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11월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가 1000원을 돌파했다. 천정부지로 원화가치는 폭락하고, 달러가치는 오르고 있었다.
“우와 심상치 않네요.”
류 과장이 결제를 받으러 박기범 부장의 책상에 와서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그렇지? 두고 보라고. 얼마 안있으면 더 오를테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상황은 한국정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달러가치는 자꾸 오르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주식과 채권을 미친듯이 팔아치웠다. 이제 한국시장은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는 곳에 불과했다.
"이야. 이거 너무 심한데? 아무리 외화유동성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이건 한국경제를 개쓰레기로 보고 있다는 거 아니야?"
주말 오후.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재경원을 다니는 친구 송영찬에게 말했다.
"그러게. 솔직히 말하면 맞는 말이지. 지금 더 심각한 건 핫머니야. 국내 금융시장에서 대거 빠져나가고, 그야말로 돈맥이 막히니 실물경제도 지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은 뻔하지."
밥맛이 없다는 듯 수저를 내려놓으며 송 부국장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보신탕이 맛이 없어? 이 집 잘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상황이 심각해서."
재경원 부국장마저도 심각하다고 할 정도라면 쉽게 이 사태가 끝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해서인지 박 부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달러를 쥐고 있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명색이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인데. 지금 추세는 이 나라를 허접한 동남아 국가들과 동급으로 본다니까. 한심한 노릇이지."
"어쩌겠어? 좋든 싫든 그게 시장원리인데. 억울하면 잘해야지"
그 말이 맞기에 송영찬 부국장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간단하지 뭐.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지금 이 외화유동성 부족문제는 해결이 간단해. 막대한 외화보유고가 있다면, 그리고 우리나라 통화가 기축통화거나 그에 준하는 준 기축통화라면 돼."
이 말에 송영찬 부국장이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둘 다 아니야. 일본만 해도 3~4천억 달러나 되고, 엔화는 달러보다는 못해도 준 기축통화니까."
"근데 우리는 그런것도 없잖아. 외국인 투자를 받아들일 때, 선별적으로 FDI(Foreign Direct Investment :외국인 직접투자. 주로 공장, 설비 등 실물투자)만 받아들이던가, 포트폴리오 투자를 받아들이려면 핫머니대책을 세우던가. 이도 저도 아니면 진짜. 어휴."
"그래 맞다. 여기에 관해서는 우리도 할말이 없어."
송영찬 부국장이 대답했다. 박기범 부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기업들도 문제야. 자산규모 키워서 재벌순위 높이려고만 하지 실속이 없어. 외국에서 돈빌린다고 미친듯이 외화 끌어다쓰는게 말이나 돼? 우리나라 재벌들 부채비율이 400%가 넘어. 이건 자본잠식이라고."
박기범 부장 자신도 기업 자금팀에 있지만 다른 기업들의 동향을 보면서 혀를 찼다. 안타까웠다. 시장개방을 하면 기회가 많아지는 만큼 리스크도 커진다.
외국인 푸트폴리오 투자확대, 국내기업의 외채확보용이가 이루어진다면 기업입장에서는 환율변동에 따르는 리스크 최소화를 위해 부채비율을 조정하거나 환 헷지를 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기업들은 그것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급격한 세계화로 몸집은 커졌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능력은 약했기 때문이다.
박기범 부장은 그것이 늘 안타까웠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관리직군에서 자금 및 재무를 담당한다면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옳다.
물론 최고 경영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위기는 심해질 모양이야."
송영찬 부국장이 침울한 소리로 말했다. 그는 매일 모니터링하는 상황 자체가 끔찍하다고 여겼다.
"외화자금과에 가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하더라. 오늘 갚아야 하는 외채가 얼마고, 또 얼마까지 리볼빙이 가능한지. 일단 도쿄시장가고, 홍콩, 싱가포르, 거기서도 안되면 얼마 되지도 않는 바레인시장."
송 부국장은 괴롭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거기서도 안되면 프랑크푸르트, 런던. 마지막으로 뉴욕. 그럼 아는거지. 아. 오늘은 얼마를 못막았구나. 그럼 한국은행 외화보유고에서 빠져나가는거고. 말로는 중앙은행이 지원한다고 하지만, 그게 뭐겠어. 돈 빼는거지. 줄돈은 많은데 받을 돈이 없다."
