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지만 그 기쁜 뉴스는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바로 다음날인 4월 28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 오남현 사장이 그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자네 아이디어 덕에 또 우리 무등그룹이 번영의 길목을 닦았네. 그 공로가 있으니. 7월 1일자로 부장승진이야. 자금팀은 93년 이후 부장직책이 없으니 이젠 자네가 다시 그 명맥을 이어야겠지.”
나이 40에 부장으로 승진하는건 아주 빠른 승진이었다. 사장실을 나와 실실 웃으면서 자금팀으로 돌아왔을 무렵, 자금팀을 비롯한 경지실 전체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들 저러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중얼거렸다.
“다들 어디로 간거야?”
순간 인기척이 전무실에서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노크를 하고 전무실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경영지원실 전 직원이 전무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주시하고 있었다.
“뭣들하는거야? 전무님 바쁘신데.”
하지만 21인치 컬러 TV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서 박기범 차장은 그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뉴스에서는 그 영상이 사실인 듯 아나운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지금 보시다시피 이곳 사고현장에는 40여대가 넘는 출근길 차량들이 복공판에 끼어 휴지조각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아. 지금 바로 들어온 소식입니다. 이번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로 인한 사망자는 현재까지 100명이 넘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부의 안전대책이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게다가 사망자의 절반가량이 등굣길 중학생들인 것으로 재확인된데 이어 부상자의 상태가 워낙 나빠 사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황 전무는 잿빛이 된 채 텔레비전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방송 헬기에서 촬영한 모습은 끔찍한 지옥 그 자체였다.
박기범 차장 역시 우두커니 서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희생자와 부상자로 넘쳐나는 병원의 모습과 오열하는 유가족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후진국형 인재가.”
박기범 차장이 침묵속에 잠긴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띄우려는 듯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 말에 다른 직원들이 맞장구를 치면서 수근댔다.
“맞아요. 작년엔 아현동 가스 폭발로 서울시내가 불바다가 된게 엊그제인데.”
“그럼. 성수대교도 무너지고. 32명이 아침에 떼죽음당했는데. 도 이렇다니. 정부는 시설물안전대책을 제대로 하는 건가?”
“눈만 뜨면 대형사고라니.”
황 전무는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리모컨을 던져버렸다.
“혹시라도 경공업본부나 이쪽에서 대구 방면으로 출장나간 직원이 있는지 파악해. 성수대교나 아현동 모두 우리 직원의 피해는 없었다만 혹시 몰라. 잘 체크하게. 대구 쪽 섬유회사와의 업무제휴로 여러명이 출장갔다고 하니까.”
전무의 지시에 몇몇 직원이 사실확인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엉망진창인 정부의 안전대책 덕에 우리 회사도 손을 놓고 있으니 한심하구만. 일단 자금마감 때문에 바쁠테지만 한동안은 경지실 전체 정시퇴근하게. 너무 위험해. 일도 중요하지만 안전이 급선무야. 일만 하다가, 길을 가다가 훅하고 가버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파트가 무너지지는 않을거 아냐.”
그날 오후, 정시퇴근을 한 박기범 차장은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이 다 잘들 있는지 확인하고 고향으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재확인했다. 물론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형네 가족, 부모님 모두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TV를 켜고 아내와 함께 대구지하철참사의 보도에 집중했다. 9시 정각. 9시 뉴스 채널을 맞추자 앵커의 목소리가 나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되야만 합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 등교길 대구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자에서 일어난 엄청난 가스 폭발사고로 모두 100여 명이 숨지고 또다른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사상자 절반은 주로 중학교 꽃다운 학생들이었습니다. 할 말을 잃습니다. 오늘 국민과 함께 이 있을 수 없는 사고 희생자의 명복을 빌 뿐입니다.”
“정말 끔찍하군.”
박기범 차장은 중얼거렸다. 아내에게 7월 1일부로 부장승진을 한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
사상 유례없는 대형사고로 백여명이 죽어가는 마당에 누군가는 승진소식을 듣는 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얼마나 더 큰 사건이 터질까.”
