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63화 (63/159)

63화

1997년 10월 8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한 박기범 부장은 홍콩 주재 무등그룹 사무소에서 보내온 뉴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오전 9시. 전사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태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았다는 뉴스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는 어떻게 될거 같나?”

오 사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각하죠. 태국이 저렇게 됐는데. 저도 매일 외환시장을 눈여겨 보고는 있지만 상황은 악화되는 모양입니다.”

박기범 부장의 말에 오남현 사장은 헛기침을 했다.

“보아하니 정부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정부의 발표를 신뢰하지 않아. 자네들은 어떻게 보는가?”

황 부사장이 그 말에 답했다.

“저 역시 못 믿습니다. 현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은 1990년에 3당 합당으로 그 더러운 노태우와 손잡고 군부독재와 손을 잡지 않았습니까? 비록 지난 1995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키기는 했지만 정말 진정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정말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려고 했다면 진작에 구속시켰어야죠.”

“그래. 맞다. 나도 그렇게 봐. 그래서 말인데 박기범 부장.”

“네 사장님.”

박기범 부장을 부른 오남현 사장은 그에게 지시했다.

“지금 달러 보유현황이 얼마나 되나?”

“대략 2억 달러입니다.”

“그래봐야 1600억 정도잖아. 더 사들여. 순현금 확보하면 일단 다 사들여. 그리고 오늘부터 모든 수출대금은 본사로 보내지 말고 뉴욕에 있는 금융기관에 예치시키도록 하게. 그리고 한신은행으로부터의 차입은 올해가 만기인가?”

“그렇습니다.”

“딱히 또 돈을 빌려야 하는 것은 있어?”

오 사장의 말에 박기범 부장은 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다 갚고 추가 차입은 하지 마. 그리고 국내 은행들로부터 빌린 돈은 11월 30일까지 다 갚게.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달러를 확보하라는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뒤 박기범 대리는 본격적으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냈다.

"아. 그리고."

오 사장이 말했다.

"스위스 계좌에 얼마나 있지? 한 1억 되나?"

"8천만 달러입니다."

"그건 내버려 둬."

태국의 외환위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한때 동남아시아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끈 태국은 이제 동남아의 경제환자로 전락했고 이곳 태국에 막대한 돈을 빌려준 외국은행들 역시 타격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동남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텃밭이었고 따라서 일본계은행들이 많은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위기로 인해 일본계은행이 입은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은행이 쌓아놓은 대손충당금을 능가했고, 서서히 금융계전반으로 부실이 확대되었다.

이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은행들은 돈을 회수할테고 단자회사나 종금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저리로 돈을 빌린 국내 금융기관들도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물론 그의 생각이 맞을지는 알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간 박기범 부장은 류 과장을 불러 부장 책상 앞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혔다.

“류 과장. 물품대가 앞으로 얼마나 되지?”

“이번 달 물품대는 대략 78억. 다음 달 경우는 회계팀에서 내역을 정리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물으시는 이유가?”

류 과장은 굳이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박 부장도 매달 월결산을 하면서 내역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 생각인데, 물품대와 급여, 그 외 별단예금지출건들을 파악해야겠어. 자네도 아까 회의를 갔으니 알겠지만 불필요하게 현금을 우리가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 달러로 환전해서 안전하게 보유하는게 최선의 길이야.”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 부장님 잠시만.”

양해를 구한 류 과장은 자기자리로 가서 A4용지 여러장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물대가 78억인데, 지급어음 상환은 다음달만 해도 대략 350억입니다. 관세도 월 잡으면 매월 2~3천은 그냥 나가니까요.”

“혹시 류 과장 자네가 짠 순현금 2000억 확보는 이런 물대랑 어음상환건도 다 계산에 포함한건가?”

박 부장의 질문에 류 과장은 머뭇거렸다.

“그건 아닙니다. 일단 2000억 현금내에서 얼마나 물대와 어음상환을 잡아야 할지 봐야할 것 같아서요. 게다가 직원들도 회사차원에서 교통체증을 막는다는 전제아래 상무급 임원을 제외하고는 회사주차장 이용을 금지하니 택시를 타면 그 전표를 올리는 것만 해도 엄청나거든요.”

사실 그랬다. 재계 10위의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것은 상무급 이상에게만 허용된 일이고, 영업사원들도 지하철을 타던지 택시를 타고 다니도록 장려했다.

“그래봤자 사원경비인데 그거 얼마나 될거야? 그럼 월평균 얼마를 잡으면 되는거야? 전사 매출이 2조 5천억이나 되는 회사가 아직도 매달 얼마의 지출을 잡을지 파악이 안된다는게 말이 되나.”

차분한 어투였지만 류 과장은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

“더 노력해야죠. 아직도 전산망이라는게 완벽하지 않아서요.”

“그건 그래. 아.”

그는 손짓으로 류 과장을 잠시 있게 하고 사무실에서 일하던 다른 직원에게 일일자금보고 파일철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몇 초 후 서류철을 가져다주자 펼쳐보았다.

“자. 보라고. 올해 9월 8일자 일일자금실적보고를 보니까 그날 하루 영업수금이 38억이야. 물론 매일 변동이 있겠지만.”

“38억이라. 많이 들어오는 날은 50억 정도 됩니다.”

류 과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더 쳐다보았다.

“음. 9월 8일자 지출이 32억이네. 뭐 달러매입한거야 어쩔 수 없고 LC결제도 크고. 물류운반비가 의외로 크군.”

서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박기범 부장은 달러를 더 많이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에 10억 수준으로 사들이던 달러매입을 20억으로 늘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매입량을 20억으로 늘릴까?”

“너무 늘리면 문제가 생길겁니다. 이유는 그렇게 되면 현금 지출액이 급격히 커질테니까요.”

“생각해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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