망하는 겁니다.
현대차 노조가 이제 연봉 2억 달라고 하죠? 파산으로 가는 열차 타는거죠 뭐영국의 IMF는 노조때문이었죠. 석탄을 70년대 들어서 쓰지도 않는데 석탄노조는 월급더달라. 생활임금 어쩌구 했으니 망했지만 우리는 정부주도 경제정책의 한계, 기업들이 글로벌화를 너무 우습게 보고 덤빈 것이죠.
특히나 90년대 우리나라는 금리가 높았습니다. 저축금리가 15%이랬으니 대출금리는 더 높았죠. 반면 외국은 금리가 낮았습니다.
일본 1%, 그래서 기업들이 외화로 신나게 돈을 빌렸죠. 달러빚이었지요. 그리고 국내 종금사, 단자회사(지금은 없어진 금융회사)들은 일본에서 저리에 빌려서 국내은행보다 낮은 금리에 돈을 막 빌려주었죠.
그리고 당시 동남아 경제가 뜨니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 가서 돈 빌려줬습니다. 마치 우리가 거대한 신용공급국(일본/미국)인줄 알고 동남아 가서 팍팍 돈빌려주었죠.
그리고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라는 환상에 갇혀서 달러당 600원대 환율을 강제로 유지했습니다. 그 결과 수출이 안되고, 수입은 급증해 96년 230억 달러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죠.
당시 일본의 엔저로(아베노믹스와 유사)일본수출이 급증하고 국내수출이 마이너스로 반전되고 달러가 유출되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한보사태, 기아사태로 국내 대기업들이 다 휘청거렸고 은행권에 부실채권이 대두되고, 복합적으로 일이 터진 끝에 IMF가 터진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