아내의 말에 박기범 차장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선진국 문턱에서 OECD니 하는 나라에서.”
그가 부장승진 소식을 모두에게 알린 건 시간이 조금 지난 5월달 하순이었다. 아버지의 생신이 5월 말이었기에 그 즈음해서 고향인 전남 목포로 내려간 박기범 차장 부부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중국음식점에서 생신잔치를 열었다.
1925년 생인 아버지도 이제 칠순이었기에 더욱 뜻깊었다. 가족들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박기범 차장이 일어나서 한마디 했다.
“아버지. 칠순 생신 축하드려요. 그리고 형. 형수님. 저희가 서울서 있는 동안 부모님 잘 모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잘 계신 것 전부 형님 내외 덕분이에요. 형 고생하는데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고, 명절때만 내려와서 죄송해요.”
“뭘 그런걸 가지고.”
큰 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막내 동생을 쳐다보면서 박기범 차장이 말했다.
“막내도 여자가 생겼다니 내년엔 장가가겠죠. 노총각이 아직 팔리는 게 신가하네요.”
이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저도 좋은 소식 전하려고요. 저 올해 7월 1일자로 부장으로 승진합니다. 아버지 생신때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박씨 가문의 경사였다. 큰 아들은 장학사로 승진했고, 자연히 교감 및 교장 승진이 빨라지는데다가, 둘째는 곧 부장에, 셋째는 대기업 엔지니어로 곧 결혼을 목전에 두었으니 이보다 더한 칠순 선물은 없었다.
무등그룹 역시 95년 1/4분기 수출액이 크게 늘어 목표치를 초과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5년 1월부터 3월까지 수출액은 2억 5천만 달러로 목표로 삼은 1억 5천만 달러를 크게 초과하는 것이었다.
“정말 대박인걸? 아직도 섬유에 편중되어있다고는 하지만 킨키 상사의 네트워크를 타고 남미, 동유럽, 중동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어.”
“그럼 게다가 사우디에서만 8백만 달러어치 팔았잖아. 중동진출은 생각도 못하던 우리한테 킨키 상사 바레인 지점을 통해 그냥 팔아제끼다니.”
기획실 직원 두 명이 신나게 떠들다가 박기범 차장을 보고는 목례를 했다.
“무슨 애기들을 즐겁게 하나?”
“수출실적이 너무 좋아요. 무서울 정도입니다.”
“무등그룹의 섬유는 세계가 알아주니까. 그렇지 뭐.”
수출호조의 원인이 킨키 상사를 친구로 만든 자신의 노력보다는 제품의 우월성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 말했다.
“게다가 세계경제도 좋아. 미국, 일본, 유럽 모두 경제상황이 좋지 않나? 덕분에 우리도 수출이 폭증하는 거지 뭐.”
다시 자리로 들어간 그는 날이 더웠는지 선풍기를 틀었다.
“올해는 여름이 빨리 오나봐.”
중얼거리듯 말하고 자기 책상에 놓인 탁상용 선풍기를 더 강하게 틀었다. 그는 아내가 언제 같이 백화점으로 쇼핑하러 가자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귀찮은데 가야 하나?”
아내가 가자고 한 백화점은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었다. 고급백화점으로 알고는 있지만 아버지 생신때 큰 형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건물 옥상층에 수영장까지 있는 건물은 위험하다고 했던 것이다.
“난 현대백화점이 더 좋은데.”
딱히 이유라 할건 없지만 그냥 그랬다.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고 거대한 대기업을 일구어낸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과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 더 이끌렸던 것일 수도 있다.
6월 마감을 앞둔 시점에서, 무등그룹은 반기 실적이 사상최고치가 될 거라는 보고가 경지실 전체에 전해졌다.
그리고 이 추세대로라면 95년엔 사상최초로 매출 2조원을 달성할 수 있을 듯 했다. 1992년 매출 1조원을 달성한 이래 고작 3년 만에 매출 2조원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매출 2조 시대라니.”
