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12월 3일. 한국정부는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치욕이라고 했지만 무등그룹은 박기범 부장이 황 부사장 앞에 불려가서 이 사태 이후에 대해 논의했다.
“으아. 구제금융을 받다니. 즉 외환보유고가 텅텅 비어서 IMF에게 구걸한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린 현재 보유한 달러를 계속 갖고 가야할겁니다.”
박기범 부장의 말에 황 부사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 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박기범 부장은 설명했다.
“580억 달러를 들여오는 것 아닙니까? 기업에 비유하자면 (주)대한민국은 구제금융 받는건 어찌보면 영업현금흐름은 적자인데 재무현금흐름이 플러스인 셈이니까요. 갚아야 할 돈이 산더미 같은 상황에서는 이 돈들 다 갚는데 사용되고 말겠죠.”
“하긴 그래. 겨울이 다가오니 원유수입도 해야하고. 만기가 도래한 외채의 일부분도 상환해야하니.”
황 부사장은 박기범 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달러를 더 가지고 있어야겠군. 좋아. 더 보유하라고.”
“그리고 수출대금은 환전을 최대한 자제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마 달러가 더 오를 테니까요.”
“더 오른다?”
“네. 달러가치가 더욱 오를겁니다. 아마 정부가 기업들에게 강제로 보유한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은 안하겠지요?”
“에이. 설마 그러겠어? 그건 아니겠지.”
황 부사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박기범 부장은 대답했다.
“그럼요. 그런 건 아닐테죠. 다만 상황이 매우 급하다는 게 문제긴 하죠. 기업들이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니까요.”
길게 대답하고는 자기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전화기를 집어들고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재경원 송영찬 부국장입니다.”
상당한 다급함과 짜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어이 송 부국장. 오랜만이야.”
침울한 송영찬 부국장과는 달리 박기범 부장의 목소리는 활기찼다.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헤헷. 정부부처는 지금 미치기 일보직전이라며? 특히 재경원은. 맞어?”
그 말에 송영찬 부국장은 대답했다.
“그래. IMF지원요청도 받았고 그래서 지원약속은 받았지만 외화가 더 빠져나가고 있어. 외국금융계는 한국경제를 믿지 않는 모양이야. IMF가 지원을 한다고 하니 기회다라고 보는거지.”
“당연하지. 외채가 산더미인데. 나 같아도 돈 빼겠다.”
“미치겠어. 환율이 계속 오르니.”
송영찬 부국장은 심각한 어투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유능하다고 자평하는 재경원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존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오고 있던 것이다.
정부가 경제의 사령탑을 맡아서 경제성장을 계획하고 기업은 그 계획의 달성을 위해 일하는 체스판의 말로 활용 당하던 정부주도의 시대. 하지만 정부도 어쩌지 못하는 위기가 닥치게 되자 기업들도 정부만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맡는 격이었다.
“아. 듣자 하니까 부실기업 발표를 한다는데. 혹시 아는거 없어?”
“왜? 미리 알아서 공매도라도 때리게?”
“넌 그렇게 할 수 있지. 나야 별로.”
박기범 부장은 대충 얼버무린 뒤에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말했다.
“팔공그룹은 부실기업 정리대상이야?”
“뭐야? 고작 그거야?”
박기범 부장은 그걸 알고 싶었다. 팔공그룹도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문제가 되는지를 알고 싶었다.
“거긴 부채비율이 너무 높지. 도저히 구제금융으로도 살릴 수 없을 정도야.”
“고마워. 알려줘서.”
그 말은 결국 부실기업 정리대상이라는 것이다.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팔공그룹이 이제 부실기업정리대상이라는 말은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이 사실을 보고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전화를 끊고 황 부사장에게 달려갔다.
“부사장님. 재경원에 전화를 넣었는데요. 팔공그룹이 부실기업 정리대상에 올랐답니다.”
“그래? 이야. 아주 잘됐는걸? 부실기업으로 재경원이 정리를 한다는 거잖아. 정부의 쓸데없는 개입이 이젠 좀 반갑다.”
“그러네요.”
“그나저나.”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황 부사장은 말을 했다.
“자네 친구인 송영찬 부국장. 믿을 만한거야?”
“그렇습니다.”
“헌데. 걱정되는건 우리가 뇌물하나 안 줬단 말이지. 팔공그룹이야 맨날 뇌물주는 회사지만 우리는 안주는데, 자네 친구도 부국장이라면 여기저기서 돈봉투를 받을 텐데 괜히 우리가 피해볼까봐 걱정이란 말이야.”
“부사장님도 참.”
박기범 부장은 안경을 치켜올리면서 대답했다.
“그 친구는 돈 안 받아요. 제가 잘 알거든요.”
황 부사장은 비웃듯 콧웃음을 치고 대답했다.
“전두환이도 구국의 일념으로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했잖아. 수천 명을 죽여가면서.”
“그런가요? 뭐 그 친구 덕에 우리가 많은 이익을 본건 사실이죠. 저야 뭐 밥한번 사주는게 전부이긴 하지만. 솔직히 전 그 친구에게 뭐 그다지 빚진 건 없다고 봅니다. 제가 물어보는 것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 부사장은 말했다.
“알았어. 일단 팔공그룹이 부실기업정리대상에 올라가는 것도 기분 좋지만 문제는 달러야. 시기를 잘 잡아서 팔게. 자네의 성과에 반영되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다시 부사장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오자 이미 환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화의 가치는 폭락했고 정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부장님. 400만 달러 정도 수출대금이 들어왔는데 이걸 환전하는게 좋을까요?”
“안돼. 환전은 지연시켜. 지금 고려은행 외화통장에 있는 돈만 2억 3천만 달러. 외환은행 외화통장에 있는 외화는 얼마나 되지?”
류 대리의 말에 박기범 부장이 대답했다.
“수출대금 다 포함하면 3억 달러입니다. 물론 석유수입대금과 원자재 수입대금이 있기 때문에 또 빠질겁니다.”
“그래봐야 LC결제일텐데 뭐.”
“꽤 큽니다. 평소에도 5백만 달러씩 나가니까요.”
“알았어. 그래도 확보는 해.”
“그런데 환율그래프가 정말 심상찮은데요?"
류 대리의 말에 박기범 부장은 모니터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