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28일 화요일 아침.
그는 신문에서 우연히 미국의 타이거 펀드가 한국에서 철수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37억원의 손해를 보고 철수한 타이거 펀드.
미국의 줄리안 리처드슨이 세운 유명 헤지펀드인 타이거 펀드는 순자산규모가 220억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헤지펀드였다.
이들 헤지펀드가 한국에서 철수했다는 말은 한국에서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록 핫머니의 성격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세계 자본시장의 움직임을 미리 알려주는 징조였다.
“본격적으로 외국인들이 철수하는구나.”
금융시장에 대한 데이터를 조사하는 그는 헤지펀드의 경우 모집인이 100명 내외의 소수 부유한 투자자들이라는 사실에 또 놀랐다.
이유는 대체 미국엔 얼마나 많은 부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이니만큼 부자들이 많지. 그렇게 부자들이 많으니 모든 미국인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저런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일을 하고. 선진국 중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작다고 하는 일본은 열심히 노력해봐야 거기서 거기니 놀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해서 90년대 이후 저성장인가?’
대충 생각한 그는 신문을 덮고 현재 보유한 달러를 점검해보았다. 무등그룹이 현재까지 보유한 달러의 양은 무려 2억 3천만 달러.
하지만 그는 팔지 않기로 했다. 더 보유해서 높아지면 팔아버릴 심산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수입원자재 결제 대금때문에라도 어느 정도 달러는 필요했다.
“부장님. 계속 달러 살까요?”
“아니 이 정도면 됐어.”
그 말에 류 과장이 대답했다.
“하지만 점차 원화가치가 폭락해나갈 것 같아서요.”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하지만 이 상태로 더 두자고. 원화결재대금도 많으니 원화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부장님. 그럼 1000원이 넘으면 파실 셈인가요?”
“아니. 고작 그걸 가지고? 매입단가가 얼만데. 더 기다려봐.”
자신 있다는 태도였지만 정작 박 부장 자신도 얼마나 환율이 될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시장이 미쳐돌아갈때는 차분히 더 기다리다가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10월 31일. 무등그룹 본사로 한 통의 팩스가 날아왔다.
“부장님. 우리 회사로 팩스 전문이 왔는데요. 재경원에서 보낸 겁니다.”
사원급 직원하나가 팩스용지를 들고 왔다.
박 부장이 내용을 보니 재경경제원이 각 기업에게 보낸 공문으로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보유한 모든 외화를 환투기 목적으로 소유하지 말고 원화로 바꾸라는 내용이 담긴 팩스였다.
"야. 뭘 이런 걸 부장인 나한테 보고를 하냐? 그냥 팩스에다가 이면지로 넣던지 아니면 그냥 버려.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귀찮다는 듯 종이를 휘적이던 그는,
“이거 그냥 내가 메모지로 쓰지 뭐.”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강경식 재정경제원 장관의 서명이 담긴 서류였지만 박기범 부장은 그 종이를 그냥 메모지 취급했다. 그 모습에 당황해하는 사원을 보면서 박기범 부장이 말했다.
“왜 그래? 재경원이 무서워? 그리고 우리가 환투기 목적으로 지금껏 달러를 사모았고 앞으로도 들어오는 수출대금을 환전안하겠다면 지들이 어쩌겠어?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정부의 개입과 간섭? 연쇄살인마가 봉사활동 하는 소리하고 있네”
재경원은 아무짓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기에 그는 회사로 온 이 공문을 무시했다. 오히려 또 팩스가 올 때 인쇄하라고 인쇄가 되지 않은 뒷면을 팩스에 집어넣었다.
“이면지 쓰지 뭐.”
그랬다. 박기범 부장의 머릿속에서 정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외환위기를 맞이하게 되더라고 외환관리를 못한 정부가 멍청한 탓이지 환율이 폭락할 것을 예상하고 환투기를 한 기업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보았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누구나 자신의 예상대로 투자를 할 수 있다.
원화가치가 떨어지는게 눈에 보이는데 달러를 사들이지 않는게 바보라고 본 그는 신문에서 실수요 이외에 달러를 사는걸 법으로 금지한다는 정부발표가 적힌 신문을 보면서 콧웃음을 쳤다.
“미친놈들. 이제 기업이 보유한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공수부대를 각 기업본사에 투입시킬 기세구만. 진짜 한나발 렉터가 로맨스 하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사실 재경원의 조치는 무의미한 헛소리에 불과했다. 기업이 필요해서 실수요라고 박박 우기면 어찌할 것인가?
이미 눈치 빠른 개인들도 실수요라고 하면서 달러를 사들인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정부의 조치를 믿는 사람은 바보 중의 바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해놓고 재경원 공무원들 뒷구멍으로 달러 미친듯이 사들이는거 아니야?"
투덜대듯 내뱉은 후, 박기범 부장은 의자에 앉아 환율을 주시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1000원대가 돌파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미 확보한 달러물량은 2억 3천만 달러. 정부에서 이런 공문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스위스 OBS비밀계좌까지 합한다면 총 3억 1천만 달러나 되지만 그 돈은 일단 역외계좌에 계속 두기로 했기에 실제 가용할 수 있는 외환은 2억 3천만 달러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쌓아놓는 건데."
원래 정부의 공문은 무시하는게 무등그룹의 관례였다. 예전부터 이런건 신경안썼고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정부발표는 무시하라고 있는 것이다.
‘혹시 정부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난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말이 그렇지 한 나라의 외환보유고는 대외결제지급력을 말하는 것이다.
달러로 대표되는 외환을 충분히 보유하여야만 급격한 대외충격시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산업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석유를 100%해외에서 수입하는 우리나라로서는 달러보유는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다. 중동 산유국들은-사우디를 위시한- 달러만 받기 때문이다.
“류 과장?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고가 얼마나 되지?”
“잠시만요.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연쇄살인마가 봉사활동 하는 소리 : 개소리이 당시 재정경제원 장관은 강경식씨였습니다.
얼마나 급했냐면 외화가 미친듯이 유출되는 가운데 이를 감지한 사람들이 투기목적으로 달러를 사들여서 부족한 달러난을 가중시켰죠. 그래서 은행창구에서도 달러매입을 중지시켰고 유학생, 중소기업, 투기자 모두 고통받았죠
미련한 시대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