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저도 봤습니다.”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본 황 부사장은 박 부장에게 말했다.
“오늘 외환시장이 열릴려면 20분 남았군. 무조건 사들이게. 달러 말이야. 무조건 사게. 무조건.”
“그렇지 않아도 오늘 50억 정도를 사려고 합니다.”
“겨우? 자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70억은 사야할걸. 최대 100억은 사들일 각오를 해.”
순간 황 부사장이 뭔가 감지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사장님. 혹시 이번 홍콩 주가폭락을 계기로 해외투자자들이 아시아에서 자본철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그 말에 황 부사장은 박기범 부장을 쳐다보았다.
“외신을 봤나?”
“저는 국내신문만 봤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간지 경제면보고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홍콩은 아시아 금융시장의 메카이고, 어찌보면 세계경제의 바로미터이니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도 그런 말이 없었어. 자네가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뭐 나야 재무부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OECD가입에 1인당 GDP 1만 달러시대를 작년에 맞이했어. 그런 나라에서 외국투자자들이 자본을 철수하리라고는 보지 않아.”
잘라말하듯한 태도를 보인 황 부사장은 계속 말했다.
"우리가 1995년에 1만 달러를 돌파했는데, 그 때 미국이 고작 2만 8천 달러. 영국이 1만 8천 달러였거든. 일본이야 워낙 소득이 높아서 4만 2천 달러를 찍었지만 말이야. 92년에 3만 달러 넘은 나라니 가능하겠지. 이 정도면 세계적인 수준이야. 그런데 한국에서 돈을 뺀다? 아니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의 추측이 맞을때가 많으니. 믿기로 하지. 나도 그 쪽으로 알아보겠네. 일단은 빨리 가서 달러나 사 놓으라고. 주가는 대폭락할텐데. 혹시 우리가 공매도를 때릴 수는 없을까?”
“그 가능성도 검토해보겠습니다.”
박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황 부사장이 말했다.
“공매도는 그냥 한 소리야. 그것 때문에 괜히 다른 일 방해되면 안되니 잊어버리라고. 네버 마인드야. 네버 마인드.”
자리로 돌아간 그는 류 과장에게 30억 어치의 달러를 사라고 하고 본인도 50억을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고려은행의 대표계좌로 여러은행에 분산된 금액을 하나로 모았고 대표계좌에 들어있는 현금 100억 중 50억을 맡았다.
9시 정각.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이 문을 열자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이날 코스피지수는 33포인트나 폭락한 570.91이었고 환율은 급등해 달러당 930원으로 치솟았다.
“나 박기범 부장입니다. 우리 고려은행 계좌에 있는 돈 중 50억을 달러로 바꾸려고요. 예. 지금 기준환율로.”
그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기준환율을 930으로 잡고 계산기를 두드리자 50억은 대략 530만 달러 정도로 나왔다.
“어려운데. 일단 우리가 보유한 달러도 그렇게 많지를 않아서요. 게다가 다른 기업들도 달러를 사려고 아우성입니다.”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달러양은?”
“맥스 15만. 매입가 935원으로.”
계산기를 두드린 박 부장은 실망스런 표정이었다.
“고작 1억 4천. 안돼요. 전사 지시야. 오늘 80억 사야해. 류 과장이 30억. 내가 50억. 내가 부장이니까.”
“일단.....”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방금 내가 20만 달러는 샀어요. 935원에. 1억8천7백만원.”
“내가 호가를 더 높게 부르면 되는가?”
“얼마에?”
“940.”
은행 담당자는 또 침묵하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롱 50만.”
고려은행 담당자의 말이었다. 그가 말한 롱은 롱 포지션의 준말로 이는 산다는(Buy) 뜻의 업계 용어였다. 반대로 숏은 쇼 포지션으로 판다는(Sell) 뜻이다.
“4억 7천?”
“롱 945. 50만.”
“오케이.”
50만 달러씩 결제를 할때마다 호가가 조금씩 높아졌다. 환투기를 한다면 아까 산 940에 사서 945에 팔아도 단위가 크다면 정말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결제를 하는 와중에 다행히 조금 떨어진 덕에 940 이하로도 달러를 살 수 있었다.
