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부장님. 배상수씨 일 좀 하는데요?"
대리급 직원 하나가 결재를 받으러 왔다가 무심코 던졌다. 속으로는 좋았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뭐 그런걸. 아니 이제 일주일인데 그게 보이나? 더 두고 봐야지. 안 그래?"
도장을 결재란에 찍으면서 박기범 부장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좋았다. 잠시 앉아있다가 그는 배상수를 회의실로 불렀다.
"부장님. 부르셨어요?"
"여기 앉아봐."
의자에 앉도록 지시한 박기범 부장은 본격적으로 OJT를 시작했다. 원래는 그 전에 해야 옳지만 일단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을 조금 시키고 나서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우리 무등그룹은 섬유를 기반으로 하는 수출기업이야. 현재 화학섬유제품에서 국내 1위. 아시아 1위를 하는 회사야."
"그럼 듀퐁같은 기업이 라이벌이겠군요."
이 말을 배상수의 입에서 듣게 되자 박기범 부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자식. 공부 좀 했는걸?'
고개를 가로저은 후 박기범 부장이 말했다.
"라이벌? 그건 아니야. 우리의 주력 상품은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 그래서 니가 입고 있는 와이셔츠나 스타킹. 속옷, 혹은 그런 제품을 만드는 다른 회사에 섬유반제품을 팔기도 하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에 받아적는 모습을 보며 나름 흐뭇해 한 박 부장은 계속 말을 해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풍요로운 국가가 어디냐? 전 국민이 배터지게 잘먹고 잘 사는....미국이지? 그 미국시장에서 우리 무등그룹이 만든 스타킹은 어지간한 프랑스 제품보다 더 비싸. 사실 프랑스의 고급 의류기업들도 우리가 만든 섬유를 사거든."
"우리 아니면 거기도 힘들겠네요."
"물론이야. 우리가 공급을 끊으면 거기는 작살나지. 허나 우리가 시장 100%는 못먹어. 그러면 또 누군가 좋은 섬유를 개발해 시장을 개척하니."
대답을 한 박 부장은 배상수가 받아적을 수 있도록 말을 끊었다. 노트에 열심히 받아적는 모습을 보며 15년 전. 자신이 처음 입사했을 때, 과장이나 부장에게 OJT를 받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자금부장이었던 황영식. 지금은 전무로 승진했고 나중에 기업규모가 더 커지면 사장까지도 노려봄직한 위인이다. 풋내나는 신입사원이었던 자신은 이제 지금 부장직함을 달고 차기 임원을 내다보는 중간관리자로 성장했다.
입사하던 1980년 당시, 그러니까 1979년 회계연도 기준으로 고작 매출액 1020억 원짜리 회사가 이제 매출 3조원 짜리 거대기업으로 자라났다.
"어쨌거나 미국시장에서의 승패는 아주 중요하다. 거기에서의 승패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해."
짧게 말을 마친 박부장은 이번에는 업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자금 일은 할만 해? 아직까지는 은행 다니고, 전표끊느라 힘들겠어. 그래도 그게 다 하나의 과정인 것이지."
"할만 합니다. 재미있어요."
"그럼. 좋은 태도야. 일단 마감은 해. 늦게 퇴근을 하겠지만. 많이 배우게 될 것이야."
근엄하게 부장다운 태도로 말을 했다. 이후, 배상수는 업무를 빠르게 습득했다. 한때 학생운동에 투신해 잘못된 길을 갔지만 원래 명문대학 출신이었고 회사생활을 하면서 여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는 회사원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아. 최 부장님."
잠시 휴게실에서 담배를 태우던 해외영업부 최 부장의 모습을 본 박기범 부장은 그를 불렀다.
"박 부장. 뭐야? 전표 잘못 올린거 있어?"
"아니. 그런건 아니고."
담배연기가 거슬린다는 듯 손으로 휘휘 저으면서 박기범 부장이 말했다.
"우리 자금 신입사원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꽈악 차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 해외영업부에서 데려갔으면 하는데?"
"에잉. 자금이 못먹는거 우리더러 먹으라고?"
투덜대며 대답하는 최 부장에게 박 부장이 말했다.
"아니야. 원래 오 사장님이 특별히 일을 시키라고 한 친구야. 자금으로 강제 할당 받은 건데 도저히 데리고 있을 수가 없어. 추가 인원을 쓰는게 오히려 더 방해돼. 해외영업은 어차피 사람 많이 필요하지 않나?"
