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의 시대-56화 (56/159)

56화

“전무님.”

“응. 자네 나랑 좀 애기를 하지.”

황 전무는 자기 방으로 박기범 차장을 들어오게 하고 손님접대용 소파에 앉혔다.

“자네. 사장님을 존경하나?”

뜬금없는 질문에 박기범 차장은 의아해하면서 서스럼없이 대답을 했다.

“물론이죠. 갑자기 왜. 혹시 사장님께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황 전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장님께서는 오늘 저녁. 가족분들을 일본으로 보내실 건가봐. 도쿄에 있는 저택으로 말이지.”

“그렇군요. 하긴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강하실테니.”

“그리고 사장님 본인도 일본으로 가신다는 군. 도쿄의 자택에서 모든 서류 결재는 팩스로 하고. 본인도 일본으로 조만간 가실거라는데. 자네가 설득을 좀 해주게.”

“그게 사실입니까? 사장님께서. 그렇다면 우리 무등그룹은요?”

황 전무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 계속 있겠지만 어렵다면 도쿄로 본사를 옮기는 수밖에. 그거 말고 뭐 있겠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캐나다에 위치한 기업이 미국으로 옮긴다면, 언어도 같고, 얼마든지 통근이 가능해서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경우는 달랐다.

‘황 전무님이야 그만두셔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없지만. 아이고. 이직준비를 해야 하나?’

어쩔 줄 몰라 허둥대고 있을 때, 황 전무가 말했다.

“자네가 설득해봐.”

짐을 떠안는 기분이었다. 쓴 약을 마신 후의 표정처럼 얼굴이 일그러진채 박기범 차장은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오남현 사장은 창밖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사장님.”

아무런 말이 없자 박기범 차장은 재차 말했다.

“사장님.”

“왜? 귀 안 먹었어.”

다소 거친, 그러나 따뜻한 마음이 녹아있는 말을 듣자 박기범 차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부장이 되어서요.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려고요.”

“쳇. 부장 따위가 대수야? 난 사장인데.”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자 박기범 차장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 사장이 나름대로 유머를 발휘했기에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으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저 사장님. 듣자하니 일본으로 본사를 옮긴다는데요.”

“응. 그럴거야. 툭하면 사고가 나는 이 나라에서는 사업을 할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지만 오 사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차가운 말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만 2천명의 우리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요?”

“뭐 어떻게든 될거야. 적어도 해고는 하지 않을테니. 이봐. 불안해서 어디 살겠어? 아침에 출근하다가 지하철공사장에서 가스폭발이 일어날까 걱정해야 하고, 쇼핑하러 갔다가 백화점이 무너질걸 걱정해야하고, 유람선 타고 바다낚시갔다가 수장되어야 하고.”

그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도 생각을 바꾸시는게.”

하지만 오 사장은 완전히 일본으로 이민을 갈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운영은 해야했기에 도쿄 사무소에서 모든 업무를 처리할 계획이었다.

‘이걸 바꾸지 못하면 난 짤리겠군.’

불안해하며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지만 사장의 마음을 돌리라는 전무의 지시 때문에 그는 설득을 해야했다. 안 그러면 전무한테 엄청 깨진다. 사장에게 깨지는 것도 싫었지만 전무에게 깨지는 건 더 싫었다.

“사장님.”

그는 말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사장은 버럭 소리쳤다.

“그놈의 사장님. 사장님. 아유 지겨워.”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보자 박기범 차장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네. 왜 그래?”

박기범 차장은 사장의 질문에 답을 했다.

“제발 떠나지는 마십시오. 사장님 같은 분이 이 나라를 버리면 저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사장님. 공수부대원들이 청을 쏘면 그냥 맞거나 피하기 바쁘고, 대형참사를 보면서 분노하기 급급하고, 공수부대를 움직여 민간인을 대학살한 놈들을 보며 분노하는게 고작입니다.”

“그래. 그래서 이 나라를 떠나려는 거야. 이 나라는 정의라는게 없어.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5.18같은 거대 사건을 무마하려고 하지 않나, 3당 합당이라는 날치기를 하지 않나, 건물이 무너져도 흥, 지하철가스폭발해도 흥, 배가 침몰해도 흥, 국민들이 죽어나도 관심조차 하나도 없는 이 나라는 희망이 없어. 아마 김영삼이는 10만명이 사고로 일시에 죽어도 신경하나 안쓸걸. 원래 그런 인간 아니야?”

화가 난 오 사장이 소리치자 박기범 차장이 답했다.