“아까보다 좀 떨어졌어.”
박기범 대리가 말하자 은행측에서 바로 대답했다.
“환투기세력이 오전중에 사서 내놓는 물량이 조금 있었어요. 정부도 외환시장에 강력하게 개입한다고 하고. 그래서 내려갔지만 또 올라갈 것 같아요.”
"아니 환투기 세력이 왜 숏을 때려? 정부의 시장개입은 무의미하다는거 알면서? 한국정부의 시장개입? 연쇄살인범이 봉사활동하는 소리하는 격이지 뭐."
"환투기애들이야 단타때리니까. 환율로도 스캘핑하는 애들 많아요. 하루에도 수십번씩 숏때리고 롱때리고. 다하더만."
"환율로 스캘핑? 어려울텐데. 전산망이 소화를 하나? 우리나라 거래소 서버가 버티지를 못할걸? 뭐 어쨌거나 뭐 좋은 정보는 없나? 환율관련해서.”
“홍콩측 정보인데, 헤지펀드들이 현금확보를 하려고 한다는군요. 그리고 미국이나 일본의 대형은행들이 달러대출에 대한 만기연장을 거부할 것이라고도 하고요.”
좋은 정보였다. 일단 그는 오늘 자기가 사야 할 50억을 계속 사들이기로 했다. 호가를 그는 의도적으로 높여가며 달러를 계속 사들였고 환율시장이 마감될 무렵 그는 자기 물량 50억을 다 사들일 수 있었다.
“부장님. 대단하세요.”
“류 과장. 자네도 다 샀잖아.”
“하지만 저는 호가를 너무 높였어요. 평균 945원에 샀습니다.”
“괜찮아. 나도 그 정도야. 80억을 확보했는데. 지금은 일단 부르는대로라도 사야할 판국이야. 일주일만 지나면 우리가 산 금액이 너무 싸게 느껴질걸?"
박 부장은 이렇게 말하고 머리를 긁었다.
"여지껏 우리가 확보한 물량이 어느 정도지? 오늘 하루만 80억이고.”
류 과장이 입을 열었다.
“96년 11월부터 조금씩 사들인 물량을 다 합하면 2억 달러 수준입니다.”
“그래. 어차피 원유결제를 위해서 달러확보를 한다고 하면 뭐랄 사람이 없을테니.”
달러를 80억어치 사고, 그가 해야할 서류에 결재를 다 끝내자 저녁 9시가 넘었다.
택시를 타고 퇴근을 하면서 박기범 부장은 차 안에서 내일 출근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달러를 비싸게 사긴 했어도 이미 홍콩에서 거래되는 역외선물환시장(NDF)에서는 1000원이 넘게 거래되고 있었으니 그나마 싸게 산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여보 왔어?”
“좀 늦었지.”
가볍게 대답하고 아내 옆에 앉았다.
“오늘은 뭐가 그렇게 바빠?”
“80억어치 달러 사들이느라. 요즘 기업들마나 달러를 사들이느라 정신이 없거든.”
“그래? 기업의 세계는 뭔진 몰라도 아주 치열해.”
“전쟁이야. 우리 회사가 살기 위해서라면 경쟁사를 죽여야 해. 그게 살길이야.”
그의 머릿속에는 내일 토요일 열릴 금융시장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었다.
25일. 토요일. 이날 문을 연 주식시장은 또 한번의 패닉을 맞이했다.
박 부장은 주식시세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주식투자를 해서가 아니었다.
원화가치가 폭락하고 주가가 급락하는 상황은 결코 좋은게 아니었다.
