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퇴근시간. 8명의 자금팀 직원들은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둔 식당으로 향했다.
30분 정도 지나서 식당로비에 들어오자 그날 첫손님이 박기범 차장 일행인 듯 주인은 손님들을 위해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채널에 맞추었다.
직장인들이니 늘 뉴스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다.
“차장님. 이제 부장님으로 불러야죠?”
류 대리의 말에 박기범 차장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7월 1일자로. 아직은 차장이야.”
“차장님. 다이하드 보셨어요? 엄청 재미있다라고요.”
다른 직원이 말했다.
“어. 그래? 언제 보러 가야겠다. 브루스 윌리스 나온거 맞지?”
텔레비전 화면과 소리가 즐거운 회식분위기에 묻혀버렸을 무렵,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박기범 차장 일행의 회식분위기와 회식을 위해 온 다른 손님들의 분위기를 모두 깨버렸다.
“...네. 지금 이곳 삼풍백화점 붕괴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입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이곳에는 천여명에 가까운 손님 및 직원들이 있다고 합니다. 천여명이 한꺼번에 매몰된 이 곳 삼풍백화점은 지난 1989년...”
순간 깜짝 놀란 류 대리가 말했다.
“차장님. 저거 보세요.”
류 대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텔레비전 모니터를 보자 참혹한 광경이 나타났다. 음식을 가지고 오던 식당 아주머니도 놀라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건이 일어난지 이제 두 달이에요. 그 때 희생당한 시민들의 피가 채 식지도 않았는데.”
한 직원이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박기범 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일단 주문도 했으니 1차만 마시고 바로 집에들 귀가하자고. 아. 모두들 혹시 모르니 집에 전화들 해요. 가족들이 걱정할테니.”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박기범 차장은 큰소리로 카운터를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시외전화 써도 되죠?”
대답은 듣지도 않고 고향이 지방인 직원에게 전화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도 고향이 지방이라 무슨 일만 생기면 전화하거든.”
잔에 소주를 따르고 나서 침울한 표정으로 한잔 들이켰다.
“큰일이야.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은 어딜 가야 마음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2년 전에 자금팀에서 이병택 부장이 죽기까지 했는데.”
회식은 분위기가 완전히 주저앉았기에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텔레비전 모니터를 보며 수많은 구급차와 경찰들, 구조대원들의 분주한 움직임만 보고 넋을 잃고 있었다.
“다들 일어날까?”
박기범 차장의 말에 서로 눈치를 보며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계산을 다 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겠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지하철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박기범 차장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영등포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큰 위험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일은 또 모르기 때문에 일단 안전한 집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보. 다행이네. 다들 안전해서.”
박 차장이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뉴스를 보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TV를 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는 아내 곁으로 다가가 꼭 껴안았다.
“괜찮아. 구급대원들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니 다 구조될거야.”
하지만 뉴스에서는 그런 박기범 차장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참혹한 숫자가 드러났다.
건물안에 매몰된 사람들의 숫자만 천 명이 넘었으니까. 현재까지 발견된 사망자만 60명.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음날. 떨리는 마음으로 조간신문을 펼쳐든 박기범 차장은 그야말로 할 말을 잃었다.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매몰. 死傷 1천여명]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는 사상자수가 1천여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보고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워낙에 큰 사건이기에 다들 동향을 살피며,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해외로 뻗어나가는 수출기업들에게는 악재가 될 수도 있었다.
“건물이 무너진다고 잘되는 수출계약이 안되지는 않겠지. 다만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실공화국이라는 거야.”
다음날이면 부장으로 승진하는 박기범 차장은 부장승진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수출계약건 때문에 걱정을 하는 류 대리에게 둘러댄 박 차장은 황 전무가 자기 책상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1995년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사고. 508명이 사망한 대참사로 대한민국 역사상 단일 규모로는 최대의 인명피해를 낸 참사죠.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입니다.
공무원이 뇌물 받고 부실로 공사한 건물 허가내주고, 건설업자도 돈 해먹으려고 안전규칙을 무시한 채 건설했고, 백화점 측도 건물 붕괴가능성을 알고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영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일어난 사고죠.
고도성장에 매몰되다 보니 안전규칙은 무시했고, 당시 관청도 뒷돈을 받고 안전규칙에 크게 미흡한 건물도 허가를 남발했죠. 나중에 미국의 조사기관이 조사한 결과 당시 삼풍백화점은 건축공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무리하게 건설했고, 지나치게 부실로 건설을 했다는 점을 밝혀내게 됩니다.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건물을 건설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