이미 반기 매출이 1조원으로 92년 한해 전체 매출과 맞먹었다. 박기범 차장이 보기에 2조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좋아. 대단하구만. 박 차장. 자네도 바로 며칠 뒤면 부장 달게 되나? 그런가.”
“그렇습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황 전무는 말했다.
“6월 마감은 천천히 하게. 너무 목맬 필요 없어. 솔직히 6월 마감을 7월 중순에 끝내도 되지. 우리니까 바로바로 하지 다른 회사들은 여유있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경영지원실을 책임지는 황영식 전무는 자기 밑에서 큰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실행시켜온 박기범 차장이 부장으로 승진한다는 사실이 아주 기뻤다.
“오늘은 승진기념해서 자네 팀원들 밥이나 사주게. 솔직히 마감 때문에 고생 많이들 했잖아. 정시퇴근이 밤 8시인 이런 회사에서 제대로 식사라도 해줘야 옳지.”
황 전무는 자기 책상서랍에서 임원들에게 지급된 업무추진비 일부를 건네주었다.
“30만원이야. 크지는 않지만 자금팀 직원 8명이서 술들 하기엔 적당할 걸세. 어쨌든 승진 축하해. 자네가 무등그룹 매출 2조의 일등공신이야.”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킨키 상사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지 않으면 수출에 애를 먹는다는 말이 되니 우리 무등그룹은 더더욱 네트워크 강화에 힘을 쏟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 전무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 임원 다 됐군. 이봐. 이제 벌써부터 이사 행세하는 거야? 기획실 임 상무도 그런 생각 안하더만. 나도 그렇고. 생각하는 건 전무 이상일세. 물론 몇몇 사소한 것에서만큼은.”
황 전무가 준 돈을 가지고 자금팀으로 돌아온 그는 직원에게 말했다.
“자. 주목하세요. 전무님이 회식비로 30만원을 주셨어요. 그래서 오늘 회식합시다. 기분 좋게 술 한 잔하고. 그리고 전무님도 6월 마감은 조금 늦어도 좋다고 하시니, 너무 일에 쪼들리지 말고 즐기면서 합시다.”
“차장님. 웬일이에요?”
여직원 하나가 대답했다.
“헤헷. 내 자랑 같지만 나 7월 1일부로 부장승진하거든. 나 이제 박 부장이야. 그래서 한턱 내는거지. 전무님 판공비로. 히히.”
“우와. 축하드려요.”
“고마워. 다 여러분들 덕이야. 나야 도장만 찍었는데 승진했잖아.”
“그럼 오랜만에 회식하는군요.”
류 대리가 말했다.
“그래. 오늘은 5시 50분에 나갑시다. 가서 택시타고 빨리 가자. 전무님의 특별 허가를 받았으니.”
============================ 작품 후기 ============================
이제 부장으로 승진합니다. 차장에서 부장으로. 이제는 임원을 내다보는 부장이라는 고지에 오르네요.
소설 속 가스폭발사고는 95년에 일어난 대구지하철가스폭발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고였고 그것도 아침 등교길시간에 일어나서 중학생들이 사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죠.
이 사건으로 김영삼 정부는 당시 내무부장관(안전행정부)을 경질하게 되죠. 지하철공사하다가 공사용 드릴이 도시가스관을 건드려서 대폭발이 납니다. 이 때만 해도 가스공사, 도시철도공사의 정보망이 혼합되지 않아서 어디에 뭐가 매설되었는지, 가스관이 어디를 지나가는지 그런걸 몰랐고 결국 대참사로 이어지지요.
끔찍한 사고지만 급격한 고도성장을 겪는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안타까운 인재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안전을 중시하고 철저한 관리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대참사는 없습니다.
최근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참사를 보면서(사망자만 천명이 넘는다네요) 여전히 후진국형 인재로 인한 사망자가 나온다는 것이 안타깝네요.
물론 선진국이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후진국형 인재가 없는 건 아니죠. 미국에서도 멀쩡한 간판이 무너지거나 하는 사고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다만 선진국은 이런 일이 적고 피해규모도 적다는 거죠.