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한참 음악을 들으며 길을 가고 있을 때, 누군가 달려오더니 박기범 부장의 어깨를 잡았다. 지나가는 행인이 길을 묻거나 시간을 묻기 위해 잠깐 말을 건 것이라고 생각한 박기범 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대학생이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며 박기범 부장에게 종이쪽지를 하나 건넸다. 그걸 엉겁결에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이어폰을 귀에서 걷어냈다.
"이걸 꼭 여기 주소로 전해주세요. 그럼 전 이만."
빠르게 그리고 급하게 말을 한 그 대학생은 뒤를 쳐다보더니 급이 뛰어갔다. 박기범 차장은 그 메모지를 슬쩍 쳐다보더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야? 여자친구에게 연애편지라도 보내나?"
다시 귀에 이어폰을 꼽고 길을 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을 무렵, 또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다 보니 숨을 헐떡이며 두 명의 남자가 지친 듯 표정을 지으며 박기범 부장에게 말했다.
"아까....누군가....뭐 주지 않았나요?"
"누구시죠?"
이 말에 숨을 헐떡이던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신분증을 꺼냈다.
"안기부입니다."
박기범 부장은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요?"
"아까 도망가던 친구가 있는데 공산혁명분자입니다. 한국 대학생 공산연맹 총무인 친구요."
"그게 뭔가요?"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박기범 부장을 보며 다른 안기부 직원이 말했다.
"아니. 지금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뭐가요. 난 다음주에 휴가를 받아서 어디갈지 고민하고 있었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을 하니 신문 같은 건 볼 새도 없죠. 9시 뉴스라는 건 그런 단어만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근데 한국 대학생 공산 연맹? 뭐 무주공산 등반모임입니까?"
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안기부 요원은 박기범 부장에게 말했다.
"그 대학생이 아마 당신을 접촉한 모양입니다. 잠시 물어볼 게 있으니 같이 가 주시죠."
"안기부에는 에어컨 있죠. 우리 회사는 에어컨이 없어서 완전 인페르노거든요. 그리고 우리 회사에 전화좀 해도 되죠? 내가 어디있는지 알아야 하거든요. 방금 은행업무 끝나고 회사로 복귀하던 참이라서."
"그러시죠."
안기부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목격자는 사회문제나 시국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는 회사 일만 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런 인물로 여겼다.
잠시 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다가왔다. 차의 문을 열면서 안기부 직원이 말했다.
"타시죠."
"그런데 왜 이 차로 안 쫓고 뛰어가서 잡으려고 해요? 그게 더 쉬울텐데."
그 말에 허를 찔린 듯 뜨끔한 안기부 직원은 둘러댔다.
"일단 차에 타시죠."
차는 뉴그랜저였다. 그나마 안락한 세단에 몸을 실은 박기범 부장은 안기부 조사실로 목격자 진술을 위해 향했다.
다소 걱정도 했지만 의외로 안기부 직원들은 친절했다. 회사에 전화도 해서 수배중 학생에 대한 목격자로 진술확보를 위해 잠시 데려갔고 회사까지 차로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요. 자정이 넘으면 집에 바래다 줘요. 한 밤중에 회사 앞에 가는 것만큼 두려운 게 없어요. 안 그래도 새벽별 보고 출근하고.... 아. 지금은 6시면 해가 뜨지?"
중얼대는 그에게 안기부 직원이 콜라가 가득 담긴 컵을 건넸다.
"회사원이니 아주 바쁘시겠군요."
"그럼요. 자금담당 부장이라 아주 바쁘죠. 회사의 생명은 돈줄인데 제가 그걸 관리하니까요. 그 경리업무 알죠? 들어올 돈, 나갈 돈 맞추는거. 그게 자금의 기본입니다. 전 경영학과 출신이라서 대학때 무지 복잡한 재무이론을 배우고, 그랬지만 회사업무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죠."
콜라를 한모금 마신 그가 다시 말했다.
"아시겠지만 최적자본구조니, 만기매칭이론이니, 채권에 대한 듀레이션이니 다 학교에서 배우지만 현실에서는 귀찮아서 안 구해요. 어차피 우리 회사는 들어오는 돈이 더 많으니 만기매칭해서 자금 부족을 어찌 하자 이럴 필요가 없죠."
"대단하군요."
"그럼요. 그리고 우리 회사가 보유한 채권도 듀레이션 안 구해요. 그냥 할인해서 미리 받던지 그러니까. 어느 세월에 일일이 이자 구하고. 귀찮아요. 중요한건 만기일에 돈이 들어오게만 하면 되죠."
안기부 직원은 이제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그 대학생이 뭘 건네주었습니까?"
"아. 그 대학생요? 저한테 뭐라고 말을 하면서 이 쪽지를 건넸습니다."
박기범 부장은 주머니에서 그 대학생이 준 쪽지를 꺼내 그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전 그 친구가 길 물어보려고 절 부른 줄 알았죠. 그리고 귀에다 이어폰을 꼽고 있어서 뭐라고 말했는지 잘 못들었어요. 지 혼자 할말만 하고 가버리니까."
안기부 직원은 쪽지를 가만히 보았다.
