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류 과장은 박기범 부장의 지시에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았다. 잠시 뒤 그가 대답했다.
“한국은행의 공식 발표로는 300억 달러랍니다.”
“300억 달러?”
류 과장의 말에 재확인하는 듯 말을 하고 그는 컴퓨터로 자세한 데이터를 찾으면서 한 손으로 전화를 들고 서울에 위치한 아마미 타카코 도쿄 경제신문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전화를 받았다.
“아마미 타카코 도쿄 경제신문 기자입니다.”
“나 박기범 무등그룹 부장입니다. 뭐 좀 물어보려고요.”
“오랜만에 전화를 했네. 그래 뭔가요?”
박기범 부장은 그가 궁금해하던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2가지인데 첫 번째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가 얼마나 될지. 정부는 300억 달러라고는 하지만 난 그걸 안 믿거든. 그리고 다음은 타이거 펀드가 빠져나갔거든요. 한국에서 철수했어. 이를 월가 자본의 코리아 엑소더스로 볼 수 있을지. 난 엑소더스의 시작이라고 봐요. 그걸 알리는 프리머니션(징조)이 아닐까 싶어.”
아마미 기자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박기범 부장님은 어떤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아마 세지마 류조 정도 되는 정보력이 있는 모양인데,”
다급했기에 박기범 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쓸모없는 소리말고. 세지마 류조인지 뭔지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알았어. 알았어. 첫 번째 질문에 답하면 한국은행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 다만 외화의 유출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거야. 내가 볼 때 지금 속도라면 다 바닥이 날거야. 헤지펀드 쪽에서는 한국의 실제 외환보유고는 발표치의 절반도 안된다고 해. 그렇다면 150억 달러 미만?"
"그럼 한국은행이 사기를 친다는 소리네. 새빨간 거짓말?"
"그렇게 까지는 보기 힘들고, 말했다시피 지금 미국과 일본 투자자들이 미친듯이 한국에서 돈을 빼내고 있거든. 한국은행이 집계를 내서 발표를 하고 있을 때도 돈이 줄줄이 빠져서 외환보유고를 발표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거야."
잠시 말을 멈춘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재차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외국에서 빌린 외채의 만기상환기간을 연장하지 않으면 바로 끝이 나니까. 지금 한국대기업들이 얼마나 외국은행들로부터 돈을 빌렸는지 정부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어. 그거 만기연장 거부당하면 한국대기업들은 열이면 열. 전부 파산이야."
"그렇게 심각해?"
"빚잔치했으니 할 수 없지. 두 번째는 박 부장 당신이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소로스는 알아도 줄리안 로버트슨은 잘 모르지. 하지만 월가는 다 알아. 이제 한국은 가망이 없다고 본거지.”
아마미 타카코 기자의 입을 통해 들려온 가망이 없다는 것은 이제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신용도는 바닥이 났고, 전혀 믿을 수 없는 신용을 가진 국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이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2억 달러정도를 보유하고 있는데 좀 기다리면 될까?”
“헤지펀드로 대표되는 외국투자자들이 코리아 아니 아시아 엑소더스를 하고 외환보유고는 빠르게 줄고, 한국의 종금사나 단자회사들이 빌린 달러빚은 만기연장을 안해주려고 하지 않겠어? 달러가치가 폭등할 것은 눈에 보이는데? 2억 달러를 가지고 있으면 잘하는거야.”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제 더 사는 건 그만두고 지금 있는 달러를 원화로 바꾸는 것은 시간을 두고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아마미 타카코 기자는 또 다른 중요한 말을 했다.
“그리고 나도 파악한 바로는 원래 한국정부가 단기적인 외화문제는 일본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워싱턴이 도쿄에 압력을 넣었다던데? 이제 한국정부는 고립무원의 처지지.”
“워싱턴이 도쿄에?”
이 말은 충격적인 말일 수 있다. 즉 미국이 일본에게 압력을 넣어 한국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경제패권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클린턴이 직접 움직였다는군. 루빈도 대장성에 전화를 넣었고. 미국은 말이야. 일본이던, 독일이던, 영국이던, 가만있기를 바라는거야. 미국이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세계은행, IMF가 통제하기를 바라지, 일본이 나서서 아시아 국가들의 신용보증을 해주거나하는걸 바라지 않아. 한가지 더 말하자면 한국을 미국의 경제지배아래 편입시킬 계획이야.”
그 말을 듣고는 지금까지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재확인한 박 부장은 기자에게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요. 내가 밥 한번 살게.”
“어이. 기사거리는?”
박기범 부장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일단 외환문제가 더 급했고 아마미 기자에게는 나중에라도 기업관련 기사를 제공하면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그녀도 이해하겠지.”
혼자 중얼거린 박기범 부장은 머리가 아픈 듯 안경을 벗고 미간을 매만졌다. 곧 그는 2억 3천만 달러에 달하는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면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고 세월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면서 결재해야 할 서류를 작성했다.
그는 이번 추석연휴 때 목포에 내려가서 푹 쉬고 오자고 생각하고 비교적 편한 마음가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딘지 불안한 측면이 있어서 자금팀 내부를 서성거렸다.
“부장님. 불안하십니까?”
“어?”
류 과장의 말에 깜짝 놀란 그는 고개를 여러차례 끄덕거렸다.
“뭐 그렇지 뭐. 아. 자네 고향이 어디지? 이번 추석에 내려가나? 난 내려가는데. 내일 아침 목포행 첫차 타고.”
“그래도 고생이시겠어요. 저는 천안이라서 버스로 가면 금방 가거든요. 차가 없으면 지하철타고 안양 가서 거기서 시외버스를 타도되거든요.”
“이런땐 고향이 가까운 자네가 부럽구만.”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인 박 부장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 서류를 결재했다. 그날 퇴근 시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 작품 후기 ============================
루빈 : 로버트 루빈(1938~) 당시 미국 재무장관. 유태계 미국인으로 나중에 시티그룹 회장까지 지냅니다. 클린턴의 명을 받들어 일본에 압력을 넣어 한국의 외화유동성문제는 IMF를 통해서만 해결해야 한다고 했죠.
줄리안 로버트슨도 월가의 대표적인 헤지펀드 매니저입니다. 지금은 은퇴했죠. 아마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 줄리안 로버트슨의 한국철수는 타이타닉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사람이라고 보기도 한답니다. 실제 당시 경제신문보다 한겨레에서 먼저 보도했죠. 대다수는 무의미하게 받아들였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