그러자 최 부장은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신입이라고? 그러면 영업 해봐야지. 영업은 해봐야해."
당연한 일을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최 부장은 말했다.
"이번주가 자금 마감이지?"
"그렇지"
박 부장이 재빠르게 대답했다."끝나면 주려고."
"좋아. 오 사장님한텐 자네가 허락을 맡아. 그리고 자금 마감 끝나면 천천히 줘. 꼭 매월 1일날 발령 받아야 하는건 아니니까."
"그러지 뭐."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 박기범 부장은 배상수를 불렀다. 그를 회의실 의자에 앉혀놓고 회사원으로서 알아야 할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대해 가르쳤다.
"너 오늘날 미국이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지 아니? 오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쌓은 부가 고작 탄생한지 200년 밖에 안 되는 나라가 쌓아올린 부(富)에 비하면 겨우 먼지조각에 불과한지. 궁금하지 않아?"
박기범 부장은 기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바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인권존중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가장 잘 실현한 인류역사의 종점이기 때문이다."
배상수는 이 말을 듣고 새삼스레 박 부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로 이러한 사상기반 위에 자본주의가 꽃피우고 그 자본주의는 모든 인류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지. 오죽하면 세계최고의 정치학자인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을 했겠니? 사실 그렇지. 지금 1996년의 세계. 너무 따분해. 컴퓨터. 인터넷, 이 모든 변화와 혁신이 다 미국에서 이루어졌지. 바로 자유주의,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가치의 기반 위에 태어난 혁신이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무등그룹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난 부장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우리는 섬유회사야. 특히나 화학섬유. 우리의 목표는 듀퐁같은 종합석유화학기업이 되어야 한다고 봐. 그 첫발을 지난 1990년 서산 석유정제시설 준공으로 내딛었지."
"그럼 이젠 또 뭐가 필요할까요?"
배상수의 질문에 박 부장이 답했다.
"뭘 것 같아? 바로 조선 그리고 유전개발이지. 석유가 반드시 필요해. 지금은 한국석유공사에 우리가 필요한 물량을 공급해달라고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직접 사우디에서 우리가 유조선을 발주해서 사오고, 더 나아가 우리가 유전을 캐는거야. 이게 경영학에서 말하는 수직계열화다."
그렇다. 석유-운송-석유화학-화학제조 및 판매로 이어지는 거대한 공급체인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돈을 충분하게 조달하는 것. 이는 무등그룹의 최고의 목표이자 자금팀 부장으로서의 목표였다.
"지금은 힘들지만 기회가 오겠지. 그러면 우리는 다른 기업들처럼 원자재가격에 휘둘리지 않아.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는 우리 스스로 조달하는데 가격변동이 문제겠니? 그야말로 원가부담 자체가 사라지는거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거야 말로 최고의 헷지 아니겠어?"
"섬유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군요."
"당연한 말씀."
이날 이후 박기범 부장은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이 학생운동가 출신의 신입사원에게 쏟아부었다. 자유무역의 우수성과 보호무역의 폐해, 정부개입의 불행함 등을 가르쳤다.
며칠 후, 해외영업부 최 부장과의 약속대로 배상수는 이제 해외영업부-그곳에서도 핵심인 북미디비전으로-에서 일을 하게 된다.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는 최 부장을 본 박기범 부장은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최씨. 담배좀 작작 태워."
"아이. 시달리가 겨우 한 대 빠는건데. 되게 뭐라 그래?"
투덜대면서 최 부장이 대답했다.
"됐고. 저기 배상수. 그 놈은 일은 잘해?"
"북미사업부 보냈는데, 아주 열심히야. 그쪽 시장을 알아야 한다고 북미지역의 역사, 경제, 문화. 책은 다 보더라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최 부장의 얼굴에서 본 박기범 부장은 그래도 그 놈이 제대로 된 녀석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 놈이 그러더라. 미국노래를 많이 들어야 할 것 같다고."
"역시 내가 지대로 키운 놈이여."
미소를 가득 지으며 박 부장이 말하자 최 부장은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나저나 그 놈은 누굴 좋아할라나? 우리 팀에는 팝의 매력을 아는 놈이 하나도 없어. 적어도 전세계를 무대로 장사하는 무등그룹직원이라면 알아야지. 내가 배리 매닐로우까지는 알아야 한다고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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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여러분. 이 배상수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인물이 소설의 마지막부분에서 박기범 사장을 어떻게 하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