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1997년. 새해부터 경제환경이 암울했다. 이미 96년부터 한보그룹 등 거대 기업들의 부실채권문제가 대두되는데 이어, 97년초 무역수지마저도 적자로 급반전되면서 한국은행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매일 급격하게 유출되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한데요?”
3월 말. 자금부장으로 2년 전에 승진한 박기범 부장은 황 부사장에게 말했다. 사무실로 배달된 경제신문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삼미그룹도 부도나고.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어.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다행이야. 1994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달러를 사두기 시작했으니까. 우리가 사들인 달러가 얼마나 되지?”
“지금까지 사들인 달러가 2억 달러입니다. 다행히 스위스 페이퍼 컴퍼니가 저희를 살리고 있습니다. 평균 매입단가가 700원대 중후반입니다.”
“지금 벌써 환율이 880원대를 오가니 20%는 그냥 벌었군.”
“그렇습니다.”
박기범 부장은 이미 94년 말. 해외증권투자, 해외공장건립 등의 목적을 위해 달러를 사두자는 재무투자안을 건의하였다. 이 때 스위스의 OBS를 통한 스위스 계좌. 외환은행에 예비목적으로 쌓아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본인도 달러를 1만 달러 정도 사두었고 고향에 있는 형에게도 사라고 말했던 것이다. 형 역시 차를 크레도스로 바꾸려다가 그 돈 천만원으로 달러를 샀던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 상황이 결코 우호적이지는 못한데. 어떻게 대처를 하면 좋겠나?”
“달러확보입니다. 일단 수출대금은 전부 환전하지 않고 물품대 지급분만 환전하려고 합니다. 나머지 돈은 전부 달러예금으로 두었다가 한번에 환전하려고요.”
“그래. 그렇게 해.”
부사장실을 나온 박기범 부장은 책상에 앉아서 서류들을 검토했다. 일단은 물품대 지급과 관련해서 지급기일을 변경하거나 결재조건을 어음에서 현금으로 교체해 달라는 내역들이었다.
협 조 전
문서번호 : 97-01234
발송일자 : 1997-03-24
기안자 : 홍욱식 경공업사업부 섬유과장협조부서 : 자금팀 박기범 부장
-거래처(삼유 패브릭) 현금결제 지급건삼유 패브릭이 최근 유동성 위기 때문에 현금확보가 어려운 실정. 따라서 앞으로의 결제건은 어음대신 현금요청임.
4월 물품대 : 12,987,000원(VAT 포함)5월 물품대 : 24,998,900원(VAT 포함)전액 현금결제 요청
“아니. 이 사람들은 신문도 안 보나? 지금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현금결재를 어떻게 해 줘?”
그는 전화를 걸어 담당자와 통화를 했다.
“자금팀 박 부장입니다. 예. 홍 과장? 서류 봤는데 말이 안돼. 기획실도 그렇고 경지실도 그렇고 지금 우리 경제도 서서히 위태위태한 모양인데 어떻게 우리가 현금결제를 마구 남발하겠어. 뭐? 원가를 깎겠다고? 안 돼. 일단 이 사안은 반려할거야. 우리 회사는 한푼이 아쉬운 시점이야. 알겠어.”
전화를 끊고 그는 전자결재문서에서 반려를 클릭했다. 그러자 작은 윈도우 창이 뜨면서 반려사유를 기재하는 칸이 등장했다. 그는 거기에 내역을 써내려갔다.
-전사적 현금유동성확보로 인해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아니면 현금결제 대신 3개월 어음지급으로 지속할 것.
다음 서류도 결재할 것이 있었다. 일단 꼼꼼히 서류를 읽으면서 정리를 하면서 그는 전사의 현금확보 방안도 찾아보았다.
“류 과장?”
그는 자신의 직속 부하인 류 과장을 불렀다. 그가 다가오자 바로 지시를 내렸다.
“류 과장. 순현금 2000억 확보방안 언제 다 되지?”
“거의 다 되어갑니다.”
“최대한 빨리 해 줘. 내역을 일단 봐야하니까.”
“알겠습니다.”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순현금 2000억은 말 그대로 무등그룹이 보유한 현금규모였다. 일단 현금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파악을 한 후 그걸 빌미로 재무투자를 해볼 심산이었다. 재무투자라고 해봐야 달러확보나 안정적인 예금으로 회사의 자산을 지키는 것에 불과했다.
“아 맞다. 류 과장? 기획실로 가서 향후 경제전망이나 최근 이슈가 되어가는 경제문제에 대해서 좀 알아가지고 오게. 아니면 기획실 부장 불러오던가.”
“알겠습니다.”
박기범 부장의 책상에는 모니터가 두 개 있었다. 첫번째 모니터는 업무용 회사 서버와 연결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환은행 전산망과 연결된 것으로서 원달러환율, 원엔환율 차트, 미국의 다우지수, 일본의 닛케이지수, 우리나라의 코스피 지수가 나와있었다.
그 차트를 보면서 근심에 잠긴 박기범 부장은 초조해졌다. 그의 마음 속에 뭔가 불안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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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우리나라는 IMF위기를 맞게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