"주룩주룩 나가겠구나."
"물론이지. 아주 무서울 정도야. 나야 외화담당이 아니라 은행쪽이지만 거기서 거기지 뭐."
친구의 말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박기범 부장은 정부개입을 반대하고 재경원의 인위적인 통제를 싫어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마저 싫어할 수는 없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이 나라를 세계적인 부자나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전세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경제대국으로 도약시키는 일이었다. 이 원대한 목표를 위해서 한국인들은 많은 것을 희생했다.
세계최장 노동시간, 세계최고 수준의 산업재해.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과 맞지 않는 어두운 면이었지만 이를 극복해나가는 것이 과제였다.
그리고 더 많은 산업생산, 산출물, 경제적 풍요는 노동조건도 개선시키고, 한국인들의 삶을 더 알차게 가꿀 수 있게 할 것이다.
영원한 번영과 성장. 1962년부터 이어진 한국의 놀라운 번영은 세계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이제 세계최고수준의 생활수준을 영위하는 부자나라로 바꾸어놓았고 계속 바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대한민국호가 좌초위기에 내몰렸다. 박기범 부장은 대기업에서, 송영한 부국장은 경제 및 재정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원에서 대한민국호를 이끌고 지휘했다.
"나도 재정경제원 공무원이지만 내가 봐도 한심해. 아직도 관 주도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공무원들, 문제가 많아. 기업현장은 하나도 모르고 다들 탁상공론이지.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주특기잖아. 탁상공론"
송영찬 부국장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관료. 유능했지만 부패한 존재. 이제는 무능하면서도 부패한 존재로 변질됐고 시대변화에 뒤처진 이들. 한국경제를 암초로 돌진시켰다.
"나도 듣자하니 미국이 개입했다고 하던데. 우리 정부가 일본에 일시적 자금요청을 했다면서."
"그렇지. 한일간에는 급할 때 돈을 빌려주는 관행이 있으니."
아마미 타카코 기자의 말과 일치했다. 박기범 부장은 그녀의 정보수집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올 3월만 해도 산업은행에서 목표한 것보다 돈을 더 국제시장에서 빌렸거든. 지금은 뭐 말도 안되는거고. 그나저나 위기가 너무 빨라. 정부의 대응능력을 마비시켰어. 뭐 기업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래. 우리회사는 그나마 다행이야. 달러를 많이 확보해두었거든. 2억 3천만 달러 가량 보유를 했어. 원자재 수입대금목적인데, 혹시 몰라서."
"잘했다. 외화부채는 없고?"
"없지. 다 갚았으니까."
당당한 태도로 박기범 부장은 말을 했다. 송영찬 부국장은 소주를 쭉 들이켰다.
"보니까 태국도 IMF구제금융을 받았고, 혹시 우리도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이 올까?"
"글세.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인데 구제금융? IMF는 돈 플러스 정책지원인데 우리가 그렇게 급박한 상황은 아닐거야. 혹시 또 모르지. 그렇게 된다고 해도 한동안은 혼란이 지속될걸?"
============================ 작품 후기 ============================
리볼빙 : 리볼버 총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채권을 발행하고 나중에 원금을 갚을때,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받은 돈을 갚아나가는 구조입니다. 필요할때 채권을 발행할 때 제때 팔리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볼빙이 안되면 생돈을 그냥 갚아야 하는거죠.
외국인투자 자체는 나쁜게 아닙니다. 특히 외국인이 국내에 와서 공장짓고 하면 가장 좋지만 이 포트폴리오 투자는 변동성이 높아서 세삼한 주의가 필요하죠.
실제로 당시 재경원은 일본에 도움 요청했습니다. 미국이 먼저 손을 써서 그렇지.
정부 공식문서에 IMF구제금융을 받아야 한다는게 나온 것이 11월 7일. 청와대까지, 즉 대통령에게 보고가 된 것이 11월 14일이고 이후, 즉각적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협상팀이 IMF와 논의에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