“사장님 말씀이 틀린건 아닙니다. 하지만 희망을 가지셔야 합니다. 포기하시기엔 그동안 쌓은 업적,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신군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수십만 광주시민들, 가난에서 허덕이던 국민들을 생각하시면 사장님 같은 기업가가 이 나라를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이 술술 나온다는 사실에 박 차장 자신도 적잖이 놀랐다. 뭐 숫자를 다소 과장하기는 했지만 오 사장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 말을 듣자 오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긴 아내와 자식들은 전부 일본에 가 있으니.’

“박 차장. 내일 부장달게 되나?”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무릎을 꿇은 채 대답을 하자 오 사장은 직접 다가와 박기범 차장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일어나. 쇼하지 말고. 그냥 화가 나서 던진 말을 황 전무가 심각하게 받아들였나봐. 화 풀렸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역시 황 전무. 아주 난리도 아니구만.”

정말 황 전무가 오해를 한 건지 박 차장이 온 덕에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한시름 놓았다. 바닥에서 일어나며 그는 잘됐다고 여기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어쨌든 회사를 나가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라가 정말 어떻게 되려는지.”

그는 약간의 불안감이 들었다. 그 불안감은 조급증에 중독된 한국경제와 한국사회에 대한 일말의 경종이었다. 무엇인가 말을 할 수는 없지만 희미한 불안감이 들었고 그는 곧 현실로 이어졌다.

연말연시가 찾아오자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는 많은 사건사고가 잊혀졌다. 물론 신문들은 95년 10대 사건사고를 선정하겠지만 그 때 뿐이다.

늘 그렇듯이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 박기범 부장은 자신이 부장으로 승진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회사의 분위기도 좋았다. 무등그룹은 사상최초로 매출 2조원을 돌파했고, 순이익도 13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터라 다들 두둑한 보너스를 받을 생각에 마음이 부풀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에서 [전두환씨 구속수감]이라는 단어가 지면을 장식하자 기분이 좋아진 오남현 사장은 전직원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할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드디어. 이 나라가 정의를 실현해 가는구만.”

사회분위기는 좋았지만 서서히 경기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이래 줄곳 성장하기만 하던 한국경제가 서서히 그 성장동력이 꺼지고 있던 것이다.

1995년 12월. 무등그룹 경영지원실 직원들은 오랜만에 한데 모여 연말 송년회를 했다. 사상최대 실적을 낸 만큼 신라호텔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올해 매출이 2조 5천억. 순이익이 1380억. 사상최고의 실적을 냈고, 내년에도 더 발전을 할 것 같아. 올해 처음으로 재계 10위안에 들어갔고."

황 전무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자금팀 부장으로 승진한 박기범 부장도 기분 좋게 앉아있었다. 밴드를 하나 불러왔기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원찮은 가라오케 기계보다야 밴드 하나 불러오는게 났겠지. 이번에 부장으로 승진한 박기범이. 이리 와. 먼저 밴드도 있으니 노래도 부르고. 먼저 애기도 하고."

그가 마이크를 건넸다. 나가기 싫었지만 주위 직원들이 박수를 쳤기에 어쩔 수 없이 나간 그가 마이크를 건네받고 말했다.

"올해 아주 최고의/최악의 해였어요. 우리 회사의 실적은 최고였지만. 정말 사상최고...."

곧 탄식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빌리 조엘과 크리스티 브링클리가 이혼한지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재결합을 안한대요. 안타까워라. 리차드 기어와 신디 크로포드도 이혼했고. 사는게 재미가 없어. 95년은 진짜 이혼의 해라니까."

이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박 부장은 회사 그만두고 할리우드 전문 기자해도 되겠어."

회계팀 부장이 말했다.

"거 집에 가서 그런 소리하면 마누라한테 쫓겨나 이 사람아."

회계팀 부장은 한번 더 말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솔직히 우리 마누라도 크리스티 브링클리 같은 미녀도 아닌데, 이혼까지 당하면 안되잖아요. 위자료 줄 돈도 없는데."

여기까지 말하고 좌중을 한번 둘러보았다.

"어이. 박 부장. 노래 한곡 때려."

황 전무가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 말했다.

"부장 직함 단 기념이네요."

그는 뒤돌아 밴드를 보고 말했다.

"글렌 캠벨. 라인스톤 카우보이"

============================ 작품 후기 ============================

글렌 캠벨의 노래. 라인스톤 카우보이(Rhinestone Cowboy)도 1975년 빌보드 1위죠. 저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주세요. 이번에 연재중인 코카시안 엠파이어의 주인공 자넷은 과거 1980년도에 무등그룹의 미국홍보모델이었고 그래서 1980년 박기범이 입사했을 때 받은 달력에 나온 금발모델이 바로 자넷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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