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그리고 그 역시 은행에 전화를 걸어 그의 달러예금을 모두 원화로 환전했다. 전화를 끊고나서 자금팀 직원들이 그의 책상앞에 모두 와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부장님 축하드려요. 부사장님이 그러시던데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니요.”
“뭐 그런걸 가지고. 다 우리 자금팀 직원들이 잘해준 덕분이야. 자금식구들이 하나하나 잘해주니까. 류 대리도 수고했어. 다들 충실히 일을 해주니 되는거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그는 자신의 공을 부하직원들에게도 돌렸다.
“이제 부장님. 이사로 승진 확정이군요.”
“에이. 그런 소리 마. 이사라니. 아니 이사는 뭐 아무나 되나?”
그래도 내심 이사로 승진하는 걸 기대했기에 그는 더할나위없이 기뻤다. 이 소식은 바로 전사로 퍼져나갔다. 경영지원실 소속 다른 팀 부장들이 다가와 한마디씩 했다.
“이야. 박 부장. 축하하네. 이제 내년인 박 이사가 되겠어.”
“아이고. 부장님. 부장님이 먼저 승진하셔야죠. 이사 되면 어디 이사가야 할텐데.”
자신보다 두 살이나 많은 회계팀 부장이 축하하러 오자 그는 정중하게 말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그래. 밥이나 한번 사라고.”
회계팀 장 부장은 회계정보시스템 개선으로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이사승진으로 이어지기에는 약간 미흡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하면 승진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점을 알기에 한번에 수천억의 외환차익을 남긴 박기범 부장이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자네 황 부사장 이어서 차기 부사장이 될 수도 있겠어.”
“너무 앞서가시는군요. 전 이제 부장말단인데요. 경지실에서 가장 늦게 부장달았잖아요.”
“이사는 가장 빨리 달면 돼.”
그해 크리스마스부터 28일까지 오남현 사장과 각 부사장들, 전무급 임원들은 전부 강원도의 한 펜션으로 가서 승진대상자들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는 모임을 가졌다.
정기승진은 당연하고 특별승진대상자들에 대해서도 서류를 검토했다.
그리고 31일 오후 6시. 전사공지를 통해 각 지원본부별, 팀별로 승진공지가 떴다. 회사내의 인트라 메일에 첨부된 엑셀파일을 통해 승진대상자 명단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경영지원실 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경영지원실 승진대상자(1998년 1월 1일자)정기승진 박기범(부장->이사) 외환차익 2570억정기승진 유정수(차장->부장) 사업자등록통합정기승진 오세한(차장->부장) 정기승진 이 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창 밖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사라니. 임원이야. 드디어.”
박기범 부장은 중얼거리고 나서 흥분이 되어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직장생활 18년만에 임원으로 승진하는 셈이었다. 다소 빠를 수도 있는 승진.
무등그룹의 이사는 임원치고 생각보다 대우가 엄청나지는 않았다. 우선 자동차가 없다. 원래 상무급부터 자가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차를 주지는 않지만 연봉이 크게 오른다. 그가 알기로 이사만 돼도 연봉이 7천만원선으로 알고 있으니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받은 어머니에게 이사 승진을 알려드렸다.
"이제 좀 내가 효도를 하는 것 같군."
바쁘다는 핑계로 고향에 자주 내려가지도 못하고 큰 형이 부모님을 부양하는 형국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내려갈때마다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형에게 미안했다. 이사를 달았으니 부모님 생신때 더 좋은 음식 대접하고 용돈도 넉넉하게 드려서 그동안 못한 효를 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형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사라. 우리 집사람도 고생했지. 뭐 빨래와 청소는 주말에 내가 다했지만."
============================ 작품 후기 ============================
드디어 이사로 승진합니다. 임원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지요. 저는 임원이 되어본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친척들 중에 임원분이 계시죠. 차기 사장 대열에 오르는 직책인 전무급. 그래서 귀동냥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회사를 다녔고 이직해서 다른 회사를 다니다보니 좀 아는 면이 있답니다. IMF.우리나라에게는 재앙이면서 새로운 도약이었죠. 1987년 610항쟁과 629선언으로 이어진 민주화. 동시에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본격적인 포퓰리즘이 이 나라를 광기에 몰아넣었고 62년 경제발전 이후 열심히 축적한 발전역량을 다 갉아먹은 결과 IMF가 오게 되었죠.
IMF이후 정부개입은 힘을 잃고 민간기업이 주도적으로 경제를 이끄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일개 5급 사무관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재벌총수한테 절을 받는 그런 일은 사라졌죠. 김영삼때만 해도 과천청사에 재벌총수가 불려나오면 거기 9급한테도 머리를 조아리고 굽신굽신거렸답니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