"이 종이를 거기 위에 빨간 글씨로 적힌 주소로 전해달라네요."
"선생님. 이게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몰라요. 전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었거든요. 일단 회사는 가야하니까."
입을 굳게 다문 안기부 직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박기범 부장에게 또 말을 던졌다.
"그 학생이 누군지 모른다고 그러셨죠?"
고개를 끄덕이자 안기부 직원은 자신이 가져온 두터운 파일철을 열고 종이를 한 장 꺼내 그에게 건넸다.
"보시죠."
"흠."
종이에는 현상수배범이라는 글씨와 함께 사진이 붙어있었다.
-이름 : 배상수
-나이 : 23세
-혐의 : 한국대학생 공산연맹 총무-포상금 : 300만원.
-목격시 경찰서, 안기부로 신고 바람.
"우와. 상금이 3백. 오. 좋은데요?"
"이 친구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 나라에 공산혁명을 일으키려는 것이죠."
"근데요. 지금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5.18도 한때 난동이라고 했잖아요. 진실은 정권잡으려도 탱크끌고간건데."
박기범 부장이 가볍게 말을 던지자 안기부직원이 말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5.18은 과거 군사정권의 잘못이고 엄연한 민주화운동이지만 이 학생들은 정말로 나라를 뒤엎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공산혁명을 일으켜서 이 나라에 노농정권을 수립하고 선생님 같은 회사원들도 자본가에 빌붙은 민중의 적이라 하면서 아마 광화문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 주리를 틀겁니다."
이 말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요? 그럼 안되지. 게다가 나 같이 아메리칸 팝을 좋아하는 사람보고 미제 앞잡이라 하면 안되잖아요. 난 마이클 잭슨의 팬인데. 제 마누라는 마돈나 팬이고."
"그러시군요."
"그럼요. 마돈나 남편이 누군지 알죠? 숀 펜. 물론 지금은 이혼했지만. 아. 그런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혼은 절 슬프게 해요. 특히나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의 이혼은, 아마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이혼 이후,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이혼이 될겁니다."
안기부 직원은 말했다.
"아마 선생님 같은 분은 노농정권이 수립되면 가장 먼저 총살당할겁니다. 당연하겠죠. 마이클 잭슨 노래를 좋아한다? 광화문광장에서 죽창에 찔리실겁니다."
"세상에나. 그럼 내 가족은 물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도 무사하지 못하겠네요. 형님은 학교 선생님이셔서."
"그렇죠. 학교교사라면 역시 무사하지는 못합니다. "
박기범 부장은 안기부 직원의 말에 겁을 집어먹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선생님께서 귀한 정보를 주셔서 현상금에 대해서는 고려해보죠. 다만 다른 목격자들도 있어서 선생님 혼자 다 가지지 못할 수도 있죠."
"그럼 안되는데. 그 돈 받아서 일본이나 대만여행가려고 했죠. 부모님 모시고. 제가 둘짼데 효도 좀 해드리려고요."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죠?"
"아. 선생님이에요. 저희 큰 형도 중학교 교사시고, 형수도 학교 선생이고."
조사는 금방 끝났다. 안기부 조사실로 간지 세시간 만에 그는 안기부 차를 타고 회사로 복귀했다.
"아. 일이 밀려있을 텐데. 큰일이다."
회사로 돌아온 그는 바로 책상에 앉아서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안기부 가셨다는데... 괜찮으시죠?"
과장급 직원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별거 아니야. 내가 길을 가는데 수배중인 범죄자를 본거라서 목격자 진술만 한거야. 살다보니 내가 범죄자를 봤다는 이유로 안기부 가서 진술도 하고. 세상 오래살고 볼 일이지?"
============================ 작품 후기 ============================
안기부는 국가안전기획부의 준말로 지금 국정원의 옛날 이름입니다. 원래 국정원은 중앙정보부였습니다. 나중에 두환이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꿨고, 김대중 정권때 안기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죠.
근데 이름을 바꾸기만 한다고 뭐가 달라질거라고 생각하는게 우리 한국민족의 단점이죠. 미국은 아무리 추문이 많아도 그냥 cia씁니다. 원래 중앙정보부라는 말 뜻이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입니다. 안기부나 중앙정보부나 국가정보원이나 하는 일은 다 같아요. 국내외 첩보, 적대국가 정보수집, 정보기관이죠. 회사로 말하자면 기획실 같은데. 국가운영하려면 안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1987년. 선거로 대통령이 뽑히고 민주적인 정권이 이어지면서도 일부 정신 못차린 대학생들은 데모질만 했죠. 1996년 8월에는 연세대 데모로 길가던 시민을 대학생들이 두들겨 패서 죽이기도 했죠. 이땐 그랬습니다. 데모하는 학생을 보고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아저씨한테 쇠파이프 휘두르고, 뭐 나라가 개판오분전이었죠 그래서 87년 이후 학생운동은 전두환시기와 달리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죠. 87년 6.29를 이끈건 대학생들의 희생과 이를 지지한 넥타이부대의 힘이었지만 90년대 들어서는 대학생들만의 투쟁이 되었죠. 대대수 시민들은 시위보다는 번영과 안정을 택한 것이죠. 그게 시대정신이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