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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시대-57화 (57/159)

57화

이듬해인 1996년. 부장직함도 달았고 일도 수월하게 풀렸다. 여전히 아침 8시까지 출근하고 저녁 8시에 퇴근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부장님. 여기 이번 달 월 결산철입니다."

과장이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넸다. 각 은행계좌별로 예금된 금액을 7월 31일자로 모두 정리한 프린트내역, 앞으로 받을 어음내역, 7월달 물품대 내역, 미국 주식보유현황 등 이 회사의 재무상황에 대한 모든 내역들이 정리가 되어있었다.

"D/A네고한거 계속 추가하는건가?"

이 말에 서류를 가져다 준 과장이 대답했다.

"예. 계속 은행에서 다 받아서 해 나가니까요."

"알겠어."

박기범 부장은 도장을 찍은 과장을 믿고 서류철을 덮고 맨 위에 놓인 결재방에 도장을 찍었다. 잠깐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그는 신문을 펼쳤다. 시장동향을 파악할겸, 시사이슈도 알아볼겸,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였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최근의 학내소요사태에 대해 집중보도되고 있었다.

"쯧쯧쯧."

가볍게 혀를 찬 박기범 부장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습관처럼 안경을 매만졌다.

"학생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헌날 데모질이군."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다른 페이지로 신문을 넘겼다. 최근 한총련을 비롯한 수많은 대학내 서클들이 아직도 망해버린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고, 경찰과 시민들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경찰이 알아서 잘하겠지. 안기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계속 신문을 넘겼다. 회사생활 16년째. 41살의 박 부장은 이제 평범한 소시민으로, 한국사회의 중산층으로, 그리고 침묵하는 다수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통일, 민주주의, 민족과 같은 큰 주제가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가장 큰 생각은 회사업무가 50%, 가족이 25%(아내, 딸, 형제, 부모 모두 포함), 팝이 10%, 할리우드 동향이 10%, 그 외 잡생각이 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은행가야하는구나."

시계를 보고 중얼거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는 그냥 과장급이나 사원급이 필요한 은행업무 처리를 위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부장급인 그가 가야하는 이유는 보다 더 중요한 일때문이었다.

"아. 날이 참 좋다."

8월 달 휴가가 일주일이 주어지는데 이제 그 휴가예정일을 앞두고 있었다. 박 부장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위의 빌딩숲을 둘러보았다.

그가 입사하던 80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1990년대 중반. 한국경제의 놀라운 성장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이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한국은 유럽의 전통적인 강호들도 공포에 떨게 할 정도의 번영과 실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쏟아내는 막대한 수출품-자동차, 반도체, 건설-등은 선진국 시장을 휩쓸었고 이를 기반으로 막대한 달러를 축적했고, 이를 기반으로 국민들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1년 전인 1995년 8월. 큰 형도 형수님과 같이 대만엘 다녀왔다. 형네 가족이야 학교 선생님이고 해서 방학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그는 휴가도 일주일 내내 다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작년에는 1주일 휴가를 받았지만 이틀씩 나누어서 쉬었기 때문에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댁에서 머무른게 다였다.

"올해는 반드시 휴가를 잘 받아내야지."

다짐하듯 중얼거리면서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래은행으로 향한 그는 해야 할 업무에 대해서 의논을 했다. 무등그룹 자회사인 무등운송의 주식관련 문제였다.

물론 모두 다 비상장회사이지만 현재 무등운송 주식의 소유권을 오남현 회장 자녀들에게 이전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주식관련 문제는 일단 저희은행에서 다 책임을 지죠. 관련 서류는 드릴테고요."

"그런데 비상장주식. 이게 돈이 되나요? 뭐 비상장이라 거래도 잘 안되고. 나도 자금팀 부장이지만 현재 무등운송은 비상장주식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이 말에 은행 담당자가 말했다.

"맞기는 맞는 말이죠. 아니 근데."

그는 컵에 담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부장님께서 은행창구 다니신다는게...보통은 과장급들 이하가 자주 오잖아요."

"지점장님도 우리 사무실 방문했는데요 뭘. 그리고 알잖아요. 우리 회사는 아직 에어컨이 없어서. 부장 달았다고 부장전용 선풍기 한 대 주더이다."

"아니. 무등그룹 정도 되는 회사에서 에어컨이 없다는게 말이 되나요?"

은행원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은행이라도 안오면 에어컨 바람은 전철에서 밖에 쐬지를 못하거든. 아. 내 차에 에어컨 없어요."

"차에도요?"

"그렇다니까. 88년 형 르망인데 에어컨이 있을 리가. 형 차에는 에어컨이 아주 좋더군요. 로얄 프린스라서."

손사래를 친 그는 컵에 담긴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쭉 들이켰다.

"주식 소유권 이전이나 잘 해줘요. 관련 서류 다 주고. 인감은 다 받아올테니까."

박 부장은 눈을 찡긋하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에어컨만 설치하면 나도 여기 안올테니. 그러면 내가 그리워질거 아니요."

"냐하하."

은행원은 콧소리를 내며 비웃었다.

"부장님이 프랜 파인이라면 모를까."

은행을 빠져나온 박기범 부장은 툴툴대면서 회사로 걸어갔다.

"그거 참. 날씨가 무지하게 덥구만."

그는 정장 바지주머니에서 소니 워크맨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꽃은 후 테이프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I see you, you see me

Watch you blowin the lines when you're making a scene

Oh girl, youve got to know

What my head overlooks

The senses will show to my heart 음악을 들으면서 박기범 부장은 자신이 대릴 홀이라도 된 듯 노래를 중얼거렸다.

When it's watching for lies

You can't escape my

Private eyes

They're watching you

They see your every move

Private eyes

They're watching you

Private eyes

They're watching you watching you watching you watching you

============================ 작품 후기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최근 실직으로 인해 경황이 없었습니다.

계속 업뎃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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