환율이 달러당 900원대로 원화의 가치가 휴지로 변해간다면 외국인들은 보다 적은 달러로 많은 원화를 획득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주가마저 폭락해 주가가 휴지가 되면 외국인들은 휴지로 변한 우량기업의 주식을 대거 취득해 향후 한국경제가 안정될 때 주가차익과 환차익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돈벌기 정말 쉬워. 내가 돈만 많다면 일시적으로 박살나는 국가의 주식, 채권을 헐값에 사들일 수 있을거야. 그런 역량을 가진 나라가 미국밖에 없다니. 그 복지국가라는 스웨덴도 별거 아니구만. 흥"
주가 그래프를 모니터를 통해 보면서 투덜댄 그는 문득 신문에서 현재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미국의 아시아견제작전이라고 평해 주목을 받은 마하티르 인도네시아 총리의 발언이 떠올랐다.
“그 사람 말이 사실일까?”
박기범 부장은 그런 음모론 따위를 신봉하지 않았다. 유태인 자본의 세계지배라든지 그런 것은 애초부터 무가치한 내용이라고 보았다.
세계최고의 부자는 빌 게이츠로 스코틀랜드 계 미국인이었고, 유태인들이 세운 나라인 이스라엘은 한국경제규모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그렇게 머리좋고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유태인들이 사는 국가인 이스라엘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95년 현재 고작 18000달러.
차라리 일본의 대기업들과 자본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들은 95년에 이미 42000달러를 찍었으니까.
어찌보면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우수한 민족은 미국민족일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국과 일본, 독일 같은 국가들은 미련하게 제조업으로 돈을 번다.
한국이 힘들여 자동차를 만들면 미국은 영화한편 수출해서 자동차 수출로 번 돈의 수십배를 앉아서 번다. 독일이 힘들게 벤츠와 포르쉐를 팔아 돈을 벌면 미국은 컴퓨터 앞에서 증권투자, 차익거래, NDF거래 등으로 벤츠 수억대를 살 수 있는 돈을 1분만에 번다.
현재 진행되는 위기를 바라보면서 박기범 부장은 복잡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거나 마하티르라는 인물의 말이 맞다면 만일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우량한 대기업들을 외국인들은 헐값에 사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익은 미국과 일본투자자들이 향유할 것으로 보았다.
그 중에서도 미국투자자들의 이익이 엄청날 것으로 보았다. 달러가치는 세계경제의 패닉속에서 가치가 날로 오르고 있었다.
토요일 증시는 어제에 이어 또 폭락세로 24일 금요일에 570포인트까지 떨어진 종합주가지수는 이날 548.47로 끝났다. 하락율은 무려 3.85%.
“시장이 미쳐 날뛰는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박기범 부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주 주말 내내 회사에 나오기로 결정했다. 일요일이라고 집에서 쉬어봤자 마음만 불안하고 차라리 회사에 있는게 더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빌게이츠는 1994년 세계최고의 갑부라는 타이틀을 확보한지 14년 뒤 2008년 워렌버핏에게 타이틀을 내어주지만 2009년에 재탈환합니다. 하지만 2010년. 멕시코에 카를로스 슬림에게 그 자리를 다시 빼앗기죠. 지금은 재탈환합니다.
미국 400대 부자리스트에는 94년 이후 줄곳 1위를 차지합니다. 세계갑부리스트는 매년 3월기준, 미국부자는 9월 기준이라 늘 변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래 위기가 오면 미국 달러화와 일본 엔화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안전자산으로 여겨서요. 경제위기가 오는데 어떤 정신병자가 브라질에 투자하나요? 지금 시위하죠? 돈을 뺍니다. 안전한 미국과 일본으로 가는거죠.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 총리인데 이 당시 말레이시아도 직격탄을 맞아서 경제가 박살나고 하루에도 자살하는 사람이 수십명 나오고 거리에 실업자와 거지가 들끓고 완전히 원시시대로 회귀했거든요. 그래서 격분한 나머지 위기의 배후에는 헤지펀드-유태인 매니저-들이 있다고 했고 그 대부격인 소로스를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조지 소로스는 유태인이지만 시오니즘을 반대하는 사람이죠. 핏줄만 유태인이지 유태명절을 보내지도 않고 유태인 언어를 사용하지도 않는 그냥 미국시민입니다. 마하티르도 뭘 알고 떠들